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뉴트/톰늍] MAZE IN THE TRAP vol.2 003 [선공개분 完]
+) NOTICE
둘이 멀쩡하게 연애하는게 보고싶어서 시작한 평범한 세계에 대학교 AU 입니다.
플레어는 발병하지 않았고, 다들 알아서 잘 살고 있는 세계.
적당한 망상과 설정 붕괴가 언제나 함께 합니다 ㅇㅅㅇ)9
선연재분이 끝났습니다!
이 이후 작업물은 3월 메런온에 회지로 만들어집니다 봐주셔서 감사해요!
1권에서 이어지는 같은 커플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
어느정도까지 연재 후 뒷부분을 추가해 회지로 만들 예정입니다.
책이 나와도 연재한 분량 자체를 지우진 않습니다..
write. 환월
뉴트는 바득바득 우기면서 걸어가겠다고 했지만, 토마스가 거절했다. 지루한 싸움은 언제나 토마스가 이겼다. 뉴트는 뚱한 표정으로 조수석에 앉아서 창문 밖으로 휙휙 지나쳐가는 풍경을 바라봤다. 느리게 깜박이는 눈에 앙상한 가로수가 한가득 담겼다가 곧 사라졌다.
“…뉴트?”
“왜?”
“그냥.”
“운전이나 똑바로 하시죠. 토마스 씨.”
뉴트가 고개를 돌리며 킥킥거리며 웃었다. 토마스는 자신의 얼굴에 닿는 시선을 느끼자 헛기침을 했다. 핸들을 잡은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가는 걸 보는 뉴트는 마냥 재밌는 눈치였다. 선글라스를 슬쩍 내려서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사람을 한참 쳐다봤다. 그리 먼 거리를 이동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길게만 느껴지는지 알 수 없었다.
“뭐? 사온다고?”
“…저긴 너무 눈에 띄지 않을까?”
“…….”
“생각보다 귀찮은 일이네. 이거.”
“사서 어디로든 가면 되지.”
토마스가 싱긋 웃으면서 운전석 문을 닫았다. 금방 오겠다는 것처럼 손을 휘휘 흔들어 보이고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밖에선 안이 보이지 않는 차 안에서 뉴트는 사람들이 가득한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
생각보다 더 답답했다. 뭐랄까 같은 사람인데 서로 섞일 수 없는 기분이었다. 물론 섞이려 한다면 귀찮아지는 쪽은 뉴트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공주님 취급을 바란 건 아니었는데.”
어쩔 수 없다는 걸 이해하면서도 괜히 한마디 더 보태고 싶은 법이었다. 사람 구경도 시들해지자 뉴트는 앓는 소리를 하면서 시트에 허리를 깊숙이 묻었다. 아무래도 이틀은 앓아누울 거 같은데 다음 촬영은 괜찮을지 걱정이 되었다.
똑똑.
“음?”
잠깐 정신을 판 동안 시간이 뙈 지난 거 같았다. 밖에서 토마스가 문을 열어달라고 손짓을 하고 있었다. 뉴트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자 다시 한번 창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아. 뉴트가 잠금장치를 풀자 토마스가 한 손 가득 종이봉투를 든 채 문을 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었어? 한참 창문을 두드려도 듣지도 못하고 말이야.”
“그냥 이런저런.”
“그래?”
“응.”
토마스는 딱히 긴 말을 하지 않았다. 품 안에 잔뜩 들고 온 것을 뉴트에게 넘겨주고 운전석에 앉았다. 가볍게 문을 닫고 나서 핸들에 팔을 얹곤 뉴트를 돌아봤다.
“가까운 곳으로 갈까. 아니면…….”
“뭐.”
“응?”
다짜고짜 뉴트가 물려주는 햄버거를 한입 베어 문 토마스가 눈을 깜박이면서 우물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뉴트가 크게 웃으면서 자신의 몫을 꺼내 들었다. 바삭바삭 구겨지는 얇은 종이를 벗겨내고 한 손에 든 채 좀처럼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뉴으.이거 머아.”
“가끔은 그냥 여기서 먹어도 되잖아. 안 그래? 뭘 귀찮게 사람 없는 곳을 찾아서 가려 그래.”
