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를 마치는 즉시 창고에 준비된 재료로 은신처 전체가 탈 수 있도록 불을 붙인 후 무기를 데리고 귀환하게.”
“…….”
“증거를 남기지 말아야 하네. 알았나.”
“…알겠습니다.”
“자네를 믿지.”
무전이 뚝 끊겼다.
이 말은 곧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소리와 같았다. 하지만 고집이 센 무기는 좀처럼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채 버티고 앉은 무기를 다루는 덴 제법 시간이 걸렸다. 곱게 모셔가는 무기와 달리 럼로우는 내내 할 일이 많은 사람이었다.
“진짜 이렇게 협조 안 할래?”
“…….”
“저 눈깔을 찌를 수도 없고.”
“…….”
“피범벅 해서 노려보지 마 소름 끼치니까.”
“…….”
그 소리는 알아듣나보다. 날카롭던 눈매가 순간 불쌍하게 축 처지더니 고개를 숙인다. 강아지로 치자면 온몸으로 자기 화났다고 시위하는 꼴이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고 하더니 감정 숨기는 법도 서툴렀다. 저럼 놈이 어떻게 최고의 암살자가 된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일어서.”
“…….”
“집에 가셔야죠. 윈터 솔져씨.”
“…….”
“안 일어나?”
하여튼 얌전하게 행동하면 말이라도 곱게 해줄 텐데 꼭 저렇게 버텨서 욕을 얻어먹는다.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으면서, 답답하다는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엉덩이를 두들겨서 내려갈 수는 없으니 그냥 몇 번 걷어찬다. 무거운 엉덩이가 이제야 떨어진다.
그리고 어떻게 산길을 내려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다만 어지간히 더러운 꼴을 보고 산 용병도 그날의 참상은 좀처럼 잊히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시커먼 새끼가 획 돌아서 자신을 물어뜯을 수도 있었다. 그러면 뭐 죽어야지. 럼로우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계속 걸어.”
“…….”
“쉬, 뒤돌아보지 말고.”
“…….”
아까 눈이 돌아간 채 으르렁거리던 녀석은 오간 데 없고 잔뜩 겁에 질린 녀석이 순순히 걸음을 옮긴다. 이 녀석은 늘 이랬다. 아프면 아프다. 싫으면 싫다. 적어도 간단한 신호를 보내줘야 뭘 알아차릴 텐데, 그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미 명령에 익숙해진 삶이란 언제나 이렇게 얼어붙어 있었다.
“왔군,”
“바쁘신 분이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무기 손질이 잘 된 건지 확인하러 왔네.”
“…….”
“섬세한 녀석이거든.”
“아, 예.”
떨떠름한 표정으로 비켜선다. 에셋은 눈앞에 있는 피어스를 보고 벌벌 떨었다. 아가 그 귀신같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찾을 수 없었다. 하여튼. 럼로우는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지만, 자신의 목숨 줄을 틀어쥐고 있는 사람 앞에서 내색할 순 없었다.
“잘 움직일 것 같군. 돌아가지.”
“예.”
“솔져는 따로 싣고 럼로우는 이따 잠깐 내 방으로 오게.”
“알겠습니다.”
이제 잠시 이별이었다. 기름을 먹인 녀석은 금방 끌려가서 또 뇌를 갈아버릴 테고, 자신은 바삐 움직여야 했다. 잠시나마 지옥을 오가던 남자는 이제야 가늘게 한숨을 내쉬어 본다. 언제 또 만날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지만 한 번 더 만나고 싶었다. 그나마 저 녀석이 말을 잘 들어주면 괜찮겠지만 짐승만도 못한 뇌를 가진 무기는 언제 폭발할지 몰랐다.
“하여튼 이런 곳에 발을 들이는 게 아니었어.”
용병으로 굴러먹다 중년이 다 된 남자는 이제야 자신의 인생을 돌아본다. 하지만 그런다고 바뀌는 것이 없었다.
*
“얜 또 왜 이래?”
“무슨 말이십니까?”
“왜 눈이 죽은 생선처럼 맛이 가있냔 말이야.”
“바이탈 사인. 심장 박동. 호흡. 고통 신호. 모두 정상입니다.”
“저걸 정상이라고 부르는 네놈들 머리부터 좀 열어봐야겠다.”
“…….”
으르렁거리는 용병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듯 과학자 무리는 입을 다문다. 전기로 잘 지져놓은 녀석은 아직도 근육이 펄떡펄떡 뛰었다. 죽은 것 같진 않은데 살아있는 것만 못한 상태였다. 마우스피스를 얼마나 깨물었는지 잇자국이 깊게 났다.
