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반짝 관심은 오래갈 일도 아니었다. 화려하게 결혼식을 한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주목할 만한 사고를 친 것도 아니었다. 단지 둘의 직업이 직업인만큼 잠시 화젯거리가 됐을 뿐이었다.
그러나 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관심은 둘에 대해 알고 싶어 했다. 하지만 토마스야 연구가 바쁘다는 이유로 자신의 연구실에 틀어박히면 꺼내올 사람이 없었다. 딱히 연예계에 발이 넓은 사람도 아니었거니와 유명하지도 않았다. 좀 더 깊은 관심을 가지던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논문을 찾아보고 혀를 내두르는 것이 전부였다. 위키드 연구소 총장 페이지의 직접 사사 받는 애제자. 최연소 총장 후보. 기타 등등. 화려한 수식어가 붙어있었지만, 솔직히 평범한 사람들의 흥미를 움직이기엔 조금 부족했다.
“그러니까 내가 왜요?”
여기서 붙잡힌 쪽은 뉴트였다. 토마스보다 익숙한 얼굴에 적당한 인지도까지. 그런 뉴트를 노리는 기자들이 더덕더덕 달라붙을 때마다 질색하는 표정으로 도망가던 녀석은 결국 뭔가 포기하긴 했는지, 가끔 인터뷰하기도 했다. 조용히 살았는데 도대체 왜 이렇게 일이 커진 지 모르겠다. 그런 말이 듣는 사람마다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꽤 요란하게 사귀긴 했는데,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디서 만나셨는지, 조금만 알려주시죠.”
“…그건 다들 아시지 않나요? 그냥 대학에서 만났어요. 선후배로.”
“뉴트 씨가 선배? 선배 맞으시죠?”
“…그렇죠.”
“아하.”
한 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신경이 쓰였다. 도대체 뭘 원하는 건지. 도시 한복판에서 결혼식이라도 하는 걸 원하는 걸까. 사실 뉴트는 모델일 외에 딱히 자신을 드러내는 타입도 아니었고, 토마스는 그보다 더했다. 어렸을 때부터 질리도록 돌아다닌 것이 너무 지겨워 어느 순간 브라운관에서 사라져버린 놈이었다. 그런 둘이 조용히 집에 틀어박혀 있다 밖에 나왔을 뿐인데, 세상은 관심을 가져도 너무 가졌다.
“어차피 이러다 슬슬 관심이 사라지겠죠.”
“과연 그럴까요? 다들 굉장히 궁금해 하는 것이 많은 걸요.”
“하지만 말입니다. 대다수가 그렇게 궁금해 하는 일은 저희 프라이버시겠죠. 안 그런가요?”
“그렇죠.”
“그래서 밖으로 이야기하지 않는 겁니다.”
뉴트가 이미지 소비를 많이 하지 않고 계속 호기심을 끌어당기는 것은 어쩌면 성격 탓인지도 모르겠다. 한번 철벽을 친 다음 두 번짼 아주 조금 허물어버린다. 다 이야기해줄 것처럼 하다가도 어느 순간 계약이 끝났다면서 몇 달 동안 칩거한 채 좀처럼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이 적절한 조련에 사람들은 꼭 미끼를 문 것처럼 이리저리 휘둘렸다. 하긴 이렇게 행동하면서 동시에 토마스를 관리했으니 이 정도에서 그쳤겠지. 아니었으면 이미 스캔들을 만들어도 세 번은 만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럼 나중에 또 한 번.”
“그땐 제가 바쁠 것 같은데요.”
뉴트는 일어서면서 인사를 한다. 도대체 무슨 관심이 이렇게 많은 건지. 너무 많은 질문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이 정도에서 그만하면 될 것 같은데. 물론 속마음이 그렇다 해서 대충 대답한 것도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온 뉴트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런 뉴트를 기다리던 매니저가 웃으면서 걸어왔다.
“끝났어?”
“적당히.”
“그럼 가자. 오늘 촬영은 없으니까 바로 집으로 가면 될 거야.”
“아무것도 안 하고 눕고 싶다.”
“그러도록 해.”
“그럴까.”
뉴트가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인터뷰가 끝나고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밖에서 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덫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차에 탈 때까지 뉴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래도 딱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여튼 남한테 관심은 많아서.”
“문은 닫고 말해라.”
“당연하지.”
아. 피곤해. 뉴트는 차에 타자마자 그대로 늘어졌다. 끙끙 앓으면서 팔을 쭉 폈다. 으으으. 절로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모델을 한다고 했지 연예계 진출한다는 소리를 한 적 없었는데……. 왜 다들 이렇게 궁금해하지.”
“…다들 어쩔 수 없는 일이 있으니까 그렇지.”
“그런가. 하지만 정말 이런 일은 취향이 아닌 거 같아.”
매니저는 소리 없이 웃었다. 하긴 인터뷰도 일에 관련된 것만 고르고 골라서 응하던 사람이 갑자기 연애 사정을 설명하려니 혀가 꼬이지 않을 리 없었다. 그래도 굴러먹은 연차가 있으니 소란을 만들진 않겠지만, 영 적응이 안 된다는 표정을 보는 건 또 재미가 있었다. 온몸으로 싫다 싫다 하면서 또 일정 잡아오면 군말 없이 나간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한참 앓다가 토마스를 소환한다. 매니저도 뉴트와 일한 지 꽤 오래됐지만, 요즘처럼 뉴트의 감정선이 널뛰는 광경은 처음 봤다.
“그래도 이럴 때가 좋은 거다.”
“…별로 안 좋은 거 같은데.”
“배가 불렀지.”
낄낄거리며 농담 따먹기를 주고받던 차 안이 순간 조용해졌다. 뉴트는 안 그런척해도 꽤 긴장한 것인지 금방 곯아떨어졌다. 매니저는 조용히 차를 세웠다. 그리고 급하게 내렸다. 둘만 있으면 이렇게 불편한 일이 종종 있었다. 문을 열고 옆자리에 구겨둔 담요를 꺼내서 바짝 마른 어깨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푹 뒤집어 씌웠다.
에이전시 쪽은 이참에 뉴트를 연예계로 밀어 넣고 싶은 모양인데, 정작 당사자는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는 것 같았다. 지금도 할 만큼 일하고 은퇴하면 저기 멀리 집이나 사서 틀어박혀야겠다고 말을 하는 녀석을 어떻게 끌고 가야 할까. 매니저는 생각할수록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고 어려웠지만, 그래도 할 일이 없는 것보단 나았다.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도 있고.”
“…….”
“난 그걸 시켜야 하고.”
매니저는 혼자 웃었다. 저만큼 나이를 먹었는데, 가끔 보면 나이답지 않은 어린아이 같은 면이 있었다. 아니 토마스한테 옮았다고 봐야 할까. 둘은 물과 기름같이 보이면서 슬쩍 섞이고 있었다. 토마스는 언제쯤 온다고 했던가. 머릿속으로 날짜를 셈하던 매니저는 곧 고개를 가볍게 흔들고 운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누가 저 녀석은 그렇게 예민하던 모델이라 생각할까. 이런 것을 보면 확실히 사람은 좀 부대끼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맞는 말 같았다. 사실 따지자면 처음 만났을 때보다 나이를 먹은 것도 있는 데다, 뉴트가 더 철없이 행동하는 토마스를 잡아오느라 상대적으로 같이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는 것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하지만 뭐 어떤가. 결과적으론 좋은 일이었으니까. 주변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같이 섞여 들어갔다.
물론 집에 오자마자 토마스가 귀신같이 전화한다. 차를 타고 이동한 시간이 얼마나 긴데 그동안 한 번도 연락이 없다가 집에 들어와서 옷 좀 벗으려 하면 꼭 이렇게 통화가 길어진다. 뉴트는 제법 진지하게 토마스한테 질문한다. 물론 둘 다 일이 많아 지친 목소리였지만, 이 시간이 싫진 않은 모양이었다.
“너 나한테 GPS라도 달아놨냐?”
“무슨 소리야?”
“아니면 이렇게 시간 맞춰서 전화하기 힘들 거 같잖아.”
“그런 거 아니고, 내가 지금 끝났어.”
“…정말?”
“응. 정말. 잠깐 커피 마시러 나왔어. 조금 있다가 다시 들어가야지.”
“집엔 언제 올 건데?”
“…그게.”
아차. 요즘 가장 예민한 주제를 생각 없이 꺼내 버렸다 뉴트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토마스의 목소리가 질질 늘어졌다. 이쪽도 엄청나게 피곤한 모양이었다. 얼굴 못 본 지 얼마나 됐더라. 일주일? 이주일? 이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 걸 보니 오래 헤어져 있어도 어지간히 떨어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분명 핸드폰에 적어놨을 텐데. 항상 계획은 계획처럼 제대로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사실 언제 끝날지 모르겠어.”
“…일주일이면 끝난다고 자신감에 차있던 토마스 씨는 어디로 갔을까.”
“그땐 그럴 줄 알았지.”
“일 주인은 더 있어야 해?”
“아마도? 근데 일찍 끝나면 바로 나올 수 있고.”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이 주일은 더 못 나올 것 같네.”
“아니야. 그런 소리 하지 마.”
“왜? 정말일까 봐?”
“…으응.”
토마스는 무서운 소리 하지 말라고 했지만, 어쩐지 미래가 될 것 같았다. 토마스가 말하기를 이번은 정말 어렵지 않은 연구인 줄 알았는데, 자꾸 원하는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했다. 그러다 보니 계획이 자꾸 늘어졌다. 게다가 초조해 지면 오히려 제대로 결과를 만들지 못하는 것도 한몫했다. 다른 선임들이 토마스한테 어깨 힘 좀 빼고 조급해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게 어떻게 사람 맘대로 되는 일인가. 그래서 한참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래도 전화는 할 수 있으니까.”
“…연구실 들어가면 못하잖아.”
“그래서 오늘 다 하고 갈 거야. 뉴트 보고 싶어.”
“나도. 그리고 집에 오기 전에 미리 나한테 이야기하고 와. 미리 시간 빼놓을 테니까.”
“알았어.”
