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뉴트/톰늍] MAZE IN THE TRAP 008
+) NOTICE
둘이 멀쩡하게 연애하는게 보고싶어서 시작한 평범한 세계에 대학교 AU 입니다.
플레어는 발병하지 않았고, 다들 알아서 잘 살고 있는 세계.
적당한 망상과 설정 붕괴가 언제나 함께 합니다 ㅇㅅㅇ)9
톰늍 대학교 편까지 연재하고 대학교 졸업 이후 버전을 따로 추가해 회지로 만들 예정입니다.
연재한 분량 자체를 지우진 않습니다.
write. 환월
8.
가슴에서 시작된 열은 온몸을 타고 올라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숨을 쉴 수 없기도 하고, 한 번은 머리가 아파서 일어날 수 없었다. 호되게 앓은 병이 점점 식고 이내 단단하게 굳어져야 나을 텐데, 토마스는 아직도 활활 타는 열병을 안은 채 끙끙거리고 있었다.
“…뉴트.”
이름을 말하면 숨이 턱 막혀왔다. 혀끝에 걸리는 발음 하나하나마다 눈물이 나올 정도로 좋았다.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한번 넓어진 세계를 의식하면 더 외로워졌다. 확장된 까만 공간에 토마스 혼자 서 있는 것 같았다. 희미하게 보이는 빛을 따라 내내 걸어도 도착할 수 없어서 얼마나 먼 곳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넓은 방에 한가득 사람들이 모여 있던 그 날이 자꾸 기억이 났다.
“…토마스.”
뉴트도 몇 번이나 속으로 토마스의 이름을 불렀다. 스티븐. 토마스. 스티븐 토마스. 이 감정이 거짓이 아니라면 좋을 텐데, 뉴트는 아직도 확신하지 못했다. 내내 전공 과제를 하다온 터라 눈은 뻑뻑하고 온몸은 뻐근했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혹시나 아주 조금이라도 동정이 섞여 들어가기라도 하면 차라리 모르는 척하는 것이 나을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런 아이일수록 자신을 동정하고 안쓰럽게 바라보는 시선을 귀신같이 알아채곤 했다. 그렇게 상처가 되면 다시는 쳐다볼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누가 알려줬으면 좋겠다. 가슴이 답답해.”
뉴트는 단단하게 식은 가슴에 뭉클 올라오는 열기를 느끼며 표정을 찡그렸다. 몇 번이나 타올랐다 식은 가슴이 쿵쿵 뛰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둔통은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적어도 확신이 있으면 한마디라도 할 텐데, 그것조차 못하는 자신이 웃겨서 미칠 것 같았다. 뉴트. 너 이런 새끼 아니었잖아. 자학하는 것 마냥 한마디를 툭 던졌다. 이 층에서 민호가 돌아눕는 소리가 들렸다. 민호가 한 말이 내내 떠나지 않은 것도 이 불면증에 한몫했다. 입술을 가늘게 떨며 한숨을 뱉어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가슴이 답답해.”
토마스도 뉴트와 같았다.
✗ ✓ ✗
물론 여기서 토마스가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은 것이 몇 가지 있었다. 그중 가장 큰 문제는 민호랑 뉴트의 관계였다. 딱히 물어볼 사람도 그럴 용기도 없었던 터라 토마스는 그저 머릿속에 궁금함을 가득 담은 채 입을 꾹 다물고 주변을 관찰하기만 했다.
둘은 어렸을 때부터 같이 뒹굴고 자란 덕분에 무슨 일을 해도 가깝게 챙겨주는 것이 일상이 된 터라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둘은 항상 같이 다닌다고 웃었다. 뉴트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집에 틀어박혔을 때도 직접 쳐들어가서 질질 끌어내온 것도 민호였다. 이거 놓으라고 난리를 치는 녀석 멱살을 잡고 한마디 했었다. 신기하게도 꼭 일주일이 지나자 뉴트가 제 발로 집 밖으로 나왔다. 다들 뉴트가 수업을 빼먹기라도 하면 일차론 민호에게, 두번째로는 알비에게 연락을 하곤 했다.
“…….”
그러니까 여기가 문제였다. 이미 일 년도 넘게 둘이 투닥거리는 것을 봐온 사람들은 저것들 또 저런다면서 웃어넘겼지만, 토마스가 보기엔 아니었다. 아무리 오래된 친구해도 너무 친밀했다.
