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호는 옆에서 장작을 고르면서 무심하게 말한다. 토마스는 그런 민호를 가만히 쳐다보다 눈만 깜박인다. 이 녀석이 입을 다물면 열 방법이 없었다. 토마스는 늘 그랬던 것처럼 속으로 싸고도는 것이 많았다. 뭐든 품에 끌어안고 끙끙 앓기만 한다. 만난 지 오래되지 않은 녀석이지만 민호는 그런 버릇을 훤히 꿰고 있었다. 숨긴다고 숨겨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가야 할 곳이 있어.”
“그럼 나도 같이 가.”
“민호가 왜.”
“…그럼 널 혼자 보내? 넌 아직 한참 신입이야.”
“…….”
“너 혼자 가서 사라지는 건 더 보기 싫다.”
“…….”
“마음 정리되면 말해. 준비할 거니까.”
“…으응.”
민호의 말을 꺾을 수 없다. 토마스는 그냥 고개만 끄덕거리고 말았다. 세이프 헤이븐은 생각보다 좋은 곳이었다. 물론 살아가는 방식은 공터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물론 그리버가 있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머리가 쪼개질 것처럼 복잡한 미로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숲과 어울린 채. 자연에서 필요한 것을 얻으면서 살아간다. 높은 건물은 있지도 않다. 그저 천막을 만들고 기둥에 해먹을 걸었다.
“저 새끼는 또 왜 저러는지.”
민호의 말투는 무뚝뚝했지만, 걱정이 묻어나온다. 공터에서부터 세이프 헤이븐까지. 살아남은 몇 안 되는 동료였다. 위키드의 손아귀에서 구해낸 면역자들과 다른 사람을 빼고 나면 민호가 아는 사람은 몇 명 남지 않았다. 민호는 그런 공터 인들을 끔찍하게 여겼다.
토마스는 세이프 헤이븐으로 은 뒤로 약간 시들었다. 물론 사람이 노상 건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토마스가 간신히 버그에 올라탔을 때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지금 몸 상태가 썩 나쁘진 않았다. 총알이 지나간 자리에선 검붉은 피가 꿀렁거리며 배어 나왔다. 아무리 천으로 꾹꾹 눌러도 솟구치는 피를 똑똑히 보았다. 흐릿하게 풀어진 눈이 결국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고 스르르 감겼다.
‘토마스?’
‘…….’
‘토마스. 정신 놓으면 안 돼!’
‘…….’
축 처진 토마스를 몇 번이나 흔들었다. 하얗게 질려가는 녀석을 어떻게 데리고 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하지만 다행히 녀석은 버텨냈다. 의식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목숨을 놓진 않았다. 총알 자국 모양으로 번진 피가 채 마르기도 전에 눈을 떴다. 조금 더 쉬라는 소리를 못 들은 척 하며 끝끝내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녀석의 눈은 조금 더 단단해졌고 상처가 더덕더덕 붙었다.
‘그러다 평생 앓는다.’
‘…….’
‘고집도 저런 고집이 없다니까.’
토마스를 아는 모든 사람은 혀만 끌끌 찬다. 아득바득 일어난 녀석은 옆구리를 손으로 짚으면서도 부지런히 걸어 다닌다. 그렇게라도 정신을 차리면 나아질 것이라. 이런 식으로 애써 좋게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속으로 파인 상처가 깊었던 모양이었다.
토마스는 가끔 혼자 바다가 보이는 모래사장에 앉아 있곤 한다. 민호는 그럴 때마다 신입을 챙기러 갔다. 하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은지 언제부터는 그냥 내버려 두었다. 만족할 정도로 눈에 바다를 담으면 휘적휘적 돌아오곤 했다. 몇 명은 저러다 큰일 난다고 걱정한다. 하지만 민호는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지. 괜찮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할 일을 찾는다. 이젠 미로를 달리지도 않고, 크랭크를 피해 달아나지 않아도 된다. 할 일이 사라지면 만들어서라도 몸을 움직이는 편이었다. 그렇게 다들 세이프 헤이븐에 조금씩 적응해간다. 다만 토마스는 아직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
아무 말 하지 않고 바다만 바라본다. 바닷바람을 타고 파도가 친다. 금방이라도 모래사장을 축축하게 적시던 물이 밀려난다. 그리고 다시 차오른다. 부글부글 하얀 거품이 보일 때마다 토마스는 두 손 가득 물을 퍼 올리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도 손에 남는 것은 없었다. 짭짤한 소금기가 입술에 옮아붙기 시작하고 나서야 그런 행동을 멈추곤 했다.
“뉴트.”
이젠 부르기도 힘든 이름을 부른다. 한 글자. 다시 한 글자. 발음할 때마다 심장에 쿡쿡 박힌다. 이름을 부르는 것이 이렇게 힘든 것인 줄 처음 알았다. 뉴트를 평생 잊지 못하기에 여러 번 부르면 이름 정도 부르는 것은 쉬워질 줄 알았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
잊히는 것이 싫다.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도 무섭다. 뉴트의 편지를 닳도록 읽었다. 세상에 한 장밖에 없는 편지가 혹시 사라질까 봐 늘 목에 걸고 다닌다. 다들 토마스의 목에 걸린 것의 정체를 궁금해하지만 깊게 물어보진 않았다. 뉴트가 준 목걸이 옆엔 작은 병이 하나 더 생겼다.
