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이라 시간이 부족해 보고싶은 부분만 쓰느라 굉장히 불친절 하지만, 언제나처럼 잘 부탁드립니다.
윈터솔져 기반 럼로우와 버키 이야기 입니다
적당한 망상과 설정 붕괴가 언제나 함께 합니다 ㅇㅅㅇ)9
write. 환월
용병의 삶에 미래란 단어는 그저 사치품에 불과했다.
어디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 현실이 아닌 미래를 내다본다는 소리는 그냥 목숨을 내놓고 다니겠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하지만 럼로우는 아주 가끔 미래를 꿈꾸기도 했다. 물론 불사라는 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지독한 지옥에서 뒹굴다 보니 어느 정도 요령이 생기고 시간을 뺄 수 있었다.
“…….”
“쉬, 가만히 있어,”
“…….”
“또 누구 뼈를 부러뜨리려고.”
“…….”
“쯧.”
대놓고 혀를 차면 커다란 덩어리가 슬슬 움직인다. 꼭 공간을 빙빙 도는 동물원의 맹수 같았다. 하지만 그 본질은 맹수인지라 하이드라에 속한 사람 중 그 누구도 윈터솔져 앞에 오래 머물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차 하는 순간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 나간다. 물론 저 불쌍한 병기는 아무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이미 갈려질 대로 갈려진 뇌는 많은 생각을 담기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윈터솔져를 관리하는 부서는 절로 기피 대상이 되었다. 그곳에 가는 사람은 세상을 정리하는 것과 같은 무게의 고통을 받았다. 그곳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발탄이 빼곡하게 깔린 곳이었다. 하지만 그런 팀의 가장 머리에 앉아있는 럼로우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가만히 있으라니까.”
“…….”
“자꾸 정신 사납게 굴 거면 지금 뇌 지지러 가버려.”
“…….”
“어쭈? 이 새끼 봐라.”
“…….”
“너 말 알아듣지?”
“…….”
“모르는 척하지 말고.”
사실 럼로우는 윈터솔져와 같은 임무를 나간 적이 거의 없었다. 현재 에셋을 관리하는 입장이지만, 해야 할 일은 조금 달랐다. 캡틴 아메리카를 감시하기 위해 스트라이크 팀을 잠복시킬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안 그래도 매일 저 멍청한 맹수를 잡고 쫓느라 힘든데, 눈앞엔 늘 캡틴 아메리카가 의심이 가득 찬 표정을 하고 있었다. 조금만 틀어지면 바로 목을 물어뜯길 것 같았다.
“…….”
“못 알아듣는 척하긴.”
“…….”
“그러면서 임무는 어떻게 하나 모르겠네.”
“…….”
전쟁에 동원될 땐 자비라곤 없는 기계처럼 보이는 녀석은 하이드라로 돌아오기만 하면 극도로 불안해하곤 했다. 물론 그런 날엔 늘 럼로우가 헐레벌떡 하이드라로 뛰어왔다. 쉴드에 처박던지 하이드라에 머물게 하던지. 입에 달고 사는 투덜거림은 떨어질 줄 몰랐다.
하지만 그렇게 핸들러가 와도 상태는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보는 둥 마는 둥 주변을 맴돈다. 그러더니 침대에 쭈그리고 앉은 채 말이 없다. 그런 상황이 슬슬 지겨워질 때쯤 럼로우는 늘 비슷한 말을 한다. 어차피 기억을 담을 수 없는 무기는 같은 말을 반복해도 잘 알아듣지 못했다.
“이제 곧 나가야 해.”
“…….”
“얌전히 좀 있어라. 왜 괜히 안 먹어도 될 욕을 먹고 매를 버냐.”
“…….”
“하여튼.”
럼로우는 시계를 힐끗 쳐다본다. 이쯤이면 임무가 하달될 텐데 오늘따라 늦어진다. 슬슬 돌아가지 않으면 괜한 의심을 살 텐데, 수뇌부는 그런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하긴 죽어도 럼로우 혼자 죽어버릴 일이니 하나하나 상황을 봐줄 순 없는 노릇이었다.
“뭘 갑자기 그렇게 친한 척을 해?”
“…….”
“우리…아니지 너랑 난 우리라고 칭하기까지 시간이 좀 모자라니. 안 그래?”
“…….”
“너랑 난 그냥 비즈니스 관계잖아.”
“…….”
“내가 이런 뇌 병신한테 어려운 말 해봤자 남는 게 없어.”
“…….”
“너 욕한 거 아니야. 아니면 또 한 번 집어던져 보던가.”
녀석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웃는다. 노련한 용병의 눈빛에 절로 수그러든 목은 펴질 생각이 없어 보인다. 늘 이런 식이었다. 무서워하면서도 호기심을 숨기지 못한다. 아무리 봐도 덜 녹아서 그런 것 같은데, 애써 멀쩡한 척을 하려 한다.
“…응?”
귓가에서 무전기 소리가 들린다. 럼로우는 익숙하게 무전을 받는다. 낯선 소리가 들리자 멍청한 녀석은 또다시 펄쩍 뛰어오른다. 적당히 손을 휘두르니 구석에 홀린 듯 처박혀서 움직이지 않는다.
“예. 일찍도 연락 주시는군요.”
“…….”
“예?”
“…….”
“그게 무슨…….”
“…….”
“저 지금 쉴드로 돌아가지 않으면 캡틴이 의심할 겁니다.”
“…….”
“아, 그러십니까. 알겠습니다.”
“…….”
“예. 이후 다시 명령 기다리겠습니다.”
