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히삼/제갈유비] 창공의 전기(蒼空之傳記) 010
+) NOTICE
레전드 히어로 삼국전 2차 연성입니다.
유비와 제갈량 / 조조와 사마의 / 손책과 주유가 각각 궁의 주인과 신선으로 나옵니다.
제갈유비 연성으로 시작했지만, 둘이 만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수 있습니다.
동양 AU 및 설정 날조가 항상 함께합니다.
적당한 망상과 설정 붕괴가 언제나 함께 합니다 ㅇㅅㅇ)9
write. 환월
“오셨습니까.”
“궁에 큰일은 없었나.”
“예. 다행히.”
“…….”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사숙은?”
“후원에 궁주님과 함께 계십니다.”
“그런가.”
“검은 이리로.”
사마의는 익숙하게 검을 받는다. 구영을 쫓아내는 과정을 지겹고도 길었다. 아무리 봉황 궁에서 내로라하는 군사를 모아서 갔다고 하지만, 군주가 직접 힘을 쓰지 않으면 어느 정도 제약이 있었다. 체약이 찐득하게 말라붙은 갑옷은 제 색을 알기 어려울 정도로 엉망이었다. 제대로 몸조차 정리하지 못하고 허겁지겁 궁으로 복귀한 이유는 안 봐도 뻔했다.
“늘 고생이군.”
“신선의 의무는 주군을 보필하는 것. 언제나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큰일이 없어서 다행이야.”
“…….”
“조금만 늦었으면 달이 바뀌어서 돌아올 뻔했지.”
“미리 나가서 맞이할 것을…….”
“아니야.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예. 알겠습니다.”
사마의는 체액과 살덩이가 엉긴 검과 함께 예장을 받아든다. 어지간히 고생했는지 태오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하긴 잠이라도 편히 잘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괴수의 본체 밑엔 수많은 권속이 있었고, 자신들의 구심점을 잃지 않기 위해 닥치는 대로 덤벼든다. 그러다 보니 밤을 새우는 것은 일상이고, 잠깐 시간을 내어 눈을 붙이는 것조차 불편하게 앉아서 해야 할 경우가 많았다.
이런 상황에 봉황의 힘을 사용하는 군주마저 오지 않으니 군대의 사기가 점점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군대를 앞장서서 이끈 장군이 태오였다. 아직은 젊은 축이지만 누구보다 용맹하고 책임감이 강했다. 왕윤이 직접 자신의 스승으로부터 데려온 아이를 보던 수많은 권속은 군주의 뜻을 반대했다. 하지만 그때 왕윤은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최대한 일찍 돌아오기 위해 서둘렀다. 그래도 꽤 괜찮지 않은가.”
“당연히 달을 넘겨서 돌아오실 줄 알았습니다.”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아서, 힘을 좀 냈다.”
“몸 상하십니다.”
“이 정도야.”
그 말을 하면서 약하게 표정을 찡그린다. 사마의는 스쳐 지나가는 모든 표정을 보고 있었지만, 굳이 입을 대지 않았다. 신선은 그저 궁을 지키고 주군을 보필하면 그만이었다. 그 외의 일은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았다. 물론 태오 장군이 특히 주군이 아끼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마의가 성의껏 모셔야 할 존재는 아니었다.
“전서구라도 올려주셨으면 미리 준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 허례 따윈 필요 없다.”
“구영의 체액은 몸에 좋지 않습니다. 부디 몸을 보하시지요.”
“알았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서도 정신은 늘 딴 곳에 가 있었다. 사숙이라 했던가. 아니면 선배라고 했던가. 사마의가 왕윤의 신선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아 굴러들어온 아이는 생각보다 작았더랬다. 왕윤 뒤에서 이글이글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아이는 어느새 이만큼 커서 장군이 되었다. 물론 태오 장군이 열심히 움직일수록 군주는 편해진다.
그렇게 따지면 사마의로선 나쁘지 않은 수였다. 혹시나 군주가 상처라도 입는다 치면 궁 전체가 무너져내린다. 응룡궁을 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적어도. 그런 일은 일어나게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신선으로서의 자존심이고, 최고 신선이 되기 위한 욕심과도 같았다. 이런 사마의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오 장군은 오늘따라 좀 더 허둥지둥한다.
“사숙을 만나고 바로 들어가겠다.”
“…네.”
