럼로우의 말에 의하면 버키의 눈이 안 보이는 것은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했다. 하지만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을 해서라도 친구가 나아졌으면 하는 생각에 참고 또 참았다. 아무리 인내심이 깊은 캡틴이라고 해도 자꾸 눈앞에서 달갑지 않은 상황을 보면 점점 예민해지고 만다.
“언제까지 그럴 거야?”
“이 녀석 눈 고쳐놓으라고 한 건 캡틴이잖습니까.”
“…….”
“내가 뭘 어쨌다고 이래요.”
“너무 오래 걸리잖아.”
“그게 내 책임입니까?”
“…….”
하긴 스티브도 자신이 되지도 않는 짜증을 부리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저렇게 럼로우만 따르는 친구를 보고 있자니 속이 꼬였다. 그런 캡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버키는 내내 텅 빈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기만 한다.
“이 녀석 책임이죠.”
“뭐?”
“내가 할 수 있는 건 예민한 성질을 진정시켜는 것 밖에 없는데, 백치가 못 받아들이는 걸요.”
“…….”
“캡틴. 정 짜증 나면 직접 하시던가 하쇼…. 예?”
“…….”
“아, 싫으면 그냥 그 스위치 누르던가. 한 번에 머리통 날아가고 좋네.”
“…….”
많이 참았다 했다. 럼로우는 대놓고 비꼬더니 자리를 뜬다. 사실 럼로우 뒷목에 나노 폭탄을 심은 것은 캡틴의 의견이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찝찝한 마음이 있어 반대했는데,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캡틴이 신원보증을 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럼로우는 뜻밖에 고분고분 나노 폭탄을 받아들이는 것 같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걸 빌미로 열심히 캡틴의 성질을 긁었다.
하지만 캡틴은 그럼 남자를 잡기 싫었다. 어차피 저렇게 문을 박차고 나가도 갈 수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럼로우는 사라졌지만 좀 문제가 생겼다. 늘 익숙한 냄새가 희미해지자 침대 위에 덩그러니 나앉은 버키가 또 이리저리 코를 킁킁거린다. 뭔가 들어도 이해를 못 하니 말로 설명할 수도 없었다. 스티브는 그런 친구를 내내 바라보았다.
“버키.”
“…….”
“버키.”
“스티브?”
“응, 맞아.”
“…….”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친구를 알아본다. 하지만 안 보이는 눈이 바로 뜨이는 것도 아니기에 시선은 언제나 저 먼 곳을 향해 붕 떠 있었다. 스티브는 표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친구한텐 보이지 않으니 어쩐지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럼로우가 했던 것처럼 발자국 소리를 낸다. 뚜벅뚜벅 걸어오는 소리가 커지자 버키의 시선이 스티브가 있는 비슷한 곳에 떨어진다. 코를 킁킁거려도 별다른 냄새가 나지 않는지 고개를 한쪽으로 슬쩍 기울인다.
“버키, 괜찮아?”
“…….”
“저번에 놀라게 해서 미안해.”
“…내가 그랬었나.”
“내가 좀 더 세심했어야 했는데, 말이야. 이젠 괜찮을 거야.”
“나…눈이 안 보여서.”
“…….”
“어디 있지.”
버키가 손끝으로 허공을 더듬는다. 예민한 암살자의 감각이 아직 죽지 않았는지, 제법 비슷한 곳에 손가락이 머무른다. 그런 버키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스티브는 손을 잡아줄 수도 없어서 안절부절못할 뿐이었다. 갑자기 손이 허공에서 멈춘다. 그 손끝에 스티브의 푸른 시선이 철썩 다가와 붙는다. 손끝으로 그려낸 허공의 궤도가 눈에 보인다면 아주 복잡했겠지.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팠다. 부지런히 움직이던 시선은 여전히 저 벽 너머를 보고 있었다.
“스티브. 스티비. 어디 있어.”
“…….”
“이쪽인가.”
“아니.”
“기다려 봐. 찾을 수 있어.”
“…….”
“찾을 수 있어. 스티브.”
보다 못해 한마디를 툭 던졌지만, 친구끼리 닮은 고집은 꺾이지도 않는다. 버키의 손은 자꾸 허공을 더듬으면서 애매한 거리에서 움직였다. 당장 저 손을 잡아채서 손바닥에 입술을 대고 싶었다. 끈질기게 기다리던 스티브는 더는 참지 못하고 슬쩍 고개를 꺾는다.
사실 알아차려도 별 상관없었다. 알아차리면 알아차리는 대로 손 한 번 더 잡아보면 된다. 우직한 고집이 슬쩍 기울이자 버키의 손끝에 단단한 피부가 닿는다. 보이지 않는 눈이 깜박이면서 속눈썹 그늘을 만들어낸다. 약간 커진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지만, 저번처럼 놀라진 않는다.
“여기 없었던 것 같은데.”
“지금부터 있으면 되는 거지.”
“그런가.”
“…응.”
“어디 보자. 얼마나 잘생겨졌나.”
손가락이 더듬더듬 스티브의 얼굴을 타고 올라온다. 한쪽 손으로만 만지자니 좀처럼 얼굴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혹시나 친구가 다칠까 싶어 버키는 왼쪽 팔을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스티브는 그런 손길이 기분이 좋았다. 스르르 눈을 감으면 어렸을 적 기억이 살아 올라왔다.
“이렇게 컸었나.”
“꽤 됐지.”
“더 커진 거 같네. 얼굴은 다친 곳은 없는 거 같고…….”
“…….”