후. 무전기를 끊자마자 욕이 절로 입술을 비집고 나온다. 까라면 까야 할 입장이라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짜증이 솟구친다. 물론 그런 짜증의 원인은 저 녀석 때문이었다. 꼼짝없이 괴물과 며칠 밤을 보내게 생겨서인지 갑자기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임무란다.”
“…….”
임무란 단어를 듣자마자 눈에서 살기가 흘러나온다. 으르릉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것쯤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팔다리는 물어뜯길 수 있지만, 훈련된 맹수는 목을 물진 않았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어차피 다치면 낫는 것은 숨을 쉬는 것만큼 당연한 일이니 말이다.
“내가 왜 널 데리고 가야 하는진 모르겠지만…….”
“…….”
“캡틴 아메리카는 지금 출장을 갔더군.”
“…….”
“넌 얌전히 임무만 마치고 다시 여기로 돌아오면 되는 거야.”
“…….”
좀 얌전해진 것 같았다.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점차 줄어든다. 럼로우는 그런 녀석을 빤지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간 녹이 슨 의자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거운 군화가 저벅저벅 시멘트 바닥을 밟는다. 발에 차이는 작은 돌조각은 저 멍청한 맹수가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쥐어 뜯어놓은 흔적이 분명했다.
“며칠 같이 있을 건데 인사나 할까?”
“…….”
“너랑 나 슬슬 우리라고 말할 수 있을 테니까.”
“…….”
얌전하다 싶으면 꼭 사고를 친다. 우두둑. 낯선 소리가 울려 퍼진다. 앞으로 내민 손을 붙잡고 그대로 꺾어버린 녀석은 눈을 치켜뜬 채 씩씩거리며 숨만 내쉬었다. 완전히 돌아가 버린 손목을 바라보던 럼로우는 차갑게 식은 표정으로 그리 놀라지 않았다. 늘 있던 일인 것처럼 익숙한 얼굴이었다.
“야…….”
“…….”
자기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은 자꾸 구석으로 도망가기만 했다. 아무래도 해동을 하다 뇌를 잘못 건드린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불안정했다. 덜렁거리는 손목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제법 가라앉는다.
“내가 말했지.”
“…….”
“너 이러는 거 받아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
“…….”
“입이 붙은 건지. 아니면 모른 척하는 건지.”
“…….”
“이거 어찌할 거야.”
덜렁거리는 손목을 내민다. 자기가 부러뜨려놓고 펄쩍 뛰는 것은 무슨 심보인지 알 수 없었다. 럼로우는 주변을 둘러본다. 하지만 혹시나 모를 자해 위험 때문인지 좁은 방 안엔 제대로 된 물품이 없었다. 밥을 먹일 필요도 없으니 수저 같은 것도 없었다. 의자는 럼로우가 온다고 같이 들여보냈으니 저 녀석은 네모난 시멘트 방에 늘 갇혀있을 뿐이었다.
“젠장.”
아프지도 않은지 꺾여버린 손목을 주물거린다. 분위기는 한없이 가라앉기만 하고, 도통 긴장이 풀어지지 않았다. 잘못한 걸을 알긴 하는지 에셋은 잔뜩 눈치를 본다.
“아직 너랑 내가 우리라고 말하기엔 조금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
“안 그래?”
“…….”
“언제까지 이럴 거야? 내가 병신이 되면 네놈 옆에 있을 수 있을 것 같아?”
“…….”
“여긴 망가지면 그대로 버린다고.”
“…….”
“하긴 내가 그러질 못해서 아직 이러고 있지.”
뼈가 꺾이는 것과 다른 마찰음이 들린다. 럼로우는 익숙하게 칼을 든다. 그리곤 피부를 쭉 찢어버린다. 그러면 잔뜩 고여 있던 피가 줄줄 흘러나온다. 회색빛 시멘트 바닥에 시커멓게 죽은 피가 뚝뚝 떨어진다. 몇 방울은 럼로우의 군화에 튀었고, 몇 방울은 에셋에게 옮겨붙었다.
“피 냄새나도 참아. 네가 그랬잖아.”
“…….”
“이 정도 다친 건 하루면 나아.”
“…….”
“따지고 보면 나도 너한테서 나온 자식인데 말이야.”
“…….”
아예 뒤돌아 앉아버린 녀석은 고개를 기울여서 벽에 기댄다. 그러더니 움직이지 않았다. 오래 갇혀있다 보면 미친다는 소리가 사실인 듯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다가 픽 쓰러질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얌전하면 그걸로 충분했다.
럼로우는 그런 녀석을 내내 바라보았다. 결국, 이런 저주와 같은 형질을 만들어준 녀석은 눈앞에 있는 녀석이었다. 하지만 그걸 딱히 부정하고 싶지도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저 녀석이 자신에게 준 것은 평생 전쟁에서 뒹굴고 살라는 낙인과도 같았다. 자존심 없게 제 발로 죽어버리는 것은 못 할 짓이었다. 하지만 그 많은 전쟁을 헤치면서 죽을 만큼 상처를 입어도 치명상은 입지 않았다. 지독한 저주가 분명했다.
“나도 너처럼 오래 살 수 있을까?”
“…….”
“응? 어떻게 생각해?”
“…….”
에셋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만두자. 벙어리한테 말을 거는 것도 아니고,”
“그건…….”
“응?”
럼로우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벽에 머리를 댄 채 움직임도 없는 녀석한테서 쇳소리가 섞인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대화라고 하기보단 혼잣말에 가까웠다.