“아지마…….”
“여기가 아마 사람에 제일 없는 장소일 텐데.”
“…….”
우물거리는 토마스의 입을 바라보던 뉴트가 여전하단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신도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비싸고 좋은 차 안에서 먹는 음식이 패스트푸드인 햄버거라니 뭔가 아이러니했지만, 둘 다 좋으면 된 것 같았다. 컵 표면에 얼음이 녹은 물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뉴트가 손끝으로 컵을 들어서 콜라를 한 모금 마셨다. 이런 추운 날에 콜라라니.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이러고 있으니까 진짜 할 일 없어 보이지 않아?”
“지금은 그렇잖아.”
“지금 이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 중 누가 이런 차 안에서 햄버거나 먹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겠어. 안 그래?”
“맞아.”
“근데 가끔은 이런 것도 좋다.”
뉴트는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햄버거 하나를 다 먹을 때까지 연신 싱글거리며 입가에서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다 먹은 햄버거 종이를 구겨서 종이봉투 안에 던져 넣었다. 아, 잘 먹었다. 뿌듯한 표정으로 얼음이 반쯤 녹은 콜라를 손끝으로 들어 올렸다.
“배불러?”
“물론.”
“더 먹을 게 필요하면…….”
“그럴 리가. 이제 됐어.”
엄지 손끝으로 입술에 묻은 소금을 닦아낸 뉴트가 나른한 표정으로 토마스를 올려다보았다. 눈을 깜박거리면서 그 시선을 받아낸 토마스가 햇살이 부서지는 것처럼 웃었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생활이 계속되고 있었다. 뉴트는 이 정도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다. 토마스도 마찬가지였다. 아직은 모든 것이 맞지 않아 조금 어색하긴 하지만, 천천히 맞춰나간다면 분명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둘이서 행복하면 그만이지.’
“무슨 생각해?”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인데 그냥 정신 놓고 내 마음이 가는 대로 좋은 일만 하고 사려는 생각?”
“뉴트 답네.”
“지금 나 욕하는 거야?”
“으응? 그럴 리가.”
토마스가 또 웃었다. 하긴 친구들은 다들 저런 너드가 뭐가 좋다면서 놀리곤 했다. 일 더하기 일을 물어보면 둘이라는 대답밖에 못 하는 녀석이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토마스한테 말한 대로 한번 사는 인생인데, 자기 좋다고 해주는 사람과 사는 게 뭐가 나쁜 건지 알 수 없었다.
거리에 그대로 차를 주차한 채 저녁 해가 건물 너머로 지는 것까지 바라본 둘이 집으로 돌아왔다.
✗ ✓ ✗
의외의 복병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언제나처럼 뉴트가 먼저 할 일을 하러 나갔다. 토마스는 뉴트의 뒷모습을 오래오래 쳐다보면서 잠깐 정신을 팔았다. 아차 하고 시계를 봤을 땐 한창 출근할 시간이 지나있었다. 허둥지둥 연구실로 뛰어가는 모습을 뉴트가 봤다면 저 녀석 또 그런다면서 웃었을 것이 뻔했다. 두 사람만 사는 공간이 텅 비자 곧 쓸쓸한 공기가 집안 가득 내려앉았다.
둘은 온종일 비슷한 시간을 보냈다. 물론 하는 일은 극과 극이라고 할 만큼 달랐지만, 가끔 넋을 놓는 표정이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행동을 보면 꼭 닮아있었다. 누군가 연락이 올 곳이라도 있냐고 물어보면 화들짝 놀라서 아니라고 극구 부정했다. 액정에 올라오는 팝업 창이라도 보일까 봐 꼭 뒤집어 놓는 버릇도 똑같았다. 주변 사람들이 한참 좋을 때라고 하거나 말거나 둘은 언제나 행복했고, 그 정도로 충분했다.
“토마스 오늘 무슨 좋은 일 있어?”
“네? 네.”
“그럴 줄 알았다.”
“네?”
살살 웃으면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토마스가 손으로 볼을 문질렀다. 연구원들이 보기엔 좋아죽으려고 하는 것 같은데 어색하게 숨기려고 하는 것이 귀여웠다.
