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히삼/제갈유비] 창공의 전기(蒼空之傳記) 008
+) NOTICE
레전드 히어로 삼국전 2차 연성입니다.
유비와 제갈량 / 조조와 사마의 / 손책과 주유가 각각 궁의 주인과 신선으로 나옵니다.
제갈유비 연성으로 시작했지만, 둘이 만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수 있습니다.
동양 AU 및 설정 날조가 항상 함께합니다.
적당한 망상과 설정 붕괴가 언제나 함께 합니다 ㅇㅅㅇ)9
write. 환월
어떻게 제갈량의 허락을 얻었는지는 알 수 없다.
주유가 봤으면 천하의 제갈량이 드디어 죽을 때가 된 것이라며 잔뜩 놀렸을 것이 분명했다. 제갈량은 이런 쪽으로 칼같이 굵었지만 서서에겐 약간 예외를 두었다. 차라리 조금이라도 도술에 능했으면 반대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면 명분이라도 서는 일이 된다. 신선이 괜히 인간 세계에 내려가서 도술로 세상을 혼란하게 만들면 고통받는 쪽은 선계였다. 그런 이유를 대서라도 인간계에 내려가지 못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서서가 태어난 이후 모든 일은 제갈량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일단 서서가 도술을 익힐만한 시간이 없었고, 그리 뛰어난 편도 아니라는 사실이 발목을 잡았다. 물론 크게 걱정해야 할 사항이긴 하지만 서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이걸 빌미로 자꾸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했다. 그렇게 인간계를 구경하고 싶다며 제갈량을 조르기 시작했다.
항상 조용하던 궁이 시끄러워진 것이 그쯤이었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졸라 겨우겨우 허락을 받았다. 따지자면 제갈량이 서서를 막을 수 있는 위치냐. 그것은 또 아니었다. 하지만 서서는 제갈량을 굉장히 믿고 있었기에 굳이 허락을 받고 나서고 싶어 했다. 제갈량은 한숨을 푹푹 쉬면서도 문 가까이 따라 나왔다. 큰일이 있으면 전서를 보내라는 약속을 세 번이나 하고 나서야 서서를 보내주었다.
“그럼 다녀올게. 제갈량!”
“제발 큰 사고만 치지 말고…….”
“날 그렇게 못 믿는단 말이야?”
“…….”
“걱정 마. 내가 다녀와서 신기한 이야기 엄~청 많이 해줄 거니까!”
“네. 그래요.”
“진짜 간다?”
“네. 네.”
“안녕! 나중에 봐!”
뭐가 그렇게 신나는 일인지. 서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재빠르게 뛰어간다. 인간계로 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으니 큰일이야 날까 싶었다. 구름이 잔뜩 낀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어느새 인간계로 이어진 산에 닿을 것이다. 돌아오는 것은 비슷하게 오면 된다. 하지만 왜 이렇게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알 수 없었다. 주군이 처음 멋대로 궁을 비웠을 때보다 심했다.
“내가 정말…지치긴 했나 보군.”
제갈량은 그냥 희미하게 웃고 만다. 이렇게 웃을 수라도 있게 된 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주군이 없는 곳에서 웃고 떠드는 불경한 존재라고 해야 할까. 서서가 나타난 후 궁은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분명 좋은 쪽이리라.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
“그럼 뭐부터 해볼까.”
아직 채 궁의 영지를 벗어나지도 못한 어린 신선은 마냥 들떠있었다. 제갈량의 허락이 생각보다 쉽게 떨어진 것에 대해 고민하던 것도 잠시였다. 이제 곧 그렇게 가고 싶어 하던 인간계에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절로 발걸음이 빨라졌다. 물론 한 번도 발걸음 한 적이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꼭 몸은 알고 있는 것처럼 굴었다.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은 아닌 모양이니 일단 몸이 시키는 대로 걸어 가보기로 했다. 서서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한없이 기분이 좋아진다.
물론 제갈량과 같이 나왔다면 더 좋았겠지만. 제갈량이 궁을 떠날 수 없는 이유를 알고 있어서 더는 떼를 쓰지 못했다. 아직 알아야 할 것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지만, 제갈량이 가장 먼저 가르친 것은 궁과 자신의 관계였다. 아무리 서서라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더는 말을 붙일 수 없었다.
제갈량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서는 곧 인간계로 내려가는 입구에 다다랐다. 잠시 고민하면서 주변을 살핀다. 딱히 지키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표식이 새겨져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서 주변을 탐색하다 드디어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와.”
