하지만 서서가 그렇게 얌전할 리 없는 일이었다. 처음 갔을 때보다 더 대담하게 놀러 다니곤 했다. 이젠 기거하는 곳이 궁인지 인간계인지 알 수 없었다. 제갈량은 몇 번이나 서서를 붙잡고 도술을 가르치려 했지만, 도통 말을 듣지 않았다.
‘서서, 오늘은 해야 합니다.’
‘하지만…별로 재미없는걸.’
‘그렇게 싫다고 안 하면 나중에 어쩌려고 그럽니까.’
‘그야. 제갈량이 해주지 않을까?’
‘…….’
‘도술 같은 거 재미없고, 제갈량이랑 있는 쪽이 훨~씬 재밌는데.’
‘내가 없으면 어쩌려고…….’
‘흐응.’
서서가 웃기 시작하면 천하의 제갈량도 당해낼 수 없었다. 이렇게 말에 독기가 빠진 것은 처음이었다. 혼자 있던 시간이 길어서인지, 훌쩍 들어온 서서의 존재가 생각보다 더 컸다. 어차피 이렇게 평생 주군을 기다리다 사라질 운명이었다. 애써 나쁜 생각은 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성이 침착하게 현실을 물고 들어온다. 눈을 돌린다고 해서 끝날 일은 아니었다. 차라리 인정하는 편이 나을까. 아니면 죽기 직전까지 버둥거리면서 응당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나을까. 제갈량의 속은 복잡하게 꼬인 개미굴과도 같은데, 서서는 그런 제갈량의 마음을 다 읽지는 못한다.
물론 그러니까. 마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달라는 표현은 아니었다. 이런 고통은 혼자 지고 가면 충분했다. 힘든 쪽이 있으면 그저 즐거운 방향도 있어야 한다. 제갈량은 전자였고 서서는 후자였다. 혹시나 다음 대 군주가 나타난다면. 적어도 서서는 궁에 대해 좋은 기억만 가지고 살아갈 수 있으리란 생각을 했다.
“제갈량은 항상 최악의 상황까지 생각해?”
“그래야 이곳이 계속 이어질 수 있으니까요.”
“늘 이렇게 있으면 심심하지 않아?”
“익숙합니다.”
“…….”
“요새 인간을 만나러 자꾸 인간계에 가는 거 알고 있어요.”
“어…알았어?”
“모를 리 가요.”
가볍게 한숨을 쉰다. 물론 크게 혼낼 생각은 아니었다. 신선이 움직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본능적인 일이다. 분명 인간계에 뭔가 있으니 서서가 그리도 내려가고 싶어 하는 것이겠지. 그렇지만 제갈량은 아직 인간계에 정이 붙지 않았다. 한발만 비틀리면 그대로 원망이 인간계에 옮아붙을 것이 뻔했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되는 일이기에 꾹꾹 참고 있었다.
“하지만…너무 가까이하진 마세요.”
“알았어.”
“모든 인간이 그렇다는 소리는 아니지만…….”
“…….”
“서서 생각보다 비틀린 쪽이 많으니까요.”
“…….”
“그냥 그렇단 소립니다.”
“알았어. 조심할게!”
“그리고 괜히 다른 곳에 기웃거리다 다른 신선 눈에 띄지 말고요. 그럼 좀 일이 복잡해집니다. 애초에 신선이 마음대로 인간계를 오가는 건…….”
“알았다니까. 우리만의 비밀?”
“…….”
“헤헤.”
허. 제갈량은 허탈하게 웃어버린다. 순수한 것도 나쁘진 않겠지. 게다가 말린다고 안 갈 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갈 거면 안전하게라도 돌아오라고 하는 편이 나았다. 서서를 만나고 나서 자꾸 한 발짝 물러서게 된다. 주군한테도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누가 보면 웃을 일이었다.
“그럼 다녀올게.”
“도대체 인간계에 무슨 보물이 있어서…….”
“신기한 게 엄~청 엄청 많다니까.”
“…….”
“제갈량도 보면 좋아할 거야.”
“나중에 생각해 보죠.”
“매일 그러더라.”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한다. 제갈량은 어서 가보라며 서서를 보낸다. 서서가 사라지면 오늘은 편전 정리도 해야 했고, 며칠 동안 하지 못한 명상도 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힘이 흔들리면 궁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서서의 미미한 도술이 도움이 되긴 하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은 늘 제갈량이 감당해야 했다.
‘또 저렇게 가는군.’
궁을 나서는 이가 모두 무사히 돌아오길 빌었다. 주군도 저렇게 가볍게 웃으면서 궁을 나섰고 다신 돌아오지 않았다. 제갈량은 그 기억 때문에 서서를 과보호하려고 하는지도 몰랐다. 떠난 이가 돌아오지 않으면 기다리는 사람은 하염없이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했다. 몇 번이나 그만둘까 싶은 생각이 들어도 결국 다시 제자리로 올 수밖에 없었다.
서서가 돌아오면 그렇게까지 인간계에 가는 이유와 거기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좀 더 자세하게 물어봐야겠다. 제갈량은 이렇게 생각한다. 신선의 감은 쉽게 흘려보낼 것이 못 되었다.
**
“아, 안녕하세요!”
“우리 또 만났다! 그렇지?”
“정말 그러네요.”
“못 찾을까 봐 걱정했는데.”
“…절요?”
“응. 내 친구니까.”
서서는 큰 장이 열리지 않으면 항상 유진을 찾았다. 신선의 능력을 조금만 이용하면 사람 하나 찾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물론 그렇게 자꾸 나타나는 서서를 보는 유진의 눈이 점점 반짝이는 것은 덤이었다. 어린 소년은 서서를 선녀 정도로 취급하는 모양이었다. 사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그리 틀린 소리도 아니었다. 어디 사는지도 알려주지 않고, 훌쩍 사라졌다가 훌쩍 나타난다. 그리고 언제나 곱고 좋은 옷을 입고 다니는데 세상 물정을 하나도 모르기까지 했다.
“왜 이렇게 잘해주는지 모르겠어요.”
“왜?”
“그냥요. 난 맨날 혼나기만 하는데…….”
“우린 친구잖아.”
“그것도 이상하다니까요. 형이 자꾸 높은 분들이랑 엮이지 말라 했거든요.”
“나 높은 사람 아니야.”
“에이.”
“정말인데…….”
서서는 금방 시무룩해진다. 애초에 높은 사람이라는 뜻도 모르겠거니와 이제 겨우 사귄 친구가 자신을 서먹하게 대하는 것 같아서 슬펐다.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 한 소년은 또 서서가 그러는 것을 지나치지 못한다. 애써 밝게 웃으면서 옷자락을 덥석 잡는다.
“저쪽으로 가요.”
“…응?”
“여긴 사람이 많으니까.”
“그래!”
유진은 이리저리 쏘다니면서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이 장터의 지리에 밝았고, 어디로 가야 사람이 좀 덜한지도 알고 있었다. 그런 유진이 내내 신기한 서서는 자꾸 질문이 늘었다. 묻고 싶은 것도 많았고, 유진이 데려가 주는 장소에 신기한 것도 많았다. 서서가 알고 있는 사람이라 치면 제갈량과 주유. 그리고 사마의와 사마휘님. 유진이 전부였다. 애초에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선인 데다 군주가 없는 궁에 들어와 살다 보니 권속조차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런 서서에게 유진은 신기한 존재였다. 나무 그늘에 앉아서 계속 종알종알 말을 건다. 장터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까지 올라오는 이는 별로 없었다. 큰 나무는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면서 베어 넘기지 않아서 이곳은 제법 울창하기까지 했다. 서서는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런 손에 잡힐 리 없었다. 괜히 민망해서 머리를 만지작거린다.
