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다가 그런 친구의 증상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늘 이런 식으로 전원을 내린 것처럼 잠을 잔다는 말만 반복 한다. 꼭 알고 있으면서도 알려주지 않으려는 말투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니 짜증이 안날 수 없었다. 스티브는 인내심이 매우 강한 편이지만, 버키한테는 유독 약했다. 물론 버키를 찾는 그 세월을 꾹꾹 참아왔다는 사실을 친다면 인내심이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눈앞에 친구가 나타나자마자 이런 식으로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옛날의 캡틴은 아니었다.
“왜그러시죠?”
“…….”
“아, 참. 그 고고한 자존심 그만 세우고 천천히 물어봐도 될 텐데.”
“뭐?”
“혼잣말입니다. 혼잣말.”
럼로우는 캡틴 로저스를 아주 잘 안다. 그래서 꼭 이렇게 성질을 긁다 못해 뒤집어 놓기 일쑤였다. 하지만 눈 앞에서 버키가 눈을 뜨고 움직이는 걸 본 이상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궁금한 것이 있지만, 저 녀석에게 물어보는 것은 어쩐지 지는 기분이 든다. 과학의 힘을 빌리면 뭐든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럼로우는 꼭 다 안다는 표정으로 돌아본다.
“역시 나 없으면 좀 불편하겠죠?”
“…됐어.”
“뭐가 됩니까. 저 녀석 버릇 생활습관. 발작 증세.”
“…….”
“캡틴이 뭐 한가지라도 알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
“없잖아요.”
“버키를 잘 아는 건 나야.”
캡틴은 또박또박 단어에 힘을 준다. 물론 맞는 말이다. 1917년생 버키 반즈를 잘 알던 사람은 죄다 죽었다. 유일하게 남은 사람은 스티브라고 할 수 있겠지. 둘은 형제보다 가까운 사이로 자랐다. 스티브가 조금 늦긴 했지만 군대도 같이 활동할 수 있었고, 죽음의 문턱도 같이 뛰어들면 무섭지 않았다.
이런 생각과 그리움에 알파의 소유욕이 끼어들면 좀 복잡해진다. 스티브는 알파였고, 버키 반즈는 나이가 꽤 먹어서 군대에 갈 때까지 딱히 몸에 특이 사항을 보이지 않았다. 가끔 그런 사람이 있다. 몸 안에 발현될 유전자가 있지만 성장이 느리거나 아예 죽을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하는 종류 말이다. 버키 반즈는 그런 사람들로 치면 행운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굳이 오메가니 센티넬이니. 이런 복잡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살기엔 전쟁터는 너무 위험했다.
“예, 물론 잘 아시겠죠. 1900년대의 버키 반즈요.”
“…….”
하지만 럼로우의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결과가 어떻든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점차 여유가 생긴다. 반대로 캡틴은 점점 초조해진다. 이런 식으로 구석에 몰려본 기억이 없었다. 차라리 어려운 작전을 수행하는 곳에서 결정해야 한다면 이것보단 쉬웠을 것 같았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
“캡틴이 아는 건 1900년대의 버키 반즈 아닌가요?”
“…그건.”
“에셋이 어디서 무슨 일을 했는지 알고 있습니까?”
“…….”
“아, 이건 알겠네. 문서를 읽어 봤을 테니.”
“…….”
“하지만 그 이후론 모르잖아요, 안 그럽니까?”
“…….”
“그 녀석이 어디서 뭘 먹고, 뭘 했는지. 누구와 같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직도 저 녀석은 캡틴의 친구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버키는…내 친구야.”
“제가 뭐라고 했나요. 이제 저 녀석은 더는 캡틴이 찾는 버키가 아니라는 소리죠.”
“…….”
“잘도 자네. 이쯤이면 늘 깨어나곤 했는데.”
럼로우는 말을 돌린다. 침대 위엔 여전히 버키, 혹은 에셋이 누워있다. 축 늘어진 몸을 어떻게든 주워 담아 침대 위에 올려놨는데, 꼭 전원이 꺼진 인형 같아서 조심스러웠다. 가만히 감겨 있는 눈은 눈썹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숨을 쉬는 건지 아닌지. 스티브는 잠시 눈을 돌린다. 그리곤 천천히 걸어다 버키의 볼에 손을 댄다. 그리고 코 밑으로 손가락을 옮겨본다. 가늘게 흐르는 숨결이 느껴지자 조금 안심한 표정으로 손을 뗀다.
굳이 이런 식으로 누군가 앞에서 행동하는 것은 알파로서 제 짝을 지키려는 행동이었다. 아마 그걸 보고 느끼라는 사람은 럼로우일텐데, 막상 그 남자는 별로 개의치 않은 표정이었다. 그런 표정이 스티브의 짜증에 불을 당기고 있었다. 하긴 지금도 알파 기운을 활활 뿜으면서 럼로우를 위협하고 있지만, 정작 그 화를 받는 사람은 느끼지도 못한다.
“캡틴. 어차피 화내봤자 나한텐 안 통해요.”
“…….”
“내가 모를 거로 생각했습니까? 나도 말단이긴 하지만 그래도 작은 다리 하나 정도는 해먹을 위치라니까.”
“…….”
“캡틴이 무슨 형질인지. 그렇게 아끼던 친구가 또 어떤지. 하이드라는 뭐든지 다 알고 있었거든요.”
“…….”
“그래서, 이렇게 화를 내면 말이죠.”
“뭐?”
아. 짧은 쇳소리가 들린다. 방금까지 죽은 듯 누워있던 녀석이 움직인다. 갑자기 숨을 크게 들이쉬면서 몸이 뻣뻣하게 굳어간다. 숨을 들이쉬는 소리에 피 냄새가 섞여 들어간다.
