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뉴트/톰늍] SCORCH IN THE TRAP 007
+) NOTICE
메이즈 인더 트랩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엠프렉과 2세 언급이 있으니 해당 설정을 즐기지 않는 분들은 피주세요!
둘이 멀쩡하게 연애하는게 보고싶어서 시작한 평범한 세계 AU 입니다.
전 작에서는 대학생 이었지만 지금은 뉴트는 모델, 토마스는 연구원으로 나옵니다
적당한 망상과 설정 붕괴가 언제나 함께 합니다 ㅇㅅㅇ)9
전작에서 이어지는 같은 커플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
어느정도까지 연재 후 뒷부분을 추가해 회지로 만들 예정입니다.
책이 나와도 연재한 분량 자체를 지우진 않습니다.
write. 환월
뉴트는 생각보다 얌전히 안겨 있었다. 물론 여기서 버둥거리다 잘못 떨어지기라도 하면 간신히 나은 다리를 또 다칠 것 같았다. 일단 얌전히 있다가 집에 들어가서 내려놓기만 하면 정강이라도 걷어차 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토마스는 내려줄 듯 말 듯하면서 계속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조금만 더 참자. 참자. 이마에 여러 번 참을 인을 새기던 뉴트는 결국 토마스의 멱살을 다시 한 번 붙들었다. 물론 최대한 상냥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사실 이 정도 참은 것도 용하다 싶었다. 갑자기 고삐가 당겨진 것처럼 목을 덜컥 잡힌 토마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왜 그래?”
“몰라서 물어?”
“불편해?”
자세를 고쳐 안으려는 토마스를 한 번 더 저지했다. 이게 아니잖아. 정말 몰라서 저러는 건지. 아닌지.
“그게 아니잖아. 도대체 어쩔 셈이야?”
“뭐가?”
“저번에도 한바탕 난리 치고 우리 한동안 귀찮았던 거 생각 안 나? 이번에도 이러면 내가 뭐가 되냐 말이야.”
“뭐가 되긴.”
“기껏 다리 다쳐서 요양한다고 일정 다 뺀 사람이 여기 와서 놀고 있다고 하면 잘도 사람들이 이해를 해주겠다.”
“…그런가.”
“그런가가 아니잖아.”
“하지만 거기 있나 여기 있나 똑같은 거 아니야?”
“…….”
토마스의 한마디에 말문이 턱 막혔다. 도대체 저 머리는 어떻게 돌아가는 걸까. 연구소에선 그렇게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이 없다며 칭찬이 자자하다. 가끔 말하는 걸 보면 사회라는 구조가 돌아가는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긴 대학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러긴 했다. 조금 더 컸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여전히 전혀 자라지 않은 모양이었다.
“사람 사이에서 이리저리 치이는 것보다 여기 와서 있는 쪽이 더 편할 거 같아서 그랬지.”
“…….”
“뉴트도 사람 많은 곳 싫어하잖아.”
“…그렇긴 하지만.”
“뉴트는 생각이 너무 많아.”
뉴트가 항상 하던 말을 냉큼 따라 한다. 뉴트는 눈을 찌푸리면서 토마스를 올려다보았다. 아직도 걱정이 가득한 얼굴을 보니 완전히 내려놓진 못한 것 같지만, 뭐 어떤가. 어차피 이곳에서 혼자서 나갈 방법도 없다. 운전을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혼자 돌아가는 것도 좀 이상했다.
뉴트는 토마스의 머릿속을 훤하게 꿰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얼굴에 그대로 나타나는 걸 알아서인지 애써 표정 관리를 하고 있지만, 그것 뿐이었다. 능글능글 웃는 녀석의 볼을 쭉 잡아당겼다. 으아으어. 또 죽는소리를 낸다. 이쯤 되면 관성이 아닐까 싶었다. 볼을 잡은 손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아프긴 아픈지 눈에 습기가 촉촉하게 스며들었다.
“너 같은 녀석이랑 같이 있으니까 생각이 많아지는 거야.”
“…하지만.”
“뭐가 하지만이야.”
“뉴트도 좋잖아.”
“…….”
“맞지?”
정말 어쩜 이럴 수 있지. 토마스가 이럴 때마다 말문이 막히고 만다. 시선을 똑바로 맞춘 다음 헤실헤실 웃고 있으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빛을 받으면 누구보다 맑아지는 눈동자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뉴트는 언젠가 토마스한데 내 눈에서 뭐가 보이냐고 물어보곤 했다. 토마스의 눈을 쳐다보면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처럼 맑기만 한데, 까만 눈엔 뭐가 보일지 궁금했다. 토마스는 일 초도 고민하지 않고 뉴트가 보인다고 대답했다. 그때부터였을까. 뉴트는 도저히 이길 수 없었다.
