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큰둥하게 뒤돌아 누운 민호의 등은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미 커다랗게 몸집을 불린 두 녀석은 안절부절못하며 민호 등 뒤에 앉아있었다. 키는 이미 민호와 비슷해지고, 힘도 제법 겨룰 만큼은 됐다. 하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어린애인지, 민호가 대꾸도 안 하고 돌아 누워있는 이유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형이 왜 이러지. 우리가 뭘 잘못했을까. 똑같이 생긴 머리 위로 한가득 떠오르는 물음표는 점점 많아지더니 천정을 가득 채울 만큼 부풀어 올랐다.
“…….”
“형.”
“왜.”
“우리가 잘못 했어.”
“…뭘 잘못했는데?”
“그러니까…그게…….”
“그것도 모르면서 사과부터 하려고?”
“…….”
민호가 일어나 앉았다. 제법 엄하게 말하자 또 비 맞은 강아지처럼 몸을 웅크린다. 물론 이 웃긴 상황을 보는 사람마다 민호가 잘못했다며 한마디씩 보탰다. 예를 들어 뉴트라던가.
“우리 그래도 할 일도 다 하고 왔고, 그러니까…….”
“그래서?”
“그러니까.”
민호가 싸늘하게 말하면 꼭 이렇게 말끝이 사라진다. 한 두 번 그랬으면 적당히 넘어갈 수도 있을 텐데, 쌍둥이들은 정말 말주변이 없었다. 하긴 민호가 이 정도로 화를 내는 상황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 어지간한 사고를 친다 해도, 머리 한 대 쥐어박거나 잔소리 조금 하고 넘어가곤 했는데, 오늘은 뭐가 그렇게 화가 났는지 단단히 혼을 내주겠다는 태도였다.
“그러니까…….”
“누가 말할래?”
“…….”
또 둘이 눈을 데록데록 굴리면서 눈치를 본다. 똑같이 생긴 짙은 샴페인 색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고민을 툭툭 털어낸다. 뭐라고 하지. 뭐라고 할까. 형한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둘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뻔했다. 어떤 식으로 말해야 민호가 조금이라도 화를 덜 낼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다 컸다면 다 컸고, 어리다면 어린 나이인 녀석들은 언제나 이렇게 고민이 많았다.
“토마스가 할래?”
“…….”
“토미가 할래.”
“…….”
입이 붙었는지. 민호만 보면 다물지 못하고 재잘거리는 입은 꾹 다문 채 눈만 깜박거렸다.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침대에 은은하게 스며드는 햇살이 가득 걸린 속눈썹 두 쌍을 바라보던 민호는 아차 싶었다. 또 이렇게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흐지부지 넘어갈 뻔했다.
“내가 할래.”
토마스가 먼저 나섰다. 민호는 계속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길고 긴 변명과 사실을 주야장천 떠들던 녀석이 먼저 나가떨어졌다. 그런 쌍둥이를 보던 토미는 뭔가 부담스러운 표정으로 민호의 눈에 시선을 맞추며 눈만 깜박거렸다. 나한테 물어보지 마. 형. 그 안타까운 마음의 소리를 듣지 못한 민호는 곧 토미에게도 질문을 던졌다.
둘에겐 정말 죽을 것 같은 시간이었다.
**
“뭐야. 왜 그렇게 한숨을 쉬고 그래.”
“애들이…말을 안 듣잖아.”
“그래. 내가 그 이야기 할 줄 알았다.”
“…….”
뉴트는 내내 한숨을 쉬는 친구의 얼굴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긴히 할 말이 있다고 해서, 무거운 걸음을 뗐는데 고작 한다는 소리가 애들이 말을 안 듣는다는 것 따위였다. 저 녀석은 어떻게 해야 하지. 뉴트도 걱정이 깊었다.
내 친구가 이렇게 팔불출은 아니었는데. 뉴트 기억 속의 민호는 똑 부러지고, 무뚝뚝하지만 자기 할 일은 찾아서 하는 녀석이었다.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어릴 때부터 업어 키우다시피 했던 녀석들에 대한 걱정이 도가 지나쳐서, 지금 약간 일의 경중을 따지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
뉴트는 그런 민호를 보며 빙긋 웃었다. 이미 반 쯤 녹아버린 얼음은 커피를 밍밍하게 만들었고, 컵에 달라붙은 물방울은 뚝뚝 소리를 내며 탁자에 떨어졌다. 지지부진한 대화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뉴트가 먼저 의자에 허리를 기댔다.
“저기…민호.”
“응?”
“넌 걔들이 몇 살 일 거라 생각해?”
“…무슨 소리야?”
갑자기 멍해지는 표정을 보던 뉴트가 또 웃었다. 쌍둥이들이 연구소 일이 끝나자마자 민호한데 연락을 할 때까진 약 한 시간. 그리고 이곳까지 달려오는 덴 삼십 분. 이야기를 마치기엔 적당한 시간이 남아있었다. 여전히 물기 어린 컵 표면만 만지작거리는 민호에게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졌다.
“걔들이 몇 살로 보이느냐고.”
“그야…….”
민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눈을 깜박거리더니 입술을 혀로 슥 쓸었다. 일분. 이분. 결국, 참지 못한 뉴트가 또 먼저 입을 열었다. 이렇게 넷을 보는 다른 사람들은 이러다가 다들 제 명에 못 살 거라며 농담을 해댔다. 사실 오지랖이 넓은 것은 비단 민호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쌍둥이들 벌써 내년이면 성인이야.”
“…….”
“지금은 고등학교 다닐 나이고.”
“…….”
“네가 자꾸 어린애 취급하고 눈높이 교육을 하려고 하니까 걔들도 자꾸 거기에 맞춰서 어리광만 느는 거잖아.”
“…….”
“안 그래?”
“그런가.”
아이고 답답아. 뉴트는 당장 입에서 불을 뿜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물론 처음 만났을 땐, 저 녀석들이 조그마하고 뽀얗고 귀엽고. 이랬던 것 인정한다. 하지만 그때부터 십 년도 넘게 지났는데, 민호의 머릿속엔 언제나 저 두 녀석은 어린애였다. 그것도 열두 살이나 차이가 나는 띠동갑 어린애 말이다. 하긴 퍽 귀여울 나이였다. 민호는 이미 나이를 많이 먹은 어른이었고, 저 둘은 막 살아 올라오는 십 대 아닌가.
