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민호/토민호] Here I am 004
+) NOTICE
영화 1편을 기반으로 원작 네타(메이즈러너 파일분량)를 맛내기로 섞었습니다.
토민호인데 토마스랑 민호 한참동안 안만남 주의
적당한 망상과 설정 붕괴가 언제나 함께 합니다 ㅇㅅㅇ)9
어느정도까지 연재 후 뒷부분을 추가해 회지로 만들 예정입니다.
책이 나와도 연재한 분량 자체를 지우진 않습니다..
write. 환월
항상 불쑥 나타나서 자신들을 빤히 쳐다보던 조그만 아이가 발길을 끊자 그룹 내에서 슬슬 소리가 커졌다. 그리고 그 날을 기점으로 하기라도 하듯 실험은 더욱 가혹해졌다. 오갈 데 없는 분노를 품은 아이들은 유일하게 알고 있는 토마스를 향해 그것을 쏟아내곤 했다. 시끄럽게 내던져지는 욕설을 듣던 민호는 짜증스럽게 눈가를 구기면서 돌아누웠다. 민호는 조금 더 컸고, 말수가 없어졌다.
“민호 자?”
“…….”
그런 민호 옆에 담요를 들고 온 뉴트가 털썩 주저앉았다. 뉴트도 저런 주제에 끼는 것을 딱히 좋아하지 않았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들은 아이가 슬쩍 돌아누웠다. 서로 눈을 마주친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숨을 쉬었다. 저렇게 열을 내봤자 좋을 것 하나도 없었다. 물론 저렇게 쏟아내고 나서 분노와 공포가 조금이라도 나아진다면 다행이지만, 극단적인 감정은 언제나 자신을 옭아매곤 했다.
“…….”
자신을 친구라고 부르던 유리 벽 너머 아이의 얼굴을 생각해보려 했지만,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흐릿하게 퍼지는 여러 인상 속에서 간신히 그 얼굴을 기억해냈다. 금방이라도 뭔가 물어보고 싶은 것처럼 항상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얼굴을 기억한다고 해서 따뜻하게 대해준 축은 아니었다. 그럴 생각도 없었다. 지금도 물론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지만, 적어도 소리 내서 그 녀석을 욕하고 싶진 않았다. 그런 복잡한 심경을 알아챈 뉴트가 담요를 푹 덮어쓰면서 말을 걸었다.
“민호, 무슨 생각해?”
“…….”
“지금 굉장히 생각 많은 거 다 알고 있어. 어차피 어디다 말할 것도 아닌데 털어놔 봐.”
“내일은 어떻게 살아남을까…이런 생각 하고 있지.”
“죽진 않을 텐데 뭘 걱정해.”
“어떻게 단정할 수 있어. 저번 실험이 끝나니까 두 명 정도가 보이지 않았는데.”
“글쎄. 뭐라고 할까.”
“…….”
“듣고 싶어?”
뉴트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민호는 조용히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벽에 등을 기대면서 뉴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밝은 머리카락 아래로 보이는 날카롭고 까만 눈에선 이유모를 단호함이 느껴졌다. 어디 한번 말이라도 해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널 보는 그 꼬맹이 눈에서 뭔가 다른 시선이 느껴졌거든. 우리를 보는 것과는 좀 달랐어.”
“뭐?”
“…뭐야 몰랐어? 나 그래서 네 옆에 붙어 다녔던 건데. 네가 살면 나도 덤으로 살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지금 저쪽에서 신나게 욕하고 있는 그 녀석 말이야?”
“그래. 항상 우릴 친구라고 부르면서 뭔가 한마디라도 더 하고 싶어서 안달 났던 놈 말이지.”
“…….”
“그랬다니까.”
“…….”
“이래서야 원. 얼마나 애가 탔는지 알만하다.”
“잘 모르겠어.”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그 녀석 눈 본적 없지?”
“…….”
