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뉴트/톰늍] MAZE IN THE TRAP 009
+) NOTICE
둘이 멀쩡하게 연애하는게 보고싶어서 시작한 평범한 세계에 대학교 AU 입니다.
플레어는 발병하지 않았고, 다들 알아서 잘 살고 있는 세계.
적당한 망상과 설정 붕괴가 언제나 함께 합니다 ㅇㅅㅇ)9
톰늍 대학교 편까지 연재하고 대학교 졸업 이후 버전을 따로 추가해 회지로 만들 예정입니다.
연재한 분량 자체를 지우진 않습니다.
write. 환월
9.
폭풍 같은 전쟁이 지나간 이후는 뜻밖에 조용했다. 토마스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뉴트 뒤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뉴트가 저기 가서 놀라면서 밀어내도 그때 뿐이었다.
“그래…좋을 때다.”
“알비 지금 되게 아저씨 같은 거 알아?”
“좋기는 무슨 둘 다 정신머리가 빠져도 단단히 빠졌는데.”
“그래도 지금 조용하지 않아?”
“저런 거 하나하나 받아주니까 네가 그 모양인 거다. 신입 주제에 나대고 다니긴.”
갤리가 들고 있던 캔을 단숨에 비우고 이리저리 돌리다 와작 구겼다. 물론 갤리에게 토마스는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뭐가 저렇게 좋은지 바보 같은 웃음을 실실 흘리면서 뉴트 뒤꽁무니 쫓아다니는 건 계속 거슬리기만 했다. 물론 꽤 오래 알고 지냈던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엔 애완동물 운동시키는 것보다 못한 광경이긴 했다. 물론 당연한 말이지만 구경하는 입장에서만 그랬다.
“뉴트.”
“그만 따라오고 네 수업이나 들어가 토마스.”
“…….”
“아니. 전공 수업에 들어가라고 하는 게 그렇게 서러울 일이야? 표정은 왜 또 그래?”
“…….”
이럴 때만 비 맞은 강아지 같은 얼굴로 뉴트를 붙잡았다. 분명 오늘 수업이 있다고 들었는데 왜 미술사 전공 건물 앞에 서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몇 번 이야기를 나눠본 결과 토마스는 딱히 학점이라는 것을 잘 받을 이유가 없었다. 취직이야 졸업장만 따면 곧바로 연구실로 돌아가면 되는 일이었고, 애초에 대학에 오게 된 이유도 하도 사람들이 관심을 보여서 이 정도로 잘 살고 있다고 보여주기 위한 쇼에 가까웠다.
토마스란 이름은 굉장히 흔했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은 토마스와 위키드 연구원이라는 단어를 동일 선상에 두고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지금처럼 뉴트한테 정신이 팔린 채 걸어 다니는 덕분이었지만.
“어휴. 내 팔자야.”
“…….”
“수업 듣고 오면 나도 끝나니까 그때 보자고.”
“…알았어.”
“내가 이렇게 수업 열심히 들어가는 사람이 아닌데, 내가 안가면 너도 안 갈 거 같아서 이러는 거야. 고마워하라고,”
“…….”
뉴트는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 남자친구인지 돌봐줘야 할 애새끼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영악한 아이는 뉴트가 약한 부분은 귀신같이 알아채곤 했다. 속눈썹이 보송보송한 눈을 깜박거리면서 불쌍하게 쳐다보면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안 만나주는 것도 아니었는데, 이렇게 애정을 갈구하는지 영 알 수 없었다.
토마스의 엉덩이를 걷어찰 듯 위협해서 전공 수업 건물로 쫓아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뉴트가 수업 듣고 나올 때까지 앞에서 기다릴 놈이었다. 쭈굴쭈굴 걸어가는 뒷모습이 더는 보이지 않았지만, 건물 앞에서 한참 서 있었다.
‘…몇 달은 지난 거 같은데 말이지.’
