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뉴트/톰늍] MAZE IN THE TRAP 010
+) NOTICE
둘이 멀쩡하게 연애하는게 보고싶어서 시작한 평범한 세계에 대학교 AU 입니다.
플레어는 발병하지 않았고, 다들 알아서 잘 살고 있는 세계.
적당한 망상과 설정 붕괴가 언제나 함께 합니다 ㅇㅅㅇ)9
아니..졸업 언제 하지..........
톰늍 대학교 편까지 연재하고 대학교 졸업 이후 버전을 따로 추가해 회지로 만들 예정입니다.
연재한 분량 자체를 지우진 않습니다.
write. 환월
10.
그렇게 토마스의 집에서 삼일을 보내고 둘은 훌쩍 여행을 갔다. 알비에게 전화해서 며칠 동안 집을 비울 테니 학생회 관련 연락은 되도록 하지 말라고 웃던 뉴트가 통화가 끊어지자마자 휴대폰을 꺼버렸다. 사실 방학 때 학교 일을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 그리 많진 않았지만, 세상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래도 좀 확실한 게 좋겠지?”
“이래도 괜찮아?”
“이 정도 각오도 안 하고 며칠 동안 여행을 가자고 한 거야? 괜찮아. 어차피 별로 큰일도 없을 테니까.”
“알비가 찾으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지 뭐. 늦겠다. 안 갈 거야?”
“…….”
또 걱정이 태산이었다.
“너 솔직히 말해봐. 이렇게 놀러 간 적 없지.”
“응?”
“짜준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면 편한데, 내가 한 것처럼 이렇게 눈앞에서 돌발 상황이 생기면 힘들고,”
“…….”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제대로 짚은 모양이었다. 아, 토마스 씨. 앞뒤 생각 못 하고 꽉 막힌 것 같은 전형적인 연구원의 생각에 뉴트는 잠시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다. 어쩜 이렇게 한 가지 밖에 생각을 못하지. 결국 뉴트가 졌다. 기세등등하게 꺼둔 핸드폰을 다시 켜서 보여주고 혹시 전화가 오면 피하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하고 나서야 겨우 집을 나서서 역으로 갈 수 있었다.
학교에서 역까지 거리는 두 블록 정도였다. 많이 가져갈 짐이 있는 것도 아니니 가볍게 나서긴 했지만, 날씨는 꽤 추웠다. 후우. 길게 숨을 내쉬면 하얗게 얼어붙었다. 그러다 바삭바삭 부서져 내렸다. 볼을 스치는 바람은 얼음만큼 차가웠다. 아는 사이인 듯 아닌 듯 미묘한 거리감을 둔 채 걸어가는 둘은 잠깐씩 눈을 마주치면 가볍게 웃는 것이 전부였다.
둘은 이 정도로 만족했다. 가까운 듯 가깝지 않은 거리지만, 손을 뻗으면 손가락을 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외투 아래에서 꼼질거리는 손가락을 휙 잡아챈 뉴트가 웃자, 토마스도 따라서 웃었다. 물론 손잡고 걸어 다니기엔 조금 부끄러웠기에 곧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서로 맞닿았던 손가락이 따끈하게 달아오른 것 같았다.
목적지까지 가는 길은 꽤 멀었다. 티켓 발매기에서 두 사람분의 표를 끊던 뉴트가 또 주변을 구경하는데 정신이 팔린 커다란 강아지의 뒷목을 덥석 잡았다. 안 그래도 복잡한 곳인데, 또 뭐가 그렇게 신기한지 연신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토마스가 입고 있는 외투를 잡고 질질 끌고 온 뉴트가 티켓을 흔들면서 또 한 번 잔소리했다. 다시 말하지만 뉴트는 어린애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자기 몫은 할 줄 아는 녀석이라 생각했는데, 어째 손이 더 많이 가는 기분이었다.
“내가 뭐라고 했지?”
“응?”
“아니다. 또 이런 거 처음 타본다고 할 거 아냐.”
