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민호/토민호] Good - Bye Moebius 001
+) NOTICE
영화 기준으로 토마스가 초반 글레이더들과 함께 공터에 올라갑니다.
IF 책에 예민하신 분들은 피해주세요.
결과적으로 영화와 비슷한 줄거리지만, 중간중간 다른 방향으로 사건이 전개 됩니다.
선공개 분엔 없지만 이후 원고에 (후천적) 엠프렉 소재 및 모브X민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임신 이후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행복한 분위기는 아닙니다
적당한 망상과 설정 붕괴가 언제나 함께 합니다 ㅇㅅㅇ)9
어느정도까지 연재 후 뒷부분을 추가해 회지로 만들 예정입니다.
책이 나와도 연재한 분량 자체를 지우진 않습니다.
write. 환월
Good - Bye Moebius 001
이번 달에도 어김없이 같은 소리가 들렸다.
자신이 누구인지. 여긴 어디인지.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얗게 변해버린 뇌를 감싸 쥐고 아무 것도 없는 곳에 던져진 아이들은 서로 뭉쳐 앉아서 하루하루를 버틸 수밖에 없었다. 어설프게나마 땅을 파고 이슬을 피할 지붕을 얹는 것만으로도 몇 달이 걸렸다.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
황량한 공터에 가장 먼저 올라온 알비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한 달을 버텼다. 해가 지면 불빛 하나 없는 공터엔 순식간에 새까만 어둠이 찾아왔다. 어둠에 아무리 익숙해져도 코앞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서 있는 벽 너머론 괴상한 울음소리가 밤새 들려오고, 금방이라도 뒷덜미를 낚아챌 것만 같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누군가를 불러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곳은 무서웠다. 아니 누군가 대답을 한다면 더 무서울 것 같았다. 반쯤 뜬 눈으로 선잠을 잤다. 이렇게 밤을 지새우면 희미하게 아침이 밝아오곤 했다. 그렇게 하루를 버티고 이틀을 버텼다.
알비에게 주어진 것은 형편없었다. 모포 몇 장과 저장에 쉽게 말린 음식 그리고 조잡한 연장이 전부였다. 맨손으로 시작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형편없었다. 알비가 도착한 공터에는 이름 모를 풀과 열매들이 잔뜩 자라고 있었지만, 약 하나도 제대로 없는 곳에서 배가 고프다고 그런 것을 함부로 뜯어먹을 수 없었다.
“…….”
알비는 생각보다 침착했다. 가운데 우뚝 서 있는 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고, 모포를 두른 채 버텼다. 마실 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해가 뜨자마자 숲 속을 헤매면서 반대쪽으로 나갔다. 상자에서 꺼내서 멋대로 쌓아둔 짐을 뒤지자 물통이 하나 있었다. 그것에 식수를 담아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도 녹록지 않았다. 공터는 알비의 상상보다 훨씬 넓어서 혼자선 많은 것을 하긴 힘들었다.
정확히 한 달이 지나고 두 번째로 상자가 올라왔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던 알비가 상자가 올라오는 것을 알아채고 당장 뛰어왔다. 먹을 것이어도 좋고 연장도 괜찮았다. 아니 그것보다 가장 필요한 것은 동료였다. 더는 이 공터에 혼자 있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
알비가 그랬던 것처럼 올라온 소년은 모든 것을 혼란스러워했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알비는 나름대로 침착하게 설명을 하려고 했다. 물론 알고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았다. 영 이해하지 못했단 표정을 짓는 녀석은 알비의 손을 잡고 상자에서 빠져나왔다. 이번엔 조금 더 괜찮은 연장과 밧줄이 올라왔다.
“넌 누구지?”
“…….”
“생각나는 걸 아무거나 말해봐.”
“…모르겠어.”
“곧 기억 날 거야. 나도 그랬으니까.”
“…….”
두 번째로 올라온 아이는 삼 일 만에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 냈다. 뉴트. 내 이름은 뉴트야. 알비는 다시 한 번 손을 내밀며 정식으로 인사를 나눴다. 뉴트의 까만 눈동자는 아직도 혼란스러움이 가득했지만, 애써 침착하게 행동하려 했다.
