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히삼/제갈유비] 창공의 전기(蒼空之傳記) 007
+) NOTICE
레전드 히어로 삼국전 2차 연성입니다.
유비와 제갈량 / 조조와 사마의 / 손책과 주유가 각각 궁의 주인과 신선으로 나옵니다.
제갈유비 연성으로 시작했지만, 둘이 만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수 있습니다.
동양 AU 및 설정 날조가 항상 함께합니다.
적당한 망상과 설정 붕괴가 언제나 함께 합니다 ㅇㅅㅇ)9
write. 환월
“…처음이라 어렵겠지만.”
“응?”
“이곳의 신선으로 태어났으니, 난 서서를 가르칠 책임이 있다.”
“공부하는 거야?”
“공부도 해야 하고, 지금 상황에 대해 이야기도 해야겠지.”
“…….”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근데.”
“왜 그러시죠?”
“…….”
서서의 입술이 또 불퉁하게 나온다. 제갈량은 곁눈질로 서서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사실 혼자 궁을 지킨 지 너무 오래된 터라 남과 교류하는 법이 서툴러진 탓이 분명했다. 애초에 주변에 사람을 많이 두는 편이 아니긴 했지만, 지금은 더 심했다. 주군이 돌아온 것도 아니고, 갑자기 낯선 이를 맞이했다. 최대한 당황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그렇다고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니었다.
제갈량이 걸으면 그 발자국만큼 죽어가던 숲이 살아난다. 더는 얻을 양분이 없어서 뼈처럼 바짝 말라 있던 대나무가 일순간 파랗게 살아 올라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물론 군주가 부재중인 상황에선 그저 일시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유의미한 변화는 없었다. 힘이 닿는 그 순간 살아났다가 다시 천천히 죽어간다. 누구보다 울창했던 숲이 이렇게 까맣게 타들어 가리라곤 아무도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서서는 그런 광경이 마냥 신기한 모양이었다. 서서가 처음 본 숲은 당장 모든 것이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바짝 말라 있었다. 애초에 평화롭고 풍요롭던 궁을 본 적이 없는 신선이었다. 자꾸 발걸음이 늦어지는 것을 알아챈 제갈량이 조그맣게 서서를 재촉했다. 마른 나뭇가지와 낙엽이 신발에 밟혀서 흔적도 없이 부서진다. 그 소리가 제갈량의 발걸음보다 높은 데다 보폭마저 조금 좁았다. 그러자 소리가 미묘하게 어긋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그 이후 한참 말없이 걸었다.
“다행히 궁엔 큰 이상이 없군요.”
“…….”
“들어오시죠. 이젠 이곳의 식구와 마찬가지이니.”
“제갈량.”
“왜 그러십니까.”
“그렇게 어렵게 부르지 않으면 안 될까?”
“…예?”
“무섭잖아. 그런 거.”
“…….”
“아니…안 되면 어쩔 수 없고…….”
“차차 생각해보도록 하죠.”
“…….”
“긍정적이란 의미입니다.”
“응. 알았어!”
“…….”
“다들 존댓말 해서 무섭기만 한걸.”
“그런 걸 신경 쓰지 말고 이쪽으로 오세요. 할 일이 많습니다.”
늘 혼자 걷던 길을 둘이 걷는다. 버석버석 모래가 내려앉은 돌을 밟으면서 천천히 걷고 있자니 꼭 꿈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물론 주군이 돌아온다면 그보다 기쁜 일은 없겠지만, 일단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뾰족하게 날 선 기운이 조금씩 가라앉는다.
하지만 제갈량은 시종 심각한 표정이었다. 서서에게 가르칠 것이 너무 많았다. 난데없이 태어난 신선이기에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했다. 물론 이런 고민을 서서가 눈치챈 것은 아니었다. 제갈량은 그 정도로 허술하지 않았다. 다만. 주어진 시간의 크기를 모르니 초조할 뿐이었다.
“원래는 며칠 적응 기간을 두려 했습니다.”
“…….”
“하지만 지금 그럴만한 상황이 아닌 것 같으니 바로 공부를 시작하죠.”
“공부라니…….”
“응룡 궁의 신선으로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
“저에 대한 것은 천천히 알면 될 테고.”