학생회 실에서 둘이 약간의 시차를 두고 나와서 다시 건물 앞에서 만났다. 뉴트는 보는 눈이 있으니 집으로 가자고 말했고, 토마스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이렇게 둘이서 학교 밖으로 나가는 광경은 몇 달 내내 계속해서 볼 수 있었다.
다음 날 둘은 본 민호는 잘 됐다는 표정으로 씩 웃고 지나갔다. 뉴트는 저 녀석 자는 새 뒤통수를 때려버릴 거라고 으르렁 거렸다. 친구 사이가 오래되면 이런 것이 안 좋았다. 조금만 티가 나도 곧장 알아채는 오랜 친구인 민호를 옆에 둔 뉴트는 누구를 원망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 ✓ ✗
솔직히 말하자면 그 날의 일을 생각하면 할수록 부끄러운 일이었다. 몇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이 날 정도였다. 아주 가끔 자다가 너무 부끄러워서 벌떡 일어나 때도 있었다. 토마스라고 다를 것 같진 않았지만, 뉴트는 나름대로 열심히 부끄러움을 표현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 눈에 안 띄는 편이 좋을 거 같아서 냅다 집으로 가자고 한 것까진 좋았는데, 막상 거실까지 들어오니 번쩍 제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뭘 했더라. 솔직히 거기까진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처음이야 그랬었다. 몇 달이 지나고 해가 바뀌려 하는 지금은 주위에서 뭐라고 하든지 말든지 별 상관하지 않았다. 물론 토마스는 좀 부끄러워하는 거 같았지만, 뉴트는 그마저도 나름 즐기고 있었다.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 버릇이 줄줄 흘러나올 때마다 당황하는 얼굴을 보는 것도 꽤 재미있었다. 토마스는 뉴트의 손에 자신이 집 여분 열쇠를 쥐여 주고 싶어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순 없었다. 예상외로 순순히 집 앞까지 끌려 온 뉴트는 이젠 얼굴을 익힌 사람들한테 가볍게 인사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같은 감상이었지만, 볼 때마다 집 좀 꾸미고 살라는 잔소리가 울컥 올라왔다. 아무리 학교가 끝나면 정리할 집이긴 해도, 이렇게 금방 훌쩍 사라질 것처럼 구는 건 좋아하지 않았다. 뭔가 뿌리가 제대로 묻히지 않은 나무를 보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뉴트가 뭔가 꾸미고 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기숙사보다 더 허무하게 방치된 것처럼 놓여있는 이 공간이 신경 쓰일 뿐이었다.
“이 집은 뭐 바뀌는 게 없냐.”
“…별로 꾸미고 싶지 않아서.”
“너도 그러다가 나처럼 이리저리 방황한다. 적당히 꾸밀 건 꾸미고 그러고 살아.”
“지금도 붕 뜬 거 같아?”
“뭐가?”
“아니야.”
토마스가 또 실없이 웃었다. 정곡을 찌르는 말을 푹푹 내뱉는 주제에 자신이 그런 타입이라는 것은 생각도 못 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나서서 손잡는 것도 못하면서 기회가 있다 싶으면 옆에 딱 붙어 앉는 모습이 귀엽긴 했다. 이쯤에서 뉴트는 자기가 진짜 미쳤다고 다섯 번째 속으로 말하는 중이었다. 모른 척 눈을 살짝 내리깐 채 안겨주자 그새 또 와락 껴안은 채 자꾸 뉴트의 이름을 불렀다.
“내 이름 어디 안 가니까 그만 불러도 괜찮아.”
“못 부른 만큼 부를 거야.”
“천재들은 사랑도 이렇게 뜬금없이 하나 봐? 안 그래?”
“…….”
“이런 말 싫어했던가. 신입생이라고 부르는 편이 좋아?”
“아니 내 이름 불러줘.”
“그래. 토마스.”