한 명이 더 올라왔을 뿐인데, 잘 곳을 만드는 일은 좀 더 편해졌다. 뉴트는 억척스럽게 일을 했다. 깡마른 아이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생겼는데, 어디서 그렇게 힘이 솟는지. 결국, 두 사람이 간신히 몸을 뉘일 만한 구덩이를 파고 같이 올라온 모포를 질질 끌어다 바닥에 깔고 나서야 땀에 푹 젖은 이마를 손등으로 슥 닦았다.
“됐지?”
“그러게.”
“우리 둘이 한 달을 버텨야 한다고 했나?”
“…아마도.”
“…….”
뉴트는 여전히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분명 무엇인가 좀 더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날수록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 나는 누구일까. 왜 이곳에 있을까. 뉴트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잠재우기 위해 몇 번이나 몸을 움직였다. 차라리 몸이 지치면 아무런 걱정 없이 쓰러져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 밤은 알비나 뉴트가 구덩이에서 몸을 웅크린 채 잠을 잤다. 오늘이 며칠째지. 뉴트는 가물가물한 정신으로 손가락을 접어가며 여기에 올라온 날부터 지금까지의 날짜를 새려 했다. 하지만 확실하지 않았다. 어쩔 땐 하루가 너무 짧고, 어느 순간엔 너무 길었다. 마치 해가 살아있는 것처럼 제멋대로 뜨고 지는 것 같았다. 하루에 세 번씩 해가 뜨고 상상이 들 때마다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언제나 새벽이 찾아왔고 다시 공터 위로 해가 떠올랐다. 늘 하던 대로 땅을 파고 나무를 질질 끌고 왔다. 모닥불도 필요했고, 어둠을 밝힐 횃불도 만들어야 했다. 낮은 언제나 짧았고, 배고픔은 규칙적으로 찾아왔다. 말린 고기는 조금씩 떨어졌다. 식량이 줄어든 다는 사실은 다른 모든 것보다 무서운 일이었다. 결국, 식량이 더 떨어지기 전에 둘은 숲에서 먹을 수 있는 것을 찾기로 했다.
“…토끼 같은 건 없겠지?”
“그러게.”
“나무 열매 같은 건 먹을 수 있지 않을까?”
“…….”
“우리가 정말 뭔가 필요해서 이곳에 온 거라면 먹고 죽을만한 식물과 함께 두진 않았을 거 같지 않아?”
“그렇긴 하지.”
“알비. 내 생각엔 말이야.”
“응?”
알비가 대답하기 전에 뉴트는 이미 빨갛다 못해 새카맣게 익은 열매를 뚝뚝 따고 있었다. 그리고 코로 냄새를 맡았다. 물론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독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유혹을 이기기 힘들 정도로 진하고 달콤한 냄새가 코를 감쌌다.
“뉴트…잠깐…!”
덥석 열매를 입에 넣는 뉴트가 눈을 데록데록 굴렸다. 그리고 열매를 꼭꼭 씹다가 씨를 뱉어냈다.
“…….”
“…괜찮은데? 먹어봐.”
“어쩌려고 입에 막 집어넣는 거야.”
“그냥 감이지. 이거 맛있다.”
“…….”
과즙에 입술이 빨갛게 변한 녀석이 킬킬 웃으면서 알비의 손에 열매를 한가득 쌓았다. 알비는 주춤주춤 열매를 입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둘의 손은 점점 빨라졌다. 손가락 한 마디만 한 나무 열매 좀 주워 먹는다고 배가 차진 않았지만, 매일매일 같은 음식에 질린 아이들에겐 충분히 즐거운 시간이었다. 와 살 거 같다. 물까지 꿀꺽꿀꺽 마신 뉴트가 씩 웃었다.
이런 날만 있으면 좋겠지만, 날이 갈수록 초조해졌다.
