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작정 토마스를 불러 세운 뉴트는 한참 말이 없었다. 손에 한가득 자료를 들고 막 발로 문을 열던 토마스가 그대로 멈춰 섰다. 그리고 고개만 돌린 채 뉴트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장난스럽게 물어\봤지만, 뉴트의 표정은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왜?”
“…….”
“불렀으면 말을 해. 나 무거워.”
“혹시 우리가 기억을 모두 잃으면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까?”
“그게 무슨 말이야? 위키드가 이번에 그런 실험을 한다고 했어? 실험체를 쓰는 것이 아니고 우리로?”
“아니…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그런 걱정을 왜 해? 어차피 일어나지 않을 일인데.”
“그런가.”
“뉴트, 오늘따라 피곤해 보여.”
“내가 좀 예민했나 봐.”
뉴트가 그 말을 끝으로 대화를 끊었다. 그리고 소파에 앉았다. 바스락 소리를 내며 구겨지는 하얀 가운이 시트를 따라 흘러내렸다. 한마디 더 하지 않고 그대로 소파 등받이에 고개를 젖힌 채 눈을 감는 것을 보던 토마스가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 간다? 갈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토마스가 몸으로 문을 지탱하고, 두 손으로 든 책을 낑낑거리며 아슬아슬하게 방을 빠져나갔다. 탁. 짧은 소리와 함께 방 안엔 뉴트 밖에 남지 않았다. 익숙한 정적이 흐르자 가늘게 눈을 떴다. 까만 시선이 아무런 무늬가 없는 하얀 천장을 바라보았다.
“정말…그렇다면 우리는 서로 알아볼 수 있을까?”
언제나 같은 쳇바퀴는 도는 하루 중 갑자기 든 의문이었다.
***
위키드 연구소는 새롭게 나타난 면역체를 가진 아이들의 뇌를 연구해서 플레어란 질병의 치료제를 만들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본과 넓은 부지, 그리고 수많은 연구원이 필요했다. 물론 여기에 더 필요한 것이 있었다. 바로 실험을 하기 위한 면역체계 실험 군이었다. 위키드 연구소에 속한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이것이 인륜을 어기는 일이었다. 수많은 아이를 통제하기 위해선 당연하게 폭력이 수반되었다. 모두 그런 일은 보지 않으려 했고, 듣지 않으려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치부하며 묻기 바빴다.
게다가 실험군으로 분류된 아이들만 괴롭힌 것도 아니었다. 소위 엘리트 그룹이라고 분리되어있는 쪽도 어김없이 위키드의 손길이 미쳤다. 토마스. 뉴트. 민호. 그리고 몇몇 아이들. 똑똑하고 치료제의 핵심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따로 걸러내어 데려온 남자 아이들 이었다. 물론 그 중에서 토마스의 레벨이 가장 높았다. 다른 아이들이 보지 못하는 고위 정보까지 열람할 수 있는 녀석은 종종 부러움과 시기의 대상이 되곤 했다.
“뉴트!”
“뭐야.”
“오늘 실험은 끝났어? 같이 갈래?”
“갑자기 왜 이렇게 친한 척이야.”
“뉴트, 보고 싶었어. 응?”
자연스럽게 뉴트의 옆자리를 꿰찬 녀석을 보던 아이들이 낮게 무엇인가 중얼거리며 자리를 비켜줬다. 뉴트는 그런 시선을 똑똑히 알 수 있었지만, 토마스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사실 토마스가 뉴트를 좋아한다는 것은 연구소 내에서 꽤 유명한 이야기였다. 대놓고 좋아한다는 소리만 안 했을 뿐이지 마치 서로 사귀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부담스러워서 밀어내도 다시 돌아오는 녀석을 본 뉴트는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부담스러워.”
“하지만 뉴트 말고는 나랑 안 놀아 주잖아. 할 일 다 끝났으면 같이 밥 먹으러 가자.”
“…….”
사실 다른 아이들이 놀아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토마스가 배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 상위권에 속해있는 뉴트조차 토마스의 지식을 따라가기가 가끔 벅찬데 중하위권에 있는 아이들이랑 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서로 멀어졌고, 토마스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만 내내 바라보았다. 위키드에 속한 연구원으로서 해야 할 일은 잽싸게 끝낸 토마스가 뉴트의 책상 근처에서 얼쩡거릴 때면, 언제나 같은 일이 벌어졌다. 잔뜩 인상을 쓰고 책을 읽고 논문을 해석하고 있던 뉴트가 탁 소리가 날 정도로 책을 덮었다.
그리고 그 소리가 신호라도 되는 듯 토마스가 와락 뉴트를 껴안았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생글거리고 웃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쭉 밀어내면 말랑한 볼이 다시 붙어왔다. 작은 손바닥에 한가득 쥐어지는 얼굴 쓰다듬어 주던 뉴트가 두 손으로 볼을 쫙 늘릴 때면 어김없이 뭉개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뉴으. 아하. 아프라고 하는 거야. 한 번 더 끝까지 당겼다 놓으면 잔뜩 불퉁해진 얼굴이 시선 한가득 들어왔다.
“왜 자꾸 당겨.”
“…싫으면 자꾸 귀찮게 하지 마.”
“…….”
“넌 빨리할 수 있어도, 난 아니란 말이야.”
“내가 도와주면?”
“뭐?”
“내가 도와줄게. 응?”
“…….”
