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호는 옆에서 장작을 고르면서 무심하게 말한다. 토마스는 그런 민호를 가만히 쳐다보다 눈만 깜박인다. 이 녀석이 입을 다물면 열 방법이 없었다. 토마스는 늘 그랬던 것처럼 속으로 싸고도는 것이 많았다. 뭐든 품에 끌어안고 끙끙 앓기만 한다. 만난 지 오래되지 않은 녀석이지만 민호는 그런 버릇을 훤히 꿰고 있었다. 숨긴다고 숨겨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가야 할 곳이 있어.”
“그럼 나도 같이 가.”
“민호가 왜.”
“…그럼 널 혼자 보내? 넌 아직 한참 신입이야.”
“…….”
“너 혼자 가서 사라지는 건 더 보기 싫다.”
“…….”
“마음 정리되면 말해. 준비할 거니까.”
“…으응.”
민호의 말을 꺾을 수 없다. 토마스는 그냥 고개만 끄덕거리고 말았다. 세이프 헤이븐은 생각보다 좋은 곳이었다. 물론 살아가는 방식은 공터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물론 그리버가 있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머리가 쪼개질 것처럼 복잡한 미로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숲과 어울린 채. 자연에서 필요한 것을 얻으면서 살아간다. 높은 건물은 있지도 않다. 그저 천막을 만들고 기둥에 해먹을 걸었다.
“저 새끼는 또 왜 저러는지.”
민호의 말투는 무뚝뚝했지만, 걱정이 묻어나온다. 공터에서부터 세이프 헤이븐까지. 살아남은 몇 안 되는 동료였다. 위키드의 손아귀에서 구해낸 면역자들과 다른 사람을 빼고 나면 민호가 아는 사람은 몇 명 남지 않았다. 민호는 그런 공터 인들을 끔찍하게 여겼다.
토마스는 세이프 헤이븐으로 은 뒤로 약간 시들었다. 물론 사람이 노상 건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토마스가 간신히 버그에 올라탔을 때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지금 몸 상태가 썩 나쁘진 않았다. 총알이 지나간 자리에선 검붉은 피가 꿀렁거리며 배어 나왔다. 아무리 천으로 꾹꾹 눌러도 솟구치는 피를 똑똑히 보았다. 흐릿하게 풀어진 눈이 결국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고 스르르 감겼다.
‘토마스?’
‘…….’
‘토마스. 정신 놓으면 안 돼!’
‘…….’
축 처진 토마스를 몇 번이나 흔들었다. 하얗게 질려가는 녀석을 어떻게 데리고 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하지만 다행히 녀석은 버텨냈다. 의식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목숨을 놓진 않았다. 총알 자국 모양으로 번진 피가 채 마르기도 전에 눈을 떴다. 조금 더 쉬라는 소리를 못 들은 척 하며 끝끝내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녀석의 눈은 조금 더 단단해졌고 상처가 더덕더덕 붙었다.
‘그러다 평생 앓는다.’
‘…….’
‘고집도 저런 고집이 없다니까.’
토마스를 아는 모든 사람은 혀만 끌끌 찬다. 아득바득 일어난 녀석은 옆구리를 손으로 짚으면서도 부지런히 걸어 다닌다. 그렇게라도 정신을 차리면 나아질 것이라. 이런 식으로 애써 좋게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속으로 파인 상처가 깊었던 모양이었다.
토마스는 가끔 혼자 바다가 보이는 모래사장에 앉아 있곤 한다. 민호는 그럴 때마다 신입을 챙기러 갔다. 하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은지 언제부터는 그냥 내버려 두었다. 만족할 정도로 눈에 바다를 담으면 휘적휘적 돌아오곤 했다. 몇 명은 저러다 큰일 난다고 걱정한다. 하지만 민호는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지. 괜찮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할 일을 찾는다. 이젠 미로를 달리지도 않고, 크랭크를 피해 달아나지 않아도 된다. 할 일이 사라지면 만들어서라도 몸을 움직이는 편이었다. 그렇게 다들 세이프 헤이븐에 조금씩 적응해간다. 다만 토마스는 아직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
아무 말 하지 않고 바다만 바라본다. 바닷바람을 타고 파도가 친다. 금방이라도 모래사장을 축축하게 적시던 물이 밀려난다. 그리고 다시 차오른다. 부글부글 하얀 거품이 보일 때마다 토마스는 두 손 가득 물을 퍼 올리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도 손에 남는 것은 없었다. 짭짤한 소금기가 입술에 옮아붙기 시작하고 나서야 그런 행동을 멈추곤 했다.
“뉴트.”
