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버키가 하는 일이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연구가 끊겨있는 지식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꽤 힘든 일이었다. 버키는 자신의 인내심이 꽤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착각이었다. 보고서를 두 장도 넘기기 전에 뇌가 아파졌다. 억지로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리던 남자는 결국 침대에 늘어져 버린다.
“…아 머리 아파.”
온몸이 얻어맞은 것처럼 아팠다. 오늘따라 없는 부분이 시리고 욱신거려서 자꾸 눈이 간다. 뭉툭하게 잘린 팔은 원래 자신의 것이 아닌데도 살을 파고들어 붙어있었다. 떼어낼 수도 없는데, 그렇다고 다시 붙일 수도 없었다.
“불안하지 않아?”
“…안 불안해.”
“넌 이제 아무것도 없는 거야. 지킬 수 있는 무기조차 없는 윈터 솔져는 폐기 품이지.”
“…….”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면서.”
“아니야.”
“아니긴.”
과거가 현재를 보면서 웃는다. 끝끝내 따라잡힌 현재는 더는 달릴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노력하곤 했다. 물론 과거는 그런 행동을 참 우습게 여기는 듯했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죗덩이가 천천히 버키의 몸 위에 내려앉았다. 헛것이 분명한데 가슴이 꾹 눌려서 숨을 쉴 수 없었다. 그대로 배 위에 주저앉은 녀석은 녹이 슨 쇳소리가 나는 팔로 천천히 버키의 목을 쥐어 잡았다. 손끝에서 겨울의 서늘함이 느껴졌다.
“그냥 편하게 해줄까?”
“…….”
“너도 이렇게 오명을 뒤집어쓰고 사는 건 싫잖아.”
“아니야.”
“아니긴. 이미 전 세계에 얼굴이 팔리고, 과거가 헤집어지고. 남은 것이 없잖아.”
“…….”
“누가 널 구제해 주겠어.”
“스티브…….”
“캡틴 아메리카가? 걘 못해.”
“…….”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당장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선 너보다 더 많은 사람을 먼저 구해야 할 텐데. 과연 그 사람을 다 포기하고 널 우위에 둘 수 있을까?”
“…….”
“우위에 둬도 널 먼저 도와주진 못해. 그러면 너한테 또 같잖은 오명이 더덕더덕 붙을 테니까. 안 그래? 솔져?”
“…….”
“그러니까 그냥 끝내면 편하잖아.”
“아니.”
허. 단호한 대답에 허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더니 또 얼굴을 잔뜩 찡그린다. 윈터솔져는 늘 그랬다. 제대로 사고를 할 만한 시간이 없으니 짜증이 그대로 표정에 나타나곤 했다. 자신을 잘 아는 버키는 그런 녀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렇게까지 살아서 무엇을 하게?”
“…….”
“오명을 벗을 수 있을 것 같아? 지금도 여기에 숨만 쉬면서 간신히 숨어있는 신세잖아.”
“…….”
“스티브와 왕이 숨겨준다고 했나? 네가 여기 있다는 게 발견되면 제일 먼저 곤란해질 사람은 그쪽일 텐데?”
“…….”
“폐 끼치기 싫다며.”
비릿한 피 냄새가 난다. 윈터 솔져의 몸을 타고 흐르는 피가 침대에 젖어들어 가기 시작했다. 꿈인지, 아니면 현실인지. 버키는 이제 둘을 구분하는 것을 포기했다. 꿈이어도 현실 같았고, 현실도 허상과 같았다. 어차피 제대로 된 미래에서 살 수 없는 인생이었다. 억지로 벌어진 틈 사이에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편하게 해줄게.”
“하지…마.”
“그냥 이대로 눈을 감으면 편해질걸. 어차피 넌 날 못 이겨.”
“난 그렇더라도 스티브는 이기겠지.”
“…….”
“스티브가 널 물러서게 만들 거야.”
“그 녀석이? 미션이 끝나자마자 싸울 의지를 잃어버린 채 차라리 같이 죽자고 하던 사람이 날 이길 수 있다고?”
“…….”
“그 새낀 네가 버키 반즈고 임무가 있는 윈터솔져가 아닌 이상 절대 못 건드려.”
“…….”
“그래서 내가 지옥에서 다시 걸어왔잖아.”
“…….”
“곧 편해질 거야.”
당장에라도 목을 비틀 것 같던 손이 슬슬 멀어졌다. 스티브가 자신의 화를 못 이겨 여기저기 물어놓고 간 흔적은 마치 부적 같았다. 잔뜩 짜증 난 얼굴로 좀처럼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던 허상은 옆에 있던 작은 탁자를 쾅 내리쳤다. 뇌가 쪼개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새끼 마음에 안 들어.”
“…….”
“다리 위에서 봤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난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
“그게 중요해?”
“중요해.”
“내 몸에서 이 역겨운 기운이 가시면 다시 돌아오겠어.”