“난 뉴트가 불러주는 이름이 좋아.”
“…….”
“다른 사람이 불러주는 것보다 특별하게 들리니까.”
“그건 네 착각 아냐?”
자신보다 한참 밝은 머리카락에 묻혀있던 입술이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귓바퀴에 닿았다 떨어진 것은 볼에 잠시 머물렀다. 이윽고 날렵한 선이 만든 목덜미에 닿자 뉴트가 가늘게 떨었다. 입술이 닿는 곳마다 붉게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만. 조용히 말하는 목소리에 멈칫하던 입술이 다시 한 번 진득하게 붙었다 떨어졌다.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왔다. 뒤에서 껴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이 녀석은 뭐가 이렇게 좋을까. 뉴트는 때때로 냉정하게 생각하려 했다. 물론 답이 없는 문제를 고민한다 해도 당장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
“뉴트? 왜 그래?”
“네가 오늘 할 일을 다 했나 안 했나 생각하는 중이었어. 또 다 내던지고 다닌 건 아닌가 싶어서.”
“아니거든.”
“그러면 뭐 잘했어.”
“응.”
별거 아닌 칭찬에도 기뻐했다. 토마스가 자신의 목덜미에 입술을 대고 말하면 늘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알 수 없는 감정은 심장을 타고 올라와 뇌를 하얗게 비워갔다.
“뉴트”
“…응.”
피부 위에서 시작된 이름이 다 사라지기 전에 뉴트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토마스의 코와 맞닿을 뻔했다. 코끝이 살짝 닿자 목으로 작게 웃었다.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술을 말았다. 따끈하게 입술 위에 퍼지는 타인의 체온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사람의 체온이 이렇게 뜨거웠나 싶을 정도로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
서로 떨어져 나가다 아쉬워서 한 번 더 닿았다. 눈을 깜박일 때마다 주변 사물이 흐릿하게 번져나갔다. 으응. 목 아래로 칭얼대면서 다시 가깝게 달라붙는 목소리에 뉴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바라보았다. 이 세상모르는 녀석을 어째야 하나 싶었다. 새로운 세계를 알아가자 그쪽만 파고드는 과학자를 보는 기분이었다.
주위에 많은 사람은 마냥 좋은 것도 삼세번이라고 그랬다. 초반이야 뭘 해도 좋을 수 있겠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식을 수 있었다. 어설프게나마 사회 물을 먹어가는 뉴트는 더 심각해졌다. 가끔 화보 촬영 약속이 잡히고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면 원치 않아도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얼마든지 들을 수 있었다.
토마스가 막 수줍은 첫사랑을 시작했다고 한다면, 뉴트는 이미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어렴풋하게 깨닫는 중이었다. 머리는 복잡해져만 갔다. 지금도 받기 어려울 만큼 차고 넘치는 애정이 한순간 사라진다면, 분명 힘들 것이 뻔했다. 과연 그만큼 내가 맞춰 줄 수 있을까. 뉴트가 심각한 생각을 하면 미간에 곱게 주름이 잡히곤 했다. 표정이 날카로워지는 것을 알아차린 토마스가 뒤에서 좀 더 강하게 안아왔다.
“무슨 생각해?”
“너랑 이러다 식으면 어쩔까 싶은 생각.”
“…….”
“네가 준 만큼 내가 못 주면 어쩌나 하는 것도 같이?”
“그런 건 걱정 안 해도 괜찮아.”
“그건 네 생각일 뿐이지.”
“…….”
뉴트는 스스로 아픈 소리를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런 말을 하고 나면 그 뒤에 올 행동은 뻔했다. 뒤에서 껴안은 채로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슬슬 뺨을 부비긴 하는데 차마 뉴트한테는 뭐라 하지 못하고 끙끙거린다. 그게 귀여웠다. 껍데기만 자라서 커다랗지 완전 애야 애. 하아. 뉴트가 한숨을 쉬며 한쪽 팔을 들어서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러면 곧 잔뜩 불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 말 하지 마.”
