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가 위키드 연구소에서 기억하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애초에 연구소에 놀러 온 것이 아니었기에, 많은 활동을 하지 않았다. 연구원들은 기본적으로 토마스에게 상냥하게 대해주었지만, 어린 아이는 그것보다 좀 더 많은 관심을 원하곤 했다. 항상 친구가 아쉬워하는 아이를 토닥거리며 달래주긴 해도, 그 이상 해줄 방법이 없었다. 물론 토마스도 그런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연구에 필요해서 데려온 아이들이라지만 하나하나 신경을 써줄 순 없었다.
‘…그래도 심심한 데.’
또래 하나 없이 어른들만 가득한 공간은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날수록 점점 재미가 없어졌다. 하루 세끼 밥을 먹고 위에서 시키는 대로 연구를 진행했다. 한 치도 어김없이 이뤄지는 생활에 지친 토마스는 점점 입이 짧아졌다. 하긴 연구소 밥이 그리 맛이 있는 편도 아니었다. 물론 영양 면으로 보면 하나도 빠지지 않는 식단이었다. 몇 달씩이나 군 말없이 밥을 먹었지만,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아홉 살도 안 된 아이의 입장으론 꽤 많이 참았다.
“이거 맛없는데.”
“그래도 먹어야지.”
“맛없어요. 자꾸 고무 씹는 거 같고.”
“토마스.”
“…….”
흔한 밥투정 한 번안하던 아이가 칭얼거리기 시작하니, 어른들도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결국, 밥을 반도 넘게 남긴 토마스가 시무룩한 얼굴로 식판을 들고 일어났다. 조금 더 먹으라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식판을 반납한 후 터덜터덜 방으로 돌아갔다. 그런 상태를 하나하나 보고받은 에바 페이지는 몇 가지 처방을 내렸다. 토마스는 플레어 치료제를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존재였고, 벌써 몸이 망가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른들 손에 이끌려 억지로 걸어온 아이는 여전히 시무룩했다. 그런 아이의 푸석한 눈을 바라보던 연구원이 주위를 둘러보다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무엇인가를 꺼내 손에 들려주었다. 손바닥에 한 움큼 잡히는 바삭하고 매끄러운 질감에 토마스가 눈을 크게 떴다.
“선물.”
“…….”
“숨겨 놨다가 하루에 하나씩만 먹어야 해?”
“…….”
“괜찮아. 주머니에 넣고 가렴.”
“…감사합니다.”
여전히 어정쩡하게 사탕을 든 채 자기를 바라보며 눈치를 보는 아이가 안쓰러웠는지, 직접 가운 주머니에 사탕을 넣어주었다. 토마스는 조금 생기가 돌아왔고, 걱정이 가득하던 연구실은 좀 더 안심할 수 있었다.
* * *
며칠이나 지났을까. 연구소 안이 제법 소란스러웠다.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토마스는 여전히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이 웅성거림의 원인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하나같이 바쁜 사람들은 아이의 질문에 답을 해줄 시간도 없는 것 같았다. 간신히 연구소 문 근처까지 간 토마스의 눈에 반짝거림이 한가득 피어났다.
“…우와.”
토마스의 눈에 들어온 건 자기 또래의 아이들이었다. 막 연구소에 들어왔는지,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가득 찬 눈이 계속 움직이면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토마스는 어른들의 다리에 매달려서 내내 친구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친구라는 관계를 거의 경험하지 못한 아이에겐 과할 정도의 자극이었다. 그중에 까칠하게 마른 것 같으면서도 다부져 보이는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
부스스한 더티 블로드가 눈썹보다 좀 더 길게 내려왔다. 조약돌처럼 반질반질하고 까맣게 빛나는 눈동자가 머리카락에 살짝 가려져 그늘이 졌다. 토마스는 당장 뛰어가서 손을 잡고 이름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아이들이 우르르 지나가고 나자 안 그래도 커다랗던 공간은 훨씬 더 넓어 보이기만 했다. 토마스는 내내 그 녀석을 찾았지만, 우연인지 아닌지. 좀처럼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시무룩해졌다가도, 새로 들어온 아이들 소식을 들으면 얼굴이 활짝 펴졌다. 어른보단 역시 또래가 좋은 나이였다. 새로 들어온 아이들은 적응할 시간을 줘야 한다는 빌미로 아직 연구원들과 공식적인 인사를 하지 않았다. 게다가 몇 층 몇 번 방에서 살고 있는지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그 동안 토마스의 상상은 점점 부풀어만 갔다. 요즘 들어 투정이 줄었다면서 너스레는 떠는 연구원들도 한시름을 놓은 것이 분명했다.
“빨리 만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직 애들이 준비가 안됐다고 하던걸.”
“…섭섭해요. 언제쯤 인사를 할까요?”
“며칠만 참으면 되지 않을까? 대신 토마스가 조금 먼저 들어왔으니, 밥투정한다거나 떼를 쓴다거나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당연하죠!”
“역시 착하구나.”
갑자기 어른스럽게 행동하려는 것이 내내 귀여운지 연구원들은 토마스에게 모른 척 사과를 주기도 했다. 토마스는 친구들을 만날 때까지 받은 간식을 모아두고 싶어 했지만, 사과는 오래 저장할 수가 없었다.
