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뉴트/톰늍] MAZE IN THE TRAP 006
+) NOTICE
둘이 멀쩡하게 연애하는게 보고싶어서 시작한 평범한 세계에 대학교 AU 입니다.
플레어는 발병하지 않았고, 다들 알아서 잘 살고 있는 세계.
적당한 망상과 설정 붕괴가 언제나 함께 합니다 ㅇㅅㅇ)9
톰늍 대학교 편까지 연재하고 대학교 졸업 이후 버전을 따로 추가해 회지로 만들 예정입니다.
연재한 분량 자체를 지우진 않습니다.
write. 환월
6.
꽤 오랫동안 비워두었던 자신의 연구실 문을 열었다. 익숙한 풍경에 토마스는 계속 싱글벙글 웃고 있었지만, 따라온 셋은 여전히 얼어있었다.
“여기가…어디야?”
“어? 내가 쓰던 연구실. 내가 대학 입학하느라 비워둬서 볼품없긴 하지만…….”
“볼품없다고?”
“어서 들어와.”
토마스가 안내하는 대로 연구실 안으로 들어가자 더 얼떨떨해졌다. 대학교 시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기계과 컴퓨터 시설은 물론이고, 넓이도 엄청났다. 토마스가 대학에 입학한 뒤 한 번도 방에 불을 켜지 않았던 터라 유난히 싸늘한 기운이 돌았다.
“…….”
뉴트가 농담 삼아서 저 녀석은 아무리 봐도 대학을 놀러 오는 거 같다고 한 적이 있었다. 수업도 대충 듣는 것 같고, 필기도 하는 것 같지 않은데 이상하게 과제를 안 하는 것 같진 않다고 했다. 물론 그 말을 받은 갤리와 민호가 그 소리를 듣고 네 생각이나 하라며 뉴트를 타박했다. 게다가 뭘 그렇게 열심히 관찰했느냐며 은근슬쩍 놀리기도 했다.
“토마스가 진짜 이 연구소 소속이면 진짜 대학 놀러 다니는 거 맞잖아. 어? 안 그래?”
“그래. 네가 이겼다. 뉴트.”
“그게 문제가 아니지만 말이야.”
컴퓨터 전원을 켜고 부팅을 기다리던 토마스가 소곤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휙 돌아보았다. 까만 눈이 반질반질하게 빛났다. 뉴트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주자 눈만 깜박이다 마주보고 씩 웃었다. 아, 공학을 배우는 사람은 이렇게 컴퓨터 앞에 있는 것만으로 기뻐질 수도 있구나. 뉴트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사실 그냥 자료를 요청해도 되긴 하는데…….”
“되는데?”
“혹시 다른 자료가 필요하면 다시 와야 하잖아. 그럼 차라리 내 연구실로 와서 한 번에 끝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
“게다가 페이지 총장님이 여기에 계시면 직접 만나 뵐 수 있겠지만, 아마 많이 바쁘셔서 오시지 않을 거야. 대신 내 권한 레벨에서 필요한 자료는 알려줄게. 물론 세미나 주제에 관한 것만.”
“너 이래도 괜찮아?”
“뭐가?”
“자료 막 줘도 괜찮은 거냐고.”
“딱히 큰일이 날 것 같진 않은데. 오늘 세미나 주제는 내가 알고 있는 거고 총장님이 말씀하신 것 위주로만 찾으면 별로 상관없어. 그 정도는 다들 외부 자료로 나가는 거니까.”
“…….”
“그리고 그 정도는 나도 책임질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고.”
“오, 대단한데.”
“필요하면 여기서 자고 가도 괜찮아. 사실 여기 너무 넓어서 혼자 있으면 되게 쓸쓸하거든.”
여전히 당황하고 있는 세 사람과는 별개로 토마스는 마냥 기분이 좋았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 뉴트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이 제일 신이 나는 일이었고, 두 번째는 언제나 혼자 틀어박혀 있던 연구실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것이었다. 토마스는 방 안을 꾸미는데 취미가 없어서 가장 필요한 것만 모아두고 나머지는 휑한 상태로 내버려 두곤 했다. 어릴 때부터 사용한 연구실은 꾸며야 할 공간이 아니었다.
‘정말 잘 된 거 같아. 여긴 너무 넓었어.’
