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간 뉴트는 간신히 격리실을 빠져나와, 되는 대로 헤매고 있었다. 옷은 사막에서 편히 움직일 만한 복장이 아니었다. 체온이 너무 올라가서 바깥이 뜨겁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두툼한 목도리를 둘둘 감은 채 간신히 눈만 내놓은 상태로 정처 없이 걸음을 옮겼다.
“여긴 어디지.”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간신히 만난 사람은 사막 모래에 반쯤 묻혀있는 송장이었다. 띄엄띄엄 광인들이 죽어있는 것을 이정표 삼아 광인 궁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물론 뉴트는 그 장소를 기억하지 못했다.
여전히 바짝 마른 손목은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본능이 시키는 대로 걷는 뉴트 뒤로 긴 그림자가 끓어올랐다. 체온은 점점 뜨거워져서 온몸의 피가 그대로 말라붙을 것 같았다.
이 발걸음이 멈추는 곳에 자신의 답답함을 풀어줄 사람이 있을 것만 같았다.
***
석양이 지고 있었다.
뉴트는 눈으로 새빨갛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정처 없이 걷고 있었다. 발길이 가는 대로 하염없이 헤매다 보면 언제나 어둠이 스며들었다. 오늘은 여기서 잠을 자야 하나. 온 세상을 집어삼킨 사막은 뉴트의 발목은 부드럽게 감싸 쥐고 놔주지 않았다. 뉴트는 한숨을 쉬며 사막 한가운데 털썩 주저앉았다.
“…….”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곳에 달빛이 하얗게 내렸다. 어둠을 밝히는 한 줄기 빛을 따라 저 멀리 다 무너져가는 건물이 흐릿하게 눈에 보였다. 아무도 살지 않는 곳에 홀로 앉아있는 뉴트는 최대한 바람을 피할 곳을 찾고 있었다. 가장 무서운 것은 모래 폭풍에 휘말리는 것. 두 번째는 영원히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죽는 것. 세 번째는 없었다. 혼자 있다거나 누군가 뒤에서 덮친다는 것은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어차피 한 번 죽을 뻔했는데, 그런 거로 목숨을 잃을 운명이라면 벌써 이 세상에 없을 거로 생각했다. 차 문이 다 떨어져 나간 자동차에 몸을 숨겼다. 세찬 바람은 어둠을 머금고 점점 추워졌다. 사막은 낮에는 끓어올랐지만, 해가 지면 그 어느 곳보다 추워졌다. 뉴트는 온몸을 빈틈없이 두른 옷을 좀 더 단단하게 여미며 가늘게 신음을 내뱉었다.
“…춥다.”
아무리 체온이 펄펄 끓어도 한계가 있었다. 쩍쩍 갈라진 손이 바람에 부서지지 않을까. 내일은 눈을 뜰 수 있을까. 뉴트는 한참 생각이 많아졌다. 누구를 만나야 이 답답함을 풀 수 있을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이미 세상은 다 죽어가고 있었고,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내일은 누군가 찾을 수 있길.”
뉴트는 항상 같은 생각을 하며 하루를 마무리 지었다. 계속 걷다 보면 이 사막의 끝이 보일 것 같았는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날수록 점점 그 생각이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모래로 된 비가 석 달 열흘 동안 내려서 모든 곳을 채워버린 것 같았다. 이젠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은 온통 부서진 유리와 뾰족한 철근이 마구잡이로 널려있었다.
“그래도…살아있으면.”
살아있으면 누군가 만날 수 있을 거야. 뉴트는 흐릿하게 빛나는 별 무리를 하나하나 세어보다 잠을 청했다. 조각조각 깨진 기억을 이어붙이는 시간은 고독하기만 했다. 꼭 잠이 들려 하면, 온갖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민호. 토마스. 알비. 척. 갤리. 단어가 조금 더 기억났다. 하지만 저 사람들이 누군진 아직 몰랐다. 적인지. 아니면 친구인지. 혹은 어른인지. 아무런 단서가 없었다. 그저 이름 한마디만 손에 쥔 채 세상을 헤맬 뿐이었다.
목이 타는 갈증을 해소하려면 저 사람을 만나야 했다. 만나서 붙들고 내가 누구냐고 물어봐야 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내가 당신들과 무슨 관계였느냐 라는 질문도 하고 싶었다. 뉴트는 너무 생각이 많아. 순간 귓가에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
뉴트가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귀에 들리는 것은 모래를 몰고 지나가는 바람뿐이었다. 산이었다면 메아리라도 말동무로 삼을 수 있을 텐데, 사막은 너무 황량했다.
“잘못 들었나.”
이젠 몸이 망가지다 못해 헛소리가 들리나 싶었다. 이 이상 몸이 안 좋아지면 움직이는 데 불편할 텐데. 뉴트는 지극히 현실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 몸도 굉장히 불편하긴 했지만 말이다. 조금이라도 잠을 자야 했다. 뉴트는 다시 꼬물꼬물 몸을 웅크렸다.
**
“민호.”
“…….”
“민호. 이쪽이야. 오늘은 이쯤에서 쉬자”
토마스는 한쪽만 남은 벽을 등 뒤에 둔 채 민호를 불렀다. 어둠 속에서 뭔가 보이는 건지. 민호는 내내 사막을 바라보며 눈을 찌푸리고 있었다. 하여튼. 민호가 저러고 있으면 앞으로 한 시간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토마스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익숙하게 덮을만한 것을 찾았다. 다 떨어진 누더기를 주워오고, 불을 피울만한 재료를 찾았다. 나무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적어도 불이 붙을 만한 목재 장식만 찾아도 행운이었다.
“…오늘은 운이 좋네.”
토마스가 사막에 반쯤 묻혀있는 문을 끙끙거리며 끌어냈다. 너덜너덜한 부분을 발로 강하게 밟자 뿌득 소리가 나며 쩍쩍 갈라졌다. 이 정도면 어떻게든 불을 피울 수 있었다. 주섬주섬 목재 조각을 들고 돌아온 토마스는 다시 한 번 민호를 불렀다.
“민호! 뭐가 보여?”
“응? 아니.”