“…….”
“코가 썩는 거 같아.”
버키는 이 허상이 자신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비틀려버린 것은 자꾸 되살아난다. 조금이라도 밝은 날을 볼 수 없게 만들려는 것일까. 아니면 이것도 머릿속에 새겨진 코드 중 하나일까. 버키는 눈을 감았다. 귓가에서 끝까지 들리던 목소리가 사라졌다.
“역시…내 머리가 망가졌어.”
버키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분명 피 칠갑을 했던 침대는 언제 그랬냐는 듯 깔끔하게 정돈되어있었다. 여전히 코끝에선 비릿한 피 냄새가 나는데, 눈에 보이는 공간은 너무나 깔끔했다. 이젠 감각이 상반되게 느껴진다. 더 미치기 전에 이 고통의 고리를 끊어야 했다.
“내 머릿속에 있는 코드는 하나가 아니었구나.”
이제야 이런 생각을 했다. 버키는 자신이 답답했다. 아무리 머리가 망가져도 잊어버려선 안 되는 일이 있는데, 자꾸 잊는다. 천천히 머릿속이 정리되니 어쩐지 마음이 편해졌다. 결국, 결론은 하나인데, 너무 오랫동안 고민을 하고 있었다.
“스티브…….”
하지만 이 녀석을 어째야 할까. 마음은 정리할 수 있어도, 친구를 떼어놓기는 쉽지 않았다. 자신에게서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죽을 것처럼 굴면서 예민해지는 녀석에게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하는지. 버키는 머리가 또 아팠다. 스티브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가야 할 때를 알아야 하는 법이었다. 그것이 순리고,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친구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릿할 정도로 아팠다. 이 감정에 얼마나 많은 것이 섞여 있는진 굳이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옆에 있으면 편하다. 꼭 태양 속에서 사는 것 같곤 했다. 하지만 그렇게 욕심을 내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다짐한다. 친구도 그럴까. 나를 이런 식으로 생각할까. 버키는 몇 번이나 스티브의 얼굴을 보고 답을 들었지만, 불안해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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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왕은 복도를 걷고 있었다. 굳이 반즈를 보러온 것은 아니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야 할 길은 조금 더 돌아서 걷곤 했다. 스티브가 그렇게 전전긍긍해가며 발이 떨어지지 않았던 이유를 조금 알 것 같기도 했다. 버키 반즈의 머릿속엔 아직 세뇌 코드가 살아있다. 물론 그 코드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지모는 어떻게 버키를 조종했는지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그 시기에 정전이 되어 CCTV조차 남아있는 것이 없으므로 더는 추궁할 수 없었다. 물론 윈터솔져를 세상에 내보냈다는 죄목을 하나 덜어낸다 해도 지모의 죄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캡틴이 왜 그렇게 조심스러웠는지 이해가 가는군.”
한동안 반즈를 바라보면서 나름대로 내린 결론이었다. 처음 만났을 땐 그 녀석이 제정신인지 아닌지 알아볼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다시 만났을 땐 버키 반즈가 아닌 윈터솔져가 있었다. 오른손은 그저 총을 쏘는 도구일 뿐이었다. 급소를 훅훅 치고 들어오는 공격엔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그때 봤던 남자는 그저 하이드라의 무기였다. 피로 얼룩져 단단히 묶여버린 실타래가 하나둘 풀린 그 순간 왕은 남자에게 사과해야만 했다. 그래서 잔뜩 다친 캡틴 아메리카와 버키 반즈를 와칸다로 데려왔고, 필요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생각이었다.
왕이 보기에도 버키는 심성이 착한 사람이었다. 세뇌와 고문에 모든 것이 망가지긴 했지만, 타고난 성정을 망가뜨릴 순 없었던 모양이었다. 물론 와칸다에 도착한 그 순간부터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캡틴이 옆에서 돌봐주고 잔뜩 날이 선 상처를 가이드로서 어루만져주기 시작하자 곧 얌전해졌다. 말은 약간 어눌하지만 어느정도 또렷하게 의견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분명 나아지곤 있다만…….’
확실히 반즈가 제정신을 찾아가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지모가 당장 이곳에 나타나지 않는 한 세뇌코드를 작동시킬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그만큼 불안한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세뇌코드나 윈터솔져의 살상력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전자는 이미 아는 사람이 없고, 후자는 반즈 스스로 의수를 다는 것을 거부했다. 그런데도 왕은 좀처럼 불안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반즈?”
저 멀리 복도를 배회하는 인영이 보였다. 익숙한 옷이 자꾸 복도를 이리저리 걸어 다닌다. 복잡하게 꼬인 장식 때문에 자꾸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곤 한다.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티찰라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왕은 머리가 총명한 사람이었다. 이런 일을 겪어본 적은 없지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빠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캡틴에게 설명해야 할 일이 많아질지도 모르겠군.’
