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그랬던 것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는 녀석은 조용히 그늘을 옮겨 다녔다. 하지만 작은 방엔 그다지 그늘이 많지 않았다. 얼마 되지 않는 집세를 내는 곳은 해가 뜨면 너무 밝고, 밤이 오면 지나치게 어두웠다. 그런 곳에 혼자 누워있는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혼자인 삶은 점점 익숙해졌지만, 그렇다고 외롭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도 때때로 뱃속 깊은 곳에서 불길이 솟아올랐다. 이 감정이 무엇인지는 설명할 수 없지만, 그럴 때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파졌다.
“…….”
가늘게 한숨을 쉰 녀석은 다 망가진 매트리스 위에 누웠다. 손끝으로 담요를 끌어당기면 이제 익숙한 냄새 대신 겨울이 묻어나왔다. 이제 인간에 가까워진 개는 그런 상황을 몹시 아쉬워했다. 개가 주인이 떠나간 것을 인정하기 어려운 것처럼, 남자도 늘 그런 생각을 하고 살았다. 무슨 말을 해도 이미 떠나간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진짜 나쁜 놈이야.”
툭 흘러나온 진심엔 닳아빠진 애정이 슬쩍 묻어있었다. 이 감정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가까이 있으면 귀찮고 짜증 나는 바람에 늘상 싸우고 만다. 물론 허허 웃으면서 한발 물러서 주는 쪽은 럼로우였다. 예전엔 이러지 않았다면서, 남자는 늘 자신이 주워온 백치한테 약했다. 세상 모든 걸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할 수 있는 만큼만 잘해주곤 했다.
‘내 집에서 시체 치우기 싫으니까 좀 먹어.’
‘…….’
‘야!’
‘…….’
눈을 감으면 럼로우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린다. 이젠 환청이란 건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뿌리칠 생각도 없었다. 그렇게 죽은 듯 눈을 감고 있으면 점점 목소리가 가까워진다. 귓가에 입술이 스치는 기분이 들면 눈이 절로 번쩍 뜨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꾹꾹 참으면서 자는 척을 했다.
‘뭐하는 거야.’
‘…….’
‘또 시위하냐?’
‘…….’
목소리만 들리는 남자는 백치의 귓가에서 껄껄 웃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불퉁한 목소리로 녀석을 타박하곤 했다. 그런 남자 앞에서 백치는 다시 과거를 감았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금방 사라지는 목소리라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야, 사람이 왔는데 모르는 척하기냐?”
“…….”
“어쭈. 이것 봐라.”
“…….”
“내가 먹이고 입혀서 키워놨더니 이제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이거지?”
“…….”
“나 없어도 살만한가 보네.”
“…….”
“그럼 난 이만 간다.”
“잠깐만!”
그 순간 백치가 벌떡 일어난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자신을 안아줄 것처럼 굴던 남자는 흔적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이곳으로 돌아온 적이 없었다. 허망하게 뻗은 팔이 천천히 내려온다. 고장 난 인형처럼 고개가 푹 꺾여버린다.
“너무해. 진짜.”
사실 환청이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 번쯤 얼굴이 보고 싶어서 꼭 이렇게 눈을 뜨고 만다. 매트리스에 걸터앉은 녀석은 움직이지도 않았다. 다시 한 번 목소리가 들리길 기도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차라리 그때 한번 잡아보기라도 할걸. 정작 다시 돌아가도 그렇게 못 할 텐데, 백치는 내내 후회를 한다. 왜 그랬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
한숨을 푹 쉰다. 항상 지나간 길을 따라 걷는다. 언제나 남자의 옷자락을 잡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았다. 남자는 항상 금방 떠날 것처럼 굴었고, 그렇게 열심히 수발을 들던 녀석에게 홀로서기를 강요했다.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신문을 아무리 읽어도 럼로우 이름 하나 나오지 않는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점점 마음이 복잡해진다. 그러다 보니 어쩐지 돈을 맘대로 쓰는 것 같아 어느 순간부터 신문도 사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면 알고 있는 경험이 흐려질 것 같았다. 언젠간 럼로우를 잊지 않을까. 그런 두려움이 밀려오면 백치는 늘 공책을 폈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알고 싶어도 알 방도가 없었다. 무기를 잔뜩 챙겨서 나갔으니 이 집에 남아있는 것은 없었다. 럼로우가 무기를 숨겨둔 곳을 열어봤다. 혹시 거기에 뭔가 있지 않을까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창고 문을 닫은 백치는 좀 더 시들었다. 남아있는 흔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없던 사람처럼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남자는 늘 창문 옆에서 웃고 있었다. 이젠 내가 미쳤나 봐. 백치는 머리를 쥐어뜯는다. 아무리 고통스러워해도 남들은 알지 못한다. 혼자 삭히고 또 삭히면 언젠간 아무렇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봐도 지금은 아닌 것 같았다.
**
“뭐하냐?”
“…….”
“내가 자리 좀 비웠다고, 집이 이렇게 개판이 되지.”
“…….”
“뭐야. 이젠 아는 척도 안 한다고?”
“…….”
또 똑같은 일상이 되풀이된다. 백치는 눈을 꾹 감은 채 럼로우의 목소리만 듣는다. 이렇게 듣기만 해도 가슴이 뛰는데, 왜 떠날 때까지 몰랐을까. 그동안 흘려보낸 나날이 너무 아까웠다. 또 움직이면 사라질 것이 뻔했다. 그런 백치의 뒤통수에 익숙한 손이 닿는다.
“백치야. 죽었어?”
“…….”
“왜 안 일어나.”
“…….”
