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100분/제갈유비] 꽃, 별똥별, 그리움
+) NOTICE
레전드 히어로 삼국전 2차 연성입니다.
50화 이후 제갈량과 유비 이야기입니다
우울한 부분이 있으니 주의해주세요!
적당한 망상과 설정 붕괴가 언제나 함께 합니다 ㅇㅅㅇ)9
write. 환월
드림배틀이 끝나고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우승자를 제외한 모든 참가자는 드림배틀에 관한 기억을 잊어버렸다. 배틀을 시작하던 순간과 가장 어긋나지 않은 방향으로 그간 기억이 조절된다. 몇몇은 그런 자신의 상황에 의문을 가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진 않았다.
“…….”
그런 모든 사람의 소원을 관리하는 신선은 늘 바빴다. 삼백 년에 한 번씩 큰 꿈을 받는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쪽을 택했다. 그러다 보니 작은 소원을 모아 옥새를 운용해야 한다. 신선이 태어날 때부터 각인된 일이기에 지겹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신선에겐 시간이란 개념이 없다. 그들의 삶은 드림 배틀로 시작해서 끝난다. 그것이 신선의 일생이었고, 다음 드림 배틀을 위해 끝없는 잠을 청하곤 했다. 아무도 그런 것에 의문을 가지지 않았기에 제갈량은 자신도 그렇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적어도 몇 년은 괜찮았던 것 같았다.
“…주군,”
하지만 어느 순간 단단한 심장에 균열이 생겼다. 신선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아도 괜찮다. 잠을 잘 필요가 없다. 그 모든 것은 드림 배틀을 하는 데 필요 없는 것이기에 그렇게 만들어졌다. 심장도 마찬가지였다. 신선마다 차이가 있다곤 하지만 심장은 모두 비슷했다.
“전 어쩌면 좋을까요.”
처음으로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신선계는 사시사철 좋은 곳이었다. 적당히 따뜻한 바람이 있었고, 필요하다면 편하게 먹을 수 있는 과일도 지천에 널려있었다. 추위가 없는 곳이기에 풀밭에 누워서 잠깐 눈을 붙여도 충분한 곳이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이제 제갈량뿐이었다. 옥새가 움직이지 않으면 해가 지지 않는 곳은 늘 따뜻했다. 인간계에서 처음 경험해본 밤은 어둠과 같았다. 그런 곳에서 조금 살았다고 항상 밝은 이곳이 어색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만나고 싶습니다.”
제갈량은 어떻게든 움직이고 싶었다. 하다못해 유비의 얼굴을 직접 보고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참을 수 없었다. 스스로 심장이 고장 났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것을 고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젠 너무 당연해진 그리움은 심장에 뿌리를 박고 자랐다. 줄기가 온몸을 타고 내려올 때까지 제갈량은 그저 과거를 회상하며 옥새 관리자로서의 본분을 다했다.
헤어질 때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것이 인간으로 살아갈 주군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인간과 신선의 삶은 함께 갈 수 없다. 유한한 인간의 삶이 끝나는 그때가 되어도 신선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알고 있음에도 마음을 쉽게 놓지 못한다. 그리움이란 것은 살아있는 생명과 같다. 인간은 서서히 과거를 잊어가지만, 신선은 그렇지 못했다. 영원히 기억 속에 박혀서 그리워할 사람이 모두 죽고 나면 어떻게 버텨야 할까. 제갈량은 신선의 본질에 대한 의문을 가졌다.
그래서 그런 말을 했을지도 몰랐다. 조금이라도 자신을 기억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약간의 부채감을 심었다. 가족. 친구. 기억. 이런 말이 인간에게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는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반성하고 있다. 신선이란 그런 사사로운 생각을 하면 안 되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참을 수 없었다.
“옥새를 개조해야 했다.”
나의 주군이, 저곳에서 날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엄청난 말이었다. 물론 이 말을 들어줄 사람은 남아 있지 않았다. 자신과 같은 대에 태어난 신선은 모두 죽었다. 한 명이라도 남아있으면 이렇게 쓸쓸하지 않았을까. 제갈량은 옥새를 바라보았다. 이젠 자신과 동화되어 움직이는 옥새는 예민하게 반응한다. 물론 옥새에 대해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신선조차 모르는 기능이 남아있었다.
