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법에 따르자면 한참 전에 치러야 했을 예식이었다.
물론 사는 게 팍팍했던지라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민호는 딱히 이런저런 해결법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런 민호를 보는 뉴트도 비슷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그냥 둘이 붙어있는 정도로 만족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누구보다 가까운 듯 그렇지 않은 듯 미묘한 상태로 둘은 여전히 항상 비슷한 거리를 둔 채 서 있었다.
“너희 둘은 이제 어쩌려고?”
토마스가 둘을 가만히 바라보다 툭 던진 말이었다. 물론 이런 말이 나올 수 없을 정도로 큰일이 있었다. 민호를 따르던 사람들은 모두 경비대에 끌려갔었다. 그 소식이 저 먼 곳에 살던 토마스한테 들어가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말로 꼬박 사흘은 달려야 올 수 있는 거리는 밤새 말을 바꿔 타면서 달려온 친구는 당장 신변 보증을 요청하며 경비대에 자리를 잡았다. 경비대 대장은 갑자기 나타난 부잣집 도련님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며 자리만 빙빙 돌았다.
“내 친구는 무사한가요?”
“곧 도착할 것이니 조금만…….”
“정말 내가 이래서, 그렇게 그만두라고 했는데.”
“…….”
사실 이곳에선 다른 것보다 큰 가문의 가주나 오래된 어르신의 말씀이 더 효과가 있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알려졌을 법한 부자라면 더했다. 토마스가 가져온 아버님의 말씀이 담긴 문서 한 장이 배달되자마자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이렇게 권력이라는 걸 눈으로 보고 싶진 않았는데, 토마스는 쓴 입맛을 다시면서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때 저 멀리서 인기척이 들렸다.
“…민호!”
“토마스?”
“내가 진짜 못 살겠어.”
저 멀리서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민호를 보자마자 토마스가 벌떡 일어났다. 그나마 크게 다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할 만큼 상황이 무시무시했던지 온몸엔 자잘한 상처가 가득했다. 민호의 팔엔 아직도 피가 배어 나오는 붕대가 꽉 묶여 있었다. 그 뒤에 따라 들어오는 뉴트는 잔뜩 쓸린 얼굴에 피딱지가 올라앉아 있었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잔뜩 다친 곳에 붕대를 하나둘 싸매고 있었다.
냉큼 뛰어나가 민호의 온몸을 살펴보던 토마스는 내내 한숨을 쉬었다. 민호 옆에 있는 뉴트 꼴도 말이 아닌지 한숨이 더욱 깊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대충 듣긴 했지만, 험하게 다친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그러기에 정리하고 우리 집에 오라고 했잖아. 도대체 이게 뭐야.”
“일이 좀 있었다.”
“좀 있는 게 아닌데. 뉴트는 괜찮아?”
“나야. 뭐. 다들 더 많이 다쳤지.”
너덜너덜한 옷을 벗고 경비대한테 빌린 가벼운 옷을 입은 뉴트가 눈썹을 떨어뜨리며 웃었다. 토마스는 이후 민호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모든 일은 보증한다는 말을 남긴 채 곧 떠날 준비를 했다. 더는 이곳에 머물게 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태도는 민호도 꺾지 못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대장님.”
“아버님께 제가 최대한 할 수 있는 모든 편의를 봐 드렸다고 꼭 전해주시길 바랍니다.”
“물론이죠. 그럼.”
“토마스…어딜 간다는.”
“어디긴. 우리 집이지.”
“…….”
“어차피 여기서 더 살 수도 없잖아. 겨울이 오면 더 추워,”
“…….”
“우리 집에 와서 천천히 겨울나면서 계획을 짜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딱히 할 일이 없어도 되지만, 나도 심심하니까 말동무 해주면서 공부나 하면 되는 거지.”
“그래도…….”
“아, 하는 김에 둘이 식도 올리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민호가 토마스의 입을 막았다. 하지만 토마스는 굴하지 않았다. 일단 우리 집에 들어가면 할 일부터 마저 끝내고, 천천히 생각해. 친구들도. 그런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프라이는 은근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친구?”
“민호 친구면 내 친구기도 하지.”
“그래?”
“웅. 우리 집으로 가려면 좀 멀긴 한데, 말을 갈아타고 급하게 갈 필요도 없으니 천천히 가는 거로 하면 되지 않을까? 다들 배고프지 않아?”
“그러고 보니…….”
경비대에 잡혀있으면서 밥 몇 술 얻어먹은 것이 다였다. 그나마 물이라도 넉넉하게 먹을 수 있게 해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해서 배가 고프다는 느낌을 잘 받지 못했는데, 막상 저런 소리를 들으니 위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일단 밥 좀 먹고 움직이자.”
토마스가 웃으며 민호와 뉴트의 팔을 이끌고 찻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
“아…안 입을 거야!”
“뉴트. 그러면 어쩔 건데.”
