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민호/토민호] Good - Bye Moebius 004
+) NOTICE
영화 기준으로 토마스가 초반 글레이더들과 함께 공터에 올라갑니다.
IF 책에 예민하신 분들은 피해주세요.
결과적으로 영화와 비슷한 줄거리지만, 중간중간 다른 방향으로 사건이 전개 됩니다.
선공개 분엔 없지만 이후 원고에 (후천적) 엠프렉 소재 및 모브X민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임신 이후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행복한 분위기는 아닙니다
적당한 망상과 설정 붕괴가 언제나 함께 합니다 ㅇㅅㅇ)9
어느정도까지 연재 후 뒷부분을 추가해 회지로 만들 예정입니다.
책이 나와도 연재한 분량 자체를 지우진 않습니다.
write. 환월
Good - Bye Moebius 004
“괜찮겠어?”
“괜찮다니까. 내 걱정 하지 말고, 할 일이나 잘하고 돌아와.”
“하지만…….”
“난 이제 러너가 아니야. 민호.”
“…….”
겨우 몸을 추스른 뉴트는 아직 낫지도 않은 채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갤리가 어설프게나마 만들어준 목발을 짚은 채 입술을 깨물려 일어나서 민호를 바라보았다. 좀처럼 곁을 떠나지 못하는 녀석을 보면서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다리를 디뎠다.
“…아.”
하지만 한 번 부러진 다리가 쉬이 붙진 않았다. 제대로 된 의료 기구 하나 없는 곳에선 평평한 나무를 대고 꽉 묶어두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벌써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얼굴을 보는 민호의 표정은 잔뜩 죽어갔다. 미안. 도대체 뭐가 미안한 건지. 뉴트는 친구이자 동료인 녀석의 얼굴을 보다 한숨을 쉬며 웃었다.
“미안하면 가서 출구나 찾아와.”
“…….”
“난 정말 괜찮아.”
잔뜩 쳐져서 밖으로 나가는 녀석을 보고 나서야 뉴트를 침대 위로 쓰러졌다. 아무래도 다리가 제대로 낫지 않는 느낌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손을 쓸 수 없었기에 그저 무사히 뼈만 붙었으면 했다. 왜 살아있었을까. 가끔 그런 생각도 했다. 공터에서 불편한 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살아남기 힘든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목숨이 붙어있는데,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뉴트가 공식적으로 러너에서 물러난 뒤에도 별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러너들의 삶은 항상 팍팍했다. 하는 일은 언제나 똑같았다. 아침 해가 뜨기 전 하나둘 자리를 털고 일었다. 그리고 씻고, 밥을 먹으면서 미로 안에서 먹을 최소한의 식량을 챙겼다. 그런 다음 민호의 지시를 따라 입구로 이동했다. 그 다음은 보지 않아도 항상 같았다.
“다녀올게.”
“무사히 돌아와.”
“그래.”
동료들과 짧은 인사가 끝나자마자 민호와 러너들은 미로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입구가 닫히기 전까지 지옥 같은 미로를 헤매며 지도를 만들었다. 러너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무사히 돌아오라는 것은 특히 중요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와라. 살아서. 몇 번이나 들은 이야기였다. 미로를 달리는 내내 공터 친구들의 걱정이 따라붙었다. 시간마다, 그리고 하루가 지날 때마다 구조가 바뀐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미로를 헤매다 보면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 오기 마련이었다. 이땐 절대 뒤를 돌아보거나 욕심을 내면 안 됐다. 최대한 빠르게, 그리고 안전하게 공터로 돌아가야 했다. 밤에 미로에서 살아남은 녀석은 아직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사람의 힘으로 쉽게 떨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은 확실했다.
“돌아가자.”
“…….”
“조금 늦었어. 시간에 맞춰 돌아가려면 빠르게 달려야겠다. 모두 날 바짝 따라와 뒤처지면 끝이니까.”
민호는 제법 단단한 목소리로 러너들을 이끌었다. 노련한 사람이 있다면 가끔 구역을 나눠서 돌긴 했지만, 지금은 아직 그럴만한 녀석이 없었다. 결국, 지도를 만드는 일이 조금씩 지체됐다. 하지만 이정도로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믿었다. 뒤에서 백업하는 러너들은 민호가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한 주변 상황을 기억하고 메모했다.
민호를 필두로 러너들이 우르르 입구를 빠져나왔다. 하나. 둘. 셋. 다섯까지 세고 돌아보자 커다란 태엽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 큰 문을 움직이기 위해 얼마나 커다란 기계들이 붙어있을까. 엄청난 소리를 내며 닫히기 시작하는 문틈으로 강한 바람이 불었다. 민호는 눈을 찌푸리며 입구가 닫히는 것을 내내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도 무사히 돌아왔구나.”
신발엔 모래 바람이 묻어 뽀얗게 먼지가 앉았다. 문이 닫히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다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태엽이 돌아가는 소리도 함께 멈췄다. 잔뜩 지쳐 바닥에 늘어진 러너들은 조금 남은 물통을 털었다. 몇 방울 떨어지지 않는 물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앓는 소리를 했다. 민호는 반쯤 남은 물을 던져주었다.
“…조금만 쉬다가 보고 후 바로 오두막에서 만난다.”
“알았다고, 대장.”