* * *
뉴트는 이 주일이 더 지나고서야 간신히 만날 수 있었다. 물론 토마스가 냉큼 손을 붙잡았을 때, 까만 눈이 확 커지며 그 손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굳이 손을 매정하게 빼내진 않았다. 조금씩 친해지기엔 연구소 환경은 너무 척박했다. 한순간 깊게 서로의 생활 속으로 들어온 둘은 곧잘 서로를 보며 웃곤 했다. 어른들만 가득한 공간에 간신히 자리 잡은 아이들만의 시간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물론 둘이 하는 길이 조금 다르긴 했다. 먼저 들어온 토마스가 상대적으로 높은 등급의 연구에 소속되어있던 터라 만날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었다.
“뛰지 마. 넘어져.”
“하지만…걸어오면…시간이 아까운걸.”
“정말…바보구나.”
“나…바보…아니야. 뉴트…만나려고 온 거라고.”
“알았어.”
새빨간 얼굴로 헉헉대는 토마스를 바라보던 뉴트가 웃으면서 등을 두드려줬다. 한참동안 헉헉거리면서도 뭐가 좋은지 웃는 녀석을 보다 보면 자기도 어쩔 수 없이 입 꼬리가 올라갔다. 쉬는 시간은 턱없이 짧았고, 할 이야기는 많았다.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다가 아쉬운 듯 잡고 있는 손을 놓았다. 마지막까지 잡고 있던 새끼손가락을 놓고 나서도 열 걸음도 가지 못해서 다시 뒤를 돌아봤다.
“밥 먹을 때 봐.”
“응!”
“늦으면 혼나잖아. 어서 가봐.”
“…응.”
“어서. 토마스.”
아쉬운 듯 걷다가 시간을 보고 다다다 뛰는 모습이 한없이 불안해 보였다. 물론 그렇게 휘청거리면서도 좀처럼 넘어지지 않는 것이 신기했지만. 저녁 시간이 될 땐 항상 뉴트가 토마스를 데리러 갔다. 조금 늦게 끝나는 녀석을 기다리며 복도에 서 있으면 여지없이 문이 벌컥 열리면서 반질한 머리가 불쑥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리곤 서로 몇 번이나 눈치를 보다가 슬그머니 손을 잡았다. 서로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상대방의 체온에 살짝 웃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저녁 시간도 더는 지겹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맛이 없어. 늘 똑같은 식단을 보는 아이는 작게 툴툴거리면서 뉴트의 귀에 소근거렸다. 우주식처럼 최대한의 편의성을 추구하는 밥은 아무리 먹어도 익숙해질 수 없었다. 둘이 사이좋게 식사를 끝내고 식판을 들고 일어섰다. 지금부터 취침시간이 되기 전까진 온전히 둘만의 시간이었다. 토마스가 몇 번이나 망설이는 것 같다 뉴트의 손을 잡았다.
“…왜?”
“내 방에 갈래?”
“응?”
“줄 게 있어. 뉴트!”
“그래.”
조그만 아이 둘이 서로 귓가에 소근 대며 복도를 돌아 사라졌다. 저녁을 먹던 연구원들은 괜히 뿌듯한 마음에 이젠 옷자락도 보이지 않는 복도를 내내 쳐다보았다. 아까 봤어요? 봤지. 잠시 둘에 대한 이야기로 소란하던 테이블이 하나 둘 자리를 뜨자 다시 조용해졌다.
* * *
토마스는 뉴트를 침대에 앉혀두고 부산스럽게 책상을 뒤지고 있었다. 뉴트는 그 모습이 재밌는지 팔로 턱을 괸 채 지켜보았다. 두 번째 서랍 가장 깊숙한 곳에서 꺼낸 작은 유리병을 소중하게 쥔 토마스가 냉큼 의자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침대에 올라앉았다. 토마스의 가운이 바사삭 구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자!”
“이게 뭐야?”
“사탕.”
“…….”
“아껴먹으라고 받은 건데, 같이 나눠 먹고 싶어서.”
“…나 사탕 언제 먹어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나도 그랬는걸. 여기서 선물로 받았을 때만 생각나.”
“…….”
“뉴트 손 펴봐.”
뉴트의 손바닥에 노란 레몬 사탕을 떨어뜨려 준 토마스가 또 생글거리며 웃었다. 투명한 비닐을 까서 입에 넣은 뉴트는 입안 가득 퍼지는 레몬의 새콤함에 눈을 크게 떴다. 맛있어. 우물거리느라 볼이 불룩해진 뉴트를 보는 토마스도 마냥 즐거웠다. 자기도 오렌지 사탕을 까서 입에 넣었다. 어느새 이불 위에 포개진 두 손은 서로 꼭 맞잡고 있었다. 손가락을 살짝 움직일 때마다 겹쳐있던 손도 같이 꼬물거렸다.
“뉴트.”
멍하니 뉴트를 바라보던 토마스가 홀린 듯 뉴트의 이름을 불렀다. 까만 눈과 샴페인 색 눈동자가 공중에서 마주쳤다. 그 순간 뉴트의 볼에 따뜻한 것이 닿았다. 눈만 깜박거리던 뉴트가 상황 파악을 했을 땐 이미 토마토만큼 새빨갛게 익은 토마스가 고개를 정 반대편으로 돌리고 모른 척하고 있는 광경만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
어. 손으로 천천히 볼을 쓰다듬던 뉴트의 얼굴도 달아올랐다. 입속에선 여전히 단 맛이 폴폴 올라오는데, 얼굴은 터질 것 같았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손만 만지작거리던 녀석들은 확확 달아오르는 체온을 주체하지 못했다.
평범한 세상 연예인 AU 입니다. 플레어는 발병하지 않았고, 다들 알아서 잘 살고 있는 세계.
토마스가 한명인데 3인분을 하고, 뉴트가 그 토마스를 잡으러 뛰어다닙니다.