“알았어.”
“하지 말라고 해도 매일 하잖아.”
“그러면 반응을 안 하면 되는 거 아냐. 몇 번이나 당했으면 좀 익숙해질 때도 됐잖아.”
“어떻게 그래.”
“…어휴.”
피식 웃는 소리에 또 저 녀석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더워. 저리 가. 뉴트가 얼굴을 밀어내도 허리를 붙잡은 채 버텼다. 결국, 소파에 토마스가 기대고 그 가슴에 뉴트가 뒤통수를 댄 채 늘어졌다. 뭘 해도 좋을 시기였다. 어느 로맨스 소설에 나오는 묘사처럼 눈앞에 꽃이 휘날리고, 하루에도 열두 번씩 날씨가 바뀌다 못해 종국엔 세상이 온통 분홍색으로 보이진 않았어도 충분히 행복했다.
허리를 감싸 안던 커다란 손이 뉴트의 배 위에서 서로 깍지를 꼈다. 그런 토마스의 손을 살살 쓰다듬었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았고, 과한 접촉도 없었지만 둘 다 욕심을 내지 않았다. 토마스가 뉴트의 네 번째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엄지와 검지가 손가락 두께를 재는 것처럼 움직였다. 두껍지도 과하게 얇지도 않은 것을 알고 나자 조용히 손등을 덮어서 서로 깍지를 꼈다.
“왜?”
“반지…….”
“나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
“농담이야. 가끔 촬영 있을 때 하도 이것저것 끼워대는 사람들이 있어서 귀찮아할 뿐이야. 그리고 내가 잘 안 끼기도 하고.”
“내가 주면?”
“보고 결정하지 뭐.”
“그래?”
“응.”
물론 뉴트는 멀쩡한 반지를 골라올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공돌이가 생각하는 게 거기서 거기지 뭐. 사실 주위에 토마스만큼 공학에 심취한 사람이 없어서 들리는 풍문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토마스가 뭔가 꾸미고 다닌다는 사실 자체가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꼭 받아줘야 한다면서 웅얼거리는 녀석을 대충 받아주면서 결국 웃고 말았다.
소파는 어느새 둘의 체온으로 딱 좋을 온도로 따끈해졌다. 몇 번이나 입술을 맞닿았다가 떼면서도 모자란 지 뉴트를 놓아주지 않았다. 새가 키스하는 것처럼 가볍게 떨어지는 입술 세례에 결국 깍지 낀 손을 빼서 토마스의 옷깃을 잡아챘다. 어쩜 이렇게 어설픈지. 뛰어다니는 것도 휘적휘적 불안해 보일 때부터 알아봤어.
“뉴…….”
뉴트가 직접 입술을 가져다 댈 때 토마스의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동그랗게 변했다. 떨어질 것같이 물러서다 다시 한 번 깊게 파묻는 감촉에 토마스가 눈을 파르르 떨었다.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았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데 입술에만 모든 신경이 몰린 것 같았다. 어설프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물컹한 것이 살짝 들어왔다. 혀로 살짝 아랫입술을 핥아준 뉴트가 입 꼬리에 한 번 더 입술을 댔다 떨어졌다. 여전히 뻣뻣하게 굳어있는 토마스를 보고 한마디 툭 던졌다.
“바보야.”
“…….”
“이렇게는 해야 하는 거 아냐?”
“…….”
토마스의 볼에 콕콕 박혀있는 점을 손끝으로 살살 만져보던 뉴트가 가늘게 웃었다. 화르르 달아오른 얼굴을 손으로 숨기려고 했지만, 한발 빠른 손에 잡혀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뉴트! 잠깐만! 버둥거리는 토마스의 허벅지를 다리로 꾹 누른 채 두 손을 잡아채서 소파 위로 넘겼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눈에 띄게 당황하는 얼굴이 가득 들어왔다.
