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반짝 관심은 오래갈 일도 아니었다. 화려하게 결혼식을 한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주목할 만한 사고를 친 것도 아니었다. 단지 둘의 직업이 직업인만큼 잠시 화젯거리가 됐을 뿐이었다.
그러나 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관심은 둘에 대해 알고 싶어 했다. 하지만 토마스야 연구가 바쁘다는 이유로 자신의 연구실에 틀어박히면 꺼내올 사람이 없었다. 딱히 연예계에 발이 넓은 사람도 아니었거니와 유명하지도 않았다. 좀 더 깊은 관심을 가지던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논문을 찾아보고 혀를 내두르는 것이 전부였다. 위키드 연구소 총장 페이지의 직접 사사 받는 애제자. 최연소 총장 후보. 기타 등등. 화려한 수식어가 붙어있었지만, 솔직히 평범한 사람들의 흥미를 움직이기엔 조금 부족했다.
“그러니까 내가 왜요?”
여기서 붙잡힌 쪽은 뉴트였다. 토마스보다 익숙한 얼굴에 적당한 인지도까지. 그런 뉴트를 노리는 기자들이 더덕더덕 달라붙을 때마다 질색하는 표정으로 도망가던 녀석은 결국 뭔가 포기하긴 했는지, 가끔 인터뷰하기도 했다. 조용히 살았는데 도대체 왜 이렇게 일이 커진 지 모르겠다. 그런 말이 듣는 사람마다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꽤 요란하게 사귀긴 했는데,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디서 만나셨는지, 조금만 알려주시죠.”
“…그건 다들 아시지 않나요? 그냥 대학에서 만났어요. 선후배로.”
“뉴트 씨가 선배? 선배 맞으시죠?”
“…그렇죠.”
“아하.”
한 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신경이 쓰였다. 도대체 뭘 원하는 건지. 도시 한복판에서 결혼식이라도 하는 걸 원하는 걸까. 사실 뉴트는 모델일 외에 딱히 자신을 드러내는 타입도 아니었고, 토마스는 그보다 더했다. 어렸을 때부터 질리도록 돌아다닌 것이 너무 지겨워 어느 순간 브라운관에서 사라져버린 놈이었다. 그런 둘이 조용히 집에 틀어박혀 있다 밖에 나왔을 뿐인데, 세상은 관심을 가져도 너무 가졌다.
“어차피 이러다 슬슬 관심이 사라지겠죠.”
“과연 그럴까요? 다들 굉장히 궁금해 하는 것이 많은 걸요.”
“하지만 말입니다. 대다수가 그렇게 궁금해 하는 일은 저희 프라이버시겠죠. 안 그런가요?”
“그렇죠.”
“그래서 밖으로 이야기하지 않는 겁니다.”
뉴트가 이미지 소비를 많이 하지 않고 계속 호기심을 끌어당기는 것은 어쩌면 성격 탓인지도 모르겠다. 한번 철벽을 친 다음 두 번짼 아주 조금 허물어버린다. 다 이야기해줄 것처럼 하다가도 어느 순간 계약이 끝났다면서 몇 달 동안 칩거한 채 좀처럼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이 적절한 조련에 사람들은 꼭 미끼를 문 것처럼 이리저리 휘둘렸다. 하긴 이렇게 행동하면서 동시에 토마스를 관리했으니 이 정도에서 그쳤겠지. 아니었으면 이미 스캔들을 만들어도 세 번은 만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럼 나중에 또 한 번.”
“그땐 제가 바쁠 것 같은데요.”
뉴트는 일어서면서 인사를 한다. 도대체 무슨 관심이 이렇게 많은 건지. 너무 많은 질문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이 정도에서 그만하면 될 것 같은데. 물론 속마음이 그렇다 해서 대충 대답한 것도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온 뉴트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런 뉴트를 기다리던 매니저가 웃으면서 걸어왔다.
“끝났어?”
“적당히.”
“그럼 가자. 오늘 촬영은 없으니까 바로 집으로 가면 될 거야.”
“아무것도 안 하고 눕고 싶다.”
“그러도록 해.”
“그럴까.”
뉴트가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인터뷰가 끝나고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밖에서 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덫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차에 탈 때까지 뉴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래도 딱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여튼 남한테 관심은 많아서.”
“문은 닫고 말해라.”
“당연하지.”
아. 피곤해. 뉴트는 차에 타자마자 그대로 늘어졌다. 끙끙 앓으면서 팔을 쭉 폈다. 으으으. 절로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모델을 한다고 했지 연예계 진출한다는 소리를 한 적 없었는데……. 왜 다들 이렇게 궁금해하지.”
“…다들 어쩔 수 없는 일이 있으니까 그렇지.”
“그런가. 하지만 정말 이런 일은 취향이 아닌 거 같아.”
매니저는 소리 없이 웃었다. 하긴 인터뷰도 일에 관련된 것만 고르고 골라서 응하던 사람이 갑자기 연애 사정을 설명하려니 혀가 꼬이지 않을 리 없었다. 그래도 굴러먹은 연차가 있으니 소란을 만들진 않겠지만, 영 적응이 안 된다는 표정을 보는 건 또 재미가 있었다. 온몸으로 싫다 싫다 하면서 또 일정 잡아오면 군말 없이 나간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한참 앓다가 토마스를 소환한다. 매니저도 뉴트와 일한 지 꽤 오래됐지만, 요즘처럼 뉴트의 감정선이 널뛰는 광경은 처음 봤다.
“그래도 이럴 때가 좋은 거다.”
“…별로 안 좋은 거 같은데.”
“배가 불렀지.”