허탈하게 웃으며 돌아선 민호는 토마스 품에 한가득 안긴 나무를 보자 미안한 표정으로 모래 언덕을 쭉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리곤 불을 피웠다. 이젠 노숙이 너무 익숙해진 둘은 자연스럽게 벽에 등을 댄 채 주저앉았다. 먹을 건 넉넉하지 않았다. 돌아갈 생각을 하면 이쯤에서 방향을 돌려야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괜히 모닥불을 들쑤시는 민호의 표정엔 내내 먹구름이 끼어 있었다.
토마스도 마찬가지였다. 민호가 가진 희망이 전염이라도 된 것인지 꼭 저 멀리 뉴트가 살아있을 것 같았다. 내일은 찾을 수 있어야 할 텐데. 간신히 한마디를 뱉어내곤 한숨을 쉬었다.
“일단 자자. 민호. 내일 움직이려면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야지.”
“내가 먼저 불침번 할 테니까. 먼저 자.”
“여긴 괜찮을 거야.”
“그걸 어떻게 알아.”
“그냥 내 느낌이야.”
“…….”
또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한다며 타박하던 민호는 예상보다 순순하게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사막은 밤이 추운 만큼 아침이 빠르게 왔다. 내일도 무사히 해가 뜨는 것을 볼 수 있길 바라고 또 바랄 뿐이었다.
**
뉴트는 해가 사막 끝에서 나타나기도 전에 발을 옮겼다. 슬슬 다시 달아오르는 사막은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 석양처럼 새빨갛게 물드는 아침 하늘을 바라보던 까만 눈에도 불꽃이 옮겨붙었다. 버석버석하게 마른 피부는 어제보다 조금 더 균열이 생겼다.
뉴트는 목도리를 코끝까지 올려 감았다. 예전엔 이 정돈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몸이 더 안 좋아진 건지. 아니면 체온이 점점 오르는 것인지. 해가 완전히 뜨고 사막에 뜨거운 공기가 가득 차도 몸은 내내 춥기만 했다. 적어도 위키드 내에 있을 땐 몸 상태에 대해서라도 알 수 있었는데. 괜히 입맛이 썼다. 이미 뛰쳐나온 것을 어쩌랴 싶어 고개를 몇 번 저을 뿐이었다.
운명인지. 아니면 필연인지. 뉴트와 민호, 토마스는 서로를 향한 채 곧게 걸어가고 있었다. 거리는 아직 꽤 떨어져 있었다. 이대로 누군가 방향을 틀지만 않는다면 적어도 스쳐 지나갈 순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알 리 없는 셋은 여느 때처럼 생명 반응을 쫓아 사막을 헤맬 뿐이었다.
“벌써 해가 지는 거야?”
“그럴 리가 없는데.”
“…….”
“민호. 뭔가 기분이 이상해.”
“…….”
“그리고 우리는 내일부터 다시 돌아가야 해. 알고 있지?”
“…….”
“다음에 다시 나오자. 그땐 아예 밖에서 두 배 정도 버틸 수 있게 짐을 가지고 나오는 거야.”
“…….”
“민호.”
“뉴트…살아 있겠지?”
“…….”
민호는 갑자기 무거운 말을 툭 던졌다. 처음으로 보인 흔들림에 토마스는 뭐라고 말을 할 수 없었다. 민호는 그런 토마스의 얼굴을 살피더니 괜한 소리를 했다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마른하늘에 비가 내렸다. 바짝 마른 사막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온 세상이 엉망으로 변했다. 모래는 물을 담을 힘이 없었다. 군데군데 푹푹 파인 곳엔 물이 흘렀다. 안 그래도 다리를 붙잡는 모래가 습기를 머금자 걷는 것이 점점 힘들어졌다.
“갑자기 무슨 비야.”
“나도 모르지.”
“…우리가 사막을 헤매고 다닌 지 몇 년이 된 거 같은데, 이런 거 처음 봐.”
“잔말 말고, 비 피할 곳이나 찾아. 이 똘추야.”
둘은 허겁지겁 비를 피하러 달려갔다. 세상을 집어삼킬 것처럼 쏟아지던 비가 멎는 덴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축축하게 젖은 옷을 훌렁 벗어서 물을 짜던 토마스는 언제 비가 내렸느냐는 듯 쨍쨍한 하늘을 보며 짧게 욕을 했다.
“아주 그냥 우리를 놀리나 보네.”
“…….”
“이거 마르기 전까진 모래가…자꾸…….”
“그래도 그쳐서 다행이다.”
“그건 그래.”
토마스는 또 어린애처럼 웃었다. 물기에 닿기만 하면 달라붙는 모래를 털어내는 것도 이젠 반 포기상태였다. 그리고 모래 먼지가 모두 가라앉은 덕분일까. 둘의 눈앞엔 다 무너져가는 커다란 건물이 보였다.
토마스가 간신히 눈을 뜨고, 온갖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될 무렵 처음으로 들었던 말이었다. 지금이야 똑똑하다고 다들 칭찬하지만, 그 당시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하는 작은 녀석은 그 말을 이해하기 너무 어려웠다. 이상보다는 본능이 앞서는 작은 몸은 열심히 어미 품을 찾기 위해 꼬물거렸다. 새끼 고양이가 우는 것처럼 빽빽 대는 녀석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린 연구원은 가만히 토마스를 바라보았다.
“…….”
하지만 그 손길이 영 답답한지 사방으로 버둥대는 녀석을 버틸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세게 쥐면 다칠까 싶어 장갑을 낀 손으로 조심조심 작은 몸을 옮겼다. 막 태어난 수인은 동물과 다를 것이 없어 부모의 손길이 많이 필요했다. 물론 인간의 아이라고 다들 것은 없다고 하지만, 인간보단 동물에 조금 더 가까운 녀석은 눈도 뜨지 못한 채 빽빽 울며 부모를 찾았다.
“그렇게 울어도 여기에 네 부모는 없다. 이 녀석아.”
“…….”
“들리기는 하는 건가.”