왕은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와칸다로 데리고 오기 전부터 반즈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몇 번이나 발작을 일으키는 것도 다 지켜봤었고, 침착하게 해야 할 일을 배분해주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뭐랄까. 윈터솔져를 처음 마주했을 때 느꼈던 기분이 들었다.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수트가 없지만, 버틸 순 있겠지.’
주먹을 꾹 쥔 채 발소리를 최대한 낮췄다. 탄탄한 몸은 옆에 깃털이라도 내려앉으면 그대로 튕겨 나갈 것처럼 잔뜩 긴장해 있었다. 같은 곳을 계속 오가던 몸은 어느 순간 밖이 보이는 창문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긴 머리 때문에 눈이 보이진 않았지만, 어디를 보고 있는진 충분히 알 것 같았다. 티찰라는 조심스럽게 한 걸음 더 다가섰다.
“…….”
“아.”
아주 작은 소리가 났을 뿐인데, 반즈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하지만 그 상태로 움직이지 않았다. 꼭 망가진 인형 같았다. 허. 이상한 기분에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예민하게 반응했던 것과 달리 몸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꼭 영혼이 없는 것 같아 눈을 오래 쳐다보기 힘들었다. 단단하게 쥔 주먹엔 힘이 계속 들어갔다.
“반즈?”
“…….”
“버키 반즈?”
결국, 왕이 먼저 말을 건다. 이상할 정도로 움직임이 없었다. 솔직히 죽은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마저 했었다. 물론 다행히 숨은 쉬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티찰라는 긴장을 풀지 않은 채 계속 다가갔다. 이곳의 주인으로서 일의 원인을 알아야 했다.
“반즈, 내 말이 들리나?”
“…….”
“반…….”
“폐하?”
“정신이 들었군.”
“…….”
“끝까지 정신이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나 했지.”
“…….”
버키는 티찰라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잠시 자신이 서 있는 곳을 휘휘 둘러보더니 눈을 깜박인다. 그리고 다시 티찰라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느냐는 시선을 받은 왕은 오히려 난감해졌다.
“그건 내가 자네한테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
“…….”
“모르겠는가.”
“그게…아마.”
“…….”
이번 일이 뭔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을 땐, 이미 버키의 표정이 잔뜩 무너져 내린 뒤였다. 티찰라는 가볍게 다가가 버키를 부축했다. 어느새 식은땀 범벅이 된 남자는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 몸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왕이 간신히 반즈를 방으로 옮겼다. 의자에 쓰러지듯 걸터앉은 남자는 금방 죽어 넘어갈 것 같은 표정으로 숨을 내쉬었다.
“차라도 한잔하겠는가.”
“…….”
“내가 보기엔 좀 진정할 필요가 있어.”
왕은 가볍게 차를 부탁한다. 방문이 열렸다가 다시 닫혔다. 하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운 눈동자는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다 심장이 답답한지 한쪽 손으로 그 부분을 쥐어뜯으려 한다. 이런 당황스러운 사건 가운데 스티브가 없어서 다행인지. 아니면 불행인지. 그런 반즈를 지켜보는 왕의 표정은 씁쓸하기만 했다.
“일단 마시게.”
“…….”
“진정하고 이야기하지.”
“…….”
반즈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든다. 저러다 쏟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왕은 침착하게 반즈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간신히 입술에 찻잔을 가져다 댄다. 그리고 곧 내려놓았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팔엔 핏줄이 다닥다닥 서 있었다.
“폐하.”
“…….”
“아무래도 제가 깨어있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제 몸에 센티넬 인자가 강제로 박혀있는 것처럼 머릿속에 지져진 세뇌 코드가 하나가 아닌 것 같습니다.”
“…….”
“제가 스티브…아니 캡틴 아메리카를 망치고 있어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군.”
“제가 깨어 있으면 스티브는 계속 저런 식으로 행동할 겁니다.”
“…….”
“제발 스티브를 좀 도와주세요.”
친구를 도와달라. 왕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절로 괴로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평범한 왕인 남자는 센티넬과 가이드 사이에 생기는 미묘한 일을 알아챌 수 없었다. 티찰라는 반즈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려 본 후 좀 더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물론 그렇게 둘이 죽고 못 하는 사이이면서, 스티브가 아닌 자신에게 이런 말을 털어놓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미루어 짐작했다. 간단한 일이 아닌 줄은 짐작했지만, 이렇게 엉켜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
길고 긴 샘플이 끝났습니다
아직 가야할 길이 첩첩산중 같은데, 이제 남은 건 원고 잘 마무리 하는 일뿐이네요
시빌워 쿠키를 염두해 두고 쓰는 중이기 때문에, 끝이 마냥 밝을 수 없어 약간 힘이 듭니다
스티브는 또 아쉬운 눈을 하고 떠났다. 가기 싫다는 소리는 하지 못하고 내내 눈빛으로 잡아달라고 부탁했지만, 버키는 애써 모른 척했다. 여기서 자신이 캡틴 아메리카를 잡으면 안 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몇 번이나 눈을 마주치고, 그것도 모자라 아쉬운 듯 가까이 다가오는 스티브를 겨우겨우 밀어냈다. 다녀와. 다녀와서 말해. 짐짓 엄한 말투에 커다란 금빛 강아지의 표정이 울상으로 변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스티브 로저스라는 남자가 떼쟁이가 된 건지. 버키는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다녀와서 이야기하면 되잖아.”