“지겹도록 입다가 겨우 찢어져서 내다 버렸는데, 또 입으라고? 난 싫어!”
“…….”
“이젠 좀 벗고 살아도 되는 거 아닐까?”
“…….”
옥신각신 씨름하던 뉴트는 방석에 터럭 주저앉았다. 그런 뉴트를 보는 민호는 뭐라고 한마디 말도 못한 채 그 앞을 왔다 갔다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둘을 지켜보며 한마디씩 훈수를 두던 토마스는 이미 웃음을 참지 못하고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냥 안 해도 된다고.”
“하지만…….”
“뭐 자랑할 것도 아니고, 우리 둘만 알고 있으면 되는 거 아니야?”
나름 논리적인 뉴트의 말에 말문이 막혀버린 민호는 좀처럼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하지 않는 민호를 대신해 토마스가 쑥 끼어들었다.
“민호는 네가 예쁜 옷 입는 쪽이 보기 좋다고 하던데.”
“…뭐?”
“기왕이면 예쁜 거 입고하면 좋잖아.”
“여자 옷…싫은데.”
“다른 사람 부를 것도 아니고 우리끼리 할 건데 뭐.”
“…….”
뉴트는 가만 생각을 하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얼굴이 풀리는 민호를 바라보던 토마스는 슬쩍 자리를 비켰다. 조용히 치르기로 했지만, 준비할 것이 생각보다 많았다. 비어있는 별채를 청소하고 새로 만든 방석과 벽걸이를 걸어둘 생각이었다. 색은 화사한 쪽이 좋으려나.
큰일을 해야 하니 괜히 먼저 시집간 누나들 생각이 났다. 남자가 할 수 있는 것엔 한계가 있었다. 조금이라도 꼼꼼하게 해주고 싶은데, 토마스는 사실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결국, 유모의 손을 빌리기로 했는지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별채엔 하인들이 분주하게 들락거렸다.
**
가장 맑은 날을 골라 조촐한 예식이 있었다. 멀끔한 차림으로 앉아있는 친구들은 민호를 가운데 둔 채 한마디씩 덕담을 보태고 있었다. 함께 있던 동료들 외엔 연고가 없는 사람이었다. 새신랑 옷을 입은 민호는 영 민망한 듯 자꾸 물만 들이켜고 있었다. 그런 민호를 보며 자꾸 술을 권하던 프라이는 껄껄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앞에 앉아있던 토마스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뭐랄까. 어릴 때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누나와 형들의 결혼식을 다시 보는 것 같았다. 얼굴에 상처가 가실 때까지 기다려야 해서 조금 늦어지긴 했지만, 그때보다 훨씬 날이 좋아서 잘한 선택이라 생각했다. 상 가득한 음식에 특별한 날에만 먹는 달콤한 과자들까지 줄지어 나왔다. 술에 고기까지 넉넉하게 들어가자 제법 잔치 분위기가 났다. 민호가 친구들을 상대하는 동안 뉴트는 내내 방 안에 있었다.
사실 신부 측에서 마련한 방에서 혼인 의식을 치러야 했지만, 뉴트는 그럴 수 없었다. 갈 곳이 없는 것은 민호도 마찬가지였기에, 토마스 쪽에서 방을 준비하기로 했다. 혼인 의식엔 증인이 필요했지만, 이것도 거의 불가능했다. 대신 프라이와 토마스가 양측의 증인이 되어주기로 했다. 혼인 의식을 하는 방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신랑과 신부. 그리고 증인 두 명과 의식을 주관해줄 고명한 승려 한 사람뿐이었다.
“오늘 혼인에 앞서 간단한 맹세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성전에 손을 얹고 맹세의 기도를 한다. 그리고 축복의 말과 함께 밀가루를 뿌려주고, 의식에 따라 빵과 고기를 나눠 먹고 마지막으로 소금물을 마신다. 물론 정식으로 하자면 이것보다 조금 더 복잡한 의식이 있지만, 모두 생략하고 약식으로 진행했다. 뉴트는 칭칭 감은 옷이 영 불편한 얼굴이었다. 마지막 축복의 말이 끝나자 승려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프라이와 토마스가 먼저 밖으로 나갔다. 민호가 가만히 뉴트를 바라보더니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뉴트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그 손을 잡았다.
“…….”
어쩐지 심장이 손끝에서 뛰는 것 같았다. 좁고 어두운 방에서 나오자마자 둘을 축복하는 것처럼 햇살이 쏟아졌다. 가늘게 웃는 뉴트가 민호의 손을 좀 더 꽉 쥐었다.
“…솔직히 말이야.”
“응?”
“뭐가 바뀌게 되는 건진 잘 모르겠어.”
“나도 그래.”
“잘 부탁해.”
“…나도.”
둘은 잠시 같은 높이로 눈을 맞추다 웃었다. 내내 같이 있었는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심장이 간질간질한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