“여기에 장터 말고 또 뭐가 있어?”
“네?”
“나 사실 여기 밖에 안 와봤거든. 이곳을 벗어나면 또 뭐가 있을까.”
“…….”
“응? 유진. 너라면 알 것 같아. 빨리 말해줘. 궁금해.”
“정말 몰라요?”
“정~말 모른다니까. 제갈량은 매일 여기 오면 안 된다는 소리만 하고……. 말도 안 해주고.”
“제갈량이랑 사람은 서서를 귀찮게 하나 보네요.”
“응?”
서서는 눈을 동그랗게 뜬다. 어. 그러니까. 뻐끔뻐끔. 입이 열심히 움직이는데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당황해도 보통 당황한 것이 아니었다. 아마 저 한마디에 엄청나게 놀란 모양이다.
“아냐. 아냐. 오히려 내가 제갈량을 귀찮게 하는걸.”
“뭐…그러면 그런 거죠.”
“제갈량은 내 첫 친구 거든.”
“언젠 내가 첫 친구라면서요.”
“여기서 첫 친구.”
“정말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유진이 먼저 손을 든다. 애초에 신선과 인간의 개념이 다르니 서서의 말을 이해할 리 없었다. 하지만 서서를 약간 별종 취급하는 것 같으니 대충 머릿속으로 이해 아닌 이해를 하고 넘어가는 모양이었다. 날씨 너무 좋다. 서서는 다리를 쭉 뻗었다.
햇살 아래 나뭇잎이 일렁이는 그림자가 눈동자에 그대로 닿았다. 순간 눈앞이 하얗게 변한다. 유진은 가만히 서서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버렸다. 사람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곱게 곱게 집에서만 큰 아가씨라면 더했다. 애써 서서의 반짝이는 시선을 무시한다.
“서서는 너무 착해서…….”
“응?”
“형이 그랬거든요. 세상은 사나우니까…알아서 몸을 지켜야 한다고.”
“…….”
“너무 착하면 손해 본다고 했어요.”
“유진도 착하잖아.”
“서서는 더해요.”
“하지만 난 아직 손해를 본 적이 한 번도 없는걸?”
“그렇단 이야기죠.”
서서는 이 세상에 처음 보는 것이 많았다. 늘 유진의 옷자락을 잡으면서 이것저것 물어본다. 정말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살아온 귀한 집 여식인가 싶었다. 그런 사람이 장터를 맘대로 돌아다닌다는 것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뭐 세상엔 가끔 있을 수 없는 일이 종종 일어나곤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했다. 모든 사람은 고루 평등하게 대해주면서도 늘 존중해준다. 유진은 그런 서서가 마음에 들었다.
“오늘은 언제쯤 돌아갈 거야?”
“조금만 더 있다가요. 형이 며칠 집을 비워야 한다고 해서 오늘은 일찍 들어가 있으려고…….”
“그렇구나. 나도 곧 가야 해.”
“정말요?”
“응. 늦게 가면 제갈량한테 혼나거든. 사실 오늘 수업 있는데 그것도 빼먹고 놀러 온 거라서.”
“그렇게 할 일 안 하면 큰일 날 텐데.”
“너도 똑같은 소리를 하는구나. 하지만 난 여기가 훨씬 더 재밌고 신기하거든.”
“…….”
저런 말을 들으면 갑자기 마음이 허해진다. 유진은 서서가 물어보는 장터 너머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지만, 정작 자신도 가본 적이 없었다. 이곳에 올 땐 너무 어렸던 데다 형은 절대 이 마을을 벗어나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곤 했다. 물론 부모 없는 형제 둘이 살아남으려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유진도 그런 호기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형을 생각하면 멋대로 행동할 수 없었다.
“집에 데려다줄까?”
“아뇨. 형이 그런 거 싫어해요.”
“왜?”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말라고 했거든요.”
“…….”
“아이참. 서서가 싫어서 그러는 건 아니니까.”
“알았어. 다음에 또 같이 놀자.”
“뭐…좋아요. 나도 심심했으니까.”
“이제 가야 하지?”
“…네.”
“잘 가. 다음에 또 보자?”
“서서도 조금만 더 있다가 들어가요.”
“응.”
유진은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깡마른 몸에는 좀 커 보이는 옷이 잔뜩 구겨져서 풀물이 들었다. 가볍게 아래로 뛰어내리고 곧장 두 걸음쯤 걸었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서서는 붕붕 소리가 날정도로 팔을 흔들어 준다. 계속 만났으니 다음에도 또 만날 수 있으리라. 몇 번 만나지 않았지만 서서도 유진도 그런 생각을 당연하게 했다.
‘아직 형이 오려면 좀 멀긴 했지만…….’
돌아가야 하는 시간보다는 꽤 이른 시간에 자리를 떴다. 서서도 돌아가야 한다고 했으니 이 정도에서 헤어지는 것이 맞을지도 몰랐다. 정작 형은 언제 돌아올지 몰랐다. 큰 상단을 따라갔다 오면 고기를 먹을 수 있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하던 모습만 기억났다. 이제야 약간 배가 고픈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정도로 우울해지는 건 싫었다. 일부러 씩씩하게 걸어가는 모습 뒤로 길게 햇살이 걸렸다.
**
“제갈량. 제갈량!!”
“또 무슨 일입니까.”
“할 말이…있어. 그…헉헉.”
“뭘 이렇게 급하게 뛰어와선.”
“그…….”
“숨넘어가겠습니다. 들어오세요. 차를 준비할 테니.”
“응…으응.”
“궁이 무너지는 줄 알았네요.”
“헤헤.”
괜한 타박을 들었지만, 마냥 기분이 좋았다. 제갈량은 이미 서서가 돌아올 줄 알고 있었던 눈치였다. 냉정하게 돌아서서 걷는 것 같았지만, 서서의 발걸음에 맞춰주고 있었다. 서서가 잠시 궁을 떠나 놀러 간 사이 생각보다 궁은 많이 변해있었다. 예전 제갈량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단장이었다. 꼭 손님을 맞이하려는 것처럼 꾸며진 공간은 예전보다 조금 생기가 차올랐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이렇게…급히.”
“그게…….”
“차가 식어요.”
“응. 그것도 그렇네.”
“인간계에 다녀올 때마다 한 번씩 사건을 들고 오니 이곳에서 심심할 일이 없어서 좋군요.”
“정말?”
“물론이죠.”
약간 돌려 말하는 것 같지만, 뭐 어떤가. 제갈량은 찻잔을 들면서 서서에게도 그러길 권한다. 가만히 두면 너무 흥분해서 끝없이 재잘대는 터라 이렇게 한 번씩 끊어주는 일이 필요했다. 서서가 좋아하는 차를 내려놓고 조금 가라앉히길 기다린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지나고 촛불이 타들어 간다. 아주 조금 심지가 짧아졌을 무렵 제갈량이 먼저 물었다.
“무슨 일인가요?”
“그러니까…좀 이상한 말이긴 한데.”
“어지간한 일론 놀라지 않으니까 말해 봐요.”