아이들에게 주어진 것은 턱없이 부족하기만 했다. 한 달에 한 번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부터 묵직한 상자가 올라온다. 그것을 상자라고 불러도 되는진 모르겠지만, 알비는 항상 상자라고 불렀다. 일정하게 정해진 시간은 아니지만 거의 비슷한 날짜에 배달되는 ‘상자’ 속엔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과 함께 한 명의 신입이 들어있다. 몇몇은 반쯤 정신을 잃은 채 올라왔다. 하지만 보통 완전히 기절한 채로 발견되곤 했다. 그런 아이를 질질 끌어내서 그늘로 옮기는 것도 먼저 올라온 사람들이 할 일이었다.
“일단 신입은 모포를 줘.”
“어째서?”
“너도 그랬지만, 다들 혼란스러워하니까.”
“…….”
“뉴트?”
“뭐, 알비가 그렇다면 맞는 거겠지. 이리와.”
“…….”
뉴트는 땅바닥에 엎어져 있는 녀석을 질질 끌고 나무 그늘로 향했다. 그것은 공터에서 아이들이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환대였다. 이곳은 사람이 생존은 할 수 있지만, 살만한 곳은 아니었다.
사는 것에 바빠 제대로 된 규칙도 만들지 못한 곳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직 집조차 만들지 못한 어린아이들은 새끼 동물마냥 서로 뭉쳐있는 것이 전부였다. 그나마 알비가 나이가 많은 축이라 해도 어린아이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마음 놓고 살 곳은 고사하고 자신들이 있는 이곳이 정확히 무엇을 하는 장소인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서로 모여 앉았다.
“해가…진다.”
“정말 안전한 거 맞아?”
“저것들은 벽을 넘어오지 못해.”
“그러면 낮에 문이 열렸을 땐 왜 움직이지 않지?”
“그건…….”
알비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골똘히 생각하며 단단하게 닫힌 벽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그래 왔으니까.”
“편한 소리야.”
“하지만 이곳에서 그렇게 믿지 않으면 하루도 버틸 수 없어. 계속 겁에 질려 있으면 아무것도 못하니까.”
자자. 내일도 일해야지. 알비가 옆으로 돌아누웠다. 좁은 구덩이에 모여 누운 아이들은 저마다 모포를 끌어당겼다. 금방 잠이 든 아이들도 있었고, 뜬눈으로 밤을 샌 녀석들도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밤에 기괴하게 우는 것들은 알비가 말한 대로 높은 벽을 절대 넘어오지는 못한다는 점이었다. 잠이 들려고 하면 밤하늘을 찢는 울음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지만, 애써 듣지 않으려 했다.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게 해도 귓가로 울음소리가 흘러들어오면 몸을 간신히 덮고 있는 모포를 쭉 끌어당겼다.
아무도 자신들이 이곳에 있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아이들은 그저 날이 갈수록 성장기에 맞춰 자랄 뿐이었다.
***
이런 글레이드를 지켜보고 있는 연구실이 있었다. 위키드에서도 가장 깊고 중요한 중추 연구실엔 수많은 컴퓨터와 반투명 패널이 가득했다. 그리고 어른들이 바삐 지나다니는 곳에 덜 자란 아이가 하나 있었다. 연구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나이지만, 연구원들과 똑같은 옷을 입고 화면을 이리저리 조작하고 있었다.
“토마스.”
“…네?”
“총장님이 부르신다. 이따 연구 보고서를 추려서 가보렴,”
“알았어요.”
푸른 액정에서 잠시 눈을 뗀 아이가 별로 놀라지 않은 표정으로 바로 대답했다. 깜박거리는 눈은 속눈썹에 걸린 긴 그늘을 만들었다. 소위 엘리트 그룹으로 지정되어 위키드에 들어온 아이는 토마스를 포함해 꽤 여러 명이었다. 실험군으로 분리된 아이들과는 전혀 다른 대우를 받고 있었다.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완전히 선두로 나서진 않았지만, 엘리트 그룹에 포함된 녀석들은 곧잘 한사람의 연구원 몫을 하고 있었다.
“…아직 보고 할 만 한 일이 없는데.”
“뭔가 다른 걸 시키려는 거 아닐까?”
“응?”
