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번 사람 좋게 부르던 목소리가 금방 거칠어진다. 럼로우는 이런 쪽으론 영 재주가 없는 남자였다. 사근사근하게 대해주고 싶어도 영 성미에 맞지 않으니 할 수 없었다. 당장 이곳을 떠나야 하는데, 이 백치는 또 입술만 쭉 내밀고 엉덩이를 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럴 땐 다그쳐도 소용이 없다. 하이드라 시절부터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남자는 한숨만 푹푹 쉬면서 그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뭐야.”
“…….”
“지금 피한 거냐?”
“…….”
“어쭈 눈깔 봐라.”
“…….”
말을 하지 않으니 짐승을 키우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아니 짐승은 먹이 주는 사람을 따르기라도 하지. 이 새끼는 밥은 밥대로 축내면서 일말의 호감도 보여주지 않는다. 슬슬 멍청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짜증이 났다. 차라리 하이드라에 있을 때가 나았던 것 같았다.
‘그땐 그냥 죽기 전까지 패기라도 했지. 지금은.’
영 찝찝하단 말이야. 쩝. 럽로우는 마른 입맛을 다셨다. 사실 하이드라에 있을 때 이 녀석을 만난 것은 몇 번 되지 않았다. 게다가 비밀스러운 병기였기에 윈터솔져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았다. 어떻게 알았더라. 럼로우는 옆으로 비켜선 시커먼 덩어리를 힐끗 바라보았다.
“…뭘 봐.”
“어쭈?”
“나한테 뭘 원하는 거야.”
“내가 원하는 걸 줄 순 있고?”
“…….”
“백치야. 그런 말 함부로 하면 안 되는 거야. 너 그러다 큰일 난다.”
“…….”
“그리고 밥 먹여주고 키워주는 사람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냐.”
“…….”
“앞뒤 없는 새끼.”
럼로우는 슬쩍 손끝으로 턱이라도 만져볼까 했다. 하지만 찰싹 소리와 함께 손이 휙 꺾였다. 어쭈. 럼로우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꼴에 자신을 배려한답시고 메탈 암으로 치진 않았다. 명백하게 자신이 더 강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멍청하기만 한 얼굴이 짜증이 났다.
“야.”
“…….”
“평생 그늘에서밖에 못하는 새끼가 지금 누굴 동정하는 거야.”
“…….”
“내가 지금 꼴이 이 모양이긴 해도 너보단 나아. 알았어?”
“…….”
“주워왔더니, 어디서 건방지게.”
“…….”
가늘게 자신을 쳐다보는 겨울 색 눈동자가 꼴 보기 싫어 견딜 수 없었다. 어차피 인간을 공격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던 남자는 그대로 손을 뻗어 백치의 머리카락을 휘어잡았다. 우두둑. 머리카락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한번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끌려온 녀석은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
“백치는 백치답게 굴어.”
“…….”
“백치가 사람을 동정하려고 들면 쓰나.”
“…….”
“내가 그런 것까지 하나하나 가르쳐야겠어?”
“…….”
“재미없는 놈.”
머리카락을 놔주자 그대로 몸이 푹 쓰러진다. 우연인지. 아니면 노린 건지. 그대로 럼로우의 무릎으로 쓰러진 녀석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축 늘어졌다. 물론 속으로 놀란 것은 럼로우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걷어찬다거나 밀어내진 않았다. 지금 당장 조금 험한 말을 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 녀석을 영영 놓아줄 생각은 없었다. 싫다고 도망치진 하지만, 완전히 떨어지진 않는다. 이 녀석은 늘 그랬다. 사람을 무서워하면서도 그 온기가 없으면 죽을 것 같이 굴곤 한다.
“백치야.”
“…….”
“그러니까 왜 심술을 부려서 아저씨가 험한 말을 하게 만들고 그래.”
“…….”
“화났어?”
무릎에 얹힌 고개가 슬쩍 움직인다.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럼로우는 그 뒤통수를 보며 웃었다. 귀여운 새끼. 타고난 것이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식으로 행동할 뇌조차 남아있지 않은 녀석이 이런 식으로 사람을 밀고 당길 수 없었다.
“백치. 화 안 난거지?”
“…….”
“그렇다고 믿을게?”
“…….”
“그냥 우리 둘이서 그늘에 스며들어 살면 된다니까. 왜 자꾸 아저씨를 힘들게 해.”
“…….”
“그렇게 해가 그리워?”
또 고개가 움직인다. 이 녀석은 빛과 해가 뭔지도 모르는 세상에서 수십 년간 살았으면서,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 어차피 태양을 보면 그대로 녹아버릴 주제에 자꾸 그곳으로 가고 싶어 했다. 럼로우도 윈터솔져도 양지를 걸어 다닐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거기 가면 안 돼.”
“…….”
“우리 백치는 아직 많이 아파서, 잘못하면 또 끌려갈 수 있어.”
“그건 싫어.”
“그렇지. 나도 그렇단다.”
“…….”
“아픈 거 싫으면 그냥 내 말만 들어.”
“…….”
“여기도 빨리 떠나자. 여기 뭐 좋을 게 있다고 이렇게 버티고 서있어.”
“나도 몰라.”
“정말?”
“응.”
목소리가 늘어지는 걸 보면 또 대화하기 벅찬 것이 분명했다. 아직 윈터솔져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녀석은 때때로 무기처럼 행동하곤 했다. 그러다 갑자기 반짝 정신이 들고, 그러다 다시 멍청한 표정으로 내내 움직이지 않았다.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네.’
