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뉴트/톰늍] MAZE IN THE TRAP 002
+) NOTICE
둘이 멀쩡하게 연애하는게 보고싶어서 시작한 평범한 세계에 대학교 AU 입니다.
플레어는 발병하지 않았고, 다들 알아서 잘 살고 있는 세계.
적당한 망상과 설정 붕괴가 언제나 함께 합니다 ㅇㅅㅇ)9
톰늍 대학교 편까지 연재하고 대학교 졸업 이후 버전을 따로 추가해 회지로 만들 예정입니다.
연재한 분량 자체를 지우진 않습니다.
write. 환월
Ⅱ.
토마스가 연구소에서 공부를 시작한 지 근 십 년쯤 되던 해였다. 찬 바람이 가시고 봄이 오나 싶었다. 방울방울 맺혀있던 꽃이 와르르 져버리자 어느새 햇볕이 조금씩 따가워졌다. 하지만 따로 학교를 졸업하고 입학하는 일이 없어 그다지 나이를 먹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작고 귀여웠던 아이는 성장기에 들어서면서 하루가 다르게 늘씬하게 자랐다. 어깨가 넓어지고 목소리가 조금씩 가라앉지 시작했다. 어릴 때 귀여운 모습을 잊지 못하는 선배 연구원들이 남몰래 눈물을 닦았다. 어릴 땐 올려다봐야 했던 연구소 누나와 형들을 내려다볼 만큼 자랐을 때, 에바 페이지가 토마스를 총장실로 불렀다.
이번에 시작하는 새로운 실험에 대해 조언이라도 해주시려나 싶어 별생각 없이 총장실을 찾아갔다.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오른손을 들어 두 번 노크하자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토마스는 조심스럽지만 익숙하게 문을 열었다. 손님을 맞는 것처럼 소파에 앉아있던 에바 페이지를 발견하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로 부르셨죠?”
“일단 앉아라.”
“혹시 이번 주에 시작될 실험에 관한 것이라면, 곧 보고서를 올리려고 준비 중이었습니다.”
“토마스.”
“네?”
“잠깐 연구소 일은 접어두고, 이번 학기부터 대학에 가서 공부하고 오도록 해라.”
토마스는 총장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설마 자신을 교수로 보내나 싶어 재차 물어봤지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차분하게 되물으려 했지만, 입에서는 잔뜩 놀란 목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네?”
“대학에 가라고 했다. 토마스. 필요한 절차는 이미 내가 학교 측과 연락해 끝내 놓았다.”
“갑자기 왜죠?”
갑작스러운 총장의 결정에 토마스는 눈을 크게 뜨면서 반문했다. 토마스는 어렸을 때부터 학교란 곳은 자신에게 필요 없다는 식의 교육을 받았기에 총장의 말을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 와 대학이라니. 그것도 갑작스러운 결정에 토마스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여기서 당장 대답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
그것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대학이라던가 하는 교육기관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필요한 자료는 거의 연구소 내에 소장이 되어있었고, 정 못 찾겠다 싶으면 연구원 자격으로 자료를 신청하면 그만이었다. 토마스의 기초 공부를 담당하는 선생들은 모두 고명한 학자들이었고, 오직 자신을 가르치기 위해 연구소로 들어오곤 했다. 연구가 시작되면 다들 기계적으로 움직였고, 자신이 맡은 일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런 곳에서 십 년도 넘게 살아 남들과 부딪히는 법을 모르는 청년은 대학이라는 공간을 생각하는 것부터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저…꼭 지금 말씀드려야 하는 일인가요?”
“왜 그러지?”
“너무 갑작스러워서요. 제가 거기에 가서 뭘 배워야 하죠? 전공 지식은 지금까지 여기서 배운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굳이 말하자면.”
“…….”
“외부에서 너의 사회생활에 대해 걱정하는 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지.”
“제 사회생활이 뭐가 어때서요?”