헛다리를 짚어도 단단히 짚은 바람에 굳이 힘들어하지 않아도 될 짐을 추가로 얹고 끙끙 앓았다. 그렇다고 직접 물어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실험 할 때처럼 단 한 번이라도 어긋날 수 있는 확률이 있는 방법은 사용하는 것을 지양했다. 언제나 완벽한 것이 좋았다.
토마스의 오해가 무럭무럭 깊어갈 무렵 뉴트도 비슷한 걱정을 잔뜩 껴안고 있었다. 족히 이주도 넘게 혼자서 고민을 하다 간신히 뜻을 정리한 참이었다. 하지만 뉴트가 결정을 내리고 나자 아이러니하게도 토마스가 다가오지 않았다.
“…지금 나랑 밀당 하자는 거야?”
“뭐?”
“아니야.”
죄 없는 러그를 발로 퍽퍽 찼다. 이쯤 되고 나자 뉴트도 마냥 마음을 놓고 있을 수도 없었다. 눈치가 없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이쯤 되니 토마스가 사실은 그다지 관심이 없나 싶었다.
‘지금 내가 착각을 해도 단단히 했다는 소리야?’
자다가도 저 생각이 나면 눈이 번쩍 뜨였다. 서로 허공에 대고 의미 없는 고민을 계속하는 동안 주위에선 그런 둘을 보며 마냥 즐거워했다. 직접 말만 안 했을 뿐이지 사실 둘이 사귀는 거 맞지 않냐 는 소리가 나왔다. 학생회에서 시작된 소문은 반쯤 공인된 것 마냥 조용히 물 밑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어쩌다 뉴트랑 토마스가 같은 공간에 있기만 해도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시끄러워졌다.
물론 토마스는 주변 소리를 들은 여유가 없었고, 뉴트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인상을 찡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토마스는 여전히 주변을 뱅글뱅글 맴돌고 있었다. 나름대로 생각한 계획은 있었지만, 너무 조심스러워서 도무지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뉴트는 슬슬 짜증이 폭발했지만,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 없었다. 자기가 혹시 별거 아닌 일이었는데 너무 확대 해석한 것이 역시 맞는 것 같았다. 자기 자신이 한심해서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그런 둘을 보다 못한 민호가 나섰다. 언제나 금방이라도 앓아누울 것처럼 힘이 하나도 없는 신입생도 문제였지만, 드디어 절친한 친구까지 얼굴에 그늘이 깔리기 시작했다. 몇 명 되지도 않는 학생회에서 둘이나 시들시들 힘이 없이 걸어 다니니 안 보고 싶어도 보이는 형국이었다. 싫다고 버둥대는 녀석을 힘을 누른 채 토마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학생회 실에서 좀 보자.”
“걔는 왜!”
“뉴트 너도 어디 가지 말고 여기 좀 앉아있어.”
“…….”
어지간한 일에는 나서지 않는 민호가 상담사를 자처한 것은 더는 둘의 삽질을 보고 있기 힘들다는 이유였다.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결론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면서 동의했고, 조용히 학생회 실을 비워 주었다. 민호한테 팔을 잡힌 뉴트는 잔뜩 짜증 난 표정으로 소파에 파묻혀 있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뭐가?”
“그거 아니거든.”
“와보면 알겠지.”
토마스까지 도착하고 곧 손짓을 따라 걸어와서 민호의 오른쪽에 앉았다. 왼쪽에 앉아있던 뉴트가 허리를 바로 세우면서 일어나는 듯하다 나른하게 앞으로 몸을 반쯤 숙였다.
“이제 두 사람 다 왔으니까. 무슨 일인지 좀 물어보자.”
“도대체 뭘!”
“둘이 뭐가 문제야?”
“…….”
“문제…라뇨?”
민호가 한숨을 쉬면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놈들은 알면서 모르는 첫 하는 것인지 진짜 모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굳이 그런 간지러운 말을 해야 한다는 자체가 조금 부끄러웠다. 헛기침을 두 번 정도 한 민호가 결심한 듯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너희 사이에 문제가 생긴 건 알겠어.”
“뭐?”