하지만. 뉴트는 민호의 머릿속에 박힌 어린애 공식을 깨주지 않으면, 이런 상황이 절대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아무리 나이 차이가 크게 난다 해도 성인을 성인 대접을 해줘야 하는 것 아닐까. 팔자에도 없는 아동학을 공부하게 생긴 뉴트는 눈앞에 보이는 소꿉친구의 얼굴을 보자, 어쩐지 옆구리를 대차게 찔러줘야 할 것 같았다.
“그러니까. 어른을 어른으로 대해주면서 잘 해보라고.”
“…….”
“계속 아이처럼 대하면 너희한테 남는 게 뭐냐.”
“…그러네.”
의외로 쉽게 수긍한다. 물론 금방 바뀔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토미가 워낙 애교가 많은 타입이었고, 둘이 똑같은 얼굴과 표정을 한 채 누군가를 바라보면 다들 흐물흐물 녹아내리곤 했다. 물론 이 똑똑한 녀석들은 그런 걸 알고 영악하게 써먹었다. 대부분 민호에겐 통하지 않았지만. 또 심각해진 민호의 얼굴엔 수심이 떠날 줄을 몰랐다.
“…아.”
뉴트의 시선이 탁자 위 핸드폰으로 옮겨갔다. 웅웅 소리를 내며 진동하는 핸드폰의 발신인은 안 봐도 뻔했다.
“네 새끼한테 전화 왔다.”
“아니라니까.”
“그냥 인정해라. 애 아빠.”
“…….”
자신을 한번 흘겨보며 전화를 받는 것을 보고 나서 뉴트는 커피 컵을 들고 일어섰다. 그럼. 실례. 이 정도로 찔러줬으면 알아서 해야지. 그런 생각이었다. 통화가 길어질 것은 분명하고, 아마 끊을 때쯤 되면 쌍둥이들이 이곳에 들이닥칠 것이 분명했다.
‘…이런 걸 다 알고 있는 나도 큰일 아닌가.’
어쩐지 민호보다 민호의 일정을 더 잘 알아버린 뉴트는 괜히 입맛을 다셨다. 망할 친구 녀석 때문에 여럿 고생한다며 혼잣말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
“그러니까. 우리도 잘할게.”
“…응?”
“연구소 일도 열심히 하고, 프로젝트도 안 빠지고. 형이 원하는 거 이거 맞지?”
“그야…그렇지.”
“그러니까. 다 열심히 할 거라고.”
무슨 일이 생겼는지 둘은 사뭇 진지했다. 물론 손에 들고 있는 초코 드리즐이 가득 뿌려진 스무디는 별로 안 진지해 보였다. 보통 어른은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한다고 커피를 사달라고 했다 된통 혼나고 얌전히 초콜릿 음료를 받았다.
새벽부터 말 등에 바리바리 짐을 싣고 있는 민호 뒤로 긴 그림자가 늘어졌다. 그리곤 한참 동안 바쁘게 움직이는 뒷모습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제 딴엔 새벽부터 어딘가 나가려는 민호를 눈치챘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뉴트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이런 민호에 익숙했다. 어차피 말려도 안 들을 것을 뻔히 안다. 그래서 몇 번 만류하다 곧 포기해버렸다.
사실 민호가 어디 가서 얻어맞거나 심하게 다쳐서 돌아온 위인도 아니었고, 마구 싸움을 걸며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할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다. 조용히 다녀오겠다. 우리 무리에겐 별일 없을 거다. 이런 말만 하면서 꼭 다녀와야 한다고 할 뿐 시원하게 한마디 알려주지 않는 두목을 보던 녀석들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고개만 끄덕였다. 두목이야 언제나 그랬다.
하지만 뉴트는 좀 달랐다. 이곳에 와서 도적 무리랑 사는 것이 제법 익숙해졌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시시콜콜한 사연까지 모두 아는 것은 아니었다. 안 그래도 아직 사이가 서먹한데 같이 한이불 덮고 자던 민호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자 왈칵 호기심이 흘러나왔다. 물론 민호가 보호자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저 녀석 며칠 없다고 신상에 큰일이 나진 않을 것 같았지만, 또 모르는 일이니 확실하게 해두는 편이 좋을 것이다.
“민호.”
“…응?”
말 등에 담요 하나를 단단하게 묶은 녀석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니 낯설었다. 보통 무리의 대장이라는 사람이 새벽같이 움직인다면 큰일이 있는 것이 아닐까. 뉴트는 대충 풍문으로 들은 생활상을 다시 곱씹었다. 게다가 무슨 큰일이 났나 싶어 옷 위에 천 하나만 걸치고 허겁지겁 뛰어나왔는데 꼴이 참 우습게 되었다. 뭐 이런 꼴 안 보고 뒤돌아 서 있으니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쌀쌀한 바람이 불자 뉴트는 조금 추운지 어깨에 걸치고 있던 천을 좀 더 당겨서 온몸을 푹 감쌌다.
“어디 가는 거냐고 물었잖아.”
“할 일이 좀 있어.”
“언제 올 건데?”
“…삼일쯤? 아냐. 나흘? 일주일…….”
“…….”
점점 기간이 길어졌다.
“달이 차기 전엔 돌아올 거야.”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런 새벽에 아무도 모르게 떠나는 거야.”
“항상 하던 일.”
“…일?”
“아니…그러니까.”
민호는 잠시 말이 헛나온 듯 괜히 기침만 했다. 뉴트의 눈이 또 샐쭉하게 길어졌다. 안 그래도 까만 눈을 찌푸리니 길게 속눈썹 그림자가 졌다. 뭔가 숨기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뉴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오래 알고 지낸 사이는 아니지만 민호의 표정은 알기 쉬웠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민호는 계속 다른 방향을 보며 눈만 연신 감았다가 떴다.
“그러니까?”
“…친구를 만나러 가.”
“친구?”