“난 대장이 아니야.”
“하지만 미로에선 민호가 대장이니까.”
“대장은 알비지.”
민호는 실없는 소리를 툭 던졌다. 이런 짧은 휴식이 그들이 가진 전부였다. 미로에서 무사히 빠져나오면 온몸이 비명을 질러댔다. 하루 종일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뛰어다니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다시 일어서서 숲 속 한가운데 지어진 러너의 오두막으로 향했다. 지도를 만들기 위해 준비된 곳은 러너들의 유일한 보금자리였다. 이곳은 러너 외엔 아무도 들어오지 못했다.
“오늘 머리가 왜 이렇게 아프지.”
“무슨 일이야?”
“미로에 들어갔다 나왔는데…머리가…좀.”
“난…오늘도 별다른 일이 없었는데. 왜 너만 이러지. 혹시 어디 세게 부딪히거나 했어?”
“아니. 그런 거 없는데…아.”
오늘따라 유난히 머리가 아프다고 하는 녀석들을 보던 민호는 뭔가 이상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억지로 이끌고 가는 것도 만만치 않게 힘이 들었다. 지도에 대한 브리핑만 끝나고 쉬자고 하는데도, 영 집중을 하지 못했다. 민호가 그런 녀석의 얼굴을 쳐다본 순간, 흠칫 놀라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케인?”
“…….”
“왜 그래? 너…….”
머리를 붙잡고 끙끙거리던 녀석이 얼굴을 들었다. 한껏 충혈된 눈엔 실핏줄이 툭툭 터져있었다. 정말 아픈가 싶어 민호는 답지 않게 놀랐다. 하지만 상태가 이상했다. 금방이라도 누군가의 급소를 물어뜯을 것 같이 으르렁대는 녀석의 입에선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새빨간 안광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
“민…호. 나…….”
“…….”
비틀거리는 녀석을 부축하던 민호가 순간 발을 잘못 디디고 그대로 넘어졌다. 흙투성이 바닥에 뒹굴던 두 녀석은 서로 엉켜서 좀처럼 일어나지 못했다. 녀석이 민호의 어깨를 턱 잡았다.
“케인?”
“…….”
오두막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는, 그곳에 소속된 러너들만 알 수 있었다. 그렇다 보니 민호는 점점 말이 없어졌다. 러너에 관한 일은 굳이 바깥으로 알리지 않아도 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나마 민호가 그렇게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공터 사람들이 모두 믿어주기 때문이었다. 목숨을 내놓은 채 묵묵하게 자기 할 일만 하는 녀석이 말이 좀 없다고 뭐라고 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민호는 누구보다 더 많이 미로를 헤매고 다녔다. 무리 앞에 서는 사람이었기도 했다. 다른 러너들이 조금만 몸 상태가 나쁜 것 같으면 곧장 침대에 누워있을 것을 명령했다. 오늘은 나오지 않아도 괜찮아. 물론 괜찮다고 일어나는 녀석들이 많았다. 하지만 한 번도 그런 녀석들을 데리고 미로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 민호를 보며 주변 사람들은 몸을 챙기라며 걱정했지만, 전혀 듣지 않았다. 러너 팀장은 언제나 남들보다 몇 번이나 더 빠르게 생활을 반복하고 있었다.
“…민호!”
“…….”
“또 못 들은 척하네.”
프라이가 민호을 보며 쯧쯧 혀를 찼다. 사람들이 얼마나 걱정을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민호가 미로에 들어가지 않는 날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아니. 애초에 이 공터에서 민호만큼 미로 안의 구조를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도 없었다.
비가와도. 바람이 불어도. 민호는 언제나 같은 옷에 같은 짐을 가지고 미로 앞에 서 있었다. 정확히 문이 열리기 오분 전. 눈을 감고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중얼 읊었다. 바깥으로 소리가 들리지 않는 조용한 입 모양이 보일 뿐이었다. 민호가 외우는 것은 오두막에서 조금씩 정리하고 있는 러너의 기도문이었다. 긴 듯 짧은 기도가 끝나면 기괴한 소리와 함께 지옥의 입구가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했다. 민호는 입구가 완전히 열리는 것을 기다리는 시간조차 아까운지 사람이 통과할 만한 넓이가 되자 재빠르게 뛰어 들어갔다.
***
“…허억”
간신히 트인 귓가에서 엄청나게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약에 취해 있던 토마스가 눈을 뜬 것은 어두컴컴한 통로 안이었다. 기계가 서로 맞부딪히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울렸다.
“…여긴.”
연신 눈을 깜박여 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몸이 빠르게 위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멍하니 덜컹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잔뜩 긴장한 몸이 천천히 주변 소리에 반응했다.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까맣게 점멸되어있던 뇌에 파직 전기가 튀었다.
순간 덜컹거림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곧바로 현기증이 핑 돌았다.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서 답답한 속을 왈칵 게워냈다. 우웨에엑. 먹은 것도 없는지 위액만 뚝뚝 떨어졌다.
“…으.”
더는 나올 것이 없을 때까지 모두 다 토해낸 토마스는 온몸에 힘이 빠졌다. 그대로 바닥에 늘어졌다. 차라리 이대로 누워있으면 나을 텐데, 그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토마스를 태우고 올라가는 것이 통로 요철에 걸리기라도 하면 심하게 요동쳤다. 의지할 것 하나 없는 공간에서 토마스는 여기저기 굴러다니기 바빴다.