물론 눈을 간신히 뜨고 있다 해도, 아직 제대로 보지 못하는 녀석은 계속 울기만 했다. 높게 우는 소리를 들으면 동물인 것이 확실한데,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 인간이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연구원은 더 이상한 마음이 들이 전에 맡은 일을 끝내기로 했다.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닌데 왜 이렇게 힘든진 알 수 없었다. 질질 끌어봤자 남는 건 잔업 뿐이야. 몇 번이나 같은 생각을 했다.
“그래. 이제 들어가자.”
따뜻한 전구가 설치된 침대 안에 토마스를 눕혔다. 사람보단 고양이에 가까워 보이는 녀석은 자연스럽게 따뜻한 곳으로 기어갔다. 하지만 그곳엔 따뜻한 부모의 품이 없었다. 연구원은 보들보들한 천을 잔뜩 넣어주고 나서야 자리를 떴다. 불이 꺼진 방 안에선 인큐베이터 돌아가는 소리만 들렸다. 그리고 그 소음 사이에서 낑낑거리는 목소리가 가물가물 들리는 것 같다가 어느새 뚝 끊겨버렸다.
***
“토마스. 안 돼.”
“…….”
“기다려.”
“…….”
잔뜩 짜증 난 표정으로 꼬리로 바닥을 팡팡 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구원은 엄한 표정으로 손을 들었다. 연구실에서 자라는 동안 가장 많이 들었던 소리를 꼽으라면 ‘기다려’ 였다. 확실했다. 제대로 귀가 들리지 않을 무렵부터 무엇인가 하려고 하기만 하면, 지겹도록 쫓아오곤 했다. 그러다 보니 토마스는 그 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진 아직 몰랐지만, 얌전히 있어야 한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눈앞에 장난감이 있어도, 먹을 것이 있어도 항상 마찬가지였다.
“…….”
뚱한 표정으로 쭈그리고 앉아있으면, 흰옷을 입은 어른들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크게 웃으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이러면 털이 엉키는데 어른들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귀를 쫑긋대며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귀찮은 일이 많긴 했지만, 그래도 죽을 정도로 힘들진 않았다.
“토마스.”
“응?”
“토마스. 이리와 봐.”
“…….”
“어서.”
제일 좋아하는 루니아의 목소리에 토마스는 곧장 반응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몸단장하기 귀찮게 머리를 헝클어트리지도, 억지로 손을 잡고 두 발로 서게 하지도 않았다. 냉큼 뛰어간 녀석이 다리에 착 달라붙어서 고릉고릉 목으로 울었다.
“이거 선물.”
“와!”
단 걸 계속 먹으면 밥을 먹지 않는다며 잘 주지 않던 간식이었다. 냉큼 받아서 발톱으로 종이를 쭉쭉 찢어내면 달콤한 냄새가 뭉클 올라오는 사탕이 보였다. 혀로 날름 입에 주워 넣었다. 볼이 불룩해진 녀석이 귀여운지 루니아는 계속 등을 쓸어주기만 했다.
“루니아.”
“왜 그러니?”
“왜 다들 나보고 기다리라고만 할까.”
“그게 무슨 소리야?”
“자꾸 뭘 하려 하면 안 된다고만 하고. 기다리라고 하고. 재미없는데…….”
“그건 토마스가 아직 어려서 그러지.”
“…….”
결국, 같은 소리였다. 하지만 사탕도 줬는데 굳이 다시 물어보고 싶진 않았다. 까득까득 송곳니로 사탕을 깨물어 먹던 토마스는 또 한 번 혼자 남겨졌다.
***
동물 특유의 예민함은 잠을 자고 있어도 늘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보통 때라면 푹신한 쿠션 위에서 몸을 웅크리고 한참 깊은 꿈을 꿀 시간이었다. 사박. 사박. 발끝으로 조심스럽게 복도를 걷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날카로운 것이 바닥에 긁히는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 소곤소곤 말을 하고 있었다.
“…….”
토마스가 스르르 눈을 떴다. 이런 밤에 누군가 올 리 없었다. 아직도 칭얼거리는 습관이 남아있어서 한번 잠이 깨면 귀찮다며 연구원들은 얼씬도 하지 않았다. 잠이 잔뜩 눌어붙은 눈을 손으로 슥슥 비비던 녀석은 또 한 번 낯선 소리를 들었다.
“…누구?”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토마스는 조심스럽게 쿠션 위에서 내려왔다. 잔뜩 긴장한 채 바닥에 납죽 엎드렸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이렇게 하고 있으면, 어른들 눈에 잘 띄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한참 숨을 죽인 채 유리 벽 너머에 고여 있는 캄캄한 어둠을 노려보았다. 가늘게 찢어진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것을 잡아내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귀는 아까 그 소리를 듣기 위해 쉼 없이 까닥였다. 꼬리는 잔뜩 긴장해 빳빳하게 부풀어 올랐다.
“…….”
별다른 움직임이 좀처럼 보이지 않자, 조금 호기심이 돈 토마스는 살금살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리 벽에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더니 손으로 유리 벽을 꾹 누르고 일어섰다. 보통 때면 두 발로 서는 것 초자 싫어하던 녀석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다.
“캬아악!”
“…….”
그 순간 까만 눈 두 쌍이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반사적으로 날카롭게 소리를 지른 토마스가 펄쩍 뛰어오르며 유리 벽에서 멀어졌다. 빳빳하게 털을 세운 채 잔뜩 경계하는 녀석은 잔뜩 몸을 부풀린 채 송곳니를 보였다.
“수인이야.”
“우리도 그렇잖아.”
“뭔가 달라 보이긴 하는데, 이 녀석도 실험 체인가.”
토마스와 달리 두 발로 선 녀석들이 어둠 속에서 눈만 반짝이며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 토마스는 둘의 대화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여전히 움직이지도 못하고 숨만 겨우 쉬는 녀석을 바라보던 둘은 고개를 한 쪽으로 기울인 채 말이 없었다.
“넌 누구야.”
“…….”
“누구냐고.”
“…….”
“말을 못하는 녀석인가.”
“뉴트. 잠깐만.”
“그냥 내버려 둬. 뭐하려고.”
“알아볼 게 있어.”
“…….”
“잠시만.”