사실 토마스가 연구실에 있을 땐 전혀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연구실은 크고 넓고 조용할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이 자꾸 들락거리면 집중이 흐트러진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고작 몇 달 대학교에서 사람 좀 만났다고 이 연구실이 얼마나 삭막한지 깨달을 수 있었다. 토마스는 자신이 머물고 있는 집에서 맡았던 냄새를 연구실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 언제나 새것 같은 공간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도움은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뉴트는 뜻하지 않은 기회를 잡았다. 물론 이런 기회가 다른 방향에서 오면 더없이 좋을 것 같았다. 예를 들면 당장에라도 계약하자면 몇 달 째 귀찮게 찾아오는 별 볼 일 없는 에이전시 대신 좀 더 좋은 조건이라던가. 이런 식으로 미래에 도움 되는 일이 많을 텐데 하필 보고서 따위에 귀중한 기회를 날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열심히 보고서를 쓸 생각은 없었지만, 토마스가 이 정도로 성심성의껏 도와준다는데 그 정도 성의는 보여야 할 거로 생각했다. 뉴트는 마음속으로 정리를 끝내고 나서야 토마스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 어디 한 번 보고서 잘 써보자.”
“무슨 일로 이렇게 의욕이 넘쳐. 이상한데.”
“거기 운동 중독자분도 헛소리 말고 와서 거들기나 하시죠. 지금 저만 바쁜 게 아닐 텐데요.”
기분이 풀렸는지 늘 하던 대로 존댓말을 섞어가며 농담을 툭툭 던지는 뉴트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이것저것 자료를 꺼내오던 토마스가 커다란 스크린에 자료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자료로만 보면 좀 어려울 수 있는데 생각보다 간단한 개념이라서 압축하면 그다지 어렵지 않은 영역일 거야.”
물론 이해하기엔 너무 먼 지식을 머릿속에 구겨 넣고 있는 셋은 당장 이 연구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미 반짝반짝한 눈으로 설명할 준비를 하는 저 신입생의 기대를 배신할 수 없었다. 금요일부터 시작한 보고서는 연구실에서 하루를 보내고 난 뒤 토요일 오후나 되어서 끝났다.
✗ ✓ ✗
“진짜 힘들었어,”
“뭐가?”
“보고서 쓰는 거.”
“그래도 자료는 넘치게 많았잖아.”
“자료를 말하는 게 아니야 내 머리가 처리할 수 있는 정도를 말하는 거지. 진짜 공학 쪽은 취미 없다.”
“그러면서 그렇게 열심히 했냐.”
낄낄거리며 웃던 민호가 뉴트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묵직한 근육이 어깨를 내리누르자 잔뜩 표정을 구긴 뉴트가 손으로 팔뚝을 퍽퍽 쳤다. 무거워! 그런 뉴트를 가만 내려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리곤 앞서 가던 알비를 발견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소리쳐 불렀다.
“알비. 오늘 끝나고 한 잔 하러 가는 건 어때?”
“끝났어?”
“물론이지. 여기 뉴트도 있다.”
“나 물건 아니다. 이거 놔라.”
“괜찮겠어? 보고서 쓰느라고 엄청 힘들었던 거 아냐?”
“우리야 늘 이러니까. 괜찮아. 토마스도 부를까?”
“그래야지? 어쨌거나 도움을 받았으니까.”
“그럼 괜찮은 걸로 알고. 잠시.”
“야!”
민호가 여전히 한쪽 팔로 뉴트의 목을 휘감은 채 익숙한 듯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뉴트는 또 기가 막혔다. 언제부터 저 녀석이 토마스의 연락처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통화 버튼을 누른 민호가 귀를 쫑긋거리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수신음을 듣고 있었다. 자기 옆에 있을 땐 내내 눈치만 보고 빙빙 돌던 녀석이 민호한테는 저렇게 낼름 전화번호를 가져다 바치다니. 속에서 뭔가 꿈틀거리며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뉴트는 너무 고생해서 자신이 예민해졌다고 애써 마음을 다스렸다.
“역시…안 받는 거 아니…….”
“어, 토마스. 전화받았네. 우리 보고서도 끝나고 해서 오늘 모이기로 했는데 올 거지?”
“야, 민호 내 말 좀……!”
가만히 좀 있어. 민호가 핸드폰을 멀리 떼어놓고 뉴트의 귓가에 소곤거리며 한마디를 툭 던졌다. 그 말을 들은 뉴트의 인상이 잔뜩 구겨지는 걸 봐서 화가 난 것이 분명했다. 알비는 한발 물러선 채 서 있었다. 그저 여느 때처럼 투닥거리는 둘을 보면서 허허 웃기만 했다.