“혹시…응룡이 인간계에서 태어날 수도 있어?”
“예?”
뜻밖의 질문에 제갈량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지간한 질문이 아니었다. 서서가 내려놓은 것은 너무나 무거워서 천하의 제갈량조차 함부로 입을 댈 수 없는 사안이었다. 손끝이 떨린다. 하지만 애써 침착하려 했다. 서서가 저런 말을 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을 테다. 애써 맑은 시선을 피하며 차를 마신다. 적당히 식은 찻물이 입안을 굴러다니다 꿀꺽 넘어간다.
“왜…….”
“응?”
“왜 그렇게 생각하죠?”
“왜라니.”
“그런 생각이 든 이유를 묻고 있습니다.”
“…….”
“너무 중요한 사안이라 앞뒤를 정확히 짚어주어야…….”
“…….”
“답에 가까워질 수 있기에.”
“그냥…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제갈량은 똑똑하니까 뭐든 알 수 있을 거로 생각했거든. 그래서 물어 본 건데.”
“…….”
문득 들었다. 이런 엄청난 생각을 그저 인간계를 지나가다 떠올릴 수 있다는 말인가. 솔직히 놀랐다. 아직 도술도 미숙하고 사람을 가려볼 줄 몰랐다. 물론 너무 착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신선으로선 그리 좋지 않은 성정이었다. 그런 서서가 갑자기 응룡의 군주에 관해 이야기를 꺼낸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게 확실했다. 제갈량은 천천히 감정을 다스린다. 여기서 목소리가 높아져봤자 좋을 일이 없었다.
“그런 일이 있다면.”
“…….”
“나도 느꼈겠죠.”
“역시…그런가. 하지만 자꾸 주변에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고 그러는데…….”
“착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만.”
“…….”
“확실하지 않으니 뭐라 단정하진 못하겠네요.”
“그럼 태어날 순 있다는 거네?”
“그렇겠죠.”
“아…….”
“군주라는 지위는 핏줄도 중요하지만, 능력과 신수의 허락이 훨씬 더 필요합니다.”
“…….”
“아무리 핏줄이 중하다 한들 신수가 거부하면 절대 군주로 올라설 수 없죠. 현 수장인 왕윤 님도 그렇고, 손책 님도 그렇겠지만요.”
“그렇구나.”
“주군이 인간계로 내려가셨기에. 인간계엔 그분의 힘이 남아있을 수도 있습니다.”
“…….”
서서는 뭔가 더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입을 다물었다. 하긴 자신보다 제갈량이 아는 것이 더 많고 똑똑했다. 게다가 듣고 보니 그저 착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제갈량의 표정은 조금 어두워 보였다. 저렇게 단호하게 말하고도 복잡한 속내를 애써 참아냈다.
“그러니 인간계엔 많이 놀러 가지 마세요.”
“그건 싫은데.”
“오래 머물러 봤자 좋은 곳은 아닙니다.”
“하지만 내가 만난 사람들은 다 착했어.”
“착해서 문제란 소리니까요.”
“…….”
“서서에게 뭐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은 편전 정리를 해야 하니 조금 도와줄래요?”
“나도 들어가도 괜찮아?”
“오랜만에 꽃을 꺾어다 장식해 볼까 합니다. 주군이 좋아하셨으니.”
“좋아. 나도 도와줄래.”
“네.”
애써 다른 곳으로 대화를 이끈다. 자신이 꽃을 꺾겠다며 앞서가는 서서를 내버려 둔다. 화단을 일부러 가꿔둔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해가 지고, 처소에서 혼자가 되면. 제갈량은 늘 할 일이 많았다. 오늘은 좀 더 복잡한 생각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
“…….”
밤이 깊어서도 제갈량은 혼자 깨어 있었다. 서서는 일찍 들어가라고 보냈으니 아마 지금쯤이면 꿈속에서 헤매고 있으리라. 창호지 너머로 희미한 달빛이 비친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는데, 좀처럼 마음이 정리되지 않았다. 의자에서 일어난다. 몇 번 걷다가 괜히 창문을 열어본다. 그리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마지막으로 정리해둔 붓을 하나씩 만져보다 결국 다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내가…이런 말에 휘둘리는 것이 맞는가.”
이젠 마음이 단단히 굳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런 한마디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보니 아직 멀어도 한참 먼 것 같았다. 좋을 것 하나 없는 삶에 서서라는 존재가 나타났고, 그 입에서 주군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정신을 차릴 수 없다니. 스스로 웃겨서 피식 웃고 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마음이 완전히 가라앉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방문을 열고 나와 버린다. 어둠이 궁을 집어삼킨 채 천천히 녹아내린다. 한참 바라보다 편전으로 향한다. 오늘은 이곳에서 밤을 새우면서 홀로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주군을 기다렸다. 그리고 몇 번이나 그만둘 뻔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삶에서 작은 희망을 찾으려 했다. 편전에 조심스럽게 꿇어앉는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한다. 단 한 번도 느껴지지 않았던 주군의 기운을 찾아본다. 순간 바람이 불어 촛불이 훅 꺼진다. 간신히 빛을 밝히고 있던 편전이 삽시간에 어두워진다. 하지만 제갈량은 그런 것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
느껴지지 않는다. 주군이 처음 사라졌던 날부터 늘 한결같은 공허함이었다. 아무리 정신을 집중해봐도 간 곳을 알 수 없다. 이런 기분을 견딜 수 없어서 애써 찾지 않았다. 언젠가는 돌아오리라. 그렇게 믿으면서 살았다. 그러기에 서서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만약…주군이 아니라면.”
이 목숨도 끝이 다가오는가. 제갈량은 가만히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본다. 이 손이 투명하게 변하는 그 순간 모든 것이 끝나는 날이 분명했다. 아직은 아니다만. 그렇다고 영원히 그런 날이 오지 않으리란 보장 또한 할 수 없었다.
“주군은 항상 너무 상냥하셨습니다.”
제갈량의 주군은 현명했지만, 그만큼 인간계에 관심이 많았다. 항상 굽어살피면서 조금이라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주려 했다. 물론 제갈량은 몇 번 항변하긴 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의 주군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잠자코 따르기 시작했다.
신선은 매일 말했다. 이렇게 인간을 좋아해도 그들은 하늘을 읽을 수 없으니 보답받지 못한다. 그러니. 여기까지 말하면 젊은 군주는 늘 활짝 웃었다. 그리곤 제갈량을 끌어안는다. 나의 신선이 하는 말을 흘려들을 수는 없지만 그건 아니라고 했다. 제갈량은 품에 안겨서 그냥 눈을 감았다. 이런 고집을 꺾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인간을 사랑한 것이 저주가 된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왜 하필 나의 주군이었는가. 제갈량은 화를 참지 못한다. 그렇게 인간계를 귀하게 여기던 주군은 그저 가벼운 사찰을 나갔을 뿐이다. 다른 궁에서도 종종 하던 일이지만, 그 횟수가 좀 많았다. 제갈량은 자신도 동행하게 해달라 청했다. 그러나 군주는 부드럽게 거절했다. 금방 돌아온다는 말을 남기고선 훌쩍 떠난 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궁은 시간이 멈췄고, 지금도 그랬다.
“난…정말.”
제갈량은 속에 꾹꾹 뭉쳐놓은 고통을 내뱉는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고통과 회한이 가득 담겨 있었다. 차마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지도 못했던 것이 오늘따라 쉽게 흘러나온다. 서서에게만 느껴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의 실체를 알아야 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아직 주군을 기다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기를. 제갈량은 홀로 엎드려서 빌었다.