+) 지금에서야 생각났는데 뉴트가 토마스보다 나이가 많습니다. 민호>뉴트>토마스 순
적당한 망상과 설정 붕괴가 언제나 함께 합니다 ㅇㅅㅇ)9
선연재분이 끝났습니다!
이 이후 작업물은 5월 코믹에 회지로 만들어집니다 봐주셔서 감사해요!
어느정도까지 연재 후 뒷부분을 추가해 회지로 만들 예정입니다.
책이 나와도 연재한 분량 자체를 지우진 않습니다.
이 글은 썰 같이 풀어주신 촐님(@go00chol) 에게!
write. 환월
004
집에 돌아왔지만, 별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문을 열자마자 냉큼 안으로 뛰어들어간 토마스는 소파에 웅크린 채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예의 쿠션을 꽉 끌어안은 채 입술을 푹 파묻었다. 불룩하게 부어오른 볼을 바라보던 뉴트는 내내 한숨만 내쉬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싶은데, 정작 당사자는 말해줄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소파 한구석에 바짝 붙은 녀석을 가만히 바라보다, 그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소파 가죽이 구겨지는 소리에 토마스가 반쯤 튀어 올랐다. 슬금슬금 곁눈질로 옆을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여전히 입은 꾹 다물고 있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건데.”
“…마음에 안 들면 마음에 안 든다. 뭐가 불편하면, 불편하다. 말을 하라니까?”
“…….”
“저기, 여기 좀 보세요. 그쪽이 날 고용한 거 맞지? 그러면 당당하게 요구를 하던가.”
“…….”
“정말 답답하네.”
“…어차피 말해도 안 믿을 거 다 아니까 말 안 할래요.”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
토마스가 눈을 깜박였다. 긴 속눈썹 안에 갇힌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다들 안 믿었으니까, 형도 굳이 알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지금 이런 바보 같은 상황을 그대로 지속하자고? 날 못 본 척하고 멋대로 움직이는 것도 내버려두고?”
“그건…아니지만.”
“…….”
들을수록 답답했다. 도대체 얼마나 큰일이기에, 다들 못 믿는다는 걸까. 사실 뉴트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이렇게 심각하게 운을 띄운 사람 치고 정말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늘어놓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고작해야……. 깊게 생각을 하려다 고정 관념을 만들지 말자고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사람의 마음은 간사해서 항상 나쁜 쪽으로 생각하곤 했다.
“…….”
뉴트가 동요하지 않을수록 토마스는 점점 더 초조해 하는 것 같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예전 매니저들은 이런 식으로 말하면 적당히 넘어가 주곤 했다. 물론 그렇게 축적된 일이 한 번에 터져서 매니저가 쉽게 바뀌긴 했지만. 어쨌거나 한순간의 고비는 넘기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한테는 전혀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뭐라고 말해도 놀라지 않을 거니까. 말해봐.”
“분명 놀랄 텐데.”
“안 놀란다니까.”
“놀라는 것도 모자라서 날 미친놈으로 볼 게 분명하니까.”
“…안 그런다니까?”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말했어요. 하나같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토마스가 문득 자신의 손가락쯤에 닿아있는 까맣고 단단한 시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뉴트는 그런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줬다. 잔뜩 부풀려진 불안감을 구겨 넣은 눈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짙은 샴페인 같기도 하고, 다시 보면 호박 같기도 한 눈이었다.
“…….”
“말해봐.”
“…….”
“적어도 매니저와 연예인 사이엔 숨기는 일이 없어야 된다고 생각해.”
“…….”
“날 믿는다면, 말해봐.”
“…….”
낯은 목소리가 조근 조근 토마스의 귀에 스며들었다. 특유의 그 독특한 발음이. 그리고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으려 할 때마다 생긴 불협화음이 토마스의 귀를 통해 심장에 닿았다. 계속 말해보라고 했다. 몇 번이나 말을 하지 않겠다고 버텼지만, 뉴트는 전혀 물러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쯤이면 예전 매니저들과 뭔가 다른 성격이라고 알아차렸어야 했다. 하지만 그것을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다.
“웃지 않을 거죠?”
“안 웃어.”
“…….”
“말해보라니까?”
“형한테 못 말하겠어요.”
“…….”
도대체 왜 이렇게 뜸을 들이는지. 결국, 속으로만 우물거리다 포기한 녀석은 잔뜩 주눅이 든 채 뉴트 눈치를 봤다. 결국 뉴트가 먼저 항복했다. 성격 같아선 잠도 재우지 않고 끝까지 추궁해야 마땅했지만, 당장 내일도 촬영이 있었다. 이러다 혹시 촬영에 지장이라도 가면 큰일이었다. 영 찝찝했지만 이 정도로 그만두기로 했다.
뉴트가 한걸음 물러서자 소파에 잔뜩 웅크리고 있던 몸이 조금씩 펴졌다. 여전히 뉴트의 눈치를 살피던 녀석이 조용히 일어났다. 일부러 시선을 반대 방향으로 돌려주고 나서야 거실을 벗어나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방문이 조용히 닫혔다.
그리곤 다시 열리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거실에 한참 서 있던 뉴트는 그제야 포기했다. 거실 불을 끄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여전히 적응이 안 되는 침대를 바라보다가 대충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곤 푹신한 침대에 아무렇게나 누워 있었다. 그것도 잠시 괜히 토마스가 신경이 쓰여서 뒤척거리기만 했다.