“응.”
“그래. 뭐 신기할 수 있다고 생각해. 응. 이해해. 잘 된 일이네. 너한테는 새로운 경험?”
“그러니까…….”
“아니 차는 됐다고 했지. 그리고 네가 모는 차를 타느니 이렇게 가는 게 훨씬 편할 거 같아.”
“…….”
기분이 우울해졌나 싶어 쳐다봤는데 다행히 그런 건 아닌 듯했다. 잠시 내려뒀던 짐가방을 어깨에 걸친 뉴트가 이리 오라고 손짓을 했다. 양팔로 가방끈을 잡고 있던 토마스가 눈을 깜박이면서 곧장 뉴트한테 걸어갔다. 이래저래 힘든 여정이 될 거 같았지만, 차라리 즐기기로 했다.
“네가 어린애가 아닌 게 다행이야.”
“왜?”
“적어도 얌전히 앉아있긴 하니까?”
“…뉴트!”
“농담이야.”
언제나 한마디 더 보태서 토마스를 놀리곤 했다. 토마스는 이쯤 되면 익숙해질 거라 생각했는데, 뉴트를 보면 항상 새로워서 익숙해질 틈이 없었다. 좌석에 앉자마자 눈을 깜빡거리나 싶더니 이내 눈두덩이를 손으로 꾹꾹 누르기 시작하는 녀석은 빤히 바라보았다. 눈을 살짝 감은 채 하품을 하는 토마스가 귀여워 보였다. 물론 십 초 뒤에 자신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을 부정했다. 아직은 좀 부끄러웠다.
“졸려?”
“응? 응.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졸리면 자둬. 나도 한숨 잘까.”
“…….”
슬금슬금 허리를 안아오는 손을 가볍게 쳐서 쫓아내려 했지만, 또 실패했다. 허리에 살짝 팔을 두른 토마스가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뉴트 쪽으로 숙였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입술이 목에 닿을 듯하다 멀어졌다. 두꺼운 외투 아래로 파고든 손길에 뉴트가 눈썹을 찡그렸지만, 그렇다고 물러날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애매한 자세를 좀 더 편하게 고쳐앉았다. 자신 쪽으로 반쯤 넘어온 토마스를 옆으로 꾹꾹 밀어냈다. 그리곤 적당히 어깨를 맞댔다. 토마스의 한 손은 이미 뉴트의 허리에 있었다. 손가락으로 악기를 연주하는 것처럼 톡톡 건드릴 때마다 뉴트가 눈을 깜박였다.
“뉴트…졸려.”
“자라. 자.”
“예전에도 차만 타면 졸렸어.”
“언제 적 이야기세요?”
“십 년 전?”
“…….”
“그리고 항상 같은 꿈을 꿨는데.”
“예전에 말했던 끝없이 걸어가는 꿈?”
“응.”
“그 꿈은 언제쯤이면 안 꿀 거 같아?”
“모르겠어. 그런데 요즘 점점 안 꾸는 날이 늘어가고 있어.”
“…….”
“가끔 꿈속에서 걷긴 하는데 그래도 끝이 보이거든. 거의 다 왔을 때 깨긴 하지만.”
“그냥 주무세요. 토마스 씨.”
“응.”
“다 오면 깨워줄게.”
몸집만 커다란 녀석이 자리 투정이라도 하는 건지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허리를 잡힌 채 흔들거리던 뉴트가 결국 어깨에 손을 올려서 토닥거리고 나서야 점차 얌전해졌다. 새근새근 잠든 모습을 보니 뉴트도 없던 졸음이 옮는 것 같았다. 자면 안 되는데. 작게 하품을 하며 몇 번이나 속으로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 열 마디쯤 같은 말을 반복했을 때 뉴트의 고개가 토마스의 머리에 닿았다. 약간씩 덜컹거리는 흔들림도 느껴지지 않는지 좀처럼 깨지 않았다. 허리를 잡고 있던 토마스의 손에 힘이 풀렸다. 규칙적으로 내뱉는 숨결이 섞였다. 추운 날씨에 두 블록 가까이 되는 거리를 걸어온 둘에게 따뜻한 차량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뉴트의 어깨에 걸쳐져 있던 가방 끈이 스르르 흘러내렸다.