낄낄거리며 농담 따먹기를 주고받던 차 안이 순간 조용해졌다. 뉴트는 안 그런척해도 꽤 긴장한 것인지 금방 곯아떨어졌다. 매니저는 조용히 차를 세웠다. 그리고 급하게 내렸다. 둘만 있으면 이렇게 불편한 일이 종종 있었다. 문을 열고 옆자리에 구겨둔 담요를 꺼내서 바짝 마른 어깨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푹 뒤집어 씌웠다.
에이전시 쪽은 이참에 뉴트를 연예계로 밀어 넣고 싶은 모양인데, 정작 당사자는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는 것 같았다. 지금도 할 만큼 일하고 은퇴하면 저기 멀리 집이나 사서 틀어박혀야겠다고 말을 하는 녀석을 어떻게 끌고 가야 할까. 매니저는 생각할수록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고 어려웠지만, 그래도 할 일이 없는 것보단 나았다.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도 있고.”
“…….”
“난 그걸 시켜야 하고.”
매니저는 혼자 웃었다. 저만큼 나이를 먹었는데, 가끔 보면 나이답지 않은 어린아이 같은 면이 있었다. 아니 토마스한테 옮았다고 봐야 할까. 둘은 물과 기름같이 보이면서 슬쩍 섞이고 있었다. 토마스는 언제쯤 온다고 했던가. 머릿속으로 날짜를 셈하던 매니저는 곧 고개를 가볍게 흔들고 운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누가 저 녀석은 그렇게 예민하던 모델이라 생각할까. 이런 것을 보면 확실히 사람은 좀 부대끼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맞는 말 같았다. 사실 따지자면 처음 만났을 때보다 나이를 먹은 것도 있는 데다, 뉴트가 더 철없이 행동하는 토마스를 잡아오느라 상대적으로 같이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는 것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하지만 뭐 어떤가. 결과적으론 좋은 일이었으니까. 주변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같이 섞여 들어갔다.
물론 집에 오자마자 토마스가 귀신같이 전화한다. 차를 타고 이동한 시간이 얼마나 긴데 그동안 한 번도 연락이 없다가 집에 들어와서 옷 좀 벗으려 하면 꼭 이렇게 통화가 길어진다. 뉴트는 제법 진지하게 토마스한테 질문한다. 물론 둘 다 일이 많아 지친 목소리였지만, 이 시간이 싫진 않은 모양이었다.
“너 나한테 GPS라도 달아놨냐?”
“무슨 소리야?”
“아니면 이렇게 시간 맞춰서 전화하기 힘들 거 같잖아.”
“그런 거 아니고, 내가 지금 끝났어.”
“…정말?”
“응. 정말. 잠깐 커피 마시러 나왔어. 조금 있다가 다시 들어가야지.”
“집엔 언제 올 건데?”
“…그게.”
아차. 요즘 가장 예민한 주제를 생각 없이 꺼내 버렸다 뉴트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토마스의 목소리가 질질 늘어졌다. 이쪽도 엄청나게 피곤한 모양이었다. 얼굴 못 본 지 얼마나 됐더라. 일주일? 이주일? 이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 걸 보니 오래 헤어져 있어도 어지간히 떨어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분명 핸드폰에 적어놨을 텐데. 항상 계획은 계획처럼 제대로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사실 언제 끝날지 모르겠어.”
“…일주일이면 끝난다고 자신감에 차있던 토마스 씨는 어디로 갔을까.”
“그땐 그럴 줄 알았지.”
“일 주인은 더 있어야 해?”
“아마도? 근데 일찍 끝나면 바로 나올 수 있고.”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이 주일은 더 못 나올 것 같네.”
“아니야. 그런 소리 하지 마.”
“왜? 정말일까 봐?”
“…으응.”
토마스는 무서운 소리 하지 말라고 했지만, 어쩐지 미래가 될 것 같았다. 토마스가 말하기를 이번은 정말 어렵지 않은 연구인 줄 알았는데, 자꾸 원하는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했다. 그러다 보니 계획이 자꾸 늘어졌다. 게다가 초조해 지면 오히려 제대로 결과를 만들지 못하는 것도 한몫했다. 다른 선임들이 토마스한테 어깨 힘 좀 빼고 조급해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게 어떻게 사람 맘대로 되는 일인가. 그래서 한참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래도 전화는 할 수 있으니까.”
“…연구실 들어가면 못하잖아.”
“그래서 오늘 다 하고 갈 거야. 뉴트 보고 싶어.”
“나도. 그리고 집에 오기 전에 미리 나한테 이야기하고 와. 미리 시간 빼놓을 테니까.”
“알았어.”
“너 연락 안 하고 오면 내가 집에 없을 수도 있어. 먹을 것도 없으니까 꼭 연락해. 저녁으로 먹고 싶은 것도 정해놓고.”
“…난 아무거나 상관없는데.”
“고기 먹여야겠네.”
“그것도 좋고. 뉴트랑 같이 있으면 뭐든 좋아.”
“그래. 우리 둘이 같이 시간이 맞아야 할 텐데. 휴가는 한 번에 몰아서 쓰게 해준 데?”
“응? 아마도. 지금 이렇게 끌려들어 가는 것도 중반 넘어가면 좀 낫지 않을까. 그렇다고 내가 빠질 수도 없는 일이고, 다들 바쁜데 나 혼자 나갈 수도 없고.”
“…철이 들었나.”
뉴트가 솔직하게 감탄했다.
예전에 무슨 일만 나면 모든 걸 제쳐놓고 뛰어나오던 녀석이 저런 말을 할 수 있다니. 그래도 나이가 먹으면 사람이 변할 수 있나 보다. 어쩐지 아들 하나 다 키운 기분이 들었다. 둘이 사귀는 내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니. 이것도 참 새로운 경험이었다.
“뉴트 보고 싶다.”
“…나도. 토마스.”