한번 신경을 쓰기 시작하니, 바짝 당겨진 정신이 몰려오는 피곤을 밀어냈다. 불을 끄고 나서도 한참 어둠 속에서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점점 더 또렷하게 돌아오는 정신은 지금 당장 바로 앞의 방문을 열어보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모르겠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토마스가 뉴트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만큼, 뉴트도 토마스의 사생활을 지켜줘야 했다. 별다른 움직임이 없으니 잠을 자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내내 뒤척거리던 뉴트가 설핏 잠이 들었다. 잠이 다 깬 줄 알았는데, 일단 눈을 감으니 한 번에 몰려왔다. 방금까지 졸리지도 않은 것 같았는데, 갑자기 몰아치는 잠을 이기지 못한 뉴트가 이불을 더듬더듬 잡아서 좀 더 끌어당겼다.
“…….”
얼마나 잠을 잤을까.
뉴트의 방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한 뼘 정도 열린 문은 잠시 머뭇거리며 멈춰있었다. 그리고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마나 조심스럽게 여는지 경첩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희미한 취침 등이 가득한 방 안엔 가늘고 낮게 흐르는 숨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가끔 뒤척일 때면 이불이 구겨지면서 사박사박 소리를 냈다.
완전히 문이 열리자 길쭉한 몸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품 안에 커다란 베개를 안은 채 한참 침대 앞에 서 있던 녀석이 조심스럽게 뉴트를 내려다보았다. 완전히 잠든 뉴트는 어느 정도 소음이 들려도 깨지 않았다. 그대로 주저앉아서 침대에 턱을 올려놓았다.
“…….”
으음. 뉴트가 이불을 좀 더 당겨 덮으며 돌아눕자 한사람이 누울만한 공간이 생겼다. 조심스럽게 이불을 만지작거리던 녀석이 조용히 일어서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여전히 꽉 끌어안은 베개를 좋지 않았다. 아슬아슬한 긴장이 희미한 불빛을 타고 흘러내렸다. 뉴트가 잠에서 깨지 않는 것을 확인한 토마스가 조심스럽게 빈자리에 몸을 뉘었다. 푹신하게 뺨에 닿는 시트를 느끼면서 눈을 반쯤 감았다.
토마스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생각보다 뉴트의 잠귀가 밝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리자 잠에 잔뜩 젖은 눈을 반쯤 떴다. 그리곤 느리게 깜박이다 다시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꿈속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눈을 뜬 뉴트는 잠이 싹 달아난 표정이었다. 깜박. 깜박. 깜박. 잔뜩 긴장한 눈이 빠르게 깜박거렸다. 뭔가 등 뒤에서 묵직한 것이 느껴지긴 하는데, 정체를 알 수 없었다.
“…….”
얌전히 있는 것을 보자면 해를 끼치진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구 움직일 수도 없었다. 어색하게 계속 자는 척을 하는 어깨엔 점점 힘이 들어갔다. 잔뜩 긴장한 입술에서 살짝 흐트러진 숨이 흘러나와 침대에 흩어졌다. 다행히 등 뒤에 있는 것은 뉴트가 일어난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슬쩍 떠보려고 이불을 끌어당기는 척 부스럭거렸지만, 큰 움직임은 없었다.
‘…뭐지.’
그 순간 뒤에서 커다란 손이 뉴트의 허리를 콱 붙잡았다. 비명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손으로 틀어막은 뉴트가 눈만 깜박거렸다. 허리를 붙잡은 손에 이어 누군가 뒤에서 뉴트를 껴안고 있었다. 도대체 뭐야. 이게. 정신이 없었다. 도둑이 들었다면 물건이나 훔치고 나가지, 이렇게 느긋하게 희롱을 하지 않겠지. 물론 강도라면 말이 다를 수도 있지만, 적어도 토마스가 사는 집이 그렇게 허술하진 않을 것 같았다. 어깨에 닿는 숨결이 느껴지자 뉴트는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뒤를 돌아왔을 때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뭐야?”
뉴트의 허리에서 툭 떨어진 손을 가만히 보았다. 그리고 팔을 쭉 따라가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자기 방에 들어가서 자고 있던 녀석이 왜 자신의 침대에 웅크리고 누워있는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품에 들고 온 베개는 무엇인지. 어른을 찾는 아이처럼잔뜩 웅크린 몸이 이불 위에 누워있었다. 뉴트의 허리에서 떨어진 손을 갈 곳을 잃은 것 같았다. 그러다 베개를 꽉 쥔 채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을 찡그렸다.
“도대체 뭐야. 이놈.”
“…….”
“토마스?”
“…….”
뉴트는 토마스가 몽유병이 있는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잘 자던 방에서 굳이 여기까지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자신이 세웠던 가설 중 하나가 맞는 것 같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해졌다. 매일 밤 이렇게 아무 곳이나 헤매고 다니다 잠이 들면, 다음날 감기에 걸릴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다 큰 사람을 침대에 묶어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토마스를 깨워서 자초지종을 들으려 했다. 하지만 얼마나 깊게 잠이 들었는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뉴트는 아주 잠깐 그대로 여기서 재울까 싶었다. 잘 자는 녀석을 굳이 깨울 이유가 없긴 했다. 사실 침대는 둘이 누워도 남을 만큼 넓었고, 이불도 모자라지 않았다. 물론 토마스가 이불 위에서 그대로 웅크리고 있다는 것이 조금 문제이긴 했다. 정 안되면 토마스 방에 있는 이불이라도 들고 올 생각이었다.
“…으응.”
“깼네.”
“…….”
“아침에 제대로 이야기하려 했는데…굳이 이렇게 오밤중에 사람을 놀라게 해야 했니.”