“…….”
와장창. 단단한 철장에 되게 몸을 부딪치고 나서야 간신히 멈출 수 있었다. 몸을 받아준 것을 더듬어 보니 밧줄이었다. 이리 저리 굴러다니는 동안 거친 밧줄에 팔이 쓸린 걸까. 얼얼한 아픔이 스물 스물 팔을 타고 밀려 올라왔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야. 토마스는 밧줄 더미에 누운 채 간신히 숨을 고르며, 정신을 차리려 했다.
하지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억을 통째로 들어낸 기분이었다. 마치 전원을 껐다 켠 것처럼 기억의 한 곳이 비어있었다. 아무리 생각하려 해도 점점 멀어지기만 했다. 가장 중요한 부분만 까맣게 지져진 것 같았다. 도대체 뭐였지. 뇌의 한구석이 뻥 뚫려있었다. 게다가 덜컹거리며 빠르게 위로 올라가는 상자에 실려 있다 보니 머리가 어지러워서 좀처럼 생각의 중심을 잡을 수 없었다.
“도대체…이게 무슨.”
간신히 늘어져 있던 몸을 뒤집었다.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앉아 사방을 더듬어봤다. 여전히 머리는 어지럽고, 속은 울렁거렸다. 손에 만져지는 것은 단단한 철장뿐이었다. 사방이 단단히 막힌 박스형 철장은 토마스와 몇 가지 물품을 실은 채 한없이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이 박스는 아래도 철장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철장 틈 사이로 보이는 어둠은 끝없이 이어졌다. 너무 어두워서 오히려 공포심조차 들지 않았다. 차라리 그대로 잡아먹힐 것 같았다. 중간 중간 달린 희미한 비상등만 깜박거릴 뿐이었다.
“…누구 없어요?”
토마스가 위를 단단히 막은 철장을 주먹으로 쾅쾅 두드렸다. 하지만 철장은 열릴 것 같지 않았다. 누구 없어요! 도와줘요! 꽉 쥔 주먹에 시퍼렇게 멍이 들 정도로 두드리던 토마스가 다시 한 번 덜컹거리는 통에 그대로 앞으로 넘어졌다. 와장창 소리가 날 정도로 철장에 세게 부딪힌 몸은 얼얼하게 아팠다. 몸이 성한 곳이 없는 것 같았다. 그 순간 귓가에 찢어지는 것 같은 낯선 울음이 들렸다.
“으아악!”
토마스가 놀라서 펄쩍 뛰었다. 바로 옆에 있는 우리엔 돼지가 들어있었다. 덜컹거리는 좁은 곳에 갇혀있는 탓에 거친 소리를 내며 흥분하는 돼지의 울음소리는 잦아들기는커녕 점점 높아져만 갔다. 시끄럽게 울어대는 소리가 귀를 찔렀다. 시끄럽고 정신이 없어 조금이라도 돼지우리에서 멀어지려 했지만, 그것도 쉽지 않을 만큼 상자는 좁은 곳이었다. 밧줄과 드럼통. 그리고 돼지와 몇 가지 생활필수품을 담은 상자는 점점 더 속력이 빨라지고 있었다. 통로는 여전히 길기만 했다.
“거기 누구 없어요? 좀 도와주세요!”
토마스가 목이 찢어질 만큼 소리 질렀지만, 점점 빨라지는 시끄러운 기계 소리에 완전히 묻혀버렸다. 뭔가 번쩍이는 것이 있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통로의 끝은 단단히 막혀 있었다. 와중에 박스는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주변 경고등이 새빨갛게 빛나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반짝거리는 붉은 조명이 점점 강해질수록 안에 든 사람은 더욱 당황했다. 아무리 봐도 단단히 막혀있는 천정은 열릴 것 같지 않았고, 상자는 점점 빠르게 천장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
토마스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눈을 질끈 감은 채 곧 닥칠 엄청난 고통에 대비했다. 으으윽.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절로 얼굴이 찡그려졌다. 최대한 몸을 보호하려는 몸짓이 무색할 만큼 경고음은 점점 커졌다. 당장 상자가 납작하게 찌그러질 것 같았다.
“…….”
엄청난 소리와 함께 온몸이 부딪힐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별다른 고통은 없었다. 아직도 몸을 웅크리고 있던 토마스가 조심스럽게 실눈을 뜨고 위를 쳐다보았다.
“…언제 멈춘 거지.”
천장에 바짝 붙은 채 멈춰 있는 상자는 이젠 작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좀처럼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금방이라도 상자가 아래로 뚝 떨어질 것 같은 불안함이 있었다. 토마스는 한껏 당황한 얼굴로 들을 사람이 없는 말을 계속해서 소리쳤다. 누구 없어요? 저기. 밀폐된 공간도 아닌데 숨이 가빠지다 못해 점점 거칠어졌다.
“도대체 뭐가…어떻게 된 거야.”