“이러다 내 커리어가 끊기고 말 거야.”
“그럼 내가 먹여 살리지 뭐.”
“…뭐?”
“집에서 하고 싶은 거 하고, 내가 먹여 살리고. 집에 돌아와서 둘이 같이 지내고 이러지 뭐.”
“정말 태평하구나.”
“뉴트는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게 뭐라고 해도 분명 잘할 거란 확신이 있으니까.”
“좋은 것만 하고 살 순 없지.”
“그렇게 해줄 순 있어.”
거실에 서서 한 바퀴 빙글 돈 토마스가 뉴트는 소파에 내려놓았다. 뉴트는 얌전히 앉아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런저런 타박을 하긴 했지만, 별장은 참 좋았다. 넓고 깨끗하고. 게다가 귀찮게 하는 파파라치며 사람들도 하나도 없는 조용한 공간에 앉아있으니 숨이 툭 터지는 것 같았다. 아, 좋긴 하네. 뉴트가 소파 뒤로 풀썩 누워버렸다.
“뉴트 아저씨 같다.”
“너라고 안 이럴 줄 아냐.”
“화보만 보던 사람들이 이런 거 보면 놀랄 거야.”
“멋대로 환상을 만들면 충격이 심한 법이지.”
“난 둘 다 좋지만.”
토마스가 옆에 냉큼 올라앉았다. 뉴트의 어깨에 모른 척 고개를 댄 채 눈을 감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렇게 앉아있으면, 쉽게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리곤 한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서 들리는 심장 소리가 점점 선명하게 들린다.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지. 조용하면 생각이 많아진다. 하지만, 이런 생각쯤은 얼마든지 해도 좋았다.
“여기 밤에 야생동물이 나온다거나 하진 않겠지?”
“곰?”
“너무 조용하니까 꼭 무슨 사건이 생길 것 같네.”
“뉴트 요즘 추리 소설을 너무 많이 보는구나.”
“응?”
“옆에 쌓아둔 책이 죄다 그런 종류던데. 그럼 뉴트가 탐정하고 내가 탐정 조수를 하지 뭐.”
“우리 둘밖에 없는데 무슨 사건이 일어나.”
“뉴트가 하고 싶어 하면 사건 일으키지 뭐.”
또 둘이 서로 킬킬거리다 입술을 맞댄다. 따뜻한 체온이 서로 섞이기 시작하면 절로 눈이 감기곤 했다. 자연스럽게 뉴트 위로 올라탄 토마스가 두 손으로 뉴트의 어깨를 그러쥐었다. 좀 급한가. 가까이 밀어붙이는 몸에 뉴트는 눈을 감으면서 자연스럽게 입술을 열었다. 으음. 입술이 맞닿은 틈새로 흘러나오는 작은 목소리가 소파 위에 떨어져 그대로 말라갔다. 뉴트의 손가락이 더듬더듬 토마스의 팔을 타고 올라왔다. 그리고 서로 단단하게 붙잡은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좀 더 편하게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다 이내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완전히 뉴트 위에 올라탄 토마스가 코끝에 입술을 톡톡 가져다 댔다. 코에서 입술로 다시 눈꺼풀로. 마치 입술로 얼굴을 기억에 새기는 것 같았다. 뉴트가 토마스의 목 뒤에 손을 감았다. 그리고 쭉 끌어당기면 토마스의 균형이 와장창 무너졌다.
“…으아.”
“하긴 우리 너무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어. 그렇지?”
“응.”
“서로 바쁜 게 딱히 좋은 일만은 아닌 것 같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오늘따라 왜 이렇게 잘생겨 보일까.”
“난 어디 가서 못생겼다는 소리는 안 들어봤어.”
“…아무래도 널 이렇게 키워준 사람을 만나봐야겠어.”
시답지 않은 농담에서도 애정이 뚝뚝 떨어졌다. 서로 입술을 맞대고 혀를 섞고, 좋을 대로 움직였다. 이리저리 움직이다 옷이 말려 올라갔다. 마른 근육이 그대로 드러나자 토마스가 손바닥으로 배를 살살 문질렀다. 뉴트는 눈을 살짝 찡그리며 그 손길을 피하려 했지만, 소파에서 갈 곳은 한정되어 있었다.
“해도 안 졌는데.”
“…어차피 둘밖에 없잖아.”
“…….”
