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녀석이 얼마나 귀찮게 하고 옆에서 치댔는지, 잔뜩 지친 민호는 그날 끙끙 앓았다. 더 놔두면 민호가 발목이 낫기도 전에 몸살로 앓아누울 것이란 사실을 확신한 뉴트는 간신히 둘을 손님들이 쓰는 방으로 데려갔다. 물론 얌전히 간 것은 아니었지만, 다친 사람 옆에서 바짝 누워서 잘 수 없다는 말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일어나서 올게. 형.”
“그래. 그래.”
“언제쯤 낫는 거야?”
“그야 나도 모르지.”
“…….”
“그리고 당장 낫는다 해도 한참은 조심해야 해.”
“그런가.”
“당연하지. 이것들아. 이러다 또 다치면 정말 큰일 나는 거야.”
“알았어.”
잘못하면 더 다친다는 소리에 심장이 떨어졌는지, 둘은 얌전히 물러섰다. 방금까지 팔을 잡고 늘어지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잔뜩 긴장한 표정의 둘을 보던 민호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런 말 한마디 했다고 곧이곧대로 믿는 놈들을 어떻게 귀여워하지 않을까.
“그럼 얌전히 둘이 자고 내일 만나자.”
“응.”
“…잠깐. 그런데 말이야.”
“응? 왜?”
“너희 여기 온 거 말을 하고 왔어?”
“…….”
“설마…….”
“잘 자. 형! 내일 봐!”
토마스가 재빠르게 토미의 뒷덜미를 덥석 잡았다. 잠깐 난 아직 인사 안 했어! 조용히 하고 따라와! 토미 귓가에 으르렁거리듯 속삭인 녀석은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바삐 걸음을 옮겼다. 물론 그 정도로 입을 다물 토미가 아니었지만, 그리고 질질 끌고 방을 빠져나갔다. 놔! 토마스! 야! 한참 시끄러운 목소리가 얽히는가 싶더니 점점 멀어졌다.
물론 주변에 있던 어른 중 누구도 둘을 말리지 않았다. 익숙하게 옆에 붙은 선수가 저쪽으로 가라며 둘을 쿡쿡 찔렀다. 고개를 꾸벅 숙인 녀석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다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와글와글 떠들며 민호가 누워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민호. 애들 울겠다. 아주.”
“뭐, 사실이잖아.”
“애들이 네놈이 좋아서 그러는 건데, 도대체 왜? 일부러 그러는 거냐?”
“아니야.”
“아니긴 뭘.”
“실제로 다치면 손해 보는 건 이쪽이잖아. 나도 괜히 아픈 모습 보이기 싫다고.”
“애 아빠 다됐네.”
아니 잠깐. 민호가 잠시 대화를 끊고 낄낄거리며 웃는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이놈들이. 하여튼 조금만 틈을 보이면 놀리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그런 민호의 표정을 본 녀석들이 또 한 번 웃으면서 어깨를 팡팡 쳤다. 아악.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건 그렇고, 저 녀석들 어쩌지.”
“뭘 또? 왜 애 아빠 짓이야.”
“또 말 안 하고 여기로 날아온 거 같은데…괜찮을까?”
“…….”
“아무리 봐도 애들 표정이 거짓말한 거 걸렸을 때랑 똑같단 말이지.”
“잘도 아네.”
뉴트가 한마디 거들었다. 물론 뉴트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민호가 저렇게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재밌으니 맞장구 정도만 같이 쳐주기로 했다.
“그러니까…이야기를 해야 할 거 같은데.”
“생각해보니까 저번에도 그랬었지.”
“그래.”
“…또? 그 녀석들이? 참 어리다고 해야 할지,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그래. 또 저렇게…….”
민호는 한숨을 쉬었다. 안 그래도 저번에 멋대로 일주일 내내 연구소를 비웠다가 뒷목을 잡혀 끌려갔던 녀석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설마설마 했는데, 또 그럴 줄이야. 어쩐지 다리보다 머리가 더 아파져 오는 것 같았다.
그 옆에서 그런 민호를 바라보던 뉴트는 내내 재밌는 눈치였다. 항상 진중하고 말도 없던 녀석이 저 둘만 나타나면 허둥거리는 모습이 볼만했다. 물론 뉴트가 나서서 알려준 것이긴 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선 그게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저번처럼 또 끌려갈 때까지 놔두지그래.”
“뭐? 무슨 소리야.”
“어차피 저 녀석들은 가라고 해도 너한테 붙어서 안 떨어질걸?”
“…….”
“맞지?”
“그러네.”
나름 심각해졌다. 하긴 저번에도 그렇게 안 가도 된다고 그렇게 떼를 쓰다가 끌려간 전적을 생각하면, 이번에도 제대로 된 절차를 밟고 온 것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이 녀석들을 데리고 가십시오 하면서 연구소에 전화하기도 뭐했다.
형! 어떻게 그래요! 둘이 떠드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잔뜩 배신당한 표정으로 바라볼 둘을 생각하니 분명 해야 하는 일이지만,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그러면 그렇지. 쌍둥이한테만 유난히 물렁물렁하게 대하는 민호를 잘 아는 뉴트는 웃기만 했다.
“일단 자고 일어나면 뭐라도 되어 있겠지.”
“…그렇게 간단하게.”
“하지만 지금 끙끙거린다고 해서 뾰족한 방법이 생각나는 것도 아니잖아? 이 시간이면 다들 퇴근하고도 남을 시간이라고,”
“…….”
“일단 좀 자라. 너 그러다 염증 생기면 더 고생한다.”
뉴트가 말을 끝내자마자 사람들을 휘휘 몰아냈다. 간신히 혼자 남게 된 민호는 잔뜩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별다른 수가 없어서 얌전히 잠이나 자기로 했다. 영 잠이 안 오는지 이리저리 뒤척거리던 민호가 겨우 조용해졌다.
***
그리고 민호가 일어나고 나선 예상외의 일이 생겨있었다. 생글거리며 민호 옆에 들러붙은 녀석들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내내 기쁜 빛을 감추지 않았다. 슬슬 불안해지는 민호는 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형 왜 그래.”
“너희 둘 무슨 일이 있었냐?”
“응?”
“왜 갑자기 이렇게 신나.”
“…….”
“나 화 안 낼 테니까. 말해봐.”
“…….”
둘은 또 얌전해졌다. 그리곤 둘이 뭔가 눈빛을 주고받더니, 민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우리 같이 휴가 가요. 형.”
“응?”
“같이 갈 거죠?”
“아니. 잠깐 이게 무슨 소리야.”
“어제 연구소에 통화해서 허락도 받았는데, 어차피 형도 이번 대회 안 나가고, 발목도 치료해야 한다면 서요.”
“그렇긴 하다만…이게 무슨.”
“감독님. 맞죠? 저희랑 형 놀러 가도 괜찮은 거죠?”
언제 왔는지, 감독님이 뒤에서 팔짱을 낀 채 셋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민호는 짧게 탄식을 내뱉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쩐지 이번 휴가가 끝나면 엄청나게 굴러다녀야 한다는 사실은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마냥 좋은 둘을 끌어안은 채 감독을 바라보았지만, 아무런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뉴트는 기왕 가는 거 즐기고 오라며 어깨를 두드렸다.
“좋겠네. 휴가 얼마 만이냐?”
“어디로 갈진 모르겠지만, 올 때 선물이나 사와라.”
“다들…진짜.”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잘 쉬다 오도록 해.”
“감독님…….”
이젠 민호에게 남은 아군이 없었다. 민호는 발을 다쳤고, 저 꼬맹이 녀석들은 면허가 없었다. 도대체 뭘 얼마나 떼를 썼는지 위키드에서 셋을 위해 차를 보내줬다. 민호는 잔뜩 민망한 표정으로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런 민호를 가운데 두고 양 옆자리를 차지한 녀석들은 행복한 표정이었다.
“형 사실 수영은 할 수 있는 거죠?”
“뭐?”
“총장님한테 위키드에 소속된 별장을 빌려달라고 했는데.”
“이 녀석들이…정말 그런 소리를 했다고?”
“왜요? 가끔 다른 누나들도 놀러 가는 곳인데.”
“…….”
어쩐지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아 민호는 그냥 반쯤 체념한 표정으로 얌전히 시트에 등을 기댔다. 여름 휴가를 얼마나 길게 잡았는 진 모르겠지만, 어쩐지 순탄치 않을 것 같은 기분이 자꾸 들었다. 두 녀석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연신 재잘거리며 민호의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민호의 양팔을 하나씩 붙잡은 녀석들은 잔뜩 뚱한 표정으로 버티고 있었다. 민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흔들거리고 있었다. 물론 민호가 힘도 더 좋고 덩치도 컸지만, 매몰차게 둘을 밀어낼 수 없었다. 그런 모습을 보던 뉴트는 그저 혀를 쯧쯧 차며 팔짱을 꼈다.
“쟤네 또 저래?”
“그냥 아들이라니까.”
“아니 저럴 거면 그냥 일주일 데릭 다녀오지. 무슨 강아지들도 아니고 저렇게 떨어지기 싫어하냐.”
“내 말이 그 말입니다.”
뉴트가 웃으며 말을 받았다. 하긴 뭐 저런 모습 보는 것도 언제나 재밌긴 했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떠나려 해도 어떻게 일정을 아는지 귀신같이 나타나는 두 쌍둥이를 보는 사람들은 신기하다며 한마디씩 보탰다.
사생도 저렇겐 안 하겠다. 칭찬인지 뭔지. 뉴트는 그런 녀석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콱 찍었다. 애들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어. 타박하는 소리를 들으며 죽는소리를 하는 동료를 옆에 놔둔 뉴트가 민호를 불렀다. 이렇게 끊어주지 않으면 평생 놓아주지 않을 기세였으니까.
“민호. 슬슬 출발해야지.”
“토마스. 토미. 들었지? 나 이제 가야 해.”