“다시 갈까?”
“…….”
“아저씨 섭섭하네. 그래도 너 보겠다고 천릿길을 달려왔는데.”
“…….”
“나쁜 새끼.”
“그…….”
결국 또 입을 연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몸은 먼저 반응하고 말았다. 도대체 어디 갔었는지. 뭘 하고 살았는지. 나는 보고 싶지 않았는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그 순간 익숙한 손끝이 느껴졌다. 쪼글쪼글 살이 오그라든 투박한 손바닥이 백치의 볼을 쓸어준다.
“안 죽었네?”
“…….”
“이렇게 모르는 척하면 내가 슬픈데.”
“또…갈 거잖아.”
“내가?”
“…….”
럼로우는 백치의 말에 냉큼 대답을 붙인다. 그 순간 감겨있는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꿈이라고 믿고 싶지만, 꿈이 아니었으면 했다. 천천히 손끝을 움직인다. 그러자 익숙한 손길이 깍지를 낀다.
“시간 지나면 돌아온다고 했는데.”
“…….”
“이젠 나 필요 없어?”
“아…니.”
목소리가 떨린다. 꿈은 확실한데, 이렇게 대답을 해주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구구. 눈물샘이 고장 났나 보네. 손가락이 눈 밑에 닿는다. 축축한 속눈썹이 남자의 손가락이 옮아붙었다.
“진짜 돌아온 거야?”
“그럼 내가 귀신이냐?”
“…….”
“눈 뜨고 봐. 내가 진짠지. 아닌지.”
“…도망갈 거 같아.”
“그건 네 녀석이 잘하는 거고.”
“…….”
“몇 번이나 이러다가 사라진 거 다 알고 있어.”
“그럴 수도 있지.”
“…….”
“그래서 나 안 보고 싶었고?”
“보고 싶었어.”
눈물이 가득 찬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움직인다. 짙고 어둡게 내려앉은 밤이 눈을 가린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흐릿한 형체를 볼 수 있었다. 좀 더 다친 것 같은데. 백치는 벌컥 남자를 걱정했다. 어느새 한걸음 떨어져 있는 남자는 백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둠에 숨어있는 남자는 온몸이 말이 아니었다. 제대로 상처 치료는 하고 다니는 건지. 백치가 다치면 멍청한 녀석이라고 소리 지르면서 붕대를 싸매준다. 그런 주제에 자기 몸은 늘 한번 쓰고 버릴 것처럼 굴었다.
“꼴이 왜 그 모양이야.”
“일이 좀 있었어.”
“무슨 일.”
“용병 일이라는 게 늘 그렇지.”
“…….”
“잘살고 있으니 됐다.”
“얼굴 볼래.”
“봐도 별거 없는걸.”
“…….”
백치는 눈을 찌푸린 채 럼로우를 찾았다. 코끝에 익숙한 화약 냄새가 났다. 남자는 항상 화약 속에서 살았다.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나 보고 싶었어?”
“…응.”
“저번에 나갈 땐 돌아보지도 않았잖아.”
“…그건.”
뭐라고 대꾸를 하려다가 입을 다물어버린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어떻게 말해야 가슴 속에서 일렁이는 감정을 설명할 수 있을까. 말주변이 없는 녀석은 늘 이런 식의 대화가 힘들었다.
“너 보고 싶어서 왔어.”
“…또 어디 가?”
“일하러 가야지.”
“…….”
“많이 걸릴 거야.”
“…….”
“이젠 익숙하잖아. 먹을 것도 좀 먹고 면도도 하고 다녀라. 꼴이 그게 뭐냐.”
“너보단 나아.”
불퉁한 목소리가 들린다. 남자는 자기는 엉망이 된 채로 백치 걱정을 한다. 그런 보살핌은 나쁘지 않았지만, 지금 듣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늘 럼로우를 잡고 있어도 이상하게 가깝지 않았다. 이 상황도 꼭 그랬다. 움직이고 싶어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알려주고 싶은 것이 있어서 왔어,”
“또 뭐가.”
“혹시나 너랑 내 이름을 부르면서 널 찾아오는 녀석이 있으면…….”
“…….”
“모른 척해.”
“…….”
“그래야 네가 살기 편하니까. 알았어?”
“…….”
“백치야.”
“…….”
“이제 오랫동안 또 못 만날 텐데 대답해야지.”
“…….”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또 멀리 사라질 것 같아 대화를 끝맺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다시 눈을 떴을 땐 이미 아침 해가 신문지 붙인 창문에 스며들고 있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잔뜩 부은 눈이 뻑뻑하게 아팠다. 구불구불 일어나 앉은 남자는 좁은 방을 돌아본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럼로우의 말에 의하면 버키의 눈이 안 보이는 것은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했다. 하지만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을 해서라도 친구가 나아졌으면 하는 생각에 참고 또 참았다. 아무리 인내심이 깊은 캡틴이라고 해도 자꾸 눈앞에서 달갑지 않은 상황을 보면 점점 예민해지고 만다.
“언제까지 그럴 거야?”
“이 녀석 눈 고쳐놓으라고 한 건 캡틴이잖습니까.”
“…….”
“내가 뭘 어쨌다고 이래요.”
“너무 오래 걸리잖아.”
“그게 내 책임입니까?”
“…….”
하긴 스티브도 자신이 되지도 않는 짜증을 부리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저렇게 럼로우만 따르는 친구를 보고 있자니 속이 꼬였다. 그런 캡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버키는 내내 텅 빈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기만 한다.
“이 녀석 책임이죠.”
“뭐?”