“…버키.”
“난 진짜 괜찮다니까.”
“…….”
“스티브. 스팁.”
“…….”
“캡틴 로저스?”
“그건 싫어.”
“안 가면 계속 이렇게 부를 거야.”
“…….”
“네가 나 때문에 할 일 안 하는 건 볼 수 없어.”
“…….”
버키가 이렇게 나오면 스티브는 이길 수 없다. 스티브가 캡틴 아메리카가 아닌 척 무리에 끼어서 떠났다. 티찰라는 가지 않았다고 들은 것 같다. 왕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건 큰 회담이 있진 않다는 것과 같았다. 어쩐지 마음이 놓였다. 아마 몇몇 측근을 만나려고 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정치는 잘 모르긴 하지만…말이지.”
버키는 정치나 사회 쪽 문제가 나오면 늘 말문이 막혔다. 고위급 인사만 골라서 암살을 반복해온 윈터솔져가 정치 쪽에 둔하다니 어쩐지 아니려니 한 말이었다. 하지만 버키는 윈터솔져로 활동할 때 늘 백치와 같았다. 강제로 기억을 지운 뒤 세뇌 코드를 읊는다. 그리고 타겟팅을 정해주면 알아서 목표를 해치운 다음 돌아온다. 하이드라에게 버키는 좋은 무기였을 뿐이었다. 의지가 없으니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죽인 사람들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 깊게 물어볼 수 없었다. 어차피 이해할 수 없는 건데 굳이 부담을 지워주기 싫었다. 버키는 곧 자신이 해야 할 일이나 잘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안 되는 일을 붙잡고 있어 봤자 힘만 들었다. 벌써 머리가 아픈 것 같았다. 하지만 이건 버키가 해야 할 일이었다. 한 번 지독하게 물고 늘어지던 환상은 오늘따라 보이지 않았다. 이런 쪽이 더 불안하긴 했지만, 머리는 어느 정도 안개가 걷힌 것처럼 맑았다.
“…….”
짧게 인상을 쓰던 버키는 자리에 앉아 첫 번째 보고서를 열어보았다. 빽빽하게 적힌 의학 용어는 어려워서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쉬지 않고 보고서를 읽었다. 수많은 정보 중 아주 작은 단서라도 찾아야 한다는 마음에 자꾸 손이 헛나갔다. 안 그래도 한쪽만 남은 손으로 이것저것 뒤적여보는 건 힘들었다. 결국, 산처럼 쌓아둔 책더미를 팔꿈치로 툭 쳐버리고 말았다. 와르르 소리는 내며 쏟아진 책에선 먼지가 퐁퐁 피어올랐다.
센티넬은 세대를 잇기 어려운 존재였다. 가이드조차 찾기 힘들어 이젠 거의 사라진 종족이기에 학자들도 이쪽에 관한 보고서를 굳이 열어보지 않았다. 이런 것을 찾아 다 준 티찰라에게 새삼스레 감사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와장창 쏟아버렸으니 문제였다. 소중한 자료를 조금이라도 구겨진 상태로 돌려주기 싫었는데, 꼭 이럴 때마다 어딘가 망가진 몸이 사고를 치곤 했다.
“…이런.”
버키는 허겁지겁 책을 주우려 하다. 먼지를 들이마시고 몇 번이나 기침을 해버렸다. 쿨럭. 쿨럭. 눈에 눈물방울이 맺혔다.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매운 먼지에 호되게 당하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책을 주워들었다. 한 번에 두 개. 혹은 한 개. 천천히 책상 위에 쌓아 올리던 버키는 새삼스럽게 자기의 상태에 헛웃음이 나왔다.
가끔은 의수가 필요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했었다. 물론 자신이 의수를 극구 거부한 것도 맞았다. 하지만 이렇게 멍청한 짓을 할 때마다 왠지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일까 싶기도 했다. 물론 버키에게 왼팔이란 어차피 없었던 부분이었다. 그때. 그 옛날 기차에서 떨어질 때부터 이미 사라졌었다. 하지만 강제로 이식된 팔이라도 오랫동안 붙어있어서 그런지 꼭 원래 팔처럼 익숙했다. 물론 무기에 익숙해지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이건 생활의 문제였다.
“누가 보면 바보라고 놀리겠네.”