최대한 인간과 자연스럽게 섞이기 위해 국경 부근으로 움직이곤 했다. 나라와 나라가 맞닿은 지역은 물자 교환을 위해 장터가 제법 크게 자리 잡았다. 그리고 온갖 사람들이 지나다니다 보니 서로의 옷차림에 그리 관심을 두지 않았다. 출신도 쓰는 언어도. 하다못해 예절까지 다른 사람이 모인 곳이라 몸을 숨기기 쉬웠다. 훌쩍 찾아왔다 떠나는 축도 많으니 갑자기 사라져도 그다지 큰 의심을 받지 않았다.
“신기하다.”
뭐, 가장 중요한 점은 서서가 인간계에 처음 와봤다는 사실일까. 제갈량이 그렇게 당부하고 또 당부했는데 하나도 기억이 아니 앉는 모양이었다. 서서는 이미 온갖 물건에 시선이 팔려버렸다. 그 주변을 지나치는 인파는 각자 할 일을 하느라 바빴다. 시장통 한가운데 서 있던 어린 신선은 누군가 뒤에서 소리치는 것을 듣고서야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멍하니 걷기엔 사람이 지나치게 많고 거리는 복잡했다. 처음 와본 곳이니 방향을 가늠할 수도 없었다. 사람이 걷는 방향이 맞겠지. 이런 생각으로 걸었다. 그러다 가끔 멈춰 선다. 그럴 때마다 서서의 눈엔 하나같이 예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좌판에 잔뜩 깔아둔 장신구를 구경하기도 하고, 바구니에 가득 쌓아둔 과일을 살짝 만져보기도 했다.
“어서 오세요!”
“이게 뭔가요?”
“예?”
“어…….”
“귀한 집 아가씨께서 이런 걸 처음 보셨나 봐요.”
“네. 뭐.”
상인이 약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서서는 아차 싶었는지 고개만 꾸벅 숙이고 돌아섰다. 아직 사람과 말을 섞는 것이 어색했다. 왜 처음 본다는데 저런 눈으로 바라보는 걸까. 하지만 서서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 답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소란을 일으키면 다시는 구경을 나오지 못하리란 것쯤을 알 수 있었다.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와.”
선계에서 보지 못했던 네발짐승이 쫑쫑 걸어간다. 아마 상인을 따라다니면서 먹을 것을 얻어먹는 강아지인듯했다. 장터에 가면 흔히 보이는 광경이지만 서서에겐 그것마저 신기했다. 그저 강아지를 따라간다. 음식을 얻어먹는데 눈치가 빠른 짐승이 멈춰 서더니 뒤따르는 사람을 돌아보았다.
“나 보는 거야?”
“…….”
“너무 귀엽다.”
서서는 그대로 쪼그려 앉은 채 손을 내밀었다. 그러지 강아지는 금방 가까이 다가온다. 그리곤 손을 핥아보다 몇 번 치대더니 나올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채곤 천천히 떠나간다. 그런 걸 보던 서서는 약간 슬퍼했지만, 그렇다고 놀 것이 강아지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길목에 서서 잠시 고민을 한다. 시간을 한정적인데 하고 싶은 일은 너무 많았다.
“그럼~ 이제 어느 쪽으로 가볼까?”
주변을 돌아보면서 한참 오른쪽과 왼쪽을 셈한다. 속으로 몇 번이나 손가락을 움직였는지 셀 수 없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을 보내다 이내 마음을 정했는지 왼쪽으로 몸을 휙 돌렸다. 오른쪽은 장이 끝나는 초입이었고, 왼쪽은 풍물패라도 온 것처럼 사방이 소란했다. 분명 재밌는 일이 생길 것 같았다. 풍물패 구경도 처음인지라 잔뜩 설렌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서서가 방긋 웃으면서 채 한 걸음도 걷기 전이었다.
“…으앗!”
묵직한 짐이 온 몸을 들이받는 것 같았다. 품에 안기듯 묵직하게 뛰어들어온 것을 버틸 수 없어서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서서는 이런 갑작스러운 공격을 버틸만한 힘이 없었다. 한순간 균형이 와장창 무너졌다. 그 충격으로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헝클어지면서 울컥 피어난 흙먼지가 묻었다. 제대로 대비도 못 한 채 넘어져서 부딪힌 등과 엉덩이가 얼얼하게 아팠다. 끙끙 소리는 내며 일어서려 했는데, 묵직한 것이 몸을 누르고 있어서 좀처럼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아야. 이게 뭐야.”
“…….”
“아파라…….”
“…….”