이건 또 처음 듣는 소리였다. 도적 떼 두목한테 친구가 있다는 소리도 믿기 어려웠지만, 하필 친구를 이런 새벽부터 나가서 만난다니. 아무래도 이상했다. 차라리 경비대랑 뒷거래한다고 하는 쪽을 믿겠어. 뉴트는 이제 대놓고 팔짱을 낀 채 민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래. 친구.”
“친구도 계신 양반이 여기서 왜 도적질을 하고 계시나 몰라.”
“세상사가 다 뜻대로 되는 건 아니잖아.”
“…….”
“네가 생각하는 그런 친구 아니야. 나도 그 녀석한테 빚진 게 있고, 그 녀석도 나한테 도움받은 일이 있어서 가끔 찾아가는 거니까.”
“…….”
뉴트의 고개가 한쪽으로 살짝 꺾였다. 그렇게 중요한 친구라. 예상외의 대답이었고, 새로운 모습이었다. 어쩜 그런 일이 있으면서 이렇게 내색도 안 하고 사는지. 참 알기 쉬우면서도 어려운 사람이었다. 물론 따지고 보면 뉴트는 외부인이고, 굴러들어온 돌이었다. 그래도 잘 지내보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무리 사이에 끼기 힘들다는 사실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내가 알아선 안 되는 거야?”
“…응?”
“내가 알면 안 되는 이야기냐고.”
“아니…그러니까.”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나도 이제 여기서 같이 사는 사람인데 너무 속이지만 말아줘.”
“그게…….”
“잘 다녀오고 무사히 돌아오도록 해.”
“…….”
뉴트가 먼저 말을 끊자 민호는 더 대화를 이어갈 수 없었다. 안 그래도 말주변이 없고, 한마디 하는 것도 진중한 사람이라 답답하단 소리를 들을 정도인데,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난 그럼 계속 천막을 써도 되는 거야?”
“물론…물론이지.”
“내가 바쁜 사람을 너무 잡았나. 다녀와. 난 들어갈게.”
푸르스름한 달을 가리는 것 하나 없는 공간엔 부슬부슬 달빛이 내렸다. 뉴트는 바삭바삭 소리가 날 정도로 곱게 부서지는 달빛을 온몸에 맞으며 서 있었다. 화려한 천 사이로 보이는 옷자락이, 그 옷을 잡고 있는 손에서 이어진 얇은 손목까지 하얗게 빛났다. 뭐랄까. 어둠을 먹고 자라는 꽃 같다고 할까. 아니면 밤에만 피는 달맞이꽃 같다고 해야 할까. 짧은 식견으로 표현할 수 없는 모습에 민호는 순간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뉴트를 똑바로 바라보기 어려웠다.
“…왜 안가?”
“아…냐. 가야지. 다녀온다.”
검은 말 위로 훌쩍 올라탄 민호는 괜히 또 기침했다. 그리곤 한 번 더 돌아볼 것처럼 순간 멈췄다. 넓은 어깨 바로 위를 넘겨보던 뉴트는 아주 조금 기대를 했다. 민호가 돌아보지 않을까. 한마디라도 더 해주고 떠나지 않을까.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실망한 뉴트 뒤로 긴 그림자가 늘어졌다. 물론 민호가 돌아보지 못한 것은 갑자기 달아오른 얼굴 때문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뉴트만 보면 심장이 뛰고, 술을 마신 것처럼 얼굴에 열이 올라왔다. 조금만 가까이 가면 이런 모습을 들킬까 싶어 다가가지 못했다. 애써 바쁜 척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삐를 다부지게 잡은 민호의 손등엔 바짝 힘줄이 서 있었다.
“야속한 녀석.”
들어주는 이 없는 밤하늘에 서늘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같이 잠 좀 자고, 밥을 먹는다고 특별한 관계로 발전하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의 마음은 간사하게도, 작은 욕심을 냈다. 그리고 그 욕심이 점점 자랄수록 기분은 널을 뛰었다.
“…돌아오면 뭔가 바뀌어 있을까.”
뉴트의 눈매가 곱게 접혔다. 내일 아침부터 움직이려면 조금이라도 더 자야 했다. 민호가 떠난 것은 떠난 것이고, 뉴트가 할 일은 남아있었다. 뭐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을 품은 채 뉴트는 아무도 없는 천막으로 돌아갔다.
**
“넌 또 표정이 왜 그래?”
“…아냐.”
“뭐가 아냐. 피곤해?”
“그런 거 아냐.”
“이상하네. 과일 좀 먹을래? 가져오라고 할까?”
“괜찮아.”
“역시 이상해.”
다 죽어가는 친구를 보던 토마스는 손으로 턱을 괸 채 연신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결국, 뭐라도 먹을 것을 더 가져오겠다면서 조용히 자리를 떴다. 민호의 한숨은 깊어져만 갔다.
밤새 달리고 또 달려서 도착한 곳은 엄청난 부잣집이었다. 물론 대문으로 당당히 들어가지 않는다. 민호는 말을 여관에 부탁했다. 혹시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한껏 눌러쓴 천이 답답하게 시선을 가렸다. 값을 먼저 치르라는 소리에 돈을 툭툭 던져주곤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넓은 저택을 돌아가면 꼭 한 사람이 넘을 만큼 낮은 담이 있었다. 물론 보통 사람은 넘기 힘든 높이였다. 익숙하게 벽에 있는 작은 틈을 밟고 담장을 넘은 민호는 조용히 정원으로 숨어들었다. 밤이 되면 춥고 해가 뜨면 더운 도적 근거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부를 자랑하는 곳이었다. 넓은 땅은 잘 개간해서 수로를 만들었다. 그 넓은 수로엔 깨끗한 물이 흘렀다. 수로 주변엔 화려한 꽃과 나무가 잔뜩 심겨있었다. 방금 물을 준 것인지 물방울을 머금은 꽃이 탐스럽게 웃고 있었다.
“여긴 와도 와도 적응이 안 된다니까.”
“…민호?”
“…….”
“민호? 왔어?”
인기척이 들리자 재빠르게 그늘 뒤로 몸을 숨긴 민호는 조심스럽게 상황을 지켜보았다. 사박. 사박. 떨어진 잎을 밟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장 민호가 숨어있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한 민호의 얼굴이 일순간 확 풀어졌다.
“토마스.”