버키는 오래간만에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 없었다. 침착하게 들고 있던 봉투를 내려놓자 소파에 늘어져 있던 발이 이제야 꿈질거리며 움직인다.
“너…진짜.”
“아저씨 왔어?”
“…….”
“기다리다가 졸았지 뭐.”
“너…….”
“아, 왜.”
누가 잘못한 것인지. 참 뻔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소파에서 일어나 등받이에 턱을 댄 녀석은 아직도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멍든 얼굴에 씩 웃다가 아픈지 얼굴을 찡그린다. 내가 미쳤지. 버키를 혀를 끌끌 차면서 봉투를 뒤적였다.
“그래. 언제쯤 나을 예정이고?”
“그거야. 난 모르지.”
“…….”
“내가 의사야? 그걸 어떻게 알아.”
“죽다 살아난 주제에 말이 많다.”
“살아있으니 아저씨 얼굴도 다시 보고, 집에도 들어오고 좋네.”
“주둥이만 살아서.”
“흥.”
그대로 소파에 다시 누워버린다. 그리곤 들으라는 듯 끙끙 앓기 시작한다. 갈비뼈가 아프네. 발목이 부러진 것 같네. 얼굴이 아프네. 버키가 때린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렇게 온갖 아픈 척을 하다 보면 버키가 가까이 다가온다. 물론 럼로우는 약간 기대를 하지만 버키는 모르는 척 가슴을 꾹 눌러서 제대로 눕히곤 했다.
“악!”
“…….”
“아저씨 일부러 그랬지.”
“내가 뭘?”
“와, 진짜 이럴 거?”
“이럴 건데.”
“아저씨가 이럴 줄 몰랐네. 다친 청소년 보호는 못 할망정…….”
“네 입으로 어른이란 소리를 한 이십번은 들은 것 같아.”
“…….”
“오늘은 밥 먹고 일찍 자.”
“맥주는?”
“다친 녀석이 무슨 술을 찾아.”
“쳇.”
럼로우의 입술이 오리 주둥이 만큼 나와 버린다. 얼음 주머니가 볼에 닿았다. 얌전히 있어. 사실 발목이 완전히 부러진 상황이라 움직일 기력도 없어 보였지만, 꼭 이렇게 말해야 마음이 놓인다. 럼로우는 아직도 입이 댓 발이나 나온 채 얼음 주머니를 문지른다. 버키는 봉투 안에서 이것저것 음식 재료를 꺼냈다.
“오늘 메뉴는 뭐야?”
“굶겨서 내쫓기 전에 얌전히 얼음이나 문질러.”
“너무하네.”
“너야말로 내 인생에 너무 하다고 생각 안 해?”
“음…그 건은 지금부터 생각해보고 있을게.”
“어휴. 내가 진짜 멍청했지.”
럼로우는 늘 따박 따박 말대답을 한다. 눈도 똑바로 마주치면서 말이다. 그러면 먼서 한숨을 쉬는 쪽은 버키였고, 먼저 돌아서기까지 해버린다. 버키는 늘 사람을 오래 대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자신의 인생에 훌쩍 뛰어들어온 이 망나니 같은 녀석은 사적인 영역은 생각도 안 하는 것처럼 버키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오늘은 그냥 샌드위치나 먹어.”
“그거 사 온 거야?”
“그래.”
“나 샌드위치 좋아해.”
“어련하겠어.”
“정말이야.”
“…….”
“기왕이면 아저씨랑 같이 먹는 게 더 좋고.”
이 녀석을 지금이라도 내쫓아야 하지 않을까. 버키는 이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렇게 모질지 못한 사람이었다. 저런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었다면 애초에 새벽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집 안에 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도…아직 멀었어.’
버키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냉장고를 열었다. 다행히 반쯤 남은 우유가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 버터를 꺼내서 올려두었다. 사실 늘 대충 먹고 때우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라 집 안에서 많은 요리를 하지 않았다. 그나마 해 먹는 것은 간단한 달걀 요리나 베이컨 종류였고,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은 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그렇게 먹고산다고 다친 녀석까지 막 먹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유와 버터를 냄비에 넣고 천천히 끓이기 시작했다. 눈감고도 만든다는 매쉬 포테이토 가루는 이럴 때 제법 쓸모가 있었다. 보글보글 고소한 냄새와 함께 끓어오르는 소리가 나면 은박 봉투에 들어있던 가루를 한 번에 와르르 쏟아버렸다. 감자를 직접 으깨서 만들어줘야 할 것 같지만, 그런 건 버키도 해 먹으면서 살지 않아서 할 수 없었다.
“또 그거 만들어?”
“싫으면 먹지 마.”
“아니야. 나 그거 좋아해.”
“그래. 많이 먹어.”
저 멀리서 무슨 소리가 들린다. 이럴 때마다 버키는 럼로우에게 등을 돌린 채 가늘게 웃곤 했다. 저 녀석 앞에서 슬쩍 웃기라도 하면 늘 세상이 시끄러워진다. 적당히 저어주기 시작하면 가루가 사정없이 우유를 빨아들인다. 아무래도 우유 계량에 실패했는지 점점 더 퍽퍽해진다. 버키는 옆에 있는 우유를 들어서 대충 끼얹은 다음 계속 주걱을 저었다. 적당히 만들어진 것을 접시 옆에 덜고, 남은 공간에 샌드위치를 올린다. 그리고 옆에 커피 한잔까지 놓으면 간단한 저녁이 완성된다.
“밥 먹어.”
“잠깐만.”
