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2월에 나온 톰늍 교류 앤솔로지에 실렸던 원고 중 홈페이지에 공개된 샘플 부분입니다.
해당 샘플은 1권과 2권 분량입니다
‘다 들리는데, 왜 저렇게 소곤거리는 거야.’
삼삼오오 모인 녀석들이 자기를 보며 수군수군 귓속말하는 것을 모두 듣고 있었다. 청각이 예민하다는 것은 딱히 좋지만은 않았다. 익숙하다면 익숙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좋진 않았다. 토마스 옆자리는 아직 비어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접근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차라리, 같은 수인이면 좋을 텐데.
토마스는 속으로 작게 툴툴거렸다. 어차피 인간이랑 짝 같은 거 해봤자, 잔뜩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아줘야 할 뿐이었다. 그건 정말 귀찮고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같은 종이 낫지. 몇 번이나 그렇게 속으로 되뇔 무렵, 옆에서 의자를 빼는 소리가 들렸다.
어쩔 수 없이 쫑긋 서는 귀를 막을 수 없었다. 바닥을 질질 끄는 소리가 들리더니 책상 위에 묵직한 가방이 툭 떨어졌다. 그리곤 의자에 주저앉는 소리까지 확실하게 들렸다. 가방 지퍼 여는 소리. 뭔가 뒤적거리는 소리. 핸드폰 줍는 소리. 온갖 정보가 토마스의 귀에 들려왔다.
토마스는 일어날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다.
열심히 자는 척을 하고 있었는데, 막상 옆에 짝이 왔다고 벌떡 일어나는 것도 조금 이상했다.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모른 척하고 있으면 그나마 친해질 기회를 발로 걷어차는 일이고. 토마스의 머릿속은 내내 복잡했다.
“…….”
결국, 토마스가 막 일어난 척 어색하게 하품을 하며 책상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까만 시선이 토마스의 눈에 닿았다. 위에 이어폰을 꽃은 채 아무 말 하지 않고, 조용히 자신을 보고 있는 모습을 본 토마스는 어쩐지 숨이 턱 막혔다. 살짝 다문 입술은 달싹이지조차 않았다. 여전히 손가락은 핸드폰 위에 올라가 있는데 시선만 슬쩍 올려서 토마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교실 안으로 불어온 바람에 부스스한 금발이 살짝 흔들렸다.
“뭐?”
입술만 움직여 소리 없이 물었다.
“응?”
이미 바짝 긴장한 토마스는 귀가 사정없이 바짝 서 있었다. 당황해서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약간 멍청한 목소리로 말한 거 같았다. 하지만 이어폰을 꽂고 있으니 들리지 않았겠지. 애써 위로했다. 시간은 멈춘 것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말을 할 듯 말듯 애매한 모습에 어쩐지 조바심이 일었다. 눈 깜박임이 점점 빨라지고 나서야 녀석이 귀에서 이어폰을 뺐다.
“무슨 일이야?”
“아니. 네가…그러니까.”
“별 싱거운 녀석을 다 보겠네.”
사실 노래도 듣고 있지 않았나 보다. 어쩐지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토마스는 제 마음과 상관없이 쫑긋거리는 귀를 당장 뽑아버리고 싶었다. 끙끙거리는 신음이 목 안에서 맴돌았다. 뭐라고 말을 붙여야 할까. 토마스의 그런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녀석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난 뉴트.”
“응?”
“뉴트라니까. 어차피 짝인데 통성명하고 지내는 쪽이 낫지 않아?”
“…….”
“아니면 말고.”
“아, 난…토마스야.”
“그래.”
뉴트는 그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은 수인에 관한 호기심이 가득했다. 아니면 귀 한번 만져 봐도 되냐며 지겹게 달라붙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막상 무신경하다고 느낄 만큼 대수롭지 않게 대하는 사람을 만나자 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당황해서 눈을 떼지 못하는 녀석의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던 뉴트는 이상한 사람 보는 표정으로 머리를 슥 쓸어 넘겼다.
“왜 그렇게 쳐다봐.”
“아니 뭐 더 할 말 없어?”
“내가 뭘?”
“그러니까 보통 수인들 보면…….”
“그런 걸 물어봐서 뭘 해. 어차피 별로 다르지도 않은데.”
“…….”
토마스의 표정이 더 알 수 없게 변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뉴트는 혼자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토마스는 홀린 듯 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저기. 또 목에서 쩍쩍 갈라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뉴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잠깐만.”
어물어물 목 안으로 넘어가는 목소리는 그대로 훅 흩어져 버렸다. 뉴트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알아채자마자 토마스는 재빨리 교실을 뛰어나갔다. 그저 조금 특이한 하루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할 수 없었다.
