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화를 신고 오는 사람은 모두 무서웠다. 뚜벅. 뚜벅. 무겁고 거친 굽이 바닥에 닿으면 소름 끼치는 소리를 만들었다. 그 소리가 멀리서 들리기 시작하면 눈을 질끈 감았다. 귀를 막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간신히 숨만 내쉬는 불쌍한 무기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조만간 닥쳐올 고통을 준비한다.
“…….”
늘 여기서 그대로 지나가면 좋을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빠르고 급하게 걷던 발자국이 뚝 멈추면 항상 무거운 철문에 열쇠를 집어넣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열쇠가 돌아간다. 철컥. 자물쇠가 열리자 몇 겹이나 단단히 묶인 쇠사슬이 풀어진다. 그러면 무겁고 녹슨 문이 천천히 열린다. 냉골 같은 방에 방치되어있던 녀석은 최대한 구석으로 몸을 숨기려 했지만, 사각지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
“솔져?”
“…….”
“덜 녹았군.”
“…….”
세뇌 상태가 아닌 윈터 솔져는 늘 겁이 많다. 고통에 대한 공포에 푹 잠겨 있다. 하긴 이젠 죽어버린 이름인 버키 반즈였을 때도 그랬을 것 같았다. 전쟁에 나온 것도 원하지 않았다. 다 죽어가는 외팔이를 주워와서 몇 번이나 뇌를 갈아버려도 마지막 본성을 지우지 못했다. 세뇌 중일 땐 멀쩡하게 말을 듣다가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곧장 발작을 일으킨다.
“솔져. 총장님이 부르신다.”
“…….”
“끌어내.”
“…….”
하지만 지독할 정도로 끔찍한 고문에서 살아남은 인간적인 면은 하이드라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눈앞에 보이는 군화들도 그랬다. 버키, 아니 윈터솔져가 어떤 것을 두려워하던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목적만 달성하면 그만이었다.
해동이 덜 된 몸에선 겨울 냄새가 난다. 그런 남자를 양쪽에서 겨드랑이에 팔을 끼우고 일으킨다. 제대로 굽혀지지 않은 발목 관절 때문에 발끝이 툭툭 바닥에 걸린다. 그 상태로 끌고 가기 시작하면 윈터 솔져 뒤로 긴 물기가 남았다.
“…….”
“늦었군.”
“좀 문제가 있었습니다.”
“또 그 일이겠지. 정말 지독하군. 이 정도면 아무 생각이 나지 않을 텐데.”
“그렇습니다.”
“하여튼…이놈이고 저놈이고.”
날카로운 눈매가 조용히 돌아간다. 억지로 끌어다 의자에 묶어둔 무기는 좀처럼 진정할 줄을 모른다. 크게 부푸는 가슴은 자꾸 헛숨을 들이쉰다. 온몸에 연결된 기계 장치는 불안한 상태를 가감 없이 보여줬다. 우는 법을 잊어버린 녀석은 표정조차 모호하다. 우는지 무서워하는 것인지. 도통 알아챌 수 없었다.
“참 손이 많이 가는 무기야.”
“…….”
“저번에 사용하고 나서 가이드가 출장 중인 터라 그대로 얼렸더니, 좀 불안한 모양입니다.”
“가이드? 어디 갔지?”
“캡틴과 함께 잠입 수사를 나서는 바람에.”
“…아 그랬군.”
“…….”
무기는 말이 없다. 이 의자에 앉아 있으면 모든 말이 저 멀리서 들리는 것 같다. 들어봤자 전혀 도움이 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저 위에서 결정하면 그만인지라 선택권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늘은 그저 조금 덜 아팠으면 했다.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속눈썹에 불안함이 주렁주렁 열린다.
“솔져.”
“…….”
“가이드가 없지만, 이번에도 잘 해주리라 믿는다.”
“…….”
“솔져?”
“…….”
“네가 하는 일은 모두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야. 비록 지금 고통이 심하겠지만, 돌아오면 가이드를 바로 붙여주마.”
“…….”
“대답해.”
“…내가.”
“내가?”
“여기는…어디지.”
안타까운 무기는 자꾸 짚어서 안 될 곳을 짚는다. 이미 망가진 뇌가 계속된 리셋으로 제대로 작동을 하지 못하니 최근 기억은 모두 잊어버린다. 그러니 자꾸 한 줌 남은 과거의 파편을 그러쥔 채 되물어 보곤 한다. 물론 그러면 꼭 아픔이 뒤따른다.
“…….”
결국, 매를 번다. 뺨을 맞고 기계에 팔이 구속된 채 뇌를 다시 한 번 갈아버린다. 물론 이렇게 하면 가이드가 없어도 센티넬 능력을 뽑아 쓸 수 있다. 아마 무기가 순순히 명령에 따랐어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백치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또 한 번 마우스피스를 물고 꺽꺽 소리를 지를 뿐이었다.
*
“…….”
센티넬 능력을 발휘하면 밤을 뛰노는 맹수만큼 눈이 좋아진다. 하지만 그것도 가이드가 내내 붙어있어서 컨디션을 조절해 줄 때 이야기였다. 한계까지 몰린 녀석은 결국 순간적으로 눈이 멀어버렸다. 발작을 일으키며 땅을 뒹구는 녀석에겐 동물에게도 쓰지 않을 것 같은 독한 마취제가 푹푹 꽂힌다.
