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키.”
“…….”
“버키. 괜찮아?”
“…….”
“그래. 쉬어. 이따가 다시 올게.”
“…….”
침대에서 상체만 일으킨 채 앉는 남자는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 텅 빈 눈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곤 한다. 말도 없고 생각도 없는 남자는 그렇게 무기물인 것처럼 침대 위에 앉아있었다. 항상 옆에는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이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혼자가 될 때면 조금 아픈 녀석은 천천히 방안을 걸어 다니곤 했다.
그런 상황에서 버키 혹은 에셋이라고 불리는 남자는 눈을 뜬 뒤에도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처음 눈을 떴을 땐 뭔가 무서운 것을 본 것처럼 발작을 일으켰다. 그 옆엔 늘 그랬던 것처럼 스티브 로저스가 있었고, 버키는 자신의 친구를 알아보지 못했다.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벌벌 떨면서 눈을 크게 뜨는 친구를 바라보던 스티브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 그런 얼굴을 보는 녀석은 더 놀라서 숨으려 했고 결국 럼로우가 둘 사이를 가로막은 채 앉고 나서야 잠잠해졌다.
“…….”
“쉬, 괜찮아.”
“…스티브?”
“…….”
“아닌가.”
“맞아. 그러니까 좀 더 자자.”
“…….”
일부러 재우려 했다. 방금까진 울고불고 무서워하던 녀석을 그새 알아본다. 각오한 일이지만 입맛이 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버키는 그나마 조금씩 안정이 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꽤 많이 기억해냈다. 보통 그의 기억엔 럼로우나 스티브가 항상 등장해서 둘은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스티브는 럼로우를 믿지 못해 손에 수갑을 채우고 싶었지만, 그런 도구를 보면 버키가 발작을 해대는 통에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몇 번이나 즐겁지 않은 상황을 두 눈으로 보고 난 뒤에야 스티브는 밖으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럼로우는 훨씬 더 귀찮은 상황을 얻게 되었다. 시도 때도 없이 몰아붙이는 통에 도통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지금도 꼭 그 짝이었다.
“버키가 왜 저러는 거야.”
“또 뭘요?”
“정신을 차린 게 아니잖아.”
“그야. 저 녀석한텐 저게 정상인 상태니까 그러죠. 캡틴.”
“…….”
“그것 봐요. 캡틴은 저 녀석을 모른다니까.”
“…….”
“그냥 놔둬요. 워낙 낯을 많이 가리는 녀석이라 새로운 곳에 도착하면 꽤 오랜 시간 동안 저렇게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킁킁거려요.”
“…….”
“워낙에 냄새가 없는 녀석이라 좀처럼 새로운 공간이 자기 것이라 인식을 못 하더군요.”
“그런…….”
“놔두면 저절로 품에 들어올 텐데, 참 모르시네.”
“…….”
럼로우는 예전보다 캡틴의 성질을 덜 긁나 싶더니 이때 다 했는지 한마디 덧붙인가. 럼로우의 멱살을 잡은 캡틴의 손엔 힘이 잔뜩 들어갔다. 보자 보자 하고 참아줬더니 정도를 모른다. 아니 버키만 끼면 유난히 예민해지는 탓이려나. 하여튼 안 맞아도 이렇게 안 맞을 수 없었다. 예전에 서로의 정체를 모를 땐 어떻게 같이 미션을 수행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로우.”
“응?”
“…….”
“저 캡틴?”
“뭐야.”
“바쁘신 와중에 죄송하지만, 손 좀 풀어주셔야 하겠는 걸요.”
“…뭐?”
“예쁜이가 절 부르네요. 가봐야죠. 또 놀라지 않으려면.”
“…….”
“저번에도 잔뜩 놀라서 병실에 있는 거 다 때려 부쉈잖아요. 아, 나 참. 나 일하러 가겠다고요. 예? 캡틴 로저스,”
“…….”
