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그랬던 것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는 녀석은 조용히 그늘을 옮겨 다녔다. 하지만 작은 방엔 그다지 그늘이 많지 않았다. 얼마 되지 않는 집세를 내는 곳은 해가 뜨면 너무 밝고, 밤이 오면 지나치게 어두웠다. 그런 곳에 혼자 누워있는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혼자인 삶은 점점 익숙해졌지만, 그렇다고 외롭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도 때때로 뱃속 깊은 곳에서 불길이 솟아올랐다. 이 감정이 무엇인지는 설명할 수 없지만, 그럴 때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파졌다.
“…….”
가늘게 한숨을 쉰 녀석은 다 망가진 매트리스 위에 누웠다. 손끝으로 담요를 끌어당기면 이제 익숙한 냄새 대신 겨울이 묻어나왔다. 이제 인간에 가까워진 개는 그런 상황을 몹시 아쉬워했다. 개가 주인이 떠나간 것을 인정하기 어려운 것처럼, 남자도 늘 그런 생각을 하고 살았다. 무슨 말을 해도 이미 떠나간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진짜 나쁜 놈이야.”
툭 흘러나온 진심엔 닳아빠진 애정이 슬쩍 묻어있었다. 이 감정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가까이 있으면 귀찮고 짜증 나는 바람에 늘상 싸우고 만다. 물론 허허 웃으면서 한발 물러서 주는 쪽은 럼로우였다. 예전엔 이러지 않았다면서, 남자는 늘 자신이 주워온 백치한테 약했다. 세상 모든 걸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할 수 있는 만큼만 잘해주곤 했다.
‘내 집에서 시체 치우기 싫으니까 좀 먹어.’
‘…….’
‘야!’
‘…….’
눈을 감으면 럼로우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린다. 이젠 환청이란 건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뿌리칠 생각도 없었다. 그렇게 죽은 듯 눈을 감고 있으면 점점 목소리가 가까워진다. 귓가에 입술이 스치는 기분이 들면 눈이 절로 번쩍 뜨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꾹꾹 참으면서 자는 척을 했다.
‘뭐하는 거야.’
‘…….’
‘또 시위하냐?’
‘…….’
목소리만 들리는 남자는 백치의 귓가에서 껄껄 웃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불퉁한 목소리로 녀석을 타박하곤 했다. 그런 남자 앞에서 백치는 다시 과거를 감았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금방 사라지는 목소리라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야, 사람이 왔는데 모르는 척하기냐?”
“…….”
“어쭈. 이것 봐라.”
“…….”
“내가 먹이고 입혀서 키워놨더니 이제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이거지?”
“…….”
“나 없어도 살만한가 보네.”
“…….”
“그럼 난 이만 간다.”
“잠깐만!”
그 순간 백치가 벌떡 일어난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자신을 안아줄 것처럼 굴던 남자는 흔적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이곳으로 돌아온 적이 없었다. 허망하게 뻗은 팔이 천천히 내려온다. 고장 난 인형처럼 고개가 푹 꺾여버린다.
“너무해. 진짜.”
사실 환청이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 번쯤 얼굴이 보고 싶어서 꼭 이렇게 눈을 뜨고 만다. 매트리스에 걸터앉은 녀석은 움직이지도 않았다. 다시 한 번 목소리가 들리길 기도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차라리 그때 한번 잡아보기라도 할걸. 정작 다시 돌아가도 그렇게 못 할 텐데, 백치는 내내 후회를 한다. 왜 그랬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
한숨을 푹 쉰다. 항상 지나간 길을 따라 걷는다. 언제나 남자의 옷자락을 잡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았다. 남자는 항상 금방 떠날 것처럼 굴었고, 그렇게 열심히 수발을 들던 녀석에게 홀로서기를 강요했다.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신문을 아무리 읽어도 럼로우 이름 하나 나오지 않는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점점 마음이 복잡해진다. 그러다 보니 어쩐지 돈을 맘대로 쓰는 것 같아 어느 순간부터 신문도 사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면 알고 있는 경험이 흐려질 것 같았다. 언젠간 럼로우를 잊지 않을까. 그런 두려움이 밀려오면 백치는 늘 공책을 폈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알고 싶어도 알 방도가 없었다. 무기를 잔뜩 챙겨서 나갔으니 이 집에 남아있는 것은 없었다. 럼로우가 무기를 숨겨둔 곳을 열어봤다. 혹시 거기에 뭔가 있지 않을까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창고 문을 닫은 백치는 좀 더 시들었다. 남아있는 흔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없던 사람처럼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남자는 늘 창문 옆에서 웃고 있었다. 이젠 내가 미쳤나 봐. 백치는 머리를 쥐어뜯는다. 아무리 고통스러워해도 남들은 알지 못한다. 혼자 삭히고 또 삭히면 언젠간 아무렇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봐도 지금은 아닌 것 같았다.
**
“뭐하냐?”
“…….”
“내가 자리 좀 비웠다고, 집이 이렇게 개판이 되지.”
“…….”
“뭐야. 이젠 아는 척도 안 한다고?”
“…….”