“어차피 여긴 아무도 안 온다니까.”
“그래도 멀뚱히 서 있다가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떡해.”
“들어가자. 이쯤 되면 올 거로 생각했어.”
“그래.”
한눈에 봐도 엄청나게 비싸 보이는 옷을 입은 녀석은 스스럼없이 민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민호는 그새 웃고 있었다. 당장 민호를 별채로 들여다 앉힌 토마스는 과자를 가져온다 차를 내온다 하며 부산을 떨었다. 물론 아침부터 준비해둔 것을 들고 내오는 것에 불과했지만, 친구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을 해주고 싶어 했다. 민호는 자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차와 다과를 바라보다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문득 심각해졌다. 민호의 표정을 알아챈 토마스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민호에게 몇 번씩이나 도적질 정리하고 이곳에 들어와 살라고 하던 녀석이었다. 이번에도 대충 경비대와 마찰이 생긴 것이 아닐까 넘겨짚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응? 내가 뭐.”
“표정이 당장 죽을 것 같은데? 인상도 잔뜩 쓰고. 나한테 말해봐.”
“뭘…….”
“혹시 알아. 괜찮은 해결 방법이 있을지.”
“…….”
“어서. 친구 좋다는 게 뭐야.”
토마스는 생글생글 웃으며 민호를 바라보았다. 허물없는 녀석은 가금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았다. 민호는 그런 눈빛을 두 번이나 보고나니 버틸 자신이 없었다. 뉴트는 간신히 도망치듯 피했지만, 눈앞에 앉아있는 토마스는 그럴 수 없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혹시…그…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치자.”
“…….”
토마스는 저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잡았다. 저 목석 같은 녀석한테서 저런 소리가 나오다니. 민호의 부하들은 이 사실을 알까. 너무 신이 나서 견딜 수 없었다.
“응. 응. 말해봐.”
“뭘…해줘야 좋아할까?”
“겨우 그거야?”
“그게 아니야. 이것저것 사다 줘 봤는데…또 남한테 빼앗아 온 거 아니냐. 난 필요 없다 하면서 다시 돌려주란 말만 하잖아.”
그야. 네가 도적이니까. 토마스는 혀끝에 굴러 나오는 말을 꿀꺽 삼켰다. 이런 말 했다가 민호가 다시는 여기에 안 올 수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어서 더 이야기해 보라는 녀석의 재촉에 민호는 다 포기한 듯 하고 싶었던 말을 줄줄 늘어놓았다.
“…….”
“그러니까. 뭐…어쩌지.”
“어쩌긴…네 진심만 말해도 그것보단 나을 것 같은데.”
“난 항상 진심이야.”
“…….”
토마스도 그렇게 남녀 관계에 밝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위로 많은 누나와 형이 있었고, 자연스레 보고자란 것이 있었다. 하지만 토마스와 민호는 상황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럼…음.”
“…….”
“꽃이라도 가져다주면?”
“꽃?”
“우리 정원에서 괜찮은 거 꺾어가. 설마 꽃을 빼앗아왔다고 생각하진 않을 거 아냐.”
“…….”
“이번에 핀 꽃이 크고 예쁘더라.”
토마스는 가끔 이렇게 때려 맞출 때가 있었다.
**
“그러니까…이게 뭐라고?”
“…….”
민호는 얼굴이 시뻘게져서 들지도 못했다. 결과적으로 좋은 선물인 것은 확실했지만, 방법이 나빴다. 아무리 싱싱하고 예쁜 꽃이라도 며칠 동안 꺾은 채 가져 오면 시들기 마련이었다. 밤을 새워 돌아온 민호 손에는 다 죽어가는 꽃이 들려있었다. 이걸 내다 버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가지라고 내밀기도 못해서 안절부절못하며 천막 주위를 뱅뱅 돌면 민호는 결국 인기척에 잠이 깬 뉴트한테 붙들려 안으로 들어왔다.
“…그게.”
“선물이야?”
“…….”
뉴트가 웃었다. 민호는 또 숨이 막혀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예쁘네.”
아무 말 없이 다 시든 꽃을 받아간 뉴트는 이미 끝이 갈색으로 변하기 시작한 꽃잎을 손가락으로 살살 쓸어내렸다. 그러더니 팔찌로 만들어뒀던 색실을 풀어내 꽃을 한데 묶었다. 이미 시들기 시작한 것을 살릴 순 없지만 예쁘게 말릴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고마워.”
“…뭐?”
“선물 고맙다고.”
그 한마디에 천막 안으로 서늘한 달빛이 스며들었다. 소리 없이 타오르던 램프에서 순식간에 불꽃이 사라졌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천막 안엔 여전히 두 사람이 있었다.
그래도 마음을 붙일 친구가 생기자 밤에 깨지도 않고, 아침마다 엄마를 찾으면서 투정을 부리지도 않았다. 대신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반쯤 강요로 인해 트리사랑 몇 번 어색하게 붙어 다니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껌 딱지처럼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뭐야.”
“…….”
“뭔데. 자꾸 따라다녀. 네가 하는 연구는 이쪽이 아니잖아.”
“…….”
“입이 붙었어?”
“아니.”
“그러니까 왜 자꾸 따라다니냐고.”
새침한 얼굴로 돌아보자, 잔뜩 낯설어하는 얼굴이 한가득 들어왔다. 어쩐지 어제보다 점이 더 많아진 거 같네. 트리사는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까만 점이 온 얼굴에 콕콕 박힌 녀석은 트리사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할 만큼 수줍어하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늘부터 같은 연구를 하라고 했어.”
“…뭐?”
“총장님이 그러셨다고.”
“…….”
“그러니까.”
“알았어.”
“…응?”
“무슨 말 하는지 알았다고. 그러면 당당히 옆으로 와서 걸어. 왜 자꾸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는 거야.”
“…….”
트리사가 이리 오라는 듯 휙휙 손짓했다.