“…….”
“얘가 또 왜 이래.”
간신히 졸린 눈을 비비며 눈을 뜬 녀석이 잔뜩 겁을 집어먹을 얼굴로 뉴트를 바라보았다. 마치 낯선 어른을 본 어린아이처럼 허겁지겁 베개에 얼굴을 숨겼다. 뉴트는 어이가 없어서 웃고 말았다. 민망해서 저러는 것인가 싶었는데, 토마스는 진심이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이 애써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또 모르는 사람을 보는 시선을 받자 뉴트가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다시 한 번 뒤집었다.
“토마스.”
“…누구세요?”
“…….”
“밀레드 형…어디 갔어요?”
“…….”
살짝 떨리는 목소리가 어젯밤에 듣던 것보다 어려진 것 같았다. 뉴트는 그런 생각을 치우기 위해 고개를 휙휙 저었다. 아무래도 저놈의 술수에 그대로 말려든 것이 분명했다. 뉴트가 침대에서 내려와 전등을 켰다. 그러자 갑자기 밝은 빛을 본 토마스가 눈을 잔뜩 찌푸리며 버둥거렸다. 스스로 생각해도 참 웃긴 상황이었다.
“이제 말해봐. 왜 이러는 거야.”
“…….”
“토마스.”
“나…그러니까…….”
“내 눈을 보고 제대로 말해.”
“…….”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눈꼬리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소리도 나지 않는 눈물과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에 오히려 당황한 쪽은 뉴트였다. 심하게 다그쳤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한마디 했을 뿐인데.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어색하게 손을 내민 뉴트가 울지 말라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침대 위에서 엉엉 울고 있는 다 큰 어른을 바라보고 있자니 기가 막혔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한참을 울던 녀석이 코를 훌쩍이며 간신히 진정했다. 진이 쪽 빠진 뉴트가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오늘도 오후 촬영인 것을 감사히 여기기로 했다. 야간 촬영이면 더 좋을 텐데. 점점 잦아들어 가는 울음소리를 끝까지 들어주던 뉴트가 고개를 들었다. 그 시선 끝에 토마스가 걸려있었다. 토마스는 그 반질반질한 눈빛이 부담스러운지 몸을 조금 웅크렸다. 도대체 어떤 것에 저리도 겁을 집어먹었는지 알 수 없었다.
“토마스.”
“…….”
“토마스? 응? 나 좀 봐봐.”
“…….”
“응?”
한껏 누그러진 목소리로 토마스를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뉴트를 아는 사람이 본다면 상상도 하지 못할 부드러움이었다. 마치 아이를 달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뉴트는 자꾸 목에서 올라오는 당황스러움을 꾹꾹 참으면서 토마스를 차분하게 설득했다. 단순한 것인지. 아니면 지나치게 순진한 것인지. 토마스는 뉴트가 부드럽게 대해주기 시작하자 금방 경계를 풀었다. 조금씩 가까이 오는 녀석은 어느새 뉴트한테 바짝 붙어 있었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속으로 한숨을 쉰 뉴트가 토마스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속눈썹이 푹 젖을 정도로 맺혀있던 물기가 사라졌다.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녀석을 받아주는 것은 조금 버거웠다. 하지만 이 정도로 진정이 된다면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응?”
“형이…….”
“숨기지 말고 천천히 말해봐. 나 화 안 낼 테니까.”
“…….”
“토마스?”
순간 또 시선이 저 멀리 흩어졌다. 세 갈래로 쪼개졌던 눈빛이 다시 한 곳을 바라보기 시작하자, 흔들리던 것이 점점 가라앉았다. 뉴트는 잠자코 그 눈빛의 끝을 따라갔다. 아까보다 많이 진정된 모습이었다. 그러더니 문득 옆에 앉아있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뉴트?”
“그래. 왜?”
“…….”
“다들 내가 이래서 하루 만에 도망가기도 하는데…….”
“…….”
“그래서 굳이 말 안 하려고 했거든요. 길게 말해봤자 다들 안 들으려고 하니까.”
뉴트는 뭐라고 말을 할 수 없었다. 왜 그렇게 말을 아꼈는지 알 수 있으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복잡하게 얽힌 머릿속을 정리하고 나서 토마스를 쳐다보았다. 그제야 살짝 흔들리고 있는 눈동자가 보였다. 여러 번 상처받은 모습을 뉴트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진작 좀 말해주지. 드디어 방어적으로 나오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하긴. 남들보다 좀 침착하다고 생각하던 자신도 그렇게 놀랐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싶었다.
“…….”
“밀레드 형이 되게 잘해줬거든요. 처음 이럴 때도 막 소리 지르지도 않고.”
“…….”
“뉴트 형도 그랬던 것처럼. 근데 워낙 제가 바쁘기도 하고, 다들 못 버텨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손가락만 툭툭 튕기고 있는 것을 보니 조금 짠해졌다. 쉽게 말 못할 일인 것은 확실했고, 그것을 모두 이해해 주리라곤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한마디 잘못 새어나간 것이 큰 타격이 될 수도 있었다. 슬슬 매니저를 왜 그렇게 꼼꼼하게 골랐는지도 이해가 될 것 같았다. 아이고. 뉴트가 살짝 미간을 구기면서 토마스의 손을 덥석 잡았다. 깜짝 놀라서 펄쩍 뛰어오른 녀석이 침대에서 미끄러질 뻔했다.
“토마스.”
“…….”
“난 절대 네 매니저 그만두지 않을 거니까. 말해 봐. 그래야 나도 널 도와줄 수 있어.”
