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히삼/제갈유비] 창공의 전기(蒼空之傳記) 외전 003
+) NOTICE
레전드 히어로 삼국전 2차 연성입니다.
유비와 제갈량 / 조조와 사마의 / 손책과 주유가 각각 궁의 주인과 신선으로 나옵니다.
동양 AU 및 설정 날조가 항상 함께합니다.
본편에서 못했던 이야기와 완결 이후 유장과 유비와 제갈량의 이야기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해당 글은 본편을 읽으셨다는 전제하에 진행됩니다.
적당한 망상과 설정 붕괴가 언제나 함께 합니다 ㅇㅅㅇ)9
write. 환월
“그래서 손책님은요?”
“손책?”
“예.”
“으음. 그러니까.”
“말씀하기 곤란한 부분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아니냐. 절대 그런 거 아니야.”
“…….”
“내가 뭐라고 제갈량한테 속이는 부분이 있겠어…….”
“목소리는 전혀 아닌걸요.”
“자꾸 놀리지마. 제갈량. 나도 지금 엄청나게 노력 중이란 말이야.”
“어떤 노력을 하시는데요?”
“그러니까…음.”
“…….”
“군주로서 할 일도 해야 하고, 사마휘님이 우리에게 남기신 말도 처리해야 하고.”
“…….”
“어려운 사람도 도와야지.”
“…….”
“아…닌가?”
유비는 잘 나가다 늘 끝을 맺지 못한다. 제갈량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그새 주눅이 든 표정으로 신선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을 했는데. 하지만 그 성정도 유비의 일부려니 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주군이라면 응당 저렇게 말했을 것이다.
오히려 단호하게 말을 자르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다면 누군가 주군의 몸을 빼앗은 거라 믿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니 오히려 주군과 같으니 안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제갈량의 입술 끝에 미소가 번진다. 아무리 눈치가 없지만, 제갈량에게 한해선 또 예민하기 마련이었다. 그런 표정을 금방 알아챈 유비는 괜히 민망한 척 같이 웃고 만다.
“손책은 잘 돌아갔을 거야. 그리고 제갈량이 일어나면 연락을 달라고 하긴 했지만.”
“그렇겠죠.”
“생각보다 시간이 지나긴 했는데, 그래도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주유라면 아마 그럴 겁니다. 눈으로 보지 못하면 확신하지 못하니까요.”
“그래. 천천히 연락하자.”
“봉황궁이야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하지만.”
“…….”
“백호궁은 신선의 힘이 떨어진 것 빼고는 큰일이 없으니 그나마 다행인 일이군요.”
“저…그래서 말인데.”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또 그런 표정을 지으십니까.”
“…….”
“주군?”
“말해도 될까. 하고.”
“…….”
“생각하고 있었어,”
“어차피 제게 다 하실 말씀이 아니십니까. 편히 하십시오.”
“하지만…….”
제갈량이 뭐라고 할 것 같아서. 우물거리던 말끝이 사라졌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알 수 있었다. 제갈량은 이런 주군을 보필하려면 자신이 더 튼튼하고 똑똑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하지만 태어나길 그 정도 능력이 된다는 사실로 일찌감치 알고 있었으니 제갈량에겐 거칠 것이 없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날뛰던 응룡조차 어느 정도 누를 만큼 힘이 있던 신선이었다.
“아냐. 조금 더 정리되면 말할게.”
“주군이 그렇게 숨기시더라도 다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뭐? 그런 게 어디 있어.”
“왜 제가 모르리라 생각하시는지 전 그게 더 놀랍습니다.”
“…….”
“사마휘님께서 절 옥새의 관리자로 임명하셨습니다. 이미 생을 다해 사라졌던 절 살려내시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
“제가 많은 정보가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다 알고 있는 거였어?”
“다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이 정도는 짐작하고 정보를 유추해 알아낼 수 있을 뿐이지요.”
“제갈량은 항상 말을 어렵게 하더라.”
유비는 고개를 기울인다. 사실 제갈량이 빙빙 돌려 말하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이런 일이 자주 있었다. 유비와 제갈량의 관계는 늘 이렇게 흔들리는 것 같으면서도 견고했다. 물론 유비가 무던한 성격이고 제갈량이 날카로워서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비가 제갈량을 깊이 믿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제갈량은 그런 주군에게 반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조만간 두 군주를 만나 뵈어야겠군요.”
“응?”
“주군이 늘 걱정하시니 직접 만나보시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움직여도 괜찮아?”
“물론입니다. 사방에서 기운이 스며드니 육신은 회복이 거의 끝났습니다. 도술이야 조금 모자란 것은 천천히 돌아올 것이고.”
“…….”
“전 괜찮습니다. 선계 최고 신선이 이런 일로 흔들린다면 모두가 웃을 테니까요.”