“내가 할 수 있는 건 예민한 성질을 진정시켜는 것 밖에 없는데, 백치가 못 받아들이는 걸요.”
“…….”
“캡틴. 정 짜증 나면 직접 하시던가 하쇼…. 예?”
“…….”
“아, 싫으면 그냥 그 스위치 누르던가. 한 번에 머리통 날아가고 좋네.”
“…….”
많이 참았다 했다. 럼로우는 대놓고 비꼬더니 자리를 뜬다. 사실 럼로우 뒷목에 나노 폭탄을 심은 것은 캡틴의 의견이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찝찝한 마음이 있어 반대했는데,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캡틴이 신원보증을 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럼로우는 뜻밖에 고분고분 나노 폭탄을 받아들이는 것 같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걸 빌미로 열심히 캡틴의 성질을 긁었다.
하지만 캡틴은 그럼 남자를 잡기 싫었다. 어차피 저렇게 문을 박차고 나가도 갈 수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럼로우는 사라졌지만 좀 문제가 생겼다. 늘 익숙한 냄새가 희미해지자 침대 위에 덩그러니 나앉은 버키가 또 이리저리 코를 킁킁거린다. 뭔가 들어도 이해를 못 하니 말로 설명할 수도 없었다. 스티브는 그런 친구를 내내 바라보았다.
“버키.”
“…….”
“버키.”
“스티브?”
“응, 맞아.”
“…….”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친구를 알아본다. 하지만 안 보이는 눈이 바로 뜨이는 것도 아니기에 시선은 언제나 저 먼 곳을 향해 붕 떠 있었다. 스티브는 표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친구한텐 보이지 않으니 어쩐지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럼로우가 했던 것처럼 발자국 소리를 낸다. 뚜벅뚜벅 걸어오는 소리가 커지자 버키의 시선이 스티브가 있는 비슷한 곳에 떨어진다. 코를 킁킁거려도 별다른 냄새가 나지 않는지 고개를 한쪽으로 슬쩍 기울인다.
“버키, 괜찮아?”
“…….”
“저번에 놀라게 해서 미안해.”
“…내가 그랬었나.”
“내가 좀 더 세심했어야 했는데, 말이야. 이젠 괜찮을 거야.”
“나…눈이 안 보여서.”
“…….”
“어디 있지.”
버키가 손끝으로 허공을 더듬는다. 예민한 암살자의 감각이 아직 죽지 않았는지, 제법 비슷한 곳에 손가락이 머무른다. 그런 버키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스티브는 손을 잡아줄 수도 없어서 안절부절못할 뿐이었다. 갑자기 손이 허공에서 멈춘다. 그 손끝에 스티브의 푸른 시선이 철썩 다가와 붙는다. 손끝으로 그려낸 허공의 궤도가 눈에 보인다면 아주 복잡했겠지.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팠다. 부지런히 움직이던 시선은 여전히 저 벽 너머를 보고 있었다.
“스티브. 스티비. 어디 있어.”
“…….”
“이쪽인가.”
“아니.”
“기다려 봐. 찾을 수 있어.”
“…….”
“찾을 수 있어. 스티브.”
보다 못해 한마디를 툭 던졌지만, 친구끼리 닮은 고집은 꺾이지도 않는다. 버키의 손은 자꾸 허공을 더듬으면서 애매한 거리에서 움직였다. 당장 저 손을 잡아채서 손바닥에 입술을 대고 싶었다. 끈질기게 기다리던 스티브는 더는 참지 못하고 슬쩍 고개를 꺾는다.
사실 알아차려도 별 상관없었다. 알아차리면 알아차리는 대로 손 한 번 더 잡아보면 된다. 우직한 고집이 슬쩍 기울이자 버키의 손끝에 단단한 피부가 닿는다. 보이지 않는 눈이 깜박이면서 속눈썹 그늘을 만들어낸다. 약간 커진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지만, 저번처럼 놀라진 않는다.
“여기 없었던 것 같은데.”
“지금부터 있으면 되는 거지.”
“그런가.”
“…응.”
“어디 보자. 얼마나 잘생겨졌나.”
손가락이 더듬더듬 스티브의 얼굴을 타고 올라온다. 한쪽 손으로만 만지자니 좀처럼 얼굴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혹시나 친구가 다칠까 싶어 버키는 왼쪽 팔을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스티브는 그런 손길이 기분이 좋았다. 스르르 눈을 감으면 어렸을 적 기억이 살아 올라왔다.
“이렇게 컸었나.”
“꽤 됐지.”
“더 커진 거 같네. 얼굴은 다친 곳은 없는 거 같고…….”
“…….”
“멍든 곳도 없고.”
볼에 손바닥을 댄 채 친구가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그런 얼굴을 보던 스티브가 결국 참지 못하고 손 위에 손을 겹쳐버린다. 따뜻한 체온이 닿자 버키가 지레 놀라서 펄쩍 뛴다.
“정신이 들어서 다행이야.”
“내가…얼마나 잔 거지.”
“조금 많이.”
“다행이네. 또 몇 년 동안 잠이 든 건 줄 알았어.”
“…….”
“이번에 일어나면 널 놓칠 거 같아서, 불안했는데. 내가 아는 스티브가 맞는 것 같아.”
“그랬어?”
“응.”
버키가 웃는다. 아니 웃는다 하기도 뭐할 정도의 움직임이었지만, 스티브는 알 수 있었다. 긴장에 바짝 굳었던 몸이 스르르 무너진다. 그 틈을 놓치지 않는 스티브가 손을 슬쩍 당기니 그대로 친구의 몸이 앞으로 푹 꺾였다. 품 안 가득 친구를 안은 채 스티브는 말이 없었다. 놀란 버키한테 한 대 정도 얻어맞지 않을까 했는데, 생각보다 순순히 안겨있었다.