아닌 척 해도 많이 다친 것은 맞는 모양이다. 절뚝거리며 한 발로 뛰어온 녀석이 의자에 앉는다. 갈비뼈를 문지르며 끙끙 앓는다.
“잘한다. 아주.”
“식탁 앞에서 왜 또 혼을 내.”
“그럼 그 꼴을 보고 혼을 안 내게 생겼어?”
“…….”
“왜 자꾸 술 먹고 그렇게 새벽에 행패 부리고 다녀.”
“그거야…….”
“잘못한 건 알아?”
“행패 안 부렸어.”
“뭐?”
버키가 웃으며 물었다. 럼로우는 내심 억울한 얼굴로 버키를 바라본다. 뺨에 시커멓게 멍이 든 주제에 할 말은 많은 모양이었다. 어서 말해보라는 듯 손을 휘휘 젓고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호기심이지.”
“호기심에 목숨 걸고 다녀?”
“그거야…좀 위험해서…….”
“위험?”
“아, 아니.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너 뭐 하고 다니는 거야.”
“…….”
“새벽에 그렇게 쓰러져서 집에도 못 찾아갈 정도로 맞고 다니는 게 호기심 해결 때문이라고?”
“…….”
럼로우는 묵묵히 샌드위치를 씹어 넘겼다. 말실수했다. 이런 표정을 숨기지도 않는다. 버키는 밥 먹고 두고 보자는 표정으로 럼로우를 노려본다. 사실 버키가 이렇게 표정을 대놓고 굳히면 등골이 금방 서늘해질 정도로 무서웠다. 럼로우는 애써 그 시선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오늘 저녁은 제법 살벌했다.
*
그러니까 버키가 럼로우를 만난 것은 새벽 운동 길이었다. 사람이 많으면 불편하다는 이유로 버키는 늘 새벽에 운동하곤 했다. 물론 새벽길이 공기도 맑고, 차가운 공기를 들이켜면 잠이 빨리 깬다는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가 큰 부분을 차지하진 않았다.
아직 쌀쌀한 날씨는 긴 숨을 금방 하얗게 얼려버린다. 버키는 길게 흩어지는 자신의 숨을 바라본다. 후우. 괜히 크게 숨을 내쉬면 꼭 담배 연기처럼 뭉클 피어올랐다. 그리곤 천천히 길을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늘 지나가던 곳에 낯선 검은 물체가 하나 있었다.
‘뭐지.’
처음엔 쓰레기 봉지인 줄 알았다. 하지만 점점 가까이 다가가자 그건 웅크린 채 쓰러진 사람이었다. 깜짝 놀라 의식을 확인한다. 코끝에 약한 숨이 느껴지고, 그다음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얼굴엔 울긋불긋한 멍은 물론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
모르는 사람이라도 당황할 판에 아는 얼굴이었다. 새벽길 문을 연 약국도 병원도 찾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매정하게 다친 사람을 놔두고 갈 성격도 되지 못했다. 버키보다 약간 작은 녀석을 간신히 부축해서 일어난다. 의식이 없어 늘어진 녀석을 겨우겨우 끌어서 집에 데려왔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온몸은 추운 날에도 땀범벅이었다. 그렇게 겨우겨우 소파에 눕힌 녀석은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끙끙 앓았다.
눈에 보이는 외상은 확실하지만, 안쪽은 장담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살살 먼지만 씻어낸 후 약을 바른다. 그렇게 반나절을 내리 잔 녀석이 간신히 눈을 떴을 때 버키는 자리에 없었다. 럼로우는 낯선 공간에서 도망칠 만큼의 체력도 없어서 그대로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아…저씨?”
“그래.”
“아저씨가 어떻게. 악!”
“누워있어.”
급하게 일어나려다 옆구리를 붙잡고 스러진다. 미운 놈 한 번 더 잘해준다는 심정으로 버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병원은 죽어도 안 간다기에 그냥 그러라고 했던 것이 벌써 일주일째다. 아예 소파에 자리 잡고 누운 녀석은 버키가 보면 더 아픈 척을 한다. 버키도 어느 정도 응급 지식은 있어서 갈비뼈나 장기를 다치지 않은 것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더 걱정되는 터라 그냥 놔두었다. 그걸 잘 아는 녀석은 오늘도 열심히 소파에서 시위한다. 늘 그랬다.
*
“아저씨.”
“…….”
“아저씨!”
“…어. 왜.”
“나한테 물어본 거 다 대답했다?”
“뭐?”
“아저씨가 안 들은 거야.”
“너. 잠깐만!”
“잘 먹었습니다. 환자는 접시만 치우고 다시 누워야지.”
버키를 뒤로한 채 럼로우가 일어선다. 접시를 물속에 담가두고 절뚝거리며 버키 곁을 지나친가. 그리고 소파까지 느릿하게 걸어가더니 앓는 소리를 내며 앉았다.
전력이라 시간이 부족해 보고싶은 부분만 쓰느라 굉장히 불친절 하지만, 언제나처럼 잘 부탁드립니다.
윈터솔져 기반 럼로우와 버키 이야기 입니다
적당한 망상과 설정 붕괴가 언제나 함께 합니다 ㅇㅅㅇ)9
write. 환월
솔직히 이 정도로 알려줬으면 할 만큼 했다.
안 그래도 하루하루 살기가 팍팍한 곳에서 이 이상의 친절을 기대하면 안 되는 일이었다. 아무리 머리가 멍청한 새끼라도 말은 알아들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닌 모양이었다. 하나도 바뀌지 않은 상황에 럼로우는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
“뭘 잘했다고 눈을 치떠.”
“…….”
