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호뉴트/민늍] 신부이야기 009
+) NOTICE
신부이야기에서 모티브를 얻은 중앙아시아+무언가 동양 판타지 aU입니다
민호는 도적단 두목 / 뉴트는 팔려가던 중
기본적인 의상에 대한 묘사는 촐님(@go00chol)의 그림을 보고 연성했습니다
촐님(@go00chol), 로케님(@goroke11)과 같이 풀던 썰을 기반으로 합니다
적당한 망상과 설정 붕괴가 언제나 함께 합니다 ㅇㅅㅇ)9
write. 환월
궁금함이나 문의는 댓글 방명록 트위터 등 편한 곳으로 부탁드립니다 >_<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일정부분 연재 후 1월 민늍온에 신간으로 나옵니다 샘플은 지우지 않아요
벤이 돌아왔을 땐 이미 해가 지고도 남은 시간이었다. 얼마나 많은 짐을 가지고 오는지 좀처럼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결국, 과일에 간식으로 사 온 튀긴 빵까지 야무지게 먹어치웠다. 그 후 다들 기다리다 지쳐 하나둘 방에 누운 채 잠이 들락 말락 하는 그 순간 방문이 덜컥 열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 아, 벤! 왔구나.”
“이렇게 먼 줄 정말 몰랐네. 이번엔 유난히 오래 걸렸어,”
“어서 와서 앉아.”
“일손이 많이 왔네?”
“이럴 줄 알고 불렀지.”
잔뜩 피곤한 얼굴로 방에 발을 디디려던 벤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언제나 비슷하고 익숙한 얼굴 사이로 유난히 낯선 머리통이 보였다. 적어도 벤이 떠나기 전엔 저런 사람이 무리에 들어온 적이 없었다.
‘음? 내가 헛 걸 보고 있나.’
벤은 눈을 몇 번이나 감았다가 떴다. 하지만 이런 도적 소굴에 어울리지 않는 예쁜 옷을 입은 사람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새초롬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곧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민호를 바라봤다. 두목 이게 무슨 일이냐고. 민호는 말이 없었다. 주변에 굴러다니는 딱딱한 과일 껍질을 이리저리 치운 벤이 엉덩이를 붙이기가 무섭게 다른 녀석들이 슬금슬금 모여들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아니…그것보다.”
“너 기다리다가 굶어 죽을 뻔했잖아.”
“내 말 좀 들어봐.”
“오다가 어디로 샌 거 아냐? 여자라도 만나고 왔냐?”
“야!”
결국, 벌컥 성을 낸다. 정작 늦게 온 당사자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자기 좋을 대로 말을 내던지는 녀석들을 당해낼 수 없었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질문 세례에 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민호가 딱히 저지하지 않는 걸 보니 즐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 대답을 다 해주면 조용해질까. 결국, 제일 귀찮고 정석적인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다른 녀석보다 키가 큰 녀석이 방바닥에 대충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하나하나 이야기해. 뭐가 그렇게 궁금한 거야.”
“그거야…….”
“언제나 가던 길을 다녀온 건데 …….”
“이번 수확은 어때?”
“생각보다 짐이 많아서 한 번에 오래 움직일 수가 없어서. 그렇다고 우리가 말을 갈아가면서 달려올 수도 있는 처지도 아니고. 어차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서 넉넉하게 잡고 왔지 뭐.”
“그래서 결국은 편하게 쉬면서 왔다 이거잖아?”
“이 자식이. 매일 그 먼 길을 다녀오는 건 생각하지도 않고.”
벤이 왈칵 성을 냈다. 제일 앞서서 농담을 던지는 녀석의 멱살을 잡고 주먹을 얼러보았다. 물론 이것은 늘 하던 환영인사와 같았다. 멱살을 잡힌 놈도 주먹을 든 놈도 결국 껄껄 웃으면서 방바닥에 늘어졌다.
“일단 물이나 줘봐. 목말라 죽겠다.”
대접 가득 물을 떠다 주자 숨도 쉬지 않고 연거푸 들이켰다. 아, 살겠다. 커다란 대접 안에 담긴 물을 완전히 비운 벤이 소매 끝으로 입을 닦았다. 수건도 받아서 얼굴을 씻고, 축축해진 앞머리를 대충 쓸어 올렸다. 그런 모습을 보던 놈들은 더 애가 닳았다. 궁금해. 말 좀 해봐. 물론 벤이 팔아온 돈에 대해 궁금한 것은 넉넉할수록 민호가 주전부리를 사서 돌아갈 확률이 높다는 시답잖은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두목이란 자가 다 큰 사내놈들이 징징거린다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꿩을 좀 사자. 아니면 돼지고기를 좀 사자. 프라이한테 맛있는 것 좀 해달라고 합시다. 대장. 하고 싶은 말도 참 많았다. 몸집이 큰 데다 활동량이 많은 녀석은 항상 배가 고팠다. 하지만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돈을 모수 쓸 수 없었다.
