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호뉴트/민늍] 신부이야기 011
+) NOTICE
신부이야기에서 모티브를 얻은 중앙아시아+무언가 동양 판타지 aU입니다
민호는 도적단 두목 / 뉴트는 팔려가던 중
기본적인 의상에 대한 묘사는 촐님(@go00chol)의 그림을 보고 연성했습니다
촐님(@go00chol), 로케님(@goroke11)과 같이 풀던 썰을 기반으로 합니다
적당한 망상과 설정 붕괴가 언제나 함께 합니다 ㅇㅅㅇ)9
write. 환월
궁금함이나 문의는 댓글 방명록 트위터 등 편한 곳으로 부탁드립니다 >_<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일정부분 연재 후 1월 민늍온에 신간으로 나옵니다 샘플은 지우지 않아요
그 난리를 치고 나서 반동이라도 생긴 것일까.
뉴트는 엄청난 속도로 도적 무리에 섞여 들어갔다. 물론 어색해 하고 낯을 가리는 놈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괜히 한 발짝 물러서는 놈. 여전히 남 보듯 으르렁거리는 놈. 괜히 민호한테 화살을 돌리는 놈. 제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뉴트는 이런 상황을 모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같이 낯설어 할 수 없었다.
“뉴트 어디가?”
“…양들 좀 풀어두고 와야지.”
“바쁘네.”
“다른 사람만 하려고. 어차피 내 몫인데 열심히 해야지.”
“…….”
“다녀올게.”
사실 뉴트는 놀고먹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마음이 불편하다고 해야 하나. 할 일이 없으면 굳이 찾아서 하는 타입인지라, 편하게 쉬라고 하는 말을 유난히 부담스러워 했다. 바쁘게 몸을 움직이면 머리가 맑아진다는 소리를 하는 뉴트는 혼자 바빴다. 물론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영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뭐, 하지만 알아서 일을 찾아서 한다니 말릴 생각은 없었다. 이곳에선 할 만큼 일을 해야 밥을 먹을 수 있다.
“뉴트. 나도 갈래!”
“…같이 갈까?”
“그래!”
민호가 자리를 비우면 뉴트는 냉큼 옷을 벗었다. 서역 물건은 사서 돌아가던 상인에게서 빼앗아 왔다는 옷을 입었다. 옷 품이 너무 커서 마치 남의 옷을 뒤집어쓴 것 같았지만, 뭘 입어도 원래 입고 있던 옷보단 편했다. 너무 이질적인가 싶었지만, 이것도 감지덕지했다.
“옷 갈아입었네?”
“너무 불편해서.”
“으음.”
척은 동그란 뺨을 한껏 부풀리며 웃었다. 뉴트는 재빨리 말에 올라탔다. 눈치를 보던 척이 우리를 열면 양들이 와르르 달려 나왔다. 천천히 양을 몰면서 밖으로 걸어가는 뉴트 뒤로 허겁지겁 말을 달리는 녀석이 눈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풀이 가까운 곳에 있어 다행이었다. 뉴트와 척이 고민이 늘어진 것을 바라보던 벤이 지나가는 말투로 알려줬다. 북쪽으로 가봐. 역시 밖으로 다니는 사람이 많이 알았다.
게다가 도적 떼들이 있는 곳이라 유목민들의 손이 타지 않은 작은 풀밭은 몇 마리 되지 않는 양을 키우기 충분했다. 워어. 워. 뉴트가 채찍을 가볍게 휘두르며 양 떼를 몰았다. 그렇게 양들을 풀어놓고 나서야 말에서 내린 뉴트는 허리를 쭉 펴면서 앓는 소리를 했다.
“아우, 허리야.”
“뉴트. 도시락은 여기다 걸어둘까?”
“그래. 사실 조금 있다 돌아가야 하지만.”