트리사가 토마스의 옆 의자에 냉큼 올라앉았다. 어깨를 타고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을 손으로 슥 쓸어 넘겼다. 눈을 깜박거리며 토마스를 쳐다보자, 샴페인을 닮은 눈이 시선을 맞추며 굴러갔다.
“예를 들어 엘리트 그룹인 우리도 쉽게 못 하는 프로젝트라던가…말이야. 안 그래?”
“그걸…내가 왜.”
“왜긴 여기서 제일 뛰어나니까 그렇겠지.”
“……”
“나중에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말해 줄 수 있어?”
“생각해 보고.”
“너무 하네. 페어끼리.”
트리사가 주먹으로 토마스의 팔을 퍽 쳤다. 아. 토마스가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리자 방금까지 트리사가 앉아있던 의자 위엔 까르르 웃음소리만 남아있었다. 토마스는 한숨을 푹푹 쉬며 보고할 내용이 프린트된 종이를 하나하나 집어 들었다.
“프로필이…이게 맞나.”
여기저기 널려있는 실험군의 프로필을 뒤적이던 토마스가 한 장을 골라냈다. 특히 마음에 두고 있었는지, 메모가 여기저기 붙어있었다. 민호. 토마스가 이름을 천천히 읽었다. 입술에 닿으면 사라지는 이름은 낯설기만 했다. 까맣고 작은 아이의 상반신 사진이 함께 첨부되어 있었다. 어디서 왔는지. 언제 태어난 것인지. 모든 것은 확실하지 않았다.
“…….”
민호는 꽤 우수한 학생이었다. 어떤 실험에 들여보내 지더라도 상위권으로 통과했다. 기억력. 체력. 지구력. 판단력. 공간지각력. 모든 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녀석은 몇 번이나 공터로 끌려 올라갈 뻔했다. 물론 그것을 막아선 것은 토마스였다. 엘리트 그룹에서도 가장 영향력이 있는 토마스가 반대하기 시작하자, 연구원들도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토마스 지금 상황이 급박하단다.”
“…….”
“어서 명단을 넘겨야지.”
“그래도…….”
토마스는 끝까지 버티고 있었다. 명단을 적는다고 해봤자 민호가 일찍 올라갈 것은 당연했다. 민호. 갤리. 뉴트. 알비. 실험 상위권에 속한 사람들의 이름을 몇 번이나 말하면서 끊임없이 고민해봤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초반에 중위권 아이들을 둘이나 보냈는데 제대로 된 결과를 얻을 수 없었던 것을 보면, 별 수 없었다. 아무리 여러 가지 루트로 머리를 굴려도 같은 결과만 나올 뿐이었다. 어중간한 놈들이 몇 명이 간다고 해도 저것보다 좋은 결과가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역시 처음 공터에서 살아남을 사람들은 상위권밖에 없나. 정말 그것밖에 답이 없는 걸까.’
토마스는 민호를 먼저 올려보내기 싫었다. 왜 하필 민호일까. 민호는 왜 그렇게 능력이 뛰어났을까.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 중에 딱 한 명 마음에 든 녀석이었다. 이왕이면 오래 곁에 두고 싶었다. 어린아이가 부리는 치기 어린 고집은 생각보다 깊었다. 순수하게 독점하고 싶은 욕망은 작은 아이의 심장 속에 깊게 박혀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
물론 연구에 사심을 담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처음 연구소에 들어왔을 때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소리였다. 그래서 실험실에 있는 동안은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항상 원칙에 어긋나지 않으려 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머릿속에 순간 스며든 사적인 감정이 점점 진해지자, 깊은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독점욕이 물씬 피어올라 토마스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최대한…나중에 올려보낸다면…….”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머리가 복잡했다. 미룰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토마스는 사실 민호가 공터로 올라가는 것을 끝까지 반대하고 싶었다. 하지만 민호의 능력이 문제였다. 모든 방면으로 뛰어남을 보여준 터라 아무리 토마스가 반대한다 해도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다. 여전히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손이 종이를 마저 챙겨들었다.
“정말…싫은데.”