이제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불안하게 어둠 속에서 두리번거리던 토마스의 눈에 한줄기 밝은 빛이 쏟아졌다. 천장이 갈라지면서 두꺼운 철판이 밀려나자,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강한 빛이 쏟아졌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쉽게 뜰 수가 없었다. 일단 상황을 지켜보려고 했지만, 뭔가 심상치 않았다. 토마스는 한쪽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좀 더 구석으로 몸을 숨기기 시작했다.
“…….”
빛의 면적이 넓어질수록 목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강하게 내리쬐는 빛 사이로 하나둘 검은 인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점점 가까워지는 사람들은 제법 많은 숫자였다. 하나같이 빤히 내려다보며 서로 웃고 떠들었다. 시끄러운 기계 소리에 섞여드는 웃음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낄낄거리며 서로 토마스에게 뭔가 말을 걸거나 손가락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삼삼오오 등장하는 사람은 점점 늘어났다.
“…데리고 올라와.”
짧은 말 한마디에 익숙한 듯 철장이 열렸다. 토마스는 도망가고 싶었지만, 철장 안에서 도망갈 수 있는 공간은 한정되어 있었다. 물론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상자 보단 바깥이 더 안전할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낄낄 거리며 손가락질하는 녀석들에게 가고 싶진 않았다.
쾅. 쾅. 커다란 몸이 철장을 밟고 아래로 내려왔다. 익숙하다는 듯 토마스의 팔을 잡고 끌어당기는 소년의 표정은 영 좋지 않았다. 약하게 반항하는 것도 가소롭다는 듯 팔을 콱 움켜쥐었다.
“아파!”
“조용히 해. 신입.”
“…….”
“뭐해. 일어나. 여기 있다가 그대로 굶어 죽을래?”
“이거 놔!”
“어디서 투정이야!”
팔을 잡아끄는 힘이 강해서 더는 버틸 수 없었다. 급하게 일어나려다 다리가 풀린 토마스가 비틀거리며 철장에 얼굴을 박을 뻔했지만, 그다지 상관하지 않는 눈치였다.
토마스가 이곳이 어디 인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그대로 풀밭에 넘어졌다. 낯선 소년은 엄청난 힘으로 토마스를 밀어 넘어뜨렸다. 허겁지겁 몸을 돌려서 물러서려는 신입을 막아서는 다리들이 벽을 만들었다. 이미 둥글게 자신을 에워싼 사람들에게서 멀어질 수 없었다.
“키도 크고 그러니 요리 조수로 써야겠는데.”
“아냐. 저 녀석을 프라이한테 주긴 너무 아까워. 안 그래? 이번 신입은 뭘 시켜야 할까.”
“비실비실한 게 청소나 시키면 딱 알맞겠는데.”
“…이 녀석 잔뜩 겁먹은 것 좀 봐.”
“야, 신입. 뭐 하고 있어. 아직까지 상자 안인 줄 알고 있는 거야? 인제 그만 정신 차려.”
“…….”
시끄러운 목소리가 머리 위로 와르르 쏟아졌다. 이미 잔뜩 신난 녀석들은 토마스의 말을 들을 생각조차 없었다. 저마다 멋대로 한 마디씩하며 좋을 대로 낄낄거렸다.
그 중엔 발로 토마스의 몸을 툭툭 건드리는 녀석들도 있었다. 놀라서 팔딱팔딱 튀어 오르는 신입이 웃긴 모양이었다. 한 명이 건드리고 나면 다른 사람이 더 심하게 건드렸다. 토마스는 이 상황이 두려웠다. 정신을 차려보니 낯선 상자 안이었고, 그나마 예전 기억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간신히 탈출구가 열리려나 싶었는데, 갑자기 낯선 녀석들이 나타났다. 멋대로 끌어올리더니 이젠 주위를 둘러싸고 쉼 없이 압박하고 있었다. 토마스를 끌어내고 땅에 던진 녀석은 계속 사방을 돌아보며 뭐라고 말을 하고 있었지만, 그다지 좋은 소리는 아니었다. 게다가 잔뜩 당황한 토마스의 귀엔 제대로 된 사람 목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
“이 녀석 완전히 얼어붙었네.”
“가서 누가 민호 좀 찾아봐라.”
“야, 신입. 뭐하냐니까.”
점점 시끄러워지는 목소리는 단단하게 뭉친 채 토마스의 목까지 들어찼다. 그럴 때마다 알 수 없는 공포에 질린 눈이 심하게 흔들렸다. 토마스는 이 곳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그리고 그 순간 다리로 만들어진 울타리 한쪽에 작은 틈이 보였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온몸으로 다리들을 밀어내며 밖으로 빠져나갔다.
아이쿠. 몇 명이 큰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넘어졌다. 토마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지금 어디로 달리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이라도 저 수상한 무리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아무래도 우리 새로운 러너 감이 생겼나 보다!!!”
알 수 없는 말이 뒤통수에 납작 달라붙었다. 하지만 토마스를 몰아댈 정도로 시끄럽게 소리치는 것과는 다르게 누구 하나 뒤쫓아 오지 않았다. 마치 토마스가 뛰는 것을 구경하는 것 같았다. 시끌시끌한 목소리가 공터 안을 가득 채웠다.
“헉…헉.”