뉴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웃었다. 소리 없는 웃음이 바짝 바른 채 부서져 맨바닥에 흩어졌다. 다른 일에는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녀석이 왜 그런 거 하나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 물론 이해가 가긴 했다. 자신이 이끄는 무리가 살아남는 것을 생각하기에도 하루가 모자랐다. 뉴트야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조금은 있었기에 알 수 있었던 것일까. 민호는 정말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애초에……. 아니다. 뉴트는 더 길게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갑자기 실험이 미뤄져서 편하긴 하다.”
“그러게. 무슨 일이지. 이렇게 편하게 내버려둘 리 없는데.”
“연구실 쪽에 무슨 일이 생겼나?”
“…….”
“하긴 그게 무슨 상관이지. 일단 우리만 안전하면 그만인데. 실험도 안 하고 아프지도 않고,”
위키드는 제대로 된 이야기조차 해주지 않은 채, 아이들을 내버려둔 상태였다. 며칠째 실험이 중단되면서 몸은 편했지만, 그에 비례해서 불안감은 점점 쌓여만 갔다. 이러다 갑자기 누구 하나 끌고 가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영영 잊히면 여기서 이렇게 죽어야 할까. 쉽사리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걱정은 바닥에 켜켜이 쌓여만 갔다. 갇혀있는 입장으로선 밖에서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차라리 그놈이 보러오기라도 하면 멱살 잡고 물어보기라도 할 텐데, 발길을 끊은 건지 흥미가 떨어진 건지 옷자락도 보이지 않았다.
‘너무 조용해서 이상한데.’
밥도 꼬박꼬박 나왔고, 더는 이상한 구조물에 자신들을 밀어 넣지도 않았다. 뭔가 뒤에 더 큰 일이 있을 것 같은데, 어린아이의 머리론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나가 더 고통스러운 일이 시작되었다. 한 번에 여러 명을 이상한 공간에 밀어 넣는 것은 그만두었지만, 이젠 각자 끌고 가기 시작했다. 날이 선 반응으로 경계하는 녀석들을 끌고 간 연구원들은 별다른 감정이 없이 수조에 밀어 넣었다. 생각보다 깊은 곳은 발이 닿지 않았다. 손으로 버틸만한 곳도 없는 매끈한 유리벽을 하릴없이 손가락으로 득득 긁어 내렸다. 숨이 점점 가빠지고, 손끝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데 흐릿하게 보이는 어른들은 연신 자신들을 보면서 손가락질을 하고, 열심히 기록할 뿐이었다.
“…….”
왈칵 숨이 넘어가자 물이 입안에 가득 찼다. 이렇게 죽는 건가 싶었다. 어느 순간 고통스럽지도 않았고, 천천히 몸이 떠오르는 착각이 들었다. 간신히 뜨고 있던 눈이 스르르 속눈썹 아래로 사라졌다. 온몸에 힘이 빠지고 그대로 늘어졌다.
“…커헉.”
정신이 완전히 넘어가기 직전 갑자기 와르르 앞으로 쏟아진 몸에 갑자기 중력이 느껴졌다. 숨이 확 트이는 기분에 뉴트는 본능적으로 숨을 쉬었다. 한번 기침을 할 때마다 폐까지 들어찬 것 같은 물이 왈칵 흘러나왔다. 우웨엑. 먹은 것도 없는데 자꾸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땅을 두 손으로 짚고 고개를 숙인 뉴트가 다시 한 번 물을 토했다. 찢을 것처럼 두근대는 가슴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간신히 눈앞이 보이기 시작했다. 눈물이 줄줄 흐르는 상태로 주변을 둘러 봤지만, 싸늘한 반응뿐이었다. 온몸에 물이 가득 찬 것처럼 무거웠다. 마르기 시작한 몸은 덜덜 떨렸다. 턱이 제멋대로 움직일 정도로 뼈를 파고드는 추위였다.
“민호!”
눈앞에 보이는 유리관에는 민호가 있었다. 이미 한계를 훌쩍 넘긴 것 처럼 작은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뉴트가 그 앞으로 달려가려 했지만, 어른들이게 팔을 잡아채었다. 간단히 아이를 저지한 연구원이 민호를 바라보면서 무엇인가 바쁘게 적었다.