“…스티브?”
“왜?”
“말이 없으니까 불안해서.”
“아니야. 그런 거.”
“화난 거 아니지?”
“내가 너한테 화날 게 뭐가 있어.”
“…많지.”
“아니야.”
버키는 스티브 가슴에 코를 박은 채 눈만 감았다가 다시 떴다. 숨을 쉬면 천천히 몸이 녹는 것 같았다. 버키는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어서 무슨 일인진 잘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몸이 부들부들하게 녹아내리는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한 번 더 숨을 들이쉬니 간질간질하고 시원한 냄새가 코를 타고 넘어온다. 푸르르 입으로 숨을 내뱉은 친구가 좀 더 묵직하게 다가온다. 스티브는 그런 친구의 등을 조심스럽게 토닥인다. 한번 두 번, 어색하게 등에 올라간 손은 몇 번 허공에 멈춘다.
“너무 오래 있었다.”
“…뭘?”
“헤어진 채로.”
“그냥 날 찾아오지 그랬어.”
“그땐…생각이 좀 많았어.”
“…….”
“지금도 그러지만.”
오늘따라 버키가 제법 또렷한 언어체계를 구사한다. 말도 통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이해하기도 한다. 스티브는 기쁜 만큼 마음 한구석에 단단한 응어리가 얹혔다. 이게 다 럼로우 탓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개소리만 안 했어도 이렇게 속이 복잡해지지 않았을 텐데. 물론 가볍게 넘기지 못한 탓도 있지만, 굳이 그 사실을 집어 말해주는 남자는 늘 캡틴의 머리 위에서 놀고 싶어 했다.
‘캡틴도 이제 슬슬 저 녀석에 대한 태도를 정하라고요.’
‘뭐?’
‘이렇게 어설프게 대해봤자 남는 게 없다니까.’
‘…….’
껄껄 웃는 재수 없는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런 녀석을 쫓아버리려는 듯 버키를 좀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가슴에 코를 묻고 있던 녀석은 어느새 어깨에 턱을 올려둔 채 눈만 깜박인다. 빨리 눈이 보이면 좋을 텐데, 버키의 몸은 아무리 검사를 해봐도 복잡하기만 했다.
“스티브.”
“…응?”
“향수 뿌렸어? 아니면 누굴 만나고 온 거야?”
“…….”
친구가 갑자기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한다. 스티브는 강아지를 다루는 것처럼 버키의 등을 슬슬 쓸어내린다. 그릉그릉 울리는 숨소리가 커졌다가 작아진다.
“내가 알던 스티브 냄새가 아닌데.”
“…….”
“누구 건진 모르지만…좋다.”
“…….”
버키는 그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잠에 이끌려갔다. 애써 잠을 이기려고 눈을 깜박깜박했지만, 부드럽게 토닥이는 손길과 따뜻한 체온이 한 번에 흘러들어오자 영 버티기 힘든 모양이었다. 버키가 고른 숨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스티브는 곁눈질로 친구의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
그리고 버키가 한 말의 의미를 알아채자마자 얼굴이 잔뜩 달아올랐다. 몸을 움직이면 친구가 깰까 싶어 멋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자꾸 달아오르는 얼굴이라도 좀 수습하고 싶은데,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이 꼴을 럼로우가 보면 배를 잡고 웃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속도 모르는 친구는 완전히 잠에 취한 채 고른 숨소리만 내뱉었다.
“버키.”
“…….”
“버키.”
“…….”
돌아오지 않는 대답을 알면서도 계속 친구의 이름을 부른다. 한번. 두 번. 계속 불다 보면 심장에 쌓여서 단단해질까. 이렇게 눈앞에 있는데, 언제든 훅 사라질 것 같은 친구는 불안하기만 했다. 조금만 안정이 되면 생각하자. 스티브는 그렇게 생각했다. 버키의 몸에선 늘 비슷한 냄새를 느낄 수 있었다. 커다란 몸을 좀 더 힘주어 안은 캡틴은 버키의 목덜미에 코를 묻은 채 오랫동안 친구를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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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파 냄새를 향수인 줄 아는 버키와....초인적 인내심으로 참는 스티브와..환장쇼를 벌이는 럼로우
늘 말하고 있지만 지금 천천히 쓰고있는 벜른전 신간에도 들어가는 내용입니다. 빨리 여기까지 원고를 해야할텐데..
침대에서 상체만 일으킨 채 앉는 남자는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 텅 빈 눈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곤 한다. 말도 없고 생각도 없는 남자는 그렇게 무기물인 것처럼 침대 위에 앉아있었다. 항상 옆에는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이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혼자가 될 때면 조금 아픈 녀석은 천천히 방안을 걸어 다니곤 했다.
그런 상황에서 버키 혹은 에셋이라고 불리는 남자는 눈을 뜬 뒤에도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처음 눈을 떴을 땐 뭔가 무서운 것을 본 것처럼 발작을 일으켰다. 그 옆엔 늘 그랬던 것처럼 스티브 로저스가 있었고, 버키는 자신의 친구를 알아보지 못했다.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벌벌 떨면서 눈을 크게 뜨는 친구를 바라보던 스티브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 그런 얼굴을 보는 녀석은 더 놀라서 숨으려 했고 결국 럼로우가 둘 사이를 가로막은 채 앉고 나서야 잠잠해졌다.
“…….”
“쉬, 괜찮아.”
“…스티브?”
“…….”
“아닌가.”