“언제 올 건데.”
“이 녀석이 은근슬쩍 말이 짧아진다?”
“우리랑 약속한 거는 하나도 안 지키고, 이게 뭐야!”
“토마스. 조용히…….”
민호가 허둥지둥 토마스의 입을 막았다. 스무 살도 넘은 녀석들은 이럴 때만 어리광을 피웠다. 잔뜩 억울한 눈으로 민호를 올려다보는 통에 없던 두통이 생기는 것 같았다. 토마스가 물러설 생각을 하지 않자, 토미도 주춤주춤 다시 다가왔다. 자기만큼 커다란 녀석들을 어떻게 제어할 줄 모르는 민호의 얼굴엔 당황스러움이 가득 묻어났다.
“형이 예전에 약속한 거 잊었어요?”
“…뭐가.”
“스무 살 되면 같이 살자고 했잖아요.”
“…….”
“근데 벌써 우리 스무 살 되고도 세 살이나 더 먹었는데 이러는 게 어디 있느냐 이거예요.”
“…….”
“진짜 너무해.”
물론 떼를 쓰고 있다는 것을 이 영악한 아이들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민호를 쉽게 보내주기 싫었다. 어렸을 땐 스무 살만 되면 당장 같이 살 것처럼 이야기하더니, 이젠 어린이가 아니지 않으냐면서 빠져나가기만 했다.
“그게 아니고 나도 운동을 해야, 대회에 나갈 거 아냐. 안 그래?”
“…….”
“응? 토마스. 토미. 나 보고 이야기해봐. 안 그래?”
“…그래요.”
둘의 목소리가 죽어갔다. 아마 귀와 꼬리가 달려있다면 물을 잔뜩 먹은 것처럼 축 처졌을 것이 분명했다. 또 그런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약해졌다.
‘나도 이제 뭐라고 못하겠네.’
민호가 한숨을 쉬며 둘에게 잡힌 팔을 빼냈다. 형. 잔뜩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들리기 전에 민호는 모른 척 두 팔을 벌렸다. 이리와. 뉴트는 이미 그 꼴을 보고 웃겨서 넘어가고 있었다. 똑같이 생긴 커다란 놈 둘을 품 안 가득 안아준 민호는 잠시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자기가 낼 수 있는 가장 친절한 말투로 달래고 있었다. 물론 무뚝뚝한 사람이 그렇게 말해봤자 얼마나 상냥하게 말하겠냐만. 잘 이해는 되지 않지만 둘은 충분히 이해한 것 같았다.
“알았어.”
“이번에 돌아오면 너희 연구소로 놀러 갈게 알았지.”
“…응.”
“토마스도 대답.”
“…….”
잔뜩 부루퉁한 표정으로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불안해하는지. 꼭 새끼 분리하는 부모 개를 보는 기분이었다. 하긴 둘한테 부모님 말고 가장 소중한 사람을 꼽으라면 당연히 민호일테니,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럼 형 다녀올게.”
“빨리 다녀와.”
“훈련 스케줄이 있는데 어떻게 일찍 오냐. 대신 끝나자마자 연구소로 갈게.”
“응.”
“그래. 나 같다. 둘이 싸우지 말고 얌전히 있어.”
민호가 두 녀석의 머리를 여러 번 쓰다듬어 주고 나서야 긴 이별 인사가 끝이 났다. 그런 민호의 어깨에 손을 올린 뉴트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연신 웃으며 말을 걸었다. 쌍둥이는 민호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오래오래 바라보고 있었다.
**
연구실이 발칵 뒤집힌 건 민호가 훈련을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재미없다. 재미없다. 하는 소리는 입에 달고 살던 녀석들의 핸드폰이 울렸다. 둘의 번호를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형인가 봐.”
냉큼 핸드폰은 낚아챈 토미가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형! 밝은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는 더 이어지지 못하고 축 가라앉았다. 갑자기 심각해진 분위기에 침대에 누워있던 토마스가 주섬주섬 일어나 앉았다.
“야, 왜 그래.”
“…….”
“토미, 왜 그러냐고!”
“…….”
“야!”
냅다 짜증을 내는 녀석은 날카로운 목소리와 달리 잔뜩 긴장한 듯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토미는 점점 심각해졌다. 대답만 하다 전화를 끊은 녀석을 돌려세운 토마스가 하나하나 캐묻기 시작했다. 낯빛이 잔뜩 어두워진 토미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토마스, 형이…….”
“형? 민호 형? 왜?”
“그러니까…….”
“아, 답답해. 빨리 말해봐. 왜 그러는데.”
“훈련하다 다쳐서 이번 대회는 불참하기로 했다고.”
“뭐?”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나도 몰라. 뉴트 형이 전화 온 건데 일단 알고만 있으라고…….”
“…….”
잔뜩 당황한 둘은 서로 얼굴만 마주 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토마스는 눈을 깜박이며 계획을 세웠다. 그러더니 벌떡 일어났다. 토미가 그런 쌍둥이를 멍하니 바라봤다.
“뭐해. 일어서.”
“응?”
“형한테 안 갈 거야? 지금 출발해도 늦어.”
“아…아니. 갈 거야.”
“연구소 휴가가…아 모르겠다. 그냥 가자.”
이 녀석들은 도통 이 버릇이 고쳐지지 않았다. 둘이 휑하니 사라진 방안을 발견한 사람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도대체 그 짧은 개인 시간 동안 어디로 사라진 건지. 전화도 받지 않는 녀석들 때문에 연구소는 또 한 번 난리를 겪고 말았다.
**
“…….”
“형 빨리 할 말 있음 해봐.”
“…….”
“빨리!”
민호가 부목에 붕대를 매고 누워 있는 침대 옆을 점거한 쌍둥이는 잔뜩 화난 표정이었다. 민호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하려 했지만, 집요하게 따라오는 두 쌍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진짜 뉴트. 이 도움이 안 되는 놈. 이글이글 끓는 속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형!”
“어…그래.”
“우리 약속했잖아!”
“…그랬지.”
“일 생기면 이야기한다며. 근데 이게 뭐야. 왜 다쳤는데 말도 안 하고.”
“그야…….”
잔뜩 화난 둘은 절대 물러설 것 같지 않았다. 항상 두 녀석한테 뭐라고 하는 입장이던 민호는 갑자기 바뀐 상황에 영 적응을 할 수 없었다.
“너희 걱정할까 봐 그랬지. 그리고 그렇게 큰 부상도 아니고, 예전에 다쳤던 발목 염좌가 다시 생긴 것 뿐이라니까.”
“…….”
“초기 치료도 다 했고, 어차피 다친 김에 몸 좀 조심하라고 대회 참가 안 하기로 한 거고.”
“…….”
“그래. 내가 잘못 했다.”
“형 진짜 나빴어.”
볼이 터질 듯 부어오른 토미가 툴툴거렸다. 그러면서도 민호가 싫진 않은 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허리를 잡고 매달리는 녀석과 아직도 잔뜩 화가 난 토마스를 번갈아 상대하느라 없던 두통이 다시 시작되었다.
“약속도 안 지키고.”
“그래. 그래. 내가 잘못 했어.”
“다치고.”
“그것도 내가 나빴네.”
“우리 마음도 몰라주고.”
“그래. 그것도…뭐?”
민호는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았다. 다시 물어봐도 둘은 조개처럼 입을 다문 체 다시 말해주지 않았다. 민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열 살도 넘게 차이 나는 녀석이 하는 말에 말려들어서 이러는 것이 어른답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마음처럼 되는 일이 아니었다.
민호는 그날 이후로 옆집에서 무슨 소리가 날 때마다 숨도 편히 못 쉬는 상태가 됐다. 저질러놓은 잘못이 있으니 제 발 저리는 것이었지만, 아직 꼬맹이들을 바라볼 용기가 낫지 않았다. 이럴 때마다 뉴트 생각이 이를 벅벅 갈았다.
하지만 뜻밖에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당연히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놀 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골목에서 한 번 정도는 마주칠 법했는데,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조금씩 기억이 희석되고 있었다.
“…….”
물론 뉴트가 놀러 오기만 하면 산통이 깨졌지만. 아무래도 이 녀석은 민호가 당황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 분명했다. 제집처럼 쳐들어와서 소파를 점거한 채 민호를 바라봤다.
‘저 녀석을 그냥.’
그대로 친구를 대접하겠다고 들고 온 과자를 얼굴에 부어줄까 하다 간신히 참았다. 그런 민호의 손에서 냉큼 과자를 들고간 뉴트는 내내 편안한 표정이었다. 아, 정말. 이젠 한숨도 말라버렸는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뭐 진전은 있어?”
“무슨 진전.”
“옆집이랑 안면을 텄으면 뭐라도 할 거 아냐.”
“…….”
“아니야?”
“진전이고 뭐고, 애들이 밖에 나와 있는 걸 한 번도 못 봤어.”
“흐음.”
“항상 집도 조용하니까…잠깐만. 근데 왜 자꾸 걔들이랑 날 엮으려고 해?”
“이웃이잖아.”
“네 녀석 이웃은 아니잖아. 넌 여기 살지도 않으면서…아니다. 됐다. 저지른 일을 또 말해봐야 무슨 소용이야.”
민호는 이제 포기에 익숙해졌다. 물론 이 이후로 뉴트는 내내 민호의 집에 드나들었다. 첫 번째 이유는 같이 운동을 가자는 것이지만, 두 번째는 누가 봐도 쌍둥이 때문이었다. 애를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자기를 놀리는데 재미를 붙인 건지. 이런 녀석을 친구라고. 민호는 욕을 꾹꾹 삼키며 뉴트가 들고 있던 과자를 뺏어 들었다. 그런 점에서도 둘은 꽤 닮아 있었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전혀 아니라고 딱 잘랐다.
이렇게 마주치지만 않는다면, 이 상태 그대로 데면데면하게 지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사건은 의외의 곳에서 터졌다.