자신과 부딪힌 것은 허리 정도 올까 싶은 아이였다. 아이도 놀라서 허둥지둥 일어나려 했지만, 당황했는데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서서는 아이를 살짝 떼어내면서 주변 상황을 살폈다. 분명 제갈량이 큰 소란을 만들지 말라고 했었다. 그런데 이미 몇 번이나 관심을 끌고 말았다. 손바닥에 잔뜩 상한 짙은 색 머리카락이 달라붙었다. 땀에 잔뜩 젖은 채 흙먼지에 구른 아이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넌…누구니?”
찬찬히 어깨를 짚으면서 먼지를 털어준다. 멋대로 자란 머리카락이 이마를 가득 가렸다. 그 그늘에 숨은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서서는 인간계의 생활상을 잘 모른다. 하지만 이런 표정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일단 아이를 진정시키려고 보듬어 안았다. 하얀 옷에 먼지가 묻은 것을 본 아이가 당황해서 더 버둥거렸지만, 그럴 때마다 서서는 좀 더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괜찮아?”
“…….”
“다치진 않았어?”
“네…그러니까.”
“다행이다. 나도 안 다쳤거든. 큰일 날 뻔 했잖아.”
“…….”
“정말 괜찮은 거야? 왜 그렇게 급하게 뛰고 그래.”
“그게…좀 바빠서요.”
“음.”
“죄송합니다. 그…옷…변상을 해야 할 텐데.”
“응? 옷?”
사실 아이는 자신이 다치는 것은 그리 상관없어 보였다. 정신이 들자마자 눈에 보인 것은 굉장히 비싸 보이는 옷이 형편없이 구겨진 채 흙바닥에 뒹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와장창 넘어진 몸은 알 바 아녔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서서와 옷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냐. 이거 괜찮은데.”
“하지만…저 때문에…….”
“아냐. 아냐. 정~말 괜찮다니까? 다치진 않았어?”
“…….”
“난 내 옷보다 다친 게 더 중요해.”
“…네.”
그럼 다행이다. 서서가 생글거리며 웃는다. 아이를 일으키면서 자신도 일어났다. 그리곤 옷을 툭툭 털어주면서 다친 곳이 없는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러고 나서야 자신의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여전히 잔뜩 주눅 들어있는 아이는 눈만 데굴데굴 굴린다.
“정말 괜찮은 거야? 어디 살아? 데려다줄까?”
“아뇨. 아니에요. 괜찮아요!”
“나 때문에 괜히 넘어진 거면…미안한데.”
“아니에요! 정말 괜찮으니까…….”
“그럼 다음에 혹시라도 또 만났을 때 아픈 거 이야기해야 해?”
“…네.”
작은 아이는 고개를 숙여 꾸벅 소리가 날 정도로 인사를 했다. 서서를 그저 생글생글 웃으면서 아이 무릎 걱정을 한다. 하지만 그런 관심이 더 독이 된 모양인지 아이는 급하게 뒷걸음질을 친다. 그 모습을 보자 따라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냥 살살 손만 흔들었다. 다음에 보자는 덧없는 약속도 같이 흘러나왔다. 몇 번이나 돌아보며 서서를 향해 꾸벅꾸벅 인사를 하던 동그란 뒤통수가 점점 멀어진다. 아이가 제대로 보이지 않을 때 까지 서서는 내내 그쪽을 바라보았다.
“…….”
아쉬운 마음에 자꾸 돌아보게 된다. 괜히 같은 방향으로 가면 또 놀랄까 봐 일부러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그렇게 조금 걷다 보니 금방 새로운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옷이 구겨지거나 흙먼지가 묻는 것은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신선에게 의복이란 그저 편하게 관리할 수 있는 주술 중 하나였다. 조금만 더 놀다가 해가 지기 전에 돌아가야지. 그렇게 손가락을 접어가면서 계획을 짜던 서서는 금방 사람 사이로 섞여들었다.
***
“유진아. 여기서 뭐 하고 있어.”
“…형!”
“여기 오면 안 된다고 했잖아.”
“…….”
“꼴은 또 왜 이래.”
“…….”
“누구랑 싸웠어? 어? 형한테 빨리 이야기해봐.”
“그게…아니라.”
늘 혼나던 모습 그대로 기둥을 붙잡고 선 아이는 당장에라도 땅 밑으로 쑥 꺼질 것처럼 고개를 집어넣었다. 우마차에 짐을 싣던 사람이 그런 아이를 보고 가까이 다가왔다. 꼴이 먼지 구덩이에 들어갔다 나온 강아지 같았다. 큰 눈만 껌벅거리는 얼굴이 퍽 안타까운지 아이를 데리고 안쪽으로 들어간다.
“유진이가 또 왔어?”
“제가 오지 말라고 하는데…혼자 있다 보니 심심한가 봅니다.”