항상 비축분이 있어야 했고, 자연스럽게 먹고 싶은 것을 모두 쓸어 담지 못했다. 가끔 못 이기는 척 고기를 조금 더 사긴 했지만, 주전부리나 단 과자 같은 것은 이렇게 따라 나와야 간신히 맛볼 수 있었다. 그렇다 보니 기를 쓰고 따라 나오는 녀석들은 항상 정해져 있었다. 그런 것을 모를 민호가 아니라 몇 번이나 엉덩이를 걷어차이기도 했다.
“혹시 알아 돈이 많이 됐으면, 민호가 맛있는 걸 살지도 모르지.”
“프라이한테 특별식 좀 해달라고 합시다.”
“조용히 해라.”
“매일 같은 요리 먹는 것도 질린다구요. 대 …아니 민호.”
“들을 말부터 듣고 이야기들 해.”
한마디 하면 다들 우우 볼멘소리한다. 겨우겨우 진정을 시켜놓자 벤이 이것저것 담아 온 돈주머니를 와르르 쏟았다. 보통 때라면 이렇게 조심성 없이 돈을 다룬다고 한 소리 들었을 것이 뻔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라도 시선을 돌리는 것이 나았다. 민호는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남몰래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미간에 굵게 진 주름이 언제나 펴질까. 뉴트는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펴주고 싶을 정도로 걱정됐다.
“이렇게 자신 있게 쏟는 걸 보니 꽤 짭짤했던 모양이지?”
“이번에 넘겨받은 비단 덕택이지.”
“그래? 그거 잘된 일이네.”
심드렁하게 반응하는 민호를 보며 뭔가 한마디 더 하고 싶은지 벤은 손을 벌려서 과장된 손짓을 했다.
“정말 괜찮았다니까. 비단은 좀 상하긴 했지만, 겉면뿐이었어. 그래서 나쁘지 않은 가격으로 넘겼고, 금붙이는 예전에 하던 것처럼 보석이랑 금을 분리해서 각자 처분했어.”
“잘했네.”
“내가 이런 건 전문이지.”
한걸음 물러서서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뉴트는 영 낯선 소리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석류 까먹으면서 같이 어울려서 한마디씩 나누는 동안 녀석들은 눈에 띄게 친절해졌다. 물론 민호에게 덮어놓고 우호적인 놈들만 데리고 나온 것도 있지만, 생각만큼 그렇게 험악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래서 조금은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저런 전문적인 이야기가 나오니까 도대체 이야기에 낄 수 없었다.
‘뭔가 기분이 좀 이상한데.’
뉴트는 조금 더 뚱한 표정으로. 다리를 당겨 앉았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왁자지껄한 목소리에 묻혔지만, 벤은 가만히 뉴트를 바라보았다. 물론 그런 시선이 가는 곳에는 항상 민호가 함께 따라왔다. 이게 무슨 일이지. 잠깐 본거지를 떠나있던 사이 참 희한한 일이 생긴 것 같았다.
“민호가 오늘따라 좀 이상한 거 같다? 안 그래?”
“벤도 그렇게 느껴? 아, 하긴 벤은…….”
“음?”
“그러니까 말이야.”
“도대체 뜸은 왜 이렇게 들여?”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
뉴트를 힐끗거리던 녀석들이 눈이 반짝해져선 멋대로 떠들었다. 그러자 금방 왁자지껄한 소리가 점점 퍼져나갔다. 나가서 술이라도 좀 받아와. 민호가 적당히 돈을 쓸어 담아서 누군가에게 쥐여줬다. 혹시나 머뭇거리면 그 말을 취소할까 싶어 두 명이 급하게 돈을 받아 방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남은 돈으로 주전부리를 사 오겠다는 소리만 냉큼 남겨둔 채 말이다. 민호는 또 한마디 하려다 그만두었다.
“무슨 일이야? 저 녀석이 이렇게 순순히 돈을 내줄리 없는데. 아, 그래. 이 이야기 하려던 것이 아니었지. 그건 그렇고…….”
“벤 그게 말이야!”
“그래. 마음대로 해라.”
“민호가 벤이 없는 사이에 도적질하러 나가서 다른 건 아무것도 못 가져왔는데 색시를 주워왔어.”
“색시는 무슨!”
그 말을 듣자마자 민호가 펄쩍 뛰었다. 그리고 뒤에 죽은 듯 앉아있던 뉴트도 소리 없는 비명을 질러댔다. 그리고 그 둘의 모습을 보며 이것 보라며 손가락질하던 놈들은 뭐가 그렇게 신났는지 깔깔 웃으면서 멍청한 표정을 한 벤을 붙잡고 늘어졌다.
“벤 너도 웃기지? 웃기다고 해봐!”
“…… .”
그런 꼴을 보고 있던 남자는 마냥 머리가 어지러웠다. 민호는 왜 저렇게 한마디도 안 하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는지 알 수 없는 데다, 색시는 또 뭔가. 저기 예쁜 옷 입고 조용히 앉아있는 사람은 우리 쪽과 무슨 관계인가. 물어볼 것이 너무나 많은데, 머리가 어지러워서 정리가 하나도 되지 않았다. 떠들고 싶은 사람은 제멋대로 떠들고, 눈을 피하고 싶은 녀석은 내내 땅만 바라봤다. 뭐라고 해야 하나. 그렇게 지지부진한 상황 속에 술을 사러 갔던 녀석들이 돌아왔다.