“…….”
“어차피 우린 한 배를 탔으니까, 서로 터놓고 가는 쪽이 편하지 않을까? 적어도 오늘처럼 이렇게 갑자기 방으로 걸어 들어온다 해도 놀라진 않을 거 아냐.”
“…….”
좀처럼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하긴 저런 말을 믿었다 몇 번이나 낭패를 본 적도 있었다. 애써 묻어두었던 상처가 왈칵 살아 올라왔다. 지금은 도망가지 않았다고 해도 언제 바뀔지 모르는 것이 사람 마음이었다. 결국, 그런 토마스를 바라보고 있던 뉴트가 먼저 두 손을 들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내가 추측한 걸 너한테 말해볼게.”
“…….”
“맞으면 맞다. 아니면 아니다만 말해줘. 나도 그럼 더는 물어보지 않고 지낼 테니까.”
“…….”
“알았지?”
“…응.”
겨우 토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뉴트는 자세를 돌려서 그런 녀석을 바라보았다. 엉겁결에 뉴트를 마주 보게 된 토마스는 눈을 깜박거리면서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했다. 뉴트는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 지 조심스럽게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내가 아침에 처음 왔었을 때, 지금 토마스 같은 상태는 아니었지?”
“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리고 그 아침에 봤던 녀석은 어제 촬영 때 보였던 표정의 토마스와 같은 녀석 일 거야. 내 추측이 맞아?”
“…응.”
“그래.”
또 말이 없어졌다. 하지만 처음 운을 떼는 것이 어려웠지, 그다음은 조금 쉬웠다.
“아까 방으로 올 때 울던 애는, 또 다른 녀석이야?”
“…….”
“약간 어린 것 같았는데, 이것도 맞을까?”
토마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뉴트는 참을성 있게 직접 말해주길 기다렸다. 사실 이 정도 말했으면 거의 다 알고 있다고 봐도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스스로 말하지 않는 일은 추궁하듯 따질 수 없었다.
“…그게.”
느릿하게 흘러나온 목소리는 약간 갈라져 있었다.
“처음엔…잘 몰랐는데. 나이를 먹으면서 알게 됐어요.”
“…….”
“제일 먼저 안 건 토마스였고, 제일 나중에 안게 톰이거든요. 사실 어렸을 땐 막 그런 기억이…잘 없었는데, 고등학교 때쯤엔 확실하게 인식이 되기 시작했어요.”
“토마스가…그 까칠한 애?”
“…네.”
“톰은? 잠깐 다들 널 토마스라고 부르잖아?”
“대외적으론 다들 그렇게 부르는데…일단 이름은 그렇게 되어있으니까요. 하지만 다른 애들은 절 토미라고 부르…….”
또 말을 잘라먹는다. 뉴트는 이제 놀라지도 않았다.
“톰은 일곱 살? 여섯 살? 사실 나이는 잘 모르는데…여하튼 생각보다 많이 어려요.”
“…….”
“그래서 밤도 굉장히 무서워하고, 어려서 혼자서는 잠을 잘 못 자는데…그래서 저희는 자고 있어도 톰은 밤에 자주 깨니까. 가끔 매니저 형들 방으로 찾아가요.”
“…그래서.”
토마스가 말해준 이야기는 생각보다 많이 길었다. 몇 년 동안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참고 있던 말을 모두 털어놓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물론 중간 중간 쉬는 시간이 더 많았던 것도 맞았다. 뉴트는 재촉하지 않았다. 말하다가 목이 막히기도 하고, 목소리가 뒤집어지기도 했다. 드문드문 이어지던 말이 잠시 뚝 끊겼다. 눈가가 붉게 달아오른 토마스가 손바닥으로 눈가를 꾹꾹 눌렀다.
“…지금도 다들 깨어 있어?”
“그렇긴 한데 나오고 싶진 않은가 봐요.”
“그래. 어려운 이야기 해줘서 고맙다.”
“형이야말로…미안해요. 나 같은 녀석 아니더라도 편한 연예인들 많을 텐데. 되게 이상하죠?”
“이미 계약서에 도장 다 찍었는데, 인제 와서 그런 말 하는 거야?”
“…….”
“또 그런 표정을. 너를 나무라는 건 아니야. 어차피 나도 내가 결정해서 온 건데. 대신…….”
“…대신?”
“너도 날 조금만 더 믿어주면 좋겠어. 그리고 시간 되면 다른 애들도 소개 좀 해주고.”
“네? 네.”
토마스가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해본 것이 족히 일 년은 됐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화려하게만 보이던 녀석이 조금 짠해졌다. 뭔가 조금 엉킨 실의 끝이 보이는 것 같았다. 토마스가 베개를 집어 들고 일어섰다. 이제 괜찮으니까 돌아가서 자겠다고 일어나는 것을 뉴트가 굳이 잡아서 다시 앉혔다.
“어차피 애가 깨면 또 올 거 아냐. 무서워한다며.”
“…….”
“그냥 여기서 자.”
“하지만…불편할 텐데.”
“이럴 줄 알고 내가 침대 큰 거로 사달라고 했나 보지. 둘이 자도 넉넉한 데 뭐.”
뉴트가 토마스를 밀어서 눕히고 이불을 덮어줬다. 그리곤 침대를 빙 돌아서 자기 자리에 누웠다. 어색하게 등을 보이고 누운 채 짧게 잘 자란 인사를 했다. 토마스는 가끔 이불만 부스럭댈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서로 돌아보지도 말도 하지 않은 채 잠을 청했다.