“민호! 야!”
입가에서 부글거리는 공기양이 줄어가는 걸 눈으로 보면서도 연구원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상태에서 흘러나오는 뇌파를 점검하면서 바쁘게 움직일 뿐이었다. 가만히 보자니 사람 하나 죽어야 이 실험이 끝날까 싶었다. 완전히 늘어져서 둥실 떠오르다 가라앉기를 반복하는 몸은 하나도 힘이 없었다. 물속에 둥둥 떠 있는 맨발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
“민호!”
“…….”
뉴트의 목소리에 어른들에게 가려서 보이지 않던 아이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싸늘하게 식은 눈매에선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뉴트는 순간 눈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몇 번이나 팔을 비틀며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 했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조금만 더 물 속에 두면 민호가 죽을 것 같은데 꺼내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같이 들어가 있으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야!!!”
“…….”
“너 진짜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내 말 안 들려?”
“…….”
“야!! 이 새끼가 진짜!”
토마스는 이제 뉴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착 가라앉은 눈으로 앞에 있는 민호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꼴이 너무 같잖아서 당장에라도 한 대 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잘못 생각했어. 어차피 다 똑같은 놈이었는데 다를 거라고 믿었다니. 토마스를 향해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지만, 뉴트의 목소리가 닿지도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가끔 주변을 돌아볼 뿐이었다.
“…….”
결국, 반쯤 정신을 잃고도 한계까지 민호가 간신히 끌어 올려졌다. 바닥에 그대로 쓰러져서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부들부들 떠는 손끝을 보던 뉴트가 연구원의 손을 홱 뿌리쳤다. 일부러 놔준 것처럼 너무나 쉽게 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곧장 민호에게 달려갔다. 쓰러져있는 몸을 일으키고 등을 두드렸다. 민호의 목에서 울컥 소독약 냄새나는 물이 넘어왔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은 좀처럼 핏기가 돌지 않았다. 얼마나 물속에서 몸부림을 쳤는지 끝없이 물을 토하기만 했다. 완전히 푹 젖은 몸에 찰싹 달라붙은 실험복이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면서 바닥에 철썩철썩 달라붙었다.
“…….”
“민호 괜찮아?”
“…어.”
뉴트가 몇 번이나 민호의 이름을 불렀다. 정신이 가물가물한 건지 좀처럼 대답을 하지 못하던 입에서 간신히 한마디가 툭 굴러 나왔다. 몸을 둥글게 웅크린 채 움직이지 못하는 민호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서로 다른 시간에 끌려 나와서 얼마나 물속에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 자신도 죽을 뻔했으니, 민호는 적어도 그만큼의 고통을 받았을 거라 짐작할 뿐이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토마스는 말이 없었다. 마지막 보고서에 개인 소견을 짧게 적어 넣은 후 휙 돌아서 밖으로 나가버렸다. 더는 어떤 사람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런 토마스를 바라보던 트리샤가 가볍게 한숨을 푹 쉬었다. 아직 실험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저렇게 나가버렸으니,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트리샤. 토마스는?”
“아마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 거 같은데요.”
“…….”
“나머지는 그냥 하던 데로 진행하시면 될 거 같아요. 토마스가 쓴 부분은 그대로 올려주시면 된답니다. 전 잠깐 토마스 좀 찾아올게요.”
“그러렴.”
“혹시 제가 안 돌아왔는데 실험이 끝난다면 그냥 종료해주세요.”
“알았다.”
“저쪽도 거의 끝나가니까 별다른 일 없으면 오늘은 이걸로 끝낼 수 있을 거 같아요.”
“토마스가 또 숨바꼭질이라도 한다고 그러냐?”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요. 그럼 저도 먼저 가볼게요.”
트리샤가 작은 손으로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마저 지시하곤 토마스를 찾으러 나갔다. 하지만 이 작은 녀석은 어디에 숨었는지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았다. 예전에 한 번쯤 토마스를 찾아냈던 곳을 중심으로 돌아다녔지만, 위키드는 너무 넓었다. 결국, 휴게실에 털썩 주저앉은 트리샤가 끙끙거리면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바보 토마스.’