와장창 문짝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술병이 옮겨지고 주전부리까지 들어왔다. 준 돈을 아주 탈탈 털어서 쓴 놈은 너무나 뿌듯한 표정이었다. 보통 때라면 돈 헤프게 쓴다고 잔뜩 잔소리를 들었을 텐데, 오늘은 그럴 정신도 없어 보였다. 방 안을 가득 채울 것 같은 술병에 술잔. 꼬치에 꿰어서 구운 고기에 소시지. 튀긴 빵까지 아까 저녁을 먹었다고 믿어지지 않았다. 이걸 누가 다 먹으라고. 오히려 벤이 타박을 한다. 너희 저녁 안 먹었잖아. 짐짓 뿌듯한 표정으로 벤 앞에 음식을 이것저것 밀어줬다.
“어차피 너 밥도 안 먹었잖아. 어차피 안주로 먹는 김에 같이 요기하라고 넉넉히 샀지.”
“밥 먹은 거 아니었어?”
“우리? 먹었지?”
“내가 이상한 거야. 아니면 너희가 살짝 맛이 간 거냐. 내가 자리를 비운 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말 모르겠다.”
혀를 끌끌 차던 벤은 그래도 싫지 않은 지 좀 더 당겨 앉았다. 민호 이리와. 다들 술 한 잔씩 하자. 벤의 말에 모른 척 술잔을 받아든 민호는 뉴트를 끌어다가 앉혔다. 아. 벤의 입이 간질간질했다. 딱히 소문을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너무 궁금했다.
“그래서 누구야?”
“…응?”
“이 정도 되면 정식으로 소개를 해줘야 하는 거 아냐? 지금 보니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진 몰라도 같이 생활할 사람 같은데.”
“…그렇지.”
“그럼 소개 좀 해봐.”
벤이 음식을 먹기도 전에 술을 훌떡 털어 넣었다. 빈속에 이러지 말라고 프라이한테 한두 번 잔소리를 들은 것은 아닌데, 벤은 꼭 그랬다. 그리곤 빵을 질겅질겅 씹었다. 빵이 목으로 넘어갈 때까지 민호는 입을 열지 않았다. 어휴. 망부석도 이런 망부석이 따로 있을까. 슬슬 민호에게 제대로 된 답을 듣기 힘들 것 같은지, 슬그머니 뉴트에게 화살을 돌렸다.
“그쪽 말이야.”
“…….”
“어차피 같이 살게 된 모양인데.”
“…….”
“이렇게 된 거 통성명이나 하고 살죠? 저 녀석은 도대체 소개를 해줄 생각을 하질 않으니.”
“…아. 그러니까.”
“내가 떠나기 전엔 못 보던 얼굴이니 최근에 온 거 같은데, 이런 험한 곳까지 어떻게 왔지?”
“저 녀석이 데려왔지.”
뉴트는 씩 웃으며 손가락으로 슬쩍 민호를 가르쳤다. 어. 그렇겠지. 어쩐지 당연한 것을 물은 것 같았다. 하긴 이리도 깊은 곳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올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싶었다. 물론 도적단 초창기엔 오갈 곳 없는 고아를 모아서 키우기도 했지만, 옛날 일이었다. 민호가 두목 자리에 오르기도 전, 겨우 말을 타고 뛰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럼 도대체 저 대장님의 생각은 무엇인가. 안 그래도 피곤한데 머리가 더 어지러웠다.
“정말? 민호가?”
“그래.”
“그러니까 저번 일 나가서 널 데려왔다고?”
“…그렇다니까. 왜 사람 말을 못 믿어? 어디서 헛정보를 듣고 왔는진 몰라도, 전혀 쓸모없는 무리를 덮쳤었어.”
“뭐, 우리라고 내내 잘할 수만은 없지.”
“덕분에 살았어. 그렇게 끌려가느니 이쪽이 훨씬 마음이 편하니까. 아직 밥값은 못하고 있지만.”
가만가만 말하는 것을 듣던 벤은 대충 전후 사정을 알 것 같았다. 제대로 된 패물이 거의 없는 무리. 하지만 눈에 띄게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사람. 돈 많은 늙은이의 취미 중 하나였다. 물론 벤도 그렇게 장식품처럼 사느니 차라리 이쪽이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이곳에 모여 있는 놈 중 저렇게 한마디 보탤만한 인생 곡절 없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마음속에 하나씩 과거를 품고 사는 곳에선 오히려 평범한 축에 가까웠다. 그래서 다들 어울려서 살 수 있었다. 여기까지 듣고 나니 어쩐지 꽤 친한 사이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름은?”
“뉴트.”
“그래. 뉴트. 처음이지만 잘 부탁한다.”
“뭐, 나도. 밥값이나 하게 도와줘.”
누구 들으라고 하는 소린지 뉴트는 계속 비슷한 말을 했다. 그럴 때마다 민호의 눈썹이 눈에 띄게 꿈틀거렸다.
“…그런데 말이야.”