“너도 도와줬는데 당연히 와야지. 학생회 애들도 몇 올 거니까 이참에 제대로 인사도 좀 하고. 응. 그래 거기서 보자.”
“…….”
“오늘 시간 빈다고 온대.”
“그래서?”
“아, 진짜 이럴래?”
팔에서 벗어나려고 버둥대는 몸은 더 내리눌렀다. 뉴트는 가끔 마음에 있는 생각과 정반대의 말을 하곤 했다. 오랜 친구인 민호는 그걸 잘 알고 있었다. 멀리서 학생회 간부들한테 전화하고 있는 알비까지 가까이 불러서 같이 걷기 시작했다. 민호가 하는 말이라면 잠자코 들어주니 이 녀석이 기고만장하게 이런다며 뉴트가 몇 번이나 툴툴댔다.
“그런데 누구누구 온대?”
“갤리랑 윈스턴. 그리고 프라이까지.”
“제법 많네. 갤리 오면 싸우는 거 아냐?”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없던 싸움도 생기는 거겠지. 괜히 애들한테 시비나 걸지 마라.”
“아 이 녀석이 진짜!”
발끈하는 뉴트를 보면서 알비와 민호가 동시에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부학생회장인데 너무한다고 한마디 더 하곤 입을 다물었다. 물론 알비는 항상 자기가 없으면 뉴트가 자리를 대신한다고 말하곤 했다. 연임중인 알비의 말에 토를 달만한 사람은 학생회 내에 없었다. 이것도 다 친해서 그러려니 했다. 보통 들어오는 신입생 인턴 치고는 제법 빠른 속도로 친해지는 토마스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저번에 봤던 연구소와 나이를 따지면 서로 동갑이거나 오히려 토마스가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토마스가 나이 같은 건 말을 하지 않아 따로 물어보진 않았다.
토마스는 여느 때처럼 목도리로 얼굴 절반을 가린 채 이젠 잎이 다 떨어진 나무 밑에 서 있었다. 한 번 바람이 불 때마다 간신히 가지를 붙잡고 있던 나뭇잎이 툭툭 떨어져 내렸다. 발끝에 차이는 바삭하게 마른 잎이 계속 시선을 어지럽혔다. 낙엽을 몇 번 걷어차다 길게 숨을 내쉬었다. 긴 숨이 하얗게 일어났다.
“…….”
물론 뉴트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냅다 자신의 연구실을 보여준 것이 맞았다. 게다가 아무리 토마스라고 해도 자료 없이 설명하려면 더 헷갈릴 것이 뻔했다. 하지만 한 번도 외부인을 들이지 않았던 연구실을 보여주고 나니 혹시나 총장님께 혼이 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물론 토마스가 숨긴다고 해서 숨길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연구소는 사각지대 없이 CCTV가 설치되어있었다. 로비를 통하지 않았을 뿐이지, 토마스가 친구들을 데리고 들어온 것은 고스란히 녹음되어 남아있을 것이 뻔했다. 하지만 별다른 말이 나오지 않았으니 괜찮으려니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뉴트가 기뻐해 줬으면 했는데.’
사회생활이 어색한 어린아이가 관심을 표현하는 방법은 지극히 직설적이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그 사람이게 도움이 된다면 아낌없이 내보일 수 있었다. 토마스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또래보다 훨씬 높은 곳에서 살던 사람이란 것이 좀 문제였지만, 본질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어차피 토마스에게 대학 점수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애초에 4년 정도 쉬고 오라는 소리도 들었고, 레포트는 딱히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뉴트가 점수를 잘 받으면 좋을 거란 생각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특권을 줄줄 풀어 놨다. 물론 뉴트가 정말 좋아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고맙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아직 점수도 나오지 않았다. 혹시나 점수가 제대로 나오지 않으면 어떤 식으로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몇 번이나 인형을 붙들고 연습하기도 했다.
토마스의 머릿속이 내내 복잡하던 새 시간이 꽤 지났다. 멀리서 토마스를 발견한 뉴트가 몇 번 소리쳐 불렀지만 제대로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저거 지금 나 무시하는 거야? 하고 고개를 삐뚜름하게 기울이자 민호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고 했다. 뉴트는 피식 웃었다. 하긴 그렇게 사람을 무시할 성격이면 애초에 그런 식으로 발 벗고 도와주지도 않았다. 두툼한 겉옷 아래로 길게 뻗은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뉴트는 눈사람 같다며 한마디 할까 하다 역시 그만두었다.