주유가 봤으면 천하의 제갈량이 드디어 죽을 때가 된 것이라며 잔뜩 놀렸을 것이 분명했다. 제갈량은 이런 쪽으로 칼같이 굵었지만 서서에겐 약간 예외를 두었다. 차라리 조금이라도 도술에 능했으면 반대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면 명분이라도 서는 일이 된다. 신선이 괜히 인간 세계에 내려가서 도술로 세상을 혼란하게 만들면 고통받는 쪽은 선계였다. 그런 이유를 대서라도 인간계에 내려가지 못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서서가 태어난 이후 모든 일은 제갈량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일단 서서가 도술을 익힐만한 시간이 없었고, 그리 뛰어난 편도 아니라는 사실이 발목을 잡았다. 물론 크게 걱정해야 할 사항이긴 하지만 서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이걸 빌미로 자꾸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했다. 그렇게 인간계를 구경하고 싶다며 제갈량을 조르기 시작했다.
항상 조용하던 궁이 시끄러워진 것이 그쯤이었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졸라 겨우겨우 허락을 받았다. 따지자면 제갈량이 서서를 막을 수 있는 위치냐. 그것은 또 아니었다. 하지만 서서는 제갈량을 굉장히 믿고 있었기에 굳이 허락을 받고 나서고 싶어 했다. 제갈량은 한숨을 푹푹 쉬면서도 문 가까이 따라 나왔다. 큰일이 있으면 전서를 보내라는 약속을 세 번이나 하고 나서야 서서를 보내주었다.
“그럼 다녀올게. 제갈량!”
“제발 큰 사고만 치지 말고…….”
“날 그렇게 못 믿는단 말이야?”
“…….”
“걱정 마. 내가 다녀와서 신기한 이야기 엄~청 많이 해줄 거니까!”
“네. 그래요.”
“진짜 간다?”
“네. 네.”
“안녕! 나중에 봐!”
뭐가 그렇게 신나는 일인지. 서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재빠르게 뛰어간다. 인간계로 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으니 큰일이야 날까 싶었다. 구름이 잔뜩 낀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어느새 인간계로 이어진 산에 닿을 것이다. 돌아오는 것은 비슷하게 오면 된다. 하지만 왜 이렇게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알 수 없었다. 주군이 처음 멋대로 궁을 비웠을 때보다 심했다.
“내가 정말…지치긴 했나 보군.”
제갈량은 그냥 희미하게 웃고 만다. 이렇게 웃을 수라도 있게 된 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주군이 없는 곳에서 웃고 떠드는 불경한 존재라고 해야 할까. 서서가 나타난 후 궁은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분명 좋은 쪽이리라.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
“그럼 뭐부터 해볼까.”
아직 채 궁의 영지를 벗어나지도 못한 어린 신선은 마냥 들떠있었다. 제갈량의 허락이 생각보다 쉽게 떨어진 것에 대해 고민하던 것도 잠시였다. 이제 곧 그렇게 가고 싶어 하던 인간계에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절로 발걸음이 빨라졌다. 물론 한 번도 발걸음 한 적이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꼭 몸은 알고 있는 것처럼 굴었다.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은 아닌 모양이니 일단 몸이 시키는 대로 걸어 가보기로 했다. 서서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한없이 기분이 좋아진다.
물론 제갈량과 같이 나왔다면 더 좋았겠지만. 제갈량이 궁을 떠날 수 없는 이유를 알고 있어서 더는 떼를 쓰지 못했다. 아직 알아야 할 것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지만, 제갈량이 가장 먼저 가르친 것은 궁과 자신의 관계였다. 아무리 서서라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더는 말을 붙일 수 없었다.
제갈량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서는 곧 인간계로 내려가는 입구에 다다랐다. 잠시 고민하면서 주변을 살핀다. 딱히 지키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표식이 새겨져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서 주변을 탐색하다 드디어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와.”
최대한 인간과 자연스럽게 섞이기 위해 국경 부근으로 움직이곤 했다. 나라와 나라가 맞닿은 지역은 물자 교환을 위해 장터가 제법 크게 자리 잡았다. 그리고 온갖 사람들이 지나다니다 보니 서로의 옷차림에 그리 관심을 두지 않았다. 출신도 쓰는 언어도. 하다못해 예절까지 다른 사람이 모인 곳이라 몸을 숨기기 쉬웠다. 훌쩍 찾아왔다 떠나는 축도 많으니 갑자기 사라져도 그다지 큰 의심을 받지 않았다.
“신기하다.”
뭐, 가장 중요한 점은 서서가 인간계에 처음 와봤다는 사실일까. 제갈량이 그렇게 당부하고 또 당부했는데 하나도 기억이 아니 앉는 모양이었다. 서서는 이미 온갖 물건에 시선이 팔려버렸다. 그 주변을 지나치는 인파는 각자 할 일을 하느라 바빴다. 시장통 한가운데 서 있던 어린 신선은 누군가 뒤에서 소리치는 것을 듣고서야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멍하니 걷기엔 사람이 지나치게 많고 거리는 복잡했다. 처음 와본 곳이니 방향을 가늠할 수도 없었다. 사람이 걷는 방향이 맞겠지. 이런 생각으로 걸었다. 그러다 가끔 멈춰 선다. 그럴 때마다 서서의 눈엔 하나같이 예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좌판에 잔뜩 깔아둔 장신구를 구경하기도 하고, 바구니에 가득 쌓아둔 과일을 살짝 만져보기도 했다.
“어서 오세요!”
“이게 뭔가요?”
“예?”
“어…….”
“귀한 집 아가씨께서 이런 걸 처음 보셨나 봐요.”
“네. 뭐.”
상인이 약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서서는 아차 싶었는지 고개만 꾸벅 숙이고 돌아섰다. 아직 사람과 말을 섞는 것이 어색했다. 왜 처음 본다는데 저런 눈으로 바라보는 걸까. 하지만 서서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 답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소란을 일으키면 다시는 구경을 나오지 못하리란 것쯤을 알 수 있었다.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와.”
선계에서 보지 못했던 네발짐승이 쫑쫑 걸어간다. 아마 상인을 따라다니면서 먹을 것을 얻어먹는 강아지인듯했다. 장터에 가면 흔히 보이는 광경이지만 서서에겐 그것마저 신기했다. 그저 강아지를 따라간다. 음식을 얻어먹는데 눈치가 빠른 짐승이 멈춰 서더니 뒤따르는 사람을 돌아보았다.
“나 보는 거야?”
“…….”
“너무 귀엽다.”
서서는 그대로 쪼그려 앉은 채 손을 내밀었다. 그러지 강아지는 금방 가까이 다가온다. 그리곤 손을 핥아보다 몇 번 치대더니 나올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채곤 천천히 떠나간다. 그런 걸 보던 서서는 약간 슬퍼했지만, 그렇다고 놀 것이 강아지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길목에 서서 잠시 고민을 한다. 시간을 한정적인데 하고 싶은 일은 너무 많았다.
“그럼~ 이제 어느 쪽으로 가볼까?”