“난 제갈량에 대해서 먼저 알고 싶은데!”
“…예?”
“같이 지낼 거잖아.”
정말 종잡을 수 없었다. 조금 엄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제갈량은 아무것도 모르는 서서의 얼굴을 쳐다보다 먼저 손을 들고 말았다. 그 누구도 이런 제갈량의 모습을 본 적 없으리라. 처음 이야기하던 것과는 달리 제갈량은 서서를 꽤 아끼고 있었다.
겨우겨우 공부를 하면서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같이 해주기로 가닥이 잡혔다. 이렇게 무른 사람이 아닌데. 주군이 보면 웃으시겠어. 제갈량은 혼자 이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렇게 찾아 헤매는 사람은 한 점 기억만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다. 가볍게 한숨을 쉬며 오늘은 편전이 아닌 신선의 거처로 향했다. 서서가 살 곳이야 남아도는 곳 중 하나를 주면 될 일이다. 하지만 공부는 아무 곳에서나 가르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빼곡한 서신과 서책이 가득 차 있는 공간엔 사람 몇 명 앉을 만한 자리가 있었다.
“잠시 앉아있으세요.”
“응.”
“차를 준비하겠습니다.”
“…여기는.”
“궁의 모든 것을 관할하는 공간입니다. 꺼내 보는 것은 상관없지만 훼손하지 않게만 주의하세요. 중요한 것들이니까요.”
“…….”
서서는 아무 말 없이 옆에 쌓인 종이 뭉치를 바라본다. 제갈량은 자연스럽게 창문을 연다. 그리고 발을 내려 종이에 직접 해가 닿지 않게 했다. 예전이라면 도와주는 시종이 있을 테지만, 이제 이곳에 기거하는 사람은 제갈량뿐이라 어쩔 수 없이 직접 움직여야 했다. 서서를 혼자 두고 가는 것이 약간 마음에 걸리긴 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옆에 데리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혹시라도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이참에 한 번 틈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차를 준비하는데 시간이 좀 걸리니…여기에서 잠시.”
“직접 해?”
“이곳엔 저 말고 다른 식솔은 없습니다.”
“…….”
“꽤 오래되었으니 이젠 익숙하네요.”
“…….”
“그럼.”
제갈량은 익숙하게 밖으로 나간다. 서서는 의자에 앉은 채 눈만 깜박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넓지만 짐 때문에 좁아 보이는 곳은 희미한 먹물 냄새가 났다. 종이 냄새인 것 같기도 하고, 밖에서 차고 늘어오는 나뭇잎 냄새가 섞인 것 같기도 했다. 종이가 바래지 않게 내려놓은 발은 꽤 오래된 물건 같았다. 서서는 조심스럽게 의자에서 일어나서 주변을 걸었다. 빽빽하게 적힌 글자를 하나하나 읽진 않았다. 그저 무엇이 있을까. 이곳에선 어떤 일이 일어났던 걸까.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
사실 신선은 지식을 배운다기보단 흡수하는 쪽에 가까웠다. 숨을 쉬는 것처럼 자신과 관련된 지식을 쌓아간다. 다만 서서는 그런 지식을 흡수할 시기를 넘어서 태어났고, 약간의 오차가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모르진 않았다. 왜 아무도 없는가. 신선이 혼자서 궁을 지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흐릿하게 알 것 같지만 차마 밖으로 내지 못했다.
‘제갈량은 그럼…….’
서서는 심성이 착하고 선해서 남을 아프게 하는 말을 쉽게 꺼내지 못한다. 그래서 더 망설이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주변을 서성거리며 천천히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적당히 짚어 넘길 수 있는 동안 빈 복도엔 오랜만에 바람이 불었다.
“…….”
제갈량은 차를 준비하면서도 좀처럼 표정을 풀지 못했다. 싫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가웠지만, 그만큼 두려움이 컸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감정 표현이 활발하단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기분이었다. 하긴 주군이 없는 궁을 홀로 지키는 신선이 뭐 좋을 일이 있어서 울고, 슬픈 일이 있어서 울겠는가. 그렇게 점점 심장부터 굳어가나 싶었다. 영원히 주군을 기다리며 살아야 한다면 그쪽이 더 나으리라 믿었던 적도 있었다. 그런 궁에 툭 떨어진 서서는 알게 모르게 제갈량에게 많은 생각을 선사했다.