“알다시피 넌 우리가 도맡아서 교육했지. 연구소에서 모든 학교생활을 대신했지만, 일반인들의 눈엔 그것이 그리 정상적인 광경은 아니겠지. 정부에서조차 너에게 관심을 보이니 우리로선 할 수 있는 모든 제스쳐를 취해야 하는 입장인 거야.”
“그래서 제가 멀쩡하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대학이란 곳에 가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이건 너무 불공평해요. 사 년이란 기간이 얼마나 긴지 잘 아시잖아요. 전…….”
“토마스.”
“…….”
에바 페이지가 조금 엄한 목소리로 말하자 금방 입을 다물고 눈앞에 놓은 커피잔만 만지작거렸다. 사실 조금 호기심이 돌긴 했지만, 깊은 대화를 할 수 없다면 굳이 가고 싶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연구소에 들어왔기에 또래가 없었다. 그래서 당장은 친구라는 존재가 별로 아쉽지도 않았다.
“그럼 보여 주기용 쇼라고 생각하지 말고, 휴가라고 생각하렴.”
“네?”
“넌 여기서 십 년 동안 충분히 많은 결과를 우리에게 가져다줬어. 물론 끊임없이 연구하고 탐구하는 자세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인간의 몸은 과도하게 스트레스가 쌓이면 곧잘 고장이 나곤 한단다.”
“…….”
“앞으로 대학에 다닐 시간은 연구소에서 준 휴가라고 생각하렴. 네가 가진 지식이라면 대학에서 요구하는 수준은 코웃음이 나올 정도로 쉬울지 모른단다. 하지만 배울 점은 분명히 있겠지. 충분히 쉬고 대학만 졸업하면 다시 연구소로 돌아오면 되지 않겠니.”
“그렇기도 하지만…….”
“난 네가 정말 자랑스럽구나.”
저 소리를 들으면 어쩐지 거절할 수 없었다. 양손으로 문지르던 커피잔을 내려놓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에바 페이지가 웃으면서 준비해뒀던 서류를 탁자에 쭉 늘어놓았다. 입학 서류부터 토마스가 거주할 집에 대한 것까지 엄청난 양이었다. 에바 페이지가 총장 겸임을 하는 학교인 만큼 여러 곳에서 명성이 높은 유망주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시험 한번 안 치르고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천천히 서류를 살피던 토마스는 조금 흥미가 생겼다. 어차피 휴가라고 한다면 하고 싶은 일쯤은 다 해봐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섯 장 까진 꼼꼼하게 읽던 손길이 점점 빨라졌다. 종래엔 손끝으로 서류를 넘기면서 대충대충 읽었다.
“연구소에서 다닐 만한 곳인가요?”
“그러기엔 좀 멀지.”
“…그럼.”
“대학 근처에 위키드 연구원들의 거주 목적으로 지원해주는 건물이 있단다. 그중에서 넓은 곳을 골라서 네가 쓸 만하게 바꿔두었으니 거기로 가서 편하게 다니렴.”
“…….”
“대학 기숙사로 보내기엔 1인 기숙사라고 해도 시설이 내 마음에 차지 않고, 너도 불편할 거라 생각했다.”
“그렇긴 해요. 남들이랑 어울려서 자는 건 질색이라.”
“어차피 그 건물은 모두 우리 연구소 명의로 되어있으니, 걱정말고 편하게 살도록 해라.”
“…혼자서”
“왜 그러지?”
“아뇨. 혼자서 있는 게 오랜만이라. 여기는 1인실이긴 해도 다들 있었고…물론 대학 기숙사도 그렇다는 알지만…….”
“필요하다면 강아지 정도는 키워도 괜찮단다.”
“그건 좀 생각해 볼게요.”
토마스는 애써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다시 서류를 집어 들었다. 위키드에서 내준 곳은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건물이었다. 간단한 약도와 함께 이런 식으로 리모델링을 했다는 전개도도 함께 첨부되어 있었다. 혼자 살기엔 쓸데없이 넓어 보이는 집이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급하게 다른 곳을 구할 길이 막막했다.