“사람이 사귀고 같이 지내다 보면 좀 서운한 일도 있고 그럴 수 있어. 난 이해해. 하지만 이렇게 둘이 대놓고 냉기 뿜고 다니면 주변 사람들이 불편해하잖아.”
“…….”
“무슨 소리야.”
“아 진짜 내 입으로 말해야겠어? 둘이 사귀는 사이면 좀 알아서 풀든가 하라고!”
“???”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뉴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토마스는 턱을 괴고 있던 손이 미끄러졌다. 두 사람이 동시에 무슨 개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자신의 소꿉친구를 쳐다봤다. 민호는 팔짱을 낀 채 전혀 지지 않고 둘을 노려보았다. 그 눈빛이 꼭 맹수 같아서 둘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뉴트보다 한 박자 늦게 정보가 처리된 토마스의 뇌가 반응하기 시작하자 곧바로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아니…난.”
“난 뭐?”
“난 민호랑 뉴트가…그러니까 둘이 잘 지내니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난 너희 둘이…….”
차마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고 토마스가 앞으로 푹 쓰러졌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웅크리고 있다 조심스럽게 한쪽 눈만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아마 올해 들은 소리 중 가장 헛소리를 뽑으라면 바로 이 한마디일 거라 생각했다.
“내가?”
“내가 이놈이랑?”
서로 삿대질을 하던 민호와 뉴트의 손이 공중에 뚝 멈춘 채 움직이지 않았다. 이 혼돈의 상태를 정리하는 덴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정적. 정적. 정적. 그리고 정리가 끝남과 동시에 두 사람의 비명과 같은 목소리가 학생회 실에 쩌렁쩌렁 울렸다.
먼저 쓰러진 쪽은 뉴트였다.
그대로 주저앉은 뉴트는 얼굴을 가렸다, 다시 머리를 헝클어뜨리기를 반복했다. 혼란스러워서 견딜 수 없었다. 여전히 토마스는 얼굴도 못 들고 웅크리고 있었고, 민호는 민호였다. 솔직히 말해서 뉴트한테 고백하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마음 정리를 끝내고 나선 그나마 허울뿐이던 애인도 정리하고, 고백하는 녀석들한테도 벽을 친 채 살고 있었는데 결과가 이 모양이었다. 그동안 토마스가 주위를 맴돌기만 하고 접근하지 않았던 것도 이해가 갔다. 설마설마 했지만 토마스가 오해한 이유가 민호와 자신 때문일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 눈치 없는…….’
뉴트는 몇 번이나 속으로 욕을 했다. 아무래도 잘못 짚은 거 같아 밤새 고민하고 이불을 차던 것도 모두 쓸모없는 일이었다. 차마 자존심 때문에 주변에 한 번 물어볼 생각도 못했다. 이런 걸 나비효과라고 했던가. 아니면 머피의 법칙이라고 하던가. 물론 둘 다 그다지 상관이 없는 것 같았지만, 그만큼 뉴트의 머릿속은 잔뜩 엉킨 채 좀처럼 풀어지지 않았다.
“…잠깐만.”
사실 토마스의 마음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을 알아차리자마자 뉴트는 자기 앞에 보이는 민호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마구 흔들었다. 팔힘이 제법 센 탓에 흔들흔들 거리던 민호가 뉴트의 팔목을 마주 잡았다. 민호가 힘을 주기 시작하자 더 버틸 수 없었다. 하지만 끝까지 멱살을 잡고 놓지 않았다.
“아, 왜 이러세요. 놓고 이야기하시죠.”
“이 새끼야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도대체 뭐가?”
“나 아직 제대로 된 고백도 못 받았는데 이렇게 터뜨리면 어쩌자는 거야. 이 눈치 없는 새끼야!!”
“…….”
“이 똘추 새끼는 나한테 몰래 말이라도 하지 이렇게 대놓고 떠벌리는 건 어디서 배워왔어. 어? 내가 지금 이렇게 법정에서 증언하는 것처럼 고백을 받아야겠어?”
“…….”
토마스는 고백이란 글자를 듣자마자 짧은 신음을 내뱉으며 다시 소파에 푹 쓰러졌다. 사실 생각해뒀던 고백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언젠가 뉴트를 몰래 불러내서 진지하게 할 생각이었는데, 완전히 망한 것은 확실했다. 분명 민호는 주변 사람들을 내보낼 때 한마디라도 덧붙인 말이 있었을 테고, 자신은 스스로 여기로 걸어 들어왔다.