둘은 반쯤 나뭇잎이 떨어진 나무 아래 자리를 깔았다. 어차피 저기 풀어둔 작은 짐승들이 배를 채우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다행히 양의 마릿수가 많지 않아 하루에 몇 번씩 왕복하지 않아도 됐다. 조금 더 커야 뭔가 할 수 있을 텐데. 뉴트는 내내 그 걱정이었다. 이 풀밭을 다 먹어치우면 어디로 가야 할까. 얼마나 더 먹일 수 있을까. 오만가지 생각을 하는 뉴트의 입에 불쑥 빵이 밀려들어 왔다.
“…읍.”
“뉴트는 항상 그렇게 인상을 쓰고 있더라.”
“그야…….”
“지금은 쉬는 시간이잖아. 어차피 돌아가면 쉬지도 못하고 바로 저녁준비 하는 걸 도와야 할 텐데,”
“그렇긴 하지.”
“뉴트는 생각이 너무 많은 것 같아.”
그런가. 뉴트는 웃으며 빵을 베어 물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지면 주변에 흩어져있는 양을 한군데로 몰아왔다. 천천히 돌아오면 꼭 저녁을 준비할 시간이었다. 척한테 양을 우리로 몰아두라고 부탁한 뉴트는 두 마리 말의 고삐를 잡았다. 마구간에 가서 고삐를 단단히 묶어두고 물과 건초를 구유에 가득 채웠다. 오늘도 수고했다고 허리를 한번 두드려 준 다음 저녁을 준비하는 곳에 가서 어정거렸다. 민호가 이것저것 많이 사오는 사람에 며칠째 식탁이 풍요로웠다. 저녁을 먹고, 그릇을 치우면 또 할 일이 없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가고 달이 뜨면, 내일이 찾아온다. 익숙해진 생활은 아주 가끔 지루함을 안겨주었다.
“민호는 언제쯤 돌아오려나.”
괜히 혼잣말하며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괜찮은 정보를 가져왔다며 벤이 며칠 동안 민호와 저쪽 건물에 박혀있더니 곧 사람을 모았다. 있을 때 벌어야지. 금방 돌아올게. 민호는 마치 옆집에 놀러 가는 것처럼 가볍게 말했다. 물론 차림은 무시무시했다. 다들 며칠 먹을 식량을 챙기고 날카로운 칼을 하나둘 허리에 찼다. 달이 차면 돌아온다는 말을 남긴 도적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우르르 본거지를 비웠다.
남은 사람은 몇 없었다. 아직 일을 나가기 어린 녀석. 후방에서 살림을 담당하는 무리, 그리고 최소한의 경비병. 그뿐이었다. 어쩐지 휑하게 비어버린 본거지가 너무 넓어 보였다.
“이렇게 보니 굉장히 넓네.”
뉴트의 입에서 가늘게 하얀 숨이 흘러나왔다. 날은 점점 추워졌다. 해가 떠 있을 동안을 괜찮았지만, 밤은 유독 그랬다. 아무리 걱정을 해도 당장 민호가 어디쯤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루빨리 달이 차기만 기다리던 뉴트는 새벽이 반쯤 지나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
“뭐? 오늘은 양을 데리고 나가지 않겠다고?”
아침부터 프라이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안 그래도 민호가 돌아올 날짜가 가까워졌는데, 거기에 더해서 뉴트도 고집을 피우기 시작했다. 보통 뭔가 하겠다는 말을 잘 하지 않는 녀석이 단호하게 말하니 프라이는 어쩐지 머리가 아팠다.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아? 뉴트?”
“응. 그래.”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어차피 건초가 남아있으니 별로 상관은 없지만.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괜찮아?”
프라이의 눈엔 그 앞엔 활을 어깨에 메고 활 통을 단단히 묶고 있던 뉴트가 보였다. 프라이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갑자기 왜?”
“사냥을 좀 나가볼까 싶어서.”
“…사냥?”
“저번에 양을 몰고 오다가 동물이 있을 만한 곳을 봤어. 아마 토끼가 있을지도 모르고.”
“뭐, 그거야. 그렇다 치고.”
“저녁 먹기 전엔 돌아올게.”