“거기 좀 앉아 있어 봐. 간식거리라도 있으면 좋으려만.”
“아닙니다. 금방 갈 건데요.”
“그냥 좀 쉬라니까. 내가 다 둘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부엌을 담당하는 중년의 여인은 인심 좋게 손짓을 한다. 하긴 형이라는 사람도 지금까지 쉬지 못하고 짐을 나르고 있었다. 큰 상단에서 허드렛일과 짐꾼을 자청하면서 겨우겨우 입에 풀칠하고 있었다. 물론 힘을 쓰는 일이니 고되긴 하지만, 세상천지 둘밖에 없는 가족을 놔두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죽어라 붙잡고 있었다.
“…형.”
“자꾸 오지 말라고 했잖아. 내가 뭐라 했어. 여긴 다 위험하다고 했지?”
“…….”
“내가 다 너 생각해서 그러는 거야.”
“…….”
“됐다. 잠깐 쉬다가 돌아가. 오늘은 짐만 실어서 보내면 별다른 일 없으니까 빨리 갈게.”
“정말? 오늘은 같이 자는 거야?”
“그래. 어차피 상단이 출발하면 이쪽도 할 일이 거의 없으니까.”
“신난다.”
방금까지 우울해하던 표정은 간 곳이 없었다. 또래보다 좀 더 깡마른 동생을 바라보던 유장의 표정은 안타깝기만 했다. 조실부모하고 동생을 키우기 위해 바득바득 살아왔다. 하지만 제대로 된 기술조차 없는 어린 형제에게 세상은 혹독하기만 했다. 몇 번 크게 다치기도 했고, 동생이 아프기도 했다. 그렇게 정처 없이 흘러 다니다 간신히 이 마을에 정착했다.
큰 상단에서 다행히 유장을 좋게 봐줘서 일거리를 주었고 처음으로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지 않고 살 수 있었다. 비록 다 쓰러져가는 집이라고 하지만 먹고 살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린아이가 내내 집에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절대 오지 말라고 해도 자꾸 기웃거린다. 뭐라도 도와준다고 달라붙는데, 아이 손을 빌리느니 유장이 좀 더 빨리 움직이는 편이 나았다.
“자, 이거라도 먹고 좀 쉬었다 다시 시작해.”
“감사합니다.”
“유진이도 많이 먹고?”
“네. 감사합니다.”
“자꾸 이렇게 간식거리를 주시면 버릇이 나빠지는데…….”
“어릴 땐 다 그런 거지. 그럼 난 나가서 일 보겠네?”
“예. 감사합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주변에 사람이 없어지자 그릇을 동생 옆에 밀어줬다. 그러곤 괜히 물을 마시면서 어서 먹으라고 한다. 깡마른 녀석이 뭐 그리 잘 먹는지. 유장은 동생을 볼 때마다 안쓰러웠다. 성장이 더딘 것이 그저 못 먹여서인지. 아니면 병이라도 있는 건지. 하루 벌어 하루 먹는 형제가 의원을 찾아갈 만큼 돈이 넉넉하지 않아 그냥 냉가슴 앓는 것처럼 지켜보기만 뿐이었다.
“오늘은 왜 또 왔어. 자꾸 오지 말라 했지?”
“…….”
“그래. 뭐 너도 심심하니까 그랬겠지.”
“그게…….”
“그래. 말을 해봐.”
“여기 오다가…….”
“무슨 사고를 친 거야. 화 안 낼 테니까 말해봐.”
“어떤 사람이랑 부딪혔는데…….”
“뭐?”
“근데. 아냐. 그분이 괜찮다고 했어.”
“…….”
“옷 구겨진 거랑…변상 같은 거 안 해도 된다고…….”
절로 목소리가 기어들어 간다. 유장은 그런 동생을 보자니 혼을 낼 생각이 사라졌다. 하긴 누가 이렇게 돈돈하면서 살고 싶을까. 그냥 먹던 거나 마저 먹으라고 그릇을 마저 밀어줬다. 그나마 마음씨 넓은 사람을 만난 모양이니 그건 다행이다 싶었다. 저렇게 눈치를 보면서 말할 정도면 보통 귀한 집 자제가 아닌가 싶었다. 그런 사람 중에서 마음이 넓은 쪽도 있겠지. 괜히 입맛이 썼다.
“근데…그 부딪힌 분 되게 예뻤어.”
“그래?”
“응. 꼭 선녀 같았는데…뭐라 하지도 않고. 나 다쳤냐고 물어봐 주고.”
“…….”
“다쳤으면 다음에 만났을 때 아프면 꼭 이야기하라고도 해줬다?”
