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가 위키드 연구소에서 기억하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애초에 연구소에 놀러 온 것이 아니었기에, 많은 활동을 하지 않았다. 연구원들은 기본적으로 토마스에게 상냥하게 대해주었지만, 어린 아이는 그것보다 좀 더 많은 관심을 원하곤 했다. 항상 친구가 아쉬워하는 아이를 토닥거리며 달래주긴 해도, 그 이상 해줄 방법이 없었다. 물론 토마스도 그런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연구에 필요해서 데려온 아이들이라지만 하나하나 신경을 써줄 순 없었다.
‘…그래도 심심한 데.’
또래 하나 없이 어른들만 가득한 공간은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날수록 점점 재미가 없어졌다. 하루 세끼 밥을 먹고 위에서 시키는 대로 연구를 진행했다. 한 치도 어김없이 이뤄지는 생활에 지친 토마스는 점점 입이 짧아졌다. 하긴 연구소 밥이 그리 맛이 있는 편도 아니었다. 물론 영양 면으로 보면 하나도 빠지지 않는 식단이었다. 몇 달씩이나 군 말없이 밥을 먹었지만,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아홉 살도 안 된 아이의 입장으론 꽤 많이 참았다.
“이거 맛없는데.”
“그래도 먹어야지.”
“맛없어요. 자꾸 고무 씹는 거 같고.”
“토마스.”
“…….”
흔한 밥투정 한 번안하던 아이가 칭얼거리기 시작하니, 어른들도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결국, 밥을 반도 넘게 남긴 토마스가 시무룩한 얼굴로 식판을 들고 일어났다. 조금 더 먹으라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식판을 반납한 후 터덜터덜 방으로 돌아갔다. 그런 상태를 하나하나 보고받은 에바 페이지는 몇 가지 처방을 내렸다. 토마스는 플레어 치료제를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존재였고, 벌써 몸이 망가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른들 손에 이끌려 억지로 걸어온 아이는 여전히 시무룩했다. 그런 아이의 푸석한 눈을 바라보던 연구원이 주위를 둘러보다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무엇인가를 꺼내 손에 들려주었다. 손바닥에 한 움큼 잡히는 바삭하고 매끄러운 질감에 토마스가 눈을 크게 떴다.
“선물.”
“…….”
“숨겨 놨다가 하루에 하나씩만 먹어야 해?”
“…….”
“괜찮아. 주머니에 넣고 가렴.”
“…감사합니다.”
여전히 어정쩡하게 사탕을 든 채 자기를 바라보며 눈치를 보는 아이가 안쓰러웠는지, 직접 가운 주머니에 사탕을 넣어주었다. 토마스는 조금 생기가 돌아왔고, 걱정이 가득하던 연구실은 좀 더 안심할 수 있었다.
* * *
며칠이나 지났을까. 연구소 안이 제법 소란스러웠다.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토마스는 여전히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이 웅성거림의 원인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하나같이 바쁜 사람들은 아이의 질문에 답을 해줄 시간도 없는 것 같았다. 간신히 연구소 문 근처까지 간 토마스의 눈에 반짝거림이 한가득 피어났다.
“…우와.”
토마스의 눈에 들어온 건 자기 또래의 아이들이었다. 막 연구소에 들어왔는지,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가득 찬 눈이 계속 움직이면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토마스는 어른들의 다리에 매달려서 내내 친구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친구라는 관계를 거의 경험하지 못한 아이에겐 과할 정도의 자극이었다. 그중에 까칠하게 마른 것 같으면서도 다부져 보이는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
부스스한 더티 블로드가 눈썹보다 좀 더 길게 내려왔다. 조약돌처럼 반질반질하고 까맣게 빛나는 눈동자가 머리카락에 살짝 가려져 그늘이 졌다. 토마스는 당장 뛰어가서 손을 잡고 이름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아이들이 우르르 지나가고 나자 안 그래도 커다랗던 공간은 훨씬 더 넓어 보이기만 했다. 토마스는 내내 그 녀석을 찾았지만, 우연인지 아닌지. 좀처럼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시무룩해졌다가도, 새로 들어온 아이들 소식을 들으면 얼굴이 활짝 펴졌다. 어른보단 역시 또래가 좋은 나이였다. 새로 들어온 아이들은 적응할 시간을 줘야 한다는 빌미로 아직 연구원들과 공식적인 인사를 하지 않았다. 게다가 몇 층 몇 번 방에서 살고 있는지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그 동안 토마스의 상상은 점점 부풀어만 갔다. 요즘 들어 투정이 줄었다면서 너스레는 떠는 연구원들도 한시름을 놓은 것이 분명했다.
“빨리 만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직 애들이 준비가 안됐다고 하던걸.”
“…섭섭해요. 언제쯤 인사를 할까요?”
“며칠만 참으면 되지 않을까? 대신 토마스가 조금 먼저 들어왔으니, 밥투정한다거나 떼를 쓴다거나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당연하죠!”
“역시 착하구나.”
갑자기 어른스럽게 행동하려는 것이 내내 귀여운지 연구원들은 토마스에게 모른 척 사과를 주기도 했다. 토마스는 친구들을 만날 때까지 받은 간식을 모아두고 싶어 했지만, 사과는 오래 저장할 수가 없었다.
