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호뉴트/민늍] 신부이야기 007
+) NOTICE
신부이야기에서 모티브를 얻은 중앙아시아+무언가 동양 판타지 aU입니다
민호는 도적단 두목 / 뉴트는 팔려가던 중
기본적인 의상에 대한 묘사는 촐님(@go00chol)의 그림을 보고 연성했습니다
촐님(@go00chol), 로케님(@goroke11)과 같이 풀던 썰을 기반으로 합니다
적당한 망상과 설정 붕괴가 언제나 함께 합니다 ㅇㅅㅇ)9
write. 환월
궁금함이나 문의는 댓글 방명록 트위터 등 편한 곳으로 부탁드립니다 >_<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막상 일을 돕겠다고 말했지만,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차라리 양이라도 칠 수 있으면 편할 텐데. 뉴트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할 일을 찾았다. 여기저기 움직여야 하면 오래 땅에 붙어있는 것은 그저 짐일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양도 밭도 남은 것이 없었다. 제일 자신 있는 두 가지가 모두 없는 곳에서 뉴트는 필사적이었다. 분명 자신이 해야 할 일이 한 가지는 있을 것 같은데 눈에 띄지 않았다.
‘…사냥이라도.’
하지만 활이 없었다. 예민하고 빠른 동물을 잡으려면 활과 화살이 필수인데 그런 위험한 물건을 자신에게 줄 것 같지도 않았다. 이래저래 열악한 상황에 뉴트는 계속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하지만 딱히 할 수 있는 일을 발견하지 못해 다시 프라이 곁으로 돌아왔다. 얌전하게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는 뉴트를 보던 녀석은 잠깐 눈을 굴리며 생각을 한다. 둘은 벌써 친해졌는지 안쪽에서 뭔가를 꺼내달라는 부탁을 했다.
“이건 뭐야?”
“오늘 먹을 음식을 만들어야지.”
“밥?”
“밥도 해야 하고. 고기를 더 놔두면 못 먹을 거 같으니 한꺼번에 다 구워서 먹어치워 버려야지.”
“…그렇구나.”
“입에 안 맞을 수도 있지만, 그런대로 먹을 만은 해.”
“내가 뭐 도와줄 건 없고?”
“음. 글쎄.”
프라이는 잔뜩 쌓아둔 음식 재료를 빠르게 훑었다. 이건 물에 씻기만 하면 되고, 저건 굽기만 하면 되는 거네. 빵은 먹을 만큼 남았던가. 프라이는 손을 접어가면서 생각하고 있고, 그 옆에 앉아있는 뉴트는 그런 행동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뭘 하면 되는 거지?”
“음…그럼 일단 저기 바구니에 있는 재료를 좀 씻어와 주겠어? 그것만 해주면 밥부터 준비할 생각이니까.”
“알았어. 그럼,”
뉴트가 옷을 살짝 걷어 올리며 일어섰다. 바구니에 가득 담겨있는 양파며 당근은 보기보다 무거웠다. 재료를 하나하나 보다 보니 어쩐지 익숙했다. 물론 특별한 재료가 날 만한 환경은 아니었지만, 이런 평범한 재료를 보는 것만으로도 조금 안심이 되었다. 볶음밥을 만들려고 하는 건가. 뉴트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늘상 먹는 음식이라 딱히 특별할 것도 없었다. 조금 다른 것이 있다면 살구 같은 과일이 조금 들어간다는 정도일까. 집에 만들던 음식을 잠시 떠올려 보던 뉴트을 깨끗하게 닦아오면, 그다음부터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주방장만의 영역이었다.
“…….”
“프라이?”
“…….”