도대체 얼마나 꼭꼭 숨어있는지 만나는 사람마다 물어보고 다녔는데 아무도 보지 못했다고 했다. 요새 실험군에 별로 관심을 안 둔다고 말해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거짓말이었다. 오히려 숨길수록 안 쪽에서 뭉근하게 타오르면서 깊은 상처를 만들고 있었다. 한번 자세하게 이야기를 해봐야 할까. 잠깐 생각하던 트리샤는 곧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포기했다. 그 고집을 꺾을 재간이 없었다.
오만 곳을 다 뒤지고 나서야 간신히 토마스를 찾아냈다. 의외로 허탈할 만큼 쉬운 곳에 있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방에 얌전히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화장실에 처박혀서 나오지 않았지만. 눈이 새빨갛게 충혈되어있고 눈 밑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걸 봐선 대차게 속이라도 게워낸 것 같았다. 힘이 하나도 없어서 종이 인형 같은 토마스를 보던 트리샤가 손을 잡았다. 의외로 얌전히 끌려왔다. 침대에 앉혀놓고 한숨을 폭폭 쉬었다. 왜 저렇게 감정 기복이 심한 것일까. 요즘 들어 유난히 더 심해진 것 같았다.
“다시 안 갈 거야?”
“…….”
“아직 실험 다 안 끝났어.”
“가긴 할 건데.”
“사실 나는 뭐가 그렇게 문젠지 모르겠지만, 계속 이러면 다른 어른들이 의심할 거야.”
“뭐…뭐가.”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해?”
“…….”
트리샤의 날카로운 질문에 토마스는 그저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숨긴다고 숨긴 것인데 자신의 페어가 알고 있으니 다른 연구원들도 충분히 눈치를 채고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생각처럼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감정을 억제하고 이성적인 선택을 하게끔 유도했지만, 생각보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부스러기가 많이 남아있었다.
“그래도 상위 그룹은 다 결과 보고서 쓰고 나왔어.”
“그런 태도가 문제란 거야. 지금 널 찾으러 나까지 나왔잖아. 나중에 뭐라고 말할래,”
“…….”
“가자.”
“…….”
“가서 마지막까지 있어야지.”
토마스를 질질 끌고 연구실로 들어왔을 땐 모든 실험이 거의 끝난 상태였다. 마지막에 투입된 아이들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민호와 뉴트가 속한 초반 그룹은 이미 제자리로 돌아간 것 같았다. 차라리 잘된 일 같아서 트리샤는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저기.”
“뭐?”
“저기 다쳤네.”
“그러게. 안 그래도 좀 위험하다고 생각했는데. 몸부림치다가 접합 부분에 찢긴 걸까. 의료반을 불러야겠어.”
가장 크게 몸부림치던 갤리가 결국 피를 보았다. 팔뚝을 세로로 쭉 찢겨서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온몸에서 물이 흘러내리면서 옅은 피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알비가 갤리를 부축해서 일어섰다. 탐탁지 않은 눈으로 치료 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치료를 거부할 순 없었다. 상처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심각한 일이었다. 갤리의 팔에 하얀 붕대가 둘둘 감기는 걸 보던 토마스는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
오늘 실험 결과가 한꺼번에 나타났다. 가볍게 훑어보는 척하면서 민호의 프로필을 읽었다. 딱히 흠잡을 만한 것도 특이한 변화도 없었다. 오히려 변화는 자꾸 자신에게 오는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오늘 하루도 지독한 실험이 끝나고 위키드 연구소에 밤이 찾아왔다. 추위와 싸우던 아이들은 제각기 콜록거리면서 자리에 누웠다. 천정을 바라보고 누운 뉴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역시 내가 잘못 생각했어.”
“뭘?”
“그 자식 말이여. 결국, 똑같은 패거리였어.”
“…누구.”