주변을 돌아보면서 한참 오른쪽과 왼쪽을 셈한다. 속으로 몇 번이나 손가락을 움직였는지 셀 수 없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을 보내다 이내 마음을 정했는지 왼쪽으로 몸을 휙 돌렸다. 오른쪽은 장이 끝나는 초입이었고, 왼쪽은 풍물패라도 온 것처럼 사방이 소란했다. 분명 재밌는 일이 생길 것 같았다. 풍물패 구경도 처음인지라 잔뜩 설렌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서서가 방긋 웃으면서 채 한 걸음도 걷기 전이었다.
“…으앗!”
묵직한 짐이 온 몸을 들이받는 것 같았다. 품에 안기듯 묵직하게 뛰어들어온 것을 버틸 수 없어서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서서는 이런 갑작스러운 공격을 버틸만한 힘이 없었다. 한순간 균형이 와장창 무너졌다. 그 충격으로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헝클어지면서 울컥 피어난 흙먼지가 묻었다. 제대로 대비도 못 한 채 넘어져서 부딪힌 등과 엉덩이가 얼얼하게 아팠다. 끙끙 소리는 내며 일어서려 했는데, 묵직한 것이 몸을 누르고 있어서 좀처럼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아야. 이게 뭐야.”
“…….”
“아파라…….”
“…….”
자신과 부딪힌 것은 허리 정도 올까 싶은 아이였다. 아이도 놀라서 허둥지둥 일어나려 했지만, 당황했는데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서서는 아이를 살짝 떼어내면서 주변 상황을 살폈다. 분명 제갈량이 큰 소란을 만들지 말라고 했었다. 그런데 이미 몇 번이나 관심을 끌고 말았다. 손바닥에 잔뜩 상한 짙은 색 머리카락이 달라붙었다. 땀에 잔뜩 젖은 채 흙먼지에 구른 아이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넌…누구니?”
찬찬히 어깨를 짚으면서 먼지를 털어준다. 멋대로 자란 머리카락이 이마를 가득 가렸다. 그 그늘에 숨은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서서는 인간계의 생활상을 잘 모른다. 하지만 이런 표정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일단 아이를 진정시키려고 보듬어 안았다. 하얀 옷에 먼지가 묻은 것을 본 아이가 당황해서 더 버둥거렸지만, 그럴 때마다 서서는 좀 더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괜찮아?”
“…….”
“다치진 않았어?”
“네…그러니까.”
“다행이다. 나도 안 다쳤거든. 큰일 날 뻔 했잖아.”
“…….”
“정말 괜찮은 거야? 왜 그렇게 급하게 뛰고 그래.”
“그게…좀 바빠서요.”
“음.”
“죄송합니다. 그…옷…변상을 해야 할 텐데.”
“응? 옷?”
사실 아이는 자신이 다치는 것은 그리 상관없어 보였다. 정신이 들자마자 눈에 보인 것은 굉장히 비싸 보이는 옷이 형편없이 구겨진 채 흙바닥에 뒹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와장창 넘어진 몸은 알 바 아녔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서서와 옷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냐. 이거 괜찮은데.”
“하지만…저 때문에…….”
“아냐. 아냐. 정~말 괜찮다니까? 다치진 않았어?”
“…….”
“난 내 옷보다 다친 게 더 중요해.”
“…네.”
그럼 다행이다. 서서가 생글거리며 웃는다. 아이를 일으키면서 자신도 일어났다. 그리곤 옷을 툭툭 털어주면서 다친 곳이 없는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러고 나서야 자신의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여전히 잔뜩 주눅 들어있는 아이는 눈만 데굴데굴 굴린다.
“정말 괜찮은 거야? 어디 살아? 데려다줄까?”
“아뇨. 아니에요. 괜찮아요!”
“나 때문에 괜히 넘어진 거면…미안한데.”
“아니에요! 정말 괜찮으니까…….”
“그럼 다음에 혹시라도 또 만났을 때 아픈 거 이야기해야 해?”
“…네.”
작은 아이는 고개를 숙여 꾸벅 소리가 날 정도로 인사를 했다. 서서를 그저 생글생글 웃으면서 아이 무릎 걱정을 한다. 하지만 그런 관심이 더 독이 된 모양인지 아이는 급하게 뒷걸음질을 친다. 그 모습을 보자 따라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냥 살살 손만 흔들었다. 다음에 보자는 덧없는 약속도 같이 흘러나왔다. 몇 번이나 돌아보며 서서를 향해 꾸벅꾸벅 인사를 하던 동그란 뒤통수가 점점 멀어진다. 아이가 제대로 보이지 않을 때 까지 서서는 내내 그쪽을 바라보았다.
“…….”
아쉬운 마음에 자꾸 돌아보게 된다. 괜히 같은 방향으로 가면 또 놀랄까 봐 일부러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그렇게 조금 걷다 보니 금방 새로운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옷이 구겨지거나 흙먼지가 묻는 것은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신선에게 의복이란 그저 편하게 관리할 수 있는 주술 중 하나였다. 조금만 더 놀다가 해가 지기 전에 돌아가야지. 그렇게 손가락을 접어가면서 계획을 짜던 서서는 금방 사람 사이로 섞여들었다.
***
“유진아. 여기서 뭐 하고 있어.”
“…형!”
“여기 오면 안 된다고 했잖아.”
“…….”
“꼴은 또 왜 이래.”
“…….”
“누구랑 싸웠어? 어? 형한테 빨리 이야기해봐.”
“그게…아니라.”
늘 혼나던 모습 그대로 기둥을 붙잡고 선 아이는 당장에라도 땅 밑으로 쑥 꺼질 것처럼 고개를 집어넣었다. 우마차에 짐을 싣던 사람이 그런 아이를 보고 가까이 다가왔다. 꼴이 먼지 구덩이에 들어갔다 나온 강아지 같았다. 큰 눈만 껌벅거리는 얼굴이 퍽 안타까운지 아이를 데리고 안쪽으로 들어간다.
“유진이가 또 왔어?”
“제가 오지 말라고 하는데…혼자 있다 보니 심심한가 봅니다.”
“거기 좀 앉아 있어 봐. 간식거리라도 있으면 좋으려만.”
“아닙니다. 금방 갈 건데요.”
“그냥 좀 쉬라니까. 내가 다 둘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부엌을 담당하는 중년의 여인은 인심 좋게 손짓을 한다. 하긴 형이라는 사람도 지금까지 쉬지 못하고 짐을 나르고 있었다. 큰 상단에서 허드렛일과 짐꾼을 자청하면서 겨우겨우 입에 풀칠하고 있었다. 물론 힘을 쓰는 일이니 고되긴 하지만, 세상천지 둘밖에 없는 가족을 놔두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죽어라 붙잡고 있었다.
“…형.”
“자꾸 오지 말라고 했잖아. 내가 뭐라 했어. 여긴 다 위험하다고 했지?”
“…….”
“내가 다 너 생각해서 그러는 거야.”
“…….”
“됐다. 잠깐 쉬다가 돌아가. 오늘은 짐만 실어서 보내면 별다른 일 없으니까 빨리 갈게.”
“정말? 오늘은 같이 자는 거야?”
“그래. 어차피 상단이 출발하면 이쪽도 할 일이 거의 없으니까.”
“신난다.”
방금까지 우울해하던 표정은 간 곳이 없었다. 또래보다 좀 더 깡마른 동생을 바라보던 유장의 표정은 안타깝기만 했다. 조실부모하고 동생을 키우기 위해 바득바득 살아왔다. 하지만 제대로 된 기술조차 없는 어린 형제에게 세상은 혹독하기만 했다. 몇 번 크게 다치기도 했고, 동생이 아프기도 했다. 그렇게 정처 없이 흘러 다니다 간신히 이 마을에 정착했다.