다시 살펴봐도 저 집은 너무 넓었다. 혼자 소파에 앉아 멍하니 바라보면 어둠이 금방이라도 빛을 삼키며 기어 나올 것 같았다. 토마스는 그런 식의 침묵을 싫어했다.
‘차라리 기숙사에 들어간다고 할까.’
잠깐 다른 생각을 하던 토마스는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차라리 혼자서 넓은 곳을 쓰는 것이 낫지 다른 사람들과 억지로 공동생활을 하는 건 싫었다. 기숙사 1인실이라고 해도 연구소에서 토마스가 살던 곳의 반도 안 되는 크기일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얌전히 아파트로 들어가면 위키드에서 청소나 요리를 할 때 필요한 사람도 보내 줄 테니 신경 쓸 일도 적을 것 같았다. 어둠이 싫다면 불을 계속 켜놔도 괜찮다는 대답도 받았다. 그저 저곳에선 잠만 자면 될 것 같았다.
“입학식이 멀지 않았으니 당장 준비를 하는 편이 좋겠구나.”
“네?”
“아무리 그래도 입학식은 참여해야 하지 않겠니. 네가 하던 연구는 나머지 사람들에게 알아서 인수인계가 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아니 그런 건 아니고…총장님!”
토마스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가져가야 할 짐이 무엇인지도 알기 어려웠고, 제대로 정리하지 않고 잔뜩 흩어둔 보고서도 순간 뇌를 스치고 지나갔다. 끄응. 느리게 신음을 내뱉던 토마스가 먼저 가보겠다고 일어섰다. 에바 페이지는 허락의 의미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라도 자신의 것을 정리하지 않으면, 시간에 맞출 수 없을 것 같았다.
급하게 돌아가는 애제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에바 페이지는 굉장히 만족스러운 얼굴로 식어버린 잔을 들었다. 토마스는 여전히 착하고 귀여운 연구원이었다.
✗ ✓ ✗
“…생각보다 짐이 없는데.”
토마스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하염없이 방안을 둘러보았다. 어쩐지 먹먹한 마음에 돌덩이가 하나 더 들어앉은 것 같았다. 이 넓은 방에 가득 차있는 물건중 토마스의 것은 몇 가지 없었다. 각종 생필품은 모두 위키드가 지급한 것이었다.
애초에 이곳에 들어올 때 혈혈단신으로 들어온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후로 필요한 것이 있다면 누군가에게 말하면 그만이었다. 토마스가 받는 월급은 차곡차곡 통장에 쌓이고 있었지만, 그 돈을 꺼내 쓸 일이 별로 없었다. 가지고 싶은 것도 없었고, 부족한 것도 없이 지냈던 나날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도대체 뭘 들고 가야 하는 거지.’
가장 소중하게 다루곤 했던 컴퓨터도 연구 자료가 잔뜩 들어있으니 절대 연구소 밖으로 들고 갈 수 없었다. 새로 들여온 컴퓨터와 패드를 집에 가져다 놓았다고 말했지만, 새 물건은 언제나 길들이기 어려웠다. 갑자기 연구소 밖으로 내던져진 토마스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가지고 갈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챙기다 보니 짐이 점점 늘어갔다. 커다란 가방에 이것저것 집어넣던 토마스가 침대 한구석에 놓여있는 작은 인형을 쳐다보았다. 베개에 반쯤 가린 채 구겨져 있는 인형을 본 순간 꼭 가져가야 할 물건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인형은 연구소에 온 지 일주일 정도 됐을 때 받은 것이었다. 어미 품에서 떨어진 강아지처럼 밤마다 징징대는 어린 토마스를 위해 연구원들이 마련한 선물이었다. 남자 연구원들은 머쓱한 표정으로 큼큼 헛기침을 하고, 여자 연구원들은 생글생글 웃으며 인형을 내밀었다. 토마스는 성장이 조금 더딘 편이라 체구가 작았다. 품 안 가득 들어오는 인형을 쳐다보면서 코를 훌쩍이자 연구원들이 앞다투어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부들부들한 아기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괜찮아. 토마스. 응? 여기선 아무도 널 해치지 않아. 모든 게 잘 될 거야. 어린 마음에 들어앉은 그 한 마디에 인형을 꾹 움켜쥐고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내 거지.”