사실 정말 궁금한 것은 따로 있었다. 하지만 이걸 물어봐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벤은 사려 깊고 눈치가 빨랐지만, 좀처럼 이번 일에 관해선 판단이 제대로 서지 않았다. 괜히 딴청을 하는 민호도 이상하고, 주위에 붙어서 잔뜩 눈을 빛내는 놈들도 어리기만 했다.
“그 옷은 도대체.”
“…아, 이건.”
뉴트가 두 손을 들어서 축 늘어지는 소매와 화려한 무늬의 옷을 바라보았다. 그런 취급이 싫다고 말했으면서, 왜 굳이 계속 입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벤이 운을 떼자마자 민호가 벌떡 일어났다. 아, 민호. 또 자리를 피한다. 이미 술이 거나하게 오른 녀석들이 손가락질하며 웃어 재꼈다. 저러다 돌아가면 홀딱 벗겨진 채 나무에 거꾸로 매달리지. 이래서야 도적단 두목의 권위가 제대로 살까 싶었다.
“딱히 내가 가져온 것이 없으니 입을 옷이 없기도 하고, 누가 벗기고 싶지 않은 것 같아서,”
“…….”
“…난 분명 벗겠다고 했었어.”
“…….”
“정말이야.”
눈치가 빠른 벤이면 알아들었으리라. 그리곤 방에서 나가려다 그대로 굳은 민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콱콱 찍었다. 그 행동 하나만으로 민호의 얼굴은 또 터질 것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 뉴트는 이제 한결 풀어진 모습으로 술잔에 손을 댔다. 애초에 적응기를 가지느라 얌전히 있었던 것뿐인지. 벤은 다 안다는 표정으로 뉴트가 들고 있는 잔에 술을 가득 부어줬다.
말들에게 건초를 가져다줬는지 보고 오겠다고 나간 민호는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얼굴이 식어야 돌아올 건가 보지. 벤은 낄낄 웃으면서 농담을 던졌다. 하긴 다른 어떤 동료보다 오래 알던 사이라 대충 눈빛만 봐도, 뭘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있었다. 특히 지금처럼 당황해서 표정을 숨기지 못할 땐 더 쉬웠다. 한참 시끄럽던 방 안이 좀 가라앉을 때 쯤 돌아온 민호는 앉자마자 술병을 잡아챘다.
이미 무리와 적당히 안면을 튼 뉴트는 얼굴이 술기운에 달아오른 채 살살 웃었다. 와르르 웃던 놈들은 서로서로 술잔을 부딪치면서 요란했다. 누가 악기 좀 가져와 보라는 소리에 질색하던 벤이 손사래를 쳤다. 민호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또 한 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질투라던가 그런 감정은 전혀 아니었지만, 심장이 저릿하게 아파졌다. 항상 무표정에 가깝게 돌아다니던 모습만 보다 이렇게 풀어진 얼굴을 보니 또 신선한 충격이었다. 뉴트가 술병을 들어 민호에게 내밀었다. 졸지에 술잔을 두 개나 받은 민호는 결국 남들보다 두 배는 더 마시고서야 자리를 뜰 수 있었다
***
얼마나 먹었는지 술이 약한 사람부터 하나둘 방바닥에 쓰러졌다.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녀석을 질질 끌어다가 위에 이불을 덮어주고, 또 마시기 시작한다. 그러다 한 명 더. 다시 두 명 더. 결국,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민호가 술잔을 놓칠 뻔해도 술자리는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아.”
민호가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땐, 벤만 반쯤 졸린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앉아서 자는 놈. 기대서 잠을 자는 놈. 아니면 대자로 누워있는 녀석. 하나같이 제멋대로였다. 그릇은 이미 싹싹 비워진 채 뼈만 가득했다. 발만 움직여서 여기저기 채이는 술병을 보니 답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잘 곳을 마련하기 위해 술에 푹 절은 몸으로 둘이 병을 밖으로 내놨다.
“…우리 이래도 되나.”
“뭐 어때.”
“내일이나 모레 정도 일을 마무리 짓도 돌아가자.”
“되겠어?”
“네가 가지고 온 돈이 있으니까 그걸로 먼저 쌀이나 필요한 음식 재료를 먼저 산 다음, 내가 귀금속을 몇 개 팔아올게.”
“여기선 거래 안 한다는 주의였잖아?”
“뉴트가 있어. 한 번 정도는 괜찮아.”
“얼씨구.”
일로 데려왔다는 것을 애써 표시하려는 것 같아 벤은 크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알아온 친구는 어디 갔는지, 지금은 허둥지둥 얼굴에 걸린 표정을 감추는 것이 전부였다. 누가 보면 절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 민호. 너 진짜 골 때린다.”
“내…가 뭘!”
“내가 널 오래 알긴 했는데, 이렇게 동요하는 건 처음인 거 같아.”
“…….”
“잘해봐. 뭐 이러다 좋으면 좋은 거지.”
“너도!”
“난 네 편이야. 놀리는 거 아니라니까.”
“그만두자.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야 내일 움직이지.”
“오랜만에 장에 와서 좋았는데 말이야.”