뭐 이젠 말해도 듣지 않을 것 같으니 그냥 물러선다. 태오는 급하게 후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긴 이렇게 자주 토벌 전에 나서는 것은 처음이었다. 원인이야 응룡궁이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해 균형이 무너진 것이라지만.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구영은 한번 놓쳤던 전적이 있어서 더 그랬다. 승부욕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돌아오자마자 바로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훌쩍 떠나고 돌아오면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은 예사였고, 늦으면 계절이 바뀌기도 했다.
“…….”
급하게 후원으로 향하다 멈칫한다. 아까부터 유난히 몸이 무겁다 했다. 이제야 자신의 몰골이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체액이 얼룩진 갑옷은 말할 것도 없고 자잘한 상처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얼굴도 엉망이었다. 어쩐다. 이렇게 고민해봐도 되는 일이 없었다. 차라리 지금 돌아가서 옷이라도 갈아입고 올까 싶었다.
“어!”
“…….”
“태오 아저씨!”
“이런…….”
“태오 아저씨!”
한발 늦어버렸다. 후원에서 나오던 익숙한 인영이 눈에 들어온다. 태오는 저절로 한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작은 아이는 그런 것쯤은 별로 상관하지 않는 듯 뒤에 서 있는 남자의 옷소매를 이끌며 열심히 걸었다. 작은 발에 밟히는 꽃잎에서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태오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우두커니 멈춰있었다. 두 사람을 보고 그대로 도망치듯 자리를 피할 수도 없는 데다 그렇다고 이 상태 그대로 있기도 뭐했다.
‘사마의 말을 들을 걸 그랬군.’
고집이 세면 이럴 때 가끔 안 좋은 영향을 받는다. 태오는 하고 싶은 일이 있거나 해야 할 것이 있으면 주위를 둘러보지 않았다. 이번 같은 경우는 왕윤을 만나는 것에 정신이 팔렸었다.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두 사람이 훌쩍 다가왔다. 작은 아이 품에 꽃이 가득 들려있는 것을 보면 후원에서 방을 장식할 것을 잔뜩 찾은 모양이었다.
“태오 아저씨!”
“궁주님.”
“초선이라 불러줘요. 네?”
“…….”
“태오 왔느냐.”
“네. 사숙.”
“아빠가 태오 아저씨 오늘 올 거라고 했는데, 진짜 왔네?”
“…….”
“신기하다.”
“이 녀석도 참.”
왕윤은 허허 웃고 만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다는 딸이었다. 물론 태오도 그랬다. 그러니 굳이 혼자서 충분하다며 토벌전에 나갔던 터였다. 아이가 앞뒤를 보지 않고 엉기려 하자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꼴이 말이 아니라 어쩔 수 없었다.
“더러운 것이 묻는답니다.”
“힝.”
“태오? 다친 곳은 없고?”
“네? 아, 예.”
“…….”
“사숙…아니 그러니까.”
“괜찮다. 호칭 따위가 다 뭐라고.”
“…….”
애초에 호칭을 고쳐야 하는 것이 맞지만, 왕윤은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태오가 편한 대로 부르라고 말하곤 했다. 태오를 데려온 스승은 의형제가 있었다. 그중 한 사람에게 거두어져 몸을 의탁한 지도 거의 이십 년에 가까워진다.
처음 만났을 땐 군주가 아니었다. 그저 오래된 의형제로 가끔 왕래했는데, 어린아이를 꺼두고 난 뒤 갑자기 군주가 되었다. 물론 애초에 왕의 핏줄을 가지고 태어날 수도 있지만, 신수의 마음에 들어서 추대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렇게 궁에 출신을 모르는 아이를 들이냐 마냐는 지루한 회의가 계속 되었고, 결국 왕윤의 한마디에 모든 것이 정리되었다.
“아직 호칭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내가 네겐 언제나 사숙이 아니더냐.”
“예.”
“늘 수고가 많고, 미안하구나.”
“그런 말은 안 하셔도 됩니다. 늘 사숙을 닮고 싶었으니까요.”
“그런가. 좋은 말이구나.”
“…….”
이렇게 칭찬하는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다소 무리한 작전을 세운 것도 맞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토벌전은 성공이었다. 그러면 된 것 아닌가. 태오는 굳이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입 밖으로 내는 성격이 아니었다. 왕윤은 초선을 안고 돌아선다. 태오는 익숙하게 뒤를 따랐다.