괜히 이렇게 한마디씩 툭툭 던진다. 그러면 저기 흐릿하게 모여있는 어둠에서 늘 보던 얼굴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그 모습이 꼭 늪에서 빠져나오는 괴물 같았다. 하이드라는 그런 녀석의 움직임을 보며 항상 칭찬했다. 그다지 듣고 싶지 않은 미사여구를 더덕더덕 붙인 윈터솔져는 늘 조용히 그늘에서 그늘로 옮겨 다녔다. 그런 녀석은 그늘에 숨어 이빨을 감추고 있다가 항상 스티브가 없는 틈에 나타났다. 누구 하나 죽일 것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젠 익숙했다. 꿈이 아니고 현실이다. 이렇게 받아 들으면 좀 더 편했다. 버키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젠 네가 무섭지 않아.”
“정말?”
높낮이가 없는 말투에 소름이 돋았다. 난 저렇게 말했던가. 자꾸 옛날 생각이 난다. 과거를 더듬는 건 스티브와 함께 있었던 잃어버린 유년기로도 충분했는데, 눈앞에 보이는 녀석은 자꾸 윈터솔져를 깨우려고 했다. 버키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이렇게 도망쳐봤자. 넌 나고, 난 너야. 날 쫓아낼 수 있을 거 같아?”
“…어떻게든 노력해보려고 하는 거잖아.”
“그래? 지금 내가 그 새끼의 힘에 눌려있다고 생각하나 본데, 사실 그런 거 아니거든.”
“…….”
“그렇게 멍청하게 살 생각이면 그냥 나한테 넘겨.”
“뭘?”
“…뭐겠어.”
“…….”
“모르는 척 하지 마. 솔져.”
그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렸다. 혼자서 중얼중얼 말을 하고 있던 버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윈터 솔져는 그새 입을 다문 채 방문 옆에 조용히 서 있었다. 그리고 새빨갛게 웃는다. 방문을 보며 손가락질을 한다. 버키의 귀에 자신의 웃음소리가 자꾸 들렸다.
다시 한 번 노크 소리가 들린다. 들어오라고 하고 나서야 조용히 문이 열렸다. 버키는 짧게 신음을 흘렸다. 밖에 이 소리가 들렸으면 얼마나 미친놈 같았을까. 이런 도발에 넘어간 자신이 나빴다. 아무리 말싸움을 해도 남이 보기엔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하는 미친놈밖에 되지 않았다. 물론 티찰라가 직접 붙여준 고용인들은 입이 무거웠다. 이 정도로 이상한 일을 하는 남자를 봐도 쉽게 일을 발설하진 않을 것이 분명했다.
“반즈씨?”
“…네. 무슨 일이시죠?”
“오늘 건강 상태 체크를 하는 날이라서요.”
“아…벌써, 시간이.”
“혹시 불안하시다면 캐틴 로저스가 돌아오시는 날에 맞춰서 하셔도 괜찮습니다.”
“…….”
“괜찮습니다. 반즈씨. 저흰 두 분을 돕는 사람들이니까요.”
“…….”
다정한 말이었다. 실제로 자신을 얼마나 꼼꼼하게 도와주는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을 보였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캡틴 아메리카의 친우라는 사람이 정신병을 앓고 헛것을 보는 새끼라는 소문이라도 퍼진다면 어떨까. 끔찍한 일이었다. 버키는 늘 자신에 대해 자신이 없었다.
자신의 단점은 곧 캡틴 아메리카의 약점이 된다. 캡틴 아메리카 에게 있어서 버키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다들 알고 있었다. 아니 알게 되었다. 다들 박물관에서 버키 반즈의 이름 정도는 모두 들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 살아서 나타났을 때 캡틴이 움직일 것이란 예상은 그 누구도 하지 못했다.
“아닙니다. 오늘은 괜찮을 것 같아요. 점심 먹고 가면 될까요?”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그럼요.”
위선자 새끼. 또 귓가에 날카로운 겨울 음성이 파고들었다. 하이드라의 망령은 호시탐탐 버키의 몸을 노렸다. 버키는 또 한 번 의수를 달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여기게 되었다. 지금도 이렇게 불안한 마음을 가눌 수 없는데, 몸이 멀쩡하면 더 큰 일이었다.
“그럼 식사하신 다음…….”
길게 이어지는 말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작게 메모를 한 버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할 일을 마친 상냥한 사람이 방에서 나갔다. 방문이 닫히면 곧 다시 피바다가 번져갔다. 이런 상황에서 미치지 않은 것은 스티브 때문이 분명했다. 아마 그 녀석이 죽었다면 버키는 제정신을 차릴 무렵에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검사라…….”
버키는 마른 입술을 슥 쓸었다. 사실 별로 좋은 결과가 나올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더 하기 싫은 마음이 생기는 것 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버티면 분명 스티브에게 이야기가 들어갈 테고, 그 녀석은 또 걱정을 사안은 채 옆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사적인 감정과 공적인 일 사이에서 버키는 내내 머리를 싸맸다.
“일단 보고서 좀 더 보고…….”