“옛날엔 연구소에서 나가는 게 싫었는데, 요즘은 오래 있는 것보다 제시간에 퇴근하고 싶어.”
“그런 소리를 하는 걸 보니 아직 살만한가 보네.”
“너무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니 그래도 억울함이 좀 풀어졌는지 목소리가 사근사근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요즘 바빠서 한동안 연구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처지는 변하지 않았다. 자꾸 끊을 듯 말듯 전화기를 붙잡았다. 그리고 엉엉 울면서 집에 가고 싶다는 녀석을 달래던 뉴트는 간신히 통화를 끝낼 수 있었다.
아니 뉴트가 끊은 건 아니었다. 이제 정말 들어가지 않으면 큰일이라 선임들이 토마스를 데리러 온 탓이었다. 통화만 했을 뿐인데 어쩐지 더 피곤했다. 잔뜩 지친 표정으로 침대에 늘어졌다. 으윽. 팔다리를 쭉 펴던 뉴트는 그대로 침대에 누운 채 천장만 바라보았다.
사실 집에 사람이 둘 이상 있던 적이 많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집이 넓어 보이는지. 유난히 쓸쓸해 보이는 집에서 이리저리 뒹굴던 뉴트는 이불을 돌돌 감았다. 시간이야 원하든 원하지 않든 계속 흘러갈 거고, 그러다 보면 연구실에서 돌아온 토마스도 만나겠지. 그리고 또 서로 일하러 나가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뉴트는 괜히 손끝으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어차피 볼 수도 없겠지만, 꾹꾹 메시지를 적어 넣었다. 일찍 보면 좋고, 늦게 보면 어쩔 수 없고. 한창 불타고 좋을 시기에 이렇게 강제로 떨어져 있는 감각은 딱히 오래 느끼고 싶지 않았다.
10월, 12월에 나온 톰늍 교류 앤솔로지에 실렸던 원고 중 홈페이지에 공개된 샘플 부분입니다.
해당 샘플은 1권과 2권 분량입니다
‘다 들리는데, 왜 저렇게 소곤거리는 거야.’
삼삼오오 모인 녀석들이 자기를 보며 수군수군 귓속말하는 것을 모두 듣고 있었다. 청각이 예민하다는 것은 딱히 좋지만은 않았다. 익숙하다면 익숙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좋진 않았다. 토마스 옆자리는 아직 비어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접근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차라리, 같은 수인이면 좋을 텐데.
토마스는 속으로 작게 툴툴거렸다. 어차피 인간이랑 짝 같은 거 해봤자, 잔뜩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아줘야 할 뿐이었다. 그건 정말 귀찮고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같은 종이 낫지. 몇 번이나 그렇게 속으로 되뇔 무렵, 옆에서 의자를 빼는 소리가 들렸다.
어쩔 수 없이 쫑긋 서는 귀를 막을 수 없었다. 바닥을 질질 끄는 소리가 들리더니 책상 위에 묵직한 가방이 툭 떨어졌다. 그리곤 의자에 주저앉는 소리까지 확실하게 들렸다. 가방 지퍼 여는 소리. 뭔가 뒤적거리는 소리. 핸드폰 줍는 소리. 온갖 정보가 토마스의 귀에 들려왔다.
토마스는 일어날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다.
열심히 자는 척을 하고 있었는데, 막상 옆에 짝이 왔다고 벌떡 일어나는 것도 조금 이상했다.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모른 척하고 있으면 그나마 친해질 기회를 발로 걷어차는 일이고. 토마스의 머릿속은 내내 복잡했다.
“…….”
결국, 토마스가 막 일어난 척 어색하게 하품을 하며 책상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까만 시선이 토마스의 눈에 닿았다. 위에 이어폰을 꽃은 채 아무 말 하지 않고, 조용히 자신을 보고 있는 모습을 본 토마스는 어쩐지 숨이 턱 막혔다. 살짝 다문 입술은 달싹이지조차 않았다. 여전히 손가락은 핸드폰 위에 올라가 있는데 시선만 슬쩍 올려서 토마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교실 안으로 불어온 바람에 부스스한 금발이 살짝 흔들렸다.
“뭐?”
입술만 움직여 소리 없이 물었다.
“응?”
이미 바짝 긴장한 토마스는 귀가 사정없이 바짝 서 있었다. 당황해서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약간 멍청한 목소리로 말한 거 같았다. 하지만 이어폰을 꽂고 있으니 들리지 않았겠지. 애써 위로했다. 시간은 멈춘 것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말을 할 듯 말듯 애매한 모습에 어쩐지 조바심이 일었다. 눈 깜박임이 점점 빨라지고 나서야 녀석이 귀에서 이어폰을 뺐다.
“무슨 일이야?”
“아니. 네가…그러니까.”
“별 싱거운 녀석을 다 보겠네.”
사실 노래도 듣고 있지 않았나 보다. 어쩐지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토마스는 제 마음과 상관없이 쫑긋거리는 귀를 당장 뽑아버리고 싶었다. 끙끙거리는 신음이 목 안에서 맴돌았다. 뭐라고 말을 붙여야 할까. 토마스의 그런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녀석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난 뉴트.”
“응?”
“뉴트라니까. 어차피 짝인데 통성명하고 지내는 쪽이 낫지 않아?”
“…….”
“아니면 말고.”
“아, 난…토마스야.”
“그래.”
뉴트는 그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은 수인에 관한 호기심이 가득했다. 아니면 귀 한번 만져 봐도 되냐며 지겹게 달라붙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막상 무신경하다고 느낄 만큼 대수롭지 않게 대하는 사람을 만나자 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당황해서 눈을 떼지 못하는 녀석의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던 뉴트는 이상한 사람 보는 표정으로 머리를 슥 쓸어 넘겼다.
“왜 그렇게 쳐다봐.”