아무래도 사람의 체력은 항상 일정하지 않아서 달리면 달릴수록 숨이 점점 거칠어지고 눈앞이 뿌옇게 변했다. 순간 입에서 단내가 울컥 올라왔다. 너무 힘들어 당장 멈추고 싶었지만, 그러면 당장 뒷덜미를 잡혀 끌려갈 것 같았다. 게다가 어디로 도망가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앞만 보며 정신없이 달렸다. 고르지 않은 땅을 달리느라 사정없이 흔들리는 시선 속에서 가야 할 곳을 찾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었다.
‘…아.’
세상을 살면서 가끔 신기한 일이 있었다. 예를 들면 일이 생기고 나서야 뭔가 이것이 잘못됐다고 느끼는 순간이라던가. 그 순간 일어난 일이었다. 평평한 땅에 콱 박혀있는 정체 모를 것에 다리가 차였다. 아니 사실 그냥 발이 꼬인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속도를 멈추지 못한 몸은 그대로 중심을 잃고 몇 번이나 땅바닥을 굴렀다.
콜록. 땅바닥을 뒹구는 동안 흙먼지를 잔뜩 먹은 토마스가 비틀비틀 일어났다. 그제야 눈앞에 거대한 구조물이 보였다.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는 콘트리트 구조물은 금방이라도 토마스의 몸을 짓누를 것 같았다. 이건…도대체. 멍하니 일어선 채 사방을 둘러보는 신입은 곧 달려온 사람들에게 뒷덜미를 붙잡혔다.
그리고 제대로 된 항변 한 번 하지 못한 채 어딘가로 끌려갔다.
***
“거기서 머리 좀 식혀라. 신입.”
“아!”
“딴 생각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
“…….”
토마스는 진정하라며 구덩이에 던져졌다.
땅을 파고 나무로 살을 엮어 만든 공간은 마치 가축을 가둬두는 곳과 비슷했다. 몸을 숨길만 한 곳도 없는 협소한 공간에서 토마스는 최대한 구석으로 붙어 앉았다. 아직도 제대로 완성되지 않은 공터는 열악했지만, 그래도 조금씩 사람 사는 티가 나고 있었다. 토마스는 천천히 창살을 잡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
모두 각자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가끔 토마스가 갇혀있는 구덩이를 바라보며 뭐라고 소리치긴 했지만, 워낙 먼 곳에 있어서 제대로 들리진 않았다. 얼마나 갇혀 있었을까. 자신을 알비라고 소개한 소년이 토마스를 구덩이에서 꺼내주었다.
“내 이름은 알비야.”
“…….”
“애들이 다들 심심해서 그런 거야. 이제 공터에 관해서 설명해 줄게. 음…일단 뭔가 기억나는 것이 있어?”
“기억…이라.”
“아무거나 괜찮아. 예를 들어 네 이름이라던가.”
“내…이름?”
“그래.”
“…….”
토마스는 무척 불안해졌다. 분명 머릿속에 간질간질 맴도는 단어가 있는데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결국,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 녀석은 굉장히 불안한 표정으로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일종의 패닉 증상이었다. 답답한지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알비는 그런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다, 익숙하다는 듯 토마스를 다독였다. 공터에 처음 올라온 녀석들은 언제나 이렇게 반응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여기에 오게 된 이유도 잊었다. 물론 알비도 아직까지 그 이유를 찾지 못했지만.
“괜찮아. 그렇게 억지로 기억하지 않아도 돼.”
“…….”
“공터에 올라오면 다들 그래. 이건 평범한 현상이야.”
“…….”
“이름은 이틀 정도면 기억이 날 것이니 걱정하지 마. 그 들은 최소한의 자비로 이름 정도는 알려 주니까.”
“…그들? 그들이 누구지?”
“누구긴. 우리를 이곳으로 보낸 작자들이지.”
씹어 먹을 듯 불특정 다수에게 적개심을 보이던 알비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 토마스는 순순히 그 손을 잡고 구덩이에서 빠져 나왔다. 그리고 아직 다 만들어지지 않은 공터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알비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절대 어겨선 안 되는 사항 세 가지를 몇 번이나 강조했다. 토마스는 의외로 쉽게 이해했다. 그리곤 무의식적으로 누군가를 찾으려는 듯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뉴트는 농작물을 보러 밭으로 간 상태였고, 민호는 여전히 미로 안에 있었다.
“…여긴.”
토마스는 아직도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아직 제대로 공터를 일구지 못한 녀석들에겐 신입을 신경 써줄 만한 여유가 없었다. 황망해 하는 것은 내버려 두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토마스를 발견한 뉴트가 다리를 절뚝거리며 걸어왔다. 토마스는 남들과는 조금 다른 걸음걸이에 뉴트의 발목을 한참이나 쳐다보고 있었다.
“…….”
“신입이냐? 정신이 들었어?”
“…응.”
“여기저기 구경을 하는 것은 좋은데, 너무 헤집고 다니지는 말도록 해. 아직 공터에 할 일이 많아서 다들 예민하니까.”
“…….”
“왜?”
뉴트가 눈을 찌푸리며 토마스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리고 그 시선의 끝이 자신의 발목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곤 고개를 들어 토마스를 바라보았다. 토마스는 머쓱한 표정으로 시선을 땅으로 옮겼다. 눈치가 없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예민한 것 같기도 했다. 다행히 다른 곳은 큰 상처 없이 아물어서, 크게 다쳤던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회복되었다. 많이 티가 나지 않을 거로 생각했는데, 뼈가 완전히 부서졌던 발목은 그렇지 못했다. 간신히 뼈가 붙긴 했지만, 예전처럼 걸을 순 없었다.