“그러다 우리 둘이 끌려가면 볼만 하겠다. 안 그래? 민호?”
“잠시만.”
민호가 조심스럽게 유리 벽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여전히 눈을 크게 뜬 채 얼어있는 녀석은 간신히 꼬리만 까닥거렸다. 민호가 발톱으로 유리를 긁었지만, 기분 나쁜 소리만 들릴 뿐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가둬둔 건가. 민호의 눈은 내내 토마스에게 머물러 있었다. 그런 민호를 보고 있던 뉴트도 호기심이 동하는지 점점 가까이 걸어왔다.
“왜 그래?”
“이상해. 같은 수인인데, 말을 못 알아듣는 것 같아.”
“그냥 귀가 안 들리는 녀석인가 보지.”
“아냐. 분명 귀가 계속 움직이면서 소리 정보를 모으고 있는데…….”
“민호. 그게 중요해? 지금 우리가 잡히냐 마느냐의 문제인데.”
“그래도 저런 녀석이 있는데 두고 갈 순 없잖아.”
“…….”
하긴 아직 어른 녀석들이 어른 키만큼 높이 설치된 출입문 용 패드를 만질 수 없었다. 유리는 흠집조차 나지 않는 걸 보니 깨고 구할 수도 없었다. 시간은 점점 흘러갔다. 뉴트는 초조해 하며 민호를 잡아당겼다.
“지금 가야 해. 아니면 늦어.”
“…그래.”
민호가 아쉬운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본 토마스는 조금씩 앞으로 다가왔다. 그렇지만 말도 통하지 않는 녀석들이 할 수 있는 행동은 그리 많지 않았다. 민호와 뉴트는 순간 맑은 눈동자에 드리운 그림자를 보았다. 하지만 데리고 나갈 방법이 없었다.
“…….”
까득 까득.
끊임없이 유리를 긁는 발톱이 부러질까 걱정이 됐다. 더 지체할 시간이 없는데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민호는 결국 다시 주저앉았다. 뉴트는 잔뜩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간 없어. 하지만 토마스의 얼굴을 보고나니 매몰차게 굴 수 없었다.
“…어쩌려고 그래.”
“나도 몰라.”
“…….”
“하지만…….”
“하지만?”
민호는 말이 없었다.
토마스의 발톱이 젖혀져서 피가 비치는 것을 보고 나서야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기다려.”
“…….”
거짓말처럼 움직임이 뚝 멎었다. 뭐라고 말을 하려는 것 같은데,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사실 인간의 언어는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순 있지만, 제대로 조합할 수 없었다. 어린 수인들에겐 그들만의 언어 체계가 있었고, 인간의 말을 알아듣고 구사하기 전까진 그쪽이 훨씬 더 편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녀석은 수인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다.
“기다려. 알았어?”
“…….”
“나중에 꼭 데리러 올 테니까. 기다려.”
“…….”
놀랄 정도로 순하게 풀어진 눈동자에 그늘이 사라졌다. 그러더니 가볍게 깜박거렸다. 민호는 두 번 돌아보지 않았다. 뉴트도 뭐라 한마디 중얼거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토마스는 둘의 모습이 어둠 속에 묻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제자리에 얌전히 앉아 기다렸다.
**
밤이 지나고 아침이 왔을 때, 토마스는 어제 도망간 녀석들이 결국 잡히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기다려. 나중에 데리러 올게. 눈이 까만 녀석들은 꼭 어른 같은 말을 했다. 연구원 품 안에서 뒹굴 거리다가 우유를 받았다. 그리고 혀로 우유를 핥으며 어젯밤 꿈같던 상황을 더듬었다.
갑자기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 작은 집을 사서 들어온 세 명은 이웃에게 꽤 많은 관심을 받곤 했다. 셋은 딱히 하는 일이 없는 것 같았다. 둘은 가끔 학교에 가는 것인지 바깥으로 나오곤 했는데, 한 명은 도통 집 밖으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묘한 분위기가 풍기자 다들 아닌 척하며 신경을 쓰고 있었다.
수군수군 대는 목소리가 들릴 법도 한데,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보통 마트에 필요한 물건을 사러 오는 사람은 세 명 중 유일한 동양인이었다. 가끔 곱슬한 브루넷 머리카락을 가진 녀석이 들리기도 했는데, 보통 인스턴트 음식을 사러 오곤 했다. 단단한 근육이 만들어진 몸은 멀리서 봐도 누군지 알아챌 수 있을 만큼 티가 났다. 채소를 하나하나 고르고, 파스타 면을 집어 들었다. 잠깐 고민하다 소스며 치즈를 잔뜩 쓸어 담은 채 계산대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아…네. 안녕하세요.”
짧은 인사가 오갔다. 항상 비슷한 시간에 마트에서 물건을 사는 동양인은 흔하지 않았기에, 점원들은 대부분 민호를 알고 있었다. 그 중엔 남다른 친화력으로 어느 정도 안면을 튼 사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민호는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짧게 대답을 하곤 했다.
“오늘은 좀 많이 사네요?”
“며칠 바쁠 거 같아서요.”
“아, 그러시구나.”
가늘게 웃던 여성이 바코드를 빠르게 찍었다. 눈앞에 쌓여가는 생필품을 바라보던 민호는 커다란 봉투에 주섬주섬 물건을 담기 시작했다. 제법 무거운 봉투를 바라보던 민호는 양손에 가득 안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
뚜벅뚜벅 걸어가는 길은 항상 지나다니는 곳이었다. 익숙하게 집 앞에 멈춘 민호가 목소리를 높이며 누군가를 불렀다. 양손에 물건이 가득 들려있는 터라 초인종을 누를 수 없었다.
“뉴트!”
“…….”
“토마스? 뉴트!”
“…….”
“집에 없나?”
민호가 난감한 표정으로 봉투를 내려놓으려는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가까이 다가갔던 민호는 그대로 코를 박을 뻔했다. 간신히 문을 피한 민호가 미간을 구긴 채 바라보자 안쪽에서 웃고 있는 뉴트가 보였다. 그런 얼굴을 보니 괜히 심술이 났다.
“왜 문을 안 열고 그래.”