“귀가 먹어버린 개새끼도 너보단 말을 잘 알아듣겠다.”
“…….”
“어쭈?”
“…….”
럼로우가 소리를 버럭 지르면 어둠 속에 뭉쳐 앉은 놈은 구물구물 움직인다. 그러더니 한껏 웅크린 채 눈치를 본다. 아니 보는 척만 한다. 정말 저 새끼 마음속에 잔소리 한 토막이 들어앉았으면, 똑같은 상황을 서른 번도 넘게 만들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무슨 생각하는지 다 아니까 제발 말 좀 들어라.”
“…….”
“입이 붙은 건지. 말을 못하는 새낀지.”
“…….”
하긴 뇌를 갈아버렸는데 똑바로 말을 하면 그것대로 무서운 일일테다. 럼로우는 그냥 그렇게 넘기기로 했다. 이 미친 곳에서 살아남으려면 쓸데없는 호기심은 좋지 않았다. 처음엔 그저 돈이 짭짤하게 들어오는 용병 일이라고 해서 시작했는데, 하이드라는 한번 잡은 먹잇감을 쉽게 놓지 않았다.
바쁘게 살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도저히 발을 뺄 수 없는 곳까지 오게 되었다. 이쯤 되면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됐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럼로우의 본능은 어서 도망치라고 했지만, 마음대로 사라질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미 받아먹을 대로 받아먹은 것은 물론이고, 기밀정보도 제법 알게 되었다. 이 상태에서 그만두고 싶어하는 건 죽여달라는 무언의 부탁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내가 이러고 있지.”
“…….”
“너 내 갈비뼈 부러뜨린 건 생각나?”
“…….”
에셋은 모르는 눈빛이었다. 한없이 커다랗고 불안한 눈동자를 한 채 못 볼 걸 본 것처럼 움직인다. 럼로우는 그런 녀석을 보니 슬슬 짜증이 치밀었다. 오냐오냐 해주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럼로우가 한걸음 다가서면 에셋은 두걸음 물러난다. 더 갈 곳이 없을 정도로 벽에 밀착한 채 눈을 굴린다.
“이거 봐라.”
“…….”
“나 참.”
“…….”
“이거 보여? 네 놈이 그랬잖아.”
“…….”
안 그랬다는 표정으로 럼로우를 바라본다. 물론 그 눈빛을 알아듣는 사람은 럼로우 뿐이었다. 그 순간 귀에 꽃은 무전기에서 어서 에셋을 안으로 들여보내라는 명령이 하달된다.
“예. 예.”
“집어넣을까요?”
“아서라. 또 몇 명이나 다치려고.”
“하지만…….”
“기다려봐.”
“네.”
부하들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물러선다. 물론 당차게 말은 했지만, 저 녀석이 무섭긴 했다. 저번에도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을 그대로 벽에 처박은 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 녀석은 척추가 나갔다고 했던가. 아니면 다리가 부러졌다고 했던가. 그런 꼴을 여러 번 보다 보니 두려움이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자, 에셋.”
“…….”
“집에 갈 시간이다.”
“…….”
럼로우는 오른쪽 문을 열라고 조용히 손짓한다. 말을 잘 듣는 부하 둘이 냉큼 문을 열고 뒤로 빠진다. 저기까지 집어넣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던가. 매일매일 난리가 났다. 하지만 럼로우는 별로 어렵지 않은 표정이었다. 천천히 걸어간다. 점점 다가오는 남자를 보던 에셋은 날쌘 맹수처럼 뒤로 물러난다. 위협하든 손을 뻗어도 그다지 무서워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는다.
“…….”
에셋은 그런 남자를 무서워했다. 분명 저 남자가 몇 번이나 크게 다쳐서 실려 나가는 것을 본 기억이 있었다. 뇌를 아무리 지져도 아주 흐릿하게 남는 잔상은 에셋을 휘감고 자랐다. 그 잔상의 중심엔 럼로우가 있었다. 얼굴에 피가 터져도, 두 다리가 부러져도 며칠 뒤면 멀쩡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다. 에셋은 깊은 생각을 하지 못해서 그런 남자가 마냥 무서웠다.
“…으.”
“쉬, 그만 칭얼거리고 집에 가야지.”
“…….”
“들어가자.”
가까이 다가가서 발을 쾅 구르니 에셋이 열려있는 문으로 쑥 들어갔다. 그러더니 스멀스멀 고개를 빼고 주변 상황을 살핀다. 저런 것 마저 짐승과 똑 닮았다. 다시 한번 발로 세게 바닥을 친다. 쑥 들어간 녀석은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직접 문을 닫은 후에 몇 겹이나 되는 잠금장치를 걸었다.
“아이고, 귀찮은 새끼.”
“저, 팀장님.”
“왜?”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돌아본 럼로우를 보자마자 약간 후회가 된다. 하지만 궁금함을 이길 수 없었다. 럼로우가 이쪽으로 배정되기 전 얼마나 많은 사건사고가 생겼는지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편하게 에셋을 다룰 수 있었다.
“저 녀석이 왜 팀장님을 무서워하죠?”
“귀신인 줄 아나 보지.”
“…예?”
“꼴에 생각이란 걸 한다고, 내가 계속 나타나는 걸 그런 식으로 이해한 것 같은데. 왜? 자네들도 내가 귀신으로 보여?”
“아뇨…그럴 리가.”
하긴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눈앞에서 몇십 년 동안 얼었다가 녹길 반복하는 것도 있는데, 럼로우를 무서워하진 않을 것이다. 물론 팀장으로서 럼로우는 엄하고 깐깐한 사람이었지만, 그런 무서움과 에셋이 느끼는 감정은 달랐다.