뉴트의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는지 주방은 계속 바빴다. 바쁘게 재료를 썰고, 커다란 냄비에 물을 끓이는 것을 보던 뉴트는 재빨리 안쪽으로 들어가 기름을 들고 나왔다. 눈치껏 이것저것 재료를 건네주는 뉴트 덕분에 식사 준비가 수월했다. 그런 뉴트를 바라보는 프라이는 내내 웃고 있었다. 이렇게 일을 하려고 하는데 민호는 그 마음을 몰라준다. 친구를 밀어주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이건 양고기?”
“저번에 먹고 남은 것인데 마저 먹어버리지 뭐.”
“음식이 다 떨어지면 어떻게 하는 거야?”
“장에 가서 사오기도 하고, 짐승이 있다면 잡기도 하지.”
“아.”
당연히 자급자족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의외로 마을과 왕래가 있는 모양이었다. 괜히 넘겨짚은 것 같아서 민망했다. 하긴 찬찬히 생각해보면 자급자족이란 생각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알 수 있었다. 쌀도 양도 기르지 않는 곳에서 뭔가 사 오지 않는다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싶었다. 프라이는 다음번 마을로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말하면서도 손은 여전히 바쁘게 움직였다. 덮어둔 접시 사이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거품을 바라보다 밥을 휙휙 뒤섞었다. 거의 다 됐다. 냄비 한가득 담긴 밥을 바라보던 프라이가 국자로 냄비 가장자리는 탕탕 쳤다. 그래도 먹을 것을 이야기하다 보니 조금씩 질문이 많아졌다.
“혹시 꿩이라던가. 토끼 같은 것도 먹을 수 있을까?”
“응?”
“가죽을 쓸 수 있는 큰 건 잡기 힘들겠지만, 토끼 정도라면 내가…….”
“가죽?”
프라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이 녀석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런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던 뉴트는 눈을 깜박이며 말을 이어갔다.
“늑대나 여우 같은 거. 늑대는 여러 명이 같이 해야 하지만…….”
“그런 맹수나 꿩은 이쪽에 안 살아.”
“…….”
가만히 뉴트의 말을 듣던 프라이가 한마디 거들었다. 아. 하긴 꿩이 이런 황량한 곳에 살 리 없을 텐데. 뉴트는 괜한 말을 한 것 같아 조금 부끄러웠다. 뭐라도 도움이 되어야 할 텐데. 어깨에 내려앉은 부채감이 좀처럼 덜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어서,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구나.”
“근데, 뭐 안 먹어 본건 아니야. 저번에 민호가 장에 나왔다면서 꿩을 몇 마리 사 와서 먹어보긴 했는데…말이지.”
“…….”
“모여 살다 보니 먹을 입은 많고, 꿩고기 양은 적어서 특별한 날이 아니면 먹지 않기로 했어. 저기 저 녀석들은 몸집도 크고 하는 일이 많아서 어지간히 먹어대거든. 하루에 세 번씩 밥하는 사람은 생각도 안 하고 차려놓으면 먹기만 바쁘다니까.”
누구 들으라고 하는 소린지. 프라이는 자꾸 바깥쪽을 향해 대답하곤 했다. 뉴트는 그런 프라이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 낯선 얼굴들이 시선에 툭툭 걸렸다. 몇몇은 손을 흔들기도 했고, 나머지는 대놓고 얼굴을 구긴다. 어딜 가나 이러지. 뉴트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그저 여기에 기거하는 동안 마찰만 없으면 다행이었다.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 했는데 머리는 점점 복잡해졌다.
“…….”
“뉴트?”
“…….”
접시를 든 채 멍하니 정신을 놓은 뉴트를 보던 프라이는 이제 도와줄 것이 없다면서 등을 떠밀었다. 응? 뉴트는 앗 하는 사이 주방 밖으로 밀려났다. 도움이 될 것이 있을까 싶어 여기저기 걸어 다니다 반쯤 탄 나무를 발로 툭툭 차서 모닥불로 집어넣었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불을 잠시 바라보다 곁에 어지럽게 널려있는 장작을 정리했다. 손바닥을 털며 허리를 폈다.