버키의 시선이 보고서에 닿았다. 보고서는 대체로 센티넬의 관점에서 그들을 파헤치고 있었다. 하지만 드물게 가이드나 가이드와 함께 지냈던 센티넬에 관한 보고서도 있었다. 버키가 찾고 있는 것은 그런 종류의 정보였다. 물론 가이드와 센티넬은 쌍방 관계기 때문에 스티브와 버키 같은 상황은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가이드의 존재조차 몰랐던 버키에겐 꽤 새로운 정보였다. 좀 더 읽어봐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덤덤한 말투로 적혀있는 것과 내용은 노골적이었다. 가이드와 센티넬이 무슨 행동을 하고 어떻게 서로를 보듬는지 적나라하게 나와 있는 페이지를 읽던 버키는 결국 보고서를 닫아버렸다. 물론 과학과 정보를 위해 만들어진 보고서라 하지만, 민망해서 참을 수 없었다. 후끈 달아오른 뺨을 시키며 괜히 방 안을 서성였다.
“이제 좀 알겠어?”
“…….”
“그 새끼가 널 속인 거야.”
“…….”
“다리 위의 그 남자. 태양 같은 스티브 로저스.”
“…….”
“고고하신 캡틴 아메리카가 말이야.”
“스티브는 날 속이지 않았어.”
“그럼 왜 널 찍어 눌렀겠어.”
“…….”
“속이지 않았다면, 그 사람이 널 그런 식으로 대했을까? 온몸에 센티넬이 물어뜯은 흔적을 만들면서까지?”
“…….”
“안 그래?”
악마의 속삭임보다 차가운 것이 볼에 닿았다. 이미 주위를 둘러싼 망령은 계속 웃기만 한다.
“널 통해서 그냥 욕심을 채운거야.”
“…….”
“센티넬은 같은 센티넬을 찍어 누르면서 흥분하지.”
“…….”
“넌 그냥 그 정도일 뿐이야.”
“듣고 싶지 않아.”
“날 막을 수 없잖아?”
“…….”
“그럼 그냥 들어. 들어놓으면 나중에 고맙다고 할 거야.”
“절대 안 그래.”
“정말?”
하이드라의 망령은 또 한 번 피를 토하며 웃었다. 그 모습이 너무 낯설어서 더는 쳐다볼 수 없었다. 버키는 아무리 생각해도 저 환상은 껍질만 뒤집어쓴 악마인 것 같았다. 아무리 기억이 지져져서 제대로 된 기억이 없다지만, 적어도 저렇게 행동했을 것 같진 않았다. 그렇다고 저 녀석을 떼어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평생 이러고 살 거면 그냥 들어가서 잠이나 자.”
“…….”
“그러면 이런 피바다 안 봐도 되고 말이지.”
“내가 그냥 다 알아서 해줄게.”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었다. 버키는 가는 신음을 내뱉었다. 이것도 저것도 모두 어지러웠다. 그저 사람답게 살고 싶었을 뿐인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이런 생각만 하면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져서 끙끙 앓기만 했다.
“스티브가 왜 변하는 거지.”
버키는 스티브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꾸 한 곳에 집착하고, 쉽게 화를 낸다. 그리고 그 화를 참지 못하면 누군가를 아래에 깔아야 정신이 돌아왔다. 지금 그 집착의 당사자는 버키였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도 버키는 세계의 모든 눈이 찾고 있는 존재였다.
“정보가 부족해.”
좀 더 알아야 해. 버키는 자신이 찾아야 하는 정보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무작정 책만 읽어선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일단 가이드 쪽 보고서만 읽고 페어로 일했던 군인에 관한 보고서만 읽기로 했다. 어차피 망가진 뇌론 어려운 과학 용어와 의학 지식을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버키는 좀 더 쉽지만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
몇 번이나 말하는진 모르겠지만, 정말 샘플이 거의 다 왔습니다.
사실 샘플이라기 보단 선연재에 가깝겠네요.
버키의 냉동이 점점 가까워져서 약간 힘들긴 하지만, 그 중간에 생길 일들을 잘 채워넣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이 이상으로 스티브를 건드릴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자신 외엔 그 누구한테도 보이지 않는 지옥이었다. 예전처럼. 늘 그랬던 것처럼 행동하면 그만이었다. 버키가 어느 한 곳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는 것을 알아챈 스티브는 고개를 숙여 시선을 맞춰가며 웃었다. 어제의 그 날카로운 기운은 오간 데 없고, 해바라기같이 밝고 따듯한 친구가 있었다.
“…버키?”
“응?”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아직 피곤이 덜 풀렸나봐.”
“…….”
“정말이야. 스티브.”
“아닌 거 같은데.”
“…….”