“너 연락 안 하고 오면 내가 집에 없을 수도 있어. 먹을 것도 없으니까 꼭 연락해. 저녁으로 먹고 싶은 것도 정해놓고.”
“…난 아무거나 상관없는데.”
“고기 먹여야겠네.”
“그것도 좋고. 뉴트랑 같이 있으면 뭐든 좋아.”
“그래. 우리 둘이 같이 시간이 맞아야 할 텐데. 휴가는 한 번에 몰아서 쓰게 해준 데?”
“응? 아마도. 지금 이렇게 끌려들어 가는 것도 중반 넘어가면 좀 낫지 않을까. 그렇다고 내가 빠질 수도 없는 일이고, 다들 바쁜데 나 혼자 나갈 수도 없고.”
“…철이 들었나.”
뉴트가 솔직하게 감탄했다.
예전에 무슨 일만 나면 모든 걸 제쳐놓고 뛰어나오던 녀석이 저런 말을 할 수 있다니. 그래도 나이가 먹으면 사람이 변할 수 있나 보다. 어쩐지 아들 하나 다 키운 기분이 들었다. 둘이 사귀는 내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니. 이것도 참 새로운 경험이었다.
“뉴트 보고 싶다.”
“…나도. 토마스.”
“옛날엔 연구소에서 나가는 게 싫었는데, 요즘은 오래 있는 것보다 제시간에 퇴근하고 싶어.”
“그런 소리를 하는 걸 보니 아직 살만한가 보네.”
“너무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니 그래도 억울함이 좀 풀어졌는지 목소리가 사근사근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요즘 바빠서 한동안 연구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처지는 변하지 않았다. 자꾸 끊을 듯 말듯 전화기를 붙잡았다. 그리고 엉엉 울면서 집에 가고 싶다는 녀석을 달래던 뉴트는 간신히 통화를 끝낼 수 있었다.
아니 뉴트가 끊은 건 아니었다. 이제 정말 들어가지 않으면 큰일이라 선임들이 토마스를 데리러 온 탓이었다. 통화만 했을 뿐인데 어쩐지 더 피곤했다. 잔뜩 지친 표정으로 침대에 늘어졌다. 으윽. 팔다리를 쭉 펴던 뉴트는 그대로 침대에 누운 채 천장만 바라보았다.
사실 집에 사람이 둘 이상 있던 적이 많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집이 넓어 보이는지. 유난히 쓸쓸해 보이는 집에서 이리저리 뒹굴던 뉴트는 이불을 돌돌 감았다. 시간이야 원하든 원하지 않든 계속 흘러갈 거고, 그러다 보면 연구실에서 돌아온 토마스도 만나겠지. 그리고 또 서로 일하러 나가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뉴트는 괜히 손끝으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어차피 볼 수도 없겠지만, 꾹꾹 메시지를 적어 넣었다. 일찍 보면 좋고, 늦게 보면 어쩔 수 없고. 한창 불타고 좋을 시기에 이렇게 강제로 떨어져 있는 감각은 딱히 오래 느끼고 싶지 않았다.
민호의 상처는 다행히 덧나지 않고 잘 아무는 것 같았다. 워낙 회복이 좋아서 그런 건지, 천만다행으로 감염이 되지 않은 건지. 뉴트는 매일매일 붕대를 감아주면서 내내 잔소리를 한마디씩 얹었다. 미간을 푹 찌푸린 채 붕대를 바라보던 민호는 뭐라 하려다가 입만 꾹 다물었다. 아무리 뭐라고 변명을 하고 싶어도 다친 사람은 이쪽이었다. 아직도 붕대를 매고 다니는 처지에 한마디 해봤자 좋을 것 하나 없었다.
“…신기하게 덧나지도 않고 잘 낫고 있네.”
“이 정도야.”
“흉터는 좀 남을 것 같은데.”
“그게 뭐 어때서.”
“…….”
“어차피 이렇게 살다 보면 상처 하나 없는 놈 없을 텐데.”
“…….”
“왜 그래?”
뉴트는 입을 꾹 다물었다.
민호는 아차 싶었다. 또 별생각 없이 말실수라도 했나 싶었다. 다시 물어보려 하기도 전 붕대를 꽉 동여매 버린 뉴트가 벌떡 일어섰다. 아 왜. 민호는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뉴트의 옷자락을 잡았다. 우뚝 멈춰선 뉴트가 가볍게 눈을 흘겼다.
“왜 그러는데?”
“이제 좀 살아난 것 같아서 별로 걱정이 안 되네.”
“…그게 전부야?”
“그래.”
슬쩍 웃음이 번지는 걸 보니 분명 속에 숨기고 있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절대 말해줄 사람이 아니었다. 민호가 머리를 벅벅 긁는 동안 뉴트는 재빨리 천막을 빠져나왔다.
‘잘 됐을려나.’
아무도 손을 못 대게 하고 직접 벗겨서 정리한 가죽이었다. 물론 뉴트도 그렇게 가죽을 잘 만지는 편은 아니지만 남한테 시키긴 싫었다. 약간 실수가 있긴 했지만, 열심히 가죽을 벗겼다. 물론 남은 여우 고기는 어떻게 해보기라도 하라며 음식 담당하는 프라이에게 넘겼다. 다들 신기한 고기라며 어떻게 한입씩 맛은 본 모양이었다. 딱히 이렇다 한 감상이 없는 걸 봐선 영 맛이 없나 싶기도 했다.
‘… 바느질 안 하려 했는데.’
바짝 말려둔 가죽을 들던 뉴트는 내내 눈을 찌푸렸다. 일단 재료는 준비됐는데, 바느질 솜씨가 조금 부족했다. 하긴 아무리 예쁘게 만들어줘도 저렇게 쏘다니고 다쳐오면 일주일도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튼튼하게. 이걸 목표로 시작했는데, 이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나가서 해야겠다.”
너덜너덜해진 수상한 물체를 바라보던 뉴트는 괜한 화풀이를 한다. 민호가 빼앗아온 물건을 정리하고 이것저것 분류하러 다니던 동안 뉴트는 양을 몰고 나갈 준비를 했다. 늘 싣고 다니던 짐 속에 슬쩍 가죽과 바느질 도구를 집어넣었다. 늘 하던 일인 척 자연스럽게 민호 곁은 스쳐 지나갔다. 민호는 또 저렇게 훌쩍 나가서 안 들어올까 내내 걱정을 늘어놓았다. 같이 산지도 꽤 시간이 흘렀는데 왜 저렇게 불안해하는지. 다들 민호가 점점 더 이상해진다며 고개를 저었다. 뭐 이런 것도 사랑이겠거니. 아니면 조금 늦게 온 사춘기려니. 다들 대충 이런 식으로 넘어갔다.
가끔 이런 곳에선 생각보다 훨씬 넓은 포용 능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물론 몇몇은 빼고. 처음 뉴트가 이곳에 굴러들어왔을 때부터 눈꼴셔서 가만두질 못하던 녀석들은 계속 겉돌았다. 겉으로는 민호한테 네네 존댓말을 하며 따랐지만, 조금이라도 수가 틀리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생각보다 거친 녀석들이 많았다. 물론 절대적인 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에게 반기를 들면 끝이 어떻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전 대장이 죽고 민호가 자리를 차지했을 때부터 잡음이 없진 않았다. 그저 이길 수 없으니 숙이고 들어가는 거다. 그런 상황에 툭 끼어들은 뉴트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자리가 너무 애매했다.
하지만 열심히 할 일을 찾아 하면서 제 밥값을 하는 녀석을 무작정 밀어낼 순 없었다. 그걸 알고 있는 뉴트는 더 바쁘게 움직였다. 시키면 도적질 못 하랴 싶었지만, 적어도 민호는 시키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이런 특혜 필요 없는데. 뉴트는 여전히 바빴고 머리가 복잡했다.
천막을 나서려는데 프라이가 말을 걸었다. 민호가 아침부터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어지간히 바쁜 모양이었다. 다친 녀석이 저렇게 돌아다니는 걸 보니 좀 안타깝긴 한데, 그러려니 했다. 정말 죽을 만큼 아프면 다른 녀석들이 먼저 그만하라고 하겠지. 다들 고집이 대단하니 어차피 좀 쉬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을 녀석이었다.
“민호는?”
“아침부터 물건 정리하려고 나갔지. 그래도 정리를 해놔야 다음에 또 팔 수 있으니까.”
“아파서 못 일어나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말했는데. 영 듣질 않더라고.”
“언제나 그렇지.”
뉴트가 웃으며 짐 꾸러미를 들었다. 그런 모습을 보던 프라이는 두 손을 허리에 얹었다.
“오늘은 양 몰고 나가려고?”
“그래야지. 며칠 쉬었으니까.”
“일찍 일찍 들어와. 시간 맞춰서,”
“알았어.”
“민호는 안 보고 가고?”
“그러다간 오늘 저녁 먹기 전에 못 들어오니까. 민호한테는 걱정하지 말라고 해. 제시간에 돌아온다고.”
“알았다.”
민호가 돌아오면 나갈 시간에 못 맞춰 나간다는 우스갯소리를 하던 뉴트가 훌쩍 말 위에 올라탔다. 왜 저렇게 서두르는지. 유난히 허둥거리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프라이를 혀를 쯧쯧 찼다. 뭐든 이 삭막한 곳에서 뭔가 생기가 도는 것은 좋았지만, 너무 간질거렸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둘이 잘해보라 열심히 옆구리를 찔러주고 있었지만. 둘의 생각은 여전히 애매한 부분이 어긋나 있는 것이 확실했다.
아무리 머리가 복잡하다 해도, 일단 밖으로 나오면 맑아졌다. 입으로 양을 몰면서 바짝 붙었다. 순한 짐승들은 뉴트가 이끄는 대로 얌전히 움직였다. 배가 찰 때까지 풀을 뜯으라고 들판에 양을 풀어둔 뉴트는 말 등에 얹어뒀던 짐 꾸러미를 들고 왔다. 꽁꽁 싸둔 천을 풀자 반쯤 바느질을 하다 만 여우 가죽이 툭 굴러 나왔다.