캡틴의 손이 스르르 풀린다. 큼큼 소리를 내며 목을 문지르던 남자는 눈을 느리게 깜빡이면서 눈앞에 옛 상사를 바라본다. 에셋이 안정되면 무슨 일을 해서라도 빨리 헤어지려 했는데, 인생이 제대로 꼬인 기분이었다. 하긴 자신이 옆에서 얼쩡거리기만 해도 자기 구역을 침범한 녀석한테 으르렁거리는 맹수처럼 위협하는 옛 상사 상대하기도 힘들었다. 그런데 오늘처럼 에셋이 자신을 부른다. 이후 상황은 안 봐도 뻔했다. 저 녀석이야 뇌가 갈려서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를 테지만, 이쪽은 좀 달랐다.
“그래도 뭐, 너무 자신감 잃지 마시고요.”
“무슨 소리야.”
“내가 아무리 이렇게 먹이고 입히면서 잘해줘도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더랍니다.”
“…….”
“죽을 거 같으면 달래주고 때리면 맞아준다고 다가 아니라고요. 내 참. 내가 내 입으로 이런 소리까지 하게 하다니.”
“…….”
“한동안 들여다보지나 마쇼. 괜히 짜증 나서 샌드백 두 개쯤 터뜨릴 게 뻔하니까.”
“지금…나랑 농담하자는 소리는 아닐 테고.”
“좋게 말해줘도 이러네. 뭐 싫으면 들어와서 의자 놓고 앉아계시던가.”
좋은 말을 해줘도 전 상사는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는다. 하긴 럼로우도 친하게 지낼 생각이 없으니 피차 마찬가지였다. 럼로우가 약하게 앓으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그러더니 벽을 짚고 보란 듯 걸어간다. 방금까지 서로 으르렁거리던 모습은 간데없고 살짝 열린 문에 손을 대고 조심스럽게 두드린다. 럼로우의 낯선 모습에 스티브의 얼굴엔 또 깊은 주름이 생긴다.
“예쁜아.”
“…….”
“나 불렀어? 응?”
“…….”
“들어가도 괜찮아?”
“…응.”
“그래. 오늘은 또 무슨 일일까.”
“…….”
럼로우는 피식 웃으면서 문을 연다. 물론 이렇게 한마디씩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최근 일이었다. 오래된 전쟁포로는 고문과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를 지독하게 앓았으며, 망가진 뇌는 평범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녀석은 늘 기억이 지워졌기 때문에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했다.
“오늘도 한탕 했네.”
“…….”
“왜 날 부른 거 아니었어?”
“럼로우. 눈이 안 보여.”
“…….”
“여기…그러니까.”
몸이 가진 것에 전부인 녀석은 감각이 통제되면 쉽게 이성을 잃는다. 가이드가 항상 옆에 있어도 저 모양이면 답은 하나였다. 너무 많은 정보를 받아들여서 신경계가 맛이 가버린 것이다. 럼로우는 에셋이 들으라는 것처럼 발걸음을 크게 내디딘다. 뚜벅뚜벅. 발소리가 가까워질수록 텅 빈 채 초점도 잡히지 않는 눈이 부지런히 움직인다.
“자, 다 왔어.”
“…….”
“이리와.”
“…….”
“그래도 걸어와.”
럼로우는 팔을 벌린 채 움직이지 않는다. 에셋은 눈이 보이지 않으면 늘 코를 사용한다. 약하게 킁킁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보이지 않는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냄새의 근원을 찾는다. 약한 담배 냄새와 화약 부스러기. 럼로우에게 묻어 있는 냄새는 늘 비슷했다. 앞뒤를 모른 채 비틀거리며 걸어오자 그새 옆으로 이동한 럼로우가 묵직한 에셋을 받아든다.
“잘했어.”
“…여기 없었던 거 같은데.”
“이제 눈 안 보여도 살 만하네? 나 없어도 괜찮아?”
“…….”
“왜 또.”
“지금 그거 나 웃으라고 한 말이지?”
“그럴 리가.”
럼로우는 늘 거짓말을 진실 속에 숨긴다. 그런 깊은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셋은 코를 킁킁거리며 럼로우의 목덜미에 얼굴을 푹 묻어버린다. 그렇게 한참 가이드의 냄새를 맡고 있으면 조금씩 예민한 신경이 풀어진다. 눈이 안 보이는 것은 스트레스 때문일 테니 시간이 좀 지나야 할지도 몰랐다.