토마스는 살짝 가운을 구겨 잡으며 타박타박 걸어왔다. 연구소에서 아이를 못 먹이는 것도 아닌데 유난히 성장이 더뎠다. 토마스보다 머리가 반절은 더 큰 트리사는 어쩐지 누나가 된 것 같았다. 아이는 잠깐 우월감을 가지면 더 어린 녀석을 보살피려 한다. 그건 트리사도 마찬가지였다. 가자. 다부지게 내민 손을 순순히 잡은 토마스가 작게 웃었다. 토마스는 내내 트리사가 하자는 대로 함께 걸어 다녔다.
물론 처음부터 토마스가 연구를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트리사가 그랬던 것처럼 토마스는 온갖 실험을 받아야 했다. 아무리 서로가 낯설다 해도 워낙 똑똑하고 외로웠던 아이들인지라 금방 친해졌다. 잔뜩 얼어있던 토마스가 하나둘 실험을 돕기 시작하면서 연구실엔 어느 정도 활기가 돌았다. 머리가 좋은 녀석은 하나를 알려주면 셋을 알았다. 아직 완전히 투입된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아이에게 기대하는 수준을 맞추고 있었다.
“토마스.”
“…네?”
“이리 오렴.”
“…….”
눈치 빠른 녀석은 대번에 연구실 분위기가 바뀐 것을 알아챘다. 그리곤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려 했다. 그런 모습을 보던 트리사가 한 발 빨리 토마스를 잡아주었다.
“다녀와. 토마스. 괜찮을 거야.”
“…….”
“나도 했던 걸.”
“정말?”
“정말. 별일 아닐 거야.”
“그럼…다녀올게.”
얇은 팔뚝에서 쭉쭉 뽑혀 나오는 피를 빤히 바라보던 녀석은 가늘게 눈을 감은 채 떨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버티는 이유는 트리사도 했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욱신거리는 팔뚝에 솜을 문지르던 아이는 잔뜩 지친 표정이었다.
“이제 충분하지 않아요?”
“응?”
“많이 한 것 같은데…….”
“저쪽으로 가서 하나만 더 하면 끝이란다.”
“…….”
“왜 그러니? 토마스?”
“아니에요.”
잔뜩 지쳐 돌아온 녀석을 기다리고 있던 작은 여자아이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잡고 식당으로 데려가서 늦은 밥을 함께 먹었다. 입맛이 없는지 깨작거리는 토마스를 보던 트리사는 가만히 뭔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자기 몫의 식판 위에 있던 작은 사탕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토마스에게 조용히 밀어줬다.
“트리사.”
“오늘 힘들었으니까 내 것도 먹어.”
“…….”
“그냥 그것도 연구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편할 거야.”
“그런가.”
“물론.”
“그렇구나.”
토마스는 아직 완전히 위키드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지만, 트리사의 말이라면 어쩐지 믿음이 갔다. 열심히 그릇을 비우는 토마스를 저 멀리 복도에서 바라보던 잰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또래랑 붙여주니 생각보다 신경 쓸 일이 적어져 편했지만, 그렇다고 저 녀석들을 마음대로 풀어놓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트리사가 생각보다 토마스랑 잘 놀아주네요.”
“누구 탓이겠습니까.”
“총장님이 특히 토마스를 아끼시니 잘 좀 지켜봐 줘요. 잰슨.”
“그렇게 귀하고 소중하면 직접 하라고 하시지?”
“아이들 담당은 잰슨이니까요.”
“…….”
“그럼.”
메리는 토마스의 혈액을 분석한 차트를 잔뜩 든 채 가볍게 인사를 하고 복도를 걸어갔다. 분명 저 여자가 엿 먹이려고 꾸민 일이 분명했다. 잰슨은 들고 있는 서류를 그대로 내동댕이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위키드는 월급이 후한대신 꼭 그만큼 사람을 들들 볶았다.
“재수 없는 여자.”
잰슨의 날 선 한마디가 텅 빈 복도에 싸늘하게 울려 퍼졌다.
***
물론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트리사와 토마스가 친하게 지내고, 며칠 지나지 않아 제대로 사건이 한번 터졌다. 그것도 하필 잰슨이 잠시 둘에게 눈을 뗀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한참 동안 얌전히 지내서 다들 어느 정도 별일이 생기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풀어져 있던 탓도 있었다.
“야!”
앙칼지게 소리 지른 트리사가 작은 손으로 토마스의 머리채를 덥석 잡았다. 찍소리 한마디 하지 못하고 질질 끌려간 녀석은 손길을 벗어날 수 없는지 버둥거리기만 했다.
“아…왜! 왜!”
“너 진짜!”
“왜!”
나름 억울함을 가득 담아 맞받아쳤지만, 트리사한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더 콱 틀어쥐는 매서운 손길에 죽는 소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머리가 빠질 것 같은 고통 속에서 토마스는 억울했다. 그저 옛날 생각이 나서 같이 놀자는 생각이었다. 옆집에 살던 붉은 머리 여자 아이의 머리를 몇 번 잡아당겨 봤던 기억이 있었다. 토마스 나잇대의 남자아이들에겐 그것은 일종의 관심 표현이었고, 못된 장난일 뿐이었다.
보통 그런 식으로 괴롭히면 여자애들은 울었고, 몇몇은 똑같이 해주겠다며 쫓아오기도 했다. 그러면 한바탕 달리기를 하다 멀리 달아나면 그만이었다. 그저 그렇게 놀던 기억이 있어서 자기도 모르게 트리사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을 뿐이었다.
물론 결과는 이 모양이었다.
번개같이 토마스의 머리채를 붙잡은 트리사는 절대 놓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다부지게 다물었다. 그리곤 다시 한 번 손으로 콱 틀어잡았다. 아. 아아아아. 아야! 죽는소리가 났다. 보통 비슷한 나이의 아이 중 여자애가 훨씬 성장이 빨랐다. 게다가 남자아이 평균보다 성장이 더딘 토마스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
“너 다시 그럴 거야?”
“아…아파. 아!”
“다시 그럴 거냐고!”
“아프다고! 아파!”
“대답 하지 않으면 안 놔 줄 거야.”
“안 해! 안 해! 진짜 안 해!”
“정말이야?”
“응…으응 정말! 진짜!”
토마스는 이젠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트리사는 바짝 마른 토마스를 질질 끌고 걷던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머리채를 잡은 손을 툭 놔버렸다. 그러자 토마스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얼마나 세게 잡아당겼는지 머리가 죄다 빠진 것 같았다. 얼얼한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잔뜩 억울한 표정으로 트리사를 올려다봤다.