큰 상단에서 다행히 유장을 좋게 봐줘서 일거리를 주었고 처음으로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지 않고 살 수 있었다. 비록 다 쓰러져가는 집이라고 하지만 먹고 살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린아이가 내내 집에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절대 오지 말라고 해도 자꾸 기웃거린다. 뭐라도 도와준다고 달라붙는데, 아이 손을 빌리느니 유장이 좀 더 빨리 움직이는 편이 나았다.
“자, 이거라도 먹고 좀 쉬었다 다시 시작해.”
“감사합니다.”
“유진이도 많이 먹고?”
“네. 감사합니다.”
“자꾸 이렇게 간식거리를 주시면 버릇이 나빠지는데…….”
“어릴 땐 다 그런 거지. 그럼 난 나가서 일 보겠네?”
“예. 감사합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주변에 사람이 없어지자 그릇을 동생 옆에 밀어줬다. 그러곤 괜히 물을 마시면서 어서 먹으라고 한다. 깡마른 녀석이 뭐 그리 잘 먹는지. 유장은 동생을 볼 때마다 안쓰러웠다. 성장이 더딘 것이 그저 못 먹여서인지. 아니면 병이라도 있는 건지. 하루 벌어 하루 먹는 형제가 의원을 찾아갈 만큼 돈이 넉넉하지 않아 그냥 냉가슴 앓는 것처럼 지켜보기만 뿐이었다.
“오늘은 왜 또 왔어. 자꾸 오지 말라 했지?”
“…….”
“그래. 뭐 너도 심심하니까 그랬겠지.”
“그게…….”
“그래. 말을 해봐.”
“여기 오다가…….”
“무슨 사고를 친 거야. 화 안 낼 테니까 말해봐.”
“어떤 사람이랑 부딪혔는데…….”
“뭐?”
“근데. 아냐. 그분이 괜찮다고 했어.”
“…….”
“옷 구겨진 거랑…변상 같은 거 안 해도 된다고…….”
절로 목소리가 기어들어 간다. 유장은 그런 동생을 보자니 혼을 낼 생각이 사라졌다. 하긴 누가 이렇게 돈돈하면서 살고 싶을까. 그냥 먹던 거나 마저 먹으라고 그릇을 마저 밀어줬다. 그나마 마음씨 넓은 사람을 만난 모양이니 그건 다행이다 싶었다. 저렇게 눈치를 보면서 말할 정도면 보통 귀한 집 자제가 아닌가 싶었다. 그런 사람 중에서 마음이 넓은 쪽도 있겠지. 괜히 입맛이 썼다.
“근데…그 부딪힌 분 되게 예뻤어.”
“그래?”
“응. 꼭 선녀 같았는데…뭐라 하지도 않고. 나 다쳤냐고 물어봐 주고.”
“…….”
“다쳤으면 다음에 만났을 때 아프면 꼭 이야기하라고도 해줬다?”
“그런 귀한 사람이 왜 길거리를 막 걸어 다녀. 주변에 호위도 없었어?”
“…없었는데.”
“이상하네.”
“형도 그렇지? 진짜 선녀 아니었을까?”
“으이그.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마저 먹고 집에 가 있어.”
“…….”
또 입이 댓 발은 튀어나온다. 하지만 유장은 동생을 옆에 달고 일을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괜히 얼쩡거리다 비싼 물품에 흠이라도 가면 일이 더 복잡해진다. 게다가 아직 자라려면 한참 남은 동생에게까지 일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 남은 간식을 종이에 싸서 들려준다. 형이 이러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괜히 투정을 부리고 싶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진짜 가?”
“그래. 얌전히 집에 있어. 해 떨어지면 어디 돌아다닐 생각하지 말고.”
“형은 언제 오는데?”
“일이 끝나면 가야지.”
“그럼…오늘은 우리 같이 자는 거다?”
“알았어. 그러니까 또 넘어지지 말고 앞에 똑바로 보면서 걸어가.”
“응!”
“들어가? 나도 나가서 일해야 해.”
“아이참. 나도 어린애 아니야. 그럼 이따가 집에서 봐!”
“그래.”
겨우 손을 흔들어서 보낸다. 집이라고 해봤자 바람이나 겨우 막을만한 방 한 칸이었다. 어린 동생을 홀로 두는 것은 마음이 아팠지만, 그렇다고 일을 쉴 수 없었다. 유장인 어깨를 풀면서 다시 짐 더미로 다가갔다. 이 정도 물건을 실은 상단이 출발하고 나면 최소 달이 두 번 차오를 때까진 돌아오지 않는다. 그동안은 조금 쉬면서 동생을 돌보고, 엇갈려 도착한 짐을 받으면 되는 일이었다.
잠깐 유진이 말했던 선녀 같은 사람이 생각난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 좋고 귀한 집 자제가 호위도 없이 길거리를 돌아다닐 것 같지 않았다. 유진은 가끔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곤 했다. 그것도 병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던 차라 그다지 이번 일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저 돈이 더 들어갈 일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팍팍한 삶을 꾸리는 것은 늘 비슷했다.
***
“제~갈량!”
“…기다리고 있었어요.”
“나 다녀왔어.”
“즐거워 보이니 됐네요. 들어오시죠.”
“응!”
겨우 해가 한 뼘쯤 남았을 때 궁으로 돌아온 서서는 방글방글 웃기 바빴다. 뭔가 사 오고 싶었는데, 인간이 쓰는 화폐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손가락만 빨았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제갈량은 그런 것에 별로 미련을 두지 않는다. 인간계 물건이 뭐가 좋다고. 주군이 계실 적 가끔 하나씩 구해서 가져다주던 물건만으로도 제갈량의 처소는 복잡했다. 이것마저 주군을 닮아 있어서 가끔 서서의 뒷모습에서 이젠 연락이 없는 이를 찾기도 했다. 이러는 것이 나쁜 일인 줄은 안다. 하지만 마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인간계 정~말 재밌던데?”
“그런 것 같네요.”
“소란스럽고, 활기차고.”
“…….”
“다들 친절한 것 같아.”
“뭐…일부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역시 주군이 없어서 그러는 거지?”
“글쎄요.”
“…….”
“그래도 서서가 재미있었다니 다행입니다. 큰일은 없었고요?”
“어…….”
잠깐 말을 끊는다. 인간과 부딪혔다는 소리를 해야 할까. 아니면 별거 아닌 거라 넘겨도 될까. 서서의 머릿속이 바쁘게 굴러간다. 날카로운 제갈량의 눈과 마주치면 저도 모르게 술술 털어놓을까 봐 애써 저 멀리 작은 도자기를 바라보았다. 제갈량은 그런 서서의 태도에 약간 미심쩍은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굳이 캐묻진 않았다. 오늘은 일찍 자라는 말을 남기고 일어선다.
“다음에 또 놀러 가도 될까?”
“이번처럼 뭔가 숨기려는 태도만 없다면 얼마든지요.”
“들켰나?”
“…예.”