나무에 기댄 채 가죽을 천천히 바라보던 뉴트는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연신 이마를 찌푸렸다. 분명 생각하고 있던 모양이 있는데 어쩐지 손을 댈수록 점점 그 모습에서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하.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바느질한 가죽. 혹은 망가져 가는 여우 가죽.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조잡만 모양에 뉴트는 끙끙 앓았다.
“이런 걸 만들려는 것이 아니었는데.”
생각처럼 잘 안 되는지 다시 바늘을 다잡은 뉴트는 가죽을 잡고 연신 끙끙거렸다. 돌아가기 전까진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자세를 조금 더 편하게 고쳐 잡았다. 슬슬 집중하기 시작하니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양이 배를 채우려면 아직 시간이 꽤 남아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뉴트의 머리가 푸스스 갈래갈래 흩어졌다.
***
“이게 뭐야?”
“…….”
“선물?”
“그래.”
“그러니까 뭘…만든.”
아악. 누군가 민호의 발을 대차게 밟았다. 눈치도 없어. 또 와글와글 모여서 입을 보태는가 싶더니 둘을 마구 밀어 천막 안으로 집어넣었다. 아 왜. 왜! 항변 섞인 목소리는 시끄러운 발자국 소리에 묻혀버렸다. 이럴 땐 그냥 둘만의 시간을 만들어 주는 편이 나았다. 자꾸 밖으로 나오려는 민호를 꾹꾹 눌러서 집어넣은 녀석들은 주변을 지킨다며 한참 와글와글 모여서 떠들다 하나둘 흩어졌다.
“받아.”
“…그러니까 이게.”
“모양은 좀 이상하지만 여우 털이야. 따뜻할 거라고.”
“…….”
뉴트는 얼굴을 돌린 채 손을 쑥 내밀었다. 민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손과 뉴트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뭔가 싶었는데 선물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자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뉴트의 손끝이 가늘게 떨리는가 싶더니 불쑥 눈앞으로 다가왔다.
“추워 보이니까 두르고 다니라고.”
“…….”
“그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누가 책임져 준대?”
“…그게.”
“여우를 잡은 김에 만든 거야. 나야 멀리 안 나가고 불이 항상 피워진 이곳에 있지만, 넌 아니잖아.”
“일부러 만들었어?”
“그래. 모양은 좀 이상하긴 해도.”
뉴트가 새빨개진 얼굴을 꾹꾹 누르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말이 멋대로 나오려고 하는지. 한참 서로 눈만 마주치던 둘은 손은 붙잡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
“뉴트?”
“둘러봐.”
뉴트가 민호의 목에 목도리를 훅 둘렀다. 보송보송한 여우 털이 목에 푹 감겼다. 민호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는가 싶더니 한 손으로 목소리를 만지작거렸다. 겨울이 가까워져 오는데도 변변한 천하나 감고 다니지 않아서 그랬어. 어물어물 저 멀리 뉴트의 목소리가 넘어갔다. 민호는 아무 말 없이 계속 털만 쓰다듬었다.
“뭘 이런 것까지 만들었어.”
“겨울이 온 지도 모르고 돌아다니는 누구 덕분이지.”
“…근데 이거 목도리 만든 거 맞지?”
“그래. 내가 좀 바느질을 못 한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러니까.”
“도적은 멋진 거 안 두르고 다닌다며. 그럼 그냥 방한용이나 생각하고 써.”
“…….”
“그러다 다 떨어지면 그냥 버리면 되니까.”
쌀쌀맞게 말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 입에서 퉁명스러운 단어가 툭툭 튀어나왔다. 물론 예쁘고 곱게 만들어주면 누구나 좋아하겠지만, 손이 따라주지 않는 걸 어쩌겠는가. 하지만 이렇게 구구절절 변명하는 것은 민망하니 돌려 말하곤 했다.
“잘 쓸게.”
“됐어.”
“따뜻하다.”
“그런 말 안 해도 된다니까.”
한 마디 한 마디가 이렇게 어려운 줄 미처 알지 못했다. 서로 소맷자락과 목도리를 꾹 잡고 놓지 않았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가늘게 웃었다. 어쩐지 선물 받은 걸 자랑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영 민망한 표정으로 망설이던 민호는 며칠 지나지 않아, 마치 십 년 쯤 목도리를 사용한 사람처럼 목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저녁 식사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은근슬쩍 민호 옆에 자리를 잡고 있던 벤은 못 보던 물건이라며 괜히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그럴 때마다 참 재밌는 반응이 터졌다. 뉴트는 시선은 반대로 돌리며 음식을 집었고 민호는 고개를 숙인 채 들 줄 몰랐다.
“어디서 났어?”
“몰라도 된다.”
“흐음.”
벤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민호가 저렇게 말을 아끼는 것을 보니 척하면 알 수 있었다. 물론 민호를 계속 놀려봤자 좋은 일이 없으니 어느 정도 자제하긴 했다. 하지만 궁금한 것을 참기 어려웠다.
“좋은 일이 있나 보지.”
“벤!”
“아, 이런 농담이나 하려고 이 자리를 잡은 게 아닌데.”
벤이 잠시 하늘을 쳐다보았다.
“민호.”
“왜 그러지?”
“달이 차오르고 있어.”
“…아.”
“약속한 날이 오고 있는 게 슬슬 출발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렇긴 하지.”
“근데 네 팔이 문제네. 괜찮겠어?”
“이 정도 쫌이야. 그렇게 큰일은 아니야. 상처가 덧나는 것도 아니고. 좀 힘든 거라면 아직 힘을 제대로 줄 수 없다는 정도인데.”
“그게 매우 큰 문제인 것 같다고 생각해.”
“하지만 날짜를 어길 순 없지.”
“그것도 맞는 말이야.”
또 뉴트는 모르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둘의 표정이 진지해지는 걸 보아하니 꽤 중요한 일인 듯싶었다. 뜯던 빵을 다시 내려놓은 뉴트는 조용히 귀를 기울인 채 민호가 대답하길 기다렸다.
“내일 새벽에 떠나야겠네.”
“그래도 좀 걱정이 된다. 너도. 이곳도.”
“…그런 이야기는 이런 곳에서 하지 마.”
“그래. 이따 거기서 만나지.”
대화가 뚝 끊겼다. 민호가 저렇게 말한다면 이젠 한마디도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뉴트는 주변에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늘 답답했다. 무슨 일일까. 난 알면 안 되는 걸까. 충분히 물어볼 수 있지만, 그러면 괜한 분란을 일으킨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괜히 가슴 한구석이 답답했다.
그렇게 저녁 식사가 끝나고, 밤이 깊도록 민호는 천막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 벤과 같이 쓰는 천막 쪽에 있으려나 뉴트는 벗어놓은 옷을 하나둘 갰다, 다시 폈다. 그러면서 시간을 보냈다. 도대체 무슨 말을 주고받는 건지.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조심스러워야 하는지. 차라리 대놓고 물어보기라도 하면 마음이라도 후련해질 텐데, 뉴트는 꾹꾹 속으로 삭이고 있었다. 천막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뉴트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왜 안 자고 있어.”
“그런 넌 내일 일찍 나간다면서.”
“…그렇게 됐다.”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뭘?”
“도대체 넌 뭘 숨기고 있는 거야. 물론 대장이라는 자리가 이것저것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 하지만 계속 그렇게 몇몇이어서 대화하면 불만이 없을 리가.”
“…알고 있어.”
“그럼 왜.”
“알아봐야 피만 부를 뿐이야. 그리고 다들 나처럼 입을 다물고 있으리란 보장도 없으니까. 차라리 궁금한 채로 모르는 편이 낫지.”
“나는?”
“뭐가?”
“적어도 내일 왜 무슨 이유로 나가는지 알아야겠어.”
“애들이 우리 둘보고 이런저런 장난을 치다 보니까 너도 동조하기로 한 거야? 왜 갑자기.”
“그런 거 아냐. 단지.”
“…단지?”
“하염없이 기다리는 쪽이 싫어서 그래.”
말을 끊는 뉴트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그런 표정을 바라보던 민호가 화들짝 놀랐다.
“그냥 대답만 해주고 가.”
“…….”
“언제 얼마나 지나면 돌아오겠다고.”
“그야.”
민호가 입술을 깨물었다.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 물론 다들 민호가 뭘 하러 가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깊은 이야기는 함부로 나누지 않았다.
“나중에.”
“…나중에?”
“그래. 이곳에 관한 일은 아무한테도 말을 하지 않는다.”
“알았어.”
“응?”
“알았다고.”
뉴트는 생각보다 쉽게 물러섰다.
민호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굳이 되묻진 않았다. 미묘하게 쌓인 신뢰가 점점 단단히 굳어가고 있었다. 뉴트가 입고 있던 옷을 한 겹 더 벗었다. 자자. 많은 말은 없었다. 여느 때와 같이 서로 반대 방향을 보고 누운 채 말이 없었다. 한참 잠들지 못한 둘은 괜히 뒤척거리며 이불만 끌어당겼다. 조금만 가까이 붙으면 편할 텐데 조금만 움직이면 이불 밖으로 굴러갈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 순간 민호가 돌아누웠다. 자는 척 눈을 꼭 감고 있던 뉴트의 몸이 슥 끌려갔다.
“민호. 팔.”
“괜찮아.”
“…….”
“…그리고 추워.”
“…….”
“괜찮으면 가까이 와서 자.”
“…….”
뉴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민호는 좀 더 뉴트의 몸을 끌어당겼다. 품안 가득 들어온 마른 몸이 가늘게 떨렸다. 민호는 모르는 척 뉴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마른 꽃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꿈인지. 현실인지. 돌아눕진 않았지만 뉴트는 그런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어깨까지 이불을 푹 뒤집어쓴 둘은 조용조용 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더 움직이면 쿵쿵 울리는 심장 소리가 서로에게 들릴까 싶어.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별빛이 천막 위에 사분사분 쌓이는 동안 둘은 그렇게 가만히 안고 안긴 채 누워있었다.
***
새벽안개가 채 가시기도 전에 민호가 조용히 눈을 떴다. 아직도 얌전히 품에 안겨있는 뉴트를 바라보던 민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좀 더 당겨 안은 채 한참 움직이지 않았다. 따뜻한 체온이 팔에 따뜻하게 스며들었다. 거친 붕대를 감은 팔에 뉴트가 깰까 싶어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옆으로 웅크린 채 자는 뉴트 위로 이불을 다시 덮어주고 나서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아직 해가 안 떴네.”
