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민호/토민호] Good - Bye Moebius 005 [선공개분 完]
+) NOTICE
영화 기준으로 토마스가 초반 글레이더들과 함께 공터에 올라갑니다.
IF 책에 예민하신 분들은 피해주세요.
결과적으로 영화와 비슷한 줄거리지만, 중간중간 다른 방향으로 사건이 전개 됩니다.
선공개 분엔 없지만 이후 원고에 (후천적) 엠프렉 소재 및 모브X민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임신 이후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행복한 분위기는 아닙니다
적당한 망상과 설정 붕괴가 언제나 함께 합니다 ㅇㅅㅇ)9
선연재분이 끝났습니다!
이 이후 작업물은 민른전 신간으로 만들어집니다 봐주셔서 감사해요!
어느정도까지 연재 후 뒷부분을 추가해 회지로 만들 예정입니다.
책이 나와도 연재한 분량 자체를 지우진 않습니다.
write. 환월
Good - Bye Moebius 005
토마스는 결국 소원대로 러너가 되었다. 물론 반쯤 우기는 녀석을 말릴만한 사람이 없기도 했다. 토마스는 내내 러너 팀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몇 번 말려보던 녀석들은 이미 두 손을 들고 물러난 상태였다. 그 꼴을 전부 보고 있던 뉴트는 맘대로 해보라면서 모든 결정권을 러너 팀장에게 넘겼다.
“…내가?”
“물론이지. 러너 팀에 대한 것은 모두 민호가 결정권을 가지고 있으니까. 뭘 새삼스럽게 그래.”
“…흠.”
“괜찮아 보이면 일단 데려다가 가르쳐 보던가.”
“…….”
“민호는 못 봤겠지만, 처음 올라와서 냅다 달리는 걸 봤는데 달리기는 제법 빠른 것 같았어.”
“…….”
민호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뉴트는 물론 그런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당장 뉴트도 상처를 입고 러너에서 빠졌다. 그리고 지금가지 꽤 많은 숫자의 러너들이 미로를 뛰어다니는 것에 염증을 느끼고, 자신이 할 일을 포기했다. 이젠 땅을 일구거나 건물을 올리고 있는 옛 러너들은 보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민호. 난.”
그새를 못 참고 토마스가 한마디 덧붙이며 끼어들었다. 민호에게 다가가기 전 뉴트가 손을 들어 토마스를 저지했다. 여전히 깊은 고민에 잠겨있는 민호의 미간엔 단단한 주름이 잡혀있었다. 팔짱을 낀 팔엔 다부진 근육이 보였고, 단단하게 땅을 버티고 서있는 발은 절대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았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다가도 멈춰서 움직이지 않았다.
“…민호.”
토마스는 그런 침묵을 견디기 힘들어했다. 당장에라도 대답을 원하는 표정으로 민호에게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주변에서 토마스를 잡고 놔주지 않았다. 좀 가만히 있어 토마스. 억지로 자리에 앉혀진 녀석은 잔뜩 불안한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볼 뿐이었다.
“좋아.”
“민호!”
냉큼 일어나던 토마스가 또 한 번 저지당했다. 이거 놔 줘! 토마스의 항의는 곧 시끄러운 목소리에 뒤덮여 사라졌다. 물론 이런 결정을 하는 덴 많은 생각이 뒤따랐다. 민호는 아직 토마스를 많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공터로 올라온 지 한 달도 안 된 녀석을 누가 쉽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근데 이 녀석은 정말 이상하단 말이야.”
“맞아.”
“…….”
토마스는 주위에서 한마디씩 들리는 소리에 눈을 찌푸렸다. 그런 토마스를 바라보던 민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말 한마디 하지 않아서 바짝 마른 입술을 타고 약간 갈라진 목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열정적으로 러너가 되고 싶어 하는 녀석은 지금까지 없었어. 도대체 왜 러너가 하고 싶은 거지?”
“난…….”
“그래. 토마스. 일단 러너를 시켜보겠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 이후엔 모두 네가 하기에 달렸어. 말해봐.”
“…….”
토마스는 신중하게 말을 고르고 있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어떻게 말해야 저 사람들이 날 믿어줄까. 물론 갓 공터에 올라온 신입이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진지하게 들어줄 사람이 많진 않았다.
“난…민호랑 같이 이곳을 나갈 출구를 찾을 거야.”
“…….”
“물론…내가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다들 믿기 힘들다는 것도 알고 있어. 하지만…….”
“하지만?”
“계속 눈에 밟혔어. 그리고 그곳으로 매일 들어가는 민호도. 내가 왜 처음 보는 곳이 신경 쓰이는지 그 답을 찾고 싶어.”
“…….”
“부탁해.”
토마스가 더 할 말은 없었다. 마지막 처분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입을 앙다문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토마스의 얼굴 절반을 가리던 그림자가 성큼 물러났다. 밝게 빛나는 눈동자를 한참 바라보던 민호는 여전히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저렇게 나대다 비명에 가고 말지.”