“…….”
그러고 나니 또 할 일이 없어졌다. 저녁 시간이 되려면 아직 멀었고, 시간은 좀처럼 흐르지 않았다. 괜히 모닥불 주위를 뱅글뱅글 돌던 뉴트는 마구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발 할 일 좀 달라고 말했는데, 민호는 어디로 갔는지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았다. 뭐, 뉴트는 들어갈 수 없는 곳에서 회의라도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조심스럽게 마구간 근처로 오자, 뉴트를 알아본 것처럼 누르가 발을 굴렀다.
“쉿.”
괜히 일이 커질까 급히 입술에 손가락을 대며 말을 진정시켰다. 옆에 묶여있는 민호의 말을 가만히 바라보던 뉴트는 마구간 울타리에 조심스럽게 몸을 기댔다. 옆으로 다가온 말이 목을 길게 빼서 팔에 바짝 붙었다. 콧잔등을 손으로 쓸어주던 뉴트는 괜히 갈기를 정리해주며 시간을 보냈다. 길고 촘촘한 속눈썹을 가진 말은 주인에 목소리에 대답하는 것처럼 울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
“네가 살아서.”
“…….”
대답도 못 하는 동물한테 무슨 말을 거나 싶었지만, 뉴트에게 누르는 무엇보다 소중한 녀석이었다. 여전히 뉴트한테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녀석을 바라보는 눈이 까만 녀석은 어둠에 반쯤 먹혀있었다. 새까만 밤처럼 짙은 색 갈기를 가진 녀석은 참 얌전했다.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뜰 뿐이었다.
“넌…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
뉴트는 잠시 고민했다. 분명 호수에 갔었을 때 들은 기억이 있었는데, 좀처럼 생각이 나지 않았다. 기억이 날 듯 말 듯 뉴트의 머리를 괴롭혔다. 뭐였더라. 뉴트는 끙끙거리며 이마를 짚었다. 붉은 고삐를 맨 말을 여전히 탄탄한 다리로 땅을 찼다.
“아…야쿠브.”
“…….”
“민호가 널 야쿠브라 불렀어.”
겨우 이름을 기억해낸 뉴트가 조심스럽게 콧잔등에 손을 가져갔다. 잘못하면 냅다 물릴 수도 있을 텐데, 이런 곳에선 참 겁이 없었다. 물론 야쿠브는 생각보다 얌전했다. 두 필의 말 사이에 서 있던 뉴트는 저 멀리서 누군가 자신을 찾는 소리를 들고 나서야 자리를 떴다. 말 두필이 등 뒤에서 뉴트를 배웅했다. 급하게 모닥불 가까이 걸어가자 이미 저녁 식사가 시작되었다. 프라이는 냉큼 뉴트의 손을 잡아 민호 옆으로 밀어 넣었다. 갑자기 쏠린 무게 중심을 이기지 못한 뉴트는 그대로 끌려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도대체 어디를 그렇게 다녔다 온 거야?”
“아…그게.”
“민호가 여기선 식사시간 지나면 아무것도 못 얻어먹는다고 하지 않았나?”
“…….”
그랬었지. 뉴트는 괜히 한마디 듣고나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저녁 내내 어디에 있었는지, 알지도 못했던 남자는 옆에 앉아서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자기 몫은 단도가 사라져서, 민호가 덜어주지 않으면 빵밖에 먹을 수 없었다. 뉴트는 모른 척 접시를 받아들었다. 하지만 속으론 당장 내 칼을 찾아내라고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밥은 잘도 넘어갔다.
“내일…….”
민호가 입을 열었다. 그 순간 모든 사람의 눈과 귀가 민호에게 향했다.
“마을로 내려갈 거야.”
“아직 벤이 안 왔는데? 그쪽에서 물건을 바꿔 와야 가는 거 아니었어? 대장?”
“생각보다 날짜가 늦어졌어.”