민호는 사방을 둘러봤다. 불침번을 하던 녀석들도 슬슬 눈을 붙이러 갔는지 사방이 조용했다. 누군가 깰까 봐 발소리를 낮춰 걸었다. 부엌 앞에 걸려있는 주머니를 들어 올리니 뭔가 묵직하게 잔뜩 담겨 있었다. 많이도 넣었네. 보나 마나 프라이의 작품이었다. 먹는 건 잘 먹어야 한다는 신조를 지닌 녀석은 항상 이렇게 도시락을 싸뒀다. 그래 봐야 간단히 먹을 수 있는 빵과 육표, 물이 전부였지만 프라이의 세심함이 느껴졌다. 도시락과 처분한 금붙이를 말 등에 실었다.
“이제 갈까.”
아무도 듣지 않는 혼잣말만 중얼거렸다. 규칙적으로 이렇게 떠나곤 했지만, 가끔 이렇게 가슴이 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디 가는 거야.”
“…어?”
“나한텐 말을 하고 떠나야지.”
“…….”
안 그래도 품에 안겨 반쯤 선잠을 자던 뉴트는 천막 문이 열리는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꿈인가 싶어 눈을 연신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리고 큰맘 먹고 뒤로 돌아누웠는데, 자리가 비어있었다. 아까 그 소리가 맞았구나. 벌써 싸늘하게 식어있는 잠자리를 바라보던 뉴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용히 문을 걷고 나왔을 때 저 멀리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
새벽부터 말 등에 바리바리 짐을 싣고 있는 민호 뒤로 긴 그림자가 늘어졌다. 그리곤 한참 동안 바쁘게 움직이는 뒷모습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제 딴엔 새벽부터 어딘가 나가려는 민호를 눈치챘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뉴트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이런 민호에 익숙했다. 다들 이렇게 나서서 말려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저 고집에 어차피 안 들을 것을 뻔히 안다. 그래서 몇 번 만류하다 다들 포기해버렸다. 몇 년 동안 주기적으로 자리를 비우면 자연스럽게 오래된 녀석들이 빈 곳을 채우곤 했다.
사실 민호가 어디 가서 얻어맞거나 심하게 다쳐서 돌아온 위인도 아니었고, 마구 싸움을 걸며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할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다. 비록 지금 상처를 입은 상태지만, 그걸 드러낼 사람도 아니었다. 조용히 다녀오겠다. 우리 무리에겐 별일 없을 거다. 이런 말만 하면서 꼭 다녀와야 한다고 할 뿐 시원하게 한마디 알려주지 않는 두목을 보던 녀석들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고개만 끄덕였다. 두목이야 언제나 그랬다.
“싸우러 가는 건 아닌 것 같고.”
“…무슨 말이야.”
“이렇게 조용히 떠나는 이유가 대체 뭔지 알아야겠어.”
“…….”
하지만 뉴트는 좀 달랐다.
이곳에 와서 도적 무리랑 사는 것이 제법 익숙해졌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시시콜콜한 사연까지 모두 아는 것은 아니었다. 안 그래도 아직 사이가 서먹하긴 해도, 그렇게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같이 한이불 덮고 자던 민호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자 왈칵 호기심이 흘러나왔다. 물론 민호가 보호자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저 녀석 며칠 없다고 신상에 큰일이 나진 않을 것 같았지만, 또 모르는 일이니 확실하게 해두는 편이 좋을 것이다.
“민호.”
“…응?”
말 등에 담요 하나를 단단하게 묶은 녀석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니 낯설었다. 보통 무리의 대장이라는 사람이 새벽같이 움직인다면 큰일이 있는 것이 아닐까. 뉴트는 대충 풍문으로 들은 생활상을 다시 곱씹었다. 게다가 무슨 큰일이 났나 싶어 옷 위에 천 하나만 걸치고 허겁지겁 뛰어나왔는데 꼴이 참 우습게 되었다. 뭐 이런 꼴 안 보고 뒤돌아 서 있으니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쌀쌀한 바람이 불자 뉴트는 조금 추운지 어깨에 걸치고 있던 천을 좀 더 당겨서 온몸을 푹 감쌌다.
“어디 가는 거냐고 물었잖아.”
“할 일이 좀 있어.”
“할 일?”
“…응.”
“그러면 언제 올 건데?”
“…삼일쯤? 아냐. 나흘? 일주일…….”
“…….”
점점 기간이 길어졌다. 민호는 마른 입맛만 다시다 결국 휙 돌아서 뉴트를 바라보았다. 찬바람이 둘 사이를 가르며 지나갔다.
“달이 차기 전엔 돌아올 거야.”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해도 아직 안 뜬 이런 새벽에 아무도 모르게 떠나는 거야.”
“항상 하던 일.”
“…일?”
“아니…그러니까.”
민호는 잠시 말이 헛나온 듯 괜히 기침만 했다. 뉴트의 눈이 또 샐쭉하게 길어졌다. 안 그래도 까만 눈을 찌푸리니 길게 속눈썹 그림자가 졌다. 뭔가 숨기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뉴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오래 알고 지낸 사이는 아니지만 민호의 표정은 알기 쉬웠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민호는 계속 다른 방향을 보며 눈만 연신 감았다가 떴다.
“그러니까?”
“…친구를 만나러 가.”
“친구?”
이건 또 처음 듣는 소리였다.
이런 황량한 곳에 터를 잡은 도적 떼 두목한테 친구가 있다는 소리도 믿기 어려웠지만, 하필 친구를 이런 새벽부터 나가서 만난다니. 아무래도 이상했다. 차라리 경비대랑 뒷거래한다고 하는 쪽을 믿겠어. 뉴트는 이제 대놓고 팔짱을 낀 채 민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래. 친구.”
“아니 멀쩡하게 친구도 계신 양반이 여기서 왜 이렇게 살면서 도적질을 하고 계시나 몰라.”
“세상사가 다 뜻대로 되는 건 아니잖아.”
“…….”
“네가 생각하는 그런 친구 아니야. 나도 그 녀석한테 빚진 게 있고, 그 녀석도 나한테 도움받은 일이 있어서 가끔 찾아가는 거니까.”
“…….”
뉴트의 고개가 한쪽으로 살짝 꺾였다. 그렇게 중요한 친구라. 예상외의 대답이었고, 새로운 모습이었다. 어쩜 그런 일이 있으면서 이렇게 내색도 안 하고 사는지. 참 알기 쉬우면서도 어려운 사람이었다. 물론 따지고 보면 뉴트는 아직 외부인이고, 굴러들어온 돌이었다. 그래도 정 붙이며 잘 지내보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무리 사이에 끼기 힘들다는 사실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이렇게 선을 긋는 민호를 보면 더 그랬다.
“내가 알아선 안 되는 거야?”
“…응?”
“내가 알면 안 되는 이야기냐고.”
“아니…그러니까.”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나도 이제 여기서 같이 사는 사람인데 너무 속이지만 말아줘.”
“그게…….”
뉴트가 이렇게 채근하는 건 처음 봤다. 민호는 어디까지 말해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차라리 모든 것을 함께 결정할 수 있는 자리에 뉴트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마저 했다.
“친구가 보석 처분은 도와줘서…….”
“…….”
“그거 하러 가는 거야. 일찍 나가는 이유는 굳이 내가 없다는 사실을 알리기 싫어서고.”
“멀리 가는 거야?”
“조금.”
“알았어. 잘 다녀오고 무사히 돌아오도록 해.”
“…….”
뉴트가 먼저 말을 끊자 민호는 더 대화를 이어갈 수 없었다. 안 그래도 말주변이 없고, 한마디 하는 것도 진중한 사람이라 답답하단 소리를 들을 정도인데,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난 그럼 계속 천막을 써도 되는 거야?”
“물론…물론이지.”
“내가 바쁜 사람을 너무 잡았나. 다녀와. 난 들어갈게.”
반쯤 녹슨 달을 가리는 것 하나 없는 공간엔 부슬부슬 달빛이 내렸다. 뉴트는 바삭바삭 소리가 날 정도로 곱게 부서지는 달빛을 온몸에 맞으며 서 있었다. 화려한 천 사이로 보이는 옷자락이, 그 옷을 잡고 있는 손에서 이어진 얇은 손목까지 하얗게 빛났다. 뭐랄까. 어둠을 먹고 자라는 꽃 같다고 할까. 아니면 밤에만 피는 달맞이꽃 같다고 해야 할까. 짧은 식견으로 표현할 수 없는 모습에 민호는 순간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뉴트를 똑바로 바라보기 어려웠다.
“…왜 안가?”
“아…냐. 가야지. 다녀온다.”
“상처 터지지 않게 조심해.”
“거의 다 나았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더 크게 다치더라.”
“…….”
검은 말 위로 훌쩍 올라탄 민호는 괜히 또 헛기침했다. 가자. 옆구리를 걷어차며 말을 재촉했다. 그러다 문득 멈춰 섰다. 그리곤 한 번 더 돌아볼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넓은 어깨 바로 위를 넘겨보던 뉴트는 아주 조금 기대를 했다. 민호가 돌아보지 않을까. 한마디라도 더 해주고 떠나지 않을까.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실망한 뉴트 뒤로 긴 그림자가 늘어졌다. 물론 민호가 돌아보지 못한 것은 갑자기 달아오른 얼굴 때문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뉴트만 보면 심장이 뛰고, 술을 마신 것처럼 얼굴에 열이 올라왔다. 조금만 가까이 가면 이런 모습을 들킬까 싶어 다가가지 못했다. 애써 바쁜 척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삐를 다부지게 잡은 민호의 손등엔 바짝 힘줄이 서 있었다. 순식간에 근거지를 빠져나간 민호는 금방 눈에 보이지 않았다.
“야속한 녀석.”