이젠 부르기도 힘든 이름을 부른다. 한 글자. 다시 한 글자. 발음할 때마다 심장에 쿡쿡 박힌다. 이름을 부르는 것이 이렇게 힘든 것인 줄 처음 알았다. 뉴트를 평생 잊지 못하기에 여러 번 부르면 이름 정도 부르는 것은 쉬워질 줄 알았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
잊히는 것이 싫다.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도 무섭다. 뉴트의 편지를 닳도록 읽었다. 세상에 한 장밖에 없는 편지가 혹시 사라질까 봐 늘 목에 걸고 다닌다. 다들 토마스의 목에 걸린 것의 정체를 궁금해하지만 깊게 물어보진 않았다. 뉴트가 준 목걸이 옆엔 작은 병이 하나 더 생겼다.
“뉴트. 이건 못 버리겠더라.”
겨우 한마디가 툭 굴러 나온다. 폐를 쥐어짜야지 숨을 쉴 수 있다. 물속에 빠진 것처럼 답답해진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더니 눈물이 툭 떨어진다. 마른 모랫바닥에 떨어진 눈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손바닥으로 눈 주위를 꾹꾹 누르면서 애써 아무렇게 않은 척을 해봤다.
“이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는데…차마 버릴 수 없어서 가지고 있어.”
대답해 줄 사람은 이제 이곳에 없다. 트리사가 목숨을 걸고 만들고 뉴트를 구할 수 있었던 혈청이었다. 왜 하필. 일찍 알지 못했을까. 토마스는 내내 악몽 속에 살았다. 뉴트는 토마스가 행복해지길 빌었다. 행복해질 자격이 있다고 했지만, 폐를 내리누르는 죄책감은 쉽게 토마스를 놔주지 않았다. 토마스는 과거를 쉽게 떨치지 못한다. 그런 사람에게 죄책감은 떨어지지 않는 지독한 굴레와도 같았다.
그렇게 며칠 잠을 설치고 나서 부적처럼 목걸이를 찾았다. 웅크리고 누운 채 한 손으로 목걸이를 손에 쥔다. 손끝으로 매끈한 통을 만지작거리면 그 안에 들어있는 편지 내용이 하나하나 살아 올라온다. 뉴트의 목소리가 토마스 옆에 살고 있었다.
“…….”
이렇게 잠을 설치면서 고생하는 것을 보면 분명 한마디 잔소리가 철썩 날아와 붙는다. 신입. 뭐해. 잠 제대로 안 자두면 내일 위험하다니까? 응? 아픈 건 아니고? 공터에 처음 올라왔을 때 뉴트가 그렇게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했다. 토마스는 또 속눈썹을 축축하게 적신 채 억지로 잠을 청했다.
“편지를 읽고…돌에 새겨진 네 이름을 보고.”
“…….”
“익숙해지려고 하는데 마음처럼 잘 안 되는 거 있지.”
“…….”
“바다가 대신 대답을 해주네.”
허허 웃고 만다. 여기까지 말하는 것도 꽤 오래 걸렸다. 몸은 억지로 회복시킬 수 있지만, 정신은 아니었다. 어딘가 하나 망가진 사람처럼 터덜터덜 걸어 다니던 녀석은 이제 내내 바다만 바라본다. 뉴트가 뭐라고 했더라. 사소한 대화 하나하나까지 기억하려 애쓴다. 과거를 더듬으면서 괴로워하다가 어쩔 땐 멀쩡하게 일을 돕기도 했다. 그저 과도기일 거라 믿었고, 이곳에서 생활하려면 그래야만 했다.
민호는 토마스가 던진 말이 영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끙끙 앓으면서 해먹에 누우려는 녀석을 붙잡고 아까 한 말의 의미를 다그쳐 묻는다. 하지만 이 고집쟁이 신입은 여전히 원하는 대답을 주지 않았다. 언제 말해줄 건데. 민호는 늘 신입을 걱정한다. 토마스는 대답 대신 빙긋 웃으면서 고개만 꾸벅꾸벅 숙였다.
**
“나…가야 할 곳이 있어.”
“또 그 소리야?”
“…….”
“도대체 어디를 갈 건데.”
“최후의 도시.”
“아…그래.”
“…….”
“뭐?”
민호가 놀라서 돌아본다. 하긴 토마스의 입에서 그런 단어가 나올 줄은 아무도 몰랐을 거다. 하다못해 민호도 애써 그곳을 잊으려 했다. 오래 기억해봤자 좋을 것이 없는 장소였다. 하지만 토마스의 눈빛은 이곳에 온 이후로 가장 또렷했다. 이제야 결심이 선 모양이었다. 민호는 집을 고치는 데 사용하기 위해 옮기던 도구 상자를 든 채 토마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말해봐.”