럼로우는 솔직한 감상을 툭툭 내뱉었다. 백치는 여전히 무릎을 강탈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안 그래도 덩치가 산만한 녀석이 무거운 메탈 암까지 달고 있으니 꼭 무릎에 바위산을 올려놓은 것 같았다. 다리 좀 저리면 어떤가. 이 새끼가 이렇게 다가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니 조금 더 참아보기로 했다.
❢
럼로우가 에셋을 처음 만난 건 그늘 아래 서 있을 때였다. 누군가 머리부터 물을 끼얹은 것처럼 잔뜩 젖은 남자가 두 팔을 잡힌 채 질질 끌려나갔다. 사실 처음엔 그리 눈길이 가지 않았다. 하이드라의 끄나풀로 활동하면서 어느 정도 보고도 못 본척하는 것이 살아남는 데 편하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적당히 묻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운명은 그렇게 쉽게 남자를 놔주지 않았다.
“이건…뭡니까.”
“오늘부터 자네가 쓸 무기지.”
“…….”
“이렇게 빨리 이 녀석을 다룰 수 있게 된 건 이례적인 일이니 마음껏 뿌듯해해도 되네.”
‘놀고 있네.’
럼로우는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하지만 표정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좋아하라면 좋아하고. 까라면 까면 된다. 그러면 적어도 목숨을 부지할 순 있었다. 그러면서 힐끗 무기를 바라보았다. 완전히 뒤집힌 눈에 주체하지 못하고 벌벌 떨리는 몸을 보아하니 자신이 오기 전에 무슨 큰일이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악취미군. 이것보다 더 잔인한 장면을 많이 봤었는데, 어쩐지 속이 메스꺼웠다. 그런 럼로우의 시선을 눈치챈 총장은 별거 아니란 투로 입을 열었다.
“아, 그건 자네가 쓰기 편하라고 다시 부팅시켜놓은 것이니 별 상관 하지 않아도 되네.”
“부팅이라.”
“그렇지. 무기는 가끔 손질하고 기름을 쳐줘야 예민하게 돌아가지 않나. 자네도 항상 총기를 손질하는 것을 알고 있네.”
“그렇습니다.”
“저것도 똑같아.”
“알겠습니다.”
남자는 더 캐묻지 않았다. 이 이상 궁금해하면 목 끝에 칼이 닿는다. 알 필요도 알고 싶어 해서도 안 된다. 남자는 그늘 안 세계에 대해 제법 빠삭했다. 피어스 총장이 웃으면서 자리를 비켜줬다. 문이 닫혔다. 럼로우는 그제야 슬쩍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보았다. 문은 닫혀있지만, 사방에 눈이 있었다. 어떻게 행동하려는지 지켜보려는 것이 분명했다.
“미치겠군.”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 있나. 좀 더 편하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당장 이런 큰일을 해야 한다. 럼로우는 쉽게 움직이지 않고 내내 무기를 바라보았다. 전기에 튀기기라도 했나. 왜 저렇게 펄떡거려. 천천히 아래위로 훑어보면서 마음껏 감상을 쏟아냈다.
“…….”
“뭐야.”
“…….”
“아, 정신이 들었군.”
“…….”
“솔져?”
“…….”
잔뜩 날 선 눈이 럼로우를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굳게 다문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꼭 맹수 같은 모습이라 럼로우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자신이 물러서면 달려들어 그대로 목을 물어뜯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버티고 서서 노려보았다.
“솔져. 대답해.”
“…….”
“솔져!”
“…….”
몇 번이나 다그쳤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
“그랬었지.”
“…뭐가?”
“넌 몰라도 되는 이야기.”
“…….”
“백치야.”
“…….”
“태양을 너무 동경하지 마. 넌 그곳에 가면 곱게 죽지도 못해.”
“…….”
“넌 그늘에서 살아야 해. 그늘과 그늘을 옮겨 다니면서 이 세상에 없는 것처럼 지내야 한다고.”
“…….”
“물론 나도 그렇지만.”
“…….”
어쩐지 무릎이 축축했다. 바보 같은 녀석이 또 생리 현상을 주체하지 못하고 질질 짜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뭐라 하지 않았다. 정신이 없는 녀석이 이렇게라도 감정 표현을 하는 게 다행이라 생각했다.
“정 해가 보고 싶으면.”
“…….”
“여길 떠나자.”
“…….”
“꼭 여기서 태양을 바라볼 필요는 없잖아.”
“왜…….”
“거기 가서 알려줄게.”
백치는 또 말이 없었다. 상한 녀석을 구슬리던 럼로우는 더듬더듬 한쪽 손으로 담배를 찾았다. 담배에 불을 붙이자 칼칼한 냄새가 코를 파고들었다. 무릎은 이제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다음 주엔 떠나야지. 남자는 담배를 쭉 빨아들이면서 몇 번이나 수정한 계획은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
+)
오랜만에 업로드를 하는 것 같아요
샘플 올린다음 원고 하느라 업로드가 멸종해버려서 어쩐지 민망하네요ㅜㅜ
지금까진 계속 루마니아에서 지지고 볶는 이야기였는데, 이번엔 그곳에 가기 전 둘이 보고싶었습니다
중간에 생략된 곳에 이어질 내용은 아마 버키가 재부팅 당하고 그걸 본 럼로우가 좀 충격을 받지 않았을까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