들어주는 이 없는 밤하늘에 서늘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같이 잠 좀 자고, 밥을 먹는다고 이런 짧은 시간에 특별한 관계로 발전하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의 마음은 간사하게도, 작은 욕심을 냈다. 그리고 그 욕심이 점점 자랄수록 기분은 널을 뛰었다. 어제 품에 안겨 잠을 자면서 거부하지 않은 것도 그런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돌아오면 뭔가 바뀌어 있을까.”
뉴트의 눈매가 곱게 접혔다.
내일 아침도 할 일을 하기 위해 바삐 움직이려면 조금이라도 더 자야 했다. 민호가 떠난 것은 떠난 것이고, 뉴트가 할 일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다녀오면 알겠지. 뭐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을 품은 인영이 아무도 없는 천막으로 돌아갔다.
10월, 12월에 나온 톰늍 교류 앤솔로지에 실렸던 원고 중 홈페이지에 공개된 샘플 부분입니다.
해당 샘플은 1권과 2권 분량입니다
‘다 들리는데, 왜 저렇게 소곤거리는 거야.’
삼삼오오 모인 녀석들이 자기를 보며 수군수군 귓속말하는 것을 모두 듣고 있었다. 청각이 예민하다는 것은 딱히 좋지만은 않았다. 익숙하다면 익숙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좋진 않았다. 토마스 옆자리는 아직 비어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접근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차라리, 같은 수인이면 좋을 텐데.
토마스는 속으로 작게 툴툴거렸다. 어차피 인간이랑 짝 같은 거 해봤자, 잔뜩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아줘야 할 뿐이었다. 그건 정말 귀찮고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같은 종이 낫지. 몇 번이나 그렇게 속으로 되뇔 무렵, 옆에서 의자를 빼는 소리가 들렸다.
어쩔 수 없이 쫑긋 서는 귀를 막을 수 없었다. 바닥을 질질 끄는 소리가 들리더니 책상 위에 묵직한 가방이 툭 떨어졌다. 그리곤 의자에 주저앉는 소리까지 확실하게 들렸다. 가방 지퍼 여는 소리. 뭔가 뒤적거리는 소리. 핸드폰 줍는 소리. 온갖 정보가 토마스의 귀에 들려왔다.
토마스는 일어날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다.
열심히 자는 척을 하고 있었는데, 막상 옆에 짝이 왔다고 벌떡 일어나는 것도 조금 이상했다.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모른 척하고 있으면 그나마 친해질 기회를 발로 걷어차는 일이고. 토마스의 머릿속은 내내 복잡했다.
“…….”
결국, 토마스가 막 일어난 척 어색하게 하품을 하며 책상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까만 시선이 토마스의 눈에 닿았다. 위에 이어폰을 꽃은 채 아무 말 하지 않고, 조용히 자신을 보고 있는 모습을 본 토마스는 어쩐지 숨이 턱 막혔다. 살짝 다문 입술은 달싹이지조차 않았다. 여전히 손가락은 핸드폰 위에 올라가 있는데 시선만 슬쩍 올려서 토마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교실 안으로 불어온 바람에 부스스한 금발이 살짝 흔들렸다.
“뭐?”
입술만 움직여 소리 없이 물었다.
“응?”
이미 바짝 긴장한 토마스는 귀가 사정없이 바짝 서 있었다. 당황해서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약간 멍청한 목소리로 말한 거 같았다. 하지만 이어폰을 꽂고 있으니 들리지 않았겠지. 애써 위로했다. 시간은 멈춘 것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말을 할 듯 말듯 애매한 모습에 어쩐지 조바심이 일었다. 눈 깜박임이 점점 빨라지고 나서야 녀석이 귀에서 이어폰을 뺐다.
“무슨 일이야?”
“아니. 네가…그러니까.”
“별 싱거운 녀석을 다 보겠네.”
사실 노래도 듣고 있지 않았나 보다. 어쩐지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토마스는 제 마음과 상관없이 쫑긋거리는 귀를 당장 뽑아버리고 싶었다. 끙끙거리는 신음이 목 안에서 맴돌았다. 뭐라고 말을 붙여야 할까. 토마스의 그런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녀석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난 뉴트.”
“응?”
“뉴트라니까. 어차피 짝인데 통성명하고 지내는 쪽이 낫지 않아?”
“…….”
“아니면 말고.”
“아, 난…토마스야.”
“그래.”
뉴트는 그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은 수인에 관한 호기심이 가득했다. 아니면 귀 한번 만져 봐도 되냐며 지겹게 달라붙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막상 무신경하다고 느낄 만큼 대수롭지 않게 대하는 사람을 만나자 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당황해서 눈을 떼지 못하는 녀석의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던 뉴트는 이상한 사람 보는 표정으로 머리를 슥 쓸어 넘겼다.
“왜 그렇게 쳐다봐.”
“아니 뭐 더 할 말 없어?”
“내가 뭘?”
“그러니까 보통 수인들 보면…….”
“그런 걸 물어봐서 뭘 해. 어차피 별로 다르지도 않은데.”
“…….”
토마스의 표정이 더 알 수 없게 변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뉴트는 혼자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토마스는 홀린 듯 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저기. 또 목에서 쩍쩍 갈라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뉴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잠깐만.”
어물어물 목 안으로 넘어가는 목소리는 그대로 훅 흩어져 버렸다. 뉴트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알아채자마자 토마스는 재빨리 교실을 뛰어나갔다. 그저 조금 특이한 하루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할 수 없었다.
서로 눈을 마주치고, 입을 마주 댄 채 내내 웃었다. 낮게 깔리는 목소리가 부스러져 발밑에 가득 쌓였다. 그리곤 다시 입술을 탐한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내내 활짝 웃는 둘은 꼭 밤에 피어난 꽃과 달 같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보통 사람보다 따뜻한 체온이 품안 가득 안겨올 때마다 뉴트는 그대로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그저 입 좀 맞추고, 등 좀 쓸어주면서 안아줬을 뿐인데. 허리엔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고, 다리는 금방이라도 꺾일 것 같았다.
‘내가 왜 이러지.’
물론 근본적인 의문은 단 한 번도 해소된 적 없지만, 적어도 싫진 않았다. 아쉽게 떨어진 입술 사이로 약간 들뜬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나서야 둘은 천천히 교실을 나섰다. 교실에 둘만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데면데면하게 수업을 받던 둘은 간데없었다.
“……”
“…….”
꼭 이렇게 정신이 돌아오면, 서로를 쳐다보기도 힘들만큼 민망했다. 아까 우리가 뭘 했더라. 같은 생각을 하는 녀석들은 내내 다른 방향을 보면서 복도를 걸었다. 아직 입술 끝에 남아있는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오히려 모른 척 하면 할수록 다시 불꽃이 살아올라왔다.
손을 잡아볼까. 아니면 셔츠 끝을 당겨볼까. 오만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철철 흘러내렸다. 흠. 흠흠. 괜한 헛기침이 엇박자로 흘러나왔다. 옆에서 자꾸 부스럭 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둘은 또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걸 알고 있어도, 얼굴이 활활 타는 것 같아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당장 잡아먹을 듯 입술을 탐하던 녀석은 어디로 갔는지. 꼬리마저 빨갛게 번해버릴 것 같은 녀석은 내내 길고 마른 손을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매끈한 손끝으로 뉴트의 손바닥을 살살 긁어댔다. 이럴 때마다 묘하게 몸 안에서 불꽃이 일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기분이 들대마다 뉴트는 걸음을 멈춰서서 가늘게 한숨을 쉬었다.
‘뭐, 그래도 이런 거 나쁘지 않지.’
뉴트는 지나치게 태평했다. 너무 태평했다.
[중략]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녀석에게 첫 단어를 가르치는 것처럼 천천히 설명을 하려고 했다. 하려고는 했다. 물론 그만큼 인내심이 없는 녀석들이 제대로 설명을 할 린 없었다. 결국 토마스의 멱살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친 녀석들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손으로 연신 부채질을 했다.
“그…그러니까.”
“그래 이 멍청아!”
“…….”
“넌 어떤 삶을 살아왔으면 크리스마스가 학교 쉬고 연구실 가는 날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
또 말이 없어졌다. 연신 귀를 쫑긋거리는 녀석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눈 깜박임이 점점 빨라지더니 결국 벌떡 일어났다. 드디어 결심이 선 모양이라며 다들 어깨를 두드려 주더니, 어서 가보라며 밀어냈다. 주춤주춤 일어난 녀석은 어정쩡한 포즈로 한걸음 물러섰다.
“어서 가봐.”
“…….”
“크리스마스는 사귀는 사람들끼린 둘도 없이 좋은 날이라잖아.”
“…….”
토마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친구를 바라봤다. 대놓고 얼굴을 구기기 시작한 녀석들은 혀를 내빼더니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시늉을 했다. 하여튼 좋은 말을 해줘도 저런 반응이었다.
“너, 기껏 충고 해줬더니 그런 눈으로 보지마라. 우리도 뭐 이런 말 해주는 거 좋아서 그러는 줄 아냐?”
“…….”
“하도 너희 둘이 답답해서 그러는 거니까.”
“…….”
뭐라 뭐라 냅다 쏴붙인 녀석들은 토마스를 복도로 와락 밀어내고 문을 쾅 닫아버렸다. 가서 둘이 해결해 새끼야! 도와주려면 끝까지 도와줄 것이지, 어린 녀석들은 인내심이 부족했다. 볼멘소리가 툭툭 떨어지던 복도는 뚜벅 뚜벅 발소리가 멀어지는가 싶더니 조용해졌다.
“그래서 둘이 잘 되어간대?”
“망했어. 아주.”
“뭐? 그렇게 이야기를 했는데도? 못 알아들어?”
“둘이 똑같이 멍청이가 아닌 이상 도통 이해가 안 되는 일이지. 하여튼 뭐 그리 고상하게 연애를 한다고 저 난리냐.”
“…….”
토마스한테 좋은 시간 보내라고 막 간지러운 것도 참고 말을 해줬었다. 그런데 그렇게 옆구리 찔러주기 전보다 냉랭해진 둘을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누가 들을까봐 소곤거리던 녀석들은 영 짜증이 나는지 발을 쾅쾅 굴렀다. 저 녀석들은 멍청이들이야! 아주! 대차게 성을 내는 녀석은 뒤통수를 감싸 쥐면서 억울한 비명만 질러냈다.