“민호가 돌아왔을 때 네가 없으면 난리 날 것 같은데.”
“혹시 그러면 어디 도망간 것 아니라고 전해줘.”
재빨리 말 위에 올라탄 뉴트가 갈 길을 재촉했다. 마른 먼지만 남기고 달려가는 녀석을 보던 프라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 안 봤는데, 점점 고집이 민호를 닮아간다. 말린다고 말려진 사람들이 아니지. 그 모습을 지켜보던 놈의 허리를 퍽퍽 치면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뉴트는 빠르게 말을 달리고 있었다. 사실 사냥할만한 짐승이 있을 진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숨을 곳이 많은 바위산에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곳인지라 그럴 확률이 높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야생동물들은 눈치가 빠르다. 어느 정도 산에 다다를 무렵 뉴트는 고삐를 바짝 잡은 채 천천히 움직였다. 너무 빠르게 울리면 땅이 울리고, 그 진동을 알아챈 야생동물들이 재빨리 몸을 숨긴다. 사실 걸어서 찾는 쪽이 가장 좋았지만, 그렇게 넉넉한 시간이 없었다.
“있을 줄 알았는데, 역시 없는 건가.”
바람에 흔들리는 풀과 나뭇가지 외에 다른 움직임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곳을 바라보던 뉴트는 짧게 혀를 찼다. 여우는 고사하고 토끼도 보이지 않았다. 꿩이야 프라이가 이쪽에선 보기 힘들다고 하니 바라지도 않았다. 사냥 다녀온다고 큰소리를 치고 나왔는데 빈손으로 돌아갈 판국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초조해졌다.
“…저기.”
뉴트가 눈을 찌푸렸다. 그래도 제대로 보이지 않아 손을 바짝 눈썹에 가져다 댔다. 으음. 바람에 움직이는 건지, 아니면 뭔가 숨어있는 건지. 애매한 움직임이 보이는 한 곳을 바라보던 뉴트가 조심스럽게 고삐를 당겼다. 일단 쫓아가 보는 편이 나으리라 판단했다.
“누르…조심히. 살살.”
말을 알아들었는지 천천히 움직였다. 조심스럽게. 최대한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만큼 다가간 뉴트가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분명 저 풀숲에 뭔가 숨어있었다. 그때 크게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림자가 슥 움직였다. 뉴트가 조용히 말에서 내렸다. 눈에 띄지 않게 허리를 숙이고 천천히 풀이 없는 곳을 골라 밟았다.
“…….”
저 멀리 희미하게 사냥감이 보였다. 이 정도면 됐다. 시위에 걸었던 화살을 콱 잡았다. 그리고 숨을 멈추고 팔을 곧게 편 다음 조준을 하기 위해 한쪽 눈을 감았다. 한번 실패하면 이 곳에서 사냥하긴 그른 것과 마찬가지라 신중해야 했다. 날카로운 화살촉이 작은 동물을 향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푹 박히는 소리가 거의 동시에 들렸다.
“…그래도 아직 감이 죽진 않았나 봐.”
뉴트는 이제야 긴장을 풀었다. 활을 어깨에 걸고 저 멀리 화살이 날아간 곳으로 걸어갔다. 화살을 맞고 그대로 숨이 끊어진 토끼의 귀를 덥석 잡았다. 몸에 단단히 박혀있는 화살을 쑥 뽑았다. 일단 한 마리는 잡았으니 체면치레는 한 셈이었다. 몇 마리 더 잡으면 좋고. 아니면 할 수 없고. 짐에서 밧줄을 꺼내 토끼를 묶었다.
모른 척 풀을 뜯기 시작하는 누르를 저 멀리 놔둔 채 뉴트는 사냥에 한껏 집중하고 있었다. 아직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없는지, 조금 있다가 제법 큰 토끼 한 마리를 더 잡았다. 한 번에 너무 많이 잡는 것은 좋지 않은데, 두 마리 가지고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한 마리 정도만 더 잡을 수 있으면 국이나 고기 스튜 정도는 끓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 잡은 크기론 다소 부족했다.