“어차피 머물지도 못하는데, 괜히 좋아해 봐야 아쉬움만 남아.”
“…….”
“왜 또 그런 눈으로 봐.”
민호가 우뚝 멈춰 섰다.
“이제 내가 아는 친구인 거 같아서.”
“…….”
벤은 술이 들어가면 가끔 이렇게 실없는 것 같으면서도 뼈있는 말을 즐겼다. 마지막까지 버티던 둘이 잠자리에 들자 커다란 방엔 각자 다른 높이의 숨소리가 엉켜 들었다. 뉴트는 술자리 중반부터 구석에서 옷을 덮고 자고 있었다. 서로서로 적당히 몸을 웅크린 채 깨지도 않고 잘도 잤다. 이불을 걷어차면, 그 옆에 있는 녀석이 냉큼 끌고 갔다. 잠꼬대가 간간이 들리더니, 누군가 코를 골았다. 그렇게 밤이 점점 깊어갔다.
달이 떴다가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면 울컥 어둠이 더 몰려왔다. 그러다 희뿌연 새벽안개가 퍼질 때쯤 누군가 머리를 붙잡고 조용히 일어났다. 부스럭부스럭 한참 소리가 들리더니 방문이 열렸다. 간신히 밖으로 나온 검은 인영은 새벽 공기를 들이마시더니 이리저리 뻣뻣하게 굳은 몸을 풀었다. 그리곤 괜히 뒤로 돌아가 마구간에 있는 말을 본다.
뒤이어 나온 녀석은 두리번거리다 익숙하게 뒤로 돌아갔다. 그렇게 벤과 민호가 이른 아침을 맞는 동안에도, 방은 내내 한밤중이었다. 뉴트는 생각보다 술을 많이 먹었는지 머리쓰개를 이불처럼 알뜰하게 덮은 채 깊은 잠을 자고 있었다. 다른 녀석들도 사정은 거의 마찬가지였다. 누군가 깨우지 않으면 해가 나무 위에 걸릴 때까지 저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깨우려고?”
“그럼?”
“너무 이르지 않아? 좀 더 자게 놔둬.”
“…….”
“너도 제일 늦게 잤으면, 좀 더 눈을 붙이던가.”
“너야말로. 안 힘들어?”
“그다지?”
내가 좀 튼튼하잖아. 벤이 허리를 젖히며 웃었다. 둘은 아침잠이 없는 건지. 아니면 이렇게 사는 것이 익숙해진 것일까. 몇 년 동안 당연한 것처럼 서로 합을 맞춰 살아가던 둘은 오늘 아침도 같았다. 그렇게 둘이 기둥에 기대앉은 채 잠깐 졸고 나니 해가 완전히 떠올랐다. 아, 졸았네. 손바닥으로 꾹꾹 눈가를 누르던 민호가 큰 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그리곤 바싹 마른 입맛을 다시는가 싶더니 곧 방으로 들어갔다. 아직도 방바닥에 눌어붙어 있는 사람들을 깨우기 시작했다.
“일어나.”
“다들 일어나. 많이 잤잖아.”
“…대장. 조금만 더.”
“늦게 일어나면 밥 없다.”
“아…아아. 대장. 민호. 조금만…아악.”
죽는소리를 하다가 하나둘 일어나 앉았다. 얼굴이 가관도 아니었다. 먹고 픽픽 쓰러져 잔 턱에 붓고 벌겋게 달아오른 뺨 중간중간엔 자국이 선명했다. 눈곱을 뗀다. 배꼽을 다 내놓고 자던 옷을 추스른다. 아주 난리가 났다. 민호는 그 꼴을 바라보며 팔짱을 낀 채 문에 삐뚜름하게 기대있었다. 벤은 슬쩍 넘겨다보곤 밥이나 사오겠다면서 한발 물러섰다.
“……,”
소란에 벌떡 일어난 뉴트는 사방팔방 새집을 지은 거리를 급하게 손으로 쓸어내렸다. 늦잠을 자고 싶어서 잔 것도 아닌데, 괜히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다들 아직 술이 덜 깬 표정으로 밥상을 받았다. 졸려. 졸리다. 하나같이 투덜거림이 입에 붙었다. 바싹 마른입 안이 까끌까끌해서 빵 한쪽도 제대로 안 넘어가는 것을 물로 억지로 넘겼다. 천천히 오래오래 씹고 있으니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아, 잘 먹었다.”
“무슨 맛으로 먹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나네.”
“그렇게 말한 거 치곤 우리 다 먹은 건 알고 있어?”
“그냥 해본 소리지.”
“그럼.”
민호가 먼저 일어섰다. 자연스럽게 민호를 향하는 눈빛엔 벌써 일을 하려고 하냐는 원망이 가득했다. 저 녀석들이. 민호는 괜히 놀려줄까 싶었다. 하지만 빨리 일을 끝내야 이 꼴을 더 안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너희들은 쉬고 있어. 돌아오면 바로 짐 실을 준비 해야 하니까.”
“오, 정말?”
“그래. 뉴트는 좀 따라오고.”
“두목이 드디어?”