같은 시간 뉴트도 도착한 메시지를 읽고 잔뜩 웃고 있었다. 주변에 몰려있던 스태프들이 하나둘 뉴트를 놀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일상이었다. 이럴 때마다 항상 철벽같던 모델이 허둥댄다는 사실을 촬영장 모두가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렇게 한번 웃고 나면 항상 좋은 사진이 나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운 미소가 은은하게 뿌려진 사진을 볼 때마다 촬영 감독은 애인 좀 촬영장에 데려다 놓자고 농담을 했다. 이번에야말로 레전드 컷 한번 찍어보자고 하는 소리에 뉴트는 질색했지만, 적극적으로 싫어하지도 않았다.
“저번처럼 한 번도 데리고 오지?”
“됐어요. 바쁜데.”
“이제 보여주기 싫은 건 아니고?”
“아, 감독님!”
“아니다. 나 아무 말도 안 했다?”
“진짜…….”
물론 대외적으로 활동하는 모델에 비하면 토마스는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부류의 유명인이었다. 하지만 뉴트 곁에서 한두 마디 얻어들은 것을 모아보면 그렇게 유명하고 잘난 사람도 없었다. 일단 위키드 연구소에 수석 연구원으로 있는 것부터 대단한 일이었다. 뉴트야 이미 익숙해진 것인지 그게 놀랄만한 일이냐고 되물었다. 은근히 뿌듯함을 숨기지 않는 표정을 보면서 스태프들이 뉴트 씨가 달라졌다면서 소근거렸다. 물론 그다음 뒤에서 다 듣고 있는 당사자의 눈총을 받아야 했다.
✗ ✓ ✗
“뉴트 오늘은 일찍 왔네?”
“어? 촬영이 좀 일찍 끝나서. 언제 들어온 거야?”
“두 시간 전에? 마저 할 일이 있어서 들고 왔지.”
“무슨 일인데?”
“…논문 쪽도 마무리해야 하고, 우리 연구소 쪽으로 할당된 과제도 끝내야 하고. 언제나 그렇지 뭐.”
“어려운 일이네.”
“그다지? 난 모델이 더 힘들 거 같은데.”
책상에 바짝 붙어있던 몸이 기지개를 쭉 펴면서 뉴트를 돌아봤다. 그 얼굴엔 삐뚜름하게 안경이 걸려있었다. 뉴트가 토마스 어깨 너머로 책상을 넘겨다보니 빼곡하게 뭔가 적힌 리포트 용지와 노트북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안경 너머로 깜박거리는 눈을 보면서 뉴트가 두 손가락으로 자기 양 눈가를 살짝 밀어 올렸다.
“토마스 안경 삐뚤어졌어.”
“어? 어.”
뉴트와 똑같은 손짓으로 안경을 쓱 밀어 올린 토마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뉴트의 허리를 감싸 안고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뉴트가 손으로 토마스의 머리를 슬쩍 밀어내다 이내 포기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뉴트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킬킬 웃으면서 토마스에게 조금 기대자 허리를 안고 있는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은근슬쩍 이곳저곳을 지분거리는 손가락이 느껴졌지만, 딱히 거부하지 않았다. 목덜미에 가늘게 내려앉는 숨이 바삭바삭 부서져 내렸다.
“밥은 먹었어?”
“아니 끝나자마자 왔어.”
“그래? 그럼 뭐 먹을까?”
“늘 먹던 거 간단하게 먹지 뭐.”
몸매 관리를 해야 한다고 말은 하면서 먹는 건 굉장히 잘 먹었다. 토마스는 항상 뭔가 식단을 짜주려 했지만, 뉴트가 낄낄 웃으면서 너나 먹으라는 소리를 하자 입을 다물었다. 아마 먹은 만큼 따로 운동하는 것 같은데, 집에서 먹는 양을 보면 누가 봐도 보통 모델 식단은 아니었다. 타고난 체질이 저런 모양이라면서 토마스는 항상 신기해했다.