“이렇게 고민한다고 해서 되는 일은 없지.”
짧게 자기 생각을 정리했다. 제갈량은 누구보다 자신이 이성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 일도 빠르게 진행할 수 있었다. 차와 몇 가지 다식을 담았다. 어떤 차가 좋을까 잠기 고민한다. 제갈량이야 늘 마시던 것이 있지만, 서서의 입맛을 알 수 없었다.
결국, 선택한 것이 달콤한 과일을 말려서 넣은 차였다. 코끝에 달콤한 형기가 들러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사실 제갈량은 단 것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주군이 좋아하기에 의례적으로 준비해둔 것이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러려니 했다.
“제갈량!”
“좀 늦었습니다.”
“아냐. 나도…어.”
“신선이라면 당연히 가지게 되는 호기심이니 굳이 이유를 찾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구나.”
“앉으시죠. 차가 식습니다.”
제갈량은 가져온 것을 내려놓았다. 서서 앞으로 단 냄새가 나는 차를 밀어주고 자신은 맑은 찻물 안에 국화를 넣은 찻잔을 들었다. 아마 주인이 사라지기 전에 가장 좋은 국화만 선별해 말려둔 것이 분명했다. 뭉클 뜨거운 기운이 피어오른다. 잠시 차를 마시는 동안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서서는 제갈량의 눈치를 보면서 찻잔에 입을 댔다.
“와…….”
“입맛에 맞으니 다행이군요.”
“맛있어.”
“주군도 서서와 입맛이 비슷하셨더랍니다.”
“…….”
“이렇게 앉아있는 것도 나쁘지 않고요.”
“날 여기로 왜 데려왔어?”
“지금부터 할 일이 많기 때문이죠.”
“…….”
“신선으로 태어났으니 그리 어렵진 않으리라 생각합니다만…….”
“…….”
“그저 제게 남은 시각이 얼마나 되는지를 알 수 없으니…재촉할 수밖에 없네요.”
“시간?”
“당연한 말 아닌가요.”
“…….”
“최악의 경우까지 생각해야 하는 것이 신선. 게다가 이 궁은 제가 지키고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하나라도 허투루 끝맺음해선 안될 일입니다.”
“…제갈량이 사라지는 거야?”
“그건…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테니 지금은 제가 알려드리는 것에 집중하세요.”
“으응.”
“서서. 그렇게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지 않아도 됩니다.”
서서의 커다란 눈엔 벌써 걱정이 가득 꼈다. 그런 표정을 알아채지 못할 제갈량이 아니었다. 이리저리 서책을 옮기던 손이 뚝 멎는다. 그러더니 작게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벌써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제갈량이 워낙 꼼꼼해서 모든 상황에 대한 대비책을 만들어 놓았을 뿐이었다. 그런 제갈량과 성정이 다른 서서는 마냥 걱정인 모양이었지만, 그렇다고 바뀔 일은 없었다.
“하지만…제갈량이 사라지면.”
“주군의 삶을 따르는 것이 신선의 생. 이렇게까지 버틴 것도 어찌 보면 옥새의 큰 은혜 아래 일어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하긴 생각보다 오래 있을 수도 있으니 이즘부터 걱정하지 마세요.”
“…….”
“너무 착한 것도 신선에겐 좋지 않은 일입니다.”
“…….”
그 말을 끝으로 제갈량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 모두 알아듣긴 버거울지 모른다. 하지만 최대한 많은 이야기를 해야 했다. 이런 조급함이 과연 도움이 되는 것일까. 스스로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제갈량은 약간 몰려있었다. 누구도 이야기할 사람이 없었던 반동일까. 아니면 그저 혼자 명상을 하면서 끝내 자기 삶의 끝을 본 현자이기 때문일까. 아무도 제갈량의 속을 읽지 못했다.
“그래서 여기 주군이 안 계신다고?”
“네.”
“……”
“그래서 제가 서두르는 것입니다.”
“그럼 지금까지 이 많은 일을 제갈량 혼자서 다 했던 거야?”
“뭐가 이상합니까?”