“최후의 도시로 가려고.”
“…….”
“민호…그러니까 불편하겠지만.”
“왜 가려는 거야.”
“…….”
“확실하지 않으면 떠날 수 없어.”
“뉴트 만나러.”
“…….”
암묵적으로 서로 입에 올리지 않았던 말이었다. 둘 다 상처를 입었다. 친구를 잃은 슬픔을 가눌 길이 없어 서로 말을 하지 않았다. 각자의 방법으로 추모를 하지만 함께 모여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서로 속으로 삭일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애써왔는데 토마스는 또 한 번 이렇게 큰일을 치고 만다.
“뉴트를 만나러 가야 해.”
“…….”
“혼자 가도 괜찮아. 갔다가 바로 돌아올 거야.”
“왜 혼자 가는데?”
“그야…….”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문다. 민호는 들고 있던 상자를 지나가던 사람에게 부탁한다. 그리곤 토마스를 끌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걸어간다. 토마스는 순순히 따라오는가 싶더니 또 입을 다문 채 버티기 시작했다. 민호는 토마스가 이럴 때마다 걱정을 한다. 갤리도. 프라이도. 척도. 수많은 이름이 생각난다. 살아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이 모두 저 녀석의 머릿속을 헤집기 어렵다고 하곤 했다.
유난히 엄한 말투에 서서는 잔뜩 주눅이 들었다. 안 그래도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제대로 인지조차 못 한 신선이었다. 하지만 사마의는 그런 서서의 표정을 전혀 개의치 않은 것 같았다. 그저 꼭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사마휘 앞에까지 걸어가는 길이 천 리와도 같았다. 늘 필요할 때마다 드나들던 곳이었으나 오늘은 조금 달랐다. 향냄새가 바뀐 것 같기도 하고, 공기가 무겁게 온몸을 짓누르는 것 같기도 했다. 분명 심경에 변화가 있는 것이 확실했다. 사마의는 짧은 신음으로 긴장을 대신한다. 그렇지만 얼굴엔 그리 큰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은 맞으나, 그 원인을 알 수 없으니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사마휘님.”
“다녀왔느냐.”
“예. 이것도 알고 계셨습니까.”
“그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보는 편이 좋을 듯하여 굳이 말을 꺼내진 않았다.”
“…….”
“서운 하느냐.”
“아닙니다. 그럴 리가.”
“…….”
어쩐지 속마음을 들킨 것 같다. 사마의는 잠자코 고개를 숙인다. 아무리 마음을 다스려도 사마휘에게 숨기는 것은 무리일지도 몰랐다. 하긴 자신이 이렇게 욕심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도 아닐 것이다. 옥새가 이렇게 만들었느니, 사마휘가 모를 리 없었다.
“뒤에 있는 아이가 새로 태어난 신선인 모양이구나.”
“안녕하세요!”
목소리는 늘 밝고 건강하다. 사마의는 조용한 접견실에 울리는 목소리를 저지하려 했다. 하지만 손을 들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낸다고 해도 될 것이 아니었다. 여전히 어린 신선은 호기심에 가득 차 있었고, 사마휘는 조용히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주유 또한 서서를 어느 정도 감싸는 행태를 보이니 이 장소에서 불편한 사람은 사마의 혼자인 것 같았다.
“네가 서서냐.”
“네. 신선 서서 사마휘님께 인사드립니다.”
“귀한 아이구나.”
“…….”
서서는 아직 사마휘가 말하는 말의 무게를 모른다. 애초에 사마휘가 옥새의 관리자라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했다. 하긴 사마의나 주유, 제갈량조차 그 말에 함의 된 것을 모두 짚어내진 못했다. 그런 와중에 서서는 방금 태어났으니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사마휘는 조용히 손을 들어 어린 신선을 가까이 부른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사마의는 서서를 저지하던 손을 거둔 채 옆으로 물러섰다.
“사마휘님?”
“그래. 네가 새로 태어난 응룡의 신선이구나.”
“…전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요?”
“주군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하겠지.”
“…….”
“곧 사마의와 서서가 널 가야 할 곳으로 인도할 것이다.”
“…….”
“아직 많은 것이 낯설 테지만, 곧 익숙해질 터이니.”
“…….”
“너무 두려워하지 말아라.”
사마휘의 말은 갓 태어난 신선에겐 세례와도 같았다. 저 말을 듣는 순간 모든 불안이 일시적으로 녹아내린다. 관리자 입을 빌린 옥새의 말일까. 아니면 그저 사마휘가 어린 신선을 아껴서 한마디 덧붙이는 걸까. 아무도 그 말의 끝을 알 수 없었다.
“사마휘님.”