“그게 아니고 금붙이 좀 팔려고 한다. 다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 괜히 돌아다니다가 사고 치지 말고.”
“알았슴다. 여기 얌전히 있겠습니다.”
배를 두드리던 놈들이 또 늘어졌다. 벤이 같이 따라나서려 일어섰지만, 민호가 더 쉬라며 만류했다. 벤은 약간 묘한 표정을 짓더니 알았다가 다시 자리를 펴고 앉았다. 그 모습을 보고이던 뉴트는 손에 금붙이를 싼 천 뭉치를 들고 일어섰다.
“다녀올게.”
“뉴트. 늦게 와도 괜찮아!”
“…뭐?”
“두목이 따로 할 말이 있을 거 아냐. 밥도 먹어도 되는 거고. 아, 그러니까 두목. 우리 돈이나 주고 가쇼.”
“이놈들이 말이 많다.”
결국, 또 엉덩이를 걷어차였다. 아이고 나 죽는다. 여기 사람 쳐요! 몸을 말면서 고래고래 소리치는 녀석들을 보던 민호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왜 저렇게 엄살이 심한지. 쯧쯧 벤은 대놓고 혀를 찼지만, 굳이 나서지 않았다. 이런 구경거리를 보는 것도 꽤 재미있었다.
“다녀온다. 벤. 알아서 좀 부탁해.”
“한두 번이야? 다녀와.”
“…그래.”
“적당히 쉬다가 배고프면 다들 밥 찾아 먹는 걸.”
벤은 깍지를 끼고 뒤로 쭉 누웠다. 푹신한 쿠션에 몸을 반쯤 기댄 채 친구에게 손을 흔들었다. 다녀와. 다녀와. 뜻하지 않은 환대를 받으며 방을 나선 둘은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
“…….”
한참 말이 없다가 겨우 민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가자.”
“그래.”
“…….”
또 말이 뚝 끊겼다. 저벅저벅 걸어가는 발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리다 어느 순간 엇갈렸다. 민호가 앞서면 멈춰서 기다리고, 뉴트가 앞서나가려면 슬쩍 옷을 잡아당겼다. 그렇게 서로 어색한 듯 친해 보이는 둘은 열심히 걸음을 옮겼다. 숙소에서 꽤 떨어져 있는 장터에 도착해서도 가장 깊숙한 곳을 찾아가야 했다. 길 복판에 서서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던 민호가 한쪽을 보며 뉴트를 불렀다. 둘의 그림자가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
“어디까지 가야 하는 거야?”
“조금 더 가야 해.”
“여긴 왜 이렇게 땅이…….”
뉴트가 잔뜩 미간을 찌푸리며 치렁치렁한 옷을 걷었다. 안 그래도 불편한데, 바닥이 왜 이렇게 진창인지.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신발에 진흙이 쩍쩍 달라붙었다. 신발을 털고 옷을 추스르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악.”
뉴트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아슬아슬하게 잘 피해가나 싶었는데 결국 진흙탕을 되게 밟아버렸다. 신발이 반쯤 잠기면서 사방으로 튄 흙이 옷에 다닥다닥 묻었다. 뉴트는 황망한 표정으로 두 손으로 꼭 잡고 있던 옷자락을 놔버렸다.
“왜 그래?”
“옷이…여기 왜 이렇게…….‘
“…물을 뿌렸나.”
“됐어. 가서 정리하면 되는 거지.”
“…….”
민호 표정이 어두워진다. 분명 표정을 보아하니 옷에 신경 쓰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뉴트는 그런 민호의 등을 꾹꾹 밀었다. 여기서 떠밀지 않으면 망부석처럼 붙어있을 것이 분명하다. 민호는 모르는 척 걸음을 옮겼다.
“일단 빨리할 일 하고 들어가자.”
“하지만…….”
“괜찮아. 뭐 이 정도야.”
“…….”
오히려 뉴트의 옷차림 하나하나에 과할 정도로 신경 쓰는 사람은 민호였다. 정작 당사자는 어차피 버린 옷이라고 생각했는지 옷자락이 멋대로 펄럭이게 둔 채 걸음을 옮겼다. 오히려 이런 편이 더 편하다 해야 할까. 뉴트는 옷을 버리는 것을 별로 개의치 않았다.
“팔 거 빨리 팔고, 필요한 것도 사고.”
“…….”
“그런 다음 돌아가자.”
“더 있어도 괜찮은데.”
“있어서 뭐해.”
뉴트가 웃었다. 민호는 내내 신경 쓰고 있었지만, 저러는데 당해낼 수 없었다. 최대한 마른 땅만 골라가며 발을 디뎠다. 땅을 살피랴, 가는 방향 보랴. 민호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겨우겨우 도착한 곳은 어쩐지 수상한 기분이 들 정도로 작고 어두운 가게였다.
“…여기야?”
“자랑스럽게 팔 물건은 아니니까.”
“하긴. 그렇지.”
“같이 들어가?”
“그래야지.”