“뭐.”
“…….”
“한 번만 더 머리카락 잡아당겨 봐.”
“…….”
“그땐 이대로 끌고 가서 화장실로 들어가 버린다?”
“…….”
“그리고 잰슨도 메리도 못 들어오게 문 잠가버릴 거야.”
“…….”
제법 무서운 협박이었다. 다신 그러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낸 트리사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토마스는 어쩐지 시간이 지날수록 서러워졌다. 그저 좀 친하게 지내자고 한 일인데, 친해지긴커녕 자기 머리카락만 죄 뜯긴 채 혼만 났다.
“…….”
“왜?”
“난 그냥…….”
왈칵 눈물부터 흘러나왔다. 울면 지는 일이라고 몇 번이나 생각했는데, 억울함이 이성을 앞질러 가버렸다. 훌쩍이기 시작하는 녀석을 빤히 보던 트리사는 또 마음이 약해져 앞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눈물에 푹 잠긴 눈동자를 이리저리 돌아보았다.
“뭘 잘했다고 울어.”
“…….”
“그러니까 여자애한텐 그렇게 하는 거 아냐.”
“…….”
“비록 지금 여기엔 네 또래 여자애가 나뿐이지만, 나중에 누군가 올 수도 있잖아. 그때 또 그래 봐.”
“…….”
누나처럼 뭐라 하는 트리사의 입에도 어느새 축축한 습기가 들어찼다. 눈앞에서 한 명이 울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전염된다. 둘이 싸운다는 소리를 전해 듣고 잰슨과 대원들이 헐레벌떡 도착했을 땐, 이미 복도가 온통 울음바다가 되어있었다. 바닥에 완전히 주저앉아서 엉엉 울고 있는 둘은 누가 먼저 싸움을 걸었는지조차 불분명했다.
“…….”
“어쩔까요? 잰슨?”
“일단…각자 방으로…좀.”
“네.”
뒤따라온 대원들이 아이들을 일으켰다. 얼마나 울었는지 옷소매부터 티셔츠까지 죄다 축축하게 변한 아이들은 쉰 목소리로 끅끅 울음을 삼켰다. 하나씩 아이를 둘러업은 대원이 뒤로 물러섰다. 잰슨은 이 상황을 뭐라고 윗전에다 보고해야 할지 아찔했다. 그리고 한동안 아프지 않았던 머리가 또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덤으로 얼마나 서러웠는지 밤이 되자 둘 다 미열이 돌았다. 급히 응급실로 데려가 해열제를 놓았다.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 나서야 색색거리며 잠이 든 아이들의 눈은 퉁퉁 부어있었다. 잰슨은 그날 밥 먹는 시간도 반납한 채 페이지에게 불려가서 이번 일에 관해 설명을 해야 했다. 벼락같은 시간이 지나고 돌아왔을 땐 이미 저녁 생각이 싹 달아난 상태였다.
“내가 애새끼들 뒷바라지 하다 죽지.”
신경질적으로 서류철을 책상에 집어 던진 잰슨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참 얌전하다가 저렇게 사고를 치기 시작하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내일부터는 시선이 닿는 곳에 저 녀석들을 둬야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다. 사고를 하루라도 치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 녀석들이 분명하니, 애초에 원인이 될 만한 것을 치워놓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Instance : No. 1-1
그날 이후 토마스는 묘하게 트리사의 말에 복종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다들 짐작하고 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잰슨은 생각보다 훨씬 얌전해진 토마스를 보며 조금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토마스!”
하지만 그런 만족도 잠시, 저 멀리 식당 한 구석에서 들리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잰슨은 절로 미간이 구겨졌다. 또 시작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애새끼들이 상전이라며 투덜거리면 남자는 이미 이런 일쯤은 익숙한 듯 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먹어.”
“…….”
“먹어. 토마스.”
토마스는 밥투정하고 있었다. 물론 딱히 가리는 음식이나 알러지가 있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지간하면 먹기 싫은 반찬 하나쯤 있기 마련이었다. 물론 위키드에서 제공되는 모든 음식은 연구원들의 건강을 생각해서 나오는 식단이었다. 하지만 아이 입맛으로 보기엔 한없이 맛없는 반찬일 뿐이었다.
“…….”
트리사의 눈치를 살살 보면서 브로콜리는 옆으로 빼놓던 토마스의 포크가 식판을 긁었다. 아. 그 날카로운 소리에 트리사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한쪽에 곱게 모여 있는 브로콜리를 보았다.
“토마스.”
“…….”
“먹어. 전부.”
“…싫어.”
이길 수 없다는 걸 알면서 괜한 반항을 했다. 물론 트리사가 빤히 쳐다보자 곧장 수그러들긴 했지만.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일을 하는 표정으로 포크를 들었다. 억지로 브로콜리를 쑤셔 넣은 토마스는 금방이라고 죽을 것 같았다. 불룩하게 튀어나온 볼은 움직일 줄을 몰랐다.
“다…머어따.”
“…….”
“배…부어. 그만…머으래.”
잔뜩 발음이 엉킨 소리를 내뱉으며 식판을 들고 일어서려는 토마스를 다시 잡아 앉힌 트리사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입안에 있는 거 삼켜.”
“…….”
“어서.”
“…….”
결국, 입안에 가득 물고 있던 브로콜리를 삼키고 난 뒤에야 식당을 떠날 수 있었다. 잰슨은 하루 소람의 총량이 이 정도만 되면 그다지 삶이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뭐 가끔 싸울 수도 있는 거지.’
하나부터 열까지 뒤치다꺼리를 해줘야 하는 것을 트리사가 해준다면야. 그동안 할 일도 할 수 있고. 이 악랄한 삶 속에 간신히 긍정적인 면을 찾아낸 남자는 잔뜩 툴툴거리며 반대쪽으로 사라지는 토마스의 동그란 뒤통수를 오래오래 쳐다보았다.