“널 쳐다보던 새끼. 적어도 지금은 우리 편은 아니야.”
“…….”
“넌 분하지도 않아?”
“이제 이런 실험 그만했으면 좋겠어.”
“…….”
힘이 다 빠진 민호의 목소리를 듣는 뉴트는 맥이 풀렸다. 하긴 죄 없는 사람에게 화를 내봤자 서로 피곤한 일이었다.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아무래도 물을 제때 말리지 못한 것이 원인이지 않을까 했다.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인데. 뉴트는 담요를 둘둘 감고 가늘게 기침을 했다.
✗ ✓ ✗
처음 공터로 올라가기로 선택된 것은 알비였다.
끝없이 이어진 실험으로 이미 잔뜩 지친 아이들은 어지간한 자극엔 움직이지 조차 않았다. 그리고 또 한 번 휴식기가 있었다. 그 시간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하지만 아이들은 눈치가 빨랐다. 실체는 알 수 없지만, 실험실 내에 잔뜩 떠도는 이상한 분위기를 알아챘다. 자고 일어나면 옆에 있는 동료가 사라질 것 같았다.
“무슨 일일까.”
“두 가지지. 뭔가 더 미친 짓을 할 것이 남았던가.”
“…남았던가?”
“아니면 더는 우리가 쓸모가 없어졌던가. 그것 뿐이잖아.”
“그러네.”
“물론 지금 분위기는 이상하다고 생각해. 아무래도 그 얼굴에 속은 게 분하긴 하지만, 그땐 이 정도는 아니었거든.”
“여전히 그 녀석이 원흉이라고 생각해?”
“물론. 왜냐면 확실하게 아는 녀석이 그놈 뿐이거든.”
“…….”
“다른 사람의 이름을 알았다면 분명 그쪽도 싫어했을 거야. 말하고도 웃긴 소리지만.”
뉴트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실없이 웃었다. 그 웃음을 보던 민호도 허탈하게 미소를 지었다. 연구실에서 끊임없이 고통을 받던 아이들은 그래도 나름대로 성장기를 지내고 있었다. 키가 서로 경쟁하는 것처럼 길쭉하게 자라나 싶었는데, 팔다리도 길어졌다. 제법 몸이 단단해지려는 기미를 보이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문득 꽤 많은 시간이 지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냉랭한 곳에선 시간의 흐름을 느낄만한 것은 어디에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무사히 일어나면 그저 하루가 지났다고 믿었다.
하지만 최근엔 몇 번이나 잠이 들었다 놀라서 일어나길 반복했기에 그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이 년이 지났을까. 아니면 사실 오 년도 넘게 지난 것일까. 나는 몇 살일까. 손가락으로 애써 연구소에 들어온 날짜를 셈을 해보다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알비?”
“…….”
“알비 어디 갔어?”
“…몰라. 분명 여기에.”
손에 잡히는 건 싸늘하게 식은 담요뿐이었다. 분명 어제저녁까지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싸움이 붙은 아이들을 뜯어말리고, 때에 맞춰 들어온 음식을 받아서 나눠 먹었다.
다만 조금 다른 일이 있다면 유난히 기분이 싸한 것 같다는 뉴트의 말에 다 함께 한구석에 뭉친 채 잠을 잤다. 애들 사이에 낀 민호가 낄낄거리며 넌 너무 예민하다고 놀려댔다. 잠시 동안 그 말에 동의하는 놈들이 와르르 웃어 재끼더니 하나둘 전구가 꺼지는 것처럼 잠이 들었다.
그리고 기억이 끊겨있었다.
아무리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기억을 하려고 해도 그 부분 기억이 싹둑 잘린 것처럼 텅 비어있었다. 꿈도 꾸지 않았고, 그렇다고 일어나 있는 사람도 하나 없었다.
“기분이 이상했던 게 이것 때문이었나?”
“이상하지 않아? 왜 아무도 몰랐던 거야.”
“…….”
“…설마.”
“뭐?”