“…….”
“슬슬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생각해.”
“주군을 제외한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
“하지만 뭐 크게 다른 말은 아니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니까.”
“…….”
“어그러진 세계를 다시 맞춰야 하지 않겠습니까.”
“응?”
“신선은 어디까지나 군주를 위해 사는 몸. 이미 끝난 몸에 다시 한번 생명을 주셨으니 주군의 소원을 이루어 드려야죠.”
“난.”
“…….”
“…아니야.”
또 그렇게 말끝을 흐린다. 제갈량은 굳이 되묻지 않았다. 어차피 차차 알게 될 것을 지금부터 캐물어봤자, 주군의 얼굴에 그늘만 생길 뿐이었다. 봉황궁이야 뻔한 일이니. 백호궁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옥새를 관리하는 자리로 들어가기 전에 할 일이 많았다. 시간이 좀 더 있었으면. 새로운 생명을 받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거꾸로 건넜다. 그러자 마음에 한줄기 욕심이 생긴다. 이러면 안 되는데. 몇 번이나 속으로 되뇌어 보지만 그것조차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
“주군!”
“아니. 또 왜 그러느냐.”
“일어나신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움직이십니까. 그러다 정말 큰일 난다고요!”
“…….”
“괜찮다니까. 별일 아니었다.”
“하, 주군을 모시는 신선의 눈을 속일 생각입니까.”
“아니 오히려 네 몸을 걱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
“예?”
“내가 모르는 줄 알았겠지?”
“…….”
“아무리 몰래 하려고 했다 해도 말이다. 그런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니. 사마휘님이 한 번 더 짚어주지 않으셨다면 평생 그렇게 있을 작정이었을까.”
“그야. 모르죠.”
주유의 말끝이 새침해진다. 물론 저렇게 반응하는 것은 정곡을 찔렸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손책은 오랫동안 주유와 함께 지냈기에 그 정도는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백호 궁의 신선이 약하다는 소리는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신의 심장이 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주유가 찾아왔다. 심장이 찢어질 듯 아프면 정신이 혼미해진다. 아무리 정신력이 강한 강동의 호랑이라고 하지만, 당장 터질 것 같은 몸을 제어할 순 없었다.
그런 심장을 진정시킬 수 있는 사람은 주유뿐이었다. 물론 아무런 대가 없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따로 알아본 바에 의하면 이런 식으로 직접 신선의 생명력을 쓰기 시작하는 것은 독이나 다름없었다. 천천히 비어가는 그릇을 제 눈으로 똑바로 바라보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주유의 그릇이 지나치게 작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처음 한두 번 손책에게 힘을 나누어 줄 때는 그리 티가 나지 않는다. 약간 피곤하긴 하지만 버틸 만했다. 큰 그릇에서 한 줌 물을 덜어낸다고 해서 눈에 띌 정도로 수위가 낮아지진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한번. 두 번. 심장이 날뛸 때마다 주유는 자신의 힘을 주군에게 나누곤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눈에 보일 정도로 생명력이 비어가기 시작했다.
“…….”
물론 그 상황을 주유가 걱정하지 않을 순 없다. 그러나. 주군이 좀 더 중요했다. 신선이란. 군주를 보필하는 도구일 뿐. 이젠 너무 많이 들어서 오히려 잊고 있던 말이 떠오른다. 그렇게 애써 불안한 마음을 누르면서 살아왔지만, 최근엔 눈에 띌 정도로 힘에 부쳐 한다.
“주유.”
“네, 주군.”
“그러지 말아라.”
“신선의 의무를 저버리라고 말씀하시는 군주는 손책님이 처음이실 겁니다.”
“그런 말이 아니지 않으냐.”
“그렇다면 주군이 편찮으신데. 전 어쩌랍니까.”
“…….”
“이젠 많이 나으셨다곤 하지만 늘 걱정이 된단 말입니다.”
“난 괜찮다. 강동의 호랑이가 그렇게 쉽게 쓰러지겠느냐.”
“저번에 그러셨잖아요.”
“아이. 주유!”
“제발 몸을 아껴서 사용하세요. 궁 모든 이사 주군을 걱정합니다.”
“난 네가 더 걱정이구나.”
“…….”
“정말이야. 이러다 네가 훌쩍 떠나버리면 난 어떻게 이곳을 지키겠어.”
“제가 왜…….”
손책의 시선을 빤히 따라가던 주유의 말끝이 뚝 끊어졌다. 손책이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티가 많이 났을 터. 어떻게 해야 하나. 뭐하고 해야 할까. 궁을 지키기 위한 신선이 이리도 약해졌다는 것을 누가 알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머리가 복잡해서 더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저번에 제갈량에게도 힘을 나누어 주지 않았느냐.”