“…한 마리 더 잡을 수 있으려나.”
뉴트가 발돋움을 해가며 이리저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옷이 펄럭거렸다. 바짝 마른 풀색이 물든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면서 춤을 줬다. 살짝 눈을 감고 숨을 들이쉬면 겨울이 느껴졌다. 어쩐지 가슴이 툭 터지는 것 같았다.
“…응?”
분명 토끼가 움직이는 것보다 묵직한 발소리였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귀를 쫑긋 세우던 뉴트가 조심스럽게 발을 움직였다. 허리까지 자란 풀이 가득한 쪽은 아니었다. 소리만 들릴 뿐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뉴트가 조심스럽게 바위를 딛고 올라섰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폈다. 부스럭. 사박. 사박. 어딘가에서 뉴트를 보고 있는 것이 확실한데,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쌍방 싸움이었다.
“어디지.”
순간 느낌이 좋지 않았다.
“설마 늑대 종류는 아니겠지. 이런 곳에 살 것 같진 않지만.”
화살을 하나 더 꺼내서 시위에 걸었다. 여우가 아닐까 싶었지만, 혹시라도 늑대 같은 대형 종이라면 말이 좀 달라진다. 그런 건 혼자 잡기에 무리가 있었다. 긴장되니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저 멀리 서 있던 풀이 갑자기 푹 꺾였다.
“저기구나.”
뉴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화살을 조준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계속 같은 곳을 바라보며 집중하고 있으려니 눈이 아팠다. 그 순간이었다. 그 순간 풀숲이 크게 흔들리는 것 같더니, 시커먼 물체가 펄쩍 뛰어올랐다.
***
그 시간 민호는 뉴트를 데려왔을 때처럼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익숙하게 두 패로 나뉘었다. 그리곤 빠르게 달려가 상단의 머리와 꼬리를 동시에 쳤다. 호위병들을 먼저 말에서 떨어뜨린 다음, 기동력을 빼앗기 위해 말의 엉덩이를 때려서 저 멀리 내쫓았다.
“도적 떼다!”
“도적이 나타났다!”
쉴 새 없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민호는 눈 하나 깜작하지 않았다. 늘 하던 일인 데다 실패하지 않을 거란 자신감도 충분히 있었다. 다른 도적과 다른 점이라면 사람 목숨을 빼앗지 않는다는 정도일까. 물론 물건은 쓸모없거나 처치하기 곤란한 것을 제외하고 모두 한곳에 모았다. 주춤주춤 모인 상인들은 힘이 없었다. 호위병들은 벤이 담당해서 한쪽에 꿇어 앉혔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려고 하나하나 줄로 단단히 손을 묶었다. 기다란 줄 하나로 손이 묶인 경비병들은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여긴 다 됐습니다. 두목.”
벤이 손을 털면서 씩 웃었다. 제법 강한 저항이 있었는지 자잘한 상처가 얼굴에 길게 났다. 그나마 크게 찔리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물론 당사자는 그다지 상처를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 잘했다.”
“이쪽 마차엔 별거 없는데요. 두목.”
“무거운 거 쓸모없는 거 빼고 골라내.”
민호가 바쁘게 이리저리 지시했다. 상인들은 한자리에 모아두고 양옆으로 도적들이 둘러쌌다. 민호는 그 앞에 서서 모든 도적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 순간 이유 없이 등에 소름이 쭉 돋았다.
“…응?”
“두목! 피해!”
“…….”
벤이 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민호의 반응이 이상할 정도로 느렸다. 고개를 상인들이 꿇어앉아 있는 쪽으로 돌렸을 땐 이미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 칼을 들고 달려드는 중이었다.
‘아차.’
좋은 옷을 입고 있어서 별로 위협이 될 것 같지 않다고 넘겨짚은 것이 화근이었을까. 그 속에 경호원이 섞여 있으리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니 무술을 아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민호가 급하게 팔로 칼을 막으려 했다. 적어도 심장이 가까운 곳을 다치는 것보단 팔이 나았다. 푹. 뭔가 뭉툭하게 썰리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대장!”