잰슨은 이 상황이 꿈이길 바라고 있었다. 정말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야근에 잔뜩 찌든 사내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젯밤에 또 일이 밀어닥치는 바람에 과하게 늦게 자긴 했지만, 그렇다고 나쁜 꿈을 꾼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따져보라면 평소보다 조금 적게 잠을 잔 축이었지만, 몸 상태가 그리 나쁘진 않았다. 위에서 내려오는 일거리를 생각하면 오늘도 편히 잠을 자긴 글렀다고 생각했다. 위키드에서 지내는 하루는 항상 비슷하기에 다른 일이 생길만한 구간이 없었다.
“도대체…이게 무슨 일이지.”
하지만 당장 자신의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어른의 시선으로 본다면 눈에 걸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주변에서 소곤거리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떨떠름한 표정으로 애써 입가를 씰룩이며 고개를 숙였다.
“안녕?”
“…….”
“안…녕…?”
“…….”
어른한테 또박또박 반말을 하는 맹랑한 꼬마 녀석의 높은 목소리가 귓가에 쿡 와서 박혔다. 하지만 원하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바로 시무룩해져선 주변 눈치를 보았다.
‘이 녀석은 뭐지.’
갑자기 굴러들어온 도토리 같은 녀석의 이름조차 알 수 없었다. 어른들이 가득한 공간에서 잔뜩 겁을 집어먹은 채 동그란 머리통을 꾸벅꾸벅 숙이던 녀석은 곧 눈앞에 서 있는 잰슨을 다시 쳐다보았다.
“아저씨는 누구죠?”
“…….”
여전히 맹랑했다. 게다가 한참 나이가 많은 남자를 바라보는 얼굴은 젖살이 통통했고, 눈가엔 길고 짙은 속눈썹이 보송보송했다. 그 속눈썹 아래로 보이는 짙은 샴페인 색 눈은 호기심을 가득 담은 채 조심스럽게 반짝였다. 어디서 굴러들어왔는지는 모르지만, 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아이와 시답지 않게 놀아주는 덴 한계가 있었다. 잰슨은 오늘도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고, 지금 이 아이를 보며 여러 생각을 하는 동안 귀한 시간이 줄줄 새고 있었다. 이러다간 점심시간마저 반납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잰슨은 약간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메리를 불렀다.
“총장님이 어제 말씀 하지 않으시던가요? 오늘부터 잰슨 쪽에 소속된 아이라고 하시던데요.”
“…뭐?”
“마지막 격리 구역에서 이 애 엄마가 하도 부탁하기에 일단 데리고 나온 아이인데, 어제 검사를 해보니 면역 인이라 하더군요.”
“…….”
“게다가 아주 똑똑하고 영특하다는 검사 결과가 나와서 총장님이 직접 그 아이를 연구원으로 키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뭐가 그래서죠? 그 임무를 잰슨에게 하달하고 이 아이는 이쪽에서 보살펴 주라고 하셨다니까요.”
“아니 이 연구소에 흘러넘치는 게 인력인데 이걸 내가 왜 해야 하는 거야! 난 지금 서류 더미로도 충분히 힘든 사람이야.”
“뭐…총장님 생각을 어떻게 알까요.”
메리는 다짜고짜 대화를 끊어버렸다. 그러더니 은근슬쩍 조그만 녀석의 등을 밀어서 잰슨의 사무실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여기서 절대 안 된다고 한 소리를 헸었어야 했다. 아차 하는 순간 사무실 안으로 들어온 꼬맹이는 잰슨 바로 앞에 멀뚱히 서 있었고, 메리는 웃는 얼굴로 자리를 피했다. 저 여자 내가 언젠간 가만두지 않을 거야. 잰슨은 자신에게 떨어진 짐 덩어리를 훑어보며 이를 벅벅 갈았다.
“…….”
“…….”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의미 없는 시간이 지나갔다. 아차 싶었다. 안 그래도 일이 너무 많아서 미칠 지경인데, 이렇게 시간을 허비했으니 오늘도 야근해야 했다. 그것은 불 보듯 뻔 한 일이었다. 아이고. 미치겠네. 남자는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러고 나서야 둘 사이에 걸쳐지는 시선의 높이가 비슷해졌다.
“뭐냐?”
“…….”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볼이 퉁퉁 부어오른 녀석은 내내 억울한 표정으로 잰슨을 바라보았다. 약간 겁을 집어먹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뭔가 공포에 질려있는 것 같기도 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아주 조금은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너나 나나. 저 어린 녀석은 부모랑 떨어져서 위키드에 들어온 것이 분명했고, 자신은 이곳에 묶여서 밤낮없는 업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물론 딱히 어린아이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를 봤을 때 느끼는 안타까움이 팍팍한 마음에 조금 스며든 상태였다.
‘내가 피곤해서 그런가.’
갑자기 너무 촉촉한 생각을 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잰슨은 눈썹을 움찔거리며 입가를 파르르 떨었다. 그리곤 눈을 몇 번 굴리고 나서야 간신히 진정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커다란 의자를 질질 끌고 와서 위로 열심히 기어 올라간 녀석은 작은 주먹을 꼭 쥔 채 무릎에 올려놓고 있었다. 제법 다부진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어린애는 어린애였다.
“그래. 네 이름이 뭐냐?”
“…….”
“난 아주 바쁜 사람이야. 너랑 이렇게 놀아줄 시간이 없어.”
“…토마스.”
“토마스?”
“…응.”
“그래. 토마스. 넌 이곳에서 뭘 하고 싶으냐?”
잰슨은 딱히 많은 생각을 하지 않고 툭 내던졌다. 어차피 애들이 하는 생각은 거기서 거기였고, 적당히 똑똑한 녀석이라면 알아서 갈 길이 정해지는 것이 이치였다.
“…몰라요.”
“그렇겠지.”
“하지만…….”
“하지만?”
“엄마가…엄마를 잊지 말라고 했어요.”
“…….”
“아빠도.”
“…….”
아이는 뜻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어른스러운 것인지. 아니면 애써 어른인 척하는 건지. 잰슨은 이곳에 들어온 사람 중에 정상인이 없다고 생각하는 축이었지만, 저렇게 작은 아이가 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아주 조금 연민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래. 토마스.”
“…….”
“우리 잘 지내보도록 하자.”