“아니 뭐 더 할 말 없어?”
“내가 뭘?”
“그러니까 보통 수인들 보면…….”
“그런 걸 물어봐서 뭘 해. 어차피 별로 다르지도 않은데.”
“…….”
토마스의 표정이 더 알 수 없게 변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뉴트는 혼자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토마스는 홀린 듯 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저기. 또 목에서 쩍쩍 갈라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뉴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잠깐만.”
어물어물 목 안으로 넘어가는 목소리는 그대로 훅 흩어져 버렸다. 뉴트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알아채자마자 토마스는 재빨리 교실을 뛰어나갔다. 그저 조금 특이한 하루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할 수 없었다.
서로 눈을 마주치고, 입을 마주 댄 채 내내 웃었다. 낮게 깔리는 목소리가 부스러져 발밑에 가득 쌓였다. 그리곤 다시 입술을 탐한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내내 활짝 웃는 둘은 꼭 밤에 피어난 꽃과 달 같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보통 사람보다 따뜻한 체온이 품안 가득 안겨올 때마다 뉴트는 그대로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그저 입 좀 맞추고, 등 좀 쓸어주면서 안아줬을 뿐인데. 허리엔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고, 다리는 금방이라도 꺾일 것 같았다.
‘내가 왜 이러지.’
물론 근본적인 의문은 단 한 번도 해소된 적 없지만, 적어도 싫진 않았다. 아쉽게 떨어진 입술 사이로 약간 들뜬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나서야 둘은 천천히 교실을 나섰다. 교실에 둘만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데면데면하게 수업을 받던 둘은 간데없었다.
“……”
“…….”
꼭 이렇게 정신이 돌아오면, 서로를 쳐다보기도 힘들만큼 민망했다. 아까 우리가 뭘 했더라. 같은 생각을 하는 녀석들은 내내 다른 방향을 보면서 복도를 걸었다. 아직 입술 끝에 남아있는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오히려 모른 척 하면 할수록 다시 불꽃이 살아올라왔다.
손을 잡아볼까. 아니면 셔츠 끝을 당겨볼까. 오만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철철 흘러내렸다. 흠. 흠흠. 괜한 헛기침이 엇박자로 흘러나왔다. 옆에서 자꾸 부스럭 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둘은 또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걸 알고 있어도, 얼굴이 활활 타는 것 같아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당장 잡아먹을 듯 입술을 탐하던 녀석은 어디로 갔는지. 꼬리마저 빨갛게 번해버릴 것 같은 녀석은 내내 길고 마른 손을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매끈한 손끝으로 뉴트의 손바닥을 살살 긁어댔다. 이럴 때마다 묘하게 몸 안에서 불꽃이 일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기분이 들대마다 뉴트는 걸음을 멈춰서서 가늘게 한숨을 쉬었다.
‘뭐, 그래도 이런 거 나쁘지 않지.’
뉴트는 지나치게 태평했다. 너무 태평했다.
[중략]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녀석에게 첫 단어를 가르치는 것처럼 천천히 설명을 하려고 했다. 하려고는 했다. 물론 그만큼 인내심이 없는 녀석들이 제대로 설명을 할 린 없었다. 결국 토마스의 멱살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친 녀석들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손으로 연신 부채질을 했다.
“그…그러니까.”
“그래 이 멍청아!”
“…….”
“넌 어떤 삶을 살아왔으면 크리스마스가 학교 쉬고 연구실 가는 날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
또 말이 없어졌다. 연신 귀를 쫑긋거리는 녀석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눈 깜박임이 점점 빨라지더니 결국 벌떡 일어났다. 드디어 결심이 선 모양이라며 다들 어깨를 두드려 주더니, 어서 가보라며 밀어냈다. 주춤주춤 일어난 녀석은 어정쩡한 포즈로 한걸음 물러섰다.
“어서 가봐.”
“…….”
“크리스마스는 사귀는 사람들끼린 둘도 없이 좋은 날이라잖아.”
“…….”
토마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친구를 바라봤다. 대놓고 얼굴을 구기기 시작한 녀석들은 혀를 내빼더니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시늉을 했다. 하여튼 좋은 말을 해줘도 저런 반응이었다.
“너, 기껏 충고 해줬더니 그런 눈으로 보지마라. 우리도 뭐 이런 말 해주는 거 좋아서 그러는 줄 아냐?”
“…….”
“하도 너희 둘이 답답해서 그러는 거니까.”
“…….”
뭐라 뭐라 냅다 쏴붙인 녀석들은 토마스를 복도로 와락 밀어내고 문을 쾅 닫아버렸다. 가서 둘이 해결해 새끼야! 도와주려면 끝까지 도와줄 것이지, 어린 녀석들은 인내심이 부족했다. 볼멘소리가 툭툭 떨어지던 복도는 뚜벅 뚜벅 발소리가 멀어지는가 싶더니 조용해졌다.
“그래서 둘이 잘 되어간대?”
“망했어. 아주.”
“뭐? 그렇게 이야기를 했는데도? 못 알아들어?”
“둘이 똑같이 멍청이가 아닌 이상 도통 이해가 안 되는 일이지. 하여튼 뭐 그리 고상하게 연애를 한다고 저 난리냐.”
“…….”
토마스한테 좋은 시간 보내라고 막 간지러운 것도 참고 말을 해줬었다. 그런데 그렇게 옆구리 찔러주기 전보다 냉랭해진 둘을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누가 들을까봐 소곤거리던 녀석들은 영 짜증이 나는지 발을 쾅쾅 굴렀다. 저 녀석들은 멍청이들이야! 아주! 대차게 성을 내는 녀석은 뒤통수를 감싸 쥐면서 억울한 비명만 질러냈다.