“토마스!”
“어, 민호.”
“내가 부를 땐 아는 척도 안 하더니.”
“…못 들었어. 레포트는 잘 냈어? 점수 잘 나와야 할 텐데.”
“네가 준 자료만 짜깁기해서 대충 내도 내가 쓴 것보다 잘 나올 테니까 걱정 마.”
“그러면 다행이고.”
뭐가 좋은지 또 서글서글 웃는다. 뉴트는 그렇게 웃는 토마스의 얼굴을 볼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 아팠다. 딱히 병은 아닌 거 같아서 입 밖으로 내지 않았지만, 미묘하고 간지러운 통증은 조금씩 강하게 심장을 압박해 오곤 했다.
민호가 둘의 어깨에 팔을 턱 올리면서 정신 차리라고 할 때까지 서로 말이 없었다. 뉴트는 요즘 들어 자신이 정신을 빼놓고 다닌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 휴학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닐까? 까지 말하고 스스로 어이가 없었다.
성인이 분명한데 묘하게 미성년자를 끌고 술집에 가는 모양새였다. 목도리를 둘둘 말고 뉴트 뒤를 따라왔다. 강아지 산책시키는 것 같은 모습에 뉴트는 결국 토마스의 손을 덥석 잡아 앞으로 끌어냈다. 몇 번이나 성인이 맞느냐고 확인했지만, 확실했다.
하지만 뭔가 잘못을 저지르는 것 같은 찜찜함에 민호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미 술집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각자 잔을 들고 있던 무리가 알비를 반겼다. 이놈들은 여전히 기다릴 줄 모른다면서 민호가 타박했다. 큰소리로 웃음이 터지고 하나둘 자리에 앉았다. 토마스를 가만히 쳐다보던 민호가 뉴트 옆으로 슬쩍 밀어 앉혔다. 군소리 없이 순순하게 자리에 앉은 신입생은 뭐가 그렇게 신기한지 면접 보러왔을 때와 똑같은 표정으로 이리저리 구경하고 있었다.
“아, 저 신입 녀석. 왜 저렇게 두리번거려.”
“……”
“일단 받아. 학생회 규칙이 있는데 눈앞에 있는 술 다 비울 때까지 의자에서 일어나기 없는 거다?”
“어째서?”
“어째서긴. 신참이 말이 많다.”
갤리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면서 토마스 앞에 잔을 밀어줬다. 하나둘 토마스 이름을 부르면서 분위기를 띄우기 시작했다. 알비는 저 녀석들 또 시작이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말리지는 않았다. 마음에 드는 신입이건 아니건 모두 한 번씩은 거쳐 가야 할 일종의 축제이기도 했다. 죽을 만큼 마시게 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 갤리의 표정을 보니 어쩐지 끝을 보려고 하는 것 같았다.
“좋을 때다.”
“넌 안 그랬던 것처럼 말한다.”
“난 적어도 저렇게 애들이 죽자사자 덤벼들진 않았거든.”
“그런가.”
“그랬지.”
알비랑 뉴트가 잠시 옛날 생각에 취한 새 토마스 앞엔 빈 잔이 하나 생겼다. 신입 잘 마시네. 옆에서 프라이와 자트가 바람을 넣었다. 그와 동시에 자기 잔을 반쯤 비운 민호는 팔짱을 끼고 토마스가 어떻게 하는지 지켜볼 뿐이었다. 딱히 갤리 무리에 어울리려 하지도 않았고, 토마스를 지켜주려고 하지도 않았다. 민호가 굳이 표현하지 않아서 그러지 나름대로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두 번째 잔이 비워지는 것을 보고 나서 갤리는 추가 주문을 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떴다. 아무래도 필름이 끊길 때까지 먹이려나 싶어 조금 걱정이 됐다. 그래도 배려해준다고 토마스 앞에 이것저것 안주를 밀어주는 프라이가 천천히 먹으라면서 다독였다. 물론 보통은 그만 마시라고 할 테지만, 오랜만에 재밌는 신입이 들어온 터라 모두 잔뜩 신이 났다.
“근데, 토마스 저러다 기절하면 누가 집에 데려다 주지?”
“…….”
“음, 너?”
“미쳤냐. 내가 저 큰 걸 어떻게 들고 가.”
“민호?”
“난 토마스 집 모르는데?”
“그건 나도 몰라 멍청아.”