가볍게 몸이라도 풀러가자고 둘이 집을 나설 때였다. 문을 열고나올 때부터 뒤통수가 이상하게 아릿하다 했더니, 옆집 꼬맹이들이 문을 반쯤 연 채 둘을 쳐다보고 있었다. 또 한 번 갈 곳을 잃고 헤매는 민호의 눈동자를 보던 뉴트가 웃었다. 그리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서 꼬맹이들의 눈높이에 맞췄다.
“안녕? 나 저번에 봤었지?”
“…….”
“기억 안 나?”
“형…친구?”
“그래. 저 형 친구.”
그래도 옆집에 살던 민호가 좀 더 낯이 익는지 뉴트의 시선을 슬슬 피했다. 이것 봐라. 그런 꼬맹이들의 표정을 뉴트가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자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민호가 뉴트의 목덜미를 덥썩 잡아서 끌어냈다.
“무슨 짓이야.”
“왜!”
“진짜 내가 미친다.”
“…알았어.”
뉴트가 툴툴거리며 물러섰다. 민호는 뭐라고 말을 붙여야 할지 내내 고민했다. 물론 입에서 나온 말은 처음 만났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들의 반응은 그때보다 조금 나았다. 뭔가 궁금한 것은 있지만, 쉽게 말을 못하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큰 눈이 데굴데굴 소리를 내며 굴러갈 것 같았다. 깜빡. 눈을 감았다가 뜰 때마다 속눈썹이 흔들렸다. 그렇게 어색한 눈 맞춤을 참지 못한 뉴트가 툭 한마디 말을 던졌다.
“같이 놀러 갈래?”
“…….”
“우리 저기 공원에 운동하러 갈 거야. 같이 가서 놀자.”
“뉴트!”
“응?”
저 표정 봐. 민호는 끙끙 소리를 내며 고개를 푹 숙였다. 꼬맹이들은 당연히 거절하겠지 라고 생각했다. 문틈으로 보이는 똑같은 얼굴이 둘. 작은 손이 넷. 눈이 두 쌍. 안 그래도 부담스러운데 두 명이 똑같은 표정으로 고민했다.
“갈래.”
“그래…미안 뭐?”
“같이 갈래.”
“…….”
뜻밖의 대답에 뉴트와 민호는 황당하고 말았다. 반쯤 장난으로 던진 말이었는데, 쌍둥이는 그 말을 들으면서 한없이 진지했던 것이 틀림없었다. 일단 내뱉은 말이니 약속은 지켜야 하겠지만, 어른들 허락이 먼저였다. 어린아이를 멋대로 데리고 나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일은 친 사람은 뉴트인데, 고민은 민호가 더 깊었다. 뉴트는 그런 민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웃으면서 계속 말했다. 이미 두 아이는 뉴트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데리고 가줄 수는 있는데.”
“응!”
“대신 가서 허락받아와. 맘대로 나가면 안 되잖아.”
맞는 말이었다. 어린아이들이 듣기에도 떼를 쓸 수 없는지 잠깐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토마스. 나 나갈래. 같이 가자.”
“…….”
“내가 허락받아올게!”
“토미!”
“같이 가는 거다?”
쌩하니 안쪽으로 뛰어들어간 아이가 사라지자, 토마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분명 민호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다. 뉴트는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왜 이렇게 가시를 세운 새끼 고슴도치처럼 뾰족하게 대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낯을 가린다고 생각하기엔,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뭔가 할 말을 다 하는 아이 같은데, 이상하게 민호만 보면 입을 열지 않았다.
지루한 대치 상황이 계속되었다. 한 마디 말을 걸어볼까 하던 그 순간 토미가 불쑥 나타났다. 잔뜩 신난 얼굴을 보니 분명 허락을 받은 것이 확실했다. 두 손으로 토마스의 옷을 꾹꾹 잡아당기며 칭얼거렸다.
“토마스, 허락받았는데 옷 입고 나가래.”
“…….”
“응? 형들이랑 놀러 가자.”
“…….”
“응?”
“…….”
입을 다물고 대답을 하지 않으니 점점 울상이 되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당장에라도 칭얼거릴 것 같은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계속되었다. 그리고 줄이 끊어지기 직전 토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옷 입고 나와. 뉴트가 둘을 안쪽으로 돌려세워 주며 웃었다. 잠깐 시야에서 쌍둥이가 사라진 틈을 타 민호는 뉴트의 멱살을 잡았다.
“넌 진짜.”
“쟤네가 너한테 할 말이 있다니까. 난 다리 놔주는 것뿐이야.”
“아니 저런 어린 애들이랑 다리 놔줘서 뭐하게.”
“뭐하긴. 잘 지내는 거지.”
“…….”
“그냥 애들을 키우라는 소리구나.”
“아니야. 절대.”
뉴트가 멱살을 잡고 있는 민호의 손을 하나하나 떼어 냈다. 그리고 옷매무새를 정리하자마자 동그란 머리 둘이 또 툭 튀어나왔다. 그렇게 추운 날씨는 아니었지만, 어린아이라 걱정이 되는지 니트에 얇은 코트를 입고 있었다. 똑같은 옷이 항상 두 벌씩 있는 걸까.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치 틀에 찍어낸 인형이 둘 서 있는 것 같았다. 작은 가방까지 하나씩 메고 나온 녀석들의 손을 잡으려 했다.
“응?”
냉큼 뛰어가 민호의 다리에 매달린 녀석이 생글거리며 웃었다. 뉴트는 머쓱하게 손을 거뒀다. 이럴 거로 생각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더 직접적이었다. 뚱한 표정으로 문을 잡고 서 있던 녀석도 주춤주춤 밖으로 걸어 나왔다. 토미의 반대쪽에 서서 옷자락을 꾹 쥐는 걸보고 있자니 귀여워 죽을 것 같았다.
“다행이야. 민호.”
“뭐…뭐가.”
민호는 이 상황이 당황스럽기만 했다. 어린 애들이라 뿌리치지도 못하고 그대로 바지춤을 잡힌 채 서 있었다.
“애가 셋이었으면 팔이 모자랐잖아.”
“뉴트!”
“둘이니까 한 손에 하나씩 잡으면 되겠네.”
“…….”
“한 번에 안고 가진 못할 거 아냐.”
“그렇긴 하지.”
“내가 친구 된 도리로 가방은 들어줄게.”
뉴트가 저렇게 빠져나갈 때마다 정말 쫓아가서 멱살을 잡아야했다. 뉴트가 커다란 가방을 어깨에 하나씩 걸치더니 어서 데리고 오라는 듯 고개만 까닥거렸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별수 있나. 민호는 한숨을 푹푹 쉬면서 조그만 두 손을 하나씩 나눠 잡았다. 굳이 다행인 점을 찾으라면, 자기를 싫어하는 줄 알았던 녀석이 먼저 다가왔다는 정도일까. 민호가 조심스럽게 걷기 시작하자 작은 발자국 소리가 따라왔다.
“…….”
“민호?”
“아, 내 걸음이 너무 빠른 거 같아서.”
아이들이 민호의 보폭을 따라갈 수 있을 리 없었다. 차라리 한명씩 안고 가면 더 편할 텐데. 두 녀석 다 민호한테서 떨어지질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민호는 아이들의 발걸음에 맞춰 최대한 천천히 걷고 있었다.
원래 달리는 것을 천직으로 알고 태어난 녀석인지라 이런 좁은 보폭이 불편하고 답답했지만 놔두고 갈 수도 없었다. 뉴트는 한참 앞에서 빙글 뒤로 돈 채 세 명을 내내 바라봤다.
“형 얼마나 더 가야 해?”
“조금 더.”
“…….”
“가면 재밌어?”
“음…재밌겠지? 걸을 수도 있고 나무도 있고 그러니까.”
“그런가.”
눈을 반짝이는 녀석이 자그마한 손을 민호의 손가락을 꽉 쥐었다. 그래도 얌전해서 다행이야. 민호는 등 뒤에서 줄줄 흐르는 식은땀을 이제야 느끼고 있었다. 말을 잘 듣고 순해서 다행이지, 천방지축이라면. 아마 반도 못 가서 주저앉았을 것이 분명했다. 아니면 억지로 한 명씩 안고 걸어가던가. 하지만 이 정도를 걸어가면 힘들다고 칭얼거릴 법도 한데 끈기 있게 따라오는 녀석들이 대견하긴 했다.
공원은 그리 멀지 않았다.
애초에 공원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가볍게 운동을 하거나 산책을 할 목적으로 만든 곳이었다. 하지만 이런 가까운 곳도 좀처럼 나와 보지 않았는지, 쌍둥이들은 두 눈에 공원이 들어오는 그 순간부터 잔뜩 신이 나 있었다. 당장 뛰어가고 싶었지만, 손을 단단히 잡고 있는 민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멀리 가면 안 된다?”
“응!”
두 번 씩 약속하고 세 번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물론 그것도 잠시 잔뜩 신난 녀석들은 이리저리 움직이기 바빴다. 민호는 눈앞에서 타박타박 걸어 다니는 아이들을 보며 잠깐 옛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 민호의 어깨에 턱 하고 턱을 얹은 뉴트가 어깨너머로 음료수를 건넸다.
“…….”
“왜 또 표정이 그래.”
“너 같으면 지금 걱정이 안 되겠냐.”
“별로. 애들도 착하고 얌전하잖아. 연습이 모자라면 여기 한 바퀴 뛰고 오던가. 애들은 내가 시켜보고 있을게.”
“…….”
“지금 좀 쑤신 거 다 안다?”
이렇게 속마음을 숨기기 힘들었다. 민호는 잠깐 고민하다 저지를 벗었다. 혹시 몰라 편한 옷을 입고 오길 잘했단 생각을 했다. 혹시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애들 손잡고 있으라는 말을 몇 번이나 하다가, 오른쪽으로 휙 뛰어갔다. 뉴트는 그런 뒷모습을 보며 내내 웃고 있었다. 저렇게 뛰는 걸 좋아하는데, 지금까지 참은 것도 대단했다. 그리고 슬금슬금 눈앞에서 이것저것 만지며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토미.”