답지 않게 투덜거리던 토마스는 혹여 누가 듣기라도 할까 봐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아이는 자신의 힘이 닿지 않는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곧잘 포기해 버렸다. 남은 상위 그룹에서 세 번째. 토마스는 결국 민호를 세 번째 상자에 담아 공터로 올려 보내기로 했다. 이 이상으로 미룰 수 없었다. 민호의 이름을 꾹꾹 힘줘서 적어 넣은 토마스가 펜을 내려놓으며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머리가 아팠다. 작은 손으로 연신 마른세수를 하며 괴로워하다 의자에서 내려왔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벽에다 쿵쿵 박던 녀석이 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총장실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총장님.”
가볍게 문을 두드린 토마스가 잠시 서 있었다. 문이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다시 한 번 노크하며 입을 열었다. 위압적일 정도로 무거운 문은 금방이라도 토마스를 내리누를 것 같았다. 몇 번이나 와서 이제는 익숙해질 만도 하지만,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
어른들이 자신을 놀린 건가 싶었다. 분명 총장이 불렀다 했는데, 안에선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괜히 손에 들고 있는 보고서를 만지작거렸다. 몇 번이나 노크해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이게 뭐야.”
입이 비죽 튀어나왔다. 토마스가 막 걸음을 돌리려는 순간 문이 덜컥 열렸다. 들어오너라. 아무래도 날 놀린 거야. 토마스는 입을 잔뜩 말아 물고 총장실 안쪽으로 걸어갔다. 작은 아이의 그림자마저 사라지고 나자 두껍고 무거운 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아직 보고서가 다 완성되지 않았는데…….”
“알고 있다.”
“어째서 그럼…….”
토마스는 도통 어른들의 화법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 알고 있다면서 왜 굳이 자신을 불렀을까. 뭔가 따로 시킬 일이라도 있는 건가. 데굴데굴 눈만 열심히 굴러갔다. 그런 아이를 바라보던 총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토마스. 묵직하게 들려오는 이름에 토마스가 눈을 들었다.
“네?”
“네가 꼭 해야 할 일이 있단다.”
“무슨 일이죠?”
“가보면 알 수 있겠지.”
“안 할 순 없는 거죠?”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만일 제가 하기 싫다는 이유로 거절할 수 있다면 절 이렇게 따로 불러내지 않으셨을 테니까요.”
“역시 똑똑하구나.”
“…….”
똑똑하단 말이 칭찬일까. 토마스는 자신에게 선택권이 없다는 사실만 다시 알았을 뿐이었다. 잠자코 고개를 끄덕인 아이는 옆에 서 있던 연구원의 안내를 따라 총장실을 나섰다.
“도대체 무슨 일이죠?”
“가보면 저절로 알게 되겠지. 중요한 일이거든.”
“…….”
쉽사리 말을 해주지 않는 연구원을 빤히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쉬었다. 눈을 깜박거리고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적셨다. 그렇게 손을 잡고 한참 걸어간 곳은 예상외의 장소였다. 토마스가 다닐 수 있도록 허락된 곳보다 훨씬 깊숙한 곳에 비밀스럽게 위치한 연구실이었다. 토마스는 다른 또래보다 많은 장소와 정보에 접속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지만, 이렇게 깊숙한 곳에 들어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통제구역을 지났지. 토마스는 머릿속으로 지나온 철문의 개수를 셌다. 그러는 동안 멈출 줄 모르는 발걸음은 점점 깊은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순간 코에 소독약 냄새가 울컥 흘러들어왔다. 으. 자연스럽게 얼굴을 찡그리는 아이를 다독이던 연구원은 그러면서도 발을 멈추지 않았다. 사방이 꽉 막힌 공간에 소독약 냄새까지. 한 번 무서운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었다. 이 정도는 익숙한 일이라며 애써 생각을 하지 않으려 했지만, 금방이라도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끌려갈 것 같았다. 연구원은 그 복도에서 가장 안쪽에 있는 수술실로 토마스를 데려갔다.