“맞아. 그러니까 좀 더 자자.”
“…….”
일부러 재우려 했다. 방금까진 울고불고 무서워하던 녀석을 그새 알아본다. 각오한 일이지만 입맛이 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버키는 그나마 조금씩 안정이 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꽤 많이 기억해냈다. 보통 그의 기억엔 럼로우나 스티브가 항상 등장해서 둘은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스티브는 럼로우를 믿지 못해 손에 수갑을 채우고 싶었지만, 그런 도구를 보면 버키가 발작을 해대는 통에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몇 번이나 즐겁지 않은 상황을 두 눈으로 보고 난 뒤에야 스티브는 밖으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럼로우는 훨씬 더 귀찮은 상황을 얻게 되었다. 시도 때도 없이 몰아붙이는 통에 도통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지금도 꼭 그 짝이었다.
“버키가 왜 저러는 거야.”
“또 뭘요?”
“정신을 차린 게 아니잖아.”
“그야. 저 녀석한텐 저게 정상인 상태니까 그러죠. 캡틴.”
“…….”
“그것 봐요. 캡틴은 저 녀석을 모른다니까.”
“…….”
“그냥 놔둬요. 워낙 낯을 많이 가리는 녀석이라 새로운 곳에 도착하면 꽤 오랜 시간 동안 저렇게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킁킁거려요.”
“…….”
“워낙에 냄새가 없는 녀석이라 좀처럼 새로운 공간이 자기 것이라 인식을 못 하더군요.”
“그런…….”
“놔두면 저절로 품에 들어올 텐데, 참 모르시네.”
“…….”
럼로우는 예전보다 캡틴의 성질을 덜 긁나 싶더니 이때 다 했는지 한마디 덧붙인가. 럼로우의 멱살을 잡은 캡틴의 손엔 힘이 잔뜩 들어갔다. 보자 보자 하고 참아줬더니 정도를 모른다. 아니 버키만 끼면 유난히 예민해지는 탓이려나. 하여튼 안 맞아도 이렇게 안 맞을 수 없었다. 예전에 서로의 정체를 모를 땐 어떻게 같이 미션을 수행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로우.”
“응?”
“…….”
“저 캡틴?”
“뭐야.”
“바쁘신 와중에 죄송하지만, 손 좀 풀어주셔야 하겠는 걸요.”
“…뭐?”
“예쁜이가 절 부르네요. 가봐야죠. 또 놀라지 않으려면.”
“…….”
“저번에도 잔뜩 놀라서 병실에 있는 거 다 때려 부쉈잖아요. 아, 나 참. 나 일하러 가겠다고요. 예? 캡틴 로저스,”
“…….”
캡틴의 손이 스르르 풀린다. 큼큼 소리를 내며 목을 문지르던 남자는 눈을 느리게 깜빡이면서 눈앞에 옛 상사를 바라본다. 에셋이 안정되면 무슨 일을 해서라도 빨리 헤어지려 했는데, 인생이 제대로 꼬인 기분이었다. 하긴 자신이 옆에서 얼쩡거리기만 해도 자기 구역을 침범한 녀석한테 으르렁거리는 맹수처럼 위협하는 옛 상사 상대하기도 힘들었다. 그런데 오늘처럼 에셋이 자신을 부른다. 이후 상황은 안 봐도 뻔했다. 저 녀석이야 뇌가 갈려서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를 테지만, 이쪽은 좀 달랐다.
“그래도 뭐, 너무 자신감 잃지 마시고요.”
“무슨 소리야.”
“내가 아무리 이렇게 먹이고 입히면서 잘해줘도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더랍니다.”
“…….”
“죽을 거 같으면 달래주고 때리면 맞아준다고 다가 아니라고요. 내 참. 내가 내 입으로 이런 소리까지 하게 하다니.”
“…….”
“한동안 들여다보지나 마쇼. 괜히 짜증 나서 샌드백 두 개쯤 터뜨릴 게 뻔하니까.”
“지금…나랑 농담하자는 소리는 아닐 테고.”
“좋게 말해줘도 이러네. 뭐 싫으면 들어와서 의자 놓고 앉아계시던가.”
좋은 말을 해줘도 전 상사는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는다. 하긴 럼로우도 친하게 지낼 생각이 없으니 피차 마찬가지였다. 럼로우가 약하게 앓으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그러더니 벽을 짚고 보란 듯 걸어간다. 방금까지 서로 으르렁거리던 모습은 간데없고 살짝 열린 문에 손을 대고 조심스럽게 두드린다. 럼로우의 낯선 모습에 스티브의 얼굴엔 또 깊은 주름이 생긴다.
“예쁜아.”
“…….”
“나 불렀어? 응?”
“…….”
“들어가도 괜찮아?”
“…응.”
“그래. 오늘은 또 무슨 일일까.”
“…….”
럼로우는 피식 웃으면서 문을 연다. 물론 이렇게 한마디씩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최근 일이었다. 오래된 전쟁포로는 고문과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를 지독하게 앓았으며, 망가진 뇌는 평범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녀석은 늘 기억이 지워졌기 때문에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했다.
“오늘도 한탕 했네.”
“…….”
“왜 날 부른 거 아니었어?”
“럼로우. 눈이 안 보여.”
“…….”
“여기…그러니까.”
몸이 가진 것에 전부인 녀석은 감각이 통제되면 쉽게 이성을 잃는다. 가이드가 항상 옆에 있어도 저 모양이면 답은 하나였다. 너무 많은 정보를 받아들여서 신경계가 맛이 가버린 것이다. 럼로우는 에셋이 들으라는 것처럼 발걸음을 크게 내디딘다. 뚜벅뚜벅. 발소리가 가까워질수록 텅 빈 채 초점도 잡히지 않는 눈이 부지런히 움직인다.