“날…버그로 여길 수도 있겠구나.”
사실 개조라는 것조차 쉬운 것이 아니었다. 제갈량을 버그로 인식하게 되면 옥새부터 망가질 것이고, 그것은 신선계와 인간계 모두에게 큰 재앙이 될 것이다. 이후 드림 배틀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제갈량의 결심은 개인의 이기심에 가까웠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아니 알고 싶지 않다.
물론 당장 옥새를 뜯어고치고 싶었지만, 제갈량은 그렇게 큰일을 멋대로 벌인 성경이 아니었다. 천천히 장각이 만든 설계도를 꺼내온다. 조금씩 고치면 몇 년 안에 완성이 될 것이다. 그저 그 시간 동안 유비가 무사하길 빌었다. 인간의 생은 하늘이 관장하는지라 신선이 아무리 애를 써도 닿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냉정했다.
“곧 가겠습니다.”
제갈량의 결심이 점점 굳어간다. 지금은 옥새에 매인 몸이지만, 희망이 보였다. 현 관리자는 원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만 보면서 파고 들어가는 성격이었다. 제갈량이 옥새를 뜯어보는 동안 신선계엔 밤이 오지 않았다. 늘 환한 것이 싫어 억지로라도 밤을 만들던 것조차 잊은 채 해야 할 일에 집중했다.
**
“주군.”
“…제갈량?”
“오랜만입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습니까.”
“삼 년이나 지났어.”
“…….”
“다신 못 볼 줄 알았는데…….”
“삼 년이나 걸리다니, 누군가 들으면 웃겠군요.”
“…응?”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혹시 어딘가 아프신 곳은 없으신가요? 제가 없다고 무술 연습을 게을리하신 건 아니겠죠?”
“아니야. 나 건강해. 정말이야.”
“…….”
“진짠데…….”
유비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제갈량이 잠시 입을 다물면 거짓말처럼 시무룩해진다. 조금 키가 자란 걸까. 눈높이가 약간 달라졌다. 신선은 가장 최적의 신체 상태로 고정되어 변하지 않기에 인간의 변화는 늘 흥미로웠다. 제갈량은 그런 유비를 보고 웃었다. 옷 따뜻하게 입고 다니라는 말은 여전히 듣지 않는다. 늘 입던 옷과 도복. 그리고 비슷한 머리 스타일. 하나도 변하지 않았지만 벌써 삼 년이나 흘렀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왔어?”
“예?”
“그때…다시 못 만난다고 해서.”
“그랬었죠.”
“혹시 신선계에 무슨 일이 생긴 거야?”
“…….”
“내가 소원을 빈 게 역시 잘못된 일이었을까? 응? 제갈량. 대답 좀 해줘.”
“그럴 리가요. 신선계에 문제가 생겼다면 저부터 이미 죽고 없겠지요. 이렇게 맘 편히 어디로 놀러 다니겠습니까.”
“…….”
유비는 또 자신이 바보 같은 말을 했다며 웃었다. 들고 있던 장바구니는 이미 바닥에 떨어졌다. 주군. 저기 감자가 굴러갑니다. 제갈량의 한마디에 퍼뜩 정신을 차린 유비는 장바구니를 정리한다. 아. 이거 깨졌다고 공손찬한테 혼나겠다. 잔뜩 입술을 내민 채 떨어진 것을 주워 담았다.
“왜 저만 보면 이렇게 허둥지둥하십니까. 전 주군을 혼내러 온 것이 아닙니다.”
“…….”
“그저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날…보고 싶어서?”
“네.”
“옥새는…….”
“저 위에.”
제갈량이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킨다. 그 손가락을 따라 올려다보니 해가 쨍쨍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으. 유비가 눈을 찌푸린다. 제갈량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물론 알아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정말?”
“예. 전 선계 최고니까요. 장각이 남긴 자료를 조금 더 찾아서 개조했습니다. 지금까지 아무 이상이 없으니 멀쩡하겠지요.”
“하지만…….”
“주군이 보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
“혼자 있는 것이 너무 쓸쓸해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매일 소원을 빌었는데.”
“하지만 제 앞에 계시지 않으니까요.”
“…….”