물론 뉴트는 매일 책상 앞에 붙어있으면서 인스턴트를 먹는 토마스를 더 신기해했다. 너야말로 채소도 먹고 운동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웃었다. 물론 그렇다고 운동을 안 하는 것도 아니었다. 토마스는 달리는 것을 좋아하니까 그걸로 충분했고 뉴트는 따로 관리를 받으니 서로 의미 없는 말을 무심하게 건네고 있었다.
저녁 식사 시간은 생각 외로 조용했다. 토마스가 익숙하게 민호가 실린 신문을 건네주자 뉴트가 익숙하게 받아들었다. 이 녀석 잘하고 있나 모르겠네. 언제나 같은 걱정이었다. 사실 뉴트가 걱정하는 것보다 민호는 훨씬 잘하고 있었다. 스포츠면만 펴면 사흘에 한 번꼴로 민호 사진을 볼 수 있었고, 채널을 돌리다 보면 여기저기 인터뷰를 하느라 바쁜 모습도 심심하지 않게 볼 수 있었다. 한 손에 두툼한 수제 샌드위치를 들고 기사를 읽던 뉴트가 신문을 옆에 내려놓았다.
“그래도 잘하고 있나 보네.”
“아까 뉴트 오기 전에 전화 왔었어. 대회 끝나면 바로 집에 한 번 오겠다고 하던데.”
“걘 멀쩡한 자기 집 팔았다냐? 왜 자꾸 여기로 기어들어 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던 뉴트가 커피 잔을 집어 들었다.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입술을 살짝 핥았다. 잔이 유리에 부딪히는 소리가 맑게 울렸다.
“하긴 얼굴 본지도 오래됐지.”
“그러게.”
“왜 또 그렇게 쳐다봐?”
“아냐. 아냐.”
“…하여튼.”
뉴트가 흘낏 기사를 한 번 더 넘겨다보면서 말끝을 흐렸다. 토마스는 언제나 처음처럼 뉴트를 대했다. 처음 하던 그 말을 지키기라도 하려는 것 같아서 몇 번이나 이제 적당히 해도 된다고 했지만, 자기 딴엔 그렇게 못하겠는지 여전했다. 몸도 섞고 가까워질 만큼 가까워 졌는데 왜 가끔 저런 것을 보면 처음 만났을 때처럼 부끄러워지는지 알 수 없었다.
“…….”
“왜?”
“그냥. 좋아서.”
가끔 지나가는 한 마디에 볼이 붉게 달아오르면 토마스가 귀신같이 알아채곤 뉴트를 쳐다보았다. 그러면 항상 그 눈 속에 푹 잠길 것 같았다. 정신이 나갈 것 같아 눈을 살짝 돌리면 끝까지 쫓아왔다. 결국, 버티다 못해 웃고 마는 둘 사이엔 따뜻한 공기가 넘쳐흘렀다.
“오늘 바빠?”
“…조금.”
“그럼 할 일 다 하고 보자.”
뉴트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면서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토마스가 먼저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통 땐 들어가기 싫어서 커피도 한 잔 더 내려서 들어가는데, 곧장 방으로 향하는 걸 보면 어지간히 바쁜 일 인 것 같았다. 뉴트는 딱히 집에 돌아와서 해야 할 잔업이 없어서 언제나 바쁘다는 연구원을 먼저 들여보내고 설거지를 하곤 했다.
“그럼 설거지를 해볼까?”
사실 설거지와 부엌 정리라고 해봐야 별것 없었다. 보통 저녁으로 먹는 건 밖에서 사 온 샌드위치나 가벼운 스튜였기에 치워야 할 것이 많진 않았다. 컵 두 개와 접시 두 개. 그리고 자잘한 종이. 뉴트는 하나하나 눈대중을 하면서 컵부터 들었다. 싱크대에 컵과 접시를 가져다 두고 샌드위치를 쌌던 종이를 구겨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설거지거리를 깨끗하게 씻어서 올려두고 수건에 손을 닦았다.
“치울 놈들이 몇 개 없어서 다행이긴 한데.”
막상 가벼운 설거지를 끝내고 나니 할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TV를 켜자니 바쁜 사람 집중력이 흐트러질까 걱정이 됐다. 사실 토마스는 한 번 할 일에 집중하면 다른 소리가 안 들린다며 편하게 하고 싶은 것을 해도 된다고 여러 번 말했다. 하지만 미안한 마음에 적당히 저번에 읽다가 놔둔 책을 들고 소파에 앉았다.