“멍든 곳도 없고.”
볼에 손바닥을 댄 채 친구가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그런 얼굴을 보던 스티브가 결국 참지 못하고 손 위에 손을 겹쳐버린다. 따뜻한 체온이 닿자 버키가 지레 놀라서 펄쩍 뛴다.
“정신이 들어서 다행이야.”
“내가…얼마나 잔 거지.”
“조금 많이.”
“다행이네. 또 몇 년 동안 잠이 든 건 줄 알았어.”
“…….”
“이번에 일어나면 널 놓칠 거 같아서, 불안했는데. 내가 아는 스티브가 맞는 것 같아.”
“그랬어?”
“응.”
버키가 웃는다. 아니 웃는다 하기도 뭐할 정도의 움직임이었지만, 스티브는 알 수 있었다. 긴장에 바짝 굳었던 몸이 스르르 무너진다. 그 틈을 놓치지 않는 스티브가 손을 슬쩍 당기니 그대로 친구의 몸이 앞으로 푹 꺾였다. 품 안 가득 친구를 안은 채 스티브는 말이 없었다. 놀란 버키한테 한 대 정도 얻어맞지 않을까 했는데, 생각보다 순순히 안겨있었다.
“…스티브?”
“왜?”
“말이 없으니까 불안해서.”
“아니야. 그런 거.”
“화난 거 아니지?”
“내가 너한테 화날 게 뭐가 있어.”
“…많지.”
“아니야.”
버키는 스티브 가슴에 코를 박은 채 눈만 감았다가 다시 떴다. 숨을 쉬면 천천히 몸이 녹는 것 같았다. 버키는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어서 무슨 일인진 잘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몸이 부들부들하게 녹아내리는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한 번 더 숨을 들이쉬니 간질간질하고 시원한 냄새가 코를 타고 넘어온다. 푸르르 입으로 숨을 내뱉은 친구가 좀 더 묵직하게 다가온다. 스티브는 그런 친구의 등을 조심스럽게 토닥인다. 한번 두 번, 어색하게 등에 올라간 손은 몇 번 허공에 멈춘다.
“너무 오래 있었다.”
“…뭘?”
“헤어진 채로.”
“그냥 날 찾아오지 그랬어.”
“그땐…생각이 좀 많았어.”
“…….”
“지금도 그러지만.”
오늘따라 버키가 제법 또렷한 언어체계를 구사한다. 말도 통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이해하기도 한다. 스티브는 기쁜 만큼 마음 한구석에 단단한 응어리가 얹혔다. 이게 다 럼로우 탓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개소리만 안 했어도 이렇게 속이 복잡해지지 않았을 텐데. 물론 가볍게 넘기지 못한 탓도 있지만, 굳이 그 사실을 집어 말해주는 남자는 늘 캡틴의 머리 위에서 놀고 싶어 했다.
‘캡틴도 이제 슬슬 저 녀석에 대한 태도를 정하라고요.’
‘뭐?’
‘이렇게 어설프게 대해봤자 남는 게 없다니까.’
‘…….’
껄껄 웃는 재수 없는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런 녀석을 쫓아버리려는 듯 버키를 좀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가슴에 코를 묻고 있던 녀석은 어느새 어깨에 턱을 올려둔 채 눈만 깜박인다. 빨리 눈이 보이면 좋을 텐데, 버키의 몸은 아무리 검사를 해봐도 복잡하기만 했다.
“스티브.”
“…응?”
“향수 뿌렸어? 아니면 누굴 만나고 온 거야?”
“…….”
친구가 갑자기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한다. 스티브는 강아지를 다루는 것처럼 버키의 등을 슬슬 쓸어내린다. 그릉그릉 울리는 숨소리가 커졌다가 작아진다.
“내가 알던 스티브 냄새가 아닌데.”
“…….”
“누구 건진 모르지만…좋다.”
“…….”
버키는 그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잠에 이끌려갔다. 애써 잠을 이기려고 눈을 깜박깜박했지만, 부드럽게 토닥이는 손길과 따뜻한 체온이 한 번에 흘러들어오자 영 버티기 힘든 모양이었다. 버키가 고른 숨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스티브는 곁눈질로 친구의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
그리고 버키가 한 말의 의미를 알아채자마자 얼굴이 잔뜩 달아올랐다. 몸을 움직이면 친구가 깰까 싶어 멋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자꾸 달아오르는 얼굴이라도 좀 수습하고 싶은데,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이 꼴을 럼로우가 보면 배를 잡고 웃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속도 모르는 친구는 완전히 잠에 취한 채 고른 숨소리만 내뱉었다.
“버키.”
“…….”
“버키.”
“…….”
돌아오지 않는 대답을 알면서도 계속 친구의 이름을 부른다. 한번. 두 번. 계속 불다 보면 심장에 쌓여서 단단해질까. 이렇게 눈앞에 있는데, 언제든 훅 사라질 것 같은 친구는 불안하기만 했다. 조금만 안정이 되면 생각하자. 스티브는 그렇게 생각했다. 버키의 몸에선 늘 비슷한 냄새를 느낄 수 있었다. 커다란 몸을 좀 더 힘주어 안은 캡틴은 버키의 목덜미에 코를 묻은 채 오랫동안 친구를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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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 냄새를 향수인 줄 아는 버키와....초인적 인내심으로 참는 스티브와..환장쇼를 벌이는 럼로우
늘 말하고 있지만 지금 천천히 쓰고있는 벜른전 신간에도 들어가는 내용입니다. 빨리 여기까지 원고를 해야할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