“뉴트. 이건 못 버리겠더라.”
겨우 한마디가 툭 굴러 나온다. 폐를 쥐어짜야지 숨을 쉴 수 있다. 물속에 빠진 것처럼 답답해진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더니 눈물이 툭 떨어진다. 마른 모랫바닥에 떨어진 눈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손바닥으로 눈 주위를 꾹꾹 누르면서 애써 아무렇게 않은 척을 해봤다.
“이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는데…차마 버릴 수 없어서 가지고 있어.”
대답해 줄 사람은 이제 이곳에 없다. 트리사가 목숨을 걸고 만들고 뉴트를 구할 수 있었던 혈청이었다. 왜 하필. 일찍 알지 못했을까. 토마스는 내내 악몽 속에 살았다. 뉴트는 토마스가 행복해지길 빌었다. 행복해질 자격이 있다고 했지만, 폐를 내리누르는 죄책감은 쉽게 토마스를 놔주지 않았다. 토마스는 과거를 쉽게 떨치지 못한다. 그런 사람에게 죄책감은 떨어지지 않는 지독한 굴레와도 같았다.
그렇게 며칠 잠을 설치고 나서 부적처럼 목걸이를 찾았다. 웅크리고 누운 채 한 손으로 목걸이를 손에 쥔다. 손끝으로 매끈한 통을 만지작거리면 그 안에 들어있는 편지 내용이 하나하나 살아 올라온다. 뉴트의 목소리가 토마스 옆에 살고 있었다.
“…….”
이렇게 잠을 설치면서 고생하는 것을 보면 분명 한마디 잔소리가 철썩 날아와 붙는다. 신입. 뭐해. 잠 제대로 안 자두면 내일 위험하다니까? 응? 아픈 건 아니고? 공터에 처음 올라왔을 때 뉴트가 그렇게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했다. 토마스는 또 속눈썹을 축축하게 적신 채 억지로 잠을 청했다.
“편지를 읽고…돌에 새겨진 네 이름을 보고.”
“…….”
“익숙해지려고 하는데 마음처럼 잘 안 되는 거 있지.”
“…….”
“바다가 대신 대답을 해주네.”
허허 웃고 만다. 여기까지 말하는 것도 꽤 오래 걸렸다. 몸은 억지로 회복시킬 수 있지만, 정신은 아니었다. 어딘가 하나 망가진 사람처럼 터덜터덜 걸어 다니던 녀석은 이제 내내 바다만 바라본다. 뉴트가 뭐라고 했더라. 사소한 대화 하나하나까지 기억하려 애쓴다. 과거를 더듬으면서 괴로워하다가 어쩔 땐 멀쩡하게 일을 돕기도 했다. 그저 과도기일 거라 믿었고, 이곳에서 생활하려면 그래야만 했다.
민호는 토마스가 던진 말이 영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끙끙 앓으면서 해먹에 누우려는 녀석을 붙잡고 아까 한 말의 의미를 다그쳐 묻는다. 하지만 이 고집쟁이 신입은 여전히 원하는 대답을 주지 않았다. 언제 말해줄 건데. 민호는 늘 신입을 걱정한다. 토마스는 대답 대신 빙긋 웃으면서 고개만 꾸벅꾸벅 숙였다.
**
“나…가야 할 곳이 있어.”
“또 그 소리야?”
“…….”
“도대체 어디를 갈 건데.”
“최후의 도시.”
“아…그래.”
“…….”
“뭐?”
민호가 놀라서 돌아본다. 하긴 토마스의 입에서 그런 단어가 나올 줄은 아무도 몰랐을 거다. 하다못해 민호도 애써 그곳을 잊으려 했다. 오래 기억해봤자 좋을 것이 없는 장소였다. 하지만 토마스의 눈빛은 이곳에 온 이후로 가장 또렷했다. 이제야 결심이 선 모양이었다. 민호는 집을 고치는 데 사용하기 위해 옮기던 도구 상자를 든 채 토마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말해봐.”
“최후의 도시로 가려고.”
“…….”
“민호…그러니까 불편하겠지만.”
“왜 가려는 거야.”
“…….”
“확실하지 않으면 떠날 수 없어.”
“뉴트 만나러.”
“…….”
암묵적으로 서로 입에 올리지 않았던 말이었다. 둘 다 상처를 입었다. 친구를 잃은 슬픔을 가눌 길이 없어 서로 말을 하지 않았다. 각자의 방법으로 추모를 하지만 함께 모여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서로 속으로 삭일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애써왔는데 토마스는 또 한 번 이렇게 큰일을 치고 만다.
“뉴트를 만나러 가야 해.”
“…….”
“혼자 가도 괜찮아. 갔다가 바로 돌아올 거야.”
“왜 혼자 가는데?”
“그야…….”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문다. 민호는 들고 있던 상자를 지나가던 사람에게 부탁한다. 그리곤 토마스를 끌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걸어간다. 토마스는 순순히 따라오는가 싶더니 또 입을 다문 채 버티기 시작했다. 민호는 토마스가 이럴 때마다 걱정을 한다. 갤리도. 프라이도. 척도. 수많은 이름이 생각난다. 살아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이 모두 저 녀석의 머릿속을 헤집기 어렵다고 하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