사박. 사박.
얇은 종이 넘기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이마에 약하게 주름이 잡혀가는 뉴트는 어느새 책에 푹 빠져 있었다. 요즘 바쁘게 일을 하는 동안 반도 읽지 못하고 놔뒀던 책이었다. 책에 나오는 주인공은 자신과 비슷한 거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토마스와 닮아있었다. 미묘하게 같은 듯 다른 주인공이 책장을 넘길 때마다 바쁘게 움직였다. 뉴트가 눈을 깜박이면서 책을 든 채 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옆 탁자에 올려뒀던 책갈피로 읽었던 곳을 표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큼큼. 목이 바짝 말랐는지 뉴트가 손으로 목을 쓰다듬었다. 냉장고를 뒤져서 마실 것을 찾던 뉴트가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더니 부엌 밖으로 걸어가서 토마스 방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토마스, 뭔가 마실 거 가져다줄까?”
“…….”
“토마스?”
“…….”
“하긴 대답할 리 없나.”
뉴트가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냉장고를 뒤지기 시작했다. 집중하면서 뭔가 손으로 집어 먹는 건 좋아하지 않으니 마실 것을 찾았다. 딱 두 개 남아 오렌지 주스 병을 손에 들었다. 아무래도 내일 당장 같이 장이라도 보러 나가야 할 것 같았다. 아무리 며칠 대충 먹고 살았다지만 이렇게 냉장고가 비어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한 손에 하나씩 주스 병을 든 뉴트가 토마스의 방으로 들어갔다. 살짝 열린 방문 틈으로 조용히 바라보니 바쁘게 필기하는 뒷모습이 보였다. 발끝으로 문을 살살 열고 들어가서 바로 옆에 설 때까지 토마스는 뉴트가 가까이 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자.”
“으아악!”
“뭘 그렇게 놀라. 잠깐 휴식 시간입니다. 토마스 씨.”
“뉴트?”
“그대로 두면 또 밤새 움직이지도 않을 것 같아서. 냉장고가 텅 비어서 먹을 만한 것이 이것뿐이더라.”
“조금만 있다가 쉬려고 했는데”
“그럼 지금부터 쉬면 되겠네. 받아.”
“응?”
휙 던져준 유리병을 두 손으로 받은 토마스가 의자를 빙글 돌려 앉았다. 벌써 뚜껑을 따서 입으로 가져간 뉴트가 눈을 가늘게 접으면서 웃었다. 길쭉하고 늘씬한 몸을 따라 토마스의 시선이 흘러내리는 걸 보면서 눈썹을 바짝 치켜 올렸다.
“지금은 뭐하는 중이야?”
“어? 연구 목적 설정? 곧 장기 프로젝트 들어갈 거 같아서.”
“…흐응”
반쯤 마신 주스 병을 책상 가장자리에 올려둔 뉴트가 슬슬 토마스의 책상을 구경하고 싶은지 몸을 바짝 붙여왔다. 자연스럽게 토마스의 머리 위에 턱을 얹었다. 뒤에서 목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빼곡하게 단어가 적힌 종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무슨 주제로 프로젝트를 하는데?”
“어…인간이 얼마나 오래 살 수 있는지?”
“음?”
“인간에게 일어나는 뇌 관련 질환을 통제해서 건강하게 살 수 있게 만들려고 하는 노력 중 하나지.”
“…….”
“물론 우리 연구소 전문은 뇌와 신경계 쪽이지만, 더 나아가서 외상으로 불편한 곳을 고칠 수도 있다고 생각해.”
“…….”
“왜 그래?”
갑자기 심각해진 뉴트가 말이 없었다. 토마스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신나서 이것저것 말해주다가 무겁게 누르는 무게를 느꼈는지 더듬더듬 손으로 뉴트의 팔을 잡았다.
“뉴트?”
“…….”
“왜 말이 없어?”
“그렇게 사람이 살아서 뭘 해?”
“응?”