“너…왜 그렇게 예민해.”
“…….”
“나도 같이 있는데 뭐 여기 무섭다고.”
“…소독약 냄새가 나서.”
“…….”
“난 그런 곳 싫어.”
약하게 칭얼거리던 녀석이 자꾸 무너진다. 또 자려고 하나. 이 녀석은 멀쩡한 침대를 놔두고 꼭 럼로우한테 안겨서 기절하곤 했다. 럼로우가 끙끙거리며 에셋을 침대로 옮긴다. 이 백치는 자기가 혈청 맞았다고 남도 다 그런 줄 안다. 그리곤 조용히 밖으로 나와 전 상사이자 에셋의 친구인 사람을 부른다. 캡틴은 럼로우가 왜 저렇게 잘해주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 괜찮으니까 좀 와서 보다 가요.”
“무슨 꿍꿍이야.”
“꿍꿍이는 무슨. 내가 진짜 일을 저지르려면 벌써 캡틴 뒷덜미에 총알을 박았습니다.”
“…….”
“이 녀석 이러면 한참 얌전하거든요.”
“…….”
“애완동물도 잘 때 제일 귀엽다는데, 귀여운 거 보면 좋잖아요. 안 그럽니까?”
“웃으라고 한 소리는 아니겠지?”
“하여튼 친구 아니랄까 봐. 말투도 닮아가긴.”
럼로우는 약간 뒤로 물러선 채 툴툴거린다. 캡틴은 여전히 럼로우는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버키 얼굴을 보는 것은 좋았다. 또 전원이 끊긴 것처럼 누워있는 친구를 한참 바라본다. 차마 손을 댈 생각은 하지 못하는 남자를 바라보던 럼로우는 쯧쯧 혀를 찬다. 도대체 죽고 못 사는 친구라고 할 땐 언제고 저렇게 매너를 지키면서 낯을 가린다.
“그거…만져도 괜찮수다.”
“…뭐?”
“만져도 안 깬다니까요.”
“…….”
“이때 아니면 언제 만져보겠어요.”
또 대화가 뚝 끊긴다. 스티브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는다. 단단한 메탈암이 손끝에 닿자 차가운 금속이 그대로 느껴진다. 럼로우는 깨지 않는다 했지만, 그 말을 믿고 마냥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스티브의 시선이 천천히 얼굴로 올라간다. 금방이라도 눈에서 꿀이 떨어질 것 같은 모습인데, 행동은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그 순간 메탈암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스티브. 난 버키 뷰캐넌…반즈.”
“…….”
“너 괜찮아? 왜 그렇게…커졌어.”
“…….”
“아프진 않았어?”
“…….”
드문드문 이어지는 잠꼬대엔 갈라진 쇳소리가 스며들었다. 꼬물꼬물 움직이는 메탈암이 어느새 스티브의 손에 깍지를 낀다. 메탈암이 그런 섬세한 활동을 할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날 선 숨에 단 냄새가 섞인다. 스티브는 버키가 놀라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알파 형질을 조절한다. 부드럽고 따뜻하게 섞이는 향기에 잔뜩 날선 몸이 슬슬 풀어진다. 하이드라가 다 말려죽인 줄 알았던 오메가는 간신히 살아나와 몸을 숨긴 채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
아마 뒤에 럼로우가 없었으면 그대로 두 손을 맞잡은 채 울었을지도 모른다. 겨우겨우 꾹꾹 참은 스티브는 그저 버키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버키의 몸에선 겨울이 섞인 신기한 냄새가 난다. 스티브는 아주 옛날, 군대에 있을 무렵 이것과 비슷한 냄새를 느낀 적이 있었다.
“…버키.”
“응. 스티브.”
“…….”
“아프지 마.”
예전과 똑같은 부드러운 말투였다.
+)
서로서로 채워줄 수 없다는 너무 잘 알아서 꺼지라고 말 못하는 둘이 너무 좋네요
버키가 그 당시에 좀만 제정신이었다면 둘 다 잡을 수 없는 곳으로 사라져서 평생 나타나지 않았을거라 생각합니다
빨리 셋이 집에 들어가는게 보고싶은데, 늘 지지부진 하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