토마스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발견한 자신의 물건을 집어 들었다. 얼마나 안고 잤는지 군데군데 금방이라도 실밥이 터질 것처럼 낡은 인형이 한 손에 가볍게 잡혔다. 가방을 다시 열어서 남는 공간에 인형을 쑤셔 넣었다. 의자에 걸쳐둔 가운을 잠시 바라보던 토마스는 영 어색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한동안 저것을 입을 일이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생소했다. 자신의 방에서 나와서 문을 닫았다. 옆에 달린 패널에 카드를 갖다 대자 짧은 전자음과 함께 문이 잠겼다.
“이제 진짜 가는 건가.”
에바 페이지가 집까지 편하게 타고 가라며 차를 내주었다. 연구소를 나오기까지 두 번 정도 더 카드를 사용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커다란 유리문을 열고 나왔을 때, 이제 막 물들기 시작하는 울긋불긋한 나무들이 토마스 눈앞에 펼쳐졌다.
“벌써 가을이야?”
“이쪽으로 오시죠.”
“잘 부탁합니다.”
처음 연구소에 들어왔을 때 탔던 차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토마스가 훨씬 더 커버렸다는 정도일까. 뒷좌석에 편하게 등을 기대고 다리를 꼬았다. 어두운 유리를 통해 토마스는 흐릿하게 바깥을 보았다. 가을은 언제나 생각보다 짧을 테니 곧 겨울이 올 것 같았다.
기대. 불안감. 초조. 온갖 감정이 뒤섞인 마음은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몇 번이나 숨을 고르면서 눈을 깜박이던 토마스는 아예 잠이라도 자려는 듯 온몸에 힘을 빼고 시트에 기댔다. 뜻하지 않게 받은 휴가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깨에 걸고 있던 가방끈이 차가 흔들리면서 스르르 흘러내렸다. 토마스는 그런 것도 모른 채 잠이 들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도착했다는 기사의 목소리를 저 멀리서 들었다. 꼭 같은 꿈을 두 번째 꾼 토마스는 영 찝찝한 표정으로 눈을 떴다.
“바로 앞 건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이름을 말씀하시면 알아서 해주실 겁니다. 그럼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총장님께는 숙소에 있는 휴대폰으로 연락하시면 됩니다. 따로 만들어두셨다고 하셨습니다.”
“하, 날 너무 어린애로 보시네.”
말은 그렇게 하지만 토마스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것에 익숙했다. 차 문이 닫혔다. 자신을 여기까지 데려다 준 차도 떠나고 정말 혼자 남아버렸다. 커다란 가방을 한쪽 어깨에 메고 밖으로 툭 떨어진 토마스는 한동안 거리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사 년 동안 살아야 하는 곳을 눈에 새기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 ✓ ✗
“와우.”
넓을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상상 이상이었다. 기껏해야 방 두 개정도 딸린 집이 아닐까 했지만, 거실부터 부엌, 손님방에 개인용 창고까지 갖춰진 시설에 토마스는 약간 질린 표정이었다. 새삼스럽게 위키드 연구소가 얼마나 재력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옛날부터 있었던 가구를 싹 내버리고 새것들로 싹 채워진 곳에선 새집 냄새가 났다. 새집 냄새라는 것은 곧 사람이 사는 것 같지 않다는 뜻과도 같았다.
넓은 곳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있으려니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처럼 추웠다. 대충 온도를 올리고 비틀비틀 걸어서 집을 구경했다. 그러다 곧 흥미를 잃고, 침대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 앞으로 쓰러지는 것처럼 누워버렸다. 푹신한 이불에서도 솜 냄새가 났다.