무작정 토마스를 불러 세운 뉴트는 한참 말이 없었다. 손에 한가득 자료를 들고 막 발로 문을 열던 토마스가 그대로 멈춰 섰다. 그리고 고개만 돌린 채 뉴트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장난스럽게 물어\봤지만, 뉴트의 표정은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왜?”
“…….”
“불렀으면 말을 해. 나 무거워.”
“혹시 우리가 기억을 모두 잃으면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까?”
“그게 무슨 말이야? 위키드가 이번에 그런 실험을 한다고 했어? 실험체를 쓰는 것이 아니고 우리로?”
“아니…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그런 걱정을 왜 해? 어차피 일어나지 않을 일인데.”
“그런가.”
“뉴트, 오늘따라 피곤해 보여.”
“내가 좀 예민했나 봐.”
뉴트가 그 말을 끝으로 대화를 끊었다. 그리고 소파에 앉았다. 바스락 소리를 내며 구겨지는 하얀 가운이 시트를 따라 흘러내렸다. 한마디 더 하지 않고 그대로 소파 등받이에 고개를 젖힌 채 눈을 감는 것을 보던 토마스가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 간다? 갈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토마스가 몸으로 문을 지탱하고, 두 손으로 든 책을 낑낑거리며 아슬아슬하게 방을 빠져나갔다. 탁. 짧은 소리와 함께 방 안엔 뉴트 밖에 남지 않았다. 익숙한 정적이 흐르자 가늘게 눈을 떴다. 까만 시선이 아무런 무늬가 없는 하얀 천장을 바라보았다.
“정말…그렇다면 우리는 서로 알아볼 수 있을까?”
언제나 같은 쳇바퀴는 도는 하루 중 갑자기 든 의문이었다.
***
위키드 연구소는 새롭게 나타난 면역체를 가진 아이들의 뇌를 연구해서 플레어란 질병의 치료제를 만들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본과 넓은 부지, 그리고 수많은 연구원이 필요했다. 물론 여기에 더 필요한 것이 있었다. 바로 실험을 하기 위한 면역체계 실험 군이었다. 위키드 연구소에 속한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이것이 인륜을 어기는 일이었다. 수많은 아이를 통제하기 위해선 당연하게 폭력이 수반되었다. 모두 그런 일은 보지 않으려 했고, 듣지 않으려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치부하며 묻기 바빴다.
게다가 실험군으로 분류된 아이들만 괴롭힌 것도 아니었다. 소위 엘리트 그룹이라고 분리되어있는 쪽도 어김없이 위키드의 손길이 미쳤다. 토마스. 뉴트. 민호. 그리고 몇몇 아이들. 똑똑하고 치료제의 핵심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따로 걸러내어 데려온 남자 아이들 이었다. 물론 그 중에서 토마스의 레벨이 가장 높았다. 다른 아이들이 보지 못하는 고위 정보까지 열람할 수 있는 녀석은 종종 부러움과 시기의 대상이 되곤 했다.
“뉴트!”
“뭐야.”
“오늘 실험은 끝났어? 같이 갈래?”
“갑자기 왜 이렇게 친한 척이야.”
“뉴트, 보고 싶었어. 응?”
자연스럽게 뉴트의 옆자리를 꿰찬 녀석을 보던 아이들이 낮게 무엇인가 중얼거리며 자리를 비켜줬다. 뉴트는 그런 시선을 똑똑히 알 수 있었지만, 토마스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사실 토마스가 뉴트를 좋아한다는 것은 연구소 내에서 꽤 유명한 이야기였다. 대놓고 좋아한다는 소리만 안 했을 뿐이지 마치 서로 사귀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부담스러워서 밀어내도 다시 돌아오는 녀석을 본 뉴트는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부담스러워.”
“하지만 뉴트 말고는 나랑 안 놀아 주잖아. 할 일 다 끝났으면 같이 밥 먹으러 가자.”
“…….”
사실 다른 아이들이 놀아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토마스가 배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 상위권에 속해있는 뉴트조차 토마스의 지식을 따라가기가 가끔 벅찬데 중하위권에 있는 아이들이랑 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서로 멀어졌고, 토마스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만 내내 바라보았다. 위키드에 속한 연구원으로서 해야 할 일은 잽싸게 끝낸 토마스가 뉴트의 책상 근처에서 얼쩡거릴 때면, 언제나 같은 일이 벌어졌다. 잔뜩 인상을 쓰고 책을 읽고 논문을 해석하고 있던 뉴트가 탁 소리가 날 정도로 책을 덮었다.
그리고 그 소리가 신호라도 되는 듯 토마스가 와락 뉴트를 껴안았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생글거리고 웃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쭉 밀어내면 말랑한 볼이 다시 붙어왔다. 작은 손바닥에 한가득 쥐어지는 얼굴 쓰다듬어 주던 뉴트가 두 손으로 볼을 쫙 늘릴 때면 어김없이 뭉개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뉴으. 아하. 아프라고 하는 거야. 한 번 더 끝까지 당겼다 놓으면 잔뜩 불퉁해진 얼굴이 시선 한가득 들어왔다.
“왜 자꾸 당겨.”
“…싫으면 자꾸 귀찮게 하지 마.”
“…….”
“넌 빨리할 수 있어도, 난 아니란 말이야.”
“내가 도와주면?”
“뭐?”
“내가 도와줄게. 응?”
“…….”