“응?”
“토마스.”
“…왜?”
“재밌는 구경 할래?”
“…….”
재밌는 구경이라는 말에 눈이 반짝거렸다. 뉴트가 씩 웃으며 두 아이의 손을 잡았다. 그리곤 가장 가까운 벤치로 데려갔다. 한 명씩 안아다 벤치에 앉혀준 다음 손으로 저 먼 곳을 가리켰다. 뉴트의 손가락을 따라 움직이는 샴페인 색 시선엔 잔뜩 호기심이 돌았다.
“이제 여기 보고 있으면 민호 형이 지나갈 거야.”
“왜?”
“그 녀석이 좀 달리기 바보라서, 뛰는 걸 엄청나게 좋아하거든.”
“그렇구나.”
“뭐 나도 연습해야 하는 건 마찬가진데, 오늘은 쉬기로 했으니까. 잘 봐야 해? 형 순식간에 지나가니까.”
“응!”
아이들은 가끔 이렇게 순수할 정도로 단순했다. 뉴트도 벤치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곤 물통을 꺼냈다. 천천히 쉬면서 민호를 기다리려 했는데, 토미의 눈이 물통에 닿았다. 아. 뉴트가 입으로 가져가던 물통을 손가락으로 쿡쿡 건드렸다. 그리고 눈을 맞추자 작은 얼굴이 아래로 움직였다.
“목말라?”
“응.”
“빨대가 없는데. 마실 수 있겠어?”
“응. 괜찮아.”
“조심. 조심.”
토미가 물을 마시자 조용히 토마스도 손을 뻗었다. 아직도 낯을 가리나. 뉴트는 속으로 내내 귀여워 죽겠다는 생각만 했다. 토마스가 물병에서 입을 떼려는 그 순간 눈앞에 민호가 휙 지나갔다. 손을 잡고 올 때는 잘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엄청나게 커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 순간 토마스의 작은 손에 힘이 빠지면서 그대로 물통을 놓치고 말았다. 뚜껑을 닫지 않은 물통이 그대로 한 바퀴 회전하며 바지 위에 물을 쏟았다.
“아…….”
“아이고.”
뉴트가 깜짝 놀라서 토마스를 안아 일으켰다. 잔뜩 젖어버린 옷은 이미 물기를 흡수하다 못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뉴트가 재빨리 물을 털고, 코트를 벗겼다. 잔뜩 찡그린 표정이던 아이가 주춤주춤 물러섰다.
“토마스.”
“응. 괜찮아. 이 정도면 이런 날씨엔 금방 말라.”
“…하지만.”
“뭐 이런 거 가지고 놀라. 괜찮아.”
뉴트가 옷을 꾹꾹 짜고 물을 털었다. 한참 토마스를 돌봐주는 새 민호가 뭔가 이상한지 가볍게 방향을 틀어 다가왔다. 잔뜩 신난 표정으로 답싹 안기는 토미를 몇 번이나 밀어내다 결국 안아 올렸다.
“지금 나한테 안기면 땀 냄새난다.”
“괜찮아!”
“내가 못 살아. 뉴트. 토마스는 왜 그래?”
“아 물을 쏟아서. 금방 마를 거 같아.”
“토마스. 괜찮아?”
“…응.”
시무룩한 목소리가 땅바닥에 잔뜩 깔렸다. 그런 분위기를 어떻게 해보려는 듯 민호가 손을 내밀었다. 토마스. 눈을 깜박이며 그 손바닥만 쳐다보던 토마스의 얼굴에 살짝 웃음기가 돌았다.
“가자. 어차피 물은 금방 말라.”
“…어딜?”
“같이 좀 걷거나 뛰거나 하지 뭐. 안 갈래?”
“…….”
“토미는 간다는데.”
“…갈래.”
“뉴트 형도 같이 가자 해. 이리와.”
토마스가 주춤주춤 뉴트의 옷자락을 쥐었다. 결국, 아이들 체력이 방전될 때까지 신나게 뛰어놀았다. 막판엔 피곤을 견디지 못한 아이들이 꾸벅꾸벅 졸았다. 민호는 웃으면서 토마스를 업었다. 뉴트는 토미를 안아 들었다. 어쩐지 늦둥이 동생이 생긴 기분이었다.
뉴트는 몇 번이나 애들 눈을 봤느냐고 물었다. 완전히 푹 빠진 거 같은데. 민호는 그런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렸다. 그저 늦둥이 동생이 생긴 기분이었다.
“정말 못 봤어?”
“뭘.”
“요 녀석들 눈 말이야. 너한테 푹 빠진 거 같은데. 알아주지 않는다니 나쁜 형이잖아.”
“그냥 신기해하는 거라니까.”
“신기한 사람이면 그냥 한번 보고 넘겼겠지. 네가 엄청 마음에 든 거 같더라.”
“개소리를 신기하게 한다.”
“개소리 아니라니까. 내가 장담해.”
깔깔 웃던 뉴트가 잠에 푹 빠져서 흐물흐물 흘러내리는 작은 몸을 다시 들쳐 안았다. 얼마나 신나게 놀았는지 이대로 업어다 우리 집에 데려놔도 모르겠다. 뉴트가 땀에 푹 젖은 토미의 머리를 살살 쓸어 정리했다. 친구란 놈이 또 헛소리한다며 민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날 이후 조금씩 가까워진 것은 확실했다.
경계도 덜 하는 데다 가끔 아침에 마주치면 작게나마 인사도 받을 수 있었다. 민호는 외동이어서 그런지 이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일부러 깨어있는 건지. 아니면 원래 일찍 일어나는지 민호가 밖으로 나오면 항상 문을 반쯤 열고 쳐다보고 있었다. 모른 척 하기도 뭐해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기 시작한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나고 있었다.
***
“이상해.”
“뭐가.”
“아니 다른 건 아니고, 쌍둥이 말이야.”
“응?”
“지나치게 조용해서.”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항상 사람이 없는 것 같은데.”
“너…생각보다 그 애들한테 관심이 많네.”
뉴트가 들고 있던 빵을 베어 물며 민호를 빤히 쳐다봤다. 또 그런다. 민호는 작게 뉴트를 타박했지만, 말엔 거짓말이 들어있지 않았다.
집안 자체가 조용한 분위기일 수도 있지만 민호가 느끼기엔 과할 정도로 조용했다. 게다가 아이들은 밖으로 놀러 나오는 적도 거의 없었다. 가끔 민호 손을 잡고 공원을 가거나 하는 것이 전부였다. 옆집에 사는 어른들은 아침 일찍 출근하는지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던 뉴트는 너도 이제 끝났다- 라는 표정이었다. 물론 잔뜩 심각한 민호는 그런 뉴트의 표정을 알아채지 못했지만. 구구절절하게 다시 시작되는 옆집 탐험기는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민호는 옆집 문을 다시 두드렸었다. 누구세요. 언제나 그랬든 것처럼 문을 여는 아이의 눈에 민호가 가득 들어왔다. 형! 민호를 알아본 아이들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이럴 생각까진 아니었지만, 옆집에 놀러 가서 주스도 대접받았다.
‘아, 이런 거 신경 쓰면 안 되는데.’
남의 집 소파에 앉아서 아이들을 얼러주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집은 전체적으로 흰색으로 꾸며져 있었다. 먼지 한 톨 내려앉지 않은 가구를 보면 어떤 느낌의 가정인지 알 것 같았다. 되게 깔끔한 집이네. 그런 생각도 잠시. 마냥 형이 좋다고 달려드는 녀석들이 소파 위에 냉큼 올라앉았다.
조금 말을 튼 다음 물어봤다.
아이들에게 직접 들은 바에 의하면 일어나면 항상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했다. 무슨 일은 하는진 듣지 못했지만, 굉장히 바쁜 분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부모님을 이해한다는 말도 따라왔다.
“…….”
고작 다섯 살짜리 아이가 이렇게 속 깊은 말을 하는 것이 좀 가슴이 아팠던 민호가 커다란 손으로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줬다. 금방 볼이 발그스름하게 달아오른 아이는 신이 나서 이것저것 말하며 민호의 품에 안겨들었다.
누가 쌍둥이 아니랄까 봐 토미가 그러기 시작하면, 아닌 척 앉아있던 녀석도 똑같이 따라 했다 완전히 등을 묻은 채 두 아이를 품 안 가득 끌어안아 줬다. 민호는 또래 아이들보다 덩치가 큰 편이었고, 쌍둥이들은 평균보다 조금 작았다. 품으로 파고 들어간 아이들은 내내 생글거렸다.
그 상태로 토미는 또 재잘거렸다.
“…자고 일어나면 도우미 누나가 오는데.”
“그래?”
“응. 밥도 해주고 옷도 골라주고. 청소도 해줘.”
“그리고 나선?”
“우리 둘이 방에서 노는데.”
“방에서?”
“응! 구경 갈래. 형?”
품 안에서 벌떡 일어난 녀석이 민호를 보면서 웃었다. 민호는 모른 척 토미가 손을 잡고 끄는 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그대로 걸어가려 하다 반대쪽 손을 소파에 남아있는 아이에게 쭉 뻗었다.
“같이 가야지?”
“…….”
“안 갈 거야?”
“갈 거야.”
뭐 그렇게 퉁명스럽게 말하는진 몰라도 주춤주춤 소파에서 내려왔다. 그리곤 손을 잡는 대신 민호의 상의 끝을 잡았다. 옷 늘어난다. 괜히 타박을 하던 민호가 씩 웃으면서 손을 떼서 직접 잡았다. 깜짝 놀라서 바르작거리는 손끝이 느껴졌지만, 뭐 어떤가. 그렇게 둘은 토미가 안내하는 대로 방으로 걸어갔다. 쌍둥이들은 둘이서 방 하나를 쓰고 있었다. 물론 아이들이 쓰기엔 꽤 큰 방이었지만. 문을 열자 민호는 생각지도 않은 방 안 모습에 조금 놀랐다.