“자, 다 왔어.”
“…….”
“이리와.”
“…….”
“그래도 걸어와.”
럼로우는 팔을 벌린 채 움직이지 않는다. 에셋은 눈이 보이지 않으면 늘 코를 사용한다. 약하게 킁킁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보이지 않는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냄새의 근원을 찾는다. 약한 담배 냄새와 화약 부스러기. 럼로우에게 묻어 있는 냄새는 늘 비슷했다. 앞뒤를 모른 채 비틀거리며 걸어오자 그새 옆으로 이동한 럼로우가 묵직한 에셋을 받아든다.
“잘했어.”
“…여기 없었던 거 같은데.”
“이제 눈 안 보여도 살 만하네? 나 없어도 괜찮아?”
“…….”
“왜 또.”
“지금 그거 나 웃으라고 한 말이지?”
“그럴 리가.”
럼로우는 늘 거짓말을 진실 속에 숨긴다. 그런 깊은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셋은 코를 킁킁거리며 럼로우의 목덜미에 얼굴을 푹 묻어버린다. 그렇게 한참 가이드의 냄새를 맡고 있으면 조금씩 예민한 신경이 풀어진다. 눈이 안 보이는 것은 스트레스 때문일 테니 시간이 좀 지나야 할지도 몰랐다.
“너…왜 그렇게 예민해.”
“…….”
“나도 같이 있는데 뭐 여기 무섭다고.”
“…소독약 냄새가 나서.”
“…….”
“난 그런 곳 싫어.”
약하게 칭얼거리던 녀석이 자꾸 무너진다. 또 자려고 하나. 이 녀석은 멀쩡한 침대를 놔두고 꼭 럼로우한테 안겨서 기절하곤 했다. 럼로우가 끙끙거리며 에셋을 침대로 옮긴다. 이 백치는 자기가 혈청 맞았다고 남도 다 그런 줄 안다. 그리곤 조용히 밖으로 나와 전 상사이자 에셋의 친구인 사람을 부른다. 캡틴은 럼로우가 왜 저렇게 잘해주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 괜찮으니까 좀 와서 보다 가요.”
“무슨 꿍꿍이야.”
“꿍꿍이는 무슨. 내가 진짜 일을 저지르려면 벌써 캡틴 뒷덜미에 총알을 박았습니다.”
“…….”
“이 녀석 이러면 한참 얌전하거든요.”
“…….”
“애완동물도 잘 때 제일 귀엽다는데, 귀여운 거 보면 좋잖아요. 안 그럽니까?”
“웃으라고 한 소리는 아니겠지?”
“하여튼 친구 아니랄까 봐. 말투도 닮아가긴.”
럼로우는 약간 뒤로 물러선 채 툴툴거린다. 캡틴은 여전히 럼로우는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버키 얼굴을 보는 것은 좋았다. 또 전원이 끊긴 것처럼 누워있는 친구를 한참 바라본다. 차마 손을 댈 생각은 하지 못하는 남자를 바라보던 럼로우는 쯧쯧 혀를 찬다. 도대체 죽고 못 사는 친구라고 할 땐 언제고 저렇게 매너를 지키면서 낯을 가린다.
“그거…만져도 괜찮수다.”
“…뭐?”
“만져도 안 깬다니까요.”
“…….”
“이때 아니면 언제 만져보겠어요.”
또 대화가 뚝 끊긴다. 스티브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는다. 단단한 메탈암이 손끝에 닿자 차가운 금속이 그대로 느껴진다. 럼로우는 깨지 않는다 했지만, 그 말을 믿고 마냥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스티브의 시선이 천천히 얼굴로 올라간다. 금방이라도 눈에서 꿀이 떨어질 것 같은 모습인데, 행동은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그 순간 메탈암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스티브. 난 버키 뷰캐넌…반즈.”
“…….”
“너 괜찮아? 왜 그렇게…커졌어.”
“…….”
“아프진 않았어?”
“…….”
드문드문 이어지는 잠꼬대엔 갈라진 쇳소리가 스며들었다. 꼬물꼬물 움직이는 메탈암이 어느새 스티브의 손에 깍지를 낀다. 메탈암이 그런 섬세한 활동을 할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날 선 숨에 단 냄새가 섞인다. 스티브는 버키가 놀라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알파 형질을 조절한다. 부드럽고 따뜻하게 섞이는 향기에 잔뜩 날선 몸이 슬슬 풀어진다. 하이드라가 다 말려죽인 줄 알았던 오메가는 간신히 살아나와 몸을 숨긴 채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
아마 뒤에 럼로우가 없었으면 그대로 두 손을 맞잡은 채 울었을지도 모른다. 겨우겨우 꾹꾹 참은 스티브는 그저 버키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버키의 몸에선 겨울이 섞인 신기한 냄새가 난다. 스티브는 아주 옛날, 군대에 있을 무렵 이것과 비슷한 냄새를 느낀 적이 있었다.
“…버키.”
“응. 스티브.”
“…….”
“아프지 마.”
예전과 똑같은 부드러운 말투였다.