“하여튼 저런 새끼들은 비위 맞춰주기가 힘들어서.”
“…….”
“에셋은 이틀 뒤에 꺼낼 거니까 나 없을 때 사고 치지 마.”
“예.”
“그래. 가서 쉬어. 내일 아침 늦지 말고.”
럼로우는 약간 피곤한 표정으로 손을 휘휘 저어 부하들은 내쫓았다. 이 상황에선 없는 쪽이 더 편했다. 개인 시간을 가질 생각에 후다닥 꺼진 녀석들은 꽁지도 보이지 않았다. 뒷 목을 슬슬 주무르던 럼로우는 에셋이 갇혀있는 방 앞으로 걸어간다.
“…….”
“거기 있는 거 다 안다.”
“…….”
씩씩거리는 소리가 작은 구멍을 통해 흘러나온다. 헐떡거리는 소리를 듣자 하니 놀란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뭐 여기서 다시 꺼내서 얼러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이고. 럼로우는 그대로 주저앉은 채 다리를 쭉 뻗었다. 피멍이 들고 뼈가 두 쪽으로 부러졌던 다리는 어느새 멀쩡해졌다. 물론 아침에 일어나다가 약한 현기증을 느끼긴 했지만, 위험할 정도는 아니었다.
“야.”
“…….”
“날 기억하긴 해?”
“…….”
“넌 늘 이렇게 날 무서워하면서 날 기다리잖아.”
“…….”
“그리고 나는 늘 널 잊어야 했고.”
“…….”
“물론 너도 늘 모든 일을 망각한 채 아무것도 모르는 무기로 돌아가지만 말이야.”
“…….”
“날 이렇게 만든 건 서른다섯 번 째야. 좀 기억해.”
“…….”
“다른 사람한테 이러면 벌써 시체 여러 번 치웠을 거야. 알았어?”
“…….”
“하여튼 비싼 새끼야.”
“…….”
꿈쩍도 하지 않는 입을 열 방법이 없었다. 그래. 멋대로 생각해라. 럼로우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무리 윈터솔져의 담당이라지만, 이렇게 삭막하고 추운 곳에서 함께 밤을 새우고 싶진 않았다. 불을 끈 럼로우가 문을 닫는다. 무거운 문이 닫히자마자 적막이 내려앉는다. 여전히 씩씩거리는 거친 숨을 내뱉는 윈터솔져는 어둠에 묻힌 채 구물 구물 움직였다.
*
럼로우가 처음부터 이렇게 윈터솔져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자신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어렸을 때 있었던 일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혈청 보유자를 늘리려고 했던 하이드라는 어린 용병을 중심으로 인체 실험을 강행했다. 윈터솔져의 피를 정제해서 어느 정도 혈청 비슷한 것을 만들어내게 되자 그것을 인체에 직접 주입하는 방법으로 끝없는 실험을 했다.
이 실험을 하는 동안 수많은 아이가 죽어갔다. 럼로우도 그중 하나였다. 온몸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과 힘줄마다 벌레가 가득 찬 느낌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연구원들은 그런 럼로우의 몸을 침대에 단단히 묶었다.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상태로 고열이 올랐다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지길 반복했다.
그리고 다행히 살아남은 녀석이 천천히 눈을 떴을 때, 주변 침대는 모두 비어있었다. 수많은 목숨을 희생해도 그다지 눈에 띄는 성과를 얻지 못했다. 윈터솔져처럼 강하지도, 눈이 밝지도 않은 녀석은 쓸모가 없었다. 인제 그만 처리하라는 지시에 산채로 땅에 묻혔던 것 같았다. 간신히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렇게 좋을 대로 떠돌아다니던 럼로우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받은 실험과 단체에 대해 잊어버렸다. 먹고 살기가 더 급했기 때문에 그런 허울 좋은 과거를 더듬을 여유가 없었다.
“…….”
고통이 느껴지지 않고, 제법 심한 상처를 입어도 빠르게 아문다. 신기한 일이었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용병 일을 하기에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칼에 찔려도, 총알이 박혀도 약간 눈을 움찔거리는 남자를 보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괴물이라며 혀를 찼다.
그렇게 굴러먹던 녀석은 다시 하이드라 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특이 체질이 들통나고 말았다. 그리고 과거 기록을 찾아낸 사람은 럼로우를 총장실로 떠밀었다. 어떻게든 발각될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빠를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 능력을 높이 산 총장이 럼로우에게 윈터솔져를 떠맡겼다.
좋은 일은 아니었다. 처음 만난 날 윈터솔져는 도대체 뭐에 화가 났는지 럼로우의 목을 잡고 벽에 던져 버렸다. 우드득 소리와 함께 갈비뼈가 부러진다. 럼로우가 쓰러진 것을 본 윈터 솔져는 꼭 목이 매달린 맹수처럼 굴었다.
“아, 젠장.”
“…….”
“사람을 이렇게 내동댕이치다니 귀찮은 무기네. 다른 녀석이었으면 벌써 목뼈가 부러져서 죽었어.”
“…….”
“갈비뼈가 부러지고, 팔이 빠졌네. 이것도 청구하면 돈으로 줘? 응?”
“…….”