“하지만 바꿀 물건이 있어야 뭘 사오든가 하지. 지금 우리한테 남은 게 뭐가 있는데?”
“그건…….”
민호가 말끝을 흐리자 다들 자연스럽게 옆에 앉아있는 뉴트를 바라보았다. 뉴트는 목에 빵이 턱 걸려서 넘어가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 없었다. 망할 두목이란 놈은 입을 열지 않았고, 다들 제멋대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대놓고 손가락질을 하는 녀석의 얼굴에 냅다 접시를 던져버릴까 싶은 그 순간 옆에서 단단한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럴 줄 알고 달이 차기 전에 도착하지 못하면 바로 마을 쪽으로 오라고 전해뒀어. 아마 우리가 내려가면 시간이 비슷하게 맞을 거야.”
“그럼 그냥 그렇게 만나겠단 소리요?”
“아니지.”
“도대체 생각하는 게 뭔지 말 좀 해봐요. 대장.”
“…….”
오랫동안 같이 지낸 녀석들도 저렇게 답답해하는데, 뉴트는 훨씬 더 했다. 말로만 팔아버리지 않는다 했지, 역시 이 새끼도 도적무리의 두목일 뿐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이를 벅벅 갈던 뉴트는 손목을 덥석 잡는 민호의 손길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제발 언질이라도 주고 행동하면 좋겠는데, 저 녀석은 도통 말이 없었다. 손목을 잡힌 뉴트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민호를 바라보았다.
“뭐야?”
“…….”
“뭔데?”
“너…….”
“…….”
뉴트의 얼굴이 대번에 구겨졌다. 차라리 빨리 팔려간다고 말이라도 해라. 버석하게 마른 얼굴엔 반쯤 포기한 표정이 점점 짙어졌다. 눈치도 없이 잘랑거리는 장신구는 민호의 손끝에 걸려있었다.
“이걸 좀 팔아야겠다.”
“뭐?”
“일단 내려가서 패물을 내다 팔고, 기다리면서 벤을 만나면 될 거야.”
“…….”
“같이 가야 한단 소리지.”
“……”
이번엔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그걸 이렇게 엄숙하게 말해야 했던 걸까. 도통 저 두목님의 머릿속을 알 수 없었다. 다시 밥을 먹으라고 하는 말에 하나둘 자기 접시에 집중하기 시작했지만, 뉴트는 여전히 온몸이 굳은 것처럼 민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기분이 심장 깊은 곳에서 간질간질 올라왔다. 먹는 둥 마는 둥 식사를 마치고 뉴트가 먼저 일어섰다. 발목에 휘적휘적 감기는 옷을 휙 잡아 올린 채 천막에 들어앉았다. 그리고 바로 그 뒤를 민호가 따랐다.
“들어간다.”
“…….”
뉴트는 말이 없었다. 멋쩍은 표정으로 천막 안으로 들어온 민호는 괜히 헛기침하며 자리에 앉았다. 뉴트는 꽁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민호를 한참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저 멀리 숨겨둔 패물을 꺼내 민호 앞으로 밀어줬다. 하지만 민호는 정작 패물에 관심도 없었다.
“이게 필요한 거지?”
“그랬…지.”
“그럼 가져가.”
“…….”
“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는지 모르겠어.”
“같이 마을로 가자는 거지.”
“내가?”
바람 빠지는 소리가 의문에 섞여들었다. 정말 알기 힘든 녀석이었다. 적당히 가까워진 것 같다 싶으면 휙 물러서서 바라보곤 했다. 길게 말해도 어려운 소리를 한두 마디 말로 끝내려 했다. 무슨 목적인지 묻고 싶었지만, 흔들림 없이 단단한 눈동자를 보고 있으니 그럴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래…뭐 두목님이 같이 가셔야 한다는데 내가 가야지.”
“아니, 꼭 그런 건 아니고…….”