“내가 이런 모습이라 해도 너보단 이곳에서 오래 살아남을 거다.”
“아니…난.”
“됐다. 오늘 갓 올라온 신입한테 무슨 말을 할까.”
“…….”
뉴트는 괜히 퉁명스럽게 말을 받았다. 물론 너무 긴장하지 말라는 뜻도 담겨 있었지만, 잔뜩 낯설어하는 토마스가 그런 것까지
까맣고 반질거리는 눈은 미로에 닿아있었다. 자연스럽게 같이 미로를 바라보던 토마스의 눈에 커다란 입구에서 뛰어나오는 인영이 들어왔다. 뉴트는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토마스는 그런 뉴트의 뒤를 비척비척 따라갔다.
잔뜩 지친 표정으로 공터로 들어온 사람이 몇 번이나 마른기침하며 물을 찾았다. 후들후들 떨리는 발로 간신히 버티던 녀석이 큰 소리를 내며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죽겠다. 옆에 같이 주저앉은 사람들도 간신히 몸을 버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모습을 보며 익숙한 듯 물통을 던져주던 뉴트의 얼굴은 아까보다 훨씬 나았다. 토마스는 더는 다가가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멀어질 수도 없었다.
“민호. 무사했구나.”
“당연하지. 다녀왔다. 뉴트.”
“오늘은 뭐 특별한 일이라도 있었어?”
“그럴 리가. 늘 그랬던 것처럼 미로와 담쟁이 넝쿨뿐이야. 새로운 것이 좀 있어야 할 텐데.”
“역시 아직 출구를 찾기 힘든 걸까.”
“저기 서 있는 녀석은 누구야?”
“아, 오늘 올라온 신입이야. 좀 진정하라고 구덩이에 가둬놨다가 이제야 좀 풀어준 참이지.”
토마스는 흘러가는 바람에 자기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진 않았다. 민호도 신입이 올라오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다. 그래서 더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차피 정신없을 텐데 자기까지 굳이 이래라저래라 할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신입이 여기저기 불려 다녀봤자 별로 좋을 것도 없었다.
둘의 첫 만남은 그리 길지 않았다.
민호는 미로 안에서 보고 듣고 외운 것을 간단하게 보고한 후 정리하기 위해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러너는 공터로 돌아와서도 언제나 할 일이 많았다. 민호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며 토마스 곁을 스쳐 지나갔다. 토마스는 잠자코 그 뒷모습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
어리바리한 신입이 올라올 때마다 하나하나 눈길을 주기엔 러너의 하루는 너무 짧고 괴로웠다. 민호는 저녁 먹을 시간이 되어서도 돌아오지 않았다. 주춤주춤 뉴트 옆에 붙어 앉은 토마스는 민호에 관해 물었다. 러너. 미로. 출구. 신입은 알고 싶은 것이 참 많았다. 그런 질문을 하나하나 받아주기 힘든 뉴트는 입에 먹을 것을 물려주며 쓰러져있는 기다란 통나무에 주저앉았다. 갑자기 입으로 들어온 고기를 뱉지도 못하고 그대로 우물거리던 녀석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하지 마.”
“애…어애서.”
“신입이 호기심이 생겨서 이리저리 쑤시고 다니면 애들 눈 밖에 날 뿐이야. 알았어?”
“…….”
“다들 예민할 시기니까. 너도 아마 내일이면 할 일이 정해질 거야. 그러니까 이게 마지막 휴식이라고 생각해.”
“…….”
“쉴 수 있을 때 쉬는 게 좋아.”
뉴트는 수저로 대충 음식을 퍼서 입으로 가져갔다. 신입을 환영해 주기엔 공터 생활이 영 녹록지 않았다. 계속 가축들이 올라오고 있지만, 그것들을 잡아둘 우리마저도 모자란 상황이었다.
토마스는 아무것도 모른 채 밤을 맞았다. 여기서 자면 된다고 내준 곳은 나름 해먹 모양을 내서 만든 단체 침실이었다. 신입 배려를 해준답시고 해먹 위에 담요를 하나 끌어다 놓았다. 뉴트는 부스스한 금발을 손으로 쓱쓱 쓸어넘겼다.
“어차피 다들 올라와선 불안해하니까. 이거라도 꼭 쥐고 자도록 해. 그럼 조금은 나아질지도 몰라.”
“…….”
“그거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신입한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거든?”
“…….”
뚱한 표정으로 담요를 집어 든 토마스는 계속 불안해했다. 그리고 뉴트가 시키는 대로 손으로 문질거렸다. 뻣뻣한 것 같지만 그렇게 거슬리는 감촉은 아니었다. 잠자코 담요를 뒤집어 쓴 녀석은 영 못 미더워 보였다. 조심스럽게 해먹에 걸터앉고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어둠이 내린 공터에서 제일 잘 보이는 것은 가운데 피워둔 모닥불이었다. 타닥타닥 나무 타는 소리가 조용한 밤하늘에 울렸다.
“잠이…안 오는데.”