“일하느라 못 들었지 뭐.”
“번역?”
“응. 이번 주까지 초고 보내달라고 하잖아.”
“좀 몰아서 하지 말고, 건강 좀 챙겨라.”
“잔소리는 어지간히 하지.”
민호가 들고 있는 짐을 건네받은 뉴트가 안쪽을 뒤적거렸다. 계속 들리는 잔소리를 한 귀로 열심히 흘리다 가장 안쪽에 들어있는 맥주 캔을 기어이 발견해 집어냈다. 와. 냉큼 캔을 따려는 뉴트의 손에서 맥주를 뺏으려다 실패한 민호는 한숨을 쉬었다.
“지금 먹으라고 사온 거 아니야.”
“어차피 이따 먹어도 비슷할 걸?”
“…….”
“이럴 줄 알고 네 개 사 온 거 아냐? 나 두 개. 너랑 토마스 하나씩.”
“말이나 못 하면,”
민호는 이미 냉장고를 열고 사온 재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채소와 과일을 하나둘 정리하고 파스타 면을 한군데 모아둔 뒤에야 뻐근한 허리를 펼 수 있었다. 소파에 앉아 맥주 캔을 들고 있던 뉴트는 이미 절반도 넘게 비운 캔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와서 좀 쉬지그래.”
“집이 왜 이렇게 더워?”
“더워?”
민호는 대답도 하지 않고, 곧장 셔츠를 벗으며 화장실로 걸어갔다. 뉴트는 익숙한 표정으로 에어컨 리모컨을 들었다. 그리곤 몇 번 버튼을 누르자 시원한 바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금방 온도가 낮아지는 거실에 앉아있던 뉴트는 약간 추운지 온몸을 가늘게 떨었다.
민호는 샤워를 하는지, 저 멀리서 물소리가 들렸다. 민호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려 했던 뉴트는 이런 온도에서 차가운 맥주를 먹긴 힘든지 결국 얇은 가디건을 들고 돌아왔다. 손등을 덮을 정도로 넉넉한 크기의 가디건을 몸에 걸친 채 다시 소파에 앉았다. 등을 완전히 파묻고 소파 위에 발을 올린 채 다리를 구부린 뉴트는 눈을 깜박거리며 민호가 나오길 기다렸다.
“…추워.”
뉴트의 입술을 벌써 하얗게 질려갔다.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는 뉴트는 에어컨 바람이 너무 차갑기만 했다. 그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민호는 물이 뚝뚝 흐르는 머리를 수건으로 털어내며 민소매 티를 입은 채 거실로 걸어왔다.
“안 추워?”
“한여름인데, 덥냐고 물어봐야 하는 거 아냐?”
“…….”
“난 네가 신기하다.”
“난 그쪽이 더 신기한데요?”
민호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뉴트는 민호의 어깨에 손을 대더니 고개를 저으며 물러났다. 얼마나 찬물로 샤워했는지, 싸늘하게 식어버린 체온이 손끝에 착 달라붙었다. 민호는 크게 웃으며 TV를 켰다. 뉴트는 도저히 추워서 맥주가 넘어가지 않는지 조금 남은 캔을 탁자에 올려두었다. 민호는 자연스럽게 남은 맥주를 들어왔다. 그리고 곧장 입에 털어 넣으며 한 손으론 바쁘게 채널을 돌렸다. 시끄러운 광고가 흘러나오는 TV를 잠깐 바라보던 뉴트는 곧 옆에 놓여있는 패드를 꺼내 그쪽에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
이런저런 이유로 뉴트와 토마스, 그리고 민호는 같이 살기 힘든 체질이었다. 물론 셋이서 산다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체질이 달라도 180도 다를 것이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다. 조금 어려운 상황이 있겠지만, 서로서로 조금씩 맞춰가자며 말하던 녀석들은 한 집에서 첫 여름을 맞이하고 나서야, 뭔가 크게 잘못된 것을 깨달았다.
“…….”
“…….”
“…….”
셋은 한참 동안 서로를 마주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간신히 대화의 물꼬를 튼 민호는 아직도 훌쩍거리는 뉴트를 보자 다시 말문이 턱 막혔다.
“그러니까…….”
“…….”
“어제 매우 추웠다고?”
“그래. 이 망할 놈들아.”
“…….”
“추우면 말을 하지.”
“토마스 네가 할 말이 아니거든! 내가 끄고 잤는데 네가 귀신같이 일어나서 다시 에어컨 켰잖아.”
“…….”
“진짜 얼어 죽는 줄 알았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뉴트는 조금만 기온이 떨어져도 추워서 정신이 없어지는 타입이었고, 민호와 토마스는 과할 정도로 열이 많은 체질이었다. 게다가 조금만 더우면 밤에 잠을 못 잘 정도로 더위를 많이 탔다. 이런 녀석이 둘이나 있으니 당연히 주변 사람들은 더위에 약할 거로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당연한 것처럼 에어컨을 잔뜩 틀어놓고 잤다.
물론 그 에어컨의 희생양은 뉴트였다. 아무리 이불을 꽁꽁 덮고 잔다고 해도 여름용 이불은 한계가 있었다. 훌쩍거리며 몸을 웅크리던 뉴트는 금방이라도 얼어 죽을 것 같은 체온으로 둘에게 발견되었다. 뜨거운 물을 끓인다, 온몸을 주무른다. 난리를 치고 나서야 뉴트가 눈을 떴다. 간신히 제정신이 든 뉴트는 아직도 온몸에 붙어있는 찬 기운에 다시 이불을 둘러썼다.
“내가 뭐 어떻게 된 거야.”
“그러니까…….”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에어컨 작작 켜라 그랬지.”
“덥잖아.”
“…….”
하긴 뉴트가 유난히 더위를 타지 않는 것도 있었다. 한여름에 긴소매 가디건을 걸치고 다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게다가 혼자 집에서 일하는 시간이 많은 뉴트는 절대 에어컨도 켜지 않았다. 아주 못 버틸 정도로 더울 때만 높은 온도로 잠깐 틀었다 끄곤 했다.