“뉴트…잠깐만!”
“왜?”
“…….”
“넌 정말 아무리 봐도 순진한 건지 아니면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건지 모르겠어.”
“응?”
“아니야.”
뉴트가 그 상태 그대로 허리를 숙였다. 다시 한 번 길고 뜨거운 시간이 지나갔다. 토마스는 여전히 버둥거렸다.
✗ ✓ ✗
먼저 여행을 가자고 말한 사람은 토마스였다.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이것저것 짊어지고 와서 신나게 설명하는 것을 바라보다 엉겁결에 그래- 라고 한마디 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아니라고 부정하려 했지만, 잔뜩 기대하고 있는 얼굴을 보니 그 말도 할 수 없었다.
“정말 갈 거야? 갈 거지?”
“그런데……. 여기 꽤 먼 곳이잖아. 어떻게 가려고?”
“그러게. 그걸 생각 못 했다. 연구소에서 차 빌려올까?”
“뭐?”
“필요하면 써도 된다고 하셨는데.”
“됐거든. 벌써 연구소에 찍히고 싶지 않습니다. 토마스 씨.”
“??”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은 여전했다. 그런 토마스를 보고 있던 뉴트는 하나하나 설명을 하는 것을 포기했다. 저런 상태는 녀석에게 뭐라고 한마디만 더해도 더 큰 일을 낼 수 있을 게 분명했다. 안 그래도 토마스를 만나는 내내 연구소에서 지급한 숙소에 드나들었다. 주변에 사는 어지간한 사람과는 안면을 텄는데, 여기서 데이트 좀 하자고 차를 빌린다면. 와우.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왜?”
“그러니까 그냥 기차 타고 가자.”
“응?”
“학생 주제에 무슨 차야. 적당히 기차 타고 걸으면서 다녀오면 좋잖아. 안 그래?”
“그런가?”
차를 빌려오겠다는 고집을 꺾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물론 뉴트는 개인차로 이동하는 것을 더 좋아하긴 했지만, 저건 아무리 봐도 아니었다. 토마스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조금 급하게 잡힌 여행 계획을 하나하나 점검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여행이야?”
“더 추워지기 전에 가고 싶어서,”
“이미 겨울이잖아.”
“둘이 같이 보내는 건 처음이잖아.”
아. 그러세요.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은 말이었다. 물론 조금 불협화음이 있긴 했지만 여기저기 가볼 곳을 정하는 동안 뉴트도 조금 설레고 있었다. 토마스는 여전히 잔뜩 즐거워하고 있었다. 거실에 깔아둔 러그에 엎드린 뉴트가 손끝으로 잔뜩 쌓인 여행 정보를 집어 들었다. 푹신한 쿠션에 엎드린 채 손가락으로 문장을 긁어가면서 읽었다.
“며칠이나 가려고?”
“난 상관없는데 뉴트 계획에 맞추면 될 거 같아. 뉴트는 졸업 준비도 해야 하고. 다른 일도 있지 않아?”
“촬영 하나밖에 없는데.”
“안 가면 안 되는 일이잖아.”
“그렇긴 하지. 잘하면 곧바로 계약할 수도 있고.”
“그런데 말이야.”
토마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쿠션의 푹신함에 잔뜩 만족하고 있던 뉴트가 고개만 돌려서 자신을 부르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토마스가 손가락으로 볼을 긁적였다.
“전공 공부는 더는 안 할 거야?”
“어. 안 할 거야.”
“왜?”
“별로 하고 싶은 공부는 아니었어. 지금은 모델 에이전시 쪽에서 계속 연락이 오니까 그쪽이나 생각해 보지 뭐.”
“…….”
뉴트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토마스에겐 아직 말하지 않은 부분이 많았다. 물론 토마스도 그런 것을 희미하게 느끼고 있었지만, 몰아붙이거나 급하게 물어보진 않았다.
