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늍 대학교 편까지 연재하고 대학교 졸업 이후 버전을 따로 추가해 회지로 만들 예정입니다.
연재한 분량 자체를 지우진 않습니다.
write. 환월
11.
여행 이후로 묘하게 가까워진 두 사람은 곧잘 학교 내에서도 함께 앉아 있곤 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커피 하나씩 쥐고 아무 말 없이 앉아있기만 해도 좋았다. 다른 사람도 알아차릴 만큼 둘 사이의 분위기가 변하고 있었다. 갤리는 여전히 그런 둘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둘이 쌍으로 미쳐서 잘 논다고 툴툴거렸다.
겨울 해에 새까맣게 타서 돌아온 민호는 뉴트와 토마스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자연스럽게 뉴트의 손가락을 얽는 토마스는 잔뜩 언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둘 사이의 변화가 생긴 것은 뉴트의 졸업식 날이었다. 뉴트가 먼저 학교에 들어왔으니 빨리 졸업하는 것은 당연했지만, 토마스는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은지 졸업식 전날까지 내내 바빴다. 축하받을 것도 아닌 이름뿐인 졸업장이라며 말하며 웃던 뉴트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늘 근처를 뱅글뱅글 맴돌던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바쁜가. 연구실?”
“요즘 둘이 소홀해 진 거야?”
“내가 그런 말 하지 말랬지?”
“아 왜. 어차피 다들 아는 사실인데. 안 그래?”
“그래. 아주 쌍으로 미쳐서 말이지.”
“…….”
일부러 뉴트의 심기를 확 긁는 갤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뉴트는 반응하지 않았다. 진짜 바쁜가 보네. 섭섭한 듯 한마디 하곤 집에 가본다며 일어섰다.
“집? 기숙사가 아니라?”
“아, 기숙사. 내가 정신이 없네.”
“완전 맛이 갔네.”
“기숙사에 들어가려고. 민호 오면 나 기숙사에 얌전히 있을 거니까 찾으러 다니지 말고 곧장 들어오라고 전해줘”
“알았다.”
갑자기 쌩쌩 바람이 부는 것처럼 차가워진 둘 사이를 좀처럼 짐작할 수 없었다. 알비도 알 수 없는 둘만의 일에 끼인 것이 영 답답했는지 팔짱을 낀 채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갤리는 이제 슬슬 회장님도 둘을 포기하라는 말을 남기고, 전공 건물로 돌아갔다.
사람의 사귐이 항상 좋을 수만은 없다고들 하지만, 졸업식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왜 저러는지 알 수 없었다. 알비야 아직 듣고 싶은 수업이 많다는 이유로 졸업을 미룬 상태였지만, 뉴트는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학교를 빨리 벗어나고 싶어 했다. 분명 졸업하면 이런저런 일들을 할 거라고 둘이서 손가락 접으면서 간질간질한 이야기하는 것도 들었는데 왜 갑자기 이렇게 사이가 냉랭해졌는지 알 수 없었다.
둘 사이의 분위기가 어쨌든 간에 날짜는 착실하게 흘렀다. 식전 행사에 딱히 관심이 없는 뉴트는 꼭 참석해야 하는 것만 잠시 들렸다 나온 뒤 내내 교정을 걸어 다니고 있었다. 발길이 닿는 대로 걸었다. 비틀거리기도 하고 똑바로 걷기도 하며 도착한 곳은 토마스와 종종 앉아있던 벤치였다. 무의식이라 해도 뉴트는 잔뜩 눈길을 찌푸렸다. 뭐가 그렇게 바쁜지 졸업식 내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녀석에 대한 이유 모를 분노가 샘솟았다. 솔직히 섭섭했다. 그렇게 좋다고 쫓아다니더니 정작 가장 중요한 날에는 곁에 없었다. 뉴트가 주먹을 꾹 쥐었다.
“뉴트?”
“…….”
속으로 자기 욕하는 줄 알았는지 불쑥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잔뜩 뛰어왔는지 헉헉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군데군데 섞이면서 연신 자신의 이름을 불렀지만, 뉴트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커다란 손이 자신의 어깨를 잡았을 때 그 손을 강하게 뿌리쳤다.
“왜?”
“뉴트.”
“안 올 거면 아예 오지 말던가. 뭐가 그렇게 바쁘셨어요?”
“…….”
“이제 대충 단물 다 빨아 먹었다 이거야? 내가 미쳤지.”
“…….”
한번 섭섭한 마음이 터지자 뉴트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꼭 가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던 놈이 안 보이면 당연히 화가 날만 했다. 게다가 사귀고 있는 사이라면 더했다. 그렇게 죽고 못 살 것처럼 굴던 것이 다 꿈이었나 싶었다.
“아니…그게 아니고.”
“아니면 뭔데!”
“…….”