“무슨 일이냐.”
“신선이 태어난 것은 축하할만한 일입니다만.”
“…….”
“이젠 저 신선의 정체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
“제가 아는 한 이런 일은 선계에선 없었던 일입니다.”
“그렇지.”
“사마의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갈량과 저. 사마의님을 포함해 적은 수의 신선이 태어나고, 이후 다른 신선의 탄생이 있으리란 계시는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래. 주유. 네 말도 맞는 말이다.”
“하오면…….”
“원래 신선은 한 세력에 둘 이상 태어나지 않는다. 군주란 신선과 함께 살아가는 자. 그런 절대적인 운명이 둘일 필요는 없겠지.”
“…….”
“나도 그랬었고, 너희들의 선대의 선대까지. 옥새 아래에서 태어난 모든 신선은 그렇게 살아왔다.”
사마휘의 목소리는 전혀 떨리지 않았다. 꼭 이런 일이 있으리라 예견을 한 것 같았다. 옥새는 무엇이든 알고 있다고 하는데, 과연 이번 일도 옥새의 인도일까. 사마의는 당장 서서의 정체를 밝히고 싶었지만, 옥새 관리자 앞에서 함부로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가끔…쌍둥이 신선이 태어나기도 하지.”
“…….”
“허나 그런 일은 아주 희귀한 일이니. 옥새의 인도 아래 신선이 태어나기 시작한 날부터 손에 꼽을 정도로 존재했던 신선이다.”
“…….”
“이 아이 서서는 쌍둥이도 아니고…응룡의 신선으로 태어났으니.”
“…….”
“옥새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솔직히 나는 알 수가 없다.”
“사마휘님이 모르신다면 그 누가 안다는 말씀입니까.”
“물론 나를 통해 옥새의 모든 정보가 흐르는 것은 사실이나. 나도 모르는 옥새의 인도가 있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그러니 이번 일은 그런 종류가 아닐까 한다.”
“…….”
“서서가 정말 응룡의 신선이라면 그곳에 가보면 자연스레 의문을 해소할 수 있겠지.”
“…….”
사마휘의 말은 틀린 점이 없었다. 애초에 신선이 쌍둥이로 태어나는 것은 힘을 반으로 나누는 것과 같았다. 같은 육체를 둘로 갈라 태어나니 그저 둘이 합쳐서 한 사람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뿐이었다. 아무리 한 육체와 힘을 나눠쓴다고 하지만 육신이 둘인 이상 미미한 불협화음이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신선은 군주를 좀 더 안전히 보필하려는 방법을 택하곤 한다.
제갈량이 현재 응룡궁에 기거하고 있는데, 서서가 태어난 까닭은 무엇일까. 사마의는 무엇인가 가설을 세운 눈치였다. 서서를 보는 눈빛이 아주 잠깐 누그러진다. 서서가 예뻐서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제갈량을 대항할 패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높게 산 것 같았다.
“그러면 지금 응룡궁으로 출발해야겠군요.”
“저…이제 주군께 갈 수 있는 건가요?”
“…….”
“사마휘님. 다음에 또 뵈어요.”
“그래. 천천히 돌아가고, 나중에 다시 만나자꾸나.”
“저서 절 응룡궁으로 데려다주세요.”
“…….”
“네?”
“전 백호 궁의 신선입니다. 주유라고 부르세요. 그럼 저와 함께 응룡 궁으로 가죠. 안 그래도 응룡 궁에 궁금한 점이 많았답니다.”
“네, 주유.”
“사마의님도 함께 가실 생각이십니까?”
“먼저 출발하라. 난 사마휘님께 몇 가지 더 여쭤볼 것이 있다.”
“…….”
“곧 따라가마.”
사마의는 이번에도 옥새 관리자와 독대할 장소를 만든다. 눈에 보이는 이런 상황에 주유는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제 손을 잡은 채 한껏 기대에 부푼 서서의 눈을 보자 어쩔 수 없었다. 주유가 한 발짝 먼저 물러선다. 긴 망토가 늘어져서 땅을 가볍게 쓸고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사마의는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사마의. 무엇이 또 궁금하지?”
“서서에 관한 모든 것이 궁금합니다.”
“그래. 좋다.”
“…….”
“허나 그런 정보를 혼자서 독점하는 것은 불공평하다.”
“…….”
“사마의. 넌 똑똑한 신선이니 서서의 등장으로 이곳이 어떻게 흘러갈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과한 생각은 오히려 자신을 좀먹어 들어가는 길이라는 것을 명심하라.”
“…알겠습니다.”
“내게 궁금한 것이 있는 만큼 응룡 궁에 볼일이 있을 텐데.”
“…….”