“와우.”
“우리 방!”
“이게 다 너희 거야?”
“응. 민호 형.”
“…….”
찬찬히 방안을 살펴보자 뭔가 보통 아이들이 가지고 있을 만한 것이 잔뜩 있었다. 침대에서 책을 보다 그대로 뛰어나왔는지, 조금 정리가 되지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집안 분위기하고 그리 다르지 않았다. 민호는 곁눈질로 펴져 있는 책을 슬쩍 넘겨다 보았다.
“…….”
도대체 저걸 이해하고 보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저 그림책 삼아서 보는 것인진 모르겠지만, 아이들이 볼만한 내용은 아닌 것 같았다. 눈만 깜박이며 책을 바라보는 시선을 눈치챘는지 토미가 또 손을 쭉쭉 끌어당겼다. 토마스는 침대에 앉혀주고 토미도 들어 올렸다. 커다란 침대 위에 널브러진 책들은 빼곡하게 과학식이 들어차 있었다. 손끝으로 책장을 넘겨보던 민호는 속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토마스랑 같이 보는 거야.”
“…….”
“그렇지. 토마스.”
“응.”
“너희 몇 살이라 했지?”
“다섯 살.”
“…….”
나이를 들으니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이는 아이였다. 자기들의 보금자리에 초대했다는 이유만으로 어느 정도 경계심을 내려놓았다. 물론 그전부터 민호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눈치를 보긴 했지만. 민호는 딱히 그런 눈치를 키운 것은 아니었지만, 아이들의 시선은 너무 직접적이었다. 나이를 듣고 보니 생각보다 나이 차이도 많이 났다. 열 살. 아니 열두 살. 띠동갑 이네. 민호는 손으로 셈을 해보다 결국 헛웃음을 터뜨렸다.
“…왜?”
“아니야. 너희가 어려운 책을 보는 거 같아서.”
침대 위에 올라앉는 녀석들은 여전히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민호를 따라왔다. 와락 품 안으로 돌진하는 녀석을 받아준 민호가 휘청거렸다. 그리고 슬쩍 붙어오는 토마스를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푹신한 침대에 누워있자니 조그만 녀석들이 꼬물거리며 자꾸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뭐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똑같은 얼굴인데 표정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니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아.’
어쩐지 둘은 조금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토미. 토마스. 민호가 부르자 조그만 얼굴이 동시에 눈에 들어왔다. 아, 정말이네. 알겠어. 물론 둘 다 무표정하게 있으면 절대 구분 불가능 할 것 같지만, 지금은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약간 쌩하게 굴면서도 멀리 도망가지 않는 녀석이 토마스고, 생글생글 웃으면서 사고 치는 쪽이 토미였다. 어째서 이름이 비슷한지 까진 알 수 없었다. 마치 같은 틀에서 찍어낸 얼굴처럼 다른 부분이 없었다. 하다못해 볼에 박혀있는 점조차 똑같은 곳에 있었다. 민호가 두 손을 들어 각자 볼을 만지작거리자 금세 고양이가 우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누가 형이야?”
“으음. 토마스?”
애매한 대답을 하곤 했다. 하지만 그것조차 귀여워 보이는 것은 이미 콩깍지가 단단히 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도대체 이 쌍둥이들은 무슨 이유로 민호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맹목적일 정도로 따르고 있었다. 민호는 침대에서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저런 책 보면 재밌어?”
“왜? 항상 보는 거라고 보고 있을 뿐이야.”
“내내 집에서만 책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친구가 없는 거 아냐?”
“…….”
“너희 바깥에도 잘 나오지 않잖아.”
맞는 말인지 표정이 금방 시무룩해졌다. 민호는 괜히 미안해서 말을 돌렸다.
“공원이라도 나갈까? 운동해야지.”
“싫어.”
“토미는?”
“…….”
토미는 토마스와 민호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선택은 언제나 다르지 않았다. 가고 싶어서 안달이 난 얼굴로 토마스를 조르기 시작했다. 물론 쌩하게 대답한 녀석도 조금씩 마음이 돌아서는 모양이었다. 민호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옷 입자.”
“응?”
“그 상태로 나갈 거야? 아니지?”
“응. 아니야. 형!”
“…….”
“그럼 허락받고 오렴.”
“알았어!”
토미가 침대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제법 달리기가 빨랐다. 아마 허락도 내내 집안일을 도와주는 사람에게 받아오는 것이 틀림없었다. 뭔가 시끌시끌한 소리가 나는 거실에서 시선을 거두니 옆에 토마스가 붙어있었다. 옷자락을 꽉 쥔 채 큰 눈으로 민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떨어지기 싫어하고, 토미가 하는 건 똑같이 따라하는 조그만 녀석은 대답엔 너무 박했다.
“토마스 왜 그래?”
“…….”
“너는 말을 좀 하고 살아야겠다.”
“…해.”
“조금 더. 형이라고 불러봐.”
“…민호.”
“형.”
“…….”
“민호 형.”
“…….”
또 입을 다물었다. 조금만 더 친해지면 될 거 같은데, 영 마음을 터놓지 않았다. 그리고 토미가 돌아와서 또 민호의 허리에 매달렸다.
“나가도 된다고 해?”
“응! 옷 입고 나가래.”
“그래.”
토미가 열어주는 옷장에서 적당히 겉옷을 꺼냈다. 똑같은 옷이 두 벌씩 있으니 고르는 것 자체는 힘들지 않았다. 혼자서 둘을 데리고 나가는 건 좀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너무 얌전하게 따라왔다. 공원까지 가는 길이 제법 익숙한지 손으로 방향을 이리저리 짚어보며 맞는지 묻곤 했다. 공원에 도착해서도 딱히 많은 일을 하진 않았지만, 민호랑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즐거운지 웃음이 한가득 이었다.
한참 공원을 걸어 다니던 민호의 눈에 아이스크림 차가 보였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간식을 줘도 되는진 물어보지 않았지만, 이 정도는 괜찮을 거란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다. 용돈을 털었다. 그리고 두 녀석 손에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쥐여주었다. 금방이라도 녹아 흐를 것 같이 아슬아슬한 아이스크림을 보던 민호는 결국 두 녀석을 벤치에 나란히 앉혔다. 벤치 위로 쑥 올라간 다리를 흔들던 아이들은 얌전히 먹는 것에 집중했다.
아침부터 옆집이 시끌시끌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무시하고 조금 더 자려 했지만, 뭔가 옮기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아.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이불을 푹 뒤집어썼다. 소리가 조금 줄어든 것 같아 빨리 잠이 들고 싶었다. 하지만 5분 뒤 커다란 가구가 끌리는 소리가 다시 귀를 파고들었다.
“…….”
시끄러워. 조금이라도 더 자기 위해 침대에서 뒤척거리던 민호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일어나 앉았다. 아침부터 이게 무슨 일인지. 잠이 잔뜩 붙은 얼굴로 눈만 깜박이던 민호가 조용히 귀를 쫑긋거렸다. 도대체 아침부터 무슨 일이지. 남자들의 대화 소리. 뭔가 끌리는 소리. 벽을 사이에 두고 조금씩 흘러들어오는 소음은 일상적이지 않은 것뿐이었다. 잠깐 소리가 그쳤을 뿐인데, 잠이 솔솔 왔다. 민호는 베개를 껴안은 채 한참 꾸벅꾸벅 졸았다. 안 그래도 며칠 동안 내내 늦게 잔 터라 잠이 부족했는데, 밖에서 아침부터 꿀 같은 잠을 깨우니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졸려.”
좀 더 잘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다시 꿈속으로 걸어 들어가려는 순간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민호 아직도 자냐!”
“아…제발.”
“민호!”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민호의 방으로 자연스럽게 뚜벅뚜벅 걸어오는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민호는 목 안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베개를 안고 거꾸로 쓰러진 민호가 끙끙거리며 다리를 움직였다. 하나. 둘. 셋. 벌컥. 꼭 셋을 세고 났을 때, 문이 와장창 소리를 내며 열렸다. 자는 척을 해보려 했지만, 물론 그런 것이 통할 리 없었다. 침대에 털썩 주저앉은 녀석이 민호의 목을 꽉 누르며 웃었다.
“아직도 자냐. 어제 뭐 했어.”
“…뭐하긴. 할 일 하다 잤지.”
“무슨 일이 그렇게 새벽에만 있으실까.”
“야!”
베개에 얼굴을 박고 있던 민호가 벌떡 일어났다. 눈썹이 바짝 올라간 것을 보니 정말 짜증이 난 것 같았다. 그런 얼굴을 보던 뉴트가 그럴 줄 알았단 표정으로 웃었다. 아, 또 말렸다. 항상 이런 식으로 당하고도, 좀처럼 고쳐지지 않았다.
“뭐, 맞는 소리잖아.”
“…….”
“그렇게 좋을 대로 뒹굴 거리면 몸 다 망가진다? 네? 장거리 유망주 씨?”
“내가 무슨 일주일을 놀았냐, 사흘을 놀았냐. 운동 빼먹겠다는 것도 아니잖아. 삼십 분만 더 자자고. 나 아침부터 옆집이 시끄러워서 제대로 못 잤단 말이야.”
“시끄러울 만하지. 이사 오던데.”
“…이사?”
“몰랐어.”
“응.”
뉴트는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민호는 이제야 뭔가 알 수 없는 대화와 소음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하나하나 아귀가 맞아 들어갔다. 그렇구나. 민호는 괜히 머쓱했다.
“어디에다 정신을 빼놓고 다니면 옆집에서 일어난 일은 내가 먼저 알고 있냐.”
“그럴 수도 있지. 어젠 별소리 없었단 말이야.”