또 똑같은 일상이 되풀이된다. 백치는 눈을 꾹 감은 채 럼로우의 목소리만 듣는다. 이렇게 듣기만 해도 가슴이 뛰는데, 왜 떠날 때까지 몰랐을까. 그동안 흘려보낸 나날이 너무 아까웠다. 또 움직이면 사라질 것이 뻔했다. 그런 백치의 뒤통수에 익숙한 손이 닿는다.
“백치야. 죽었어?”
“…….”
“왜 안 일어나.”
“…….”
“다시 갈까?”
“…….”
“아저씨 섭섭하네. 그래도 너 보겠다고 천릿길을 달려왔는데.”
“…….”
“나쁜 새끼.”
“그…….”
결국 또 입을 연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몸은 먼저 반응하고 말았다. 도대체 어디 갔었는지. 뭘 하고 살았는지. 나는 보고 싶지 않았는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그 순간 익숙한 손끝이 느껴졌다. 쪼글쪼글 살이 오그라든 투박한 손바닥이 백치의 볼을 쓸어준다.
“안 죽었네?”
“…….”
“이렇게 모르는 척하면 내가 슬픈데.”
“또…갈 거잖아.”
“내가?”
“…….”
럼로우는 백치의 말에 냉큼 대답을 붙인다. 그 순간 감겨있는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꿈이라고 믿고 싶지만, 꿈이 아니었으면 했다. 천천히 손끝을 움직인다. 그러자 익숙한 손길이 깍지를 낀다.
“시간 지나면 돌아온다고 했는데.”
“…….”
“이젠 나 필요 없어?”
“아…니.”
목소리가 떨린다. 꿈은 확실한데, 이렇게 대답을 해주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구구. 눈물샘이 고장 났나 보네. 손가락이 눈 밑에 닿는다. 축축한 속눈썹이 남자의 손가락이 옮아붙었다.
“진짜 돌아온 거야?”
“그럼 내가 귀신이냐?”
“…….”
“눈 뜨고 봐. 내가 진짠지. 아닌지.”
“…도망갈 거 같아.”
“그건 네 녀석이 잘하는 거고.”
“…….”
“몇 번이나 이러다가 사라진 거 다 알고 있어.”
“그럴 수도 있지.”
“…….”
“그래서 나 안 보고 싶었고?”
“보고 싶었어.”
눈물이 가득 찬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움직인다. 짙고 어둡게 내려앉은 밤이 눈을 가린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흐릿한 형체를 볼 수 있었다. 좀 더 다친 것 같은데. 백치는 벌컥 남자를 걱정했다. 어느새 한걸음 떨어져 있는 남자는 백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둠에 숨어있는 남자는 온몸이 말이 아니었다. 제대로 상처 치료는 하고 다니는 건지. 백치가 다치면 멍청한 녀석이라고 소리 지르면서 붕대를 싸매준다. 그런 주제에 자기 몸은 늘 한번 쓰고 버릴 것처럼 굴었다.
“꼴이 왜 그 모양이야.”
“일이 좀 있었어.”
“무슨 일.”
“용병 일이라는 게 늘 그렇지.”
“…….”
“잘살고 있으니 됐다.”
“얼굴 볼래.”
“봐도 별거 없는걸.”
“…….”
백치는 눈을 찌푸린 채 럼로우를 찾았다. 코끝에 익숙한 화약 냄새가 났다. 남자는 항상 화약 속에서 살았다.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나 보고 싶었어?”
“…응.”
“저번에 나갈 땐 돌아보지도 않았잖아.”
“…그건.”
뭐라고 대꾸를 하려다가 입을 다물어버린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어떻게 말해야 가슴 속에서 일렁이는 감정을 설명할 수 있을까. 말주변이 없는 녀석은 늘 이런 식의 대화가 힘들었다.
“너 보고 싶어서 왔어.”
“…또 어디 가?”
“일하러 가야지.”
“…….”
“많이 걸릴 거야.”
“…….”
“이젠 익숙하잖아. 먹을 것도 좀 먹고 면도도 하고 다녀라. 꼴이 그게 뭐냐.”
“너보단 나아.”
불퉁한 목소리가 들린다. 남자는 자기는 엉망이 된 채로 백치 걱정을 한다. 그런 보살핌은 나쁘지 않았지만, 지금 듣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늘 럼로우를 잡고 있어도 이상하게 가깝지 않았다. 이 상황도 꼭 그랬다. 움직이고 싶어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알려주고 싶은 것이 있어서 왔어,”
“또 뭐가.”
“혹시나 너랑 내 이름을 부르면서 널 찾아오는 녀석이 있으면…….”
“…….”
“모른 척해.”
“…….”
“그래야 네가 살기 편하니까. 알았어?”
“…….”
“백치야.”
“…….”
“이제 오랫동안 또 못 만날 텐데 대답해야지.”
“…….”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또 멀리 사라질 것 같아 대화를 끝맺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다시 눈을 떴을 땐 이미 아침 해가 신문지 붙인 창문에 스며들고 있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잔뜩 부은 눈이 뻑뻑하게 아팠다. 구불구불 일어나 앉은 남자는 좁은 방을 돌아본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