“서둘러야 시간을 맞추겠구나.”
사마휘는 그 이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주유님. 전 궁금한 것이 많습니다.”
“…….”
“어째서 저만 이렇게 늦게 눈을 뜬 것이죠?”
“그거야. 저도 알 수 없습니다. 처음 본 일이니까요.”
“…그렇구나.”
“이야기하려면 좀 깁니다만, 아마 응룡궁에 가서 직접 듣는 편이 나을 것 같군요.”
“…….”
“형제자매가 생긴 것은 축하할만한 일이나, 지금 상황이 여의치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더 혼란스러운 것도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거의 다 와 갑니다.”
“주유 님은 응룡 궁에 자주 오시지 않습니까?”
“제가 기거할 곳은 백호 궁인데 굳이 다닐 일이 없지요.”
“그렇구나.”
서서는 호기심이 많다. 새로 태어난 신선이 으레 그러는 것처럼 끝없는 질문을 쏟아내며 정보를 채우기 시작한다. 텅 빈 육체에 신선이 가져야 할 정보를 채워 넣는 과정은 생각보다 빠르지만, 주변은 귀찮은 일이기도 했다. 주유는 내심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응룡 궁의 상태를 하나하나 말해줄 자신이 없었기에 말을 아꼈다. 군주가 없고, 신선만 남아있는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직 제대로 된 신선 술 조차 쓰지 못하는 어린 신선에겐 너무 가혹한 정보였다.
“옥새가 절 태어나게 한 이유가 있겠죠?”
“…….”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따로 떨어져서 이렇게 늦게 혼자 태어나진 않았을 거니까요.”
“그렇게 생각합니까.”
“아마도요. 하지만 선계도 인간계도. 제가 지켜야 할 응룡 궁도 재밌는 일이 많을 것 같아요.”
“…….”
“전 알고 싶은 것이 아주 많습니다.”
“좋은 현상이네요.”
“인간계에 가면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테고…….”
“아마 쉽게 가지 못 할 겁니다.”
“어째서…….”
“인간이 생에 신선과 선계가 간섭하는 것은 안 될 일이니까요.”
“힝. 그래도 궁금한데.”
입술을 비죽 내미는 것을 본다. 하지만 그것도 다 어린 날의 치기일 것이 분명했다. 까마득한 옛일이지만 주유도 그런 적이 있었다. 인간계에 호기심을 품고 몇 번이나 몰래 내려갔던 적이 있다. 그리고 사마의한테 혼이 났던가. 아니면 사마휘님 앞에 꿇어앉아 있었던가. 꼭 서서의 얼굴에서 어린 날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주유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어린 신선에게 조금 더 마음이 간다.
“이 대나무 숲을 지나가면 바로 응룡 궁이 보일 겁니다.”
“…아.”
“지금은 모양이 망가지긴 했지만, 예전엔 햇살이 들지 않을 정도로 빽빽한 숲이었답니다.”
“어째서…….”
주유는 대답하지 않는다. 제갈량이 아무리 술력이 깊다 해도 응룡 궁 너머 엄청난 규모의 숲까지 관리할 능력이 되지 않았다. 응룡 궁을 보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이었다. 그렇게 주인이 사라진 숲은 하나둘 말라갈 수밖에 없었다. 많은 양분이 있어야 하는 잎이 넓은 나무부터 죽어가기 시작한다. 막 새순이 돋던 꽃과 덤불이 죽어가고, 끝까지 버티던 대나무는 꼿꼿하게 선 채 타들어 갔다.
응룡궁의 주인은 숲 한가운데 서 있으면 수만 마리의 말이 달리는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그렇게 아끼고 사랑하던 숲은 이젠 햇살이 닿을 때마다 조각조각 부서져 내린다. 발밑에 쌓인 낙엽이 짧은 파열음을 내면서 먼지로 변했다. 주유는 제갈량이 칩거하기 전에 봤던 숲을 기억한다. 그리고 생각보다 처참한 숲의 상황에 놀랐지만, 서서의 손을 끌어당기는 것으로 그 마음을 대신했다.
“응룡의 신선이라면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주유 님은…….”
“전 백호 궁의 신선. 다른 궁에 출입하려면 그에 준하는 허락이 있어야 합니다.”
“혼자 들어가는 건가요.”
“당연한 일 아닙니까. 곧 문이 열리면 따라 들어가겠습니다.”
“하지만…….”
“태어나자마자 응룡 궁으로 가야 한다던 신선은 어디로 갔지요?”
“…….”
“그대가 평생 기거할 곳을 두려워해선 안 됩니다.”
“…….”
“옥새와 응룡의 인도가 있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네.”