“민호!”
한순간에 난리가 났다. 어쩐지 쉽게 일이 풀린다 했어. 다들 그런 비슷한 생각을 했다. 너무 쉽게 풀린다 했더니, 이런 일이 생긴다. 민호는 다행히 순간적으로 몸을 비튼 덕분에 급소를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날카로운 칼은 그대로 치고 들어오며 민호의 팔뚝을 세게 긋고 지나갔다. 본능적으로 팔을 감싸 잡은 민호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제법 깊게 베었는지 반대쪽 손등을 타고 붉은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방울방울 맺혀있던 것이 뚝뚝 떨어지면 바짝 마른 바닥에 피를 머금은 먼지가 피어올랐다.
“…으.”
“대장 괜찮아요?”
“괜찮아 보이냐?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큰일 나는 줄 알았네.”
“이미 큰일 난 거 같은데, 두목.”
“…….”
달려든 녀석을 땅바닥에 쓰러뜨린 녀석이 움직이지 못하게 단단히 눌렀다. 혀를 쯧쯧 차면서 팔을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좀처럼 긴장을 놓지 못했다. 어디서 또 저런 녀석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이 마지막 반항이라도 되었는지, 다들 눈치 보기 바빴다. 민호는 둘둘 말려있는 천을 쭉 찢어서 팔에 감기 시작했다. 얼마나 깊게 찔렸는지, 금방 새빨갛게 물든 천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몇 번이나 붕대를 덧 감고 나서야 겨우 피가 흘러내리지 않았다. 근육이라도 다쳤으면 어떡해요. 대장. 걱정을 한가득 안은 녀석들이 슬슬 주위에 몰려들었다.
“괜찮아. 팔이 움직이니까.”
“…아니. 움직인다고 괜찮은 게 아니잖아요.”
“됐다. 치료는 가서 하기로 하고. 일단 물건만 챙기고 떠나기로 하지.”
“하지만.”
“괜찮아.”
잔뜩 인상을 쓴 채 말해봤자 아무도 믿지 않았다. 아무리 대장의 말이라지만 그렇구나 하고 동의할 녀석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제일 잘 아는 민호는 일부러 더 멀쩡한 척 굴었다. 여기서 아픈 척을 해봤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벤은 동료를 다그쳐서 뺏은 재물을 싣기 시작했다. 무거운 걸 끌고 가봤자 경비병에게 잡히기만 할 뿐이었다. 무게에 비해 가격이 나가지 않는 물품이 여기저기 땅바닥에 쏟아졌다.
“다 챙겼어.”
“그래. 다들 출발하라 해.”
“…나랑 같이하지.”
“괜찮아.”
“안 괜찮아.”
“…….”
“내가 그 말을 믿겠냐. 같이 해.”
하여튼 속일 수가 없네. 민호는 씩 웃고 말았다. 재물과 돈에 관심이 있을 뿐이지 사람 목숨을 뺏는데 취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몇몇 과격한 녀석들은 본거지를 치러올지 모르니 싹 다 죽여야 한다고 몇 번이나 입을 모았지만, 민호는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물론 그런 민호의 생각 때문에 어려움이 전혀 없는 것은 또 아니었다.
하지만 몇 번이나 그런 어려움을 이겨나간 민호에게 반항을 하며 대들 수 있는 녀석은 많지 않았다. 속으로 불만이 있던, 대장을 끌어내리고 싶던 현재 무리를 이끄는 사람은 민호였고, 그의 말에 따라야 했다. 아무리 오냐오냐하면서 봐주고 있어도, 반기를 들면 끝이었다. 그런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닌 벤은 걱정만 켜켜이 쌓았다.
“…너 계속 이렇게 사람들 보내주다가 한번 크게 당한다.”
“그 소리 몇 년 전부터 들었는걸.”
“바깥 말고, 안에서 말이야.”
“…….”