뉴트는 엄청난 속도로 도적 무리에 섞여 들어갔다. 물론 어색해 하고 낯을 가리는 놈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괜히 한 발짝 물러서는 놈. 여전히 남 보듯 으르렁거리는 놈. 괜히 민호한테 화살을 돌리는 놈. 제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뉴트는 이런 상황을 모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같이 낯설어 할 수 없었다.
“뉴트 어디가?”
“…양들 좀 풀어두고 와야지.”
“바쁘네.”
“다른 사람만 하려고. 어차피 내 몫인데 열심히 해야지.”
“…….”
“다녀올게.”
사실 뉴트는 놀고먹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마음이 불편하다고 해야 하나. 할 일이 없으면 굳이 찾아서 하는 타입인지라, 편하게 쉬라고 하는 말을 유난히 부담스러워 했다. 바쁘게 몸을 움직이면 머리가 맑아진다는 소리를 하는 뉴트는 혼자 바빴다. 물론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영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뭐, 하지만 알아서 일을 찾아서 한다니 말릴 생각은 없었다. 이곳에선 할 만큼 일을 해야 밥을 먹을 수 있다.
“뉴트. 나도 갈래!”
“…같이 갈까?”
“그래!”
민호가 자리를 비우면 뉴트는 냉큼 옷을 벗었다. 서역 물건은 사서 돌아가던 상인에게서 빼앗아 왔다는 옷을 입었다. 옷 품이 너무 커서 마치 남의 옷을 뒤집어쓴 것 같았지만, 뭘 입어도 원래 입고 있던 옷보단 편했다. 너무 이질적인가 싶었지만, 이것도 감지덕지했다.
“옷 갈아입었네?”
“너무 불편해서.”
“으음.”
척은 동그란 뺨을 한껏 부풀리며 웃었다. 뉴트는 재빨리 말에 올라탔다. 눈치를 보던 척이 우리를 열면 양들이 와르르 달려 나왔다. 천천히 양을 몰면서 밖으로 걸어가는 뉴트 뒤로 허겁지겁 말을 달리는 녀석이 눈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풀이 가까운 곳에 있어 다행이었다. 뉴트와 척이 고민이 늘어진 것을 바라보던 벤이 지나가는 말투로 알려줬다. 북쪽으로 가봐. 역시 밖으로 다니는 사람이 많이 알았다.
게다가 도적 떼들이 있는 곳이라 유목민들의 손이 타지 않은 작은 풀밭은 몇 마리 되지 않는 양을 키우기 충분했다. 워어. 워. 뉴트가 채찍을 가볍게 휘두르며 양 떼를 몰았다. 그렇게 양들을 풀어놓고 나서야 말에서 내린 뉴트는 허리를 쭉 펴면서 앓는 소리를 했다.
“아우, 허리야.”
“뉴트. 도시락은 여기다 걸어둘까?”
“그래. 사실 조금 있다 돌아가야 하지만.”
둘은 반쯤 나뭇잎이 떨어진 나무 아래 자리를 깔았다. 어차피 저기 풀어둔 작은 짐승들이 배를 채우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다행히 양의 마릿수가 많지 않아 하루에 몇 번씩 왕복하지 않아도 됐다. 조금 더 커야 뭔가 할 수 있을 텐데. 뉴트는 내내 그 걱정이었다. 이 풀밭을 다 먹어치우면 어디로 가야 할까. 얼마나 더 먹일 수 있을까. 오만가지 생각을 하는 뉴트의 입에 불쑥 빵이 밀려들어 왔다.
“…읍.”
“뉴트는 항상 그렇게 인상을 쓰고 있더라.”
“그야…….”
“지금은 쉬는 시간이잖아. 어차피 돌아가면 쉬지도 못하고 바로 저녁준비 하는 걸 도와야 할 텐데,”
“그렇긴 하지.”
“뉴트는 생각이 너무 많은 것 같아.”
그런가. 뉴트는 웃으며 빵을 베어 물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지면 주변에 흩어져있는 양을 한군데로 몰아왔다. 천천히 돌아오면 꼭 저녁을 준비할 시간이었다. 척한테 양을 우리로 몰아두라고 부탁한 뉴트는 두 마리 말의 고삐를 잡았다. 마구간에 가서 고삐를 단단히 묶어두고 물과 건초를 구유에 가득 채웠다. 오늘도 수고했다고 허리를 한번 두드려 준 다음 저녁을 준비하는 곳에 가서 어정거렸다. 민호가 이것저것 많이 사오는 사람에 며칠째 식탁이 풍요로웠다. 저녁을 먹고, 그릇을 치우면 또 할 일이 없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가고 달이 뜨면, 내일이 찾아온다. 익숙해진 생활은 아주 가끔 지루함을 안겨주었다.
“민호는 언제쯤 돌아오려나.”
괜히 혼잣말하며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괜찮은 정보를 가져왔다며 벤이 며칠 동안 민호와 저쪽 건물에 박혀있더니 곧 사람을 모았다. 있을 때 벌어야지. 금방 돌아올게. 민호는 마치 옆집에 놀러 가는 것처럼 가볍게 말했다. 물론 차림은 무시무시했다. 다들 며칠 먹을 식량을 챙기고 날카로운 칼을 하나둘 허리에 찼다. 달이 차면 돌아온다는 말을 남긴 도적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우르르 본거지를 비웠다.
남은 사람은 몇 없었다. 아직 일을 나가기 어린 녀석. 후방에서 살림을 담당하는 무리, 그리고 최소한의 경비병. 그뿐이었다. 어쩐지 휑하게 비어버린 본거지가 너무 넓어 보였다.
“이렇게 보니 굉장히 넓네.”
뉴트의 입에서 가늘게 하얀 숨이 흘러나왔다. 날은 점점 추워졌다. 해가 떠 있을 동안을 괜찮았지만, 밤은 유독 그랬다. 아무리 걱정을 해도 당장 민호가 어디쯤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루빨리 달이 차기만 기다리던 뉴트는 새벽이 반쯤 지나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
“뭐? 오늘은 양을 데리고 나가지 않겠다고?”
아침부터 프라이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안 그래도 민호가 돌아올 날짜가 가까워졌는데, 거기에 더해서 뉴트도 고집을 피우기 시작했다. 보통 뭔가 하겠다는 말을 잘 하지 않는 녀석이 단호하게 말하니 프라이는 어쩐지 머리가 아팠다.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아? 뉴트?”
“응. 그래.”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어차피 건초가 남아있으니 별로 상관은 없지만.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괜찮아?”
프라이의 눈엔 그 앞엔 활을 어깨에 메고 활 통을 단단히 묶고 있던 뉴트가 보였다. 프라이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갑자기 왜?”
“사냥을 좀 나가볼까 싶어서.”
“…사냥?”
“저번에 양을 몰고 오다가 동물이 있을 만한 곳을 봤어. 아마 토끼가 있을지도 모르고.”
“뭐, 그거야. 그렇다 치고.”
“저녁 먹기 전엔 돌아올게.”
“민호가 돌아왔을 때 네가 없으면 난리 날 것 같은데.”
“혹시 그러면 어디 도망간 것 아니라고 전해줘.”
재빨리 말 위에 올라탄 뉴트가 갈 길을 재촉했다. 마른 먼지만 남기고 달려가는 녀석을 보던 프라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 안 봤는데, 점점 고집이 민호를 닮아간다. 말린다고 말려진 사람들이 아니지. 그 모습을 지켜보던 놈의 허리를 퍽퍽 치면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뉴트는 빠르게 말을 달리고 있었다. 사실 사냥할만한 짐승이 있을 진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숨을 곳이 많은 바위산에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곳인지라 그럴 확률이 높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야생동물들은 눈치가 빠르다. 어느 정도 산에 다다를 무렵 뉴트는 고삐를 바짝 잡은 채 천천히 움직였다. 너무 빠르게 울리면 땅이 울리고, 그 진동을 알아챈 야생동물들이 재빨리 몸을 숨긴다. 사실 걸어서 찾는 쪽이 가장 좋았지만, 그렇게 넉넉한 시간이 없었다.
“있을 줄 알았는데, 역시 없는 건가.”
바람에 흔들리는 풀과 나뭇가지 외에 다른 움직임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곳을 바라보던 뉴트는 짧게 혀를 찼다. 여우는 고사하고 토끼도 보이지 않았다. 꿩이야 프라이가 이쪽에선 보기 힘들다고 하니 바라지도 않았다. 사냥 다녀온다고 큰소리를 치고 나왔는데 빈손으로 돌아갈 판국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초조해졌다.
“…저기.”
뉴트가 눈을 찌푸렸다. 그래도 제대로 보이지 않아 손을 바짝 눈썹에 가져다 댔다. 으음. 바람에 움직이는 건지, 아니면 뭔가 숨어있는 건지. 애매한 움직임이 보이는 한 곳을 바라보던 뉴트가 조심스럽게 고삐를 당겼다. 일단 쫓아가 보는 편이 나으리라 판단했다.
“누르…조심히. 살살.”
말을 알아들었는지 천천히 움직였다. 조심스럽게. 최대한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만큼 다가간 뉴트가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분명 저 풀숲에 뭔가 숨어있었다. 그때 크게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림자가 슥 움직였다. 뉴트가 조용히 말에서 내렸다. 눈에 띄지 않게 허리를 숙이고 천천히 풀이 없는 곳을 골라 밟았다.
“…….”
저 멀리 희미하게 사냥감이 보였다. 이 정도면 됐다. 시위에 걸었던 화살을 콱 잡았다. 그리고 숨을 멈추고 팔을 곧게 편 다음 조준을 하기 위해 한쪽 눈을 감았다. 한번 실패하면 이 곳에서 사냥하긴 그른 것과 마찬가지라 신중해야 했다. 날카로운 화살촉이 작은 동물을 향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푹 박히는 소리가 거의 동시에 들렸다.
“…그래도 아직 감이 죽진 않았나 봐.”