항상 이런 식이었다. 자기가 마음에 드는 것은 언제든 가져야 했다. 뉴트가 가늘게 숨을 쉬면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작은 아이들이 연구원 가운을 입고 돌아다니는 것은 언뜻 보면 귀여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자세히 하나하나 뜯어보면 그것보다 잔인한 일은 없었다. 아이들은 서로 살아남기 위해 뭉치기 시작했다. 어른들은 나이에 맞는 것보다 더 힘든 과제를 내주었고, 계속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하는 아이들은 결국 실험장으로 끌려갔다.
“…….”
“뉴트, 응? 내가 도와줄게.”
“넌 정말.”
“하지만 뉴트가 없으면 정말 친구가 거의 남지 않는걸.”
그날은 최하위권에서 올라오지 못한 아이 둘이 사라진 날이었다. 뭐가 그렇게 두려운 걸까. 토마스는 항상 엘리트 그룹 최상위권을 지키고 있었고, 뉴트는 상위권이었으니 충분히 여유가 있었다. 게다가 토마스의 시선에 들어있지 않던 아이들이 사라졌을 뿐이었다. 뉴트는 토마스가 그 아이들의 이름조차 모를 것이란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누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싫은지 그럴 때마다 집요하게 뉴트를 붙잡고 늘어졌다.
“어디 가지마. 응?”
“…….”
“어디 가지 말고, 여기서 계속 나랑 있자. 혼자되는 건 싫어.”
“연구소에서 우리 둘이 헤어져야 한다고 하면?”
“…….”
“그럴 수 있잖아. 총장님이 그랬어. 혹시 필요한 일이 있다면 우리도 같이 실험을 받아야 한다고.”
“안 잊어버려.”
“그래?”
“저번에도 말했지만 뉴트는 절대 잊지 않을 거야.”
“…….”
가운에 푹 묻힌 목소리를 듣던 뉴트가 가늘게 웃었다. 몇 번이나 약속을 받고 나서야 배시시 웃은 토마스가 책상 옆에 있는 작은 의자에 냉큼 올라앉았다. 토마스를 뺀 다른 아이들이 유난히 개인 면담이 많아진 것 같았지만, 다들 신경 쓰지 않았다. 연구소는 언제나 바빴고, 연구 계획이 쉴 새 없이 수정되는 일이 잦았다. 그래서 당연한 줄 알았다. 서로 바빠서 며칠씩 얼굴도 보지 못했다.
그리고 기억은 그쯤에서 끊겨있었다. 뉴트를 찾던 토마스는 정확히 3일이 지나자 그런 아이를 잊어버린 것처럼 행동했다. 주변에서 보다보다 답답해진 녀석들이 토마스를 벽으로 밀어붙이고 물어보았지만, 처음 듣는 표정으로 오히려 그게 누구냐고 되물었다. 잔뜩 구겨진 옷을 움켜쥐던 토마스는 황망한 얼굴이었다. 한 번도 스쳐 지나가지 않았던 이름이 저 멀리에서 툭 떠올랐다.
“왜…지금까지 잊고 있었을까.”
마치 얇은 막으로 가로막고 있던 것 같았다. 토마스는 뉴트를 기억해 냈다는 사실을 숨겼다.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알고 있으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뉴트를 잊어버리면 어쩌지. 걱정이 날로 쌓여만 갔다. 머릿속에선 점점 또렷한 기억이 살아 올라왔다. 토마스는 작은 종이에 몇 번이나 뉴트의 이름을 썼다. 설사 기억이 사라진다고 해도 몸이 기억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뉴트. 뉴트. 뉴트. 얼마나 반복해서 썼는지 연필이 다 닳아 없어질 것 같았다.
“…….”
둘이 같이 있었을 때 느꼈던 간질간질함은 여전한 데 옆에 뉴트가 없었다.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킬 존 테스트에 선발대로 들어간 것을 확인했다. 항상 깨끗한 옷을 입고 다니던 소년은 이제 없었다. 잔뜩 더러워진 옷을 입고 작은 몸으로 아등바등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고 있었다. 하지만 차마 토마스는 눈길을 줄 수 없었다. 잠시라도 시선이 스치고 지나가면,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릴 것이 분명했다. 토마스는 그날 처음으로 위키드의 무서움을 느꼈다.
***
“토마스?”
“…….”
“토미.”
“…….”
“나 기억해?”
“…뉴트.”
“공터의 부대장인 뉴트말고. 다른 뉴트 기억하냐고 물었어.”
“…….”
“역시 넌 거짓말쟁이야. 내가 그랬잖아. 기억 못 할 거라고.”
가늘고 아프게 웃던 뉴트가 자신의 이마에 총구를 다시 한 번 단단히 고정했다. 토마스가 손을 빼려 했지만, 뉴트의 힘이 더 셌다. 토마스를 깔고 앉는 뉴트는 금방이라도 죽어 넘어질 것처럼 바짝 말라 있었다. 까만 눈은 이미 벌겋게 타서 버석버석한 재가 되어 있었다. 몇 번이나 토마스의 이름을 불렀다. 갑자기 헤어진 이후로 다시 만났을 때, 아는 척을 할 수 없었던 기간을 담아서 아프게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었다.
넌 제물이란다. 어른들의 목소리가 심장에 쿡쿡 박혔다. 치료제를 만들기 위한 제물. 뉴트에게 주어진 또 다른 이름이었다. 물론 뉴트가 연구소 생활을 기억해 낸 것은 플레어에 감염된 것 때문은 아니었다. 다리를 절게 되어서 러너를 그만두었던 그 날 밤 둑이 터진 것처럼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토마스가 꿈을 꾸면서 일어났던 것만큼 뉴트도 같은 꿈을 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