뉴트가 불쑥 던진 말에 토마스가 흠칫 놀라며 어깨를 떨었다. 무슨 말을 들은 건지 머리로 잘 설명이 되지 않았다. 잘못 들었나 싶었다. 하지만 뒤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시선을 떨칠 수 없었다. 뒤통수가 짜릿짜릿해지는 따가움에 결국 토마스가 억지로 고개를 틀었다.
“…뉴트?”
토마스는 싸늘하게 식어버린 표정을 보면서 자신이 무슨 말을 잘못했는지 몇 번이나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뉴트가 화낼만한 단어를 말한 적 없었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는 사람은 도무지 방금 전까지 함께 웃고 있던 뉴트가 아닌 것 같았다.
“내가…뭐 잘못 말했어?”
“…….”
“뉴트!”
“그렇게까지 해서 사람을 꼭 살려야 해? 다치고 아픈 사람은 죽을 권리도 있는 거잖아.”
"뭐?"
"병신을 살려놓는다고 고마워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야. 그건 그냥 과학자들의 이기주의지."
뉴트의 입에서 싸늘한 비수가 섞인 말이 툭툭 튀어나왔다. 그런 말을 듣는 토마스는 머리가 하얗게 바래서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왜 뉴트가 저런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머릿속에 마흔여섯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과연 뉴트가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왜 화가 났는지 물어보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방금까지 다정하게 말을 걸던 사람은 애초에 이 공간에 존재하지 않던 것 같았다. 토마스는 입을 열면 자신을 주체할 수 없을 거 같아서 입술을 꾹 깨물었다.
결국, 큰소리가 났다.
책상을 손바닥으로 세게 짚고 일어난 토마스가 뉴트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이글거리는 눈빛을 보던 뉴트는 조금 당황한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앞에 했던 말을 부정하진 않았다. 도대체 어떤 단어가 문제였는지 희미하게 알아차렸다. 하지만 토마스는 그것만은 뉴트에게 양보할 수 없었다. 나머지를 다 져줘도 괜찮지만, 유일하게 고집을 꺾지 않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토마스는 이런 일이 생기면 언제나 한 발 뒤로 물러서서 피하곤 했다.
“…….”
“…오늘 연구소에서 잘 거니까 찾지 마.”
“그래! 아주 들어오지 말아라!”
“…….”
토마스가 옆에 걸려있는 겉옷을 휙 걷어들면서 뉴트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 목소리에는 온갖 감정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조금 거칠게 닫혔다.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버린 방엔 싸늘함 마저 감돌기 시작했다. 뉴트는 그때까지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
토마스가 돌아오지 않았다. 뉴트는 그런 모습을 보자 화가 나는지 아무도 없는 거실에서 거칠게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왜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했는지 스스로 알 수 없었지만, 이미 그것보다 다짜고짜 집 밖으로 뛰어나간 토마스에 대한 화가 더 커졌다. 순간 이상이 뚝 끊어질 만큼 치밀어 오른 화는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
머리가 식자 뉴트는 자신이 왜 화를 냈는지 알 수 있었다. 발목을 다쳤을 때 억지로 개인적인 공간에 쳐들어와 등 떠밀던 생각이 났었다. 민호는 잠시 혼자 두자고 했지만, 조금이라도 빠르게 회복시키기 위해 이것저것 원하지도 않은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 당시 생각을 하면 할수록 끔찍하기만 했다. 뉴트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토마스에게 사과라도 해야 했다. 하지만 감정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다. 뉴트는 내내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소파에 앉아있었다. 이미 잠깐 오던 잠은 완전히 달아났고, 머리는 감정이 엉망으로 뒤섞인 채 단단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아침엔 돌아오겠지. 몇 번이나 그렇게 생각했지만, 토마스는 돌아오지 않았다. 미안하다고 전화라고 하려고 휴대폰을 들었다. 하지만 의미 없는 벨 소리가 몇 번 들리자마자 곧 전원이 꺼져있다는 기계적인 안내 음이 흘러나왔다. 몇 번이나 다시 걸어봤지만 소용없었다. 한숨을 쉬면서 휴대폰을 내려놓은 뉴트는 마른세수를 하며 끙끙 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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