“우리 셋이 알아서 해야지. 정 안되면 누구 기숙사에 좀 데리고 들어가던가. 하루 정도야 구겨서 잘 수 있겠지.”
보통 일을 치는 것은 갤리 이하 간부들이었고, 수습하는 쪽은 알비와 뉴트 그리고 민호였다. 저 녀석은 누구 집에서 어떻게 재울지 고민을 하기 시작하니 취하려던 정신도 말짱해지는 것 같았다. 물론 셋이 점점 술이 깨는 동안 토마스는 점점 정신이 풀리기 시작했다.
“이 정도 놀았으면 됐지. 그만 마셔.”
“이제 재밌어 지려는데.”
“더 마시면 어떻게 집에 가려고. 다들 돌아가야지. 재밌게 놀았잖아. 그리고 저 녀석은 이제 끝났어.”
“하긴. 다음에 또 신입생 데리고 오려면 불러.”
알비가 슬슬 정리를 시작했다. 반쯤 정신을 놓고 비틀거리는 토마스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서 겨우 의자에 걸터앉아 있었다. 아무리 요령이 없어도 주는 걸 저렇게 다 받아마시다니. 뉴트는 저 녀석이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슬슬 구분되지 않았다. 순진하다면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사려고 저 모양인지 알고 싶었고, 진짜 멍청한 거라면 저러다 어디서 하이스쿨 애들한테 돈 뜯기고 다니는 거 아닌지 걱정이 됐다.
갤리가 먼저 일어서나 하나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자트와 프라이가 신입 옮기는 걸 도와주려고 왔지만, 알비가 손을 저어 돌려보냈다. 뉴트는 술기운에 따끈따끈해진 손을 잡고 신입생을 일으켜 세웠다. 토마스의 얼굴은 터질 거 같았고, 손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운동을 제일 열심히 한다는 이유로 민호가 토마스를 업었다. 왜 나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다.
“토마스 지갑 꺼내봐. 카드키라도 있겠지.”
“그냥 우리 셋 중에 아무 기숙사나 데려가서 재우자니까?”
“아니, 침대가 없는데 어디서 재워.”
“바닥?”
“기다려봐 내가 할 테니까. 알비 가서 택시나 잡아줘.”
토마스가 메고 있던 가방 지퍼를 열고 손을 쑥 집어넣었다. 카드만 잔뜩 꽂혀 있는 까만 지갑을 꺼낸 뉴트가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렇다 할 단서가 없었다. 도대체 어디서 사는 거야. 카드를 쭉쭉 뽑아보던 뉴트가 아파트 키를 발견했다.
“아, 여기 있었네. 있긴 한데.”
“왜?”
“얘 진짜 장난 아닌가 본데.”
“멀리 사는 거야?”
“아니 여기 거긴데. 학교 앞에 있는 위키드 연구소 건물. 그 매일 지나다닐 때 보는 그 건물 있잖아. 들어가기도 힘들어 보이는 곳. 연구원들 장기 출장 나오면 사는 데.”
“…….”
“그래도 다행이다 뭐 가서 얘 얼굴 보여주면 들여보내 주겠지. 얘도 연구원이라며.”
가볍게 상황을 정리한 뉴트가 아파트 카드키만 빼낸 채 지갑을 닫았다. 다시 지갑을 토마스의 가방에 넣어주고 지퍼를 잠갔다. 알비는 이렇게 남의 집에 막 들어가도 되나 싶었지만, 뉴트가 택시를 불러 세우는 것을 보고 반쯤 포기한 채 민호를 도와 토마스를 차에 실었다.
✗ ✓ ✗
작은 소동이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무사히 토마스의 집에 들어올 수 있었다. 얼마나 보안에 철저한지 카드키를 세 번도 넘게 대고 나서야 현관문을 열 수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거실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여기서 혼자 산다고?”
“말도 안 돼.”
“기숙사에서 안 산다고 할 때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토마스, 일어나봐. 집에 다 왔어.”
“…….”
민호의 등에 축 늘어져 있는 녀석을 끌어다 소파에 앉혔다. 정신을 못 차리고 흐물거리며 옆으로 픽픽 쓰러지는 몸을 몇 번이나 바로 잡아주다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침대가 어디 있는 거야. 적당히 던져두고 가자. 집주인도 인사불성인데 우리가 오래 있을 수 없잖아.”
“뉴트. 이쪽에 있다.”
“와서 좀 업어.”