“아…그랬었죠. 괜히 그랬나 하고 생각하던 참이 입니다.”
“뭐?”
“제가 그렇게 허겁지겁 도와주지 않아도 잘 살아남더라고요.”
“넌 참…아니다. 그렇게라도 씩씩해 보이면 난 좋다.”
“그래도 제가 제갈량보다 낫다고 생각하시죠?”
“당연하지!”
이제야 얼굴이 조금 펴진다. 기운이야 금방 흩날려 사라질 것 같지만, 마음이 편하면 그대로 버티기 수월할 듯싶었다. 신선의 생명력으로 심장의 상처를 치료한다. 그렇게 천천히 제힘을 되찾아가는 손책과 달리 주유는 약간 시들었다. 그런 신선을 아무리 주변에서 돌봐주어도 한계가 있는 법이라. 다들 어떻게 할 수 없어 발만 동동 구르곤 했다.
“너무 무리하지 말아라. 난 네가 걱정이다.”
“손책님한테 걱정시키는 제 입장도 좀 생각해주세요.”
“뭐라?”
“전 언제나처럼 괜찮습니다. 아주 멀쩡해요.”
물론 아닌 것 같지만. 애써 모른 척한다. 백호 궁의 결계야 손상향과 손권이 일부 맡아주는 것도 있으니 그리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바깥에 날뛰는 환수들이야 자신이 나서서 처리하면 그만이었다. 더는 옥새 때문에 서로 견제할 일도 없어졌는데, 그런 가운데 주유만 혼자 위태위태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손책의 한숨이 깊어지는 것을 아무도 모른다. 신선이 이리도 무리하는 것을 알았다면 진작 손을 쓰려고 했을 텐데, 제 신선은 미련할 만큼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사마휘가 언질을 줄 정도라면 분명 이대로 두는 것은 안 될 일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신선이 군주를 위하는 법은 잘 알지만, 반대의 경우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다. 애초에 신선의 힘이 닳아 없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조차 많지 않았다. 그러니 이 정도로 눈치챈 것이 어쩌면 다행인 일이었다. 주유. 주유, 몇 번이나 불러도 백호 궁의 신선은 늘 아무렇지 않은 척한다. 그 성정이 꼿꼿하고 단단한 이유도 있었지만, 자신의 약점을 보이는 것을 싫어하는 까닭도 있었다.
“너무 무리하지 말아라.”
“주군께서 더 걱정하셔야 합니다.”
“너도 내 가족이 아니냐.”
“…….”
“가족이 무리하고 있으면 응당 말려야 하는 것을…….”
“주군.”
“넌 어째서…아니다. 내 마음이 어떤지는 안다고 믿고 있다”
“…….”
“게다가 네가 잘못되면 내 동생들이 많이 슬퍼할 거다. 많이 의지하고 있으니까.”
“…네.”
고분고분한 목소리가 들린다. 슬쩍 얼굴을 보니 놀란 표정이 역력했다. 손책은 늘 직설적인 편이었지만, 이럴 땐 모르는 척하는 것이 낫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웃고 말았다. 반파된 봉황궁과 간신히 살아난 응룡궁에 비하면 백호긍은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과연 이런 난리 통 중에 조금이라도 나은 것이 좋아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다친 사람이 있다 하나 궁이 주저앉을 정도로 큰일은 아니라고 말한다. 좋은 것이 좋은 일이라고. 주유도 조금은 누그러진 태도를 보인다.
“그럼 오늘부터 약을 다시 올리라고 의원에게 전하겠습니다.”
“뭐? 말이 왜 그렇게 넘어가느냐.”
“가족의 건강을 걱정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면, 응당 그렇게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저 또한 주군을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유…그게.”
“오늘부터 주군의 약 시중은 제가 직접 들겠습니다.”
“…….”
“어디까지나 가족이니까요.”
“…….”
뭔가 잘못된 결론이 도출된 것만은 확실했다. 손책은 빠져나갈 구멍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눈을 굴렸지만, 단 한 군데도 보이지 않는다. 아. 하지만 어쩌겠는가. 스스로 파놓은 함정에 발을 디딘 것인데. 주유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물러난다. 분명히. 곧장 의원으로 발걸음을 옮기겠지. 약과 침으로 기력을 보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탐탁지 않아서 더 피했던 것도 있었다.
그리고.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다가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하고 쓰러지는 몸이 답답하기도 했다. 그런 위험함은 점점 줄어드는데 왜 이리 기분이 알싸하게 가라앉는지 알 수 없었다. 주유의 생명이 심장을 감싼 채 버티고 있어서일까. 자신의 신선이 무리하고 있는 것을 두 눈으로 목도한 이유일까.
손책은 늘 정공법처럼 행동하고 생각하지만, 이럴 땐 가끔 버겁기만 했다. 어디부터 말해야 할까. 일단 의원에게 약을 짓지 말라고 부탁하는 쪽이 급한 것 같았다.