서로 기댄 채 졸던 두 사람은 내려야 하는 역에 가까워서야 허둥지둥 일어섰다. 아직도 잠이 덜 깬 토마스의 손을 잡아끌었다. 문이 닫히기 전에 간신히 내릴 수 있었다.
“못 일어나는 줄 알았네.”
“벌써 다 왔어?”
“벌써는 무슨. 우리가 너무 열심히 잔 거 같은데. 으으.”
뉴트가 크게 기지개를 켰다. 불편하게 고개를 꺾고 잔 것이 화근이었다. 목 뒤를 주물 거리던 뉴트를 가만 바라보던 토마스가 덥석 목덜미를 만지려 했다. 그리고 얻어맞았다. 춥긴 해도 날씨는 맑았다. 길게 얼어붙은 숨을 바라보던 뉴트가 씩 웃으며 토마스를 잡아끌었다. 이런저런 일이 많긴 했지만, 밖으로 나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조금 들떠있었다.
뉴트가 대학교, 그것도 학생회 실에 처박힌 이후 공식적인 첫 번째 외출이었다. 모두 뉴트 좀 밖으로 끌어내 보려고 안간힘을 쓰다 번번이 실패하곤 했다. 그나마 민호가 자신이 출전하는 대회 티켓을 보내 오면 아주 가끔 보러가곤 했다. 물론 끝까지 보는 것도 아니었다. 민호 차례가 끝나면 곧장 기숙사로 돌아가곤 했다.
한번은 민호가 뉴트는 잡아 세웠던 적이 있었다. 금방 뛰고 와서 헉헉대는 발음으로 이유를 물었을 때 뉴트는 언제나처럼 간결하게 대답을 하곤 했다. 너무 오래 보면 미련이 남을 것 같아서. 영국 특유의 악센트가 툭툭 튀는 말은 민호의 가슴을 아프게 긁어내렸다.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는 땀에 젖은 민호의 손을 뿌리치고 돌아가 버렸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눈앞에 서렸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이 자리에서 과거의 일을 생각해봤자 도움 되는 것이 없었다.
옷자락을 잡힌 채 눈만 껌벅거리는 녀석을 좀 더 끌어당겼다. 민호한테도 보여주지 않았던 속마음을 이 녀석한테는 그리 쉽게 터놓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알 것 같기도 했다. 아마 서로 가는 길이 전혀 다르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민호는 함께 걸어가던 길이 끊어져서 쉽게 한마디 말을 하기 어려웠다.
“뭐 해. 짐 풀러 가야지.”
자신이 머릿속으로 복잡한 계산을 하는 것을 들키기라도 하는 양 뉴트는 과하게 밝은 목소리로 토마스를 잡아끌었다. 토마스는 알 듯 말 듯한 표정으로 순순히 가자는 대로 따라왔다. 조금씩 섞이기 시작하는 둘은 아직 갈 길이 한참 남은 것 같았다.
✗ ✓ ✗
숙소에 도착했지만, 늘어놓은 짐이 많진 않았다. 기껏해야 메고 온 가방 두 개를 구석에 밀어놓는 정도였다. 침대는 나란히 놓여있었다. 딱히 뭔가 의식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마침 남은 방이 이것뿐이었다. 침대에 앉아서 발을 까닥거리는 토마스와는 달리 그대로 누워버린 뉴트가 허리를 이리저리 틀며 천장을 쳐다보았다.
“이제 좀 살 거 같아.”
“수고했어. 뉴트.”
“너야말로. 근데 우리 둘 다 자면서 왔잖아.”
“그런가?”
“이 정도면 못 올 거리는 아닌데, 진작 나와 볼걸.”