뉴트는 이제야 긴장을 풀었다. 활을 어깨에 걸고 저 멀리 화살이 날아간 곳으로 걸어갔다. 화살을 맞고 그대로 숨이 끊어진 토끼의 귀를 덥석 잡았다. 몸에 단단히 박혀있는 화살을 쑥 뽑았다. 일단 한 마리는 잡았으니 체면치레는 한 셈이었다. 몇 마리 더 잡으면 좋고. 아니면 할 수 없고. 짐에서 밧줄을 꺼내 토끼를 묶었다.
모른 척 풀을 뜯기 시작하는 누르를 저 멀리 놔둔 채 뉴트는 사냥에 한껏 집중하고 있었다. 아직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없는지, 조금 있다가 제법 큰 토끼 한 마리를 더 잡았다. 한 번에 너무 많이 잡는 것은 좋지 않은데, 두 마리 가지고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한 마리 정도만 더 잡을 수 있으면 국이나 고기 스튜 정도는 끓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 잡은 크기론 다소 부족했다.
“…한 마리 더 잡을 수 있으려나.”
뉴트가 발돋움을 해가며 이리저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옷이 펄럭거렸다. 바짝 마른 풀색이 물든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면서 춤을 줬다. 살짝 눈을 감고 숨을 들이쉬면 겨울이 느껴졌다. 어쩐지 가슴이 툭 터지는 것 같았다.
“…응?”
분명 토끼가 움직이는 것보다 묵직한 발소리였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귀를 쫑긋 세우던 뉴트가 조심스럽게 발을 움직였다. 허리까지 자란 풀이 가득한 쪽은 아니었다. 소리만 들릴 뿐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뉴트가 조심스럽게 바위를 딛고 올라섰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폈다. 부스럭. 사박. 사박. 어딘가에서 뉴트를 보고 있는 것이 확실한데,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쌍방 싸움이었다.
“어디지.”
순간 느낌이 좋지 않았다.
“설마 늑대 종류는 아니겠지. 이런 곳에 살 것 같진 않지만.”
화살을 하나 더 꺼내서 시위에 걸었다. 여우가 아닐까 싶었지만, 혹시라도 늑대 같은 대형 종이라면 말이 좀 달라진다. 그런 건 혼자 잡기에 무리가 있었다. 긴장되니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저 멀리 서 있던 풀이 갑자기 푹 꺾였다.
“저기구나.”
뉴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화살을 조준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계속 같은 곳을 바라보며 집중하고 있으려니 눈이 아팠다. 그 순간이었다. 그 순간 풀숲이 크게 흔들리는 것 같더니, 시커먼 물체가 펄쩍 뛰어올랐다.
***
그 시간 민호는 뉴트를 데려왔을 때처럼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익숙하게 두 패로 나뉘었다. 그리곤 빠르게 달려가 상단의 머리와 꼬리를 동시에 쳤다. 호위병들을 먼저 말에서 떨어뜨린 다음, 기동력을 빼앗기 위해 말의 엉덩이를 때려서 저 멀리 내쫓았다.
“도적 떼다!”
“도적이 나타났다!”
쉴 새 없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민호는 눈 하나 깜작하지 않았다. 늘 하던 일인 데다 실패하지 않을 거란 자신감도 충분히 있었다. 다른 도적과 다른 점이라면 사람 목숨을 빼앗지 않는다는 정도일까. 물론 물건은 쓸모없거나 처치하기 곤란한 것을 제외하고 모두 한곳에 모았다. 주춤주춤 모인 상인들은 힘이 없었다. 호위병들은 벤이 담당해서 한쪽에 꿇어 앉혔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려고 하나하나 줄로 단단히 손을 묶었다. 기다란 줄 하나로 손이 묶인 경비병들은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여긴 다 됐습니다. 두목.”
벤이 손을 털면서 씩 웃었다. 제법 강한 저항이 있었는지 자잘한 상처가 얼굴에 길게 났다. 그나마 크게 찔리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물론 당사자는 그다지 상처를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 잘했다.”
“이쪽 마차엔 별거 없는데요. 두목.”
“무거운 거 쓸모없는 거 빼고 골라내.”
민호가 바쁘게 이리저리 지시했다. 상인들은 한자리에 모아두고 양옆으로 도적들이 둘러쌌다. 민호는 그 앞에 서서 모든 도적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 순간 이유 없이 등에 소름이 쭉 돋았다.
“…응?”
“두목! 피해!”
“…….”
벤이 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민호의 반응이 이상할 정도로 느렸다. 고개를 상인들이 꿇어앉아 있는 쪽으로 돌렸을 땐 이미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 칼을 들고 달려드는 중이었다.
‘아차.’
좋은 옷을 입고 있어서 별로 위협이 될 것 같지 않다고 넘겨짚은 것이 화근이었을까. 그 속에 경호원이 섞여 있으리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니 무술을 아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민호가 급하게 팔로 칼을 막으려 했다. 적어도 심장이 가까운 곳을 다치는 것보단 팔이 나았다. 푹. 뭔가 뭉툭하게 썰리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대장!”
“민호!”
한순간에 난리가 났다. 어쩐지 쉽게 일이 풀린다 했어. 다들 그런 비슷한 생각을 했다. 너무 쉽게 풀린다 했더니, 이런 일이 생긴다. 민호는 다행히 순간적으로 몸을 비튼 덕분에 급소를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날카로운 칼은 그대로 치고 들어오며 민호의 팔뚝을 세게 긋고 지나갔다. 본능적으로 팔을 감싸 잡은 민호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제법 깊게 베었는지 반대쪽 손등을 타고 붉은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방울방울 맺혀있던 것이 뚝뚝 떨어지면 바짝 마른 바닥에 피를 머금은 먼지가 피어올랐다.
“…으.”
“대장 괜찮아요?”
“괜찮아 보이냐?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큰일 나는 줄 알았네.”
“이미 큰일 난 거 같은데, 두목.”
“…….”
달려든 녀석을 땅바닥에 쓰러뜨린 녀석이 움직이지 못하게 단단히 눌렀다. 혀를 쯧쯧 차면서 팔을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좀처럼 긴장을 놓지 못했다. 어디서 또 저런 녀석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이 마지막 반항이라도 되었는지, 다들 눈치 보기 바빴다. 민호는 둘둘 말려있는 천을 쭉 찢어서 팔에 감기 시작했다. 얼마나 깊게 찔렸는지, 금방 새빨갛게 물든 천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몇 번이나 붕대를 덧 감고 나서야 겨우 피가 흘러내리지 않았다. 근육이라도 다쳤으면 어떡해요. 대장. 걱정을 한가득 안은 녀석들이 슬슬 주위에 몰려들었다.
“괜찮아. 팔이 움직이니까.”
“…아니. 움직인다고 괜찮은 게 아니잖아요.”
“됐다. 치료는 가서 하기로 하고. 일단 물건만 챙기고 떠나기로 하지.”
“하지만.”
“괜찮아.”
잔뜩 인상을 쓴 채 말해봤자 아무도 믿지 않았다. 아무리 대장의 말이라지만 그렇구나 하고 동의할 녀석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제일 잘 아는 민호는 일부러 더 멀쩡한 척 굴었다. 여기서 아픈 척을 해봤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벤은 동료를 다그쳐서 뺏은 재물을 싣기 시작했다. 무거운 걸 끌고 가봤자 경비병에게 잡히기만 할 뿐이었다. 무게에 비해 가격이 나가지 않는 물품이 여기저기 땅바닥에 쏟아졌다.
“다 챙겼어.”
“그래. 다들 출발하라 해.”
“…나랑 같이하지.”
“괜찮아.”
“안 괜찮아.”
“…….”
“내가 그 말을 믿겠냐. 같이 해.”
하여튼 속일 수가 없네. 민호는 씩 웃고 말았다. 재물과 돈에 관심이 있을 뿐이지 사람 목숨을 뺏는데 취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몇몇 과격한 녀석들은 본거지를 치러올지 모르니 싹 다 죽여야 한다고 몇 번이나 입을 모았지만, 민호는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물론 그런 민호의 생각 때문에 어려움이 전혀 없는 것은 또 아니었다.
하지만 몇 번이나 그런 어려움을 이겨나간 민호에게 반항을 하며 대들 수 있는 녀석은 많지 않았다. 속으로 불만이 있던, 대장을 끌어내리고 싶던 현재 무리를 이끄는 사람은 민호였고, 그의 말에 따라야 했다. 아무리 오냐오냐하면서 봐주고 있어도, 반기를 들면 끝이었다. 그런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닌 벤은 걱정만 켜켜이 쌓았다.
“…너 계속 이렇게 사람들 보내주다가 한번 크게 당한다.”
“그 소리 몇 년 전부터 들었는걸.”
“바깥 말고, 안에서 말이야.”
“…….”
“너라고 모르는 건 아니겠지만.”
“하지만 굳이 사람 목숨을 뺏고 싶진 않아. 예전엔 그랬을지 몰라도…적어도 난 그렇게 하는 건 싫어.”
“난 그래서 네가 대장 자리에 있는 게 좋아. 민호.”
“갑자기 무슨 소리야.”
갑자기 왜 이러는지. 민호는 헛소리하지 말라 하면서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말을 준비하고, 상인들을 묶어놨던 줄을 끊었다. 그리고 작은 칼을 툭 차서 건넸다.
“우릴 쫓아오는 건 자유지만, 말도 없는 상태에서 괜한 호승심은 안 부리는 쪽이 낫다. 저 사람들은 다 구한 다음 무사히 돌아가려면 지금부터 걸어도 모자랄 테니까.”
“왜 살려주는 거지?”
“그래. 맞아. 난 돌아가면 당장 너희에게 복수할 것이야!”
“그것도 상관없다. 하지만 난 필요한 것만 빼앗을 뿐이지 목숨을 가지고 협박하는 걸 좋아하지 않거든.”
“…….”
“뭐, 그건 그쪽이 알아서 하고. 난 분명 경고했다.”
“…….”
“난 너희를 해치고 싶지 않지만, 내 부하들은 또 모르지.”
민호가 말에 훌쩍 올라앉았다. 벤은 그런 민호와 상인들 사이에 슥 껴들었다. 위협이라도 하는 것처럼 칼을 든 채 그대로 서 있는 벤은 몇 번이나 민호가 부르고 나서야 움직였다. 순식간에 말을 달려 시야에서 멀어지는 놈들은 잡기엔 역부족이었다. 몇 번이나 욕을 하고 침을 뱉던 상인은 주변의 아우성에 짜증을 내며 칼을 집어 들었다.