“그럼?”
“…….”
“예를 들어 이런 귀중품을 팔아치울 땐, 너보단 내가 낫다는 그런 부류의 이야기를 할 셈이야? 네가 가져다 팔면 대번에 의심을 살 테니까?”
“뭐…그렇다고 하자.”
“이상한데.”
“내일 이야기 해.”
“…….”
먼저 같이 가자고 한 주제에 급하게 대화를 마무리하는 폼이 영 수상했지만, 뉴트는 더 캐묻지 않았다. 언제나 이랬으니 오늘도 그러려나 싶었다.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맨살에 싸늘한 공기가 닿는 것을 느끼며 이불을 조금 더 당겨 덮었다.
내일 아침 일찍 밥 먹자마자 출발할 거야. 그렇게 알아둬. 등을 돌리고 있던 민호가 한마디 툭 던졌다. 뉴트는 반대쪽으로 누운 채 손가락에 낀 반지를 하나하나 만져보다 짧게 대답했다. 그러자 대화가 툭 끊겼다. 서로 할 말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인지 열심히 잠을 청하고 있었다.
하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는 것 같았다. 한참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조용해진 천막 안에선 조용조용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얕게 내뱉는 호흡마저 너무 크게 들리는 곳에 누워있는 둘은 등을 보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아. 뉴트가 눈을 반쯤 뜨며 속으로 끙끙 앓았다. 이유를 알 수 없이 두근두근 뛰는 심장 소리가 천막 안에 울릴 것 같았다. 민호 귀에 이 소리가 들리면 어쩌지. 괜한 걱정이 첩첩 쌓여갔다. 혹시나 맨살이라도 스칠까 한껏 가장자리에 자리 잡은 둘은 여전히 조금 웃긴 자세로 잠을 청했다. 그런 천막 안으로 모른 척 스며들던 하얀 달이 그 모습을 보더니 깔깔 웃었다. 잘게 부서지는 웃음을 한가득 이불 위에 쌓아두곤, 슬그머니 등을 돌려 어둠 한 자락을 깔아주었다.
***
아침부터 퍽 바빴다.
일어나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옷을 주워 입고 밖으로 나오니 해도 제대로 뜨지 않았는데 벌써 떠날 채비가 한창이었다. 뉴트는 채 가시지 않은 새벽안개 사이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도적 무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무슨 일을 도와야 할까 잠시 생각하다 마구간으로 가서 말 등에 안장을 얹었다. 응. 잠시만. 가만있어. 재갈도 살펴보고 고삐도 단단하게 다시 매었다. 바깥을 기웃거리다 말을 끌고 나오니 저 멀리 민호가 보였다.
“응?”
“아…….”
또 이렇게 말이 엇갈린다. 뉴트는 한 손으로 쥐고 있던 두 쌍의 고삐를 들어 보이며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도망가려는 거 아니야. 딱히 이런 말을 하지 않아도 괜찮지만, 굳이 덧붙였다. 민호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을 보고는 곧장 후회했다. 괜히 말했어. 민호는 농담이 통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또 잊어버리고 있었다.
일단 같이 간다고 했으니 미리미리 준비해야 하는 것은 분명한데, 어쩐지 혼자만 서두르는 것 같은 기분에 비어있는 손으로 볼을 꾹꾹 눌렀다. 이래서 할 일을 찾으려고 한 건데. 속으로 툴툴 거리는 것을 듣기라도 했는지 민호가 뉴트한테 다가와서 고삐를 받아들었다.
“뭘 벌써부터 말을 끌고 나와.”
“아니면 네가 나한테 일을 주던가. 딱히 할 일이 없으니까 저기가 묶어놓고 풀이라도 뜯으라 하려고 했지.”
“…….”
“아니면…다시 가져다 묶어둘까?”
“아니…아니다.”