“너라고 모르는 건 아니겠지만.”
“하지만 굳이 사람 목숨을 뺏고 싶진 않아. 예전엔 그랬을지 몰라도…적어도 난 그렇게 하는 건 싫어.”
“난 그래서 네가 대장 자리에 있는 게 좋아. 민호.”
“갑자기 무슨 소리야.”
갑자기 왜 이러는지. 민호는 헛소리하지 말라 하면서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말을 준비하고, 상인들을 묶어놨던 줄을 끊었다. 그리고 작은 칼을 툭 차서 건넸다.
“우릴 쫓아오는 건 자유지만, 말도 없는 상태에서 괜한 호승심은 안 부리는 쪽이 낫다. 저 사람들은 다 구한 다음 무사히 돌아가려면 지금부터 걸어도 모자랄 테니까.”
“왜 살려주는 거지?”
“그래. 맞아. 난 돌아가면 당장 너희에게 복수할 것이야!”
“그것도 상관없다. 하지만 난 필요한 것만 빼앗을 뿐이지 목숨을 가지고 협박하는 걸 좋아하지 않거든.”
“…….”
“뭐, 그건 그쪽이 알아서 하고. 난 분명 경고했다.”
“…….”
“난 너희를 해치고 싶지 않지만, 내 부하들은 또 모르지.”
민호가 말에 훌쩍 올라앉았다. 벤은 그런 민호와 상인들 사이에 슥 껴들었다. 위협이라도 하는 것처럼 칼을 든 채 그대로 서 있는 벤은 몇 번이나 민호가 부르고 나서야 움직였다. 순식간에 말을 달려 시야에서 멀어지는 놈들은 잡기엔 역부족이었다. 몇 번이나 욕을 하고 침을 뱉던 상인은 주변의 아우성에 짜증을 내며 칼을 집어 들었다.
“…민호!”
“두목!”
“무사했네요?”
“뭐 얼마다 위험한 일이라고. 돌아가자.”
“아까 오다가 도망간 말이 한 번에 모여 있기에 끌고 왔습니다. 꽤 좋은 품종이던데.”
“잘했다.”
지혈하려고 너무 꽉 조여 맨 탓인지. 아니면 생각보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건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고삐를 잡고 있는 것도 힘든지 결국 한 손으로 말을 몰았다. 팔에서 시작된 고통은 어깨를 타고 올라가 머리를 괴롭혔다. 한쪽 팔을 축 늘어뜨리고 있던 민호는 한숨을 쉬며, 가끔 뒤를 돌아봤다. 뭘 보는 거야. 벤은 그런 민호를 따라 저 멀리 지평선을 보았지만, 벤의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괜찮아?”
“뭐가?”
“정신이 없어 보여서.”
“괜찮아. 이제 들어가서 치료하고 좀 쉬면 괜찮겠지.”
“몸 좀 소중히 여겨라. 돌아가면 애들이 또 놀라겠네.”
“…아.”
“하여튼.”
갑자기 주변 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멍하니 앞만 보고 있던 민호는 옆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공기가 얼어버린 것처럼 느리게 팔뚝을 타고 오르는 고통만 느껴질 뿐 다른 것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귀에서 웅웅 소리가 울렸다. 민호? 민호? 옆에서 등을 두드리며 누군가 연거푸 민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한 박자 늦게 반응하는 몸은 점점 무거워지기만 했다.
***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가서 약이랑 붕대 좀 찾아봐.”
“민호? 정신 차려봐. 민호.”
“…머리 울린다. 그만해라.”
“다 죽어가는 얼굴로 멀쩡한 척하기는.”
반쯤 강제로 끌어내려 진 민호는 앓는 소리를 하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붕대로 쓴 천은 이미 무슨 색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피가 말라붙었다. 저기 앉혀라. 뜨거운 물을 가져와라. 아주 난리가 났다. 벤은 민호를 대신해 약탈한 물건을 이리저리 옮기라고 지시했다.
“…세상에. 이게 뭐야.”