이 녀석이 이렇게 당돌했던가. 뉴트는 그냥 생각을 그만두기로 했다. 어차피 볼 사람도 없고, 둘밖에 없는데 해가 안 진 것이 뭐가 대수란 말인가. 니트가 말아 올라가더니 안쪽에 겹쳐 입은 셔츠 단추가 툭툭 풀어졌다. 옷 벗을까? 뉴트가 한마디 하자마자 토마스의 얼굴에 스위치를 켠 것처럼 화르르 열이 올라왔다.
“…왜?”
“아니. 그냥.”
“방금까지 달려들던 토마스 씨는 어디 가시고?”
“…….”
“…그런데 나 불편한 것도 싫고, 추운 건 더 싫은데.”
“응?”
토마스가 위에서 빤히 내려다보며 눈을 깜박였다. 아. 연산이 끝난 컴퓨터에 전구가 들어오는 모양을 사람으로 표현하면 이렇겠지. 토마스가 잔뜩 달아오른 얼굴로 뉴트 바라봤다. 그리곤 자리에서 물러나더니 뉴트를 다시 답싹 안아 올렸다.
“…뉴트 방금 그 말 되게 좋았는데.”
“또 말해줄까?”
“두 번 들으면 그 느낌이 안 날 거 같아.”
토마스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뉴트가 목덜미를 끌어안은 채 그대로 입을 맞췄다. 두근두근 뛰는 심장 소리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것 같았다. 항상 제일 가까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럴 때마다 자꾸 새로운 모습이 보였다. 선배들은 좋은 날도 석 달이라며, 그 이후는 그냥 관성처럼 가까이 지내는 거라고 농담을 하곤 했다. 하지만 그 말은 틀린 것 같았다. 아마 그렇게 될 사이라면 이렇게까지 오지 않았겠지. 그런 기분만 들었다.
침실 문을 열고 뉴트를 내려놓았다. 풀썩 소리가 났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런 식으로 항상 바라봤던 것 같은데, 오늘따라 처음 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건 토마스도 마찬가지였다. 뉴트가 손을 들어서 토마스의 뺨에 댔다. 강아지처럼 눈을 감으며 볼을 부비던 녀석의 속눈썹엔 이런저런 생각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무슨 생각해?”
“…뉴트 생각.”
“내가 앞에 있는데 무슨 내 생각을 해.”
“매일 보는데 왜 매일 달라 보일까.”
“난 안 그런 줄 알아? 나도 그래.”
“진짜 이상하다. 그렇지?”
“아무래도 우리 둘이 불치병에 걸린 게 틀림없어. 안 그러면 이럴 리 없으니까.”
“그럴지도 몰라.”
“이리와. 토마스.”
뉴트가 토마스의 몸을 와락 끌어당겼다. 혹시 다리를 걷어찰까 전전긍긍하던 몸이 이상한 포즈로 넘어갔다. 푹신한 침대에선 어지간한 소리는 그대로 스며들었다. 이불에 푹 잠긴 뉴트의 얼굴엔 머리카락이 마구 흩어져 있었다. 토마스의 손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늘 좋다. 좋아한다. 그 말이 얼마나 지켜지기 힘든 것인지 둘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냥 늘 하던 대로, 하고 싶은 대로. 그렇게 살면 아주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다.
***
둘이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땐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언제부터 잠이 들었는지, 옷을 홀딱 벗은 채 이불만 감고 누워있던 둘은 서로 좀 더 가까이 붙어 누우면서 한참 깊은 잠을 잤다. 이불은 따뜻하고 침대는 푹신했지만, 뭔가 체온이 모자랐다. 뉴트의 허리를 붙들고 기절한 토마스와 그런 토마스의 목을 껴안은 뉴트는 침대 속으로 푹 꺼질 것 같았다. 평생 저러고 잘 것 같은 둘은 슬슬 배가 고픈지 이리저리 뒤척였다.
먼저 일어난 쪽은 뉴트였다.
물론 한 번에 일어날 순 없었다. 얼마나 단단하게 허리를 감고 있는지, 좀처럼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토마스의 얼굴을 꾹꾹 밀어내던 뉴트가 한숨을 쉬며 이리저리 뒤척거렸다. 그러자 단단히 깍지를 끼고 있던 손이 스르르 풀렸다. 조심조심 옆으로 빠져나온 뉴트는 그대로 토마스를 바라보았다. 잘도 잔다. 첫마디는 꼭 이런 식이었다.
“…….”