+)
서로서로 채워줄 수 없다는 너무 잘 알아서 꺼지라고 말 못하는 둘이 너무 좋네요
버키가 그 당시에 좀만 제정신이었다면 둘 다 잡을 수 없는 곳으로 사라져서 평생 나타나지 않았을거라 생각합니다
게다가 그런 친구의 증상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늘 이런 식으로 전원을 내린 것처럼 잠을 잔다는 말만 반복 한다. 꼭 알고 있으면서도 알려주지 않으려는 말투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니 짜증이 안날 수 없었다. 스티브는 인내심이 매우 강한 편이지만, 버키한테는 유독 약했다. 물론 버키를 찾는 그 세월을 꾹꾹 참아왔다는 사실을 친다면 인내심이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눈앞에 친구가 나타나자마자 이런 식으로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옛날의 캡틴은 아니었다.
“왜그러시죠?”
“…….”
“아, 참. 그 고고한 자존심 그만 세우고 천천히 물어봐도 될 텐데.”
“뭐?”
“혼잣말입니다. 혼잣말.”
럼로우는 캡틴 로저스를 아주 잘 안다. 그래서 꼭 이렇게 성질을 긁다 못해 뒤집어 놓기 일쑤였다. 하지만 눈 앞에서 버키가 눈을 뜨고 움직이는 걸 본 이상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궁금한 것이 있지만, 저 녀석에게 물어보는 것은 어쩐지 지는 기분이 든다. 과학의 힘을 빌리면 뭐든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럼로우는 꼭 다 안다는 표정으로 돌아본다.
“역시 나 없으면 좀 불편하겠죠?”
“…됐어.”
“뭐가 됩니까. 저 녀석 버릇 생활습관. 발작 증세.”
“…….”
“캡틴이 뭐 한가지라도 알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
“없잖아요.”
“버키를 잘 아는 건 나야.”
캡틴은 또박또박 단어에 힘을 준다. 물론 맞는 말이다. 1917년생 버키 반즈를 잘 알던 사람은 죄다 죽었다. 유일하게 남은 사람은 스티브라고 할 수 있겠지. 둘은 형제보다 가까운 사이로 자랐다. 스티브가 조금 늦긴 했지만 군대도 같이 활동할 수 있었고, 죽음의 문턱도 같이 뛰어들면 무섭지 않았다.
이런 생각과 그리움에 알파의 소유욕이 끼어들면 좀 복잡해진다. 스티브는 알파였고, 버키 반즈는 나이가 꽤 먹어서 군대에 갈 때까지 딱히 몸에 특이 사항을 보이지 않았다. 가끔 그런 사람이 있다. 몸 안에 발현될 유전자가 있지만 성장이 느리거나 아예 죽을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하는 종류 말이다. 버키 반즈는 그런 사람들로 치면 행운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굳이 오메가니 센티넬이니. 이런 복잡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살기엔 전쟁터는 너무 위험했다.
“예, 물론 잘 아시겠죠. 1900년대의 버키 반즈요.”
“…….”
하지만 럼로우의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결과가 어떻든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점차 여유가 생긴다. 반대로 캡틴은 점점 초조해진다. 이런 식으로 구석에 몰려본 기억이 없었다. 차라리 어려운 작전을 수행하는 곳에서 결정해야 한다면 이것보단 쉬웠을 것 같았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
“캡틴이 아는 건 1900년대의 버키 반즈 아닌가요?”
“…그건.”
“에셋이 어디서 무슨 일을 했는지 알고 있습니까?”
“…….”
“아, 이건 알겠네. 문서를 읽어 봤을 테니.”
“…….”
“하지만 그 이후론 모르잖아요, 안 그럽니까?”
“…….”
“그 녀석이 어디서 뭘 먹고, 뭘 했는지. 누구와 같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직도 저 녀석은 캡틴의 친구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버키는…내 친구야.”
“제가 뭐라고 했나요. 이제 저 녀석은 더는 캡틴이 찾는 버키가 아니라는 소리죠.”
“…….”
“잘도 자네. 이쯤이면 늘 깨어나곤 했는데.”
럼로우는 말을 돌린다. 침대 위엔 여전히 버키, 혹은 에셋이 누워있다. 축 늘어진 몸을 어떻게든 주워 담아 침대 위에 올려놨는데, 꼭 전원이 꺼진 인형 같아서 조심스러웠다. 가만히 감겨 있는 눈은 눈썹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숨을 쉬는 건지 아닌지. 스티브는 잠시 눈을 돌린다. 그리곤 천천히 걸어다 버키의 볼에 손을 댄다. 그리고 코 밑으로 손가락을 옮겨본다. 가늘게 흐르는 숨결이 느껴지자 조금 안심한 표정으로 손을 뗀다.
굳이 이런 식으로 누군가 앞에서 행동하는 것은 알파로서 제 짝을 지키려는 행동이었다. 아마 그걸 보고 느끼라는 사람은 럼로우일텐데, 막상 그 남자는 별로 개의치 않은 표정이었다. 그런 표정이 스티브의 짜증에 불을 당기고 있었다. 하긴 지금도 알파 기운을 활활 뿜으면서 럼로우를 위협하고 있지만, 정작 그 화를 받는 사람은 느끼지도 못한다.
“캡틴. 어차피 화내봤자 나한텐 안 통해요.”
“…….”
“내가 모를 거로 생각했습니까? 나도 말단이긴 하지만 그래도 작은 다리 하나 정도는 해먹을 위치라니까.”
“…….”
“캡틴이 무슨 형질인지. 그렇게 아끼던 친구가 또 어떤지. 하이드라는 뭐든지 다 알고 있었거든요.”
“…….”
“그래서, 이렇게 화를 내면 말이죠.”
“뭐?”
아. 짧은 쇳소리가 들린다. 방금까지 죽은 듯 누워있던 녀석이 움직인다. 갑자기 숨을 크게 들이쉬면서 몸이 뻣뻣하게 굳어간다. 숨을 들이쉬는 소리에 피 냄새가 섞여 들어간다.