“당연히 그랬겠지.”
“…….”
“이 정도면 잠 깼지? 일어나.”
“진짜 못 당하겠네.”
민호는 느릿느릿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미 한발 먼저 일어나 민호가 일어나길 기다리는 뉴트의 표정은 웃음이 가득했다. 이 녀석이야 어릴 때부터 친구로 지낸 터라 이런 일은 익숙했다. 예전엔 옆집에 살아서 심심하면 같이 만나서 달리기하러 가곤 했는데, 몇 번 이사하고 학교가 갈라지다 보니 좀 애매해진 감이 있었다. 물론 걸어서 충분히 다닐 수 있는 거리였지만, 옆집에 딱 붙어살던 때와는 조금 달랐다.
잔뜩 뻗친 머리카락을 손으로 슥슥 정리하는 민호를 보면서 뉴트는 또 한마디 잔소리를 했다. 오늘은 자율 연습 아니야? 잔뜩 볼멘소리하던 민호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늘 그렇듯 부모님은 아침부터 일하러 가셨는지, 집은 텅 비어있었다. 뭐라고 먹고 나가야 할 텐데. 익숙하게 민호네 냉장고를 뒤지던 뉴트는 영 먹을 것이 없다는 표정으로 점점 심각해졌다.
“먹을 거 없을 걸? 오늘 마트 들린다고 하셨는데.”
“그러게. 아무것도 없네. 계란 두 개 있다.”
“그걸 누구 코에 붙여.”
“하긴 그러네. 뭐 사 먹고 갈까?”
“가는 길에 햄버거나 먹고 가자.”
“저렇게 먹고 싶은 거만 먹다가 체중 오버 나야 정신을 차리지.”
“너나 신경 써.”
뉴트가 냉장고 문을 닫았다. 물론 말은 그렇게 해도, 이 집에 남아있는 재료로 할 만한 요리가 딱히 없었다. 별수 없네. 이미 익숙한 투닥거림이었다. 기다려봐 나 옷 좀 갈아입고. 민호가 의자에 일어섰다. 길쭉길쭉하게 뻗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근육을 풀었다.
사실 따지자면 아침잠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닌데, 꼭 이렇게 뉴트가 집으로 오는 것을 기다렸다. 민호 말로는 어릴 땐 자기가 매일 데리러 가지 않았느냐고 변명했지만, 뉴트는 그저 이 상황이 웃긴 모양이었다. 소파에 앉아서 느긋하게 등을 기댔다. 빨리해. 빨리. 입으로만 재촉하는 뉴트는 내내 입꼬리가 올라가서 내려올 줄 몰랐다.
뉴트랑 민호는 약간 다른 종목을 연습하고 있지만, 이미 선수들 사이에선 유명했다. 처음 달리기를 시작할 때부터 같이 시작하고, 항상 둘은 상위권 기록을 냈다.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는 둘은 항상 눈길을 끌었다. 학교를 졸업하면 당장 스카우트 하려고 벼르고 있는 에이전시도 많았다. 묘한 소꿉친구는 마을 안에서도 꽤 명물이었다. 점점 시끄러워지는 소리에 뉴트가 감고 있는 눈을 살짝 떴다.
“시끄럽긴 하네.”
“내 말이 맞지?”
“하지만 그게 네가 늦장을 부려도 되는 이유가 되는 건 아니지. 안 그래?”
“뉴트 넌 내 소중한 친구지만 그렇게 정색하면서 말할 때마다 한 대 치고 싶어.”
“치던가?”
“아, 진짜.”
“넌 이기지도 못하면서 꼭 그러더라.”
뉴트는 오늘도 말로 민호를 이긴 것 같았다.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옆에 내려놨던 가방을 들었다. 자연스럽게 각각 반대쪽 어깨에 가방을 멘 둘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집을 빠져나갔다. 입맛도 다르고, 주 종목도 다르고. 찬찬히 뜯어보면 얼굴도 전혀 닮은 구석이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친해졌는지. 서로 어울려 다니는 둘을 볼 때마다 주위에서 하는 말이었다.
“…아.”
민호가 힐긋 옆을 돌아보니 여전히 가구를 옮기느라 바쁜 사람들이 보였다. 거의 막바지인지 자잘한 생활 도구가 끝없이 집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이사를 오는진 모르겠지만, 나중에 인사라도 해야겠네. 막연하게 생각을 하던 민호는 옆구리를 퍽퍽 치는 뉴트에게 가방끈을 잡힌 채 반강제로 그곳을 벗어났다. 안 그런 척 하지만 분명 저 녀석이 배가 고팠던 것이 틀림없었다.
“너도 아침 안 먹었냐?”
“당연하지.”
“어쩐지 서두르더라.”
“이 정도 알고 지냈으면, 눈치껏 행동해야 하는 거 아냐? 난 세트.”
“나도.”
“사람이 별로 없길 기도해야겠네.”
“이 시간에 뭐 그렇게 많을까.”
낄낄거리며 뉴트의 어깨를 콱 잡았다. 귀찮게. 짧게 타박하는 것도 익숙했다. 둘이 골목을 벗어나고 한참이 지나도 이사가 끝나지 않았다.
***
자율 연습이지만, 훈련을 받는 것만큼 힘들었다.
마지막 스퍼트를 올리며 결승선을 통과한 민호가 그대로 바닥에 누워버렸다. 으아아. 숨이 차 거칠게 오르내리는 가슴은 좀처럼 진정할 줄 몰랐다. 힘들고 숨이 차서 입을 다물지도 못한 채 내내 헉헉거리는 민호는 트랙에서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몇몇 선수들이 그런 녀석을 흘낏 쳐다보며 지나갔다. 민호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쯤은 신경 쓰지도 않은 채 하늘만 바라보았다. 뛰고 나면 자연스럽게 긴장이 풀리고, 한 번에 피곤이 몰려왔다. 온몸이 찌르르 울릴 정도로 근육이 아팠다. 달리기 편하게 짧고 달라붙는 재질인 트레이닝 복에서 늘씬하게 뻗은 팔다리엔 근육이 붙어 탄탄했다. 땀이 송골송골 맺히다 못해 줄줄 흘러내렸다.
‘물 마시고 싶다.’
생각은 하고 있지만, 움직이기 싫었다. 누가 물통 하나 던져줬으면.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뒤통수 너머에서 들렸다.
“민호. 기록 더 좋아진 거 같은데? 아니야?”
“뉴트?”
“응.”
“넌 네 연습은 안 하고 남의 기록이나 신경 쓰고 있냐.”
“난 끝났지.”
“…….”
뭐라고 한마디 더 하고 싶었지만, 바짝 마른입이 계속 물을 찾았다. 목마르다. 민호는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은 채 뉴트에게 말을 걸었다. 아니 애초에 움직일 만한 기운이 남아있지도 않았지만.
“물 좀 줘봐.”
“이럴 땐 줘봐 가 아니고 주세요 라고 하던가 아니면 뮬 좀 주실래요 라고 해야지.”
“야!”
“짜증은. 여기 있다.”
해가 그대로 내리쬐는 민호 얼굴 위에 찬물을 적신 수건을 덮어주고. 트랙에 늘어진 손에 물통을 쥐여 줬다. 차가운 물통이 손에 들어오자 그 부분부터 감각이 살아나는 것 같았다. 벌떡 일어나서 땀과 먼지투성이인 얼굴을 수건으로 닦았다. 그리고 급하게 물통에 입을 댔다. 아. 이제야 살 것 같았다. 한참 물을 마시고 나서야 정신이 돌아왔다. 찬 수건을 목에다 걸고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뱉었다. 탄탄한 목덜미에 차가운 물이 콸콸 쏟아졌다.
“아 차가워! 야!!”
“시원하지 않아? 너 해주려고 따로 가져온 건데.”
“너, 진짜. 한다고 말 좀 하고 하면 안 되는 거냐?”
“그래도 시원하지?”
“…….”
“시원하지?”
“그래. 시원해서 죽겠다.”
사실 열로 잔뜩 달아오른 몸을 한 순간에 식혀준 물이 고맙긴 했다. 민호의 상체가 다 젖도록 물을 탈탈 부어버린 뉴트가 저 멀리 물통을 던져버렸다. 캉. 캉. 트랙에 부딪히며 물통이 저 멀리 굴러갔다. 민호의 턱에 맺혀있던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트랙에 떨어지는 물방울은 진한 자국을 만들었다. 뜨거운 열을 버티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런 민호의 등에 다리를 올리고 몸을 풀던 뉴트는 결국 한 소리 들으며 때아닌 추격전을 벌였다.
뭐 심심찮게 일어나는 일인지라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
“간다?”
“그래. 내일도 늦잠 자지 말고.”
“네 걱정이나 해. 민호.”
“…….”
“그리고 옆집에 누가 이사 왔는지 알려주고.”
“알 수 있으면. 그렇다고 남의 집 초인종을 누르고 얼굴을 보자 할 것도 아니잖아.”
“그렇긴 하네. 나 인제 간다?”
“그래. 내일 보자.”
헤어지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어차피 내일 훈련하러 가거나, 학교에 가면 또 볼 녀석이었다. 지금은 방학 중이니 딱히 학교에선 만나지 않겠지만. 중간에 학교가 한 번 갈라졌다가 다시 만난 터라, 더 친해진 것도 있었다. 방학이라고 마냥 좋은 것이 아니니 민호는 좀이 쑤셨다. 물론 달리는 것이 싫다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일주일 내내 같은 스케줄이 적혀 있다는 것이 좀 지겨울 뿐이었다. 물론 하루만 달리기를 안 해도 영 찝찝하다며 뛰쳐나가겠지만.
“내일은 훈련 내용이 뭐더라.”