사실 두 눈으로 응룡궁의 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 싶은 쪽은 주유였다. 마지막 문이 닫히기 직전 파랗게 타오르던 제갈량의 눈빛을 아직도 기억한다. 지금까지 궁이라도 무사한 것을 보아하니 안쪽에 살아있는 것은 확실한데, 도저히 불러낼 수 없으니 답답할 뿐이었다.
그렇게 따지자면 서서는 참 좋은 핑계였다. 그 고고하고 단정한 얼굴에 무슨 표정이 번질지. 상상만 해도 즐거웠다. 주인을 잃은 슬픔은 애도한다. 응룡 궁의 상황에 대해선 머리로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선계를 배척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의무를 다하지 않은 신선이란 참으로 귀찮은 존재였다.
“들어가도 되나요?”
“서서가 응룡 궁의 신선이라면 있어야 할 곳으로 인도할 겁니다.”
“아하.”
“어서.”
주유가 약간 채근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하지만 서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조심스럽게 걸어간다. 문을 단단히 닫은 채 결계로 봉해버린 궁은 조용하기만 했다. 다른 신선은 차마 다가서지도 못할 정도로 착 가라앉아있었다. 주유는 서서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정말 응룡궁의 신선일까. 이미 답은 알고 있지만, 적어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계신가요?”
“…….”
“저…….”
“…….”
“실례합니다.”
“…….”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신선이었다. 누가 자신이 가야 할 곳에 저런 식으로 말을 한단 말인가. 하지만 다가가서 가르쳐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본능이 가는 대로 따르길 빈다. 서서는 약간 망설이다 문에 손을 댄다. 그러더니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인다.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이 기울어진 고개를 따라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대로 굳은 채 망설인다. 문을 잡은 채 밀어야 하는지. 아니면 당겨야 하는지. 이런 간단한 일조차 확실하게 알지 못한 채 눈만 깜박인다.
“저…이걸 어떻게.”
“그대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
“어서요.”
서서는 뭔가 결심한 표정으로 문을 밀었다. 그 순간 평생 열리지 않을 것 같았단 응룡 궁의 문이 열린다. 그 순간 단단한 결계가 흔들리면서 짐승 우는 소리를 냈다. 용이 우는 것 같기도 하고, 다 죽어있는 대나무가 부딪히면서 뼈 소리를 내는 것 같기도 했다. 주유는 그런 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신선이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찾아가는 과정은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다. 그렇게 갈 곳을 찾지 못하면 그대로 힘이 다해 사라진다. 신선이란 늘 그런 존재였다.
“저…실례합니다.”
“…….”
“아무도…안 계세요?”
“…….”
문을 열고 들어갔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들은 것과는 좀 다른 기분에 서서는 손잡이만 꾹 쥐었다 놓는다. 아무도 없이 조용한 공간은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누구라도 자신의 목소리에 반응을 보이길 원했지만, 오히려 더 조용히 가라앉는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뒤로 물러설 순 없었다. 서서는 눈을 깜박이면서 간신히 문을 통과한다. 응룡 궁이라고 하지만,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신선은 군주를 한 번에 알아보는 법인데, 이곳엔 서서가 모실 주군이 없다. 그러나 응룡의 기운은 아직도 궁 안에 머물고 있었다. 태어나자마자 많은 일을 겪어 혼란해진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켜서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는다. 그저 앞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곳이 얼마나 큰 진 모르지만 걷다보면 누군가 한명쯤은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정말 아무도 안계세요?”
“…….”
“밖에서 다른 신선들이 기다리는데요.”
“…….”
“저…그러니까.”
“…….”
“여기가…응룡 궁은 맞는 건가요?”
돌아오는 대답이 없지만, 서서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 궁이 야속하기만 했다. 분명 결계를 통과할 수 있다면 자신이 가야할 곳이 맞을 거라는 주유의 말을 들었다. 하지만 그 안에 아무도 남아있지 않은 채 텅 비어있으리란 사실은 듣지 못했다. 다들 어디로 간 것일까. 권속은 물론이고, 주군조차 남아있지 않은 궁은 너무 넓기만 했다. 아니면 더 안쪽에 모여 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주군?”
“…예?”
“주군?”
“아니…그러니까.”
“…….”
저 멀리서 낯선 목소리가 들린다. 나이가 그리 많이 않은 목소리에 서서는 약간 안심이 되었다. 아마 자신이 모실 주군은 젊은 사람인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 조금 이상했다. 서서는 그대로 멈춰 선 채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잘못한 것 하나 없는데 뭔가 크게 잘못한 기분이 들었다. 절로 고개를 숙인다. 입술만 달싹거리며 말하는 것조차 포기한 채 낯선 목소리는 들을 뿐이었다.