이럴 때만 눈치가 빠르다. 버키는 애써 웃어 보였지만, 친구는 영 못 믿는다는 눈치였다. 그리고 버키의 얼굴을 조목조목 뜯어보고 나서 또 강아지 같은 눈을 한다. 어젯밤 일을 짚어줄까 하다 말았다. 지금 기분이 좋은 것 같은데, 굳이 이 아침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스티브.”
“버키. 괜찮은 거 맞지?”
“물론.”
살짝 말끝을 흐리는 친구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던 스티브는 영 의심쩍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을 보며 웃어주는 얼굴을 보자마자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스티브가 조금 더 다가서니 이불이 줄줄 흘러내렸다.
“…아.”
“…….”
스티브는 자신이 만들어놓은 어젯밤 흔적을 찬찬히 뜯어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불시에 얼굴이 벌겋게 익어버린다. 어젯밤에 봤던 스티브는 꼭 다른 사람 같았다. 이렇게 상반된 반응을 보고 있으면 당황할 만도 한데, 버키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겠지.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불안한 마음을 다독였다. 물론 그 기저엔 캡틴 아메리카는 이렇게 억지로 누군가를 내리누를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당연한 믿음이 깔려있었다. 오히려 그래서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뭘 그렇게 쳐다봐?”
“아니…그러니까.”
“…….”
“…….”
두 사람이 입이 불시에 멎었다. 울긋불긋한 자국을 보고 있는 스티브는 얼굴이 화끈거려서 도통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버키의 몸에 남은 흔적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올 때마다 어젯밤 일이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어떻게 끌고 들어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옷을 벗겼는지. 무슨 말을 했었는지. 이럴 땐 기억력이 좋은 것이 원망스러웠다. 버키가 말하고 움직이던 모습 하나하나가 잔상처럼 눈앞에 맺혀있었다. 그리고 그 기억이 뚝뚝 흘러내리면 눈앞에 버키가 또렷하게 보이곤 했다.
“나도…자연 치유력이라면 나쁘지 않긴 한데…….”
“…….”
“아무래도 센티넬한테 물린 자국은 오래 가나 봐.”
“…….”
“하나도 안 지워지고 점점 짙어지네. 멍이라도 들려나.”
“…….”
버키의 무심한 목소리마저 너무 뜨거웠다. 스티브는 활활 타는 볼을 꾹꾹 누르며 고개를 푹 숙였다. 도저히 제정신으로 친구를 바라볼 수 없었다. 지켜준다는 말을 하고, 며칠 된 것도 아닌데 이런 식으로 일을 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버키와 했던 모든 기억은 이리 또렷한데,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짚을 수 없었다. 어느 순간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화가 났다. 그리고. 아. 절로 눈이 찌푸려졌다. 아무리 화가 났어도 하면 안 되는 행동이었다. 죽을 것 같이 끙끙거리는 스티브를 보던 버키의 입술이 슬쩍 올라갔다.
“재밌어?”
“…….”
그 순간 귓가에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피가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목소리가 귀를 통해 흘러들어왔다. 버키는 눈을 꾹 감았다. 여기서 내색하면 진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을 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미안해.”
“…….”
“버키. 많이 화났어?”
“…….”
잔뜩 움츠러든 금발 청년이 친구의 눈치를 살핀다. 하지만 친구의 눈은 저 멀리 허공에 떠 있었다. 곡 예전에 세뇌당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스티브는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냉큼 버키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버키. 왜 그래.”
“어…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왜 그렇게 멍하니 허공을 쳐다봐.”
“내가 가끔 이래. 머리가 온전하지 못해서.”
저기에 내가 날 보고 있어. 차마 할 수 없었던 말이 목으로 꿀꺽 넘어갔다. 피를 토하며 버키의 옆을 스쳐 지나간 윈터 솔져는 어둠에 몸을 숨긴 채 죽일 듯 버키를 노려보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면 당장 비집고 들어와 이 몸을 차지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서 더 내색할 수 없었다. 스티브는 버키가 윈터 솔져라도 공격하지 못한다. 임무가 아니라면 절대 손 하나 댈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친구에게 이 이상으로 무거운 짐을 지워줄 수 없었다.
“난 괜찮아.”
“웃기고 있네.”
“정말?”
“괜찮으니까, 어제 일도 그렇게 마음에 담아두지 마.”
“…….”
“역시 위선자는 태도부터 다르네.”
“응? 스티브. 스팁. 내 스티비.”
“…버키.”
“이런다고 내가 포기할 것 같아?”
“응. 스티브.”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스티브의 말에 섞여 들어왔다. 점점 미쳐가는 건지. 아니면 실제 상황인지. 버키는 여전히 혼란스러웠지만,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그래도 스티브가 옆에 있고 다독거려주니 마음이 많이 가라앉았다. 점점 흐릿해지는 환각은 끝까지 버키의 머리카락이라도 잡아채려는 듯 허우적거리면서 사라졌다. 핏자국 하나 남아있지 않은 방 안엔 여전히 둘밖에 없었다.
“버키. 내가 정말…미안한데.”