제갈량의 웃음 끝엔 슬픔이 녹아났다. 유비는 그런 제갈량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일단 집에 가자. 가서 이야기하자. 응? 예전 같으면 가서 연습이나 하라고 하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제갈량은 살짝 웃으면서 유비를 따라간다. 익숙한 길이 보이고, 낯익은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바뀐 것이 없는 도원관은 조용했다. 분명 아이들을 많이 가르쳤던 거 같은데…주변은 둘러보자 유비는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아…지금은 다들 방학이야.”
“네?”
“노식 사부님도 일이 있고, 공손찬도 바빠서 말이야. 차라리 잘된 일이지.”
“…….”
“잠깐만 닫았다가 방학이 끝나면 다시 열어야지.”
“그러면…….”
“지금은 나 혼자 있어. 그래도 오늘은 제갈량이 와서 좋다. 공손찬 요새 바빠서 얼굴도 못 보고 있어. 전공이 잘 맞나봐.”
“…….”
제갈량은 이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 유비는 드림배틀이 끝난 인간계에선 이질적인 존재였다. 물론 그것이 우승자가 당연히 감내해야 하는 사실이라 한다면 할 말이 없다. 사실 예전 드림 배틀 우승자들도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지금과는 달랐다. 유비의 소원으로 드림 배틀이 없어진 지금 인간계와 선계는 다음 드림 배틀에 매이지 않고 영원히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다만 그걸 모두 기억하고 있는 유비가 문제였다. 인간의 삶은 거의 비슷하다. 오래 산다는 사람도 채 이백 년을 살지 못한다. 우승자라고 다른 건 아니었다. 노식 사부처럼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렇다는 건 유비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미래를 찾아 떠난다. 하지만 유비는 아니었다. 드림 배틀의 기억을 모두 간직한 채 인간계에 살고 있으니 꼭 발이 허공에 붕 떠 있는 것 같을 테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주변과 유리된다.
“주군. 제가 와서 기쁘신가요?”
“당연하지. 밥 안 먹었으면 같이 먹자.”
“알겠습니다.”
“잠깐만? 내가 이럴 줄 알고 오늘 비장의 소시지를 준비했거든.”
유비가 신나면 자신도 기분이 좋다. 군주와 신선이 감정적 교류가 가능하다는 사실은 확인된 바 없지만, 애초에 유비와 자신은 약간 특별한 존재였다. 그럴 수도 있지. 옥새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제갈량은 자신의 심장에 자라난 감정의 정체를 어렴풋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언제 돌아갈 거야?”
“하룻밤 지나면 돌아가야지요. 아직은 오래 비우지 못하니까요.”
“…그렇구나.”
“왜 그러십니까.”
“아니 좀 더 오래 있으면 좋겠다 싶었지.”
“또 내려오겠습니다. 전 인간계에 주군 외엔 적이 없으니까요.”
“정말? 그럼 어서 밥부터 먹자.”
“예.”
제갈량은 부엌에서 바삐 움직이는 유비를 눈 속에 빠짐없이 담았다. 꽃이 피고 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신선에게 처음 모시는 주군은 특별한 존재였다. 영원한 충성을 맹세함과 동시에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뒤쫓고 싶은 존재가 된다. 그래서 제갈량의 눈에 약간 다른 색이 섞여 들어갔을지도 몰랐다.
인간계에 머무르는 동안 늘 보던 밥상이었다. 달라진 것은 그저 주변 환경뿐이었다. 유비는 이거 다 먹으라면서 자꾸 제갈량 앞으로 반찬을 밀어줬다. 신선은 그저 맛을 즐기기 위해 선택적으로 음식을 섭취한다는 말은 아무리 해도 자꾸 잊어버리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것 조차 좋았다.
“신선도 잠을 자?”
“필요하면요.”
“그럼 같이 잘래?”
“…네?”
“내 방 침대 좁긴 하지만…아마 괜찮을 거야.”
“…….”
“내일 돌아간다며. 응?”
“알겠습니다. 오늘은 주군이 원하시는 걸 모두 하시죠.”
“정말 좋다. 그렇지 제갈량?”
차마 그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유비가 하자는 대로 침대에 같이 누웠다. 강아지 같은 얼굴로 웅크리고 누워서 자꾸 보채기만 한다. 모른 척 옆을 돌아보니 그제야 안심이 되는 듯 웃었다. 주군의 행복이 곧 자신의 행복이라 생각하면 이것도 나쁘지 않았다. 유비는 제갈량이 금세 사라질까 봐 얼른 손을 잡았다. 그러다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허리를 꾹 껴안은 채 품에 얼굴을 묻었다.