“우리를 모두 수면 가스로 잠시 재운 거 아냐? 그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그럴 수 있을 거 같은데…….”
“…….”
뉴트가 한 가지 가설을 던지자 다들 침을 꿀꺽 삼켰다. 차마 아무도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을 너무 쉽게 꺼낸 당사자는 한숨을 푹 쉬었다. 슬픈 일이었다. 아무리 서로 뭉치고 의지하려고 해도 실험실 안에 있는 한 이렇게 간단히 와해될 수 있는 일이었다. 한 명이 끌려갔으니 다음번에 또 끌려가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하지만 왜 하필 알비가 처음일까. 그 의문은 계속 머릿속을 긁어내리면서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도대체 지금까지 했던 실험이 무슨 의미가 있어서 처음 선택된 것인지 알고 싶었다.
“알비는 무사할까.”
“그렇겠지?”
“…….”
“아무리 뭉쳐있어도 이렇게 쉽게 끊어질 줄이야.”
“이러려고 우리를 데려온 걸까?”
“도대체 무슨 감상적인 소리야. 너희가 그러고 있으니까 일이 이렇게 된 거 아냐?”
“무슨 소리야. 갤리.”
“계집애 같은 소리 작작해. 지금 그렇게 한숨만 쉰다고 뭐가 좋아져? 이 곳은 이미 미쳐 돌아가는데?”
“그러면 널 뭘 할 건데.”
싸늘한 한마디에 갤리가 입을 다물었다. 사실 서로 갈라져서 싸워봤자 남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갤리가 화를 이기지 못하고 애꿎은 유리 벽을 쾅쾅 차는 것을 바라보던 뉴트는 주섬주섬 알비가 남기고 간 담요를 주워들었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홀연히 사라진 사람은 마치 원래부터 이 공간에 없었던 것 같았다.
“…난 어째야 할지 모르겠어.”
“나도.”
“민호. 나 너무 힘들어.”
아이들의 마음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의지할 어른도 없는 곳에서 의지할 곳은 또래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순식간에 빼앗길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인지하자 끝없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일주일 내내 알비에 대해 시끄럽던 아이들은 곧 입을 다물었다. 단순한 사실에 대해 할 말은 사실 많지 않았다. 게다가 그렇게 걱정을 할수록 무서운 생각이 들 뿐이었다.
몇 주째 또 지겨운 실험을 받고 있었다. 알비가 끌려간 이후 다른 사람이 사라졌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예전엔 연구원들이 뭐라고 하던지 귀를 막고 듣지 않으려 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달라졌다. 조금이라도 중요한 정보를 알 수 있을까 싶어 흘러나오는 대화를 엿듣곤 했다. 하지만 알비의 생사는 알 수 없었다. 가끔 이상한 단어가 들리긴 했는데, 도대체 그것들과 자신들이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 끼워 맞추지 못했다.
“공터. 그리버. 한 달.”
“뭘 그렇게 중얼거려?”
“…토마스.”
“뉴트?”
어느새 뒤에 바짝 붙은 민호가 뉴트의 어깨를 치면서 말을 걸었다.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고민 중이던 뉴트가 한 박자 느리게 반응했다. 까칠하게 마른 상태로 키만 쭉 커버린 녀석이 민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냐. 아무것도.”
“무슨 일이 있는 거 같은데”
“…일이야 언제나 있지.”
“…….”
“뭔가 또 심상치 않아.”
“뭐가?”
“그게.”
뉴트가 뭔가 말하려 하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에 듣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직도 알비 이름만 나오면 동요하는 무리에게 괜히 불안감을 주는 것은 좋지 않았다. 둘이서 조용히 이야기 좀 하자. 슬쩍 눈짓을 보내고, 옆으로 슬쩍 빠졌다. 어차피 사각지대 따위는 없는 곳이라 다들 모여 있지만, 최대한 구석으로 발길을 돌렸다. 눈치가 빠른 아이들이 잠시 둘을 바라보다 애써 모른 척했다.