편하긴 하지만, 너무 편해서 불편했다. 반쯤 이불에 가린 눈으로 자신의 가방을 찾던 토마스가 간신히 일어났다. 지퍼를 열고 인형을 꺼내 침대 한구석에 내려놓았다. 짐이야 천천히 정리하면 그만이었다. 이곳에 올 사람은 자신 외에 아무도 없었다.
“오늘부터 새집에서 1일이야. 내 친구.”
물론 인형에게 말거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모르겠다. 뭘 하고 입학식 때까지 시간을 보낼까.’
입학식까진 일주일 정도 시간이 있었고, 토마스는 할 일이 없었다. 도서관이라도 갈까 싶었지만, 곧 자신이 원하는 수준의 전공 서적이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흥미를 잃어버렸다. 일단 푹 자고 일어나서 발이 닿는 대로 돌아다니기로 했다. 스스로 가겠다는 것도 아니었고, 반쯤 억지로 보내진 터라 모든 경비는 연구소에서 대고 있었다. 사실 토마스 한 사람이 사치를 해봤자 얼마나 하겠느냐만, 위키드의 재력은 상상보다 많았다. 자신이 당연한 듯 받았던 혜택을 보통 연구원들은 일생에 한 번 얻기도 힘든 기회라는 것을 천천히 깨달아가고 있었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그대로 이불 위에서 잠든 토마스는 또 희미한 불빛을 따라 하염없이 걷는 꿈을 꾸었다.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와서 그런지 몰라도 오늘따라 걸어가는 꿈길이 너무 낯설었다. 순간 잘못 밟은 곳에 땅이 푹 꺼지며 몸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허억!!”
토마스가 놀라서 벌떡 일어났을 때 간신히 침대 끝에 걸쳐있던 몸은 중심을 잃고 그대로 와장창 무너졌다. 바닥에서 한동안 꿈지럭거리던 토마스가 앓는 소리를 하며 침대를 잡고 일어섰다. 이리저리 허리를 틀면서 가볍게 운동을 했다.
“뭐…아침에 일어나는 덴 조금 에러가 있었지만, 나쁘지 않은 컨디션이야. 후우,”
냉장고를 뒤져서 대충 가장 먼저 보이는 먹을 것을 꺼내 입에 물었다. 샌드위치를 우물대면서 주스를 따랐다. 토마스가 위키드에서 잘 먹고 좋아하는 것으로만 채워진 냉장고가 새삼스럽게 감동이었다. 물론 맛도 위키드에서 먹던 것과 같았다.
입은 채로 잠을 자서 잔뜩 구겨진 티셔츠를 훌떡 벗어냈다. 가방을 뒤져서 가볍게 후드티를 꺼내 입고, 밖으로 훌쩍 뛰어 나갔다.
“자, 어디부터 가볼까.”
발길이 닿는 대로 떠돌아다닐 예정이었지만, 그러다 집에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았다. 인터넷에 올라온 정보를 따라 이리거리 걷기 시작했다. 널찍널찍하게 만들어진 길엔 토마스 또래의 학생들이 많았다. 여학생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까르르 웃는 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토마스가 연구소에 매여 산 것은 아니었지만, 보통 멀리 나가는 일이 있을 때면 의례적으로 인터뷰 같은 귀찮은 일이 항상 동반되었다. 일정도 빡빡하고, 짜증이 나서 당장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사람이 바깥 구경을 제대로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할 일이 끝나면 억지를 부려서라도 연구소로 돌아오곤 했다. 나이가 먹으면서 대외 노출은 점점 줄어들었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분명 여기도 왔었던 것 같은데…….’
토마스는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려고 열심히 노력 중이었다. 에바 페이지와 관련 있는 곳에 자신이 안 왔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어렸을 적 희미한 기억을 지금에서야 붙잡기엔 역부족이었다. 처음 이 거리에 온 사람티를 팍팍 내며 두리번거리던 토마스가 패드 검색결과에 표시된 가게를 찾아냈다. 조금 멀리 돌아온 것 같았지만, 길을 잃지 않은 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검색 결과대로라면 적당한 가격에 맛도 나쁘지 않아 학생들이 주로 찾는 카페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시끌시끌한 소리가 토마스를 와르르 덮쳤다. 이런 소음에 익숙하지 않았다. 겨우겨우 커피 한잔을 주문하고 비어있는 테이블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 머리 아프다.”