“나 자고 있는데 먼저 가면 안 돼?”
“알겠습니다.”
“이번엔 늦잠 안 자고 일어날게.”
“주군이 일어나실 때까지 떠나지 않겠습니다.”
“정말이지?”
“네. 약속하겠습니다.”
제갈량은 품 안에 안긴 주군을 떼어내는 것보다 재우는 쪽을 택했다. 어색하게 손을 들어서 등을 두드린다. 토닥토닥 규칙적인 소리가 들린다. 유비는 자꾸 자지 않으려 했지만, 졸음의 무게를 버틸 수 없었다. 그런 유비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제갈량의 표정은 복잡하기만 했다. 내 꿈은 이미 인간계에 있는데, 옥새는 어째서 떨어져 살아야 한다고 명한 걸까. 가서 행복해지라 한 말은 뭐였을까. 제갈량은 억울했다. 평생 도구로 살지 않으려 버티다 처음으로 찾은 꿈이고 행복이었다. 하지만 그 행복의 유한함을 알게 되니 참을 수 없었다.
“인간은…다시 태어난다지만.”
“…….”
“신선은 알아볼 수 없습니다. 옥새가 무사히 돌아가는 것으로 짐작할 뿐이지요.”
“…으응.”
“그래서 유비 님, 주군. 당신을 놓을 수 없습니다.”
전 어떡하면 좋을까요. 이 어려운 질문에 확실한 대답해줄 수 있는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제갈량은 유비를 품에 안은 채 꼬박 밤을 보냈다. 이불이 흘러내리면 다시 덮어주고, 웅얼웅얼 잠꼬대하면 받아준다. 유비의 모습이 꼭 어미와 떨어진 강아지 같아서 한시라도 품에서 떨어뜨릴 수 없었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와 규칙적인 숨소리.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
“…제갈량.”
“…….”
“…잘…잤어?”
“…….”
“제갈…….”
유비는 쏟아지는 햇살에 못 이겨 눈을 떴다. 자연스럽게 옆으로 손을 뻗었는데, 아무도 없었다. 싸늘하게 식은 곳을 손으로 더듬는다. 분명 가지 않겠다고 했는데,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다. 놀라서 벌떡 일어나자 머리가 띵 하고 울렸다. 속이 울렁거리면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제갈량.”
어디 갔어. 너무 놀라서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평생 찾아오지 않으면 이렇게까지 슬프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움은 시간이 지나면 변색하고 사라지는데, 제갈량은 그것조차 섭리에 따르는 것을 놔두지 못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웃으면서 들어와 이렇게 버리고 가다니. 유비는 벌벌 떨리는 다리로 간신히 일어섰다. 사실 이 모든 게 꿈일지도 몰랐다. 빨리 방문을 열고 나가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주군…일어나셨…….”
“제갈량!”
“…무슨 일이십니까. 왜 울고 그러세요.”
“아니…난 간 줄 알고.”
“…….”
“일어날 때까지 기다린다며. 그런데 없었잖아.”
다 큰 남자의 한탄으로는 조금 웃긴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가족의 정이 고프고 늘 허덕이던 유비는 주변 사람이 사라지는 경험을 싫어했다. 다리가 풀려서 비틀거리는 유비를 한쪽 팔로 감싸 안았다. 그리곤 곧바로 사과한다. 너무 놀라서 쿵쿵 소리를 내는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
“그저…주군에게 꽃을 드리면 좋을 것 같아 잠시 다녀오는 길입니다.”
“…….”
“작약 이 아주 예쁘게 폈더군요.”
“…지금 그거 필 시기가 아닌데…….”
“선물로 가져왔습니다.”
신선은 조심스럽게 꽃을 건넨다. 유비는 코를 훌쩍이며 그걸 받아들였다. 탐스러운 크기의 작약은 금방이라도 물방울이 뚝뚝 흘러내릴 것처럼 싱싱했다. 그래도 놀랐잖아. 퉁퉁 부은 목소리에 제갈량은 그저 웃기만 했다. 유비는 병에 장식하겠다고 한다. 제갈량은 마음 가는 대로 하라며 뒤를 따랐다. 깨끗하게 씻은 유리병에 물을 담고 꽃을 꽂았다.