“…아니. 그게.”
“신선이 해야 할 일은 지극히 기본적입니다. 그저 주군이 궁에 계시지 않는 동안 조금씩 손을 대었을 뿐. 결과적으론 그리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힘들었겠다.”
“네?”
“제갈량 힘들지 않았어?”
“전혀요.”
즉답이 튀어나왔지만, 서서는 그 말 속에 담긴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누구보다 꼿꼿해서 전혀 흔들림이 없을 것 같은 신선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제갈량의 힘이란 그 누구도 함부로 가늠할 수 없으니 몸이 아픈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힘 대부분을 궁을 유지하기 위해 쓰는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감정 교류를 할 수 없고 그저 틀어박힌 채 몇백 년 도를 닦는 선인처럼 지내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다. 그런 일을 혼자 담아온 속이 어떨지는 뻔했다.
“하지만…….”
“제 감정보다 급한 것은 당장 신선으로서의 삶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겠죠.”
“…….”
“서서가 다음 대 신선이라면…이 궁엔 좋은 일이 일어나겠군요. 새로운 주인이 오실 겁니다. 이젠 이렇게 비어있지 않아도 되겠고요.”
“다음 대?”
“예. 저와 형제가 아니라 그저 다음 군주를 맞이하기 위한 신선이라면 제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건 싫은데.”
“신선으로 태어났으니. 운명을 따를 수밖에요.”
“…….”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러지 않을 듯하니, 걱정은 말고. 그저 제가 있는 동안 많이 배워두세요.”
“으응.”
물론 제갈량이 일부러 강조한 것도 있지만, 서서는 그만큼 궁금한 것이 많았다. 계속 재잘거리는 참새처럼 물어온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궁금해하곤 했다. 제갈량은 그런 질문 공세를 받은 것이 처음이라 약간 어지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이런 말벗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혼자 편전에 앉아 명상하던 때와 달리 조금씩 주변 정리를 할 수 있었다. 서서는 끈질기게 자신을 편하게 불러달라고 말한다. 제갈량은 그런 권유를 영 난감해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서서는 물러서지 않았다.
“서서는 꽃을 좋아하죠?”
“응.”
“그럼 오늘은 화단을 손보기로 하겠습니다.”
“제갈량. 편하게 불러달라니까.”
“익숙지 않아서 그러는 걸요.”
“같은 신선끼리 너~무 멀어 보여.”
“말투로 관계가 멀어지는 것은 그저 그만큼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일 겁니다.”
“…….”
“후원에 있는 화단을 손보면 그럭저럭 볼만해질 테니.”
궁에 칩거한 이후 단 한 번도 이렇게 힘을 써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서서가 태어나고 새로운 군주가 나타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조금씩 궁을 정리하려 했다. 물론 서서에겐 좋아하는 꽃을 보여준다는 변명을 덧붙인다. 저번처럼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이 그리 좋은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아직 배울 것도 흡수할 것도 많은 미숙한 신선이었다. 굳이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
“바깥에 있는 숲도 울창해질까?”
“미래엔 그러겠죠.”
“미래?”
“이 힘으로는 응룡 궁을 건사하는 것이 전부라. 거기까진 신경을 쓰지 못합니다.”
“…….”
“언젠간 다시 돌아오겠죠. 천천히라도.”
“그랬으면 좋겠다.”
“…….”
“제갈량이랑 주군이랑 같이 볼 수 있을까?”
“글쎄…….”
제갈량은 말을 아꼈다. 확실하지 않은 미래를 단정할 수 없다. 오히려 이만큼 똑똑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쉽게 긍정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갈량은 그런 헛된 약속을 하기엔 너무 총명했다. 그래서 적당히 넘겨버렸다. 그러는 편이 나았다.
“제갈량은 언제나 그렇게 대답하는구나.”
“서서는 항상 그렇게 물어보고 말이죠.”
“…….”
“이제야 약간 이 상황이 이해가 갑니다.”
“응?”
“그리 나쁘지 않은 수를 둔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또 어려운 말을 하는구나.”
“서서도 이렇게 될 겁니다.”