해가 노을을 만들며 건물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거리를 걷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긴 그림자를 데리고 있었다. 민호는 이젠 눈감고도 찾아갈 길을 터벅터벅 걸었다. 조금 피곤하기도 했고, 빨리 돌아가서 누울 생각만 하고 있었다. 아, 피곤해. 하품이 절로 나왔다. 한 손으로 들고 있던 가방을 좀 더 바투 들었다. 잔뜩 물을 먹은 옷은 무겁기만 했다.
“음?”
문을 열려고 자연스럽게 열쇠를 찾고 있는 민호의 시선에 뭔가 까만 것들이 걸렸다. 애써 무시하고 가방을 뒤지고 있으니, 자꾸 가까이 오는 인기척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결국, 가방을 옆으로 치우며 아래를 내려다보자 낯선 녀석들이 있었다.
“누구?”
“…….”
“뭘 그렇게 쳐다봐.”
“…….”
“이상한 녀석들이네.”
똑같이 생긴 두 녀석이 서로 손을 잡은 채 한군데 뭉쳐서 커다란 눈으로 민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그 눈엔 낯선 것을 바라보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민호는 애써 미소를 띠며 다시 한 번 물어봤지만, 좀처럼 말을 하지 않았다.
“뭐지?”
“…….”
똑같은 얼굴로 같은 디자인의 옷을 입은 녀석들이 서로 소곤소곤 귓속말을 했다. 그러더니 서로 힘을 합쳐 문을 열었다. 키가 약간 모자란 지 까치발을 하고 낑낑거리며 문을 여는 것이 좀 귀엽기도 했다. 겨우겨우 문을 여는 데 성공한 녀석들이 문에 매달린 채 또 한 번 민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민호는 사실 어린 아이들을 다루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동생도 없어서인지, 오히려 친구나 어른과 어울리는 쪽이 편했다. 하지만 이제 내내 봐야 할 이웃 사촌인데, 인사라도 한마디 건네야 할 것 같았다.
“이사 왔어?”
“응.”
“이름이 뭐…….”
“…….”
물론 민호의 다음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곤 다시 얼굴도 안 보여준 채 쌩하니 집 안으로 사라졌다. 까르르 웃는 소리가 잠깐 들릴 분이었다. 동글동글하고 작은 뒤통수를 따라가던 시선이 닫혀버린 문에 막혀버렸다. 아. 민호는 혹시 자기가 뭔가 잘못했나 싶어 뒤통수를 문질렀다. 잠깐 밖에 서서 기다렸지만, 다시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상한 집이 이사를 왔네.’
민호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문을 열었다. 적당히 빨랫감을 세탁기에 던져놓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조금 남아있는 과자를 꺼내서 우물거리며 소파에 늘어져 있으니 시간이 정말 빠르게 지나갔다. TV 채널을 이리저리 바꿔봤지만, 재밌는 것은 하지 않았다. 지루하게 흘러나오는 광고를 자장가 삼아 막 잠에 빠지려는 순간 현관문이 다시 열렸다. 다리를 번쩍 들었다 튕기듯 일어난 민호가 현관을 쳐다보며 웃었다.
“오셨어요?”
“왔니? 오늘은 조금 일찍 온 모양이구나.”
“자율 연습이라 적당히 하다 왔지 뭐.”
“저녁은?”
“아직요.”
자연스럽게 마트 쇼핑백을 받아든 민호가 부엌으로 걸어갔다. 이것저것 물건을 꺼내고 정리하는 손길이 익숙했다. 뉴트가 왔을 땐 텅텅 비어있던 냉장고에 음식과 재료가 가득 찼다. 뭔가 뿌듯한 얼굴로 냉장고 문을 닫은 민호는 자연스럽게 앞치마를 하고 식탁에 앉았다. 간단한 재료 준비를 돕던 손이 잠시 멈췄다. 손엔 껍질을 깎다 만 감자가 들려있었다. 잠시 뭔가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엄마.”
“왜 그러니?”
“옆집 이사 온 거야? 아까 자다가 시끄러워 깼는데.”
“그래. 아침에 나가다 이사 온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시간이 꽤 걸린 모양이네.”
“그런가 봐”
잠시 대화가 끊기니 그 빈 공간을 통통 야채를 써는 칼 소리가 채웠다. 민호도 남은 껍질을 마저 깎았다. 뽀얗게 속살을 내민 감자를 한데 모아놓은 민호가 뭔가 말을 하려 했지만, 엄마가 조금 더 빨랐다.
“애들이 쌍둥이더라.”
“쌍둥이?”
“그래. 저 나잇대 애들은 안 그래도 눈만 떼면 사고 치는데, 애가 둘이니 저 집도 힘들겠어.”
“…그랬구나.”
아. 민호는 그제야 왜 똑같은 녀석이 둘인지 알아챘다. 어쩐지. 너무 피곤해서 헛것을 본 건가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진실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하지만 귀엽다는 생각보다 사내애가 둘이라는 사실이 더 크게 다가왔다.
“…시끄럽겠다.”
“너도 뉴트랑 붙어 다닐 땐 시끄러웠어.”
“…….”
“다들 쌍둥이 아니냐고 했던 건 생각 안 나니.”
“뭐…그러니까”
민호는 괜히 말을 우물우물 집어삼켰다. 저런 말을 들으면 사실 할 말이 없었다. 어릴 적 둘이서 사고를 안 쳤다고 말하면, 엄마한테 미안했다. 얼마나 활동적인지, 자기 몸이 다치지 않으면 꼭 어딘가 하나씩 부수고 돌아오는 것이 일상이었던 나날이 분명 있었다.
둘은 지겹게도 무릎을 갈았다. 달리다가 넘어지고, 놀다가 굴러서 항상 온몸은 상처투성이였다. 손바닥보다 더 큰 밴드를 무릎에 붙이고 절뚝거리는 민호 옆엔 항상 뉴트가 있었다. 그런 둘은 다들 한데 묶어서 부르곤 했다.
“…….”
여기까지 생각하니, 시끄럽겠다고 말한 것이 조금 미안해졌다. 낯을 가리는 건지 대답도 제대로 안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어차피 이웃이 된 거 그래도 좀 잘 지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저녁을 먹고 방으로 돌아왔다. 적당히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침대에 누웠다. 그런 민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기라도 한지 뉴트에게 메일이 왔다. 액정에 뜨는 팝업 창을 바라보던 민호가 껄껄 웃으며 잠금을 풀었다.
“와, 이 타이밍 봐라.”
민호는 한 손으로 팔베개를 하고 문자에 답장했다. 남자아이들이 으레 그렇듯 군더더기 하나 없는 직설적인 답장이었다. 몇 번 더 문자가 왔다 갔다 했다. 특별할 것도 없는 대화였다. 내일 훈련 일정이라던가. 몇 시에 잘 거냐. 일찍 자라. 알게 뭐냐. 투덜거리면서도 하나하나 답장을 하던 민호가 자판을 누르던 손을 뚝 멈췄다. 방금 도착한 문자를 찬찬히 읽으면서 뭐라고 보내야 할지 고민했다.
「그래서 옆집 애들은 어때?」
뭐라고 해야 하지. 사실 얼굴만 봤을 뿐 그렇게 친해진 것도 아니었다. 잠시 고민하는 새 어지간히 궁금한데 연속으로 문자가 도착했다. 아, 이 귀찮은 놈. 민호는 속으로 이를 갈며 자판을 두들겼다.
「뭐가」
「뭐긴 뭐야. 이사 온 집. 어떠냐고.」
「그걸 알아서 뭐하게.」
「궁금하잖아」
「그냥 애들이 있어 쌍둥이.」
「쌍둥이?」
「그래」
민호는 여기까지 답해주다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쉼 없이 울리는 진동을 애써 무시하고 눈을 감았다. 저 녀석은 남의 집 일에 뭐 저렇게 관심이 많은지. 항상 그러진 했지만, 이번엔 쌍둥이란 단어에 반응한 것이 틀림없었다. 징징 울리던 진동이 잦아들 때쯤 민호는 조용히 핸드폰을 뒤집었다. 난 지금 자는 거야. 몇 개나 쌓인 문자 팝업 창이 눈에 들어왔지만, 지금 답해주기엔 너무 말이 길어질 것 같았다.
침대에 누워서 귀를 기울여 봤지만, 딱히 시끄러운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 우리가 정말 시끄럽긴 했구나. 자신이 저 나이 정도 됐을 대 집에서 어떻게 하고 놀았는지 생각하던 민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곤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옆집은 꽤 얌전한 아이 같았다.
‘아직 집이 낯설어서 그럴 수도 있지.’
좀 시끄러워도 귀엽게 봐주리라 마음먹었다. 그 흔한 TV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집은 그저 비어있는 것 같았다. 인기척이라도 들리거나 뭔가 청소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자 급격하게 졸음이 밀려왔다. 일찍 일어난 탓이라 생각하던 민호는 어느새 꿈속에 빠져들었다. 잠에 막 들려는 그 순간 조용히 들리는 아이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반쯤 넘어간 의식을 잡기엔 역부족이었다.
“…….”
조만간 꼭 한번 제대로 말을 붙여봐야지. 이 생각을 마지막으로 민호는 완전히 잠에 빠져버렸다.
***
어제 시끄러웠던 만큼, 오늘도 소란스러울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뉴트가 익숙한 듯 집으로 쳐들어올 때까지 옆집은 조용하기만 했다. 사내애들은 보통 뛰어놀거나 장난을 치지 않던가. 괜히 긴장하고 잔 탓에 평소보다 일찍 깬 민호가 어쩐지 억울한 얼굴로 핸드폰 시계를 확인했다. 알람이 울릴 때까진 삼십 분도 넘게 남아있었다. 억울해. 베개를 껴안고 다시 자세를 잡으며 누웠지만, 완전히 깨어진 잠은 영영 사라진 건지 눈이 감기질 않았다.
“…….”