하지만 목소리엔 화가 깃들지 않았다. 서서는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응룡 궁에서 만나야 할 주군은 만나지 못했지만, 제갈량이 있었다. 만약 태어났는지 서서 혼자였다면 이렇게까지 버티지 못할 것이 뻔했다. 그럴 때마다 제갈량이 대단하다고 말하곤 했다. 어린 신선의 인간계 유람기는 그렇게 있는 듯 없는 듯 작은 사건을 하나 남긴 채 조용히 끝을 맺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아차려야 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뉴트는 지나치게 어렸고, 토마스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조금씩. 연구소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삶이 익숙한 아이들은 그냥 그런 줄만 알았다. 유능하다면 유능하고, 쓸모가 없어졌다고 하면 세상이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쟨 뭔데.”
“이번에 새로 발현했대.”
“그래서 저렇게 싸고도나 봐?”
“뭘?”
“보석처럼 굴리는 거 같은데. 아니야?”
“모르지.”
애초에 센티넬과 가이드를 붙여놓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실험체라며 데려온 아이 중 몇몇은 센티넬이니 가이드니.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분리된다. 그것도 아니면 그냥 면역인 이라는 이름표가 붙어서 방이 갈리곤 했다. 위키드의 실험은 잔혹했고, 그것을 버티지 못하고 죽는 아이들이 수두룩했다.
이곳에 들어온 아이들은 자신이 왜 힘들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고통스러워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나마 상위권 그룹은 조금 나은 편이었다. 그래도 죽으면 안 된다는 소리를 하면서 아주 약간의 편의를 봐주곤 했다. 물론 제대로 된 것은 아니었다. 지옥에서 구르다가 썩은 동아줄을 내려주는 정도였다. 몇 번 그 호읠르 받아들이면 두 배로 고통스러워진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아이들은 서서히 서로 뭉치기 바빴다. 그런 무리 속에서 자연히 구심점이 생겼다.
“뉴트. 뭐해?”
“오늘은 무슨 빌어먹을 실험을 하려나 하고 보고 있지.”
“…….”
“밖에 있는 녀석 마음에 안 들어.”
“누구?”
“걸어 다니는 작은놈.”
“못 보던 얼굴인데.”
“위키드야.”
“…….”
그 한마디에 민호의 얼굴이 사납게 변한다. 뉴트는 별거 아니란 투로 이야기했지만 이곳에서 위키드는 절대적인 명령과 같았다. 그런 무리에서 툭 튀어나온 작은 녀석은 뭐가 그렇게 바쁜지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잠시도 쉬지 않았다.
“이젠 저렇게 어린애 손도 필요한가 보지?”
“센티넬 같은데.”
“그건 또 어떻게 알아.”
“손끝이 저릿저릿할 정도로 힘이 느껴지니까.”
“난 모르겠다.”
“가이드만 알겠지. 그것도 완벽한 건 아니지만.”
“그렇게 말해도 여기서 그런 힘 알아차리는 거 뉴트 뿐인걸.”
“…….”
민호는 별생각 없이 어깨를 툭툭 치고 만다. 민호는 늘 위키드에게 많은 관심을 주지 말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뉴트는 제 능력조차 제대로 갈무리 못 하는 작은 센티넬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몇몇 센티넬을 만나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자신을 데려온 연구원들은 알 수 없는 말을 했었다. 그걸 외우고 또 곱씹었다. 몇 년이나 지나고 나서야 희미하게나마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걸 알았다고 해서 당장 이 시설에서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저 쓸모없는 지식일 뿐이었다.
“…응?”
“…….”
그 순간 유리 벽을 가운데 두고 두 시선이 맞닿았다. 꼭 샴페인을 그대로 얼려놓은 것 같은 색이었다. 까맣다고 생각했는데, 빛을 받는 순간 누구보다 맑은 색이 돌았다. 뉴트는 당황해서 시선을 돌리려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차.’
애초에 이럴 줄 알았다. 능력을 갈무리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능력이 작은 몸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넘치는 놈이었다. 뉴트는 애초에 가이드로서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랬다면 뉴트는 유리 벽 안이 아니라 바깥에서 위키드의 보호를 받고 있어야 했다.
그래도 그런 어설픈 가이드마저 없는 것보단 나았다. 뉴트가 돌아다니면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는다. 물론 대다수가 센티넬이란 소리는 아니었다. 그저 약간의 침착한 분위기를 만들 수 있으면 충분했다. 센티넬은 가이드 없이는 살 수 없다지만, 가이드는 아니었다. 가이드의 일생으로 따지자면 평범하게 살 수 있는데 센티넬이 툭 끼어든 것에 불과했다.
‘…….’
뉴트는 점점 강해지는 기운에 잔뜩 눈을 찌푸렸다. 저렇게 무서운 녀석을 멋대로 돌아다니게 놔두는 위키드는 실험체에겐 일말의 정도 베풀지 않았다. 그것에 저 녀석과 이쪽의 신분 차이라는 거겠지. 쓴 미소를 짓는다. 작은 녀석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뉴트를 바라본다.
“…으.”
결국 센티넬의 힘에 뉴트가 먼저 주저앉았다. 애초에 저렇게 강한 녀석을 가이딩 해줄 정도로 능력이 특출나지 않았다. 힘의 크기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게다가 제대로 된 가이딩 방법도 아니었다. 이런 가이드를 몰아붙이는 일일 뿐이었다. 뉴트가 스르르 주저앉자 작은아이가 놀란다. 그러니 가까이 다가오려 했다. 하지만 그 시도는 어른에게 저지되었다.
“피곤해…….”
누군가 뇌를 휘저은 기분이었다. 사지를 잘근잘근 물린 것 같았고, 힘이 하나도 늘어가지 않아 그대로 깊은 늪으로 빠지는 착각이 들었다. 잠이 쏟아지기 전에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흐릿해진 눈으로 바깥을 쳐다본다. 뭐라 항변하던 아이가 덜렁 들려나가자 제대로 정제되지 않은 기운이 드디어 뉴트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하. 이제야 심장이 제대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뉴트는 그대로 바닥에 누운 채 하염없이 천장만 바라보았다. 이러나 누군가 주워가겠지. 주워가지 않아도 괜찮았다. 당장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어서 긴 생각을 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
작은 녀석이 휩쓸고 간 상처는 생각보다 오래갔다. 뉴트는 가끔 멍하게 정신을 놓고 먼 곳을 쳐다보기도 하고, 갑자기 잠이 늘었다. 몸이 버티지 못하는 것을 잘 알았지만, 굳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진 않았다. 그렇게 겨우겨우 살아 올라오니 이번엔 개인 면담이 잡혔다.
“뉴트?”
“…….”
“이런 일은 처음이지만, 확실하게 하려고 불렀다.”
“무슨 일이시죠?”
“저번에 혹시 누군가와 만난 기억이 있니?”
“…….”
“확실하게 말해주렴.”
“이곳엔 다들 낯선 사람뿐인데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지 알 수 없네요.”
제법 당돌한 말이었다. 일부러 그렇게 말하는 것을 어른은 다 알고 있지만, 오늘은 화를 내지 않았다. 뉴트 왼손엔 아직도 저릿한 감각이 남아있었다. 위키드 직원이 말하는 누군가는 뻔했다. 하지만 쉽게 이야기해줄 마음은 들지 않았다. 뉴트가 입을 닫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오히려 당황한 쪽은 위키드였다. 예전엔 그렇게 험하게 다루더니 지금은 손끝 하나 대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기만 한다.
“전 모르겠는걸요.”
“뉴트.”
“…….”
“네가 미숙한 가이드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요?”
“…….”
“그게 무슨 상관이죠?”