“저 녀석이 놀라잖아요.”
“버키!”
“그러니까. 나한테 화풀이해봤자 라니까.”
“버키!”
캡틴이 금방 기운을 거둔다. 럼로우는 알파의 기운을 느끼진 못하지만, 분위기는 알아챌 수 있었다. 하긴 저 멍청한 에셋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알파 노릇을 했던 적도 있었다. 저 녀석은 그때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늘 강제로 흐물흐물해지는 것만 보다 보니 오히려 낯설었다. 럼로우가 약간 딴생각을 하는 새에 스티브는 냉큼 버키 옆으로 다가간다. 얼굴이 살짝 달아오른 채 숨만 색색 내쉰다. 여전히 감겨있는 눈 밑에서 축축한 눈물이 배어 나온다. 생리 현상일 뿐이겠지만, 그런 모습조차 스티브는 가슴이 아팠다.
“버키. 미안해.”
“미안한 일은 하지 말아야죠.”
“…….”
“내가 그랬잖아요. 지금 예민하다고.”
“…….”
“또 저렇게 들쑤셔 놨으니 한참 힘들겠네. 내가 그거 잠재우려고 얼마나 신경을 썼는데.”
“…네 녀석이 어떻게 알아.”
“왜 모른다 생각합니까.”
“…….”
“하이드라는 모든 걸 다 알고 모든 곳에 있으니까요. 필요한 일이라면 뭐든 해야 하죠.”
“…….”
“저런 백치의 뇌를 속이는 건 아주 쉬운 일입니다. 안 그래요?”
“…….”
“그러길래. 내가 괜히 도발하지 말라고 했지 않습니까.”
대놓고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대신 빙빙 돌려 말을 한다. 확실하지 않은 정보는 사람의 뇌에 들어가면 안 좋은 방향으로 확장되지 쉽다. 남자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걸 이용할 줄 알았다. 오히려 대쪽 같은 캡틴은 그런 것에 약했다.
“그 녀석한테 당신 친구라는 사실이 남아있는 건…뭐 얼굴뿐 아니겠습니까.”
“…….”
“주워다 살려놓은 사람으로 말하는데, 예전처럼 생각하고 대하면 서로 힘들어진다는 것만 알고 계시죠.”
“그게…무슨.”
“우리 예쁜이가 생각보다 착하더군요.”
“…….”
“남이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있으면 억지로라도 맞추려고 해요.”
“…….”
“그게 내가 됐던, 캡틴이 됐던 말이죠.”
스티브는 더는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럼로우는 그저 웃기만 했다. 당장 저 녀석은 다른 곳으로 보내고 싶었지만,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버키가 발작을 하는 통에 그럴 수 없었다. 간신히 호흡이 진정된 녀석은 다시 조용해진 채 움직이지 않았다.
“버키.”
“…스티브.”
“응.”
“스티브…난…널 아는데.”
“…….”
“다리 위에…럼로우…어딨어.”
“…….”
“럼…….”
입속에 웅얼웅얼 뭔가 맴돌다 사라진다. 불쌍한 뇌엔 수많은 정보가 뒤섞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나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한 번에 섞여서 입술로 흘러나왔다. 에셋이 저렇다는 걸 럼로우는 잘 알고 있었지만, 스티브는 처음이었다. 늘 이런 식이었다.
“버키.”
“…응.”
살살 볼을 쓰다듬어 준다. 그러다 다시 한 번 숨을 쉬는 것을 확인하고, 손을 잡아준다. 약간 차가운 손이 차지게 달라붙었다. 형형하던 기운이 사그라지면 부드러운 향기가 흘러나온다. 물론 다른 알파를 경계하는 것은 잊지 않았지만, 버키 앞에선 누구보다 다정했다.
“다시 만나서 다행이야.”
“…….”
방 안엔 셋이 있는데, 둘은 말을 하지 않았다. 스티브가 침대에 앉은 채 고개를 숙였다. 겨울 냄새가 나는 입술에 천천히 입술을 겹치면 찬 기운이 스며든다. 단단하게 감은 눈은 약간 움찔할 뿐 여전히 뜨질 않았다. 조금씩 깊고 질척하게 입술을 탐하던 캡틴이 눈을 감는다. 침대는 두 사람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삐걱삐걱 소리가 난다.
‘아주 난리가 났군.’
럼로우는 애써 그쪽을 쳐다보지 않는다. 캡틴 로저스가 자신에게 보라고 하는 쇼에 불과했다. 이런 걸 보면 알파도 못할 짓이야. 화상으로 얼굴을 잃은 남자는 내내 혀를 찼다. 저렇게 친구와 연인 사이에 줄을 타면서도 입 밖으로 내질 못한다. 물론 진중한 성격도 한몫하지만, 그로 인해 자꾸 자제심을 잃어가는 것이 눈에 보인다. 럼로우는 처음으로 자신이 알파와 오메가의 사이클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을 고마워했다. 캡틴이 저렇게 방방 뛸수록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다시 봐도 참 웃기는 사람이야.’
저래도 자신에겐 아무런 해가 없다. 아니 애초에 느낄 수도 없었다. 하이드라의 명령으로 알파를 가장한 채 몇 번 에셋과 만났던 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도 아무런 향을 느낄 수 없었다. 온몸에 진득할 정도로 향수를 뿌려대는데 럼로우의 코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우위를 점하려고 하는 동안에도 불쌍한 전쟁 포로는 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여러 검사를 받으면서 조금씩 몸 상태에 대한 기록이 나오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복잡한 상황에 캡틴의 미간엔 주름이 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