“옷을 갈아입고 가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해라.”
“예.”
“네가 전장으로 떠나있는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지.”
“…….”
“사마의한테 대충은 들었을지 모르겠구나.”
“아뇨. 이쪽으로 오는 것이 바빠서…….”
“녀석 참.”
“…….”
어쩐지 민망해진다. 상장군이 되었으니 조금만 더 나이를 먹으면 충분히 대장군까지 올라갈 수 있다. 애초에 왕윤이 아끼기는 인재에 각종 토벌전마다 빠지지 않고 참여하는 봉황궁의 핵심 인력이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태오의 이런 모습을 잘 알지 못한다.
**
“제가 좀 늦었습니다.”
“얼마나 무리를 했으면…….”
“빠르게 돌아오려다 보니.”
“초선인 방금 잠들어서 처소로 보냈지.”
“아…….”
“어차피 어른끼리 해야 하는 정세 이야기 아닌가. 아이는 별로 재미가 없지.”
“…….”
“사마의도 곧 올 테니 편하게 앉아있게.”
“네.”
갑옷을 벗고 나니 몸 상태가 더 심각했다. 체액과 살점을 닦아내고 가볍게 상처를 치료하는 것만으로 시간을 잡아먹었다. 하지만 그 꼴 그대로 갈 수 없는 노릇이라 그저 초조하게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큰 부상은 없었지만, 며칠은 푹 쉬어야 한다는 궁의의 말이 돌아왔다. 물론 그 말을 한 번도 듣지 않는 태오의 태도를 생각하면 이젠 그만 말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겨우 무거운 갑옷을 벗고 가벼운 옷을 걸쳤다. 붉은 비단으로 만든 옷에 가벼운 허리띠를 두른다. 애초에 장식을 즐기는 편이 아닌 데다 타고난 무인이라 갑옷 외엔 걸칠 옷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왕윤이 내려준 몇 번의 옷을 제외하곤 그다지 욕심이 없었다. 붕대가 밖으로 보이지 않는지 점검을 하고 방을 나섰다. 그런 태오의 성격을 잘 아는 왕윤은 내내 걱정이 많았다.
“주군. 사마의입니다.”
“그래. 들어오게.”
“…….”
“중한 일을 말씀하실 것 같아 차는 제가 직접 가져왔습니다.”
“고맙네.”
“아닙니다. 당연히 신선은 궁의 기밀 유지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
“자네도 앉지.”
“예.”
늘 꼿꼿한 신선은 들고 온 찻잔을 주군과 태오 앞에 내려놓는다. 그리곤 자신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익숙한 일이지만 태오는 도통 사마의와 친분을 나누기 어려웠다. 하긴 어쩌면 당연한 말일지도 몰랐다. 태오는 내내 바깥으로 다니고 사마의는 아니었다. 그것을 제외하고도 그다지 자신을 봉황 궁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것이 느껴졌지만, 굳이 말해서 좋을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나보단 사마의가 더 잘 알겠지.”
“하오나 주군…….”
“괜찮아. 어서 말해보게.”
“…….”
사마의는 태오를 슬쩍 쳐다본다. 물론 태오에게 동의를 받을 생각은 아니었다. 뭔가. 기분이 이상하군. 태오는 그런 신선의 눈빛을 보면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태오 장군이 계시지 않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듣긴 했습니다.”
“응룡궁에 새 신선이 태어났습니다.”
“새…신선? 그게 말이 되는가.”
“신선 사마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옥새의 의지라는 이유로밖에 해석이 되지 않습니다.”
“사라졌다는 응룡궁 군주는?”
“행방이 묘연합니다. 그로 인해 선계의 불균형이 초래된 것이 아닌지 걱정하고 있습니다. 봉황 궁과 백호 궁에 날로 부담이 심해지고 있기에.”
“…….”
“뭐…그렇게 되었다고 하지.”
“궁에 신선이 둘이라니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그렇다고 태어난 신선을 억지로 떼어낼 수는 없는 것 아니냐.”
“그야…….”
“궁이 걱정되는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이런 것으로 흔들리진 않을 테니 괜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괜찮아.”
“…….”
“물론 사마의도 마찬가지야.”
“예…주군.”
“늘 고맙게 생각하지만, 가끔 지나칠 때가 있어.”