이것이 모든 루머를 인정하는 뒷받침이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머릿속으로 짜던 계획을 시작도 하기 전에 커밍아웃을 당해버렸다. 그것도 당사자 앞에서. 토마스는 얼굴이 금방이라도 익어 터질 것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야.”
“으…응?”
“너 솔직히 지금까지 간보고 그런 건 아니지?”
“어?”
“빨리 말해봐. 내가 지금 너 때문에 주변 정리도 다 하고 인연 정리도 다 끝내 놨는데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이 똘추 자식아.”
“…….”
잔뜩 당황한 토마스의 입에선 제대로 된 말도 나오지 않았다. 토마토와 같이 익은 얼굴로 허둥대는 것을 바라본 뉴트가 크게 웃으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간보는 거냐며 말한 것이 미안할 정도였다.
“난…정말 너랑 민호가…….”
“아 바보 자식.”
“내 눈엔 너무 친했단 말이야.”
간신히 제대로 된 인간의 언어를 뱉어낸 토마스는 얼굴도 들지 못했다. 웃음이 터진 민호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끅끅 넘어갔다.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표정이 점점 안 좋아지던 뉴트도 결국 토마스의 얼굴을 보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얘 진짜 울겠네. ”
“…….”
“아, 미치겠다. 진짜. 그렇지 않아?”
“…….”
“설마 미치겠다는 말을 사전 그대로 해석한 건 아니지?”
“…….”
“진짜 이놈을 어째야 하나.”
이런 볼거리는 흔한 것이 아니었다. 결과론으로 생각하자면 민호가 사람들을 다 내보내지 않았으면 아마 두고두고 놀림거리에 술안주로 오르내렸을 것이 분명했다.
토마스는 조금 억울했다. 분명 잘 숨긴다고 생각했는데, 모두 눈치를 채고 있었다. 그러면서 아무도 한마디 해주지 않았다. 게다가 생각한 고백은 아니었지만, 고백 비슷한 것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아니 오히려 고해성사라고 하는 쪽이 맞는 말일 수도 있었다.
뉴트는 이제 숨을 쉬기도 어려울 정도로 웃으면서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토마스는 애써 진정하려 했지만,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은 점점 뜨거워지기만 했다. 울고 싶었다. 한참 웃던 뉴트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일어섰다. 그러더니 저벅저벅 걸어가 토마스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서운 것이라도 본 것처럼 토마스가 펄쩍 뛰어올랐다.
“!!!”
“뭘 그렇게 놀라.”
아니…그게.
“나 사실대로 말하면, 너 알고 있었어.”
“응? 날 어떻게 알아?”
뉴트는 잠시 입술을 잘근거리며 말을 골랐다. 뭐라고 말해야 토마스가 납득 할 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계속 말하지 않는 것은 토마스의 마음을 기만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게다가 이런 찜찜함을 가진 채 제대로 된 관계를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넌 모르겠지.”
“무슨…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뉴트.”
와중에 민호가 툭 껴들었다.
“두 분이 남은 말씀 열심히 하시고, 난 이만 운동 때문에.”
“야! 민호!”
“오늘 내가 아무도 여기 오지 말라고 했으니까 둘이서 할 말 다하고 가. 그리고 문 잘 닫고.”
“꺼져!”
문 안쪽으로 얼굴을 내밀던 민호가 내던져진 쿠션을 피해 날쌔게 문을 닫았다. 문에 맞고 떨어진 쿠션을 보며 씩씩거리던 뉴트가 한숨을 푹 쉬곤 다시 토마스를 바라보았다. 파드득 놀라면서 허리를 바로 세우는 모습을 보다 보니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뉴트는 자기가 미쳤다고 확신했다. 아니라면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웃음이 나올 순 없었다. 물론 토마스도 비슷한 상태인 것 같았다.
“저놈은 내가 나중에 개인적으로 대화를 좀 나누기로 하고. 그래서 하던 말이나 계속 하자. 그러니까…내가 어디까지 했지?”
“날 안다고?”
“그래 널 알아. 어렸을 적 TV에서 봤어.”
“…사실 그거 별로 안 좋아했어. 너무 귀찮고 힘들어서.”