“…나도.”
이상한 곳에서 둘은 닮은 점이 많았다. 솔직히 둘 다 제대로 여행을 가본 적이 없었다. 뉴트는 스스로 거부했고, 토마스는 관심이 없었다. 어떻게 둘이 여행을 오게 된 건진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뭔가 가슴 속에 있던 단단한 것이 하나둘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푹신한 침대에서 뒹굴던 뉴트가 눈앞에 보이는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단단하고 곧은 눈빛에 잠시 당황한 토마스가 할 말이 있냐고 되물어왔다. 지독하게 말주변이 없었고, 그래서 더 편하기도 했다.
“뉴트, 왜?”
“어. 그냥.”
“…….”
“우리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그러니까…….”
“닮은 점이라곤 찾아보기도 힘들 정도인데.”
“내가 널 찾았으니까.”
“정말? 하지만 내가 널 먼저 알았을 걸?”
“난 한눈에 뉴트를 알아봤어.”
간질간질한 말이 침대 위에 쌓여갔다. 찬찬히 뜯어보면 정말 닮은 구석이 없는 둘이었다. 성장 과정부터 교우관계. 그리고 전공까지 조금이라도 맞닿은 부분이 없었다. 굳이 비슷한 부분을 찾자면 둘 다 속으로 삼키고 있던 비밀이 있다는 정도였다.
“보자마자 알 수 있었어. 내가 한 발자국 더 나갈 수 있게 도와줄 사람이라는 거.”
“간질간질한 말 그만해.”
“진심이야. 뉴트.”
“…….”
“난 널 만난 걸 일생의 행운이라고 느껴. 아마 이후에 아무리 좋은 일이 생겨도 이보다 기쁘지 않을 거야.”
하하. 허탈하게 웃던 뉴트가 자신의 침대에서 내려와 토마스의 침대로 옮겨왔다. 두 사람의 무게에 침대가 푹 들어갔다. 토마스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꼭 우주 같았다. 얼마나 넓은지 깊은지 알 수 없는 블랙홀 같다고 생각했다. 시선을 마주칠 때마다 금방이라도 휩쓸려 사라질 것 같았다. 토마스가 눈을 감으면 긴 그늘이 생겼다.
“가끔은 말이야.”
“뭐가?”
“인생에서 한 번쯤은 계산 안 하고 마음이 가는 대로 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
“무슨 소리야?”
“이후 일어날 일에 후회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야.”
“정말?”
“그래.”
뉴트는 자신이 한마디 할 때마다 왜 저렇게 토마스의 표정이 울먹거리는지 알 수 없었다. 살아온 과정이 너무 달라서 생각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뉴트가 굳이 자신의 인생사를 길게 말하지 않는 것처럼 토마스 또한 애써 알려주려 하지 않았다. 그래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쉽게 물어볼 수 없었지만 무겁게 입을 열었다.
“토마스.”
“응?”
“막상 물어보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냐.”
“왜 그래?”
“그냥 네가 말하고 싶을 때가 되면 알려줘.”
“뭘 알고 싶어 하는지 잘 모르겠어.”
“그것도 알아차리면 말해줘도 괜찮아.”
“왜 직접 물어보지 않는 거야?”
“너도 나한테 그래 줬으니까.”
“…….”
토마스는 정말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뉴트에 비하면 살아온 삶이 너무 단조로웠다. 모든 기억은 연구소와 방송 카메라 앞에 멈춰있었다. 하다못해 학교에서 친구 한 명 사귄 이야기도 할 수 없었다. 뉴트가 궁금해하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몇 번이나 생각했지만, 역시 할 수 없었다. 뉴트는 그런 토마스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웃고 있었다. 바짝 마른 가을날 햇살처럼 웃는 모습에 왈칵 눈물이 차오를 뻔했다.
“난 그냥 뉴트가 좋은데.”
“…….”
“무슨 말이라도 해주고 싶어. 그런데 뭘 해줘야 할지 모르겠어.”