민호는 한마디 툭 던지더니 뉴트의 손에서 받아든 자신의 말을 슬슬 어르며 끌어당겼다. 뉴트는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뒤따라 걷기 시작했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곳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그러자 눈에 한쪽에 간단하게 만들어놓은 간이 마구간이 보였다. 튼튼한 나무를 가로로 올려둔 곳에 고삐를 묶었다.
“여기서 둘이 놀고 있어.”
민호는 누구한테 아는지 모르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뉴트는 또 빈손이 된 채 눈만 깜박거렸다. 뭔가 할 일을 찾아서 하려고 하면 이렇게 금방 끝이 난다. 그러니 마음이 영 편하지 않았다. 뉴트의 멍한 시선 앞에서 이리저리 손을 흔들어 보던 민호가 터벅터덕 걸어왔다.
“가자.”
“어디를?”
“밥을 먹어야 떠나지. 여기서 아무리 빨리 달려도 점심이 지나야 도착할 텐데. 참을 수 있어?”
“아…그렇지.”
“…가자.”
무슨 말을 이렇게 뚝뚝 끊기는지 알 수 없었다. 뉴트는 잠깐 틈이 생긴 김에 결국 찾지 못한 자신의 칼을 달라고 재차 물었다. 하지만 묵묵부답이었다. 답답한 마음을 알지도 못하는지 민호는 연신 빨리 오라며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오늘도 칼이 없으면 저 녀석이 음식을 챙겨줘야 할 텐데. 뉴트는 그것이 영 불만이었다.
“…….”
하지만 또 빈손으로 아침 식사를 맞았다. 저녁처럼 호화롭진 않지만 그렇다고 못 먹을 음식을 올려둔 것도 아니었다. 양젖으로 만든 치즈를 바른 빵을 씹던 뉴트는 또 옆에서 날라주는 음식을 가득 받았다. 민호는 이제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옆으로 접시만 밀어주었다. 배불러. 배부르다고. 뉴트가 또다시 옆구리를 쿡쿡 찌르고 나서야 손이 멈췄다. 그런 모습을 보던 프라이는 모른 척 민호에게 말을 걸었다.
“아침을 먹자마자 출발한다고?”
“그래야지. 벤이 언제 도착할지 모르니까. 일단 먼저 가서 숙소도 잡아놔야 할 것 같고.”
“바쁘네.”
“이번에 많이 사와야 며칠은 더 비축해놓고 먹지.”
“그건 그래.”
“꼭 사와야 하는 것이 있어?”
“잠시만.”
프라이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부엌살림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 여기저기 들쑤시기 시작했다.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와 포대 자루가 털썩털썩 내려앉는 소리가 한참 들리고 나서야 밖으로 나온 녀석은 손가락을 접으며 뭔가를 되뇌고 있었다.
“소금이랑 말린 과일을 좀 사 오는 게 낫지 않겠어?”
“소금?”
“완전히 떨어진 건 아닌데 좀 불안해서. 나머진 항상 부탁하던 대로만 사오면 될 것 같아.”
“…알았어.”
“나가는 김에 다른 애들이 필요한 거 있으면 사오면 되겠네.”
프라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른 녀석들이 눈을 빛내면서 달려들었다. 민호는 하나씩 말하라면서 소리를 질렀지만, 그런 말을 순순히 들을 놈들이 아니었다.
“맞아. 대장. 이쪽에 못이랑 밧줄이 필요하다고.”
“우리도 필요한 거 있어!”
“이쪽도!”
“무기 날 세울 도구도 좀 구해 와야 해. 아니면 칼이 아니라 몽둥이를 들고 다닐 처지라고!”
“하나씩 이야기해! 하나씩!”
소란은 점점 더 번져나갔다.
그런 상황에서 민호 옆에 앉아있던 뉴트는 조용히 들고 있던 접시를 내려놓았다. 쉽게 일어날 수 없는 위치인지라 가만히 상황을 보고 있었다. 이번에 가서 무엇을 사와야 하냐는 주제의 대화가 길어질 기미가 보이자 조금 먼저 식사를 물렸다.