처음부터 동등한 관계는 아니었다. 작은 몸집을 가진 토마스가 무장한 어른들 품에 안겨서 위키드로 들어온 날, 커다란 버그에 잔뜩 몰아넣은 또래 아이들도 같이 그곳에 도착했다. 아무도 들여다볼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높고 단단한 하얀 벽으로 둘러쌓은 곳은 다 부서져 가는 지구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장소인 것 같았다.
버그에서 일사불란하게 끌어내려 진 아이들은 꼬깃꼬깃하고 더러운 옷은 입은 채 서로 등을 마주 대고 마냥 주위 어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마치 천적들에게 대항하는 작은 새끼 펭귄 무리를 보는 것 같은 귀여움도 잠시 총과 무전기를 든 남자들이 아이들의 등을 밀기 시작했다.
“어서 움직이거라.”
“…….”
“어서. 어서!”
“……”
“안쪽으로 들어가서 검사를 받으면 너희도 위키드의 일원이 되는 거란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아이들은 어른들을 믿지 않았다. 이미 눈앞에서 그런 소리를 쫓다가 죽어 나자빠지는 녀석들을 차고 넘치고 본 터였다. 입에 발린 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몸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저기 하얗게 서 있는 곳이 지옥인지 천국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플레어가 휩쓸고 지나간 다른 지역보다는 나을 것이 분명했다.
“…아파.”
“피곤해.”
“힘들어.”
아이들은 저마다 불만을 내뱉으며 툴툴거렸다. 아무리 목숨을 구해준 집단이라 하더라도 어린아이들은 그렇게 인내심이 길지 않았다. 과하게 많은 아이를 집어넣은 탓에 좁아진 공간은 오는 내내 답답하기만 했다. 안 그래도 피곤함에 지친 몸으로 다닥다닥 붙어서 실려 왔던 터라 온몸이 아프고 뻐근했다.
문 앞에 서 있는 중년 남자가 한 무리 어린애들을 맞이했다. 그리곤 눈썹을 찡그리며 눈 앞에 펼쳐진 지옥도를 바라보았다. 퀴퀴한 냄새부터 걸레만도 못한 천 조각을 걸치고 있는 녀석들을 바라보던 남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도대체 이 골로 애들을 끌고 온 이유가 뭐야.”
“워낙 바쁜 수송 작전이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하여튼 다른 것 생각 안 하고 자료 모으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있지.”
쯧쯧 혀를 차던 남자는 도저히 저 더러운 꼴을 봐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깐깐한 표정으로 돌아서서 문을 열었다. 그리곤 또다시 애들을 재촉했다.
“어서 들어가라.”
“…….”
“문을 통과하면 바로 돌아들어 가서 씻은 후 준비된 옷으로 갈아입으면 된다.”
“…….”
“그리고 간단한 검사를 하게 될 거야.”
“…….”
“뭐해. 어서 들어가.”
약간 짜증이 섞인 목소리가 뒤통수에 와서 쿡 박혔다. 뭐 애들에게 거부권이란 없었다. 하나둘 줄 서서 안쪽으로 들어가는 무리를 바라보던 잰슨은 귀찮은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아, 이 녀석도 왔구먼.”
“…….”
“이번에 들어온 애들은 하나같이 입이 붙은 모양이구나. 그래. 뭐 좋아.”
“…….”
“잘됐다. 한 번에 끝내도록 하지. 이 녀석도 데리고 가서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도록 해. 그리고 최대한 다른 무리와 접촉하지 않게 주의하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
“토마스 이리 오렴,”
흙먼지를 뒤집어쓴 남자는 아이를 한 번에 덜렁 들어서 곁에 있는 여자 연구원에게 넘겨주었다. 여전히 불안한 눈동자를 한 녀석은 그 와중에도 옷깃을 꽉 잡으며 답싹 안겨들었다.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옮겨지는 아이는 곧 따로 마련된 샤워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
사실 아이들이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첫날 씻고 그나마 깨끗한 옷을 주워 입는 것을 시작으로, 먹고, 검사하고, 채혈하고, 자고. 이런 생활이 계속 반복되었다. 처음엔 커다란 방에 한 번에 밀어 넣었다가 며칠 지나니 검사결과표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여섯 명씩. 혹은 여덟 명씩. 각각 나뉜 녀석들은 또 어른들의 손에 이끌려 좀 더 작은 방으로 옮겨갔다.
“뉴트.”
“…….”
“뉴트.”
“…아. 네.”
멍하니 벽을 바라보고 있던 녀석이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바짝 마른 팔에 주삿바늘을 갖다 대던 남자는 약간 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딴짓을 하다 잘못 힘이 들어가기라도 하면 곧장 커다랗게 멍이 들 수 있었다. 힘주지 말고. 뉴트. 네. 별생각 하지 않으려 했는데 자꾸 몸속으로 들어가는 약물도 수상했고, 피를 뽑는 것도 이상했다. 하지만 거부할 권리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토마스.”
“…….”
“토마스. 집중해야지.”
“아…네.”
예정보다 더 많은 피를 뽑아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조그만 아이가 팔을 솜으로 문지르며 의자에서 뛰어내렸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의무실을 나가려던 녀석은 뒷덜미를 잡혀서 다시 끌려들어 갔다. 그리곤 손에 한 움큼 약을 받았다. 아픈 것도 아니고, 몸이 이상한 것도 아닌데 어른들은 자꾸 토마스의 몸을 걱정했다. 먹기 싫다고 칭얼거려도 별수 없었다. 서로 다른 곳에서 비슷한 일을 겪고 있던 둘은 똑같이 하품하고 눈을 깜박거렸다. 서로 만나지 못하게 하는 까닭에 서로 일면식도 없는 둘은 조금 닮아있었다.