알비가 없어진 이후 그룹의 실질적인 리더 그룹은 갤리와 민호 그리고 뉴트였다. 갤리는 여전히 화를 삭이지 못하고 있었고, 민호와 뉴트는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알 수 없었다.
민호는 조금 텀을 두고 뉴트의 뒤를 따라왔다. 가장 구석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동료가 가만히 고개를 숙인 채 발끝만 바라보고 있었다. 발목까지 올라온 짧은 바지 아래로 바짝 마른 다리가 보였다. 신발로 바닥을 문지르는 뉴트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 어려 있었다.
“이제 말해 봐.”
“아직 끝난 게 아닌 거 같아.”
“뭐?”
“알비는 아직 살아있을 거야. 연구원들이 들고 다니는 차트에서 알비의 이름을 봤어.”
“…….”
“우리랑 같이 섞여 있는 차트가 아니니까, 아마 다른 실험에 투입된 거 같아. 확실하진 않지만.”
“다시 시작될 거란 의미야?”
“맞아. 계속 한달이라는 단어를 말하고 있어. 알비가 사라진 지 얼마나 됐지? 거의 한 달이지 않아?”
“확실히 그러긴 해.”
한 달 간격으로 이쪽에서 사람들이 사라질 수 있다. 꽤 괜찮은 가설이었다. 물론 계속 사람이 사라진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면 좋을 텐데. 뉴트는 여전히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쩌다 보니 주로 생각하는 역할을 맡고 있지만, 눈에 띄게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니 속으로 곪아 들어가기만 했다.
“누가 또 올라가게 될까?”
“몰라. 언제일지는 모르지만…혹시 내가 끌려가면 어쩌지.”
“…….”
애써 담담한 척하고 있지만, 그다음이 누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알비가 끌려 올라간 것처럼 어느 순간 가장 가까이에서 지탱이 되는 사람이 사라질 수도 있었다. 불안감은 순식간에 온 사방에 스며들었다.
두 번째로 올라간 것은 B그룹이 있는 격리실에서 생활하던 두 명의 남자아이였다. 뉴트는 유난히 반대쪽 방이 시끄러운 것을 알아채는 순간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알비는 혼자였는데 이번엔 어째서 두 명이나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끌려가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었다.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생각을 꾹꾹 눌러 삼킨 뉴트는 그저 입술을 깨물 뿐이었다.
“…우리가 눈치챌까 봐 밖으로 안 내보내는 거 같아.”
조금이라도 정보를 얻으려면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실험은 모두 중단되었다. 공포 속에 방치된 아이들은 어둠에 잡아먹힌 것처럼 사라진 친구들을 찾으며 끝없이 불안해했다.
밤이 된 것 같았지만 뉴트는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걱정과 불안이 뒤섞인 마음이 날뛸 때마다 심장이 지끈거리며 아팠다. 모두 잠이 든 척을 하고 있었지만, 뜬눈으로 밤을 지내고 있었다.
“…두 번째 공터 인이 올라갔구나.”
토마스는 밤이 늦도록 잠을 자지 않았다. 차게 식은 눈으로 카메라 화면을 이리저리 돌려보면서 끊임없이 무엇인가 확인하고 있었다. 공터로 처음 올라간 알비는 혼자서 한 달을 무사히 살아남았다. 물론 간신히 목숨만 잡고 있는 격이었지만, 연구원들에겐 충분했다. 다들 며칠 안가 미쳐버리거나 굶어 죽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두 번째 올라간 사람은…음…별로 기대가 되지 않는데.”
토마스가 프로필을 열어보면서 웃었다. 상위 그룹은커녕 중간 그룹에 간신히 걸쳐있는 아이들이었다.