“예쁘다.”
“마음에 드시나요.”
“응. 그런데 갑자기 나한테 꽃을…….”
“혼자 계시면 쓸쓸하실 거 같아서.”
“…….”
“일어나시는 걸 보고 돌아가려 했습니다.”
“…벌써가?”
“가봐야 합니다. 아직 오랫동안 자리를 비울 수 없어서요.”
“…….”
“이 꽃이 시들면 다시 오겠습니다.”
“정말이야?”
“예.”
“알았어. 나 항상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제갈량이 찾아와야 해?”
“물론이죠. 주군.”
제갈량이 아프게 웃었다. 짧은 만남은 인간뿐만 아니라 신선에게도 너무나 유해했다. 한마디 한마디를 할 때마다 심장이 터질 것 같고, 온몸이 부서져 내릴 것 같았다. 애초에 감정이란 것을 내줄 공간이 별로 없는 몸인지라, 이럴 때마다 온몸에 과부하가 걸리곤 했다. 나오지 말라고 하지만 유비는 자꾸 따라 나온다. 그때와 똑같았다. 햇빛을 받으면서 그대로 부서져 내리는 제갈량을 보던 유비는 결국 땅에 주저앉았다. 땅바닥에 작고 짙은 동그라미가 뚝뚝 떨어졌다.
**
“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신선은 질문한다. 하지만 옥새는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애초에 그 꽃은 선계의 물건이니 인간계의 속도로 시들지 않는다. 유비를 만나고 온 다음 날 신선은 내내 앓았다. 옥새 안에서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떴다. 여전히 신선계는 평화로웠지만, 얼어버린 심장은 여전히 아프기만 했다.
“전…주군을. 유비 님을 포기하지 못하겠습니다.”
이기적인 말이었다. 신선은 항상 곧은 생각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옥새가 버그로 여겨 공격할 수 있다. 하지만 더는 참을 수 없었다. 하늘이 인연을 내려주었으면 책임을 져야 했다.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넘지 못하는 산을 넘어서라도 이 물음의 답을 찾고 싶었다.
사실 유비가 다시 태어나도 옥새 운용엔 그리 큰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렇다면 유비가 영원히 산다면 어떨까. 다시 태어난 유비는 유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제갈량은 어려운 고민을 했다. 그저 우승자인 유비의 꿈이 필요한 것뿐이라면 그 일에 자신의 욕심 하나 끼워 넣는 것이 그리 큰일일까 싶었다.
사실 이 결심을 하기 전부터 많은 것을 준비했다. 먼저 도원 관을 봉인했다. 유비는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천천히 그것을 느낄 수 없게 된다. 영원히 사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만이었다. 제갈량은 늘 꽃이 시들면 온다는 말을 남기도 떠났다. 유비는 항상 도원 관에서 기다렸고, 다른 곳은 가지 않았다. 움직이는 모든 것은 만들어진 세계였으며 꿈속이라고 말해도 충분했다. 처음엔 마을 단위로 그다음은 정원까지. 마지막은 도원 관이었다. 인간의 한정된 삶을 봉인하려면 최대한 작은 공간이 필요했다.
영웅 패의 추억이 깃든 곳. 유비의 오래된 행복이 있는 곳. 모든 사람이 추억을 쌓고 간 곳. 기억이 천천히 지워지면,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 유비는 늘 항상 같은 얼굴로 제갈량을 기다렸다. 제갈량은 유비가 하자는 대로 모든 것을 해주곤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또 지났다. 어느새 도원관은 조금씩 낡아간다. 사람이 살지 않은 지 오래된 곳이라고 다들 말한다. 이미 유비와 같은 삶을 살던 사람들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제갈량은 자신의 이기심임을 알면서도 매일 번뇌하고 고민한다. 자신이 한 행동을 과연 용서할 수 있을까. 주군은 받아들여 줄까. 하지만 제갈량만 입을 다물면 되는 일이었다. 이젠 버릴 양심조차 없다고 생각했는데, 매일 심장을 찌르는 고통이 찾아왔다. 그럴 때마다 선계엔 밤이 왔다.
“…….”