“뉴트?”
“난 준비할 것이 따로 있어서.”
프라이한테 눈빛으로 뭔가를 말한 뉴트는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뒤통수에 달라붙는 온갖 목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뉴트는 곧장 천막으로 향했다.
괜히 개어둔 이불을 만지작거리다 구석에 쪼그리고 앉았다. 작은 천에 돌돌 싸서 모아둔 금붙이를 꺼냈다. 목숨값이라고 생각했던 패물이었다. 아깝다 아니다 할 처지는 아니었다. 게다가 저 많은 물건 중에 가지고 싶은 패물도 없었을 뿐더러,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 아닌 물건이었다. 욕심이 없으니 처분하는 것도 아깝지 않았다.
“그래도 쓸모가 있긴 하네.”
두 손 가득 들어오는 묵직한 무게를 가늠하던 뉴트는 천을 풀었다. 희미하게 흘러들어오는 빛에도 화려하게 번쩍이는 금붙이가 눈에 들어왔다. 제법 비싸 보이는 것만 골라냈다. 보석이 박힌 것. 두꺼운 것. 문양이 화려한 것. 패물에 관심 없는 뉴트가 보기에도 값이 나갈 것으로 보이는 장신구는 금방 한가득 모였다.
뒤늦게 돌아온 민호가 천막 문을 휙 걷어 올렸다. 등 뒤에서 쏟아지는 햇빛에 뉴트가 고개를 휙 돌렸다. 눈을 가늘게 찌푸리며 손으로 그늘을 만들었다. 햇빛에 가려 민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아, 왔어?”
“뭐해?”
“이거 가져다 판다며. 좀 골라내고 있었지.”
뉴트가 두 손 가득 패물을 들어 민호한테 보여줬다. 그런데 정작 금붙이를 내다 팔자고 한 사람은 표정이 영 안 좋았다.
“왜 그래?”
“그렇게 많이 안 팔아도 괜찮아.”
“그럼 난 왜 데려가는데?”
“…….”
“난 나를 데려가는 김에 다 팔아서 재산 비축하나 싶었지.”
“그런 거 아니야.”
분명 하고 싶은 말이 가득한 표정인데, 민호는 또 입을 다물었다. 뉴트도 답답한 마음을 꿀꺽 삼켰다. 민호는 슬쩍 금붙이를 보더니 가장 크고 두꺼운 팔지 두 개를 골라냈다. 둘은 어제 저녁에 하던 말을 똑같이 다시 한 번 반복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거면 돼.”
“이것만?”
“한 번에 많이 팔았다가 추적이라도 당하면 곤란하니까.”
“아…그렇구나.”
곧장 고개를 끄덕인 뉴트는 나머지를 다시 천으로 둘둘 말아서 구석에 밀어놓았다. 생각해보니 민호의 말이 맞았다. 괜히 의심 살 행동을 하는 것은 어리석었다.
“그래서 겨우 이거 두 개 팔자고 날 데려가는 거야?”
“…….”
“아니면 뭐 다른 생각이 있는 거야.”
“그야…….”
“그야?”
“계속 여기에만 있으면 답답하다며. 어차피 도와줄 사람도 필요하니까 같이 가자 이거지.”
“아…얼굴 덜 팔린 사람이 필요했구나.”
“그…아니다. 됐다.”
프라이가 보면 또 한소리를 할 만큼 답답한 대화의 연속이었다. 그냥 그 날이 가장 큰 장이 서는 날이라고 한마디만 하면 될 텐데, 계속 빙빙 도는 대화만 하며 뜬구름만 잡고 있었다. 모른 척 밀어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며 한숨을 푹푹 쉬는 친구들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뭘 밀어준다는 건지는 모르는 눈치였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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