“넌…….”
“…….”
“넌 누구냐.”
“…….”
“어떻게 여기에 들어왔지?”
“그야…전.”
“어떻게 들어왔냐고 물었다.”
“전…응룡의 신선이니까요!”
“…….”
순간 일방적으로 흐르던 대화가 뚝 끊긴다. 급하게 걷던 발소리도 멈췄다. 그와 동시에 신발 뒤축에 작은 돌이 밟혀서 낯선 소리가 들린다. 아무 말도 들리지 않지만 뾰족한 시선에 금방이라도 찔릴 것 같았다. 서서는 꼭 자신이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온 것처럼 마음이 불편했다.
“그러니까…….”
“신선?”
“…….”
“어떻게 네가 응룡의 신선일 수 있지.”
“그거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렇게 태어나서 대답을 했을 뿐인데, 눈앞의 사람은 길을 막은 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서서는 할 말이 없다. 그래서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만 깜박거린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남자는 응룡의 주인은 아닌 듯했다.
“내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
“내 결계를 뚫고 들어왔으니, 손톱만큼이라도 관련이 된 것은 확실하군요. 허나 그 일이 어떻게 진행된 일인지는 알아봐야겠습니다.”
“…….”
“전…정말.”
서릿발이 선 것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한순간 무너져 내린다. 서서가 살짝 눈을 들었을 때, 드디어 앞에 서 있는 남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표정을 애써 정리한다. 하지만 손끝이 떨리는 것까진 막을 수 없었다. 애써 불안함을 기다림으로 바꾸면서 살고 있었다.
결계가 흔들리는 것을 알아챘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일이 한두 번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저 권속이 잠시 들리려 했을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라면 주유라도 찾아왔나 싶었다. 그래서 애써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점점 가까워지는 기운에 작은 희망이 생겼다. 그 희망은 부질없는 것으로 변했고 낯선 사람이 찾아왔다.
“이번에야말로 주군이 돌아오신 줄 알았습니다.”
“어…미안한데. 난 잘…….”
“못 알아듣는 이야기일 테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답니다.”
“…….”
“혼자 온 것은 아닐 테고.”
“그…….”
“달갑지 않은 손님이 두 분이나 찾아오셨군요.”
“…….”
“이것도 부디 옥새의 의지이기를.”
제갈량은 한숨을 푹 쉰다. 그 순간 궁 전체에 익숙한 목소리가 울린다. 신선 술을 고작 이런 것에 이용하다니. 대놓고 비웃던 제갈량은 가만히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제갈량!”
“…….”
“봉황 궁 신선. 사마의다. 응룡궁의 결계를 풀고 문을 열어라.”
“…….”
“제갈량!”
“귀찮은 일이…….”
“하지만 내가 한…건.”
“알고 있습니다.”
“…….”
“여기 잠시 계시지요.”
“나…혼자?”
“응룡의 신선이 평생 지내야 할 공간입니다.”
“하지만…아무도 없고.”
“…….”
“그게…….”
“좋습니다. 짧은 시간이면 가능할 테니.”
“응!”
“먼저 가겠습니다.”
“…….”
하긴 확실하지도 않은 신선을 홀로 두고 궁 밖으로 나가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데리고 가고 싶지도 않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서서는 혹시나 제갈량이 말을 번복할까 싶어 냉큼 뒤에 따라붙었다. 제갈량은 굉장히 익숙한 표정으로 길을 걷는다. 하지만 오랫동안 이곳까지 발걸음을 한 적은 거의 없었다. 괜히 멀리까지 나갔다가 주군이 돌아오지 않으면 실망하기만 했다. 그렇게 몇 년 동안 기다리다 서서히 발걸음을 끊고 가장 중요한 건물 주변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
서서는 여전히 제갈량이 낯설었다. 따뜻하게 말을 해주는 것도 아니고, 무턱대고 따라오라고 명령 아닌 명령을 건넸을 뿐이었다. 쌀쌀한 말투가 약간 슬프긴 했다. 하지만 저쪽이 말하는 대로 혼자서 이곳에 남아있겠다고 말할 수 없었다. 궁 안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모든 것이 텅 비어버린 곳에서 안전하게 붙잡을만한 손이라곤 하나밖에 없었다.
‘…무서워.’
겨우 속으로 한마디를 툭 털어놓는다. 자박자박. 걷는 신발 소리가 엇박자로 들린다. 하지만 앞서가는 이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희미한 바람이 불면 길게 내려앉은 옷소매가 흩날린다. 서서는 그 옷자락 끝만 보면서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이렇게 멀리 걸어들어왔던가. 이런 의문이 들 무렵 앞서가던 사람이 우뚝 멈춰섰다. 물론 전혀 뒤따라오는 서서를 배려하지 않았기에 그대로 코를 박을 뻔했다.