베개에 반쯤 파묻힌 얼굴인데도 뜯어보면 참 기분이 간질간질했다. 얼굴에 콕콕 박힌 점을 따라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면 속눈썹이 가득한 눈이 보인다. 무슨 꿈을 꾸는지 뉴트가 가만히 바라보자 살짝 눈을 찡그린다. 잘생긴 눈썹이 꿈틀거리다 이내 풀어진다. 뉴트가 괜한 호기심이 들어 손가락으로 점을 콕콕 찌르면 그때마다 아이처럼 칭얼거린다. 귀여운 건가. 뉴트의 표정도 살살 풀어졌다.
“…으.”
하지만 그런 기분에 취해서 몸을 일으켰을 땐 생각보다 더 아팠다. 찌르르 울리는 허리를 꾹꾹 누르던 뉴트는 앉은 채 다시 토마스를 바라보았다. 귀엽다 싶다가도 가끔 이유 없이 얄미워질 때가 있다. 바로 이때처럼. 뉴트가 턱을 괴고 또 한참 보고 있었다.
“가끔은 이러고 있는 게 신기하단 말이야.”
“…….”
“그때 만나지 못했으면 우린 어떻게 됐을까?”
“만나지 않을 리 없는데.”
“…응?”
언제 깼는지 토마스가 눈을 뜨고 웃고 있었다. 눈꼬리가 둥글게 말리는 걸 보니 잔뜩 기분이 좋은 것이 분명했다. 진작 깨 있으면서 자는 척하긴. 뉴트는 피식 웃어버렸다.
“내가 뉴트를 찾아낼 건데, 어떻게 안 만난다는 선택지가 존재해.”
“…….”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거든.”
“그건 생각보다 나쁜 버릇이야. 토마스.”
“하지만 뉴트를 만났으니까 상관없어. 이젠 그럴 일 없으니까.”
“말은 참 잘해.”
서로 얼굴을 보면서 또 한참을 웃었다. 그때 뉴트가 토마스를 끌고 카페에 들어간 것도 운명일까. 뉴트는 사실 그런 걸 잘 믿지 않았다. 하지만 토마스는 조금 달랐다. 너무 자연스럽게 인생의 한 축을 타고 흘러들어온 녀석은 마치 예전부터 곁에 있었던 것 같았다. 알고 지낸 시간만 계산한다면 제일 늦게 만난 녀석이 분명한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물론 토마스가 구구절절 말하는 걸 들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사람의 인연이 계속될 수 있다는 것도 참 신기한 일이었다.
“이제 뭐 할 거야?”
“뉴트는 뭐 할래?”
“…이런 말 하는 거 좀 부끄러운 것 같아.”
하긴 그 말도 맞았다. 둘이 홀딱 벗고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이젠 뭐하냐고 묻는 상황이라니. 괜히 말을 했나 싶을 정도로 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냥 누워 있을까?”
“여기까지 와서?”
“역시 그건 좀 재미없나.”
“재미없는 건 아니고…….”
뉴트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냥 침대에 있겠단 말마저 수상하게 들리는 걸 보니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것이 틀림없다. 뉴트가 끙끙거리는 동안 토마스는 뭔가 말을 잘못했나 싶었는지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그럼 저녁 먹고, 별 보러 가자.”
“별?”
“잘 보일걸.”
“커피도 타서 나갈까?”
“좋아.”
계획이란 건 그때그때 정하면 그만이었다.
“씻을래.”
뉴트가 이불을 둘둘 말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토마스가 옷을 대충 주워 입고 뒤를 따라갔다. 어쩐지 옛날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욕실로 쏙 들어가 버린 뉴트를 바라보던 토마스는 곧 손목을 잡혀서 끌려 들어갔다.
벽을 통해 울리는 물소리가 오래오래 들렸다.
***
“이게 다 뭐야?”
“먹을 거 아냐?”
“아니 그건 아는데, 종류가 이게 뭐냐고.”
“왜?”
뉴트의 어깨에 턱을 기댄 토마스가 대답을 길게 늘어뜨렸다. 또 미간에 주름이 생긴 채 한참 찬장을 노려보았다. 여기에 머무르는 내내 파스타만 해먹을 생각이었던 걸까. 별장 부엌엔 온갖 종류의 파스타만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뉴트는 그 꼴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하긴 토마스가 준비해다 채워둔 것은 아닐 테지만, 최소한의 조리로 끼니를 해결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이유를 어쩐지 알 것 같았다. 고기도 있고 채소도 있지만, 피곤한데 거하게 먹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우리 내내 파스타만 먹게 생겼네.”
“…응?”
“여기까지 음식 배달이 오지도 않을 거 아냐.”