**
유비는 제갈량 옆에 앉아서 끊임없이 많은 이야기를 했다. 제갈량은 멍한 표정으로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입술을 바라보다 문득 시선을 맞춰본다. 그럴 때마다 유비의 얼굴에 불꽃이 일어나는 것처럼 붉은빛이 돈다. 그런 모습을 한두 번 본 것은 아니니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못 보게 된다면 약간 아쉬울 것 같았다.
유비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하나라도 더 알려주려고 한다. 결국, 제갈량이 물그릇을 건네고 나서야 감시 입을 다물었다. 분명 제갈량 마시라고 떠놓았던 물인데. 이젠 주인이 바꾸니 채 빈 그릇만 남았다. 제갈량은 유비가 숨을 고르는 사이 지금까지 들었던 모든 일을 정리한다. 그리곤 천천히 결론을 내린다. 과연 주군이 가장 만족할만한 대답을 무엇일까. 이젠 이런 것도 조금 생각하게 되었다.
“백호 궁부터 가시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
“왜 그런 표정이시죠?”
“아니…난.”
“마음에 담아두시지 마시고 하문하시죠.”
“…….”
“예?"
“태오…아니 조조랑 초선이가 걱정되어서.”
“…….”
확실히 유비가 걱정하는 부분은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봉황궁의 사정은 유비가 사라졌을 때의 응룡궁보다 처치가 나빴다. 신선과 군주가 한 번에 사라진 궁 안엔 아직 어린 후계자와 조조 한 사람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온갖 위험에 쉽게 노출된다. 그것 때문에 저렇게 안절부절못하는 모양이었다. 아이에게 유난히 약한 유비는 왕윤이 서거한 이후 계속 초선 걱정을 했었다.
“주군이 마음 가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
“정말입니다. 그런 표정 안 지으셔도 되고요.”
“정말?”
“예. 정말입니다. 주군께서 원하시는 방향을 알려주시면 제가 정리를 해서 보여드리겠습니다. 어차피 옥새와 새로운 규칙은 주군께서 정하시는 일이니.”
“…….”
“이젠 익숙해지셔야 합니다.”
“응. 알았어.”
영 못 미더운 말투와 함께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유비는 늘 이런 사람이려니 한다. 바다 같고, 봄 같은 사람인지라. 천천히 변하면서도 그 변화의 폭이 크다. 감정이 풍부하고 제 사람을 아낄 줄 안다. 그리고 자신이 껴안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놓으려 하지 않기에, 신선은 자신의 주군을 바다라고 부르곤 했다. 그중 한 구석에 자신이 쉴 만한 곳이 있으면 그뿐. 더는 욕심을 내지 않기로 했다.
“제갈량이 항상 고생이네.”
“누구 때문이겠습니까.”
“…….”
“전 늘 주군만 생각합니다.”
“제갈량…….”
“주군이 하시는 일이 곧 제 삶의 의미.”
“…….”
“그 어떤 것도 죄송해하실 필요가 없답니다.”
“제갈량은 늘 그렇게 말하더라.”
“제가 늘 그렇죠. 그럼 알아서 준비하겠습니다.”
“…….”
사실 이것이 마지막일 수도 있었다. 다 무너진 봉황궁의 재건과 백호궁의 안정. 그리고 응룡궁의 영원을 위해선 사마휘가 보여준 그 길을 걸어야 했다. 하지만 그 길을 걷기 시작하면 다시는 이전 생활로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옥새가 다시 피운 생명의 의미는 뭘까. 제갈량은 옥새의 끝을 알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부분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주군과 할 일이 많습니다.”
“…….”
“시간이 왜 이리도 빨리 가는지.”
“…….”
“이럴 땐 정말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있는 것만으로도 서글퍼지는군요.”
“나도 그래.”
“언제나 주군을 제 목숨처럼 생각합니다.”
“…….”
“심장이 떨어질 만큼 아픈 경험은 더는 하고 싶지 않네요.”
“…….”
제갈량의 얼굴에 드물게 민망한 표정이 감돈다. 감정 표현이 많아진다는 것은 좋은 일일까. 아니면 나쁜 일일까. 신선의 삶으로 따지자면 영원을 살아야 할 이가 흐르는 시간을 알게 된다. 길고 긴 시간을 보내야 할 이가 과거의 감정을 곱씹으면서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제갈량은 그것조차 놓치고 싶지 않았다. 예전에 미처 몰랐던 감정이 스며든다. 조금 일찍 알았다면 주군과의 관계가 달라졌을까. 아니면 그래도 이렇게 흘러갔을까. 또 잡스러운 생각이 밀려온다. 차라리 바쁘게 움직이는 편이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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