“그야…늘 궁을 생각해서.”
“그러다보면 아차 하는 순간 선을 넘게 되지.”
“…….”
사마의는 두 번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다. 태오는 자신도 저런 말을 간간이 들었던 터라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왕윤은 굳은 분위기를 풀 모양인지 다시 말을 건다. 어려운 정세 이야기는 이쯤이면 충분하다는 걸까. 아니면 굳이 다른 이에게 부담을 지우려고 하지 않는 성격 때문일까. 봉황 궁의 분위기는 늘 비슷하게 흘러갔다.
“어릴 땐 천지 분간을 못하더니…….”
“왕윤 사숙. 그거야…….”
“꼬맹이가 이렇게 많이 컸네.”
“…….”
“너와 사마의가 있어서 내가 항상 든든하다.”
“과찬이십니다.”
“매일 토벌 전에 나가고, 사마의는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와중에 궁 어려운 일까지 부담하게 해 항상 미안한 마음뿐이야.”
“아닙니다. 그것은 신선의 본분.”
“이 궁이 늘 이러면 좋을 텐데.”
왕윤은 흐릿하게 웃고 만다.
“그런데…….”
“응?”
“여포는 어디에.”
“아, 초선이 같이 자고 싶다고 하기에 놔두고 와버렸구나.”
“여포는 봉황 궁의 군주를 지키는 환수. 자꾸 곁에서 떼어놓으시면 위험합니다.”
“아냐 사마의와 네가 항상 지켜줄 텐데 뭐가 문제냐.”
“…….”
“안 그런가. 사마의.”
“예. 그렇습니다.”
“그래도 너무 떨어져 계시진 마시지요.”
“녀석. 걱정은.”
오히려 당사자는 별생각이 없는데, 태오가 더 몸이 달아한다. 하지만 군주의 상태가 곧 궁의 존속을 뜻한다. 여포는 예민하고 강해서 주변에 스며드는 위험을 잘 감지한다. 물론 그만큼 강한 환수이기에 그동안 왕윤 곁에 모여들던 무수한 위협을 물리치곤 했다. 다만 가장 걱정되는 것은 어린 궁주가 여포를 마음에 들어 해 내내 같이 놀고 싶어 한다는 점이었다. 궁에 또래가 없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제가 있는 동안은 좀 더 수비에 힘쓰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니까.”
“아닙니다.”
“예, 주군. 저도 같이 따르겠습니다.”
“…….”
젊은 사내 하나와 신선이 하는 말을 더는 물리칠 수 없었다. 왕윤은 그저 그러려니 했다. 여포가 비록 떨어져 있다고 하지만, 군주가 부르기만 한다면 삽시간에 이쪽으로 달려올 수 있는 존재였다. 도대체 그 짧고 짧은 간격은 왜 이렇게 두려워하는지. 왕윤은 저 둘이 아직 어리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마음을 조금 더 존중해주기로 정했다.
**
“말도 안 돼.”
“…….”
“아무리 생각해도 분명히 뭔가 잘못된 것이 확실하다니까요!”
“주유. 잠시만.”
“주군은 억울하지도 않아요?”
“…….”
“왜 응룡 궁만 저렇게 특별대우를 받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생각해 봐요. 우리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그렇죠?”
“그야…….”
“역시 그렇게 생각하실 거로 생각했어요. 따지고 보면 어차피 비슷한 세력인데.”
펄펄 뛰는 주유를 말릴 사람은 손상향 뿐이었다. 손책은 자신의 신선을 제대로 말리지 못한다. 워낙 방랑벽이 있는 남자라 늘 궁을 떠나있어서 주유에게 얹어준 짐이 많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물론 주유는 똑똑하고 현명했지만, 그렇다고 주군이 해야 할 일을 모두 대신하면서 한마디 말을 하지 못할 인재는 아니었다. 그런 주유와 오빠를 번갈아 보던 손상향은 결국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영랑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오라버니가 궁의 일을 하지 않는다는 관점에서는요.”
“역시…….”
“그러니까 내가 그러는 거랑 응룡궁이 무슨…….”
주유와 손상향이 동시에 손책을 쳐다본다. 아무리 대범한 남자라고 하지만 둘을 이기기엔 애초에 글러 먹은 싸움이었다.
“그래. 뭐…내가 잘못했다 치자.”