“그렇지?”
“뭐가 그렇지야. 이럴 줄 알았으면 요리라도 좀 배워두는 건데.”
“정 안되면 나가서 먹지 뭐.”
“왔다 갔다 하다가 시간 다 지나가겠다.”
“시간도 많은데.”
“여기까지 와서 또 사 먹는 음식을 먹으려고?”
“어차피 여기서 해먹는 것도 다 사서 조리하는 거잖아.”
“그거랑은 다르지.”
뉴트가 고개를 저었다. 세상 편한 것도 좋지만, 아무래도 이건 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장 돌아갈 생각도 없었다.
까짓거 파스타 계속 먹지 뭐. 늘 말하지만 뉴트도 만만치 않게 지르는 스타일이었다. 적당히 파스타를 만들어서 후루룩 식사를 끝내고 커피를 내렸다. 물론 보온병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한참 찾아야 했다. 여긴가. 아니면 저긴가. 부엌에 달린 모든 문을 열어보고 나서야 간신히 원하는 걸 찾았다. 담요도 들고, 커피도 탔다.
“좀 더 밤이 깊어야 별이 잘 보이지 않을까?”
“…그런가? 하긴 아직 좀 밝네.”
“우리 너무 서둘렀나 봐.”
“…….”
안 그런 척하면서 잔뜩 기대했던 것이 틀림없었다. 둘은 챙겨 나온 짐을 얌전히 탁자에 올려두고 소파에 걸터앉았다. 분명 밥을 먹고 나면 캄캄한 밤이 될 줄 알았는데, 시간은 생각보다 너무 늦게 갔다. 나갔다 와서 하기로 한 설거지도 하고, 괜히 물기까지 닦아서 찬장에 올려두었다. 그래도 밤이 오지 않아 내일 아침 먹을 메뉴까지 정했다. 적당히 빵 구워서 스크램블 에그나 해먹자. 물론 십 분도 되지 않아 정해버렸다.
“해가 유난히 늦게 지는 거 같아.”
“이때쯤이면 밤이 됐던 거 같은데.”
“여기는 하루가 48시간은 아니겠지?”
“이상한 소리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오래 해가 떠 있을 리 없잖아.”
물론 해는 이미 저 멀리 넘어갔다. 하지만 아직 땅 위에 남아있는 낮의 조각들이 사라지지 않았다. 어둠이 몰려오다가도 다시 물러나는 기분이 들었다. 영원히 밤이 오지 않으면 어쩌지. 쓸데없는 걱정을 해보기도 했다. 물이 끓는 것을 바라보면 유난히 안 끓어오른다는 말이 있다. 이번도 꼭 그랬다. 잠깐 한눈을 팔았더니 밤이 와르르 올려왔다. 새까만 먹물을 탄 것처럼 어두워진 바깥을 내다보던 토마스가 잔뜩 신나서 담요를 챙겼다.
“뉴트! 가자!”
“해 졌어?”
“아주 새카매!”
“언제 그렇게 됐지.”
“어서 가자.”
토마스가 뉴트의 손목을 잡았다. 가자. 빨리! 수선을 떨며 밖으로 나왔다. 예전 집에서도 별은 충분히 보였다. 하지만 여긴 좀 달랐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별이 밤하늘 가득 박혀있었다. 아. 탄성이 절로 흘러나왔다. 마치 보석으로 장식한 천을 하늘 가득 깔아둔 것 같았다.
정원 한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나무에 가려 시야가 영 답답했는지 금방 일어났다. 아무것도 하늘을 가리지 않는 정원 한가운데 털썩 주저앉았다. 담요 하나는 바닥에 깔고 하나는 둘이 같이 둘러썼다. 잠깐이라도 눈을 돌리면 와르르 쏟아질 것 같은 밤하늘을 두고 한참 앉아 있다가 서로 얼굴을 마주 봤다.
“…좋다.”
“오기 잘했지?”
“그러게.”
“나도 여기서 밤하늘은 처음 보는데, 정말 좋다. 뉴트랑 처음 봐서 더 좋은 것 같아.”
“…….”
“왜 그래?”
“아니야.”
요즘 들어 갑자기 볼에 열이 오를 때가 있다. 이정도 들으면 익숙해질 법도 한데, 늘 처음 듣는 것처럼 심장이 뛰었다. 서로 고개를 마주 대고, 커피 잔을 들었다. 감기 걸리기 전에 들어가자. 이런 말만 했다. 좋아한다. 널 사랑한다. 이런 말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오기 잘했어.’
둘은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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