‘아마 민호는 알고 있겠지.’
물론 궁금했다. 뉴트가 왜 더는 대학 공부를 하지 않으려 하는지, 무슨 일이 있어 하던 운동을 멈췄는지 하나하나 알고 싶었다. 물론 민호에게 지나가듯 물어보면 한마디라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뉴트의 거의 모든 과거를 알고 있는 민호가 때때로 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둘이 그저 친구일 뿐이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자신이 모르는 뉴트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질투가 나기도 했다.
“재미없는 소리는 그만 하고 어디 갈지 정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응? 우리 가서 노숙할 거야?”
“어, 아니야. 잠깐 생각 좀 하느라.”
“역에서 가까운데 숙소를 잡자. 어차피 돌아다니는 건 비슷할 텐데 짐 들고 오가는 건 귀찮잖아.”
지도를 하나하나 짚으면서 이야기하는 내내 토마스는 얼굴과 손가락 끝만 쳐다보고 있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이상야릇한 시선을 알아차리고 턱을 괸 채 시선만 위로 올리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씩 웃곤 했다. 여행 경비부터 계획까지 자는 동안 해는 점점 기울어져 갔다.
여름보다야 짧았지만, 겨울 방학도 나름 긴 시간이었다. 민호는 학기가 끝나자마자 전지훈련을 가야 한다면서 휙 사라졌다. 뉴트는 그런 모습이 익숙한지 죽지만 말고 돌아오라며 농담을 했다.
잔뜩 짐을 챙겨서 나오는 민호가 한 손으로 어설프게 목도리를 둘둘 둘러맸다. 안 봐도 뻔하다. 또 기숙사 다 헤집어 놓고 나가는 거. 뉴트가 혀를 차면서 반쯤 흘러내린 목도리를 제대로 감아줬다.
“추운 날 훈련할 때 더 조심해야 하는 거 알지?”
“물론이지.”
토마스가 한마디 껴들었다.
“언제 돌아오는데?”
“잘은 모르겠지만, 한 달? 두 달?”
“방학마다 매일 이렇게 훈련을 나가?”
“어? 뭐…그렇지. 조만간 대회도 있고.”
“달리는 거밖에 모르는 바보는 그냥 내버려 둬. 다쳐서 돌아오면 그대로 다시 쫓아낼 거니까.”
“뉴트…너!”
“그러니까 잘 다녀오라는 거야. 친구.”
둘이서 손을 마주 잡았다. 바짝 솟아오른 팔 근육을 따라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손을 풀면서 등을 퍽퍽 소리가 날정도로 쳤다. 앞으로 푹 쓰러질 뻔한 민호가 뭐라고 소리를 쳤지만 뉴트는 듣지 않았다. 토마스에게 뉴트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훌쩍 떠난 민호는 훈련이 어지간히 바쁜지 점점 연락이 늦어졌다.
어차피 혼자 사용해야 하는 기숙사였다. 민호가 잠시 자리를 비우고 삼일 이 지나자 미련없이 기숙사를 버려둔 채 토마스 집에 아주 눌러앉았다. 넓은 집에 남는 침대야 많았다. 게다가 기숙사보다 훨씬 좋은 환경이었고, 그저 편하게 뒹굴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민호는.”
토마스는 언제나 민호를 걱정했고, 뉴트는 뚱한 표정으로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내다 보면 새카맣게 탄 녀석이 돌아와서 웃고 있다고 했다. 벌써 몇 년째 이어진 일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해도 토마스는 전전긍긍했다.
“그 뛰는 거밖에 모르는 바보는 실컷 뛰다 기절해 있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
“역시 그런 건 가?”
“민호는 언제나 달리는 걸 좋아했으니까. 옛날부터 그랬어.”
“…….”
“게다가 나 대신 달려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겠다고 저러고 있는 거야. 곰 같은 놈. 미련하기도 해라.”