민호는 뉴트랑 우연히 마주친 사람처럼 행동하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에 앉아있던 남자는 민호를 알아보았지만, 바로 뭔가 익숙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몰래 용돈이라도 만들려고 하는 세상모르는 녀석을 대하는 것 같았다. 뉴트는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잠자코 소매 속에 숨겨온 금붙이를 내밀었다. 냉큼 가져가서 살펴보기 시작하는 주인 옆에서 한마디씩 거들던 민호가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내가 다른 곳을 소개시켜 줄 수 있는데, 여기로 데려온 겁니다. 이건 알아주셔야 한다고 봅니다. 주인장?”
“이럴 줄 알았지. 저 사람한테 뭐 수고비라도 받기로 했나?”
“그야 얼마나 잘 쳐주냐 에 달렸지. 한눈에 봐도 꽤 좋은 물건이라 이쪽으로 데려왔는데.”
“…흠.”
“싫으면 다른 곳으로 가지.”
“아냐. 아닐세.”
“그럼 빨리 계산해 줘요. 저 사람도 빨리 들어가야 한다잖아.”
“으이그.”
주인은 입맛을 쩝쩝 다시며 궤짝을 열었다. 손에 들고 있던 금붙이는 반대쪽 자루에 던져 넣더니, 곧장 돈주머니를 꺼냈다. 몇 번이나 돈을 넣었다 뺐다는 반복 하더니 결심한 듯 동전을 좀 더 집어넣었다. 그리곤 묵직한 주머니를 뉴트한테 덥석 안겨주었다.
“처음이기도 하고, 저 양반이 하도 보채서 많이 준 줄 아쇼.”
“…감…사합니다.”
“하긴 이렇게라도 돈을 만들어 놔야 무슨 일이 나도 살 만하지. 일 다 봤으면 어서 가보시게.”
“…….”
“다음에도 좋은 일 있으면 물어다 줄게. 영감.”
“다시는 오지 말아라!”
“또 저러지.”
민호가 껄껄 웃으며 입구를 가려둔 가죽을 휙 열어젖혔다. 길게 햇살이 이어지는 곳을 따라 걸었다. 종종걸음으로 민호 뒤를 따르던 뉴트는 살짝 뒤돌아서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가자. 뭐해요.”
“…아, 응. 네.”
“…….”
“어서.”
반말이 슬슬 흘러나오기 시작하니, 저 눈치 빠른 주인이 뭐라고 한마디 더 붙일 것 같았다. 민호는 답지 않게 뉴트를 채근했다. 그곳을 나와서 한참 동안은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큰 사거리에서 한번 꺾고, 다시 오른쪽으로 걸어가서야 나오는 커다란 나무 아래 자리를 잡았다.
“무거워.”
“그렇다고 내가 들어줄 순 없잖아.”
“그렇긴 하지만.”
사실 그렇게 무거운 것도 아니었다. 예전엔 이보다 무거운 곡식 자루도 턱턱 옮겼는데. 뉴트는 자신도 모르게 어리광이 늘은 것 같아 조금 부끄러웠다. 괜히 주머니를 고쳐 안았다.
“수고했어.”
“도움이 됐으니 다행이네.”
“…….”
“이렇게 바꿔 가면 뭐가 더 좋아?”
“아니…그냥. 물론 의심을 피할 순 업지만, 눈 가리고 아웅이라도 하자는 거지. 오래오래 거래하려면 말이야.”
“그런가.”
묵직한 주머니 입구를 풀어보니 동전이 가득했다. 뉴트는 그걸 눈으로 셌고, 안을 슬쩍 들여다보던 민호는 뭐라 뭐라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했다. 돈도 마련했으니 이제 남은 건 필요한 물건을 사는 일뿐이었다. 먼저 일어나던 민호는 아랫단이 엉망이 된 옷을 오래 바라봤다. 뉴트는 별거 아니라며 툭툭 털었다. 이미 버린 옷인데 뭐 어쩌겠어. 하지만 민호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물론 직접 말을 하지 않으니 알 수 없지만.
그다음부턴 바삐 돌아다니는 것밖에 없었다. 워낙 살 것이 많으니 들고 올 수도 없었다. 대충대충 돌아다니면서 아무거나 사는 것 같았는데, 찬찬히 살펴보면 꽤 깐깐한 녀석이었다. 제집 안마당처럼 돌아다니는 놈 뒤를 쫓아가는 것도 바빴다. 뉴트 입장에선 너무 낯선 곳이었고, 사람은 지나칠 정도로 많았으며, 옷은 불편하기만 했다. 하지만 더는 불평불만은 입 밖으로 내지 않기로 했다. 부지런히 뒤를 따라가는 내내 곁눈질로 시장 구경을 했다. 다들 뭐가 그렇게 바쁘고, 열심인지. 발걸음 한 번씩 멈출 때마다 괜히 감상적인 생각이 울컥 스며들었다.
‘…아, 자꾸 딴생각을 하네.’
뉴트가 고개를 흔들었다. 잘그락 소리가 나는 장식이 반짝거리며 햇빛을 받았다. 이쪽에서 쌀을 사고, 저쪽에서 고기를 산다. 민호가 저렇게 바쁘게 움직이는 건 또 처음 봤다. 잠시 발을 멈추고 한참 고민을 하는 녀석의 넓은 등을 한참 바라보다 옆에 슬쩍 섰다.