“그런 귀한 사람이 왜 길거리를 막 걸어 다녀. 주변에 호위도 없었어?”
“…없었는데.”
“이상하네.”
“형도 그렇지? 진짜 선녀 아니었을까?”
“으이그.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마저 먹고 집에 가 있어.”
“…….”
또 입이 댓 발은 튀어나온다. 하지만 유장은 동생을 옆에 달고 일을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괜히 얼쩡거리다 비싼 물품에 흠이라도 가면 일이 더 복잡해진다. 게다가 아직 자라려면 한참 남은 동생에게까지 일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 남은 간식을 종이에 싸서 들려준다. 형이 이러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괜히 투정을 부리고 싶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진짜 가?”
“그래. 얌전히 집에 있어. 해 떨어지면 어디 돌아다닐 생각하지 말고.”
“형은 언제 오는데?”
“일이 끝나면 가야지.”
“그럼…오늘은 우리 같이 자는 거다?”
“알았어. 그러니까 또 넘어지지 말고 앞에 똑바로 보면서 걸어가.”
“응!”
“들어가? 나도 나가서 일해야 해.”
“아이참. 나도 어린애 아니야. 그럼 이따가 집에서 봐!”
“그래.”
겨우 손을 흔들어서 보낸다. 집이라고 해봤자 바람이나 겨우 막을만한 방 한 칸이었다. 어린 동생을 홀로 두는 것은 마음이 아팠지만, 그렇다고 일을 쉴 수 없었다. 유장인 어깨를 풀면서 다시 짐 더미로 다가갔다. 이 정도 물건을 실은 상단이 출발하고 나면 최소 달이 두 번 차오를 때까진 돌아오지 않는다. 그동안은 조금 쉬면서 동생을 돌보고, 엇갈려 도착한 짐을 받으면 되는 일이었다.
잠깐 유진이 말했던 선녀 같은 사람이 생각난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 좋고 귀한 집 자제가 호위도 없이 길거리를 돌아다닐 것 같지 않았다. 유진은 가끔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곤 했다. 그것도 병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던 차라 그다지 이번 일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저 돈이 더 들어갈 일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팍팍한 삶을 꾸리는 것은 늘 비슷했다.
***
“제~갈량!”
“…기다리고 있었어요.”
“나 다녀왔어.”
“즐거워 보이니 됐네요. 들어오시죠.”
“응!”
겨우 해가 한 뼘쯤 남았을 때 궁으로 돌아온 서서는 방글방글 웃기 바빴다. 뭔가 사 오고 싶었는데, 인간이 쓰는 화폐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손가락만 빨았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제갈량은 그런 것에 별로 미련을 두지 않는다. 인간계 물건이 뭐가 좋다고. 주군이 계실 적 가끔 하나씩 구해서 가져다주던 물건만으로도 제갈량의 처소는 복잡했다. 이것마저 주군을 닮아 있어서 가끔 서서의 뒷모습에서 이젠 연락이 없는 이를 찾기도 했다. 이러는 것이 나쁜 일인 줄은 안다. 하지만 마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인간계 정~말 재밌던데?”
“그런 것 같네요.”
“소란스럽고, 활기차고.”
“…….”
“다들 친절한 것 같아.”
“뭐…일부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역시 주군이 없어서 그러는 거지?”
“글쎄요.”
“…….”
“그래도 서서가 재미있었다니 다행입니다. 큰일은 없었고요?”
“어…….”
잠깐 말을 끊는다. 인간과 부딪혔다는 소리를 해야 할까. 아니면 별거 아닌 거라 넘겨도 될까. 서서의 머릿속이 바쁘게 굴러간다. 날카로운 제갈량의 눈과 마주치면 저도 모르게 술술 털어놓을까 봐 애써 저 멀리 작은 도자기를 바라보았다. 제갈량은 그런 서서의 태도에 약간 미심쩍은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굳이 캐묻진 않았다. 오늘은 일찍 자라는 말을 남기고 일어선다.
“다음에 또 놀러 가도 될까?”
“이번처럼 뭔가 숨기려는 태도만 없다면 얼마든지요.”
“들켰나?”
“…예.”
하지만 목소리엔 화가 깃들지 않았다. 서서는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응룡 궁에서 만나야 할 주군은 만나지 못했지만, 제갈량이 있었다. 만약 태어났는지 서서 혼자였다면 이렇게까지 버티지 못할 것이 뻔했다. 그럴 때마다 제갈량이 대단하다고 말하곤 했다. 어린 신선의 인간계 유람기는 그렇게 있는 듯 없는 듯 작은 사건을 하나 남긴 채 조용히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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