“…….”
“저쪽으로 옮겨. 그리고 빨리 가이드 수배해서 데려와.”
“알겠습니다.”
완전히 늘어진 녀석을 독방에 밀어 넣는다. 한참 그렇게 정신을 놓고 있으면 아주 조금씩 몸이 진정된다. 하얗게 타버렸다가 간신히 돌아온 시력은 아직 형편없었다. 눈을 천천히 깜빡여 봐도 도통 초점이 잡히지 않았다. 흐릿한 시야에 뭔가 움직이지만, 귀조차 먹어버렸는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능력을 심하게 끌어다 쓰면 꼭 이렇게 지독한 리바운드가 온다.
“…또.”
완전히 갈라지고 메마른 입술에서 신음소리에 섞인 혼잣말이 흘러내린다. 조금씩 시야가 밝아지면 또 바쁘게 움직이는 군화가 보인다. 늘 그런 식이었다. 군화를 벗어나지 못하면 고통도 끝나지 않는다. 그걸 알지만 불쌍한 무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미친 거 아냐? 내가 지금 얼마나 눈치 보이는 줄 알아?”
“그러면 어찌합니까. 무기가 죽어 넘어가는데.”
“그러니까 누가 나 없을 때 막 굴리랬어? 아니면 대타라도 하나 만들어 오던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죠.”
“너희도 말이 되는 일을 좀 시켜라. 나 참.”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귀가 트인다. 끈 떨어진 인형처럼 늘어져 있던 손가락이 조금씩 움직인다. 하지만 바쁘게 지나다니는 군화는 그걸 알지 못한다. 아. 성대가 쩍쩍 갈라졌는지 숨이 갈래갈래 찢어진다. 당장에라도 죽을 것 같은데,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안다.
“에셋. 일어나 봐.”
“지금 움직이지도 못할 걸요.”
“…미쳤군. 이럴 때까지 굴리다니.”
“…….”
“뭘 봐. 문 닫고 나가”
“아, 예.”
싸늘한 한마디에 군화가 우르르 물러난다. 이제야 조금 숨이 트인다. 버키의 눈엔 먼지가 가득 쌓인 군화가 한가득 맺혀있었다. 자신에게 그리 아프게 대하지 않는 군화였다. 말은 험하지만 적어도 직접 위해를 가하진 않는다. 뻣뻣하게 굳어있던 몸이 슬슬 풀어진다.
“안 죽은 거 알아. 일어나.”
“…….”
“새끼.”
가이드란 남자는 단 한 번도 먼저 손을 내밀어주지 않는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선다. 그러다 팔이 푹 꺾이면서 앞으로 쓰러진다. 얼굴을 부딪힌 것인지. 아닌 건지. 구분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둘이 있으면 조금씩 바짝 선 신경이 누그러지기 시작한다.
“내가 이러다 제 명에 못 살지.”
“…….”
“어쩌다 이런 녀석을 떠맡아서.”
투덜거리는 목소리조차 자장가 같다. 둘이 있을 땐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다. 별것 아닌 상황이지만 에셋에겐 꿀 같은 휴식이었다. 담요 한 장 없는 맨바닥에 널브러진 채 눈만 껌벅거린다. 그렇게 한동안 둘은 말이 없다가 군화가 먼저 자리를 비킨다. 가지 말라고 잡아볼까 하지만 역시 그만둔다. 착한 군화는 그런 행동을 몹시 싫어했기 때문에, 할 수 없었다.
“…….”
“괜찮냐?”
“…….”
죽었다 살아난 남자가 옆으로 누운 채 눈만 흐릿하게 뜬다. 온몸에 열이 오르고 힘이 빠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눈만 끔벅거리고 있으니, 그 모습이 측은한지 남자가 아무렇지 않게 다가온다.
“…….”
흐릿한 시야에 낯선 것이 잡힌다. 럼로우는 늘 신던 군화를 벗고 구두를 신고 있었다. 낯선 모습에 좀 놀랐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언젠간 너에게 구두를 신고 가련다. 그땐 너도나도 전쟁 통에선 살지 않을 거니까. 남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니 정말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모습이었다. 어디서 봤을까. 백치는 열이 잔뜩 오른 머리를 잡고 끙끙거린다.
“백치야.”
“…….”
“우리 이제 여기서 못 살게 됐어.”
“…….”
“알아들어?”
“…….”
덤덤하게 말하는 남자는 옷도 멀끔하게 바꿔 입었다. 뭘까. 백치는 불안해한다. 늘 화약 냄새를 묻히고 살던 남자가 사라진 것 같았다.
“인사 끝났으면 옮길 거니까. 비켜 럼로우.”
“하여튼 산통 깨는 덴 뭐가 있다니 까요.”
“비켜.”
“예. 예. 알겠습니다.”
구두가 멀어진다. 아프지 않은 군화가 구두로 바뀐 채 시야 멀리 사라진다. 그리고 익숙한 향기가 성큼 다가온다. 열이 올라서 코가 망가진 걸까. 백치는 아파서 내내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크고 시원한 손이 이마에 닿았다 눈 밑을 쓱 쓸고 지나간다.
그 순간 정신이 아득히 멀어진다. 꼭 아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뇌는 깊은 생각을 하는 것을 거부한다. 이럴 땐 정말 쓸모없는 몸뚱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