“상인들 사이에 옷을 바꿔입은 놈이 숨어있던 건지. 아니면 정말 무술을 할 수 있는 놈이었던 건지는 몰라. 하지만 조금만 빗겨 그었으면 진짜 큰일 날 뻔 했어.”
“지금도 충분히 큰일 난 거 같아.”
척이 허겁지겁 약과 붕대를 들고 달려왔다. 프라이가 둘둘 말고 있던 붕대를 벗겨내자 흉물스럽게 벌어진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으으. 주변에서 서로 앓았다. 붕대를 벗겨내자 또 피가 왈칵 쏟아졌다. 약이랄 것도 없지만, 그래도 안 바르는 것보단 나았다.
“좀 참아봐.”
“…뭘. 으아아악!”
“참아봐.”
피와 먼지가 덕지덕지 묻어있는 팔에 물을 붓자 민호가 펄쩍 뛰었다. 하지만 팔을 단단히 잡고 있는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으윽. 꽉 다문 입술 사이로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천천히 팔을 씻어내고 약을 발랐다. 워낙 깊게 상처가 나서 아무는 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붕대로 꼼꼼하게 묶고 나서야 민호는 긴 한숨을 쉬었다.
“흉터 남겠다.”
“뭐 한두 번인가.”
“그래도 팔이라 다행이네. 처음 봤을 땐 어디 허리라도 찔렸나 했다.”
“그러면 아마 말을 타고 온 게 아니라 끌려 왔겠지.”
“말을 해도 꼭 저렇게 하지.”
괜히 등을 한대 더 얻어맞은 민호는 끙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일 보고 싶은 녀석이 있는데,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리저리 둘러보던 시선이 프라이에게 닿았다.
“…뉴트는?”
“아.”
“…어디 갔어?”
“그게. 아까 사냥하러 나간다고 했는데, 아직도 안 돌아왔네.”
“사냥?”
“갑갑한 모양이더라고. 금방 오겠거니 했지.”
“…….”
“이렇게까지 오래 걸릴 일인가.”
이 한마디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불안해서 견딜 수 없었다. 이미 해는 기울어져서 밤하늘에 먹히고 있었고, 찬 공기가 울컥 밀려왔다. 이렇게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이 아니라면, 방향을 분간할 등불도 없었다. 저 멀리서 늑대가 우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헛소리라고 생각은 하지만 마음은 더 불안해졌다. 불빛이 없는 곳에서 사람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는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생겼나 봐.”
“…그럴 리가.”
“하지만 금방 돌아온다고 한 걸.”
“…….”
민호가 다친 것도 걱정스러운데, 뉴트도 사라졌다. 수군거림이 점점 걱정되어 터져 나왔다. 이 상황에도 시간은 착실히 흘러가고 있었다. 아까보다 한 뼘은 길어진 그림자가 밤이 오고 있음을 알렸다. 민호는 결국 기다리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걸어나갔다.
“어디 가려고.”
“일단 찾아봐야 할 거 아냐.”
“…지금 가도 서로 엇갈릴 뿐이야.”
“그렇다고 이렇게 손 놓고 기다리자고?”
“너도 다쳤어. 민호. 정신 차려.”
달려나가려는 민호와 그걸 저지하는 동료 사이에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저렇게 다친 주제에 또 어디를 나간다고 하는지. 아무리 밤 지리에 밝은 사람이라 해도 사고를 안 당하는 것도 아니었다. 겨우겨우 민호를 붙잡아 앉힌 프라이는 부엌과 민호를 서로 바라보다 벤을 불렀다. 저 녀석 단단히 잡고 있으란 소리를 몇 번이나 하고 나서야 자리를 떴다.
그런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민호는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있었다. 옆을 지키고 선 벤은 안타깝다고 말을 하지만, 절대 비켜줄 생각이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한 마음은 점점 강해지는데, 뉴트는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벤.”
“안돼.”
“…….”
“난 밤에 다친 사람 절대 밖으로 못 보내.”
“…….”