“무슨 일이야.”
“오들도 나가봐야 할 것 같아서.”
“…….”
태연한 척 하려 했는데, 얼굴이 먼저 굳어버렸다. 스티브가 옆에 있어도 슬슬 무의식을 비집고 나오는 환각이 보였다. 이런 상황에 스티브가 없으면 어떻게 될까.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버키의 표정을 찬찬히 뜯어보던 스티브는 한숨을 푹 쉬었다.
“역시 내가 안 가는 것이 낫겠어.”
“…….”
“그렇지?”
“아냐. 스티브. 그럴 필요 없어.”
“버키.”
“괜찮아. 오늘 나도 할 일이 있는 걸.”
“…무슨.”
“저번에 다 못 본 자료를 빨리 읽어둬야지. 빌려온 건데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이곳에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나, 네가 너무 걱정되어서…….”
“괜찮을 거야.”
“…….”
버키는 애써 친구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친구는 걱정이 되어서 떠나지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스티브는 그런 버키를 잘 알고 있었다. 둘은 서로를 너무 잘 알아서 탈이었다. 아무리 상대방을 안심시키려고 해도, 다 아는 성정이니 좀처럼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일부러 그러는 거 다 알아. 버키.”
“…….”
“그래서 내가 더 걱정하는 거야.”
버키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저번처럼 회담이 있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스티브는 캡틴 아메리카로서 해야 할 일을 굳이 알려주지 않을 것이 확실했다. 아쉬운 듯 버키를 안고 입술로 콧대를 쓸었다. 따뜻한 태양이 온몸을 감싸는 느낌이었다. 한동안 버키를 물고 빨던 스티브가 아쉬운 듯 떨어져 나갔다. 그 순간 빙하기가 찾아온 것 같았다. 버키는 더한 추위가 오기 전에 잠자코 옷을 주워 입었고, 스티브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팔짱을 낀 채 내내 인상만 찌푸렸다.
‘역시 지금 가면 안 될 것 같은데.’
스티브는 어젯밤부터 내내 후회할만한 선택을 하는 것 같았다. 어떤 것을 골라도 나쁜 일이 생기고 말았다. 물론 버키와 몸을 섞은 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건 좋았다. 하지만 그 외에 모든 행동은 있어선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계속 끙끙 앓고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캡틴 아메리카로서 가야 하는 일이 겹치고 말았다.
‘난 어쩌면 좋을까.’
헬리 캐리어에서 단호하게 버키를 떼어내고, 같이 죽으려고 했던 캡틴이 오간 데 없다고 나타샤가 웃을 것 같았다. 물론 그녀가 이런 식으로 반응할 것이란 보장도 없었다. 이럴 때 자꾸 주변에 있던 다른 사람이 생각나는 건 그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어졌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언제 출발하는데?”
“…어? 아침 먹고?”
“언제 돌아와?”
“일이 끝나는 대로. 아마 이번에도 일찍 올 것 같아. 사실 이렇게 와칸다 쪽에 섞여서 움직이는 것도 아직은 위험하거든.”
“그래서 전쟁터에 나가는 것처럼 유니폼을 입지 않는 거네. 캡틴.”
“…그렇게 부르지 마.”
“어째서?”
“너랑 있을 땐 그냥 스티븐 로저스이고 싶어서.”
“…….”
버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가 그렇다고 하는데 굳이 고집을 피울 필요는 없었다. 스티브는 언제나처럼 친절했고, 부드러웠다. 늘 하는 말이었지만, 버키는 그런 태양 같은 스티브를 거부할 수 없었다. 식물은 빛을 따라 자란다. 빛이 없으면 식물은 길쭉하게 키만 웃자라버리고 만다. 그리고 있는 힘것 몸을 틀어 태양을 따르려고 한다. 둘의 관계는 꼭 그것과 같았다.
“얌전히 할 일 하고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넌 지금까지 일을 보고도 그렇게 말하더라.”
“그렇게라도 해야지.”
“…….”
“내가 좀 편해.”
슬쩍 흘린 진심에 스티브는 웃고 말았다. 걱정하면 되는 일도 안 될 처지기에, 그냥 버키의 말을 한 번 더 믿어보기로 했다. 괜찮을 거야. 괜찮겠지. 계속 이런 생각을 한다.
“나 없는 동안 뭘 할 건데?”
“센티넬과 가이드에 관한 책을 계속 읽어야지.”
“…….”
“난 센티넬과 싸워야 해. 스티브.”
“…….”
“그러려면 그것의 실체를 알아야 하고. 물론 거기까지 가는 일이 어렵겠지만, 포기하고 싶진 않아.”
“나도 그 마음 잘 알아. 버키.”
“…….”
“나도 그랬어.”
오랜만에 또 과거 이야기를 한다. 군데군데 불에 탄 것처럼 구멍이 숭숭 난 낡은 일기장을 넘겨보던 브루클린 소년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