서로 눈을 마주치고, 입을 마주 댄 채 내내 웃었다. 낮게 깔리는 목소리가 부스러져 발밑에 가득 쌓였다. 그리곤 다시 입술을 탐한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내내 활짝 웃는 둘은 꼭 밤에 피어난 꽃과 달 같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보통 사람보다 따뜻한 체온이 품안 가득 안겨올 때마다 뉴트는 그대로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그저 입 좀 맞추고, 등 좀 쓸어주면서 안아줬을 뿐인데. 허리엔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고, 다리는 금방이라도 꺾일 것 같았다.
‘내가 왜 이러지.’
물론 근본적인 의문은 단 한 번도 해소된 적 없지만, 적어도 싫진 않았다. 아쉽게 떨어진 입술 사이로 약간 들뜬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나서야 둘은 천천히 교실을 나섰다. 교실에 둘만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데면데면하게 수업을 받던 둘은 간데없었다.
“……”
“…….”
꼭 이렇게 정신이 돌아오면, 서로를 쳐다보기도 힘들만큼 민망했다. 아까 우리가 뭘 했더라. 같은 생각을 하는 녀석들은 내내 다른 방향을 보면서 복도를 걸었다. 아직 입술 끝에 남아있는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오히려 모른 척 하면 할수록 다시 불꽃이 살아올라왔다.
손을 잡아볼까. 아니면 셔츠 끝을 당겨볼까. 오만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철철 흘러내렸다. 흠. 흠흠. 괜한 헛기침이 엇박자로 흘러나왔다. 옆에서 자꾸 부스럭 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둘은 또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걸 알고 있어도, 얼굴이 활활 타는 것 같아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당장 잡아먹을 듯 입술을 탐하던 녀석은 어디로 갔는지. 꼬리마저 빨갛게 번해버릴 것 같은 녀석은 내내 길고 마른 손을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매끈한 손끝으로 뉴트의 손바닥을 살살 긁어댔다. 이럴 때마다 묘하게 몸 안에서 불꽃이 일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기분이 들대마다 뉴트는 걸음을 멈춰서서 가늘게 한숨을 쉬었다.
‘뭐, 그래도 이런 거 나쁘지 않지.’
뉴트는 지나치게 태평했다. 너무 태평했다.
[중략]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녀석에게 첫 단어를 가르치는 것처럼 천천히 설명을 하려고 했다. 하려고는 했다. 물론 그만큼 인내심이 없는 녀석들이 제대로 설명을 할 린 없었다. 결국 토마스의 멱살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친 녀석들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손으로 연신 부채질을 했다.
“그…그러니까.”
“그래 이 멍청아!”
“…….”
“넌 어떤 삶을 살아왔으면 크리스마스가 학교 쉬고 연구실 가는 날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
또 말이 없어졌다. 연신 귀를 쫑긋거리는 녀석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눈 깜박임이 점점 빨라지더니 결국 벌떡 일어났다. 드디어 결심이 선 모양이라며 다들 어깨를 두드려 주더니, 어서 가보라며 밀어냈다. 주춤주춤 일어난 녀석은 어정쩡한 포즈로 한걸음 물러섰다.
“어서 가봐.”
“…….”
“크리스마스는 사귀는 사람들끼린 둘도 없이 좋은 날이라잖아.”
“…….”
토마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친구를 바라봤다. 대놓고 얼굴을 구기기 시작한 녀석들은 혀를 내빼더니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시늉을 했다. 하여튼 좋은 말을 해줘도 저런 반응이었다.
“너, 기껏 충고 해줬더니 그런 눈으로 보지마라. 우리도 뭐 이런 말 해주는 거 좋아서 그러는 줄 아냐?”
“…….”
“하도 너희 둘이 답답해서 그러는 거니까.”
“…….”
뭐라 뭐라 냅다 쏴붙인 녀석들은 토마스를 복도로 와락 밀어내고 문을 쾅 닫아버렸다. 가서 둘이 해결해 새끼야! 도와주려면 끝까지 도와줄 것이지, 어린 녀석들은 인내심이 부족했다. 볼멘소리가 툭툭 떨어지던 복도는 뚜벅 뚜벅 발소리가 멀어지는가 싶더니 조용해졌다.
“그래서 둘이 잘 되어간대?”
“망했어. 아주.”
“뭐? 그렇게 이야기를 했는데도? 못 알아들어?”
“둘이 똑같이 멍청이가 아닌 이상 도통 이해가 안 되는 일이지. 하여튼 뭐 그리 고상하게 연애를 한다고 저 난리냐.”
“…….”
토마스한테 좋은 시간 보내라고 막 간지러운 것도 참고 말을 해줬었다. 그런데 그렇게 옆구리 찔러주기 전보다 냉랭해진 둘을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누가 들을까봐 소곤거리던 녀석들은 영 짜증이 나는지 발을 쾅쾅 굴렀다. 저 녀석들은 멍청이들이야! 아주! 대차게 성을 내는 녀석은 뒤통수를 감싸 쥐면서 억울한 비명만 질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