* * *
뉴트는 이 주일이 더 지나고서야 간신히 만날 수 있었다. 물론 토마스가 냉큼 손을 붙잡았을 때, 까만 눈이 확 커지며 그 손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굳이 손을 매정하게 빼내진 않았다. 조금씩 친해지기엔 연구소 환경은 너무 척박했다. 한순간 깊게 서로의 생활 속으로 들어온 둘은 곧잘 서로를 보며 웃곤 했다. 어른들만 가득한 공간에 간신히 자리 잡은 아이들만의 시간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물론 둘이 하는 길이 조금 다르긴 했다. 먼저 들어온 토마스가 상대적으로 높은 등급의 연구에 소속되어있던 터라 만날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었다.
“뛰지 마. 넘어져.”
“하지만…걸어오면…시간이 아까운걸.”
“정말…바보구나.”
“나…바보…아니야. 뉴트…만나려고 온 거라고.”
“알았어.”
새빨간 얼굴로 헉헉대는 토마스를 바라보던 뉴트가 웃으면서 등을 두드려줬다. 한참동안 헉헉거리면서도 뭐가 좋은지 웃는 녀석을 보다 보면 자기도 어쩔 수 없이 입 꼬리가 올라갔다. 쉬는 시간은 턱없이 짧았고, 할 이야기는 많았다.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다가 아쉬운 듯 잡고 있는 손을 놓았다. 마지막까지 잡고 있던 새끼손가락을 놓고 나서도 열 걸음도 가지 못해서 다시 뒤를 돌아봤다.
“밥 먹을 때 봐.”
“응!”
“늦으면 혼나잖아. 어서 가봐.”
“…응.”
“어서. 토마스.”
아쉬운 듯 걷다가 시간을 보고 다다다 뛰는 모습이 한없이 불안해 보였다. 물론 그렇게 휘청거리면서도 좀처럼 넘어지지 않는 것이 신기했지만. 저녁 시간이 될 땐 항상 뉴트가 토마스를 데리러 갔다. 조금 늦게 끝나는 녀석을 기다리며 복도에 서 있으면 여지없이 문이 벌컥 열리면서 반질한 머리가 불쑥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리곤 서로 몇 번이나 눈치를 보다가 슬그머니 손을 잡았다. 서로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상대방의 체온에 살짝 웃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저녁 시간도 더는 지겹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맛이 없어. 늘 똑같은 식단을 보는 아이는 작게 툴툴거리면서 뉴트의 귀에 소근거렸다. 우주식처럼 최대한의 편의성을 추구하는 밥은 아무리 먹어도 익숙해질 수 없었다. 둘이 사이좋게 식사를 끝내고 식판을 들고 일어섰다. 지금부터 취침시간이 되기 전까진 온전히 둘만의 시간이었다. 토마스가 몇 번이나 망설이는 것 같다 뉴트의 손을 잡았다.
“…왜?”
“내 방에 갈래?”
“응?”
“줄 게 있어. 뉴트!”
“그래.”
조그만 아이 둘이 서로 귓가에 소근 대며 복도를 돌아 사라졌다. 저녁을 먹던 연구원들은 괜히 뿌듯한 마음에 이젠 옷자락도 보이지 않는 복도를 내내 쳐다보았다. 아까 봤어요? 봤지. 잠시 둘에 대한 이야기로 소란하던 테이블이 하나 둘 자리를 뜨자 다시 조용해졌다.
* * *
토마스는 뉴트를 침대에 앉혀두고 부산스럽게 책상을 뒤지고 있었다. 뉴트는 그 모습이 재밌는지 팔로 턱을 괸 채 지켜보았다. 두 번째 서랍 가장 깊숙한 곳에서 꺼낸 작은 유리병을 소중하게 쥔 토마스가 냉큼 의자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침대에 올라앉았다. 토마스의 가운이 바사삭 구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자!”
“이게 뭐야?”
“사탕.”
“…….”
“아껴먹으라고 받은 건데, 같이 나눠 먹고 싶어서.”
“…나 사탕 언제 먹어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나도 그랬는걸. 여기서 선물로 받았을 때만 생각나.”
“…….”
“뉴트 손 펴봐.”
뉴트의 손바닥에 노란 레몬 사탕을 떨어뜨려 준 토마스가 또 생글거리며 웃었다. 투명한 비닐을 까서 입에 넣은 뉴트는 입안 가득 퍼지는 레몬의 새콤함에 눈을 크게 떴다. 맛있어. 우물거리느라 볼이 불룩해진 뉴트를 보는 토마스도 마냥 즐거웠다. 자기도 오렌지 사탕을 까서 입에 넣었다. 어느새 이불 위에 포개진 두 손은 서로 꼭 맞잡고 있었다. 손가락을 살짝 움직일 때마다 겹쳐있던 손도 같이 꼬물거렸다.
“뉴트.”
멍하니 뉴트를 바라보던 토마스가 홀린 듯 뉴트의 이름을 불렀다. 까만 눈과 샴페인 색 눈동자가 공중에서 마주쳤다. 그 순간 뉴트의 볼에 따뜻한 것이 닿았다. 눈만 깜박거리던 뉴트가 상황 파악을 했을 땐 이미 토마토만큼 새빨갛게 익은 토마스가 고개를 정 반대편으로 돌리고 모른 척하고 있는 광경만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
어. 손으로 천천히 볼을 쓰다듬던 뉴트의 얼굴도 달아올랐다. 입속에선 여전히 단 맛이 폴폴 올라오는데, 얼굴은 터질 것 같았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손만 만지작거리던 녀석들은 확확 달아오르는 체온을 주체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