토마스를 질질 끌다시피 데려가 침대에 눕혔다. 이불까지 덮어주고 나서야 세 명은 간신히 허리를 펼 수 있었다. 잘 자는지 확인까지 하고 나서야 거실에 멋대로 던져뒀던 가방을 하나 둘 둘러매기 시작했다.
하지만 막상 저렇게 혼자 두고 가려니 뭔가 찝찝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기분에 뉴트로 알비도, 그리고 민호도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몇 번이나 빨리 가야 한다고 말했지만, 셋은 모두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근데 집이 참, 사람 냄새 안 나게 생겼다.”
“그러냐?”
“어. 가구가 다 새것인데 쓴 흔적도 거의 없고…….”
“그렇긴 하네. 차라리 우리 기숙사 일 인실이 이것보다는 인간적 일 거 같은데.”
“잠만 자는 곳 같아서 괜히 두고 가기 그런 기분이 들어.”
“하지만 우리가 허락받고 들어온 게 아니잖아. 나중에 만나면 천천히 설명해주지 뭐,”
“그런가?”
“그래. 슬슬 나가야지. 아니면 또 귀찮은 일 생길라.”
알비가 둘을 다독여서 밖으로 나갔다. 경비원에게 인사까지 하고 간신히 시간에 맞춰 기숙사에 돌아왔다. 일 인실을 쓰는 알비를 먼저 보내고 뉴트와 민호는 함께 방으로 향했다.
민호가 샤워를 하는 동안 뉴트는 머리의 물기를 말리면서 뭔가를 연신 검색하고 있었다. 수건에 채 흡수되지 못한 물방울이 액정 위에 뚝뚝 떨어지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뉴트는 한참을 그대로 앉아있었다.
“뭐 해? 머리 안 말리고.”
“그냥 찾을 게 좀 있어서.”
“너 요즘 이상하다?”
“뭐가?”
“내가 아는 뉴트가 아닌 거 같은데.”
가늘게 눈을 뜨며 쳐다보는 민호 얼굴에 냅다 베개를 던져버린 뉴트가 이불 위에 엎드렸다. 덜 마른 머리카락이 갈래갈래 갈라졌다. 손에 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뭔가 오래도록 생각했다. 그런 뉴트를 바라보던 민호는 먼저 잔다는 말을 하곤 이 층으로 훌쩍 올라갔다. 그러고 좀 부스럭거리다 이불을 두른 채 아래를 내려다봤다.
“안 자?”
“이것만 보고.”
“역시 이상하다니까.”
이층 침대에서 위쪽은 항상 민호 자리였다. 이유는 몰라도 자기는 이층이 좋다고 하길래 한 번 두 번 내주던 것이 어느새 버릇처럼 몸에 배었다. 뉴트는 일 층에 누워서 바로 위에 보이는 나무 바닥을 오랫동안 쳐다봤다. 민호는 눕자마자 잠들었는지 가끔 뒤척이는 소리가 날 뿐이었다.
“…….”
몇 날 며칠 동안 간질간질하게 머릿속을 괴롭히던 기억이 방금 툭 터져 나왔다. 뉴트는 새삼스러운 기억의 파편을 더듬으며 팔로 눈을 가렸다. 가늘게 떨리는 입술에서 한숨이 훅 새어나왔다.
“…스티븐 토마스.”
드디어 생각해 낸 이름은 저 먼 과거에 뉴트가 TV에서 들었던 바로 그 이름이었다. 인터뷰에서 생글거리면서 웃는 얼굴이 지금과 똑 닮았는데 왜 이제야 생각이 났는지 알 수 없었다. 어린 토마스를 보면서 혀를 차던 어린 뉴트가 자신을 보면서 깔깔 웃고 있었다.
“…그 애가 정말 있었네.”
한 번 기억나기 시작한 파편을 잡자 곧바로 다른 것을 찾을 수 있었다. 몇 번 검색하지 않았음에도 토마스에 관한 기사는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다. 어느 기점으로 토마스란 이름이 미디어에서 사라지는 시기가 있었다. 토마스의 대변인으로 나오는 사람은 항상 에바 페이지였고, 소중한 인재의 보호를 위해 이제부터 미디어 노출을 줄이겠다는 인터뷰가 있었다.
뉴트는 그 날 밤 토마스를 보기만 하면 왜 그렇게 기분이 묘했는지 알 수 있었다. 새벽녘이 다 되어서야 선잠이 든 뉴트는 오랜만에 어렸을 때 꿈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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