“바보야. 지금 하라는 게 아니잖아.”
투정부리는 것처럼 길게 늘어지는 목소리 끝이 젖어있었다. 혼란스러워하는 토마스를 굳이 더 몰아세울 필요는 없었다. 뉴트는 여전히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희미하게 떠오르는 기억의 파편에서 토마스가 이러는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저 어렸을 때 정이 모자랐던 것일 뿐이었다. 어른들만 가득한 연구소에서 자란 아이는 그늘에서 자란 풀꽃처럼 키만 길게 컸다. 한 줌 쏟아지는 햇살을 보려고 키만 쑥쑥 키운 녀석은 너무 빠르게 어른이 됐던 것 같았다. 뉴트가 한번 꺾였다 다시 자란 타입이라고 하면 토마스는 그 반대였다. 이런 식으로 보는 것이 바로 동정이 아닐까 했다. 하지만 뉴트는 이것은 절대 그런 감정이 아니라고 스스로 다잡았다. 아니었다.
뉴트는 자신의 머리를 쓸어넘겨 주는 손을 따라 눈을 감았다. 만지는 것도 이렇게 아까워하면서 그날은 대뜸 손을 어떻게 잡았나 했다. 뉴트가 누운 채 두 팔을 벌리자 토마스가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탄탄한 목덜미를 감싸 안은 뉴트가 킬킬 웃었다.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살의 느낌이 났다. 토마스가 탄탄한 팔에 입술을 묻었다.
저녁까지 침대에서 뒹굴던 둘이 간신히 밖으로 나왔을 땐 해가 지고 있었다. 겨울 해는 유난히 짧았다. 순식간에 뒤로 넘어간 해가 사라지자 짙은 푸른색을 띤 어둠이 몰려왔다. 차곡차곡 쌓인 저녁은 밤을 불렀다. 새카만 하늘에 하나둘 돋는 별을 바라보던 둘은 손가락을 서로 걸었다. 길고 매끈한 손가락이 천천히 닿다 이내 조심스럽게 깍지를 꼈다.
“춥다.”
한참 거리에 멍하니 서 있던 뉴트가 처음 꺼낸 말이었다. 응. 추워. 토마스가 길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꽤 많이 돋은 별과 가로등이 서로 섞여들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빛은 더욱 밝아졌다. 어둠은 가로등에 우르르 물러났다 다시 울컥 달려들었다. 다리에 치렁치렁하게 감기다 못 해 늘어지는 겨울밤이 느껴졌다.
밥 먹으러 가자. 학교에서 항상 듣던 말이었다.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말이었지만, 둘은 서로 마주 보고 부끄럽게 웃었다. 그새 하얗게 얼었던 두 볼에 온기가 서렸다. 학교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하던 말인데, 왜 이렇게 민망한지 꼭 한번 숨을 내쉬어야 했다. 처음 역으로 갈 때보다 거리가 조금 가까워진 둘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상대방과 맞춰서 걷는 것은 둘 다 처음이었다. 뉴트는 항상 다른 사람보다 빨리 달리려 했다. 그리고 그럴 수 없게 된 후엔 혼자 걸어 다니곤 했다. 토마스는 항상 혼자 걸었다. 주위에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어색하게 발을 맞추면서 걸어가는 두 사람 뒤로 긴 그림자가 늘어졌다.
✗ ✓ ✗
“와.”
“여기가 유명한 곳이래.”
“나 처음 와 본 곳이야.”
느긋하게 이리저리 구경하는 재미에 푹 빠진 둘은 원래 계획했던 날짜를 넘기고 있었다. 물론 이렇게 될 것 같아 여유 시간을 남겼던 것이 다행이었다. 너무 먹어서 촬영하는 데 지장 있는 거 아니냐는 토마스의 물음에 아니라고 쿨하게 대답했다. 삼일만 머물려고 했던 것이 벌써 이틀이나 더 지났다. 열심히 둘이서 짰던 계획은 이미 다 틀어진 지 오래였지만, 못 본 것은 없었다. 천천히 급하지 않게 돌아다니면서 조금씩 가까워진 둘은 이제 옷이 서로 쓸릴 정도로 바짝 붙어서 걷고 있었다.