“약속?”
“아, 내가 육상 선수였다고 말 안 했었나? 나도 같이 선수 생활 준비 중이었거든.”
“…….”
“지금은 못 하지만.”
“왜라고 물어봐도 괜찮아?”
“…….”
잠시 말이 없어졌다. 토마스는 뉴트 옆에 좀 더 바짝 붙어 앉았다. 머그컵을 두 손으로 만지작거리던 뉴트가 입을 열었을 땐 주변 공기가 싸늘하게 식는 것 같았다. 주변에 하얗게 성에가 자라나는 것 같아서 눈을 몇 번이나 감았다가 떴다.
“다리를 다쳐서.”
생각보다 깔끔하고 직설적인 대답이었다.
“…사실 재활 치료하면 나을 수 있다고 했는데, 그렇게까지 구질구질하게 선수 생활을 하고 싶진 않았어. 게다가…….”
“…….”
“빠르게 달리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다시 다칠 수 있는 위험이 큰 부분이라 완전히 포기했지. 여기쯤이야.”
“발목?”
“그래.”
따뜻하게 달아오른 손이 발목에 닿았다. 육안으로 봤을 땐 그리 비틀리지도 않았고 커다란 흉터도 없었다. 하지만 토마스는 뉴트가 어떤 상태를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치료만 제대로 하면 일상생활에는 거의 지장이 없지만, 대회를 나가는 선수라면 충분히 신경이 쓰일 만한 부상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 부상이 가장 중요한 시합에서 어긋나 버리기라도 한다면. 아마 뉴트는 그 강박관념을 이길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프진 않았어?”
“…이제 기억도 안 나.”
허탈하게 웃는 뉴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자신의 손을 겹쳐 올렸다. 뉴트의 손가락 사이로 발목을 문질렀다. 자기보다 조금 작은 손이 아래에서 스르르 빠져나가는 것을 막지 않았다. 발목에 손을 댄 채 가만히 있었다.
“…아팠겠다.”
“기억도 안 난다니까. 이제 다 과거 이야기야.”
가늘게 눈을 접은 뉴트가 토마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커다란 손바닥이 발목을 스칠 때마다 간질간질한 기분이 저 안쪽에서 피어 올라왔다. 입술을 꾹 다물고 토마스에게 좀 더 기댔다. 마사지하는 것처럼 조물조물 주물러주던 손은 오랫동안 발목에 머물렀다.
뉴트의 부상을 봐주는 사람은 가끔 찾아가는 병원의 의사와 민호가 전부였다. 자존심 때문이라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서 아득바득 짊어지려 했다. 그나마 뒷사정을 알고 있는 민호가 도와주려 했지만, 뉴트는 또 한 번 모든 것을 정리하고 도망쳐 버렸다.
“운동은 못 하겠지만 먹고 살 길은 있어서 괜찮아.”
“난 항상 뉴트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달리는 건 민호에게서 대리만족하면 되는 일이니까 별걱정 안 해. 자기 입으로 그랬거든. 내 몫까지 뛰겠다고.”
“민호가?”
“생각보다 훨씬 고지식한 면이 있어서. 나 같은 놈 친구라고 지금까지 돌봐주느라고 속이 어지간히 썩었을 거야. 내가 그때 엄청나게 히스테리 부렸거든.”
“민호는 대단해.”
“대단하지. 언제나.”
“……”
“나 같았으면 그런 놈 제일먼저 포기했을 거야.”
발목을 만지던 손이 조금씩 위로 올라오면서 종아리를 만졌다. 뉴트가 가늘게 신음을 내뱉으며 손을 밀어내려 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결국 어설프게 안겨있는 모양새로 숨을 훅 뿜었다. 다리를 만지작거리던 토마스가 손을 뗐다. 그리고 입술에 뉴트가 닿았다. 발그스름하게 올라온 홍조를 만지면 따끈따끈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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