약간 누그러진 목소리가 들린다. 아직 존댓말에서 벗어나지 못한 제갈량은 말이라도 곱게 쓰면서 서서를 궁의 식구로 품기 시작했다. 워낙 혼자 있는 것에 도가 튼 신선인지라 아직 어려움이 많았지만, 그럭저럭 굴러가기 시작한다. 그러자 훨씬 수월해졌다.
**
“제갈량은 왜 여기서 안 나가?”
“그건 또 무슨 말인지.”
“항상 여기서 벗어나질 않으니까. 심심하지 않아?”
“…….”
“…미안.”
“아니, 잘못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그저?”
서서는 제갈량의 말끝을 따라 한다. 꼭 메아리 같다는 생각을 하던 제갈량은 고개를 가볍게 흔들어 잡념을 지우기 시작했다. 자꾸 서서에게 마음이 쓰이는 것은 주군과 닮아서일까. 어디서 이렇게 비슷한 신선을 빚어서 내려보낸 것인지. 이렇게 비슷할 이유가 없었다. 마치 주군을 기다리는 마음을 옥새가 읽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저 여기가 내가 있어야 할 곳이니까, 그러는 것뿐입니다.”
“제갈량은 그러면 궁 외엔 아는 것이 없구나?”
“말이 왜 그렇게 튑니까.”
“맞는 말 아니야? 역시 내가 다 가르쳐줘야겠어.”
당돌한 말이었다. 하지만 제갈량은 그저 웃을 뿐 뒤에 별다른 트집을 잡지 않았다.
“그렇게 아는 것이 많다면 여기에 있으면서 가르쳐주면 되는 일 아닙니까.”
“그건 안 돼.”
불쑥 가까이 다가온 서서가 빙긋 웃었다. 순간 말문이 막힌 제갈량은 헛기침하며 그 맑은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서서는 뭐가 그렇게 자랑스러운지 방글거리며 웃기만 했다.
“난 인간계도 궁금하거든.”
“…….”
“분명 신기하고 재밌는 일이 가득할 거야.”
“그렇지 않을 텐데.”
“…어째서?”
“…….”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인간계 뭐가 좋다고 저렇게 가고 싶어 하는 걸까. 사실 제갈량은 이전 기억 때문에 인간계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보는 것조차 괴롭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따르던 주군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곳. 그 주군이 아끼던 인간이 모여 있는 곳. 인간이 뭐가 예쁘게 보여서 하릴없이 그곳 구경을 다니겠나 싶었다.
하지만 서서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모든 것을 따뜻하게 바라보고 호기심이 많은 성격은 자연스럽게 다른 곳으로 향하기 마련이었다. 다른 궁은 멋대로 들어가지 못한다고 가르쳐뒀으니, 인간계가 눈에 띈 모양이었다. 그때부터 조르기 시작했는데 제갈량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제갈량도 같이 가면 좋을 텐데.”
“…그런 곳 안 가요.”
“왜?”
“…….”
“왜 항상 제갈량은 궁에서 나가지 않을까.”
“그저…이곳이 응당 있어야 할 곳이니까 그런 것이지 다른 이유가 있을 리 있나요.”
“…….”
이 모순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안 내려가 본 것도 아니었다. 당장 지금도 누구보다 인간계에 내려가서 주군의 흔적을 찾고 싶어 하지만, 이 장소가 버티기 위해선 제갈량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마음을 궁에 머무르기로 다잡았던 것인데, 서서는 제갈량의 마음을 완전히 읽진 못한 것 같았다.
“그럼 내가 다녀와서 제갈량한테 이것저것 알려주면 되겠다.”
“…….”
“제갈량도 알고 싶은 게 많은 거 아냐! 내가 다~ 알려줄게.”
“하지만…….”
“응?”
신선이 하고 싶은 일이 생긴다는 것은 본능적으로 무엇인가 알아챘다는 말과도 같았다. 이렇게 밑도 없이 고집을 부리는 경우는 더 그랬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되는 일과 아닌 일이 있는 법이었다. 아직 도술에 익숙하지 않은 서서를 혼자 보내기엔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그렇다고 제갈량이 따라나설 수도 없는 일이니 며칠 동안 계속 두고 보았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인간계에 대한 관심이 식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서서는 끈질기게 제갈량을 졸랐다.
결국, 제갈량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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