별똥별이 내린다. 인간계에선 사람이 죽으면 별똥별이 보인다고 했다. 선한 사람의 영혼을 저 멀리 좋은 곳으로 데려간다고 말했다. 신선계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제갈량의 눈앞에선 수많은 별이 떨어졌다. 꼭 자신을 꾸짖는 것 같다. 평생 운명이 이끄는 데로 살아왔는데, 원하는 것 한 가지를 했다고 모두가 자신을 책망했다. 이기적으로 살아선 안 되는 몸에 모든 것을 알려준 옥새가 원망스러웠다. 차라리 감정을 배울 수 없게 해야 했다.
“…주군.”
유비는 항상 같은 얼굴로 자신을 반겨준다. 힘들 때마다 도원 관으로 내려가 유비를 찾았다. 그러면 항상 자신을 걱정한다. 수백 수천 번을 같은 말을 하면서 다독여준다. 그 목소리가 너무 따뜻해서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제갈량을 보며 유비는 매일 같은 말을 했다. 세상이 혼란한 이유가 자신이 잘못한 것이냐고 반문하면서도 제갈량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말을 빼먹지 않았다.
“전…어떻게.”
놓을 수 없는 손이었다. 신선계가 불안한 것은 옥새와 동화된 자신의 감정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충분히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계속 모른 척하고 살았다. 하지만 총명한 머리는 자꾸 두 가지 생각을 함께하게 했다. 그럴 때마다 몸이 아팠다.
사실 알고 있었다. 이 일을 끝낼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것을 알아서 일부러 모른 척했다. 옥새에겐 유비의 생과 사를 가늠할 방법이 없었다. 그저 유비가 살아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신의 주군을 속이는 일이었다. 제갈량은 꼬박 백 년을 고민했다. 두 번째 별똥별이 내리던 날 그는 이별을 준비했다. 너무 총명하고 공정해서 끝까지 이기적이지도 못했다.
“주군.”
“…제갈량?”
“가셔야 합니다.”
“어딜? 우리 놀러 가?”
“…….”
“왜 그래. 다들 소원을 빌지 않아? 그래서 힘들어?”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
“다음엔 제가 꼭 찾아가겠습니다.”
꽃이 시든다. 그리움이 녹아내린다. 도원 관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유비를 이끈다. 파랗게 내려앉은 어둠은 금방이라도 둘을 집어삼킬 것 같았다. 유비는 주변을 둘러보다 하늘을 올려보았다.
“…….”
“별똥별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울 때 주군과 함께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이건…….”
“제가 훔친 주군의 모든 기억입니다. 이렇게 많으리라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제갈량. 왜 그래.”
“이제 가시던 길을 다시 걸어가셔야 합니다.”
“…….”
“함께해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제 이기심을 용서해 주세요.”
“…….”
유비는 아직도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제갈량은 조금 떨어져서 서 있었다. 서서의 화단쯤일까. 그곳으로 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갈량을 불렀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유비는 도원 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 이유를 아는 제갈량은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제가 주군을 속였습니다.”
“…뭐?”
“주군을 보낼 수 없어서 도원관을 봉인하고, 떠나야할 영혼을 봍잡았습니다.”
“…….”
“하지만 그것이 제 이기심임을 인정하는데 너무 오래 걸렸습니다. 이제야 용서를 빌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
“인간의 삶에 개입할 수 있는 것은 하늘 뿐. 전 어리석게도 옥새를 가지고 주군에게 신이 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걸. 왜.”
“…….”
제갈량이 땅에 엎드려서 울었다. 소리 없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면서 방울마다 꽃을 피웠다. 유비는 여전히 도원관 앞에 서 있었다.
“바보같이.”
“…….”
“내가 그걸 왜 몰랐겠어.”
“…….”
“여기에 남아있는 것은 내가 원한 일인데, 왜 제갈량이 미안하다고 하는 거야.”
“…….”
“제갈량.”
“…….”
“행복해지렴.”
“…….”
“응? 나야말로 제갈량에게 이기적인 사람일 뿐인걸.”
세상의 이치를 따르지 않은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본 채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유비는 봉인된 곳의 경계 밖으로 나갈 수 없다. 그러기에 제갈량이 다가오길 기다렸다. 이것도 하늘의 뜻이라면 그리 나쁘지 않았다. 하늘을 하얗게 수놓던 것이 하나둘 사라졌다. 파란 어둠이 새까맣게 변할 때까지 두 사람은 움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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