점점 초조해지는지 민호는 계속 빙글빙글 제자리걸음을 걸었다. 멋대로 달려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발 뻗고 누워서 기다리긴 더 힘들었다. 돌아오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돌아올 생각이 없는 건지. 가장 안 좋은 방향으로 생각이 줄줄 흘러나갈 무렵. 저 멀리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한 번에 밀려왔다.
“이게 무슨 피야?”
“뉴트? 다쳤어?”
“아니, 오늘 무슨 날이야?”
민호는 저 멀리서 들리는 뉴트 목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그 와중에 상처가 다시 벌어졌는지 절로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으으. 민호가 제대로 힘도 들어가지 않는 팔을 잠시 바라보더니,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척과 다른 녀석들이 둥글게 모여있는 곳에 가까이 갈수록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점점 커지지만 했다.
“다친 거 아냐? 응?”
“다친 거 아냐.”
“하지만 이렇게 피가…….”
“괜찮다니까.”
그 순간 둥그렇게 모여있던 녀석들이 하나둘 옆으로 물러났다. 뉴트가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들었을 때, 시선 한가득 익숙한 얼굴이 들이닥쳤다. 그리고 뭐가 한마디 말할 새도 없이 옷을 덥썩 잡혔다.
“왜? 왜 그러는 거야.”
“…이 피는 다 뭐야.”
“그러니까…….”
“어디 다친 거야?”
“그건 대장이 할 말이 아니지 않아요?”
옆에 서 있던 누군가 한마디 툭 말을 던졌다. 그제야 뉴트는 민호의 팔 한쪽이 축 늘어져 있는 걸 발견했다.
“이건 또 뭐야.”
“…다쳤어.”
“그런 주제에 누가 누굴 걱정해. 이건 내 피가 아니야.”
“…뭐?”
그게. 뉴트가 말 위에 얹어뒀던 동물을 질질 끌어내렸다. 그걸 보던 애들의 눈이 등잔만 해졌다. 토끼 세 마리. 그리고 여우가 하나. 꽤 묵직한지 두 손 가득 차게 사냥감을 끌어안은 뉴트는 눈짓으로 여우를 쿡쿡 찔러댔다.
“아무래도 큰놈이라서 바로 죽지 않더라고.”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 확실하게 처리하면서 피가 좀 튄 건데, 왜 그렇게 놀라.”
“…….”
“그쪽이 더 위험한 상황 같은데. 아니야?”
“…그거야.”
민호는 헛기침과 함께 말끝을 흐렸다.
“나 기다렸어?”
“…….”
또 분위기가 간질간질 해졌다. 두목 안 아프시다 하신다. 이제 다 나으셨단다. 한마디씩 보태는 녀석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와르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흠. 흠. 헛기침과 숨소리만 들리는 곳에서 뉴트가 먼저 뭔가를 불쑥 눈앞에 들이밀었다.
“이건 토끼고…저건 여우야.”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 토끼는 프라이한테 가져다 줘서 탕을 끓이든지 스튜를 하든지. 세 마리 잡았는데 아마 구워 먹을 정도는 아닐 거야.”
“…….”
“그리고 여우는…….”
“여우는?”
“됐다. 모습을 보아하니 아까운 가죽만 낭비할 거 같네.”
뉴트는 괜히 한마디 더 보태며 죽은 여우를 슬그머니 뒤로 감췄다. 그리고 민호의 팔을 보며 한 번 더 잔소리를 시작했다. 또 시작이네. 같은 부상으로 꼭 네 번째 잔소리는 듣던 민호는 슬슬 뒷걸음질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물론 뉴트가 졸졸 따라왔다.
어둠 속에선 부상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었는지, 천막 안에 들어가자마자 높은 비명이 흘러나왔다. 이 정도 별거 아니라는 사람과 큰일이라는 사람이 서로 섞여 들어가는 공간은 좀 더 시끄러워지고, 가까워졌다. 여우는 뉴트가 어디다 숨겼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또 하루가 흘러갔다. 겨울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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