“일종의 쿠션 역할로 집어넣은 걸까. 초반에 상위 그룹을 모두 집어넣었다 큰일이라도 나서 죽어버리면 곤란하니까.”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조작하면 눈앞에 있는 카메라 화면이 휙휙 돌아갔다. 꽤 어지럽게 바뀌는 화면을 따라가기 어려울 것 같은데, 토마스는 익숙한 표정이었다. 붉은 렌즈를 반짝이면서 움직이는 카메라는 위키드 연구소와 공터를 사각지대 없이 관찰할 수 있었다. 보통 때는 별다른 반응 없이 24시간 내내 연구소를 감시하고 있지만, 특정 조작이 가해지면 붉은 렌즈에 반짝거리는 빛이 들어오곤 했다. 아마 눈치가 빠른 아이들이라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토마스는 공터부터 쭉 훑어 내리면서 특이한 사항이 없는지 체크하고 있었다.
“…….”
밤이 되면 공터는 쥐죽은 듯 조용했다. 기괴한 울음소리가 미로 밖에서 길게 들릴 때면 토마스도 눈을 찌푸린 채 스피커 음량을 낮추곤 했다. 가볍게 시찰을 하는 덴 굳이 스피커를 켜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지만, 어쩐지 꼭 들어야만 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토마스가 하는 행동이 일종의 강박증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잠시 고민하던 토마스가 전체 카메라를 격리실 쪽으로 옮겨갔다. 한순간 점멸됐다 켜지기 시작하는 화면엔 잔뜩 모인 채 잠들어있는 아이들이 가득 채워졌다. 담요를 끌어당기고, 잠꼬대하면서 움직이는 모습이 간간이 잡히곤 했다.
“…민호.”
토마스가 특정 번호를 입력하자 화면 중앙에 카메라 화면이 켜졌다. 어둠 속이라 흐릿하게 보이긴 했지만, 못 알아볼 정도로 화질이 나쁘진 않았다. 구석에서 등을 돌린 채 자는 민호가 눈에 들어왔다. 눈을 가늘게 접으면서 한참 화면을 바라보았다. 한 번만 돌아 누워주면 얼굴을 볼 수 있을 거 같은데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
화면을 더 확대할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민호 옆에서 누군가 몸을 일으켰다. 토마스는 순간 숨을 쉬며 의자를 뒤로 밀었다. 예민한 사람이라면 눈앞에서 반짝이는 붉은 빛을 충분히 느낄 수 있으리라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민호 뒤에서 일어난 사람은 뉴트였다. 눈을 깜박이는 것 같다 완전히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반짝이는 불빛을 내내 노려봤다. 토마스는 카메라를 꺼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굳어있었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릴 생각이 없었다. 아니 연구소에서는 너무 당연하게 생각되어 말도 하지 않을 만큼 기본적인 것이었다.
‘…….’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았다. 하지만 뉴트는 말이 없었다. 소리쳐서 누군가를 깨우거나 카메라를 향해 손가락질하지도 않았다. 그냥 그렇게 빤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멍하니 굳어있던 토마스가 후들후들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카메라 전원을 내렸다. 곧 뉴트가 바라보고 있던 카메라에서 나오는 붉은 빛이 사라졌다.
“이런 식으로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구나.”
조용히 중얼거린 뉴트가 입술을 말아가며 살짝 웃었다. 뉴트의 혼잣말과 부스럭거림에 잠이 깬 민호가 뒤척거렸다. 왜? 아냐. 뉴트가 다시 등을 맞대고 누워서 잠을 청했다.
“…….”
뭔가 큰 잘못을 했다는 사실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혹시나 뉴트가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한다면 연구원들이 귀에 들어가는 것은 순식간이 될 것이 뻔했다. 그렇다면 아마 토마스는 모든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면 더는…….’
자신의 경솔함을 몇 번이나 자책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일어난 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토마스는 내내 책상에 앉아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저 민호를 한 번만 보려고 했을 뿐인데 왜 이렇게 일이 꼬이는지 알 수 없었다. 울지는 않았지만, 누군가 한번 말이라도 붙이면 곧장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민호를 구하려고 지금까지 쌓아올린 자신의 계획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대로 책상에 엎드린 채 깜박 잠이 들었다. 누군가 방에 들어와 어깨에 담요를 걸쳐주고 나갔다. 토마스가 뻑뻑한 눈을 간신히 떴을 땐 이미 아침이 밝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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