물론 그런 집에 들어오는 민호와 토마스는 더워서 쓰러지려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취향 차이는 걷잡을 수 없었다. 당연히 가장 중요한 것은 셋의 건강이었다. 하지만 에어컨 온도 하나로 셋의 건강에 커다란 문제가 생길 정도가 되자 다들 심각해졌다.
“너희가 찬물로 샤워하고 나올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난 네가 쓰고 난 뒤에 들어가면 숨이 막힐 정도로 덥거든.”
“그건 민호 말이 맞아.”
“…….”
“바깥 온도는 이미 더 더워질 수 없을 정도로 여름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는데 뜨거운 물로 샤워하는 게 말이 되냐.”
“그런 난 너희가 이해가 안 되거든.”
“…….”
셋 다 의견은 팽팽했다.
그리고 모두 옳은 주장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계속 나오는 다른 버릇에 셋을 슬슬 우리가 어떻게 친해졌는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긴 뉴트는 항상 뜨거운 커피만 마시더라.”
“너흰 겨울에도 찬 커피 마시잖아. 몸에 열이 많은 녀석들아.”
“그야 뜨거운 게 들어가면 더우니까.”
“진짜 신기하네.”
얼음 씹어 먹으면 이 안 시리냐. 타박에 가까운 투정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다른 점을 찾다가 결국 셋이서 갈라서는 것이 아닐까 고민했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 라고 몇 번이나 생각했지만, 아무리 봐도 공통점이란 없는 녀석들이었다. 점점 심각해지는 뉴트의 표정을 살피던 토마스가 툭 기어들었다.
“그럼 뉴트가 가운데서 자면 되겠네.”
“…뭐?”
무슨 헛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의 둘이 동시에 토마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토마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반짝이며 뉴트 옆에 붙어 앉았다.
“우린 더워서 못 자고 뉴트는 추워서 못 자는 거 아냐.”
“그렇지.”
“이런 상황에서 에어컨을 끄면 민호나 내가 못 자니까 뉴트도 괴로워질 거란 말이지.”
“그렇긴 해.”
맞는 말이었다. 둘 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난 토마스가 마저 말하지 시작했다.
“그러니까 뉴트를 가운데 두고 우리가 에어컨 바람은 막아주면서 자면 되지 않을까?”
“…….”
“왜 맞는 말이잖아. 사람 체온이 가장 따뜻하다며. 자는 동안 뉴트는 우리 둘 체온이 있어서 따뜻하니 좋고 우리는 시원해서 좋고.”
“…….”
“안 그래?”
“…….”
이쯤 되니 저 말이 맞는 소리인지 아닌지조차 생각하기 어려웠다. 토마스는 꽤 괜찮은 방법이 아니냐며 재차 자신의 의견을 관철했다. 하긴 원래 커다란 침대에서 같이 자던 녀석들이었는데, 자는 위치 조금 바꾼다고 크게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하루만 자보고 괜찮으면 그렇게 하자니까.”
어쩐지 이상한 방향으로 설득된 것 같았다. 일단 계획을 세웠으니 실행해보자는 토마스의 외침에 뉴트는 두 사람한테 허리를 잡혀 침실로 끌려들어 갔다. 야, 잠깐만! 야! 한참 침대에서 뒹굴던 녀석들은 완전히 침대에 늘어진 채 웃음을 터뜨렸다.
심장을 파고드는 금속의 감촉이, 온몸에서 빠져나가는 피가 생생히 느껴졌다. 순간 눈앞이 아득해지며 사방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눈은 분명 뜨고 있는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른쪽으로 다시 왼쪽으로. 간신히 시선을 움직이며 가쁜 숨을 토했지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아. 뉴트는 누군가에게 도와달라고 해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간신히 트여있던 귀가 점점 닫혀가는 것 같았다. 그제야 아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본 얼굴은 내내 울고 있었다.
왜 울었지? 스스로 질문은 던질 때마다 자꾸 기억이 부스러져 갔다. 조금 전 있었던 일도 기억할 수 없을 만큼 뇌가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토마스. 넌 왜 울고 있었지. 뉴트는 이미 바짝 말라버린 입술로 되물었다. 하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누군가 옆에서 대답을 해준다 하더라도 뉴트가 들을 수 없는 것일 수도 있었다.
‘…바보같이.’
숨도 쉬기 힘든 주제에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모진 말로 떼어놓으려 했는데, 그마저도 실패한 것 같아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순간 목에서 울컥 무엇인가 쏟아졌다. 따뜻한 액체는 몸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금방 식어갔다. 몸 밖으로 줄줄 흐르는 감각이 서서히 사라지고, 온몸이 아프지 않을 정도가 되어서야 뉴트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뭐라고 할까. 억울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좀 더 살고 싶었다고 해야 할까. 어차피 결과는 한 가지뿐인데 다른 길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뾰족한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 미안한데. 이젠 눈앞에 보이지도 않은 친구들 생각을 잠시 했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느낄 수도 없는 상태로 그저 누워 있었다. 이러다 정신이 완전히 녹아내리면 그걸로 된 것이리라. 뉴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굳이 눈을 감았다. 얇은 눈꺼풀에 갇힌 까만 눈은 불안하게 움직이다 서서히 멎어갔다.
‘정말 끝인가 봐.’
그 한마디 생각을 남긴 채 뉴트는 어둠 속에 완전히 잡아먹히고 말았다.
***
“…….”
일주일 째 미동도 하지 않는 실험체를 바라보는 연구원들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았다. 반쯤 죽어가던 생체 표본을 얻은 것은 행운이라 생각했다. 플레어에 감염되고도 꽤 오랜 시간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녀석은 심장과 가까운 곳에 총을 맞은 채 발견되었다. 총알이 심장을 관통하지 않은 것이 행운이라고 할 정도로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조금만 움직이면 당장 더 큰 출혈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서 연구원들은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뉴트가 총알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거의 숨이 넘어가기 직전 발견된 녀석의 상태는 영 좋지 않았다. 수술을 길어졌고,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간신히 총알을 제거하고 상처 부위를 단단히 봉합했다. 여전히 의식이 없는 녀석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에 사지가 구속된 채 회복실로 옮겨졌다. 마지막으로 목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단단히 고정한 연구원들은 그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일단 지켜보기로 하지.”