그리고 토마스의 고집이 폭발한 것은 며칠 지나지 않은 저녁 시간이었다. 잰슨은 여전히 아이 보는 것을 귀찮아하며 이리저리 피해 다닐 때였다. 꼭꼭 숨겨놓고 보여주지 않으려고 한 실험체를 찾아낸 녀석은 그때부터 계속 고집을 꺾지 않았다. 얼마나 쇠심줄 같은지 어지간한 사람이 들러붙어도 당하지 못했다.
“안 된다니까. 토마스.”
“여긴 혼자 있으면 심심하단 말이에요.”
“하지만 멋대로 그 곳에 들어가면 총장님이 화를 내실 거야.”
“여긴 친구도 없고, 나랑 이야기해줄 애들도 없고.”
“…….”
“그냥 얼굴만 보고 인사만 하고 올래요. 네?”
“아무리 그래도…….”
“내가 만나면 안 되는 애들이에요?”
“…….”
이럴 때만 영악했다. 순진한 표정으로 따박따박 칭얼거리던 녀석은 결국 제 생각대로 일이 풀리지 않자 그날 밤에 끙끙 앓았다. 이렇게 고집이 센 녀석인 줄 몰랐다며, 해열제를 놓던 사람도 혀를 내둘렀다. 결국, 삼일도 넘게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녀석은 겨우겨우 허락을 얻어낼 수 있었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까끌까끌한 입안으로 밥을 넘기는 어린애를 보는 어른들의 표정은 미묘하기만 했다.
**
“안녕?”
“…….”
“안녕?”
“…….”
뉴트는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오늘은 괴롭히거나 피를 뽑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뜻하지 않은 어린애가 한 명 와서 귀찮게 하고 있었다. 까맣게 마른 녀석은 커다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저 멀리서 뉴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이쪽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차림을 보니 분명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것 같았다. 애써 모른 척하던 녀석은 결국 짜증 섞인 표정으로 휙 돌아보았다.
“…뭐야.”
“우리…친구 안 할래?”
“뭐?”
“우리 친구 하자. 난 토마스라고 해.”
“…….”
묻지도 않았는데 넙죽넙죽 자신의 이름까지 밝힌 녀석은 쪼르르 달려와 뉴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뉴트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이 상황에 당황하고 있었다. 한참 말없이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던 녀석들은 좀처럼 긴장을 풀지 않았다.
‘새로운 실험인가.’
뉴트는 이곳에 들어온 날부터 모든 것을 믿지 않고 있었다. 그렇기에 갑자기 친한 척하며 치대는 이 녀석도 실험에 동원된 아이쯤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루. 이틀. 사흘.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매일 뉴트를 찾아오던 토마스는 항상 적당한 거리 이상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무엇인가 허락을 구하는 표정으로 내내 뉴트를 바라볼 뿐이었다.
“…뭐야?”
“…….”
“지금 날 기다리는 거야?”
녀석은 유난히 숫기가 없었다. 뉴트는 주삿바늘 자국이 난 팔을 뒤로 감추고 가만히 토마스를 바라보았다. 동글동글한 머리가, 맑은 눈동자가 까만 시선에 콕콕 박히곤 했다.
“도대체 원하는 게 뭔지 말해봐.”
“그건…….”
“원하는 것이 있으니까 자꾸 날 찾아오는 거잖아.”
“…….”
“어서 말해봐.”
“…….”
“혹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일 수도 있잖아. 안 그래?”
뉴트가 살짝 웃었다. 곱게 내려오는 속눈썹에 까만 시선이 가득 걸렸다. 토마스는 여전히 발끝만 보며 말이 없었다.
**
“우리가 어른이 되면 여기서 나가기로 하자.”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뭘 듣고 왔어.”
“응?”
“도대체 뭘 보고 와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그거야…….”
작은 손으로 패드를 만지작거리던 녀석은 뉴트의 한마디를 듣고 나서야 웃었다.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녀석들은 서로 등을 맞댄 채 소리 없는 웃음을 지었다. 토마스가 이곳에 오는 날은 연구원들이 들어오지 않았고, 귀찮게 실험을 하지도 않았다.
“어른이 되면, 치료제를 찾고, 네 손을 잡고 같이 나갈 거야.”
“나가면? 나가서 뭐해?”
“작은 집을 짓고, 잔디가 가득한 정원을 만들고, 옆에 밭을 만드는 거야.”
“그래서?”
“그래서라니. 거기서 둘이 사는 거지.”
“되게 쓸데없는 생각이다.”
“그런가.”
냉랭하게 말하는 뉴트와 달리 여전히 생글거리며 웃던 토마스는 잠시 패드를 내려놓은 채 눈을 감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뉴트는 길고 짙은 속눈썹을 바라보면서 나름대로 마음을 정리하고 있었다.
“십 년쯤 지나면 우리는 어른이 되어있을 거야.”
“아닐 거 같은데.”
“아냐. 십 년이면 충분해.”
“이상한 녀석이야.”
“그리고 강아지도 키우고, 길고 끝없는 정원을 걷기도 하고. 그냥 그러면서 사는 거야 어때?”
“토마스…넌 말이야.”
“응?”
뉴트는 잠시 할 말을 고르고 있었다. 이곳 밖으로 나가면 무슨 상태인지 알고 있는 걸까. 아니면 다 보고 온 것일까. 이곳에 있는 아이들은 각자 사연을 가지고 있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항상 맑은 곳에서 비가 오면 잠시 처마 밑에 서 있다가, 다시 날이 개면 숲 속으로 걸어가기도 하고…그냥 그렇게 둘이 살고 싶어.”
“…….”
“어른이 되면 말이지.”
“어른…이라.”
“내가 꼭 데리러 갈 거니까. 그때 까지 기다려 줘야 해?”
“…어디 가?”
그게. 토마스는 금방 시무룩해졌다.