“무슨 일이야?”
“양을…….”
“양?”
“조금 키워볼까 싶기도 한데.”
“그런 거 귀찮아서 잘 안 한다며?”
“그야. 그렇긴 하지만.”
“하지만?”
또 말이 없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심장이 저릿했다. 민호가 눈을 찌푸리면서 고민을 계속할수록 뉴트의 생각도 깊어졌다.
“네가 할 일이 필요 하다 해서.”
“…….”
“눈에 띄면 안 되니까 많이는 못 하겠지만, 조금이면 그렇게 부담될 것 같진 않은데. 할 수 있겠어?”
“나야…상관없는데. 괜찮아? 정말?”
“…….”
“의논도 없이 이러는 거면 이러지 않아도 괜찮아. 할 일이야 찾아보면 어디든 있겠지.”
“하지만…….”
민호가 급히 대화를 뚝 잘라먹었다. 한번 불붙기 시작한 사춘기 같은 사랑을 누가 말릴 수 있을까. 뉴트는 어쩐지 자기의 미래가 급격하게 꼬이는 기분이 들었다. 몇 번이나 만류해도 소용없었다. 결국, 민호가 이겼다.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 뉴트는 머리가 아파졌다. 새끼 양과 어미 양을 섞어서 열 마리 정도 샀다.
“아니 이걸 끌고 어떻게 돌아가려고 그래.”
“천천히 가지 뭐.”
“정말…대책이 없구나.”
“…….”
“먹을 걸 사서 간다면서 천천히 움직이면 어떡해.”
“그거야…….”
“다른 녀석들 먼저 보내고 내가 끌고 가던가. 아니면 옆에 아무나 하나만 붙여줘.”
“내가 있으면…….”
“대장은 본 무리를 떠나면 안 돼.”
“…….”
뉴트는 마치 동생한테 하는 것처럼 민호에게 잔소리를 했다. 반쯤 흘려듣는 것 같으면서도 결국 고개를 끄덕인 민호는 그나마 친한 녀석 하나를 붙여주겠다 약속했다. 적당히 끼니를 챙기고 돌아간 방에선 세상 편하게 늘어진 녀석들이 널려있었다. 왜 벌서 왔냐는 타박에 민호는 헛기침을 하며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늘 새벽에 떠나기로 하자.”
“아침에 가면 안 됩니까?”
“너무 늦어.”
“쳇.”
“마당에 저 양들은 또 뭡니까.”
“매일 젖이나 치즈를 조달하러 다니기도 힘드니까.”
“일거리가 더 늘었네. 저걸 누가 해요. 대장.”
“뉴트가 할 거야.”
그 소리를 들은 여러 쌍의 눈이 한 번에 뉴트에게 쏟아졌다. 아. 짧게 앓던 뉴트는 침착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원래 하려다 할 사람이 없다 해서…….”
“…….”
“어차피 난 다른 일을 썩 잘하는 것도 아니고, 예전에 하던 일이니 하면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그렇긴…하네. 맞는 말이야.”
뉴트의 말이 틀린 건 아닌지 다들 고개를 끄덕거리며 동조를 한다. 따지자면 귀찮은 일을 할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돼 마음을 놓은 쪽에 가깝긴 하지만, 뭐 중간 과정이 좀 꼬여도 결론만 좋으면 그만이었다. 자발적으로 같이 양을 끌고 가겠다는 녀석이 나왔다.
“뉴트. 나랑 같이 가자.”
“그럴까?”
척은 막내뻘인 녀석인데, 아직 몸집이 작아서 무거운 짐을 옮기는 덴 별로 쓸모가 없다는 말을 덧붙인다. 민호는 아직도 약간 불만을 가진 상태였지만, 그렇게 하라며 허락을 했다.
“일찍 자고, 늦지 않게 일어나. 아니면 버려두고 간다.”
“예, 예.”
“정말이야.”
“여부가 있습니까. 그런데 내일 아침은 먹여줍니까?”
“가다가 먹어야지.”
“아…….”
“밥 생각하지 말고, 내일 움직일 걱정이나 해라.”
이 한마디에 와르르 잘 준비를 하는 녀석들은 벌써 코를 고는 흉내를 내며 웃었다. 잠이 안 온다며 아우성치던 사람은 놀러 나갔는지, 채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아 숨소리가 가득 찼다. 뉴트는 옆으로 누워서 이불을 조금 더 당겨 덮었다. 부스럭부스럭. 뒤척이는 소리는 왜 이렇게 크게 나는지. 민호는 내내 제대로 눈을 붙이지 못하고 선잠을 잤다.
'메이즈 러너 > └ 민늍'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민호뉴트/민늍] 신부이야기 011 (0) | 2015.12.27 |
---|---|
[민호뉴트/민늍] 신부이야기 010 (2) | 2015.12.22 |
[민호뉴트/민늍] 신부이야기 008 (2) | 2015.11.30 |
[민호뉴트/민늍] 신부이야기 007 (2) | 2015.11.23 |
[민호뉴트/민늍] 신부이야기 006 (2) | 2015.10.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