항상 이런 식이었다. 자기가 마음에 드는 것은 언제든 가져야 했다. 뉴트가 가늘게 숨을 쉬면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작은 아이들이 연구원 가운을 입고 돌아다니는 것은 언뜻 보면 귀여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자세히 하나하나 뜯어보면 그것보다 잔인한 일은 없었다. 아이들은 서로 살아남기 위해 뭉치기 시작했다. 어른들은 나이에 맞는 것보다 더 힘든 과제를 내주었고, 계속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하는 아이들은 결국 실험장으로 끌려갔다.
“…….”
“뉴트, 응? 내가 도와줄게.”
“넌 정말.”
“하지만 뉴트가 없으면 정말 친구가 거의 남지 않는걸.”
그날은 최하위권에서 올라오지 못한 아이 둘이 사라진 날이었다. 뭐가 그렇게 두려운 걸까. 토마스는 항상 엘리트 그룹 최상위권을 지키고 있었고, 뉴트는 상위권이었으니 충분히 여유가 있었다. 게다가 토마스의 시선에 들어있지 않던 아이들이 사라졌을 뿐이었다. 뉴트는 토마스가 그 아이들의 이름조차 모를 것이란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누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싫은지 그럴 때마다 집요하게 뉴트를 붙잡고 늘어졌다.
“어디 가지마. 응?”
“…….”
“어디 가지 말고, 여기서 계속 나랑 있자. 혼자되는 건 싫어.”
“연구소에서 우리 둘이 헤어져야 한다고 하면?”
“…….”
“그럴 수 있잖아. 총장님이 그랬어. 혹시 필요한 일이 있다면 우리도 같이 실험을 받아야 한다고.”
“안 잊어버려.”
“그래?”
“저번에도 말했지만 뉴트는 절대 잊지 않을 거야.”
“…….”
가운에 푹 묻힌 목소리를 듣던 뉴트가 가늘게 웃었다. 몇 번이나 약속을 받고 나서야 배시시 웃은 토마스가 책상 옆에 있는 작은 의자에 냉큼 올라앉았다. 토마스를 뺀 다른 아이들이 유난히 개인 면담이 많아진 것 같았지만, 다들 신경 쓰지 않았다. 연구소는 언제나 바빴고, 연구 계획이 쉴 새 없이 수정되는 일이 잦았다. 그래서 당연한 줄 알았다. 서로 바빠서 며칠씩 얼굴도 보지 못했다.
그리고 기억은 그쯤에서 끊겨있었다. 뉴트를 찾던 토마스는 정확히 3일이 지나자 그런 아이를 잊어버린 것처럼 행동했다. 주변에서 보다보다 답답해진 녀석들이 토마스를 벽으로 밀어붙이고 물어보았지만, 처음 듣는 표정으로 오히려 그게 누구냐고 되물었다. 잔뜩 구겨진 옷을 움켜쥐던 토마스는 황망한 얼굴이었다. 한 번도 스쳐 지나가지 않았던 이름이 저 멀리에서 툭 떠올랐다.
“왜…지금까지 잊고 있었을까.”
마치 얇은 막으로 가로막고 있던 것 같았다. 토마스는 뉴트를 기억해 냈다는 사실을 숨겼다.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알고 있으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뉴트를 잊어버리면 어쩌지. 걱정이 날로 쌓여만 갔다. 머릿속에선 점점 또렷한 기억이 살아 올라왔다. 토마스는 작은 종이에 몇 번이나 뉴트의 이름을 썼다. 설사 기억이 사라진다고 해도 몸이 기억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뉴트. 뉴트. 뉴트. 얼마나 반복해서 썼는지 연필이 다 닳아 없어질 것 같았다.
“…….”
둘이 같이 있었을 때 느꼈던 간질간질함은 여전한 데 옆에 뉴트가 없었다.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킬 존 테스트에 선발대로 들어간 것을 확인했다. 항상 깨끗한 옷을 입고 다니던 소년은 이제 없었다. 잔뜩 더러워진 옷을 입고 작은 몸으로 아등바등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고 있었다. 하지만 차마 토마스는 눈길을 줄 수 없었다. 잠시라도 시선이 스치고 지나가면,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릴 것이 분명했다. 토마스는 그날 처음으로 위키드의 무서움을 느꼈다.
***
“토마스?”
“…….”
“토미.”
“…….”
“나 기억해?”
“…뉴트.”
“공터의 부대장인 뉴트말고. 다른 뉴트 기억하냐고 물었어.”
“…….”
“역시 넌 거짓말쟁이야. 내가 그랬잖아. 기억 못 할 거라고.”
가늘고 아프게 웃던 뉴트가 자신의 이마에 총구를 다시 한 번 단단히 고정했다. 토마스가 손을 빼려 했지만, 뉴트의 힘이 더 셌다. 토마스를 깔고 앉는 뉴트는 금방이라도 죽어 넘어질 것처럼 바짝 말라 있었다. 까만 눈은 이미 벌겋게 타서 버석버석한 재가 되어 있었다. 몇 번이나 토마스의 이름을 불렀다. 갑자기 헤어진 이후로 다시 만났을 때, 아는 척을 할 수 없었던 기간을 담아서 아프게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었다.
넌 제물이란다. 어른들의 목소리가 심장에 쿡쿡 박혔다. 치료제를 만들기 위한 제물. 뉴트에게 주어진 또 다른 이름이었다. 물론 뉴트가 연구소 생활을 기억해 낸 것은 플레어에 감염된 것 때문은 아니었다. 다리를 절게 되어서 러너를 그만두었던 그 날 밤 둑이 터진 것처럼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토마스가 꿈을 꾸면서 일어났던 것만큼 뉴트도 같은 꿈을 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