“아주 시체를 움직이네.”
“생각보단 멀쩡해. 혈청이 아직 살아있으니까.”
“…….”
“아닙니다.”
“이 녀석을 뭐 어쩌라고?”
“밥을 먹여야지.”
“밥? 이 새끼가 밥도 먹어?”
“물론. 그렇지 않으면 이미 굶어 죽은 시체가 되어있을 텐데.”
“…….”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이지만, 저런 놈이 밥을 먹는다는 것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뱃속을 비운 채 임무를 돌다가 모든 일이 끝나면 바로 얼려버리는 무기한테 그런 선택지가 있다니. 자던 캡틴 아메리카가 놀랄 일이었다. 럼로우가 그러거나 말거나 과학자들은 분주했다. 하지만 기계를 정리하는 것 외에 다른 일은 하지 않았다. 얼씨구. 남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야?”
“…….”
“아, 위험한 건 내가 하라고?”
“흠. 흠. 흠.”
“밥값도 이 정도면 알차게 빼먹는다니까.”
남자는 별로 무서워하는 기색도 없었다. 가까이 가서 볼을 툭툭 두드리니 썩은 생선 같던 눈에 살짝 생기가 돈다. 그 눈은 겨울이 잔뜩 할퀴고 사라진 색이었다. 그나마 살아있다는 신호였다.
“밥 먹으러 가자.”
“…….”
“왜 또.”
“…싫.”
“싫긴 뭐가 싫어.”
“…….”
“가자.”
럼로우가 손목을 단단히 옥죄고 있던 기계를 풀어준다. 혹시나 큰일이 생길까 봐 강제로 전원을 내려놓은 팔이 무겁게 늘어졌다. 도통 자신의 기분을 전하지 못하던 녀석이 눈꺼풀을 파르르 떤다. 그러더니 불안하게 눈동자를 움직이다 럼로우를 바라본다. 물론 잠시 눈을 바라보다 금방 시선을 돌려버렸지만, 놀라운 반응이었다. 도대체 식사 시간에 뭘 시키기에 이 녀석이 이렇게 싫어하는지 알 수 없었다.
“…….”
“네가 안가면 내 목이 달아날걸.”
“…….”
“그래도 내가 너한테 제일 잘해주지 않아? 담당자 또 바뀔래?”
“…….”
그건 싫은 모양이었다. 늘 말하지만, 이 에셋은 임무가 끝나면 늘 눈물이 많고 겁을 잔뜩 집어먹는 녀석이었다. 이 꼴을 보아하니 그다지 전쟁에 어울리는 녀석도 아닌데 왜 이런 곳에 끌려와 모르모트 취급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건 싫지?”
“그럼 가자.”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녀석이 천천히 일어선다. 럼로우는 익숙하지 않은 장소라 과학자에게 턱짓한다. 과학자 중 한 사람이 길 안내를 한다.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보니 감옥이었다. 아마 생체실험을 하기 위한 인간을 모아둔 곳이겠거니 했다. 단단한 철문으로 막힌 곳은 누구 하나 들여다볼 수 없을 정도로 꽉 막혀있었다. 아니 아무리 키우는 개라고 해도 밥은 밝은 곳에서 준다는데 이런 축축하고 음산한 곳에 데려와서 뭘 하겠다는 것인지. 럼로우는 점점 찝찝해졌다.
“저 끝이야.”
“뭐야. 같이 안 가?”
“끝나면 데리고 올라오도록.”
“…….”
젠장. 럼로우는 속으로 과학자 머리에 총을 쏘는 상상을 한다. 비열한 쥐새끼가 사라진 곳엔 윈터솔져와 굴러먹던 용병뿐이었다. 무슨 일이 있을진 들어가 봐야 안다. 감옥 중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방으로 걸어간다. 윈터 솔져가 낮게 그르릉 운다. 이렇게 짐승 같을 수 없다.
“여기서 무슨 밥을…….”
럼로우의 말이 뚝 끊겼다.
눈앞엔 허리 부분을 깊게 베인 채 피를 줄줄 흘리는 이름 모를 모르모트가 있었다. 단단하게 손목을 얽은 수갑 덕분에 지혈조차 하지 못하고 새하얗게 질린 녀석은 어디서 잡혀 온 인간인지조차 구별되지 않았다. 럼로우는 눈앞에 나타난 충격적인 장면 덕분에 옆구리에 끼고 온 윈터솔져가 홀린 듯 열린 감옥 안으로 들어가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