토마스가 덥석 뉴트의 손목을 잡았다. 그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생각보다 악력이 강했다. 잔뜩 화가 난 눈이 평소보다 더 날카롭게 치켜 올라갔다. 뭐라고 한마디 더 쏘아붙이려 했지만, 토마스의 얼굴을 보니 목이 턱 막힌 것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뉴트.”
“몰라 이 새끼야.”
“늦어서 정말 미안해. 오다가 잠깐 사고가 있었어. 넉넉하게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
“뉴트 졸업 축하해.”
주머니에서 뭔가 주섬주섬 꺼냈다. 일부러 그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여전히 한쪽 손으로 뉴트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하지만 한 손으론 도저히 뚜껑을 열 수 없었는지 제발 어디 가지 말라고 말하면서 조심스럽게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
“졸업 축하해. ”
고급스러운 검은 상자를 열자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뉴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토마스가 그것을 꺼내 뉴트의 손가락에 가져다 댈 때까지 제대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뉴트 눈처럼 까만 보석을 찾으려 했는데 마음에 드는 것이 없어서 직접 보러 다녔어,”
“…….”
“더 좋은 거 해주고 싶었는데, 시간에 맞추려고.”
“…….”
“뉴트?”
“…….”
손가락에 반쯤 걸쳐진 얇고 매끄러운 테를 바라보던 뉴트가 눈을 깜박였다. 얇은 테와 작게 박힌 보석이 어지럽게 반사되어 눈에 한가득 들어왔다. 하. 스스로 너무 바보 같아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어른이라고 바락바락 우기고 다녔는데 결국 자신도 어린애와 다를 바 없었다. 직접 찾아갈 생각도 안 하고 화부터 내다니. 머리가 식고 진정이 되자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 없었다. 하지만 토마스는 별로 개의치 않은 것 같았다.
“따지자면 보석류는 아니라고 하는데, 처음 카탈로그에서 이걸 봤을 때 뉴트의 눈이랑 굉장히 닮았다고 생각해서 꼭 이걸 사용해서 디자인해달라고 했어.”
“…….”
“어디 가지 말고 내 옆에 있어주며 안 돼?”
늦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던 졸업식에 지각한 주제에 이런 식으로 고백하는 인간은 이 세상에 토마스 하나뿐일 것이 분명했다. 어쩐지 너무 녀석다워서 할 말이 없었다. 하하하. 허탈하게 웃다가 다리가 풀려서 그대로 푹 주저앉았다. 토마스가 화들짝 놀라서 뉴트를 일으켜 세웠다. 안절부절못하는 녀석 얼굴을 손가락으로 툭 튕겨줬다.
“이 바보 새끼가.”
“…….”
“그렇다고 내 연락도 문자도 무시하고 이런 거 보러 다녔냐? 어? 비밀로 하겠다고?”
“난…….”
“정말. 남아있는 사람 생각 좀 해주지 않을래? 응?”
“…….”
“고마워.”
“내가 더 고마워.”
손가락 끝까지 딱 맞게 들어간 반지가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눈대중으로 잰 기억밖에 없는데 어떻게 이렇게 딱 맞는 사이즈로 만들어왔는지 알 수 없었다. 조금 신기했다. 손끝으로 반지를 만지작거리다 고개를 푹 숙였다. 토마스는 그런 뉴트를 보고 있었다. 간질간질한 분위기가 계속되자 뉴트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면서 고래를 휙 들었다. 그리곤 토마스의 셔츠 깃을 잡아챘다.
민망함을 애써 숨기려 한 듯 멱살을 잡은 채 토마스의 고개를 숙이게 하고 입을 맞췄다. 졸업식의 쌉쌀함이 가득 녹아내린 입술을 혀로 핥았다. 긴 입맞춤이 끝나고 서로 마주 보고 나서야 제정신이 들었다. 주변에 사람이 얼마나 지나갔는지 알 수 없었다.
어차피 더는 안 올 캠퍼스인데 마지막으로 미친 짓 한 번 하면 어떤가 싶었다. 뉴트가 토마스를 와락 껴안았다. 그리고 토마스의 품에 얼굴을 푹 묻어버렸다. 손가락에서 반짝이는 반지가 길고 까만 가운 속으로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다.
“아까 내가 대답했었나?”
“아니.”
토마스의 귀에 뭐라고 조용히 속삭인 뉴트가 잔뜩 얼굴이 붉어진 채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 그리고 자꾸 붙어오는 토마스를 밀어냈다. 자기가 껴안았으면서 이젠 밀어낸다고 툴툴댔다. 햇살처럼 웃는 녀석이 그만 식장으로 돌아가자고 뉴트 손을 잡았다.
그리고 갑자기 사라진 졸업 당사자를 찾던 학생회원들은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뉴트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보고 다시 한 번 기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