“치료제를 찾으러 가.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래. 그리고 이걸 찾아야 우리가 모두 살 수 있다고 했어.”
“…….”
“그러니까. 뉴트 꼭 나를 잊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난 무슨 일이 있어도 널 알아볼 거니까.”
“그래.”
“응. 고마워.”
십 년 후 어른이 되어서 만나자는 약속을 몇 번이나 강조하던 작은 녀석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제 자주 못 올 수도 있어. 잔뜩 시무룩한 얼굴을 보던 뉴트는 괜히 볼을 쓸어주고 눈을 마주치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시간 뉴트는 간신히 격리실을 빠져나와, 되는 대로 헤매고 있었다. 옷은 사막에서 편히 움직일 만한 복장이 아니었다. 체온이 너무 올라가서 바깥이 뜨겁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두툼한 목도리를 둘둘 감은 채 간신히 눈만 내놓은 상태로 정처 없이 걸음을 옮겼다.
“여긴 어디지.”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간신히 만난 사람은 사막 모래에 반쯤 묻혀있는 송장이었다. 띄엄띄엄 광인들이 죽어있는 것을 이정표 삼아 광인 궁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물론 뉴트는 그 장소를 기억하지 못했다.
여전히 바짝 마른 손목은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본능이 시키는 대로 걷는 뉴트 뒤로 긴 그림자가 끓어올랐다. 체온은 점점 뜨거워져서 온몸의 피가 그대로 말라붙을 것 같았다.
이 발걸음이 멈추는 곳에 자신의 답답함을 풀어줄 사람이 있을 것만 같았다.
***
석양이 지고 있었다.
뉴트는 눈으로 새빨갛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정처 없이 걷고 있었다. 발길이 가는 대로 하염없이 헤매다 보면 언제나 어둠이 스며들었다. 오늘은 여기서 잠을 자야 하나. 온 세상을 집어삼킨 사막은 뉴트의 발목은 부드럽게 감싸 쥐고 놔주지 않았다. 뉴트는 한숨을 쉬며 사막 한가운데 털썩 주저앉았다.
“…….”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곳에 달빛이 하얗게 내렸다. 어둠을 밝히는 한 줄기 빛을 따라 저 멀리 다 무너져가는 건물이 흐릿하게 눈에 보였다. 아무도 살지 않는 곳에 홀로 앉아있는 뉴트는 최대한 바람을 피할 곳을 찾고 있었다. 가장 무서운 것은 모래 폭풍에 휘말리는 것. 두 번째는 영원히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죽는 것. 세 번째는 없었다. 혼자 있다거나 누군가 뒤에서 덮친다는 것은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어차피 한 번 죽을 뻔했는데, 그런 거로 목숨을 잃을 운명이라면 벌써 이 세상에 없을 거로 생각했다. 차 문이 다 떨어져 나간 자동차에 몸을 숨겼다. 세찬 바람은 어둠을 머금고 점점 추워졌다. 사막은 낮에는 끓어올랐지만, 해가 지면 그 어느 곳보다 추워졌다. 뉴트는 온몸을 빈틈없이 두른 옷을 좀 더 단단하게 여미며 가늘게 신음을 내뱉었다.
“…춥다.”
아무리 체온이 펄펄 끓어도 한계가 있었다. 쩍쩍 갈라진 손이 바람에 부서지지 않을까. 내일은 눈을 뜰 수 있을까. 뉴트는 한참 생각이 많아졌다. 누구를 만나야 이 답답함을 풀 수 있을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이미 세상은 다 죽어가고 있었고,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내일은 누군가 찾을 수 있길.”
뉴트는 항상 같은 생각을 하며 하루를 마무리 지었다. 계속 걷다 보면 이 사막의 끝이 보일 것 같았는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날수록 점점 그 생각이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모래로 된 비가 석 달 열흘 동안 내려서 모든 곳을 채워버린 것 같았다. 이젠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은 온통 부서진 유리와 뾰족한 철근이 마구잡이로 널려있었다.
“그래도…살아있으면.”
살아있으면 누군가 만날 수 있을 거야. 뉴트는 흐릿하게 빛나는 별 무리를 하나하나 세어보다 잠을 청했다. 조각조각 깨진 기억을 이어붙이는 시간은 고독하기만 했다. 꼭 잠이 들려 하면, 온갖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민호. 토마스. 알비. 척. 갤리. 단어가 조금 더 기억났다. 하지만 저 사람들이 누군진 아직 몰랐다. 적인지. 아니면 친구인지. 혹은 어른인지. 아무런 단서가 없었다. 그저 이름 한마디만 손에 쥔 채 세상을 헤맬 뿐이었다.
목이 타는 갈증을 해소하려면 저 사람을 만나야 했다. 만나서 붙들고 내가 누구냐고 물어봐야 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내가 당신들과 무슨 관계였느냐 라는 질문도 하고 싶었다. 뉴트는 너무 생각이 많아. 순간 귓가에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
뉴트가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귀에 들리는 것은 모래를 몰고 지나가는 바람뿐이었다. 산이었다면 메아리라도 말동무로 삼을 수 있을 텐데, 사막은 너무 황량했다.
“잘못 들었나.”
이젠 몸이 망가지다 못해 헛소리가 들리나 싶었다. 이 이상 몸이 안 좋아지면 움직이는 데 불편할 텐데. 뉴트는 지극히 현실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 몸도 굉장히 불편하긴 했지만 말이다. 조금이라도 잠을 자야 했다. 뉴트는 다시 꼬물꼬물 몸을 웅크렸다.
**
“민호.”
“…….”