“맞아요. 그러니 이번만큼은 좀 처리해야 할 일을 해주셔야 합니다.”
“…….”
“이번에도 도망가면 어머님이 부르신다 하셨으니까. 오라버니가 알아서 결정하면 되겠네.”
“…….”
“그나마 여기가 잘 돌아가는 건 나 나하고 우리 신선 덕분이니까.”
사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으니 손책은 그냥 고개만 끄덕끄덕한다. 자신이 나가 있는 동안 궁을 꾸리는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그럴 거면 아예 군주 자리도 내려놓으라는 소리를 들었다. 물론 그 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옥좌를 내주려는 것을 주유가 막았다. 무슨 짓이에요! 그 목소리에 손책은 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깜박거린다. 누구보다 자신감이 넘치지만, 자리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백호 궁이나 잘 살면 되는 거 아닌가요. 어차피 다른 궁 도와줘봤자 남는 것도 없다니까요.”
“도와준다니. 어디까지나 자웅을 겨루기 위해 움직이는 거지.”
“그것도 포함이에요.”
“…….”
“주군은 자웅을 겨룰 상대를 찾는 거라고 하지만, 밖에서 볼 때는 다를 수 있다는 말이에요.”
“난 그런 것 신경 쓰지 않는다.”
“…….”
하긴 애초에 태어나기를 왕의 이름을 가친 채 태어난 이였다. 단 한 번도 시선이 아래로 향한 적이 없고, 비록 응룡궁에는 약간 못 미치는 세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떨어지는 편도 아니었다. 오히려 전투력으로만 보자면 훨씬 높았다. 군주가 직접 움직이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지만. 당연히 무사히 돌아오리란 믿음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데 말이다.”
“네, 주군.”
“신선이 둘이라면, 새로운 군주가 태어난다는 소리가 아니냐.”
“예. 뭐…….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지만…꼭 그렇다고 할 순 없습니다. 군주와 신선은 떨어지지 못하는 관계지만 꼭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리란 보장이 없습니다.”
“그래?”
“네. 제갈량이야…….”
주유는 잠시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곤 천천히 입을 연다.
“제갈량이야 가진 능력이 많으니 아직 궁을 유지할만한 힘이 남은 것 같지만, 방금 태어난 서서라면 좀 다른 이야기니까요.”
“…….”
“모든 것을 제갈량의 소멸을 전제로 한다면 그 커다란 영지를 일개 어린 신선이 부담할 수 있을 리도 없으니까요.”
“아예 없는 가능성은 아니란 소리구나.”
“네. 따지자면 그렇습니다만.”
“그럼 새롭게 자웅을 겨룰 이가 나타날 테고.”
“…….”
“즐겁지 않으냐. 주유!”
“전혀요!”
두 목소리가 하나처럼 들렸다. 하지만 여기까지 들으니 주유도 궁금하긴 했다. 한 궁에 신선이 둘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왔다. 그렇다면 제갈량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저 가설대로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채 소멸하는 것일까. 애초에 서서가 태어난 것이 생명의 끝을 알리는 신호와 같았던가.
‘그럼 내가 이기는 거네.’
절로 웃음이 난다. 단 한 번도 제갈량보다 뒤떨어진다는 생각을 한 적 없었다. 당당하게 밖에서 자웅을 겨룰 수 있다면 저 높은 콧대를 꺾어줄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한다. 하지만 지금 가설을 따르면 제갈량은 자연스럽게 소멸의 길로 접어들 것이고, 백호 궁은 더 번성하게 될 것이 당연하다.
약간 기분이 좋아진다. 웃음을 숨기지 못하는 주유를 보면서 차마 말을 걸지 못하는 손책은 인제 그만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어서 몸이 달았다. 조금만 더 있으면 이대로 어머님까지 만나야 할 판이었다. 아무리 군주라고 해도 절대 대항할 수 없는 상대는 있기 마련이었다. 허나 손책의 낯빛이 어두워지는 것은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손책님.”
“…….”
“마님께서 부르십니다.”
“뭐? 없다고 하여라.”
“…….”
“내가 이래서 여기에 오래 머물지 않으려 했는데.”
급하게 떠날 채비를 하지만, 동생과 신선을 뚫을 수 없었다. 이번엔 꼭 모셔오라는 분부가 있었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질질 끌려가는 것처럼 걷는다. 그 뒤를 신선과 동생이 따랐다. 손책의 어깨엔 근심 걱정이 켜켜이 내려앉았다.