“저 녀석이 놀라잖아요.”
“버키!”
“그러니까. 나한테 화풀이해봤자 라니까.”
“버키!”
캡틴이 금방 기운을 거둔다. 럼로우는 알파의 기운을 느끼진 못하지만, 분위기는 알아챌 수 있었다. 하긴 저 멍청한 에셋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알파 노릇을 했던 적도 있었다. 저 녀석은 그때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늘 강제로 흐물흐물해지는 것만 보다 보니 오히려 낯설었다. 럼로우가 약간 딴생각을 하는 새에 스티브는 냉큼 버키 옆으로 다가간다. 얼굴이 살짝 달아오른 채 숨만 색색 내쉰다. 여전히 감겨있는 눈 밑에서 축축한 눈물이 배어 나온다. 생리 현상일 뿐이겠지만, 그런 모습조차 스티브는 가슴이 아팠다.
“버키. 미안해.”
“미안한 일은 하지 말아야죠.”
“…….”
“내가 그랬잖아요. 지금 예민하다고.”
“…….”
“또 저렇게 들쑤셔 놨으니 한참 힘들겠네. 내가 그거 잠재우려고 얼마나 신경을 썼는데.”
“…네 녀석이 어떻게 알아.”
“왜 모른다 생각합니까.”
“…….”
“하이드라는 모든 걸 다 알고 모든 곳에 있으니까요. 필요한 일이라면 뭐든 해야 하죠.”
“…….”
“저런 백치의 뇌를 속이는 건 아주 쉬운 일입니다. 안 그래요?”
“…….”
“그러길래. 내가 괜히 도발하지 말라고 했지 않습니까.”
대놓고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대신 빙빙 돌려 말을 한다. 확실하지 않은 정보는 사람의 뇌에 들어가면 안 좋은 방향으로 확장되지 쉽다. 남자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걸 이용할 줄 알았다. 오히려 대쪽 같은 캡틴은 그런 것에 약했다.
“그 녀석한테 당신 친구라는 사실이 남아있는 건…뭐 얼굴뿐 아니겠습니까.”
“…….”
“주워다 살려놓은 사람으로 말하는데, 예전처럼 생각하고 대하면 서로 힘들어진다는 것만 알고 계시죠.”
“그게…무슨.”
“우리 예쁜이가 생각보다 착하더군요.”
“…….”
“남이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있으면 억지로라도 맞추려고 해요.”
“…….”
“그게 내가 됐던, 캡틴이 됐던 말이죠.”
스티브는 더는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럼로우는 그저 웃기만 했다. 당장 저 녀석은 다른 곳으로 보내고 싶었지만,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버키가 발작을 하는 통에 그럴 수 없었다. 간신히 호흡이 진정된 녀석은 다시 조용해진 채 움직이지 않았다.
“버키.”
“…스티브.”
“응.”
“스티브…난…널 아는데.”
“…….”
“다리 위에…럼로우…어딨어.”
“…….”
“럼…….”
입속에 웅얼웅얼 뭔가 맴돌다 사라진다. 불쌍한 뇌엔 수많은 정보가 뒤섞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나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한 번에 섞여서 입술로 흘러나왔다. 에셋이 저렇다는 걸 럼로우는 잘 알고 있었지만, 스티브는 처음이었다. 늘 이런 식이었다.
“버키.”
“…응.”
살살 볼을 쓰다듬어 준다. 그러다 다시 한 번 숨을 쉬는 것을 확인하고, 손을 잡아준다. 약간 차가운 손이 차지게 달라붙었다. 형형하던 기운이 사그라지면 부드러운 향기가 흘러나온다. 물론 다른 알파를 경계하는 것은 잊지 않았지만, 버키 앞에선 누구보다 다정했다.
“다시 만나서 다행이야.”
“…….”
방 안엔 셋이 있는데, 둘은 말을 하지 않았다. 스티브가 침대에 앉은 채 고개를 숙였다. 겨울 냄새가 나는 입술에 천천히 입술을 겹치면 찬 기운이 스며든다. 단단하게 감은 눈은 약간 움찔할 뿐 여전히 뜨질 않았다. 조금씩 깊고 질척하게 입술을 탐하던 캡틴이 눈을 감는다. 침대는 두 사람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삐걱삐걱 소리가 난다.
‘아주 난리가 났군.’
럼로우는 애써 그쪽을 쳐다보지 않는다. 캡틴 로저스가 자신에게 보라고 하는 쇼에 불과했다. 이런 걸 보면 알파도 못할 짓이야. 화상으로 얼굴을 잃은 남자는 내내 혀를 찼다. 저렇게 친구와 연인 사이에 줄을 타면서도 입 밖으로 내질 못한다. 물론 진중한 성격도 한몫하지만, 그로 인해 자꾸 자제심을 잃어가는 것이 눈에 보인다. 럼로우는 처음으로 자신이 알파와 오메가의 사이클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을 고마워했다. 캡틴이 저렇게 방방 뛸수록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다시 봐도 참 웃기는 사람이야.’
저래도 자신에겐 아무런 해가 없다. 아니 애초에 느낄 수도 없었다. 하이드라의 명령으로 알파를 가장한 채 몇 번 에셋과 만났던 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도 아무런 향을 느낄 수 없었다. 온몸에 진득할 정도로 향수를 뿌려대는데 럼로우의 코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우위를 점하려고 하는 동안에도 불쌍한 전쟁 포로는 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여러 검사를 받으면서 조금씩 몸 상태에 대한 기록이 나오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복잡한 상황에 캡틴의 미간엔 주름이 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