“알겠습니다.”
“상처가 아무는 것 같으면 바로 백신 임상 실험을 시행하겠다.”
플레어가 얼마나 위험한 병인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백신을 만들려고 했다. 연구원들의 손엔 아직 완벽하다 할 순 없는 백신이 있었다. 가장 중요한 실험을 남겨둔 플레어용 백신은 조건에 맞는 실험체를 찾을 수 없어 계속 보관만 되어있는 실정이었다.
“투여하겠습니다.”
“그래.”
“…….”
“이 녀석이 버티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른 실험체를 찾아야 할 것이야.”
“물론입니다.”
“버텨주면 좋겠지만, 상태를 보아하니 영 어려울 것 같군.”
사실 얌전하게 살아있는 플레어 감염자를 데리고 오는 것은 꽤 힘든 일이었다. 일단 폭력적으로 변하는 것은 물론이고, 제대로 주사기를 대기 힘들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저항도 하지 못할 만큼 죽어가는 뉴트는 꽤 괜찮은 대상이었다. 물론 죽으면 원래 그랬던 것처럼 발견하지 않은 셈 치기로 했다. 그냥 내다 버리면 그만이었다. 애초에 플레어에 감염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아이였다. 하지만 그런데도 한 줄기 희망을 믿고 있었다.
“버텨야 한다.”
조심스럽게 뉴트의 팔에 주사기를 찔러 넣었다. 색도 향도 없는 백신은 길고 굵은 바늘을 따라 천천히 몸 안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격렬한 반응이 일어났다. 더 움직이면 상처가 위험할 것 같아 일단 마취제를 처방했지만, 그것도 제대로 듣는 것 같지 않았다. 몇 번이나 의식 없는 몸이 튀어 오르고 뻣뻣하게 굳어가길 반복했다. 혈압이 급격히 치솟는가 싶더니 심장이 멈춘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뉴트의 몸 안에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이 상태에선 연구원들이 도와줄 만한 것은 거의 없었다. 고작해야 진통제와 마취제를 투여하고 백신을 추가로 접종할지 계산하는 것뿐이었다.
“일단 거울이 없는 방으로 옮기도록 해.”
“알겠습니다.”
“무슨 변화가 일어날지 모르니 굳이 얼굴이나 몸을 보여주는 것은 위험할 수 있어. 갑자기 폭주할 가능성도 있고.”
“예전에 사용하려다 폐쇄된 격리실 A를 이용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네, 그럼 지금 준비하고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여전히 의식을 찾지 못하는 뉴트는 침대에 구속된 채 연구소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격리실로 옮겨졌다. 사방엔 사각지대가 없이 설치된 CCTV가 24시간 돌아가는 방 안엔 침대 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위험이 될 만한 것은 모두 치워버린 곳은 하얀색 불투명한 타일이 가득 차 있었다.
소리도 스스로 사라질 것 같은 공간에 누워있는 뉴트는 보이지 않은 꿈을 내내 꾸고 있었다. 아주 조금씩 손끝이 움직이기도 했지만, 의식이 돌아오진 않았다. 치료하고 난 뒤엔 고통에 겨워 온몸을 뒤틀긴 했지만, 다행히 버티고 있었다. 완전히 굳어있던 몸이 서서히 풀릴 때 쯤 눈꼬리를 따라 눈물이 한줄기 흘러내렸지만,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
“…….”
물론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뇌를 파먹어 들어가는 플레어를 잡기 위해 몇 번이나 기억을 지우는 수술도 병행되었다. 이 모든 일은 뉴트가 의식이 없었을 때 벌어진 일이었고, 아무도 그 수술의 결과를 장담할 수 없었다.
이 정도 되면 의식이 돌아와야 할 텐데, 뉴트는 여전히 꿈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이젠 자극을 줘도 반응하지 않는 몸을 보며 연구원들은 하나둘 실험 정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역시 극도로 쇠약해진 몸으론 백신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다.
“…….”
“의식이 돌아왔습니다!”
“뭐?”
“일단 눈을 뜨긴 했는데, 아직 반응은 없지만, 불빛엔 반응하고 있습니다.”
“계속 자극을 줘서 깨우도록 해. 여기서 다시 의식을 놓으면 우리의 연구는 헛수고가 될 테니까.”
연구원들이 산소 호흡기를 다시 고쳐주고 온몸에 자극을 주기 시작했다. 뉴트는 간신히 어둠 속을 헤쳐 나왔다고 생각했다. 눈앞엔 불빛이 어른거렸는데, 마치 태양 같았다. 여긴. 어디지. 막연하게 자신이 도망쳤던 광인 궁전이 아닐까 했다.
“뉴트. 들리느냐.”
“…….”
“뉴트!”
그리고 전구가 깨지는 것처럼 소리가 퍽 터져버린 귓가에 여러 사람이 파고들었다. 뉴트는 간신히 뜨고 있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 시끄럽다. 사경을 헤매다 돌아온 녀석이 처음 생각한 단어는 놀라울 정도로 평범했다.
그 이후는 언제나 비슷했다. 위키드는 해야 할 일을 한다는 말투로 당연한 듯 아이를 몰아세웠다. 뉴트가 의식을 찾고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온갖 질문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뉴트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뭐라고?”
“내가 누구죠?”
“…….”
“나는 왜 여기 있습니까. 그리고 이곳은 어딘가요.”
“정말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 거냐?”
“전혀. 이런 곳에 왔던 것 같긴 한데…….”
뉴트가 말끝을 흐렸다. 기억은 잃었지만, 눈치는 여전했다. 연구원들은 몇 번이나 다그쳐 보다 일단 물러섰다. 연구원들의 행동에 잔뜩 짜증이 난 뉴트는 이불을 덮은 채 일어나지 않았다. 그 날 뉴트는 심하게 감기를 앓았다. 체온이 보통 사람보다 엄청나게 올라가서 절절 끓는 녀석은 해열제도 듣지 않았다.
그렇게 또 죽어버리나 했는데, 뉴트는 질기게 살아남았다.