그때부터 에셋이 럼로우를 무서워했다. 눈앞에서 빠진 팔을 맞추더니 다음날은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온다. 그 다음번엔 두 다리가 완전히 부러졌는데 정확히 삼일 뒤 걸어서 들어왔다. 물론 럼로우는 아픔을 느끼지 않고, 상처를 치료할 수 있을 뿐 불사는 아니었다. 목이 떨어지면 죽는다. 심장을 뽑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에셋은 자꾸 멀쩡하게 돌아오는 녀석을 보면 괜히 구석으로 숨는다.
오랫동안 이어진 이 기묘한 관계는 럼로우를 꽤 귀찮게 했다. 럼로우가 아무리 다쳐도 멀쩡한 것을 알아버린 에셋은 날로 사나워졌고 남자 없이는 제대로 다루기조차 힘들었다. 안 그래도 쉴드 잠입 임무를 받고 있어서 신경이 날타로운데 에셋까지 저 모양으로 구니 머리가 쪼개질 것 같았다.
“또 뭐야.”
럼로우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쉴드에서 하이드라 무전을 받는다. 상대는 스트라이커팀에 숨어있는 하이드라의 심복이었다.
“…….”
“뭐?”
“…….”
“알겠어. 오늘가서 처리하지.”
럼로우는 짧은 대답을 하고 무전을 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잘생긴 상사가 슬쩍 돌아본다.
“무슨 일이지?”
“예?”
“자네가 그런 식으로 무전을 받는 걸 처음 봐서 그러네.”
“별거 아닙니다. 스트라이커 팀이 돌아오다가 무단횡단을 하는 미친개를 칠 뻔해서 쫓으려다 팔뚝을 물어 뜯겼다고 하더군요.”
“…응?”
“그렇답니다.”
“농담인가.”
“농담일 수도 있죠.”
“자넨 참…아닐세.”
잘생긴 얼굴은 곧 시선을 반대쪽으로 돌린다. 럼로우는 속으로 껄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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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윈솔에서 그 화상을 입고 무너지는 건물에서 살아나와서, 크로스본즈 할정도면 럼로우도 혈청을 맞았던 것이 틀림 없습니다(선동과 날조)
근데 혈청이 딴게 아니고 자힐만 가능하게 발현해서 힘으론 스팁한테도 지고 윈솔한테도 지고...
“식사를 마치는 즉시 창고에 준비된 재료로 은신처 전체가 탈 수 있도록 불을 붙인 후 무기를 데리고 귀환하게.”
“…….”
“증거를 남기지 말아야 하네. 알았나.”
“…알겠습니다.”
“자네를 믿지.”
무전이 뚝 끊겼다.
이 말은 곧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소리와 같았다. 하지만 고집이 센 무기는 좀처럼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채 버티고 앉은 무기를 다루는 덴 제법 시간이 걸렸다. 곱게 모셔가는 무기와 달리 럼로우는 내내 할 일이 많은 사람이었다.
“진짜 이렇게 협조 안 할래?”
“…….”
“저 눈깔을 찌를 수도 없고.”
“…….”
“피범벅 해서 노려보지 마 소름 끼치니까.”
“…….”
그 소리는 알아듣나보다. 날카롭던 눈매가 순간 불쌍하게 축 처지더니 고개를 숙인다. 강아지로 치자면 온몸으로 자기 화났다고 시위하는 꼴이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고 하더니 감정 숨기는 법도 서툴렀다. 저럼 놈이 어떻게 최고의 암살자가 된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일어서.”
“…….”
“집에 가셔야죠. 윈터 솔져씨.”
“…….”
“안 일어나?”
하여튼 얌전하게 행동하면 말이라도 곱게 해줄 텐데 꼭 저렇게 버텨서 욕을 얻어먹는다.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으면서, 답답하다는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엉덩이를 두들겨서 내려갈 수는 없으니 그냥 몇 번 걷어찬다. 무거운 엉덩이가 이제야 떨어진다.
그리고 어떻게 산길을 내려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다만 어지간히 더러운 꼴을 보고 산 용병도 그날의 참상은 좀처럼 잊히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시커먼 새끼가 획 돌아서 자신을 물어뜯을 수도 있었다. 그러면 뭐 죽어야지. 럼로우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계속 걸어.”
“…….”
“쉬, 뒤돌아보지 말고.”
“…….”
아까 눈이 돌아간 채 으르렁거리던 녀석은 오간 데 없고 잔뜩 겁에 질린 녀석이 순순히 걸음을 옮긴다. 이 녀석은 늘 이랬다. 아프면 아프다. 싫으면 싫다. 적어도 간단한 신호를 보내줘야 뭘 알아차릴 텐데, 그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미 명령에 익숙해진 삶이란 언제나 이렇게 얼어붙어 있었다.
“왔군,”
“바쁘신 분이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무기 손질이 잘 된 건지 확인하러 왔네.”
“…….”
“섬세한 녀석이거든.”
“아, 예.”
떨떠름한 표정으로 비켜선다. 에셋은 눈앞에 있는 피어스를 보고 벌벌 떨었다. 아가 그 귀신같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찾을 수 없었다. 하여튼. 럼로우는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지만, 자신의 목숨 줄을 틀어쥐고 있는 사람 앞에서 내색할 순 없었다.
“잘 움직일 것 같군. 돌아가지.”
“예.”
“솔져는 따로 싣고 럼로우는 이따 잠깐 내 방으로 오게.”
“알겠습니다.”
이제 잠시 이별이었다. 기름을 먹인 녀석은 금방 끌려가서 또 뇌를 갈아버릴 테고, 자신은 바삐 움직여야 했다. 잠시나마 지옥을 오가던 남자는 이제야 가늘게 한숨을 내쉬어 본다. 언제 또 만날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지만 한 번 더 만나고 싶었다. 그나마 저 녀석이 말을 잘 들어주면 괜찮겠지만 짐승만도 못한 뇌를 가진 무기는 언제 폭발할지 몰랐다.