“민호. 이쪽이야. 오늘은 이쯤에서 쉬자”
토마스는 한쪽만 남은 벽을 등 뒤에 둔 채 민호를 불렀다. 어둠 속에서 뭔가 보이는 건지. 민호는 내내 사막을 바라보며 눈을 찌푸리고 있었다. 하여튼. 민호가 저러고 있으면 앞으로 한 시간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토마스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익숙하게 덮을만한 것을 찾았다. 다 떨어진 누더기를 주워오고, 불을 피울만한 재료를 찾았다. 나무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적어도 불이 붙을 만한 목재 장식만 찾아도 행운이었다.
“…오늘은 운이 좋네.”
토마스가 사막에 반쯤 묻혀있는 문을 끙끙거리며 끌어냈다. 너덜너덜한 부분을 발로 강하게 밟자 뿌득 소리가 나며 쩍쩍 갈라졌다. 이 정도면 어떻게든 불을 피울 수 있었다. 주섬주섬 목재 조각을 들고 돌아온 토마스는 다시 한 번 민호를 불렀다.
“민호! 뭐가 보여?”
“응? 아니.”
허탈하게 웃으며 돌아선 민호는 토마스 품에 한가득 안긴 나무를 보자 미안한 표정으로 모래 언덕을 쭉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리곤 불을 피웠다. 이젠 노숙이 너무 익숙해진 둘은 자연스럽게 벽에 등을 댄 채 주저앉았다. 먹을 건 넉넉하지 않았다. 돌아갈 생각을 하면 이쯤에서 방향을 돌려야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괜히 모닥불을 들쑤시는 민호의 표정엔 내내 먹구름이 끼어 있었다.
토마스도 마찬가지였다. 민호가 가진 희망이 전염이라도 된 것인지 꼭 저 멀리 뉴트가 살아있을 것 같았다. 내일은 찾을 수 있어야 할 텐데. 간신히 한마디를 뱉어내곤 한숨을 쉬었다.
“일단 자자. 민호. 내일 움직이려면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야지.”
“내가 먼저 불침번 할 테니까. 먼저 자.”
“여긴 괜찮을 거야.”
“그걸 어떻게 알아.”
“그냥 내 느낌이야.”
“…….”
또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한다며 타박하던 민호는 예상보다 순순하게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사막은 밤이 추운 만큼 아침이 빠르게 왔다. 내일도 무사히 해가 뜨는 것을 볼 수 있길 바라고 또 바랄 뿐이었다.
**
뉴트는 해가 사막 끝에서 나타나기도 전에 발을 옮겼다. 슬슬 다시 달아오르는 사막은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 석양처럼 새빨갛게 물드는 아침 하늘을 바라보던 까만 눈에도 불꽃이 옮겨붙었다. 버석버석하게 마른 피부는 어제보다 조금 더 균열이 생겼다.
뉴트는 목도리를 코끝까지 올려 감았다. 예전엔 이 정돈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몸이 더 안 좋아진 건지. 아니면 체온이 점점 오르는 것인지. 해가 완전히 뜨고 사막에 뜨거운 공기가 가득 차도 몸은 내내 춥기만 했다. 적어도 위키드 내에 있을 땐 몸 상태에 대해서라도 알 수 있었는데. 괜히 입맛이 썼다. 이미 뛰쳐나온 것을 어쩌랴 싶어 고개를 몇 번 저을 뿐이었다.
운명인지. 아니면 필연인지. 뉴트와 민호, 토마스는 서로를 향한 채 곧게 걸어가고 있었다. 거리는 아직 꽤 떨어져 있었다. 이대로 누군가 방향을 틀지만 않는다면 적어도 스쳐 지나갈 순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알 리 없는 셋은 여느 때처럼 생명 반응을 쫓아 사막을 헤맬 뿐이었다.
“벌써 해가 지는 거야?”
“그럴 리가 없는데.”
“…….”
“민호. 뭔가 기분이 이상해.”
“…….”
“그리고 우리는 내일부터 다시 돌아가야 해. 알고 있지?”
“…….”
“다음에 다시 나오자. 그땐 아예 밖에서 두 배 정도 버틸 수 있게 짐을 가지고 나오는 거야.”
“…….”
“민호.”
“뉴트…살아 있겠지?”
“…….”
민호는 갑자기 무거운 말을 툭 던졌다. 처음으로 보인 흔들림에 토마스는 뭐라고 말을 할 수 없었다. 민호는 그런 토마스의 얼굴을 살피더니 괜한 소리를 했다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마른하늘에 비가 내렸다. 바짝 마른 사막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온 세상이 엉망으로 변했다. 모래는 물을 담을 힘이 없었다. 군데군데 푹푹 파인 곳엔 물이 흘렀다. 안 그래도 다리를 붙잡는 모래가 습기를 머금자 걷는 것이 점점 힘들어졌다.
“갑자기 무슨 비야.”
“나도 모르지.”
“…우리가 사막을 헤매고 다닌 지 몇 년이 된 거 같은데, 이런 거 처음 봐.”
“잔말 말고, 비 피할 곳이나 찾아. 이 똘추야.”
둘은 허겁지겁 비를 피하러 달려갔다. 세상을 집어삼킬 것처럼 쏟아지던 비가 멎는 덴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축축하게 젖은 옷을 훌렁 벗어서 물을 짜던 토마스는 언제 비가 내렸느냐는 듯 쨍쨍한 하늘을 보며 짧게 욕을 했다.
“아주 그냥 우리를 놀리나 보네.”
“…….”
“이거 마르기 전까진 모래가…자꾸…….”
“그래도 그쳐서 다행이다.”
“그건 그래.”
토마스는 또 어린애처럼 웃었다. 물기에 닿기만 하면 달라붙는 모래를 털어내는 것도 이젠 반 포기상태였다. 그리고 모래 먼지가 모두 가라앉은 덕분일까. 둘의 눈앞엔 다 무너져가는 커다란 건물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