이 억울함을 어디에 풀어야 할까. 애써 잠들려고 노력해봤지만, 모두 헛수고였다. 민호는 이리저리 뒤척이다 결국 일어났다. 아, 더 자야 하는데. 어제부터 왜 이렇게 아침잠을 방해하는 것들이 많은지 알 수 없었다. 그나마 방학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한 적은 처음이었다. 잔뜩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있다 핸드폰을 들었다. 그제야 어제 답장을 하지 않은 문자가 눈에 들어왔다. 톡톡. 자판을 두드려 짧은 답장을 보내고 참대에 다시 누워버렸다.
“…아, 어제 오늘 나한테 왜 이러냐.”
이리저리 자세를 바꾸며 베개만 쥐어뜯던 민호는 잠시 조용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잠이 완전히 깬 얼굴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오늘은 일찍 출근하신다 했다. 꽤 일찍 일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집은 비어있었다.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꿀꺽꿀꺽 마셨다. 반절도 넘게 마신 우유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갑자기 생긴 이런 애매한 여유 시간엔 도대체 뭘 해야 할까. 민호는 눈을 깜박거리며 거실을 바라볼 뿐이었다.
“올 때가 됐는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누군가 문을 쾅쾅 두드렸다. 그러더니 익숙한 듯 비밀번호를 누르려 했다. 야, 나 일어나 있어. 민호가 문밖을 향해 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끔한 모습의 민호가 문을 열어주자 뉴트는 꽤 놀란 눈치였다.
“웬일이냐?”
“그냥 자다 깼어.”
“뭐 좋은 일이라도 생겼어? 아침부터 일어나 있는 모습을 다 보고.”
“…….”
“옆집 쌍둥이들 때문에 그래?”
“뭐?”
“어제 답장도 안 하더니.”
이 녀석은 분명 이게 궁금해서 준비하자마자 달려온 것이 분명했다. 민호는 잠깐 머리가 아팠다. 미간을 손으로 주무르면서 뉴트의 입을 막았다.
하지만 이 정도로 포기할 녀석이 아니었다. 꼬치꼬치 캐묻는 녀석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면서 짐을 챙겼다. 방까지 따라 들어와서 민호의 어깨를 잡은 뉴트가 한 번 더 물어봤다. 사실 이 정도 되면 그냥 말해줄 법도 한데, 그러기 싫었다. 사실 알고 있는 것도 한손으로 겨우 꼽을 만 했지만.
“도대체 쌍둥이가 어떻기에 이렇게 말도 안 해줘?”
“…….”
“너 오늘 이상하다?”
“그런 게 아니고…….”
“아니고?”
또 말려들었다. 아아. 민호가 한숨을 푹 쉬었다.
“아니면 뭔데?”
“그냥 어린애들이야. 그것도 엄청 어린애들.”
“몇 살?”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뭐야. 어제 인사라도 해본 거 아니었어?”
“내가 언제 그랬어.”
뉴트는 대놓고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기껏 궁금해서 일찍 달려왔다고 구시렁대더니, 곧 어린애란 소리에 집중했다. 민호는 어쩐지 일이 귀찮게 돌아갈 것 같았다. 이 녀석이 사고를 치기 전 빨리 데리고 운동장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친구를 끌고 집 밖으로 나왔다. 문을 닫으며 한숨 돌리려는 순간 뉴트가 눈을 반짝였다. 민호는 이쯤에서 뉴트를 붙잡아야 했다.
“얼굴 궁금해. 애들 볼래.”
“뭐? 미쳤어?”
“너도 얼굴 보는 김에 인사 하면 되겠네.”
“야!!”
민호가 뉴트를 잡아채는 손보다 뉴트가 문을 두드리는 속도가 조금 더 빨랐다. 쾅쾅. 조용한 아침을 찢으며 울리는 엄청난 소리에 민호는 그대로 주저앉고 싶었다. 아니 그대로 장난인 셈 치며 도망가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몰랐다. 민호한테 뒷목을 잡힌 뉴트는 내내 웃고 있었다.
‘이 새끼는 여기 살지도 않으면서, 왜…….’
어쩐지 울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도 소리를 못 들었는지, 옆집은 조용하기만 했다. 장난인 줄 안 건가. 다행이다. 이 순간 흐르는 정적이 이렇게 기쁠 줄이야. 민호는 뉴트를 확 끌어당겼다. 조금이라도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너 이따 가서 보자.”
이를 꽉 깨물면서 귓가에 한마디를 남기고 가방끈을 휙 잡아당겼다. 왜! 왜! 버둥거리는 뉴트를 끌고 막 한걸음 내딛으려는 순간 옆집 문이 열렸다. 민호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가방 끈을 잡은 민호의 손을 떼려고 하던 뉴트가 빼꼼 열린 문을 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
“아…저기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
“이 녀석이…….”
“…….”
차마 얼굴을 볼 수 없어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연실 죄송하단 말을 하던 민호는 이상한 분위기에 주춤주춤 고개를 들었다. 뉴트는 이미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웃다 못해 반쯤 주저앉아있었다. 그리고 민호의 시선이 닿는 곳엔 아무도 없었다.
“…응?”
결국, 주저앉아서 흐느끼기 시작하는 뉴트를 냅다 째려봤다. 저 녀석은 누구 때문에 이러고 있는데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따라 시선이 점점 내려갔다. 보통 일반 어른의 키보다 훨씬 아래. 그러니까 민호의 배꼽쯤 오는 높이에 작은 머리통이 보였다. 아. 민호는 그제야 문을 연 사람이 어른이 아님을 깨달았다.
“…시끄러워서 깼니?”
“…….”
“그러니까…아…….”
쌩한 표정으로 민호를 바라보는 녀석은 좀처럼 말을 하지 않았다. 민호는 어린애 잠을 깨운 건가 싶어서 안절부절못할 뿐이었다. 내가 미쳐. 뭔가 사소한 말 한마디 들리지 않는 어색한 상황은 좀처럼 풀러질 것 같지 않았다. 이대로 그냥 기절하는 것이 나을지 몰라. 온갖 생각이 다 들 무렵 안쪽에서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토마스 뭐해!”
“…넌 들어가 있어.”
“형! 안녕?”
“어…그…그래. 안녕.”
“둘이 뭐해?”
뒤에서 자기와 똑같이 생긴 녀석을 와락 껴안은 아이가 눈을 반짝이며 민호를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좀 발랄한 아이가 끼어드니 상황이 나아졌다. 민호가 어색하게 손을 흔들어주자 아이가 방실방실 웃었다. 하지만 문을 붙잡고 선 녀석은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내내 경계하는 표정으로 민호와 뉴트를 바라봤다. 들어가라는 소리를 듣지 않고 기어코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온 녀석이 민호를 보면서 눈을 깜박였다.
“형 왜?”
“아니…그러니까.”
“놀아주려고?”
“토미. 들어가 있어.”
“응?”
이 녀석도 만만치 않게 말을 안 듣는 녀석 같았다. 계속 움직이지 않고 문을 잡고 있던 녀석이 타박타박 걸어 나와 똑같은 손을 꽉 쥐었다. 으응. 토마스. 왜. 잔뜩 찡그린 표정으로 칭얼거렸다. 하지만 바로 옆에 보이는 쌍둥이의 표정에 금세 시무룩해져서 뒤로 물러섰다. 괜히 작은 발로 바닥을 문지르는 것을 보던 민호는 빨리 이 자리를 떠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너희들 이름이 뭐야?”
“뉴트!”
“왜. 어차피 나온 거 통성명이라도 하지 뭐. 난 뉴트고, 저기 옆에 서 있는 시커먼 애는 민호라고 해. 너희는?”
“…….”
“말 안 해 줄 거야?”
“난 토미고, 얜 토마스야!”
“토미!”
“하지만 형들도 이름 알려줬잖아.”
눈을 반짝거리며 한마디 보태던 녀석은 또 축 처진 채 물러났다. 도통 어린아이 같지 않은 표정을 한 토마스가 토미의 손을 잡아끌었다.
“됐어. 들어가자.”
“…….”
“어서.”
“…알았어.”
물론 둘이 집을 들어가긴 위해선 생각보다 높이 달린 손잡이를 잡아당겨야 했다. 쌩한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던 아이가 낑낑거리며 손잡이를 잡으려 하는 걸 보던 뉴트가 홀린 듯 다가섰다. 그리곤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어줬다.
“…….”
“도와준 거야.”
“…….”
눈을 깜박이며 뉴트의 얼굴을 바라보던 토마스가 한마디 말도 없이 집 안으로 쏙 들어갔다. 뒤이어 끌려가던 토미가 계속 눈치를 보고 있었다. 다시 문 밖으로 몸을 쏙 내밀었다. 그리곤 손을 붕붕 흔들었다.
“형들. 잘 가!”
“그래.”
뉴트가 웃으면서 인사를 받았다. 민호는 여전히 정신이 없었다. 뒤통수에 한마디 말을 더 얻어맞은 녀석이 아쉬운 표정으로 문을 닫을 때까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뉴트는 그런 민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뭐해. 가자.”
“너…진짜.”
“왜?”
“넌 여기 사는 것도 아니면서 아침부터 그렇게 소란을 피우냐.”
“결과적으론 이웃집끼리 얼굴 텄잖아. 애들 귀엽던데 뭐.”
“말을 말자. 너 진짜…….”
“그, 토미? 토마스? 걘 너 좋아하는 거 같던데.”
“좋아하는 게 아니고 그냥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신기한 거겠지.”
민호가 뉴트의 말을 잘라냈다. 뉴트는 잠시 하늘을 바라보다 저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곤 표정이 어두워졌다.
“근데…말이야.”
“왜!”
“우리 늦었어.”
“…….”
“시간 봐.”
웃으면서 핸드폰을 들이대는 녀석을 한 대 치고 싶었다. 지금 누구 때문에 늦은 건데! 정신을 차리고 나니 더 대책 없는 상황이었다. 소리 없는 비명이 울리더니 엄청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뉴트와 민호는 숨이 턱까지 닿을 정도로 달려서 간신히 지각을 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