“…민호!”
“두목!”
“무사했네요?”
“뭐 얼마다 위험한 일이라고. 돌아가자.”
“아까 오다가 도망간 말이 한 번에 모여 있기에 끌고 왔습니다. 꽤 좋은 품종이던데.”
“잘했다.”
지혈하려고 너무 꽉 조여 맨 탓인지. 아니면 생각보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건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고삐를 잡고 있는 것도 힘든지 결국 한 손으로 말을 몰았다. 팔에서 시작된 고통은 어깨를 타고 올라가 머리를 괴롭혔다. 한쪽 팔을 축 늘어뜨리고 있던 민호는 한숨을 쉬며, 가끔 뒤를 돌아봤다. 뭘 보는 거야. 벤은 그런 민호를 따라 저 멀리 지평선을 보았지만, 벤의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괜찮아?”
“뭐가?”
“정신이 없어 보여서.”
“괜찮아. 이제 들어가서 치료하고 좀 쉬면 괜찮겠지.”
“몸 좀 소중히 여겨라. 돌아가면 애들이 또 놀라겠네.”
“…아.”
“하여튼.”
갑자기 주변 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멍하니 앞만 보고 있던 민호는 옆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공기가 얼어버린 것처럼 느리게 팔뚝을 타고 오르는 고통만 느껴질 뿐 다른 것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귀에서 웅웅 소리가 울렸다. 민호? 민호? 옆에서 등을 두드리며 누군가 연거푸 민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한 박자 늦게 반응하는 몸은 점점 무거워지기만 했다.
***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가서 약이랑 붕대 좀 찾아봐.”
“민호? 정신 차려봐. 민호.”
“…머리 울린다. 그만해라.”
“다 죽어가는 얼굴로 멀쩡한 척하기는.”
반쯤 강제로 끌어내려 진 민호는 앓는 소리를 하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붕대로 쓴 천은 이미 무슨 색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피가 말라붙었다. 저기 앉혀라. 뜨거운 물을 가져와라. 아주 난리가 났다. 벤은 민호를 대신해 약탈한 물건을 이리저리 옮기라고 지시했다.
“…세상에. 이게 뭐야.”
“상인들 사이에 옷을 바꿔입은 놈이 숨어있던 건지. 아니면 정말 무술을 할 수 있는 놈이었던 건지는 몰라. 하지만 조금만 빗겨 그었으면 진짜 큰일 날 뻔 했어.”
“지금도 충분히 큰일 난 거 같아.”
척이 허겁지겁 약과 붕대를 들고 달려왔다. 프라이가 둘둘 말고 있던 붕대를 벗겨내자 흉물스럽게 벌어진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으으. 주변에서 서로 앓았다. 붕대를 벗겨내자 또 피가 왈칵 쏟아졌다. 약이랄 것도 없지만, 그래도 안 바르는 것보단 나았다.
“좀 참아봐.”
“…뭘. 으아아악!”
“참아봐.”
피와 먼지가 덕지덕지 묻어있는 팔에 물을 붓자 민호가 펄쩍 뛰었다. 하지만 팔을 단단히 잡고 있는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으윽. 꽉 다문 입술 사이로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천천히 팔을 씻어내고 약을 발랐다. 워낙 깊게 상처가 나서 아무는 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붕대로 꼼꼼하게 묶고 나서야 민호는 긴 한숨을 쉬었다.
“흉터 남겠다.”
“뭐 한두 번인가.”
“그래도 팔이라 다행이네. 처음 봤을 땐 어디 허리라도 찔렸나 했다.”
“그러면 아마 말을 타고 온 게 아니라 끌려 왔겠지.”
“말을 해도 꼭 저렇게 하지.”
괜히 등을 한대 더 얻어맞은 민호는 끙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일 보고 싶은 녀석이 있는데,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리저리 둘러보던 시선이 프라이에게 닿았다.
“…뉴트는?”
“아.”
“…어디 갔어?”
“그게. 아까 사냥하러 나간다고 했는데, 아직도 안 돌아왔네.”
“사냥?”
“갑갑한 모양이더라고. 금방 오겠거니 했지.”
“…….”
“이렇게까지 오래 걸릴 일인가.”
이 한마디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불안해서 견딜 수 없었다. 이미 해는 기울어져서 밤하늘에 먹히고 있었고, 찬 공기가 울컥 밀려왔다. 이렇게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이 아니라면, 방향을 분간할 등불도 없었다. 저 멀리서 늑대가 우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헛소리라고 생각은 하지만 마음은 더 불안해졌다. 불빛이 없는 곳에서 사람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는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생겼나 봐.”
“…그럴 리가.”
“하지만 금방 돌아온다고 한 걸.”
“…….”
민호가 다친 것도 걱정스러운데, 뉴트도 사라졌다. 수군거림이 점점 걱정되어 터져 나왔다. 이 상황에도 시간은 착실히 흘러가고 있었다. 아까보다 한 뼘은 길어진 그림자가 밤이 오고 있음을 알렸다. 민호는 결국 기다리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걸어나갔다.
“어디 가려고.”
“일단 찾아봐야 할 거 아냐.”
“…지금 가도 서로 엇갈릴 뿐이야.”
“그렇다고 이렇게 손 놓고 기다리자고?”
“너도 다쳤어. 민호. 정신 차려.”
달려나가려는 민호와 그걸 저지하는 동료 사이에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저렇게 다친 주제에 또 어디를 나간다고 하는지. 아무리 밤 지리에 밝은 사람이라 해도 사고를 안 당하는 것도 아니었다. 겨우겨우 민호를 붙잡아 앉힌 프라이는 부엌과 민호를 서로 바라보다 벤을 불렀다. 저 녀석 단단히 잡고 있으란 소리를 몇 번이나 하고 나서야 자리를 떴다.
그런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민호는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있었다. 옆을 지키고 선 벤은 안타깝다고 말을 하지만, 절대 비켜줄 생각이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한 마음은 점점 강해지는데, 뉴트는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벤.”
“안돼.”
“…….”
“난 밤에 다친 사람 절대 밖으로 못 보내.”
“…….”
점점 초조해지는지 민호는 계속 빙글빙글 제자리걸음을 걸었다. 멋대로 달려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발 뻗고 누워서 기다리긴 더 힘들었다. 돌아오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돌아올 생각이 없는 건지. 가장 안 좋은 방향으로 생각이 줄줄 흘러나갈 무렵. 저 멀리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한 번에 밀려왔다.
“이게 무슨 피야?”
“뉴트? 다쳤어?”
“아니, 오늘 무슨 날이야?”
민호는 저 멀리서 들리는 뉴트 목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그 와중에 상처가 다시 벌어졌는지 절로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으으. 민호가 제대로 힘도 들어가지 않는 팔을 잠시 바라보더니,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척과 다른 녀석들이 둥글게 모여있는 곳에 가까이 갈수록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점점 커지지만 했다.
“다친 거 아냐? 응?”
“다친 거 아냐.”
“하지만 이렇게 피가…….”
“괜찮다니까.”
그 순간 둥그렇게 모여있던 녀석들이 하나둘 옆으로 물러났다. 뉴트가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들었을 때, 시선 한가득 익숙한 얼굴이 들이닥쳤다. 그리고 뭐가 한마디 말할 새도 없이 옷을 덥썩 잡혔다.
“왜? 왜 그러는 거야.”
“…이 피는 다 뭐야.”
“그러니까…….”
“어디 다친 거야?”
“그건 대장이 할 말이 아니지 않아요?”
옆에 서 있던 누군가 한마디 툭 말을 던졌다. 그제야 뉴트는 민호의 팔 한쪽이 축 늘어져 있는 걸 발견했다.
“이건 또 뭐야.”
“…다쳤어.”
“그런 주제에 누가 누굴 걱정해. 이건 내 피가 아니야.”
“…뭐?”
그게. 뉴트가 말 위에 얹어뒀던 동물을 질질 끌어내렸다. 그걸 보던 애들의 눈이 등잔만 해졌다. 토끼 세 마리. 그리고 여우가 하나. 꽤 묵직한지 두 손 가득 차게 사냥감을 끌어안은 뉴트는 눈짓으로 여우를 쿡쿡 찔러댔다.
“아무래도 큰놈이라서 바로 죽지 않더라고.”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 확실하게 처리하면서 피가 좀 튄 건데, 왜 그렇게 놀라.”
“…….”
“그쪽이 더 위험한 상황 같은데. 아니야?”
“…그거야.”
민호는 헛기침과 함께 말끝을 흐렸다.
“나 기다렸어?”
“…….”
또 분위기가 간질간질 해졌다. 두목 안 아프시다 하신다. 이제 다 나으셨단다. 한마디씩 보태는 녀석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와르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흠. 흠. 헛기침과 숨소리만 들리는 곳에서 뉴트가 먼저 뭔가를 불쑥 눈앞에 들이밀었다.
“이건 토끼고…저건 여우야.”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 토끼는 프라이한테 가져다 줘서 탕을 끓이든지 스튜를 하든지. 세 마리 잡았는데 아마 구워 먹을 정도는 아닐 거야.”
“…….”
“그리고 여우는…….”
“여우는?”
“됐다. 모습을 보아하니 아까운 가죽만 낭비할 거 같네.”
뉴트는 괜히 한마디 더 보태며 죽은 여우를 슬그머니 뒤로 감췄다. 그리고 민호의 팔을 보며 한 번 더 잔소리를 시작했다. 또 시작이네. 같은 부상으로 꼭 네 번째 잔소리는 듣던 민호는 슬슬 뒷걸음질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물론 뉴트가 졸졸 따라왔다.
어둠 속에선 부상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었는지, 천막 안에 들어가자마자 높은 비명이 흘러나왔다. 이 정도 별거 아니라는 사람과 큰일이라는 사람이 서로 섞여 들어가는 공간은 좀 더 시끄러워지고, 가까워졌다. 여우는 뉴트가 어디다 숨겼는지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