항상 업무에 시달리는 중년 남자의 입에서 나온 소리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친절한 말이었다. 여전히 비죽비죽 입술을 내밀고 있던 녀석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잰슨을 바라보았다.
“잘…지내요?”
“그래. 우린 이제 팀이잖아.”
“…….”
“그리고 팀끼린 서로 믿어야 하고, 말이야.”
“그렇…구나.”
떨떠름한 대답이 따라오는 건 아마도 이곳이 아직 낯설어서라 생각했다. 잰슨은 곧 바깥으로 호출했다. 토마스에게 잘 곳을 마련해 주라는 말을 남긴 채 가볍게 아이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여기까지만 정말 잘못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아이는 소독약 냄새가 가득한 이곳이 너무 낯설었고, 그 위키드에 속해있는 어른들은 어린애를 다루는 방법이 익숙지 못했을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그렇게 막연히 생각했다. 작은 동물처럼 이불로 온몸을 감싸고 웅크려 있는 아이는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았다. 잠깐 저렇게 놔두도록 해요. 그저 빨리 적응하길 빌 수밖에 없었다.
아이는 이곳을 떠나면 정말 갈 곳이 없었다.
***
“토마스는?”
“막 잠이 들었어요.”
“못 살겠군. 상전도 아니고 이렇게 손이 많이 가서야.”
“그건…어린 아이잖아요. 잰슨.”
“하이고. 알아서 모셔야지.”
“잰슨!”
뒤에서 쿡 박히는 메리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그리곤 대충 걸터앉아서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는 시늉을 했다. 메리는 그런 잰슨을 보고 있으면서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물론 그렇게 행동하는 것과 달리 잰슨은 날이 갈수록 한숨이 늘어갔다. 그러니까 첫날은 오히려 얌전한 축이었다. 낯선 곳이라 그런지 이불을 돌돌 감은 채 얌전히 침대에 처박혀 있던 녀석은 간 곳이 없었다. 슬슬 정신이 들고, 자기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아이는 며칠째 밥도 안 먹고 밥에 엄마를 찾으며 울기 시작했다.
외톨이로 떨어진 아이는 아무도 믿지 못하고 한껏 예민해졌다. 잠을 자야 할 시간에는 잠을 자야 하는데. 자꾸 무서운 꿈을 꿨다며, 울어 재끼는 아이를 달래느라 위키드 내부가 발칵 뒤집혔었다. 엄마를 찾으면서 얼마나 서럽게 우는지 기절이라도 할까 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알 수 없었다.
“…….”
여성 연구원들이 앞다투어 아이를 안아 올려서 달래봤지만, 쉽게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예민한 데다 고집이 얼마나 센지. 어지간한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간신히 메리의 품에서 조금 울음이 잦아들자 다들 잔뜩 피곤한 표정으로 하나둘 주저앉았다.
“토마스? 괜찮니?”
“…….”
“토마스.”
“…….”
메리는 조심스럽게 아이의 볼을 쓰다듬었다. 퉁퉁 부은 눈으로 메리를 쳐다보던 토마스는 또 코를 훌쩍이며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렇게 몇 번이나 울듯 말 듯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던 녀석이 간신히 잠을 청했다. 완전히 잠든 것을 확인한 메리가 아이를 침대에 눕혔다. 따뜻한 품이 떨어져 나가야 약하게 칭얼거리던 아이는 옆에 있는 조잡하고 덩치 큰 인형을 안겨주자 곧 잠잠해졌다. 하루에 꼭 한 번씩 이렇게 잠투정을 해대니 안 그래도 바쁜 연구실이 더 바빠지곤 했다.
“아주 그냥 상전이라니까.”
“잰슨.”
“아니면 뭐 친구라도 만들어 주던가.”
“친구라.”
“…응?”
잰슨은 어쩐지 말을 잘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메리가 그다지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에 별생각 없이 넘겨버렸다. 토마스는 내내 연구소에 적응을 하지 못해 바짝바짝 말라갔다. 그러던 중 누군가 친구를 시켜주자며 다른 쪽 연구실에 있던 여자아이를 데리고 왔다. 또랑또랑해 보이는 눈을 한 여자아이를 한참 보던 잰슨은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데리고 온 연구원에게 질문을 툭 던졌다
“…뭐야?”
“저번에 잰슨이 건의한 아이들 친구 만들어주기에 대해 총장님이 깊은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모르고 계셨나요?”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예? 미스터 잰슨이 직접 건의했다고 하시면서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아. 잰슨은 그날 메리에게 했던 말이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언젠간 그 여자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잰슨은 이를 벅벅 갈았다. 못 들은 척 하면서 뒤로는 자기를 엿 먹이려 했던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미 총장의 승인이 난 일인데, 잰슨이 거부할 순 없었다.
“너 이름이 뭐냐?”
“트리사.”
“트리사? 그래 좋아. 여긴 일 하느라 바쁘니까, 저기 널 데려온 놈 따라서 친구 해줄 애를 찾아보아라.”
“…….”
“어서.”
정말 시간이 없는 것이 맞긴 했다. 잰슨은 급하게 밀린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고, 트리사는 새침한 얼굴로 서 있더니 어느 순간 사라졌다. 곧 옆방이 시끌시끌한 것을 보아 둘이 만난 것 같았다. 어쩐지 뒷목이 뻣뻣하게 당기는 것 같았다. 이러다 제 명에 못 살지. 애써 무시하려고 했던 소리가 점점 커지자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남자는 방문을 부서지라 열었다. 그리곤 복도를 척척 걸어가 옆방으로 들어갔다.
도롱이 벌레처럼 꼭꼭 숨어있던 녀석은 그래도 나이가 비슷한 또래를 보더니 조금 경계를 풀었다. 침대 가장자리에 앉은 채 트리사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여자아이는 성장이 더 빠르다. 토마스의 시선보다 불쑥 올라온 파란 눈은 느리게 깜박거리며 점이 콕콕 박힌 얼굴을 관찰하고 있었다.
“토마스?”
“…응.”
“난 트리사야.”
“응.”
여전히 뭘 그렇게 서먹해 하는지. 잰슨은 두 녀석의 소꿉놀음을 한참 바라보다 다시 돌아섰다. 며칠만 저렇게 놔두면 알아서 좋게 해결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