“손책.”
“네. 어머님.”
“…….”
“소자 일이 좀 바빠서 어머니를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정말이더냐.”
“예…….”
말끝이 살짝 흔들린다. 그 목소리를 놓치지 않은 오부인이 아들을 꾸짖는다. 물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으니 고개를 숙인 채 잠자코 앉아있을 뿐이었다. 오부인은 늘 손책을 걱정한다. 강하다고 하지만, 누구보다 걱정되는 아들이었다. 차라리 조금 덜 강하더라도 몸이 건강하면 좋을 것을. 내내 혀를 찼지만 정작 당사자는 별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제발 이젠 군주로서의 위엄을 가지거라.”
“그야…늘.”
“천상 왕으로 태어난 네가 왜 이렇게 자리를 잡지 못하는지 이 어미는 걱정이 되는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요새 인간계가 혼란에 봄 바쁜 것일 뿐, 전 아무렇지 않습니다.”
“…….”
“죄송합니다.”
절로 잘못을 빈다. 요새 궁을 떠난 횟수가 점점 많아진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정착하려 해도 눈에 보이는 마물이 많아서 손을 놓을 수 없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이렇게 말하던 것이 벌써 여기까지 왔다. 가족이 왜 자신을 걱정하는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군주란 그런 자리임을 알면서도 손책은 이리저리 흔들린다. 우유부단하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다만, 한 가지 길로 걸어가기엔 성격이 너무 곧았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한다. 그래서 가족에겐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갖는다. 이렇게 혼란한 시기가 아니었으면 사실 그리 흠잡을 것 없는 남자였다.
**
“그것 보세요. 주군.”
“…….”
“괜히 힘들여 인간계에 좋은 일 하시고 혼났잖아요.”
“…….”
“이번엔 좀 오래 머물다 가세요.”
“주유.”
“네?”
주유가 퍼뜩 고개를 든다. 너무 방자했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닌 듯했다. 손책은 길게 내려온 망토를 정리하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늘 추운 이곳에선 익숙한 광경이었다. 주유는 그런 주군의 얼굴을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내가 괜히 인간계에 내려가는 것은 아니다.”
“…….”
“그저 응룡 군주가 생각나서 그런다.”
“…….”
“비록 너무 착하다곤 하지만 꽤 좋은 녀석이지 않았느냐.”
“…….”
“그 녀석이 그렇게 삽시간에 사라졌다는데, 그러고도 인간계에 있다는데. 어떻게 내가 가보지 않을 수가 있느냐.”
“허면…….”
“녀석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그렇게 나쁜 놈도 아닌데,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는 알아야지.”
주군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계속 궁을 비우고 인간계로 내려가는 것은 약점을 노출하는 것과 같았다. 인간계에서 신선과 군주가 마음껏 힘을 낼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조심해야 했다.
“응룡 궁에서도 찾고 있을 겁니다.”
“그냥 내 기분 탓이다.”
“…네.”
“그래서 조금만 더 고생해주면 좋겠구나.”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 없죠. 주군은 이렇게 뛰어난 신선을 간택하실 수 있었다는 사실을 조금 뿌듯해하셔도 됩니다.”
“그래. 그래.”
“역시 제가 제갈량보다 나은 것 같지 않습니까?”
주유의 목소리가 돌아온 것을 보니 그래도 궁에 머무는 쪽이 안정감 있는 모양이었다. 소매를 휘둘러 환수를 풀어준다. 태사자. 감녕. 황개. 긴 빛을 달고 사라진 녀석들은 어둠 속에 스며들었다. 주군이 가는 길에서 일정 이상 떨어지지 않은 채 천천히 움직였다. 환수 모습 그대로 나와 있어도 충분한 날씨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며칠은 머물러야지.”
“네.”
“권이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늘 그러시죠.”
“그래? 그렇군.”
“예.”
짧은 대화가 툭 끊긴다. 아까까지만 해도 길게 이야기를 하던 분위기와 사뭇 달랐다. 눈이 펄펄 날리는 하늘에선 뿌연 구름을 뚫고 빛이 흘러내린다. 늘 밤이 긴 이곳은 밤낮의 차이가 거의 없었다. 달이 너무 크고 둥그렇게 떠서 꼭 태양 같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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