“그런 거 같았어.”
“날 많이 봤어?”
아니 한 번? 나 거짓말 안 하는 거 알지?
“응.”
또 습관처럼 손바닥을 마주 비비면서 말이 없어진 토마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인데 좀 미치면 어떠냐 싶었다. 길쭉하고 날렵하게 빠진 눈매 끝이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속눈썹이 붉은 그림자를 퐁퐁 만들어냈다. 이 관계에 대해 확신은 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선택에 후회는 하지 않기로 했다.
“널 처음 봤을 때부터 익숙했었어.”
“…….”
“그런데 한참 기억이 나지 않아서 힘들었고…….”
“뉴트.”
“응?”
“넌 내가 처음으로 만난 세계의 확장자와 마찬가지야.”
“…….”
“연구소가 전부인 공간에 네가 들어와 줬어. 그래서 항상 꿈을 꾸면 저 멀리서 빛이 보여서 뛰어가곤 했었어.”
“…….”
“연구소에선 언제나 같은 꿈을 꾸니까 언젠가는 닿지 않을까 생각하고 계속 뛰기로 했으니까.”
“꿈도 그 정도면 병 인 거 아냐?”
“그런데 그 빛이 너였어.”
토마스는 가끔 이렇게 뜬금없는 화법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곤 했다. 몇 번이나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정말?”
“응.”
간질간질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 같았는데, 역시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새 정신이 들었는지 또 고개를 처박았다. 뉴트는 과연 이렇게 깊은 마음을 자신이 받아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잠시 이성을 내려놓기로 했다.
지금까지 최악의 상황만을 생각하며 걱정했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오히려 한번 말을 하고 나니 후련해졌다. 적어도 토마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난 뉴트가 좋아.”
“…….”
“이거 정말 처음 말해보는 거야.”
“이건 기쁘네.”
“연구소에선 이런 감정을 가르쳐 주지 않았으니까. 거긴 복잡한 식이나 도표로 이해되는 걸 좋아했어. 그리고 친구도 없었고.”
“이래서 애들은 어렸을 때 놀아야 한다니까.”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어.”
말을 돌려서 하는 재주가 없어서 오히려 더 자극적이었다. 한 마디 한 마디 진심을 담아 하는 말이 뉴트의 심장에 툭툭 쌓였다. 사람의 말이 이렇게 무거운 줄 처음 알았다. 몇 달 동안 숨겨왔던 말을 하는 동안 토마스는 울기 직전 표정을 하고 있었다.
“똘추야 울지마.”
“안 울어.”
“그런데 나 그렇게 좋은 사람 아닐 텐데. 적당히 욕심 있고 이기적이고, 세상 사는 것도 별로 관심 없을 때가 잦아.”
“괜찮아!”
“뭐?”
“그런 건 내가 도와주면 되니까. 난 뉴트만 옆에 있으면 돼.”
“…….”
진심이었다.
몇 번이나 토마스의 마음을 떠보려고 했던 것을 살짝 후회했다. 애써 자기를 방어할 구실을 찾고 있었다. 솔직하게 인정했다. 눈을 감았다가 뜨니 어깨에 토마스 손이 닿아있었다. 물론 어깨에 닿았다 떨어지는 감촉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울먹거리며 뉴트를 한 품에 와락 껴안았다.
“고마워. 뉴트.”
“…….”
“난…….”
계속 울먹거리는 목소리를 듣던 뉴트가 토마스의 볼을 두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조금 끌어당겼다. 말 잘 듣는 강아지 마냥 순순히 끌려 내려온 시선이 깜박거렸다. 뉴트의 눈이 샐쭉하게 가늘어졌다. 자연스럽게 입술과 입술이 겹쳤다. 토마스의 목 뒤로 두른 팔이 교차한 채 가늘게 떨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뉴트가 입술을 떼자 토마스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뉴트가 씩 웃을 때, 넓은 유리창에선 한 줌 햇살이 와르르 떨어졌다. 세상이 다섯 번 바뀌고 낮과 밤이 제멋대로 섞인 기분이었다. 이 세상에 없는 열 네 번째 달력을 넘겨버린 기분도 들었다. 간질간질하고 몽글몽글한 느낌이 방 안 가득 채워졌다가 훅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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