내내 해먹에서 뒤척거리던 녀석은 담요를 당겨 덮었다. 막상 받을 땐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한 겹 덮고 누운 것만으로도 안심됐다. 불침번을 서던 아이들도 조용해졌다. 해먹에 눕자마자 잠이 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 이상할 정도로 눈이 초롱초롱했다. 해먹이 불편한 건지. 아니면 이 분위기가 불편한지. 토마스는 내내 이리저리 자세를 바꾸다 설핏 잠이 들었다.
완전히 잠이 들지 못해 반쯤 의식이 남아있는 상태로 내내 꿈을 꾸었다. 마치 현실 같은 꿈이었다. 그 속에서 토마스는 내내 달리고 있었다. 뒤를 돌아볼 수도 없었다. 난잡한 시설들이 어지럽게 얽히며 겹쳐 보이더니, 귓가에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토마스. 위키드는 좋은 일은 하는 거야. 토마스. 뭘 하는 거니. 이리 오렴. 네가 받을 수술은 모두 인류를 위한 것이란다. 토마스. 토마스. 토마스. 끝없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목소리가 나오지도 않는데 힘껏 비명을 지르며 귀를 막았다.
그 순간 토마스는 죽은 표정을 가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자신을 봤다. 사방에서 일그러지는 시선은 어지러울 정도로 바쁘게 돌아갔다. 여전히 표정이 없는 사람들이 서로 입을 모아 토마스를 불렀다.
‘잠깐. 누구야. 누가 말하는 거야. 하나씩 말해. 너희는 누구야. 내가 누군지 알려줘. 잠깐만!’
그 분위기에 질려 점차 숨을 쉴 수 없이 답답해졌다. 눈앞에 빠르게 지나가는 영상 때문인지 멀미를 하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하지만 눈을 감을 수도 없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려 했지만, 마치 가슴에 돌이 내려앉은 것처럼 답답했다. 누가 좀…살려줘. 날…….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왜 이래야 하는 거야. 토마스는 답답했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것을 들고 흔드는 사람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목을 잡혔다고 생각한 순간, 눈앞이 까맣게 죽어가며 의식이 멀어졌다.
“허억!”
토마스가 일어났을 땐 이미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상자에 담겨 올라온 지 사흘이 지났지만, 뉴트는 마땅한 일자리를 알려주지 않았다. 토마스는 내내 뉴트 뒤를 따라다니며 시키는 일을 하는 것으로 하루를 보내곤 했다. 그런 와중에 항상 눈은 민호를 쫓곤 했다.
“러너들은…말이야.”
뉴트 옆에서 땅을 고르던 녀석이 입을 열었다. 뉴트는 또 시작됐다는 표정으로 토마스를 바라보았다.
“항상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저곳으로 들어가?”
“그걸 왜 궁금해 하지?”
“러너에 대해선 궁금해 하면 안 되는 건가?”
“러너가 하는 일을 궁금해 하고, 러너로 활동하고 싶어 하는 애들은 아무도 없으니까.”
“…….”
“그래. 그냥 그게 다야.”
“하지만, 난 러너에 대해. 민호에 대해 더 알고 싶어.”
“그럼 직접 물어보지 그래. 맞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다만.”
뉴트가 피식 웃으면서 다시 갈퀴를 잡았다.
“직접…물어본다…라.”
토마스는 내내 진지했다. 하지만 먼저 공터에 올라와 있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서 말하길, 저 녀석은 호기심이 너무 많다고 했다. 물론 공포에 질려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타입보단 나았지만, 토마스는 그 호기심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녀석이었다.
신입 주제에 눈만 떼면 미로 앞에 가서 서 있는걸 보니 분명 금방 죽어 나자빠질 거라고 입을 모았다. 공터의 규칙을 들은 이상 함부로 그곳에 들어가려 하진 않았지만, 계속 궁금해 했다. 그런 토마스를 잡으러 뛰어다니는 쪽은 뉴트였다. 뉴트는 신입을 챙기는 것보다 많은 일을 담당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저 녀석을 저 상태로 놔둘 수도 없었다. 내 팔자야. 뉴트는 토마스의 귀를 잡고 끌고 오면서 투덜거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눈앞에서 동료가 죽는 것을 보는 건 공터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싫어했다. 혹시나 안쪽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그대로 묶어서 구덩이에 일주일쯤 처박아 놓을 계획도 있었다. 그런 논의를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뭔가에 홀린 것처럼 미로의 입구에 자리를 잡고 선 토마스는 안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눈을 찌푸렸다.
***
러너 팀은 잘 운영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던 어느 날 러너 한 명이 줄었다. 더는 미로로 들어가는 것이 싫다고 했다. 그리고 또 다시 사람이 더 줄었다. 러너의 특성상 하기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잡을 수 없었다. 민호는 너무나 쉽게 러너들을 놔주었다.
‘왜?’
토마스는 그런 민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저렇게 쉽게 포기하는 거지?’