“봉황궁의 신선께서 이 제갈량은 왜 찾으십니까.”
“…….”
“제가 여기서 죽든 말든 이젠 상관하지 않으신다는 소리가 얼마나 시끄럽던지. 이곳으로 흐르는 바람을 타고 몇 번이나 들었는데 말입니다.”
“…….”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어서 그 어려운 걸음을 여기까지 하셨습니까.”
“…….”
“예?”
다분히 짜증이 섞인 목소리였다. 목소리는 가라앉아있었지만, 말끝은 배배 꼬여있었다. 커다랗고 무거운 문을 사이에 둔 채 두 궁의 신선은 팽팽히 대립하고 있었다. 물론 제갈량은 응룡궁의 결계를 풀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사마의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피식 웃고 만다.
“예? 왜 대답을 하시지 않죠?”
“이 문을 열어라.”
“싫습니다.”
“…….”
“제가 명령할 수 있는 분은 제 주군뿐입니다. 사마의님.”
“…….”
“따지자면 저와 사마의님은 같은 대에 태어난 동문이 아닌가요. 그렇다면 같은 급의 명령은 듣지 않겠습니다.”
“네 아집 때문에 세상이 어떻게 변하는지 알고 있느냐.”
“…어쩌라고요.”
“…….”
제갈량의 목소리가 삽시간에 서늘해진다. 아무리 세상 방자한 신선이라 해도 대놓고 사마의에게 대들진 않는다. 게다가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사마의가 응룡궁이 해야 할 일의 대리를 맡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을 텐데, 굳이 한마디 입 밖으로 꺼내서 속을 긁어댔다. 하긴 제갈량이 온갖 말을 들으면서 참기도 많이 참았다. 평소 같았으면 당장 나가서 사람 속을 왕창 뒤집어놨을 위인이었다.
“사마휘님께 먼저 이쪽을 없애야 한다고 하신 것 아닙니까. 그런 곳에서 뭘 더 어떻게 도와드린다는 말입니까.”
“내가 그랬다?”
“제가 비록 궁 안에 있으나…주변에서 들리는 소리가 많더군요.”
“…….”
“안 그러신가요.”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하는 쪽에게 궁을 개방하라니, 스스로 좀 웃긴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곳은 돌아올 주군을 위한 공간입니다.”
“…….”
“허나 지금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는 것도 맞습니다. 이번 일은 제가 양보하도록 하죠.”
상당히 비꼬는 기분이 들었지만, 사마의는 꾹 눌러 참았다. 주군이 없어진 뒤로 미쳤다는 소문이 파다했는데 입이 살아있는 것을 보니 아직 살만한 모양이었다. 절대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문이 열린다. 주유는 절로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딱 한사람 빠져나올 정도로 열린 문 사이로 오랫동안 못 봤던 얼굴이 보였다. 자연스럽게 문밖을 빠져나온다. 그리고 문이 닫히기 전 서서도 냉큼 뒤를 따랐다.
“제가 직접 나가면 되는 것을.”
“궁이 무너진다고 미쳐 날뛰던 것이 어제와 같은데, 제법 침착하구나.”
“전 선계 최고니까요. 이 정도는 제가 없어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
“사마휘님만 만나고 돌아올 것입니다.”
“저…나는.”
“같이 가야죠.”
“응. 알았어.”
이미 사마의와 주유는 딱히 눈에도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묵직한 소리를 내면 닫힌 대문 위로 옅은 결계가 보인다. 일렁이는 녹색 문자가 보이다가 사라진다. 혹여 누군가 들어갈까 싶은지 몇 번이나 결계를 점검한다. 그리곤 사마의 곁을 지나치려 했다. 하지만 사마의의 손이 조금 더 빨랐다. 가던 길을 가로막힌 제갈량은 대놓고 불쾌한 표정을 짓는다.
“비켜주시죠.”
“자꾸 이런 식으로 오만방자하게 행동하면 더는 참지 않겠다.”
“같은 급 신선끼리 할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
“절 구속하시려면 사마휘님의 직언이 필요할 겁니다.”
“…….”
아무리 봐도 사마의의 대답을 들을 생각은 아닌 것 같았다. 제갈량은 피식 웃으면서 동기들을 지나쳐간다. 서서는 조금 떨어져서 이리저리 눈치를 보다 제갈량 뒤를 따랐다. 주유는 한숨을 쉬면서 이마를 짚었고, 사마의는 당장에라도 뭔가 부술 수 있을 것 같은 형형한 눈빛을 한 채 제갈량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