“하여튼 이런 곳에 발을 들이는 게 아니었어.”
용병으로 굴러먹다 중년이 다 된 남자는 이제야 자신의 인생을 돌아본다. 하지만 그런다고 바뀌는 것이 없었다.
*
“얜 또 왜 이래?”
“무슨 말이십니까?”
“왜 눈이 죽은 생선처럼 맛이 가있냔 말이야.”
“바이탈 사인. 심장 박동. 호흡. 고통 신호. 모두 정상입니다.”
“저걸 정상이라고 부르는 네놈들 머리부터 좀 열어봐야겠다.”
“…….”
으르렁거리는 용병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듯 과학자 무리는 입을 다문다. 전기로 잘 지져놓은 녀석은 아직도 근육이 펄떡펄떡 뛰었다. 죽은 것 같진 않은데 살아있는 것만 못한 상태였다. 마우스피스를 얼마나 깨물었는지 잇자국이 깊게 났다.
“아주 시체를 움직이네.”
“생각보단 멀쩡해. 혈청이 아직 살아있으니까.”
“…….”
“아닙니다.”
“이 녀석을 뭐 어쩌라고?”
“밥을 먹여야지.”
“밥? 이 새끼가 밥도 먹어?”
“물론. 그렇지 않으면 이미 굶어 죽은 시체가 되어있을 텐데.”
“…….”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이지만, 저런 놈이 밥을 먹는다는 것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뱃속을 비운 채 임무를 돌다가 모든 일이 끝나면 바로 얼려버리는 무기한테 그런 선택지가 있다니. 자던 캡틴 아메리카가 놀랄 일이었다. 럼로우가 그러거나 말거나 과학자들은 분주했다. 하지만 기계를 정리하는 것 외에 다른 일은 하지 않았다. 얼씨구. 남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야?”
“…….”
“아, 위험한 건 내가 하라고?”
“흠. 흠. 흠.”
“밥값도 이 정도면 알차게 빼먹는다니까.”
남자는 별로 무서워하는 기색도 없었다. 가까이 가서 볼을 툭툭 두드리니 썩은 생선 같던 눈에 살짝 생기가 돈다. 그 눈은 겨울이 잔뜩 할퀴고 사라진 색이었다. 그나마 살아있다는 신호였다.
“밥 먹으러 가자.”
“…….”
“왜 또.”
“…싫.”
“싫긴 뭐가 싫어.”
“…….”
“가자.”
럼로우가 손목을 단단히 옥죄고 있던 기계를 풀어준다. 혹시나 큰일이 생길까 봐 강제로 전원을 내려놓은 팔이 무겁게 늘어졌다. 도통 자신의 기분을 전하지 못하던 녀석이 눈꺼풀을 파르르 떤다. 그러더니 불안하게 눈동자를 움직이다 럼로우를 바라본다. 물론 잠시 눈을 바라보다 금방 시선을 돌려버렸지만, 놀라운 반응이었다. 도대체 식사 시간에 뭘 시키기에 이 녀석이 이렇게 싫어하는지 알 수 없었다.
“…….”
“네가 안가면 내 목이 달아날걸.”
“…….”
“그래도 내가 너한테 제일 잘해주지 않아? 담당자 또 바뀔래?”
“…….”
그건 싫은 모양이었다. 늘 말하지만, 이 에셋은 임무가 끝나면 늘 눈물이 많고 겁을 잔뜩 집어먹는 녀석이었다. 이 꼴을 보아하니 그다지 전쟁에 어울리는 녀석도 아닌데 왜 이런 곳에 끌려와 모르모트 취급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건 싫지?”
“그럼 가자.”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녀석이 천천히 일어선다. 럼로우는 익숙하지 않은 장소라 과학자에게 턱짓한다. 과학자 중 한 사람이 길 안내를 한다.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보니 감옥이었다. 아마 생체실험을 하기 위한 인간을 모아둔 곳이겠거니 했다. 단단한 철문으로 막힌 곳은 누구 하나 들여다볼 수 없을 정도로 꽉 막혀있었다. 아니 아무리 키우는 개라고 해도 밥은 밝은 곳에서 준다는데 이런 축축하고 음산한 곳에 데려와서 뭘 하겠다는 것인지. 럼로우는 점점 찝찝해졌다.
“저 끝이야.”
“뭐야. 같이 안 가?”
“끝나면 데리고 올라오도록.”
“…….”
젠장. 럼로우는 속으로 과학자 머리에 총을 쏘는 상상을 한다. 비열한 쥐새끼가 사라진 곳엔 윈터솔져와 굴러먹던 용병뿐이었다. 무슨 일이 있을진 들어가 봐야 안다. 감옥 중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방으로 걸어간다. 윈터 솔져가 낮게 그르릉 운다. 이렇게 짐승 같을 수 없다.
“여기서 무슨 밥을…….”
럼로우의 말이 뚝 끊겼다.
눈앞엔 허리 부분을 깊게 베인 채 피를 줄줄 흘리는 이름 모를 모르모트가 있었다. 단단하게 손목을 얽은 수갑 덕분에 지혈조차 하지 못하고 새하얗게 질린 녀석은 어디서 잡혀 온 인간인지조차 구별되지 않았다. 럼로우는 눈앞에 나타난 충격적인 장면 덕분에 옆구리에 끼고 온 윈터솔져가 홀린 듯 열린 감옥 안으로 들어가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