“너 여기 처음 오지?”
고개를 푹 숙이고 한숨을 쉬고 있던 토마스의 머리 위로 낯선 목소리가 후두두 떨어졌다. 처음엔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모르고 있던 토마스는 눈 앞에 어른거리는 인영에 깜짝 놀라 고개를 휙 들었다. 토마스보다 밝은 머리 색을 가진 학생이 테이블 앞에 앉아 씩 웃고 있었다.
“누구시죠?”
“너랑 같은 학생이지. 너 여기 신입생 아냐?”
“맞는데요.”
“역시 내 눈은 정확하다니까. 여기 와서 이렇게 지친 표정으로 테이블에 앉아있는 녀석들은 보통 신입생이거나 신입생이지/”
“…….”
토마스는 자신이 아는 사람인가 해서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결론은 역시 모르는 사람이었다. 낯선 이의 갑작스러운 친절에 경계심을 풀풀 흘렸다. 큰 눈만 깜박이면서 자신을 보는 신입생이 퍽 웃기고 마음에 들었는지, 낯선 사람이 토마스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
“아 일어서. 이렇게 시끄러운 데서 커피 마실 생각이 들어?”
“…하지만.”
“괜찮다니까. 어디 보자.”
토마스의 커피를 일회용 컵에 다시 담아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을 말릴 수 없었다. 아르바이트생과 꽤 친한 사이인 듯 낄낄 거리면서 어깨를 쳤다.
“원래 규정상 안 되는 건데.”
“나 여기 단골이잖아. 한 번만 부탁한다고. 한 번만.”
“진짜 널 이길 수가 없다. 진짜 이번뿐이야? 나 걸리면 매니저한테 진짜 혼난다고!”
“알았어.”
웃으면서 벽에 기대있던 사람이 어디 가지 말라는 듯 토마스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곧 다시 담아준 커피 두 잔을 들고 와서 하나를 토마스에게 안겨주었다. 단호하게 뻗은 손을 거절할 수 없어서 받아든 커피의 온기가 손바닥에 스며들었다.
“가자니까?”
“저기 누구 신데…….”
“아, 진짜 답답한 학생이네. 댁이 다닐 학교 선배니까 걱정 놓으라고. 내가 설마 널 잡아먹겠냐.”
“…….”
뜻하지 않은 만남에 쓸려간 토마스는 손이 이끄는 대로 끌려다녔다. 걸을 때마다 조금 불안해 보이는 모습에 커피라도 들어줄까 싶었지만, 말을 걸 여유조차 없었다. 비틀거리면서도 무슨 발이 그렇게 빠른지 토마스가 제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한적한 벤치에 도착했다.
“앉아. 뭐해?”
냉큼 걸터앉아 커피를 입으로 가져간 사람이 환하게 웃었다. 잘 마른 볏짚이 이런 색일까. 바람이 불 때마다 약한 금빛을 띠며 빛나는 머리카락을 보던 토마스는 시키는 대로 커피를 마셨다. 입안에서 쌉쌀하게 도는 커피 맛을 느끼기도 전에 옆 사람이 잔뜩 신경 쓰였다. 잔에 약간 남은 커피가 완전히 식을 때 까지 벤치에 앉아있던 둘이 겨우겨우 헤어진 것은 해가 질 무렵이었다. 많은 말을 하지도 않았다.
“정신없는 하루였어.”
토마스는 집으로 가기 위해 왔던 길을 다시 걸으면서 오늘 일을 그렇게 기억했다.
“진짜 뭐였지. 그 사람. 이름이라도 물어볼 걸 그랬나.”
인제 와서 후회해 봤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서로 반대쪽으로 헤어진 지 한참 된 사람을 따라갈 수 없었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던 토마스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정신없는 하루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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