“우리 가능하면 널 위키드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싶었지만…….”
하. 절로 코웃음이 나왔다. 일원과 자산을 다른 말이었다. 뉴트는 위키드의 자산이었지 일원은 아니었다. 그저 쓰다 버려지면 되는 것. 뉴트와 다른 아이들의 목숨값은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 자신에게 일원 운운하면서 뜸을 들이는 것은 뉴트 주변에 큰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과 같았다. 알지만 모른 체한다. 위키드에 들어온 이후 아는 것이 많을수록 목숨 줄이 줄어든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아버린 탓이었다. 연구원은 눈앞에 앉아있는 당돌한 녀석을 구슬리려 진땀을 흘렸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그런다.”
“…….”
“누굴 만났지?”
“저야 모르죠.”
“…….”
“실험 때마다 한두 명 만나는 것도 아니고, 제 주변에서 한두 명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하나하나 어떻게 기억을 할까요.”
“그래. 알았다.”
“…….”
더 캐묻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로 쉽게 물러선다. 그리고 끝이었다. 뉴트는 자신의 인생에서 더는 큰 걸림돌이 나타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은 작은 소년의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민호와 알비. 다른 녀석들과 함께 사는 다인실에서 홀로 1인실로 옮긴 것은 면담이 있고 난 뒤 채 이주가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
“뉴트!”
“…….”
“만나고 싶었어.”
“…….”
“나 모르겠어?”
“…….”
처음 보는 녀석이 친한 척을 한다. 뉴트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그때 느꼈던 기분과 똑같았다. 아직도 저러고 다니는 모양인지 온몸을 타고 힘이 흘러내렸다. 자기보다 주먹 하나는 작아 보이는 녀석은 꼭 죽마고우를 만난 것처럼 바짝 붙었다. 팔을 잡는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다리가 풀려서 침대에 겨우 주저앉았다.
“뉴트 만나고 싶다고 잰슨 엄청 귀찮게 했거든.”
“…….”
“처음 볼 때부터 알았어.”
“…뭘?”
간신히 입술을 열어 대답한다. 꼭 힘에 잡아 먹이는 기분이 들었다.
“너 가이드지.”
“…….”
“잰슨이 그랬어. 나한테 꼭 필요한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을 가이드라고 부른다고.”
“…그런 거 아니야.”
“맞아.”
저렇게 확신에 찬 목소리를 들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귀찮아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낯선 녀석이 팔을 잡고 놔주지 않았다. 뭐가 저렇게 좋을까. 연구소에서 좋은 옷 입고, 이렇게 실험체 취급도 받지 않을 거면서. 고작 또래 한 명 만났다고 좋아하다니. 뉴트는 온갖 생각이 피어오르는 머리를 주체할 수 없었다.
“내 이름은 토마스야.”
“…….”
“토마스라고 불러.”
“내가…왜.”
“오늘부터 내 가이드니까.”
“…….”
정말 놀라운 말이었지만, 그렇게 놀라진 않았다. 그저 올게. 왔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번 실험은 이쪽인가 봐. 뉴트의 생각은 놀랍도록 간결했다. 아직도 온몸을 잡아먹는 기운이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토마스가 좋아할수록 뉴트는 숨이 가빠왔다.
토마스가 잠시 없는 사이에 연구원에게 이끌려 또 상담실에 들어갔다. 왜 이렇게 인생에 좋은 일이 없는지. 뉴트는 한숨을 쉬었다. 연구원은 어려운 파일을 뉴트 앞에 늘어놓았다. 늘 끝이라고 생각한 삶에 왜 이렇게 자꾸 어려운 일이 생기나 싶었다.
“네가 가이드로서 그리 뛰어나지 않은 재목이라 저쪽에 포함해 뒀는데.”
“…….”
“토마스의 능력이 널 원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
“우리가 얼마나 고생을 했던 줄 아느냐. 아니지. 이런 이야기 해봤자…….”
“…….”
될 대로 떠드는 연구원의 말에선 온갖 과한 정보가 흘러들어왔다. 애초에 토마스를 제대로 도와줄 만한 가이드가 위키드 내에 없었다. 그나마 말을 듣는 쪽은 같이 들어온 여자아이라고 했다. 굳이 따지자면 가이딩을 하는 것이 아니고 센티넬끼리 상쇄를 하는 쪽에 가까웠다. 하지만 말을 듣는다고 했지, 완벽하단 소리는 아니었다. 점점 힘에 부쳐 하는 아이를 더는 둘 수 없어서 일단 떼어냈다고 한다.
그리고 혼자서 돌아다니면서 제대로 된 케어를 받지 못한 녀석이 자신을 발견했다는 소리였다. 몰래 실험도 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한번 정신을 잃고 실험실로 실려 간 적이 있는데 그때 인 건가 싶었다. 물론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동조율은 50% 이하. 보잘것없는 수치였다. 센티넬로서는 최상에 가까운 녀석과 가이드로서 평균에도 못 미치는 실험체의 조합은 그리 좋지 않았다.
너무 급의 차이가 나면 둘 중 하나는 과부하를 받게 된다. 센티넬이 폭주 할 수도 있고, 가이드가 제풀에 지쳐 쓰러질 수도 있다. 게다가 일대일로 붙은 가이드가 잘못되면 센티넬은 큰 충격을 받는다. 이래서 굳이 토마스에게 개인 가이드를 붙여주지 않으려 했다는 말이 덧붙여진다. 하지만 뉴트가 삶을 제멋대로 살 수 없는 것처럼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당분간은 널 토마스 곁에 두기로 했다.”
“그러다 끝나면요?”
“뭐가?”
“센티넬과 가이드 관계가 끝나면 전 어떻게 되는 거죠?”
제법 날카로운 질문이었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뉴트는 토마스의 힘이 버거웠다. 도대체 저만큼 능력이 있는 녀석이 왜 자신을 붙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뭐가 그렇게 간절해서. 제대로 된 가이드 역할도 못 하는 위키드의 자산을 붙잡고 끝을 보려고 하는지. 뉴트는 그냥 웃고 말았다.
“아무리 해도 그 녀석의 힘을 제어할 방법이 마땅치 않아서.”
“…….”
“널 붙여주기로 했다.”
뭐 도구로 쓴다는 말이었다. 실험당하다 죽는 것과 이쪽 중 어느 것이 나을까. 어린 뉴트는 둘 중 어떤 것이 나은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물론 후자가 안 좋다고 해도 거부권은 없었다. 토마스는 또 과부하가 걸려서 실려 갔다고 한다. 돌아오면 그다음부터는 네가 옆에 있으란 소리를 들었다. 목과 팔엔 가이딩 보조를 도와줄 기구가 달라붙었다. 꼭 개 목줄을 한 것 같아서 기분 나빴지만 내버려 두기로 했다. 다시 돌아온 토마스는 하얗게 뜬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아주. 약간.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
“나랑 끝까지 갈 거야?”
“…….”
“난 네가…아니 네 능력이 너무 버거워서 최선을 다해도 안 될 수도 있어.”
“…….”
“그러면 그 끝에 가서라도 날 기억해야 해?”
“…잊어버리지 않아.”
“…….”
“내가 잊을 리 없잖아.”
“그래.”
잊지 않는다는 그 말이 위키드 내에선 얼마나 가벼운 말인지 둘은 미처 알지 못했다. 끝을 알 수 없는 길 위에 둘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