“토마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화들짝 놀라는 아이는 눈을 커다랗게 뜰 뿐이었다. 시키는 대로 얌전히 옷을 갈아입었다. 중요한 일은 아마 수술이었던 것 같았다. 펄럭거리는 수술복 아래로 마른 종아리가 보였다. 옷자락을 두 손으로 꾹 잡고 버티는 녀석을 살살 달래서 침대에 앉히려 했다. 하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몇 번이나 이리 오라고 불렀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달래다 못 한 연구원이 성큼성큼 아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아차 할 새에 손목을 틀어잡고 구석에서 끌어냈다.
“…….”
차가운 수술대 위에 걸터앉은 아이는 굉장히 불안해했다. 한 사람이 마른 팔뚝을 문지르며 혈관을 찾는 사이 다른 사람이 다가와 토마스를 달래기 시작했다.
“토마스.”
“…….”
“토마스. 오늘 네가 받을 수술은 우리가 연구하는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란다.”
“…….”
“전 이런 소리 들은 적 없어요.”
당돌하게 말하는 아이의 눈은 또박또박 말하는 입과 반대로 엄청나게 흔들렸다. 그런 불안한 움직임을 알아채자 어른들은 사람 좋게 웃으며 아이를 달랬다. 칭얼거리는 아이쯤 그대로 마취제나 안정제를 투약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토마스는 말 그대로 특별한 아이였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실험군과 같은 취급을 했다간 뒤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수 있었다.
“토마스가 우리의 희망인지 알아보려는 수술이란다.”
“…….”
“아주 작은 수술일 뿐이야. 별로 달라진 걸 느낄 수도 없을걸. 총장님은 네게 많은 기대를 하고 계신단다.”
솔직히 비겁한 말이었다. 토마스는 연구원의 입에서 총장이란 단어가 나오자마자 애써 이 수술을 받아들이려 했다. 총장. 위키드. 플레어. 토마스를 움직일 수 있는 단어들이었다.
토마스는 은연중 이 수술이 플레어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태양이 세상을 잡아먹으면서 만들어낸 최악의 병이었다. 뇌를 파먹으며 점점 깊이 들어가는 바이러스는 너무나 공격적이었다. 게다가 그 병이 퍼지는 것은 예측하기 힘들 정도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수많은 피해자를 만들고 가정을 파괴했다. 물론 토마스도 그 희생자 중 한 명이었다.
얌전해진 아이를 재빨리 침대에 눕혔다. 산소마스크를 통해 마취 가스가 흘러들어 가기 시작하자 불안하게 흔들리던 눈길이 점점 무거워졌다. 잔뜩 긴장해 불규칙하게 내뱉던 호흡도 점점 잦아들었다. 꽉 쥐고 있던 주먹이 스르르 풀리는 것을 기점으로 수술이 시작되었다.
“다들 알다시피 이번 수술은 매우 중요하다. 일단 토마스가 성공하면 그다음으로 뽑아놓은 아이들에게 시술한다.”
“네.”
“토마스에게 처음 수술을 허락하신 것은 엄청난 일이고, 위키드의 근간을 흔들 수 있다는 소리기도 하다. 모두 정신 바짝 차리고, 혹여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다면 곧장 보고하도록 한다.”
“알겠습니다.”
“그럼 시작하지.”
작은 숨소리마저 내려앉은 곳을 찾지 못하고 파르르 흩어졌다. 토마스는 마치 다시는 깰 수 없는 잠이 든 것처럼 얌전히 누워있었다. 바싹 마른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진 몰라도, 이따금 눈꼬리에 눈물방울이 맺혔다.
수술은 생각보다 길어졌다. 사방이 막힌 수술실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시계를 보자 이미 한참 돌아간 시곗바늘이 연구원들을 맞아주었다. 간신히 회복실로 돌아온 토마스는 온몸에 주렁주렁 링거와 튜브를 달고 있었다. 여전히 의식은 없었다. 이젠 토마스가 스스로 깨어나기만 기다려야 했다. 각종 약물이 담긴 팩을 하나하나 정리한 의료진이 조심스럽게 자리를 비켜줬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의식을 회복할 단계가 남아있었지만, 그건 온전히 토마스의 몫이었다. 수술에 관한 보고서가 총장에게 올라갔고, 위키드의 수장은 그 보고서를 하나하나 읽으며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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