몇 번이나 열이 오르내리면서 뉴트의 체온은 점점 올라갔다. 게다가 극도로 약해진 몸은 무균실에 오래 있으면서 버석버석 말라가기 시작했다. 거울도 없고, 얼굴을 비춰볼 수 없는 장소에서 뉴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고통을 혼자 이겨낼 수밖에 없었다.
“…뜨겁다.”
뉴트는 몸에서 훅훅 일어나는 불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의외로 이 녀석은 성공적인 치료용 샘플이었다. 비록 약간의 후유증과 부작용이 있긴 했지만, 죽어가던 녀석이 저 정도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기적과 같았다. 뉴트의 체온은 날이 갈수록 뜨거워졌다. 이젠 평범한 사람은 잠시만 손을 대고 있으면 뜨겁다며 손사래를 칠 정도로 열이 끓었다. 꼭 지구를 비추는 태양 같다고 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런 예쁜 비유와는 전혀 상관없는 추위와 싸우고 있었다. 몸 안쪽은 용암이 흐르는 것처럼 뜨거운데 격리실은 싸늘하기만 했다. 물론 다른 곳보다 훨씬 온도를 높여줬지만, 그 정도론 무리였다. 바삭바삭 말라가는 얼굴엔 쩍쩍 금이 갔다. 금방이라도 부서져 내릴 것 같은 모습은 사막 모래로 만든 조각 같았다. 피부 곳곳에 플레어의 흔적이 남았다. 군데군데 회색으로 변한 피부는 더는 살릴 수 없었다. 그저 그런 부분이 더 이상 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사해야 했다.
“…이래서 얼굴을 못 보게 하는 건가.”
뉴트는 왼쪽 손등에 생긴 균열을 바라보았다.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날이 갈수록 온몸에 쩍쩍 갈라진 채 굳는 부분이 생기고 있었다. 몸이 이정도인데 얼굴은 얼마나 엉망일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뉴트의 머리는 검은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이유야 알 수 없었다. 백신의 부작용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확실한 것은 또 아니었다.
정말 목숨만 살아남은 녀석은 아직도 자신이 누구인지 찾고 있었다. 그리고 기어이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 냈다. 나는 뉴트야. 하지만 그 이상 알아낸 것은 없었다. 자신의 이름을 알아내자 몇몇 단어가 머릿속에 문득 떠올랐다.
“민호. 토마스.”
뭐지. 뉴트는 혀끝에 맴도는 낯선 단어에 눈만 깜박일 뿐이었다. 하지만 무엇인가 홀린 것처럼 그 단어를 반복했다.
민호. 토마스. 민호. 토마스. 민호…토마스. 자신의 이름이라고 하는 뉴트라는 단어는 이리도 어색하고 버석버석하게 씹히는데, 저 단어들은 왜 이렇게 익숙한지 알 수 없었다. 민호는 누구고, 토마스는 또 어떤 사람일까. 나랑 무슨 관계였을까. 뉴트는 궁금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고민을 해결해 주지 않았다.
**
민호와 토마스가 원래 세계로 넘어와 헤매고 다닌 지 벌써 삼 년이 되었다.
억지로 다시 공간을 비틀고 넘어온 둘은 내내 뉴트를 찾았다. 토마스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민호의 뒤를 따랐다. 뉴트를 찾자. 민호의 그 한마디 말이 마치 족쇄처럼 토마스의 목을 틀어쥐었다. 뉴트를 찾아야 해. 토마스. 민호의 눈앞에 서 있는 녀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몇 년이 지나면서 둘은 많이 컸다. 키도 컸고, 근육도 좀 더 단단하게 여물어갔다. 하지만 그렇게 시간이 지나가는 와중에 뉴트에 관한 소식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왜 아무도 없을까.”
“…모르겠어.”
“다른 곳으로 모두 옮겨간 걸까. 아니면…….”
괜히 안 좋은 생각이 들었다. 사막에서부터 내내 자신들을 쫓던 광인들이 한순간 모두 사라졌다. 마치 원래 그런 사람들이 없었던 것처럼 텅 비어버린 사막엔 소름이 돋을 정도로 고요함만 남아있었다. 민호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멀리 버려진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벽이 반쯤 무너진 곳은 인기척이 없는 걸 보니 아무도 살지 않는 것 같았다.
“저쪽으로 가보자.”
“…….”
“아무도 없는 것 같아. 이상한 일이지만.”
“알았어.”
토마스는 몇 번이나 민호를 불러 세우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잠자코 뒤를 따랐다. 공터에서 미로를 헤맬 때와 비슷한 모습으로 둘은 달렸다. 역시 마을은 비어있었다. 민호는 벽을 주먹으로 쿵쿵 쳤다. 우수수 모래가 떨어지고 흔들거리는 것을 보니 꽤 오랜 시간 방치되어있었던 것은 확실했다. 이번에도 허탕이었다. 수소문하고 싶어도 살아있는 사람을 만난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쪽으로 가면…광인 궁전으로 가는 길인가.”
“…….”
“토마스?”
“응? 어. 맞아. 이쪽 길이야.”
“…그쪽으로 가보자.”
“하지만…….”
“뉴트가 살아있다면 원래 머물던 곳에 있을 수도 있어.”
“…….”
민호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
그 시간 뉴트는 간신히 격리실을 빠져나와, 되는 대로 헤매고 있었다. 옷은 사막에서 편히 움직일 만한 복장이 아니었다. 체온이 너무 올라가서 바깥이 뜨겁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두툼한 목도리를 둘둘 감은 채 간신히 눈만 내놓은 상태로 정처 없이 걸음을 옮겼다.
“여긴 어디지.”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간신히 만난 사람은 사막 모래에 반쯤 묻혀있는 송장이었다. 띄엄띄엄 광인들이 죽어있는 것을 이정표 삼아 광인 궁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물론 뉴트는 그 장소를 기억하지 못했다.
여전히 바짝 마른 손목은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본능이 시키는 대로 걷는 뉴트 뒤로 긴 그림자가 끓어올랐다. 체온은 점점 뜨거워져서 온몸의 피가 그대로 말라붙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