“손.”
“??”
“손 줘봐.”
“…….”
“장갑이라도 가져오지.”
“까먹었어.”
뉴트가 토마스의 손을 덥석 잡아서 자기 코트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안 그래도 붙어서 걷던 토마스가 더 가까이 끌려갔다. 뭔가 생각하며 씩 웃은 토마스가 코트 안에서 손바닥을 손톱으로 살살 긁었다. 미간이 꿈틀하는 것이 분명히 보였다. 이때다 싶어 점점 더 느릿하고 진득하게 긁어 내렸다. 매끄러운 손톱이 손바닥에 스칠 때마다 뉴트는 온몸에 전기가 오르는 것 같았다. 손등을 덮고 깍지를 낀 단단한 손을 떨쳐낼 수 없었다. 토마스의 손끝에서 시작된 묘한 기운이 온몸에 퍼질 때마다 뉴트는 발걸음을 멈췄다. 기분이 묘했다.
“그만 좀 해.”
결국 ,반대편 손으로 토마스를 쭉 밀어냈다. 하지만 뉴트의 반응에 잔뜩 신 난 토마스가 다시 손을 잡았다. 그새 따뜻하게 달아오른 손이 가늘게 떨렸다. 이거 놔라. 좀! 뉴트가 팔을 휙휙 휘둘렀지만, 잡고 있는 힘이 만만치 않았다. 뉴트가 졌다. 하루 종일 토마스가 손바닥에 장난을 치는 것을 받아줘야 했다.
“높네.”
“멋있다.”
“나 높은데 싫어하는데.”
“왜?”
“높은데 보면 뛰어내리고 싶어서. 민호가 이야기 안 해줬어?”
“…….”
“농담이야.”
물론 이런 언덕 이야기는 아니었다. 여기서는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르는 것이 가까웠다. 재미없는 농담이었다. 세 번 농담이라고 말하고 나서야 토마스는 잔뜩 굳었던 얼굴을 간신히 풀었다.
“그러지 마.”
“이제 안 그래. 농담이라니까. 내가 진짜 그런 충동이 있었으면 벌써 열다섯 번은 뛰어내렸겠다.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잖아.”
“…….”
“어휴. 마음은 약해 가지고.”
언덕 가장 높은 곳에 선 채 아래를 내려다보던 뉴트가 웃으면서 토마스의 등을 팡팡 쳤다. 하지만 반응이 없었다. 이제 이런 농담은 좀 자제해야 할 것 같은데, 토마스의 반응이 너무 재밌어서 주체할 수 없었다. 이제 진짜 그만해야지. 조금 미안했다.
“미안.”
“…….”
“진짜 안 그럴게. 나 요즘 열심히 살고 있다니까?”
“…….”
“정말이야.”
자신을 푹 껴안은 토마스의 등을 두드려 줬다. 등을 쓰다듬어 줄 때마다 토마스가 좀 더 붙어왔다. 정말이야. 진짜 안 그럴게. 몇 번이나 다짐하고 손가락까지 걸었다.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토마스의 크고 단단한 손이 코트 안쪽으로 들어와 허리에서 가장 움푹 들어간 곳을 꾹꾹 누를 때 뉴트는 놀라서 펄쩍 뛰었다. 예전과 분명 다른 분위기가 느껴지는 손놀림에 눈 밑이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여긴 공공장소입니다. 토마스씨.”
“아야.”
찰싹. 따끔한 소리가 날 정도로 허리를 잡은 손을 때렸다.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던 토마스가 한 번 더 뉴트를 꾹 끌어안았다. 아직도 허리에 남아있는 남의 체온에 정신을 뺏긴 뉴트는 솔직히 그날 뭘 보고 먹었는지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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