하지만 토마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러너를 그만두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그만두기는 쉬웠지만, 그 이후 지켜야 할 항목이 많았다. 안에서 보고 들은 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 것, 모르는 척 할 것. 이것을 어길 경우 미로로 추방한다. 꽤 무서운 항목들이 줄줄 나열되었다. 이 덕분인지, 아니면 미로에 대한 공포를 알기 때문인지 미로 안에서 있었던 일은 아직 밖으로 퍼져나간 적이 없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러너들이 줄어들면 팀장인 민호에게 부담이 갔다. 좀처럼 보지 못했던 표정으로 한숨을 쉬는 민호가 눈에 걸렸다. 토마스는 홀린 것처럼 민호에게 몇 걸음 걸어가다 멈춰 섰다. 어쩐지 지금은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았다.
‘…두 명.’
민호는 남은 사람의 수를 세다가 주먹을 꾹 쥐었다. 미로로 들어간다는 것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일이었다. 하다 못 해 최초로 러너가 된 민호조차 미로가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어쩔 땐 입구가 천천히 열리는 모습이 지옥과도 같았다. 그렇기에 무엇보다 러너들의 입장을 중요시해야 했다. 억지로 시키는 것은 이 공터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남는 것은 언제나 민호였다.
“…어쩔 수 없지.”
며칠에 걸쳐 모든 러너가 민호 곁을 떠난 날, 팀장은 혼자서 미로 앞에 섰다. 몇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달리던 길이었지만 오늘따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더 이상 뒤를 따라오며 자신을 백업해 주던 사람들이 없었다. 그리고 미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혼자서 헤쳐 나와야 했다. 자연스럽게 온몸이 긴장으로 뻣뻣해졌다.
“…민호.”
그런 민호 뒤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그걸 알아채지 못할 민호가 아니었다. 날쌔게 뒤를 돌아보자 깜짝 놀란 표정의 신입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인 것 같았다. 짧게 혀를 차며 가슴에 단단히 맨 가죽 끈을 콱 잡아 당겼다.
“뭐야. 신입.”
“…….”
“할 말이 있어서 온 거 아냐? 아니면 내가 혼자 미로로 들어가는 모습이라도 구경하러 온 건가?”
“아니야. 그런 거.”
“그러면?”
“…….”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민호는 순간 머리가 아팠다. 왜 그런지는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저 녀석이 올라온 다음부터 몸이 이상했다. 물론 아프다고 말하기엔 모호한 수위였다. 가끔 찾아오는 두통처럼 괴롭힐 뿐이었다. 이게 당장 눈앞에 보이는 러너 팀의 부재 때문인지 아니면 온 동네를 제멋대로 휘두르고 다니는 신입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 민호의 입장을 모르는 토마스는 제법 당돌하게 물었다.
“토마스라고 불러.”
“…….”
“그래. 뭐 좋아. 이름을 기억한 거군. 토마스. 지금 내 옆에 와서 서 있는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러너가 되고 싶어.”
“…뭐?”
“러너가 되고 싶다고 말했어.”
민호는 순간 눈앞이 깜깜해졌다. 자신을 놀리고 있는 걸까. 아니면 어디서 헛바람이라도 들은 걸까. 민호는 입구가 열리는 시간을 잠시 계산하고선 완전히 토마스를 향해 돌아섰다.
“다시 한 번 말해봐.”
“난 러너가 되고 싶어.”
“…어째서? 지금 내 꼴을 보면 알잖아. 러너를 하던 애들도 도망치는 마당에 넌 스스로 들어오겠다고?”
“물론이야.”
“…이해할 수 없어.”
“이 미로가 정말 출구라면 나갈 길은 내 손으로 찾고 싶어. 민호도 그래서 달리고 있는 거 아냐?”
“…….”
“더 이상은 알면 안 되는 부분이라 해서 제대로 알진 못해. 하지만 난 내 손으로 출구를 찾고 싶어. 이게 전부야.”
“토마스…넌.”
“그리고 지금 당장 러너 지망생도 없잖아.”
“…….”
제대로 본 것은 맞지만, 뭐가 잘났다고 주절주절 떠드는지. 민호는 토마스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미로에 들어가기도 전에 온몸에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이 상태론 오늘 살펴야 하는 구역을 모두 살피지 못할 것 같았다.
“둘이 뭐해?”
“아…….”
“토마스. 넌 기운이 넘치는 거냐? 아침부터 나와서 민호를 잡고 늘어지게. 무슨 일이야?”
마침 민호를 배웅하러 나온 뉴트가 둘 사이에 끼어들자 자연스럽게 거리가 벌어졌다. 토마스는 냉큼 두 손을 흔들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 했다.
“아니…그냥.”
“민호?”
뉴트가 바라보자 민호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뉴트가 눈썹을 찡그리며 팔짱을 꼈다.
“이따 다녀와서 이야기하자.”
“도대체 언제부터 둘이 그렇게 돈독한 사이가 된 건지 궁금한 걸? 안 그래? 토마스?”
“……”
“농담하지 마. 뉴트.”
계속 의심스러운 듯 쳐다보는 뉴트에게 토마스를 밀치다시피 내던졌다. 얼굴을 보고 있으면 할 일도 못 할 것 같았다. 애써 앞만 바라보았다. 단단히 끈으로 조인 신발 앞코를 땅에 툭툭 치던 민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로로 뛰어갔다.
“민호랑 무슨 이야기 했어?”
“나…러너가 되고 싶다고 했어.”
“그래. 러너,…뭐?”
“난 러너가 될 거야 뉴트.”
뉴트는 어쩐지 민호의 표정을 이해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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