누군가 툭 던진 소리에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고요가 깨졌다. 둑이 터진 것처럼 수군거리기 시작하는 아이들 사이로 토마스는 올곧게 민호만 쳐다보고 있었다. 둘의 시선이 아주 잠깐 맞닿았다. 민호의 시선이 찌푸려지는 것 같다가도 훅 다가왔다.
“…좋아.”
러너에 관한 일은 민호의 결정이 절대적이었다. 민호의 한 마디에 아이들은 그렇게 결정된 거냐고 물으며 하나둘 자리를 떴다. 누구 하나 이번 일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반대하지 않았다. 갤리를 필두로 한 아이들이 모두 자기 일터로 돌아가고 나자 회의장으로 쓰는 움막엔 토마스와 민호, 그리고 뉴트와 알비 정도만 남아있었다.
“민호가 허락했으면 그걸로 된 거야.”
“…….”
“토마스. 넌 오늘부터 러너야.”
잔뜩 긴장했던 어깨가 그 소리를 듣고 나서야 조금씩 풀어졌다. 이제야 크게 숨을 내쉬는 녀석을 보던 뉴트가 슬쩍 알비를 바라보았다. 대장으로서 뭐라도 한마디 하라는 표정이었다.
“어차피 러너에 대한 것은 민호가 책임지고 있다만…….”
“응?”
“네가 그저 호기심으로 그러는 건지, 아니면 정말 진지한지는 상관하지 않겠어. 하지만 이거 하나는 명심해야 해. 새로운 러너 희망자가 나타나니 전까지 공터에 러너는 너와 민호뿐이라는 걸.”
“물론이야.”
“그럼 민호 잘 가르쳐서 데리고 다녀보도록 해.”
“귀찮은 신입이 생긴 기분인데.”
“네가 하라고 했으면서, 이제 와서 빼는 거야? 이 정도는 알아서 가르치고 고쳐서 써야지.”
“그런가.”
민호가 실없이 웃었다. 뉴트는 토마스를 불러 정식으로 둘이 인사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단단하게 못이 박힌 손을 덥석 잡은 토마스는 마치 아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굴었다. 민호는 그런 토마스가 부담스러웠지만, 어쩐지 눈을 뗄 수 없었다.
‘날…알던 녀석인가.’
스스로도 웃긴 질문에 허탈하게 웃었다. 이 공터에서 예전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몇 번이나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 했지만, 기억을 찾는 데 성공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민호였다.
‘그럴 리 없지.’
굳이 토마스가 익숙한 이유를 찾자면, 착각일 것이 분명했다. 그 착각이 뇌를 둘러싸고 허황 된 꿈을 불어넣고 있다고 믿었다. 가볍게 힘을 줘서 악수를 한 민호는 곧장 토마스를 밖으로 불러냈다. 러너가 됐으니 할 일이 많았다. 그러나 멍한 표정으로 민호가 걸어간 길을 바라보던 녀석은 뉴트한테 등을 얻어맞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민호가 부르잖아. 가봐.”
“응? 아, 알았어.”
허겁지겁 밖으로 뛰어나가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더 못 미더웠다. 저런 정신머리로 과연 러너를 할 수 있을까. 어쩐지 민호한테 짐을 얹어준 기분이었다. 뉴트와 알비는 두 사람 몫의 발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었다.
“민호!”
“…….”
“민호! 잠깐만.”
“…….”
말없이 뚜벅뚜벅 걸어가는 녀석의 뒤를 간신히 쫓아온 토마스가 어깨를 턱 잡았다. 휙 돌아서서 토마스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던 민호는 고갯짓으로 가야 할 방향을 말할 뿐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는 민호는 앞만 보면서 걷고 있었다. 토마스의 발목엔 습기를 잔뜩 머금은 풀잎과 진흙이 척척 달라붙었다. 걷다 말고 멈춰서 털어내야지 다시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민호는 그런 것쯤은 익숙한 모습이었다. 잠깐만! 몇 번이나 불러도 다시 돌아보지 않았다. 반쯤 뛰다시피 민호를 따라잡았다.
항상 해가 비추는 공터와 달리 깊고 울창한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찬 숲은 물기가 가득했다. 어디서 흐르는지 모르는 물줄기가 얕은 시내를 만들었다. 첨범 첨벙 물을 건너면 언덕이었다. 썩은 나뭇잎이 가득한 곳은 조금만 정신을 판다면 미끄러지기 딱 좋은 곳이었다. 나무 둥치를 잡고 바위를 골라 밟으며 간신히 언덕을 오른 토마스는 뻣뻣한 허리를 두드렸다. 그리고 이미 저만큼 멀리 걸어간 민호를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쉬곤 뛰기 시작했다.
“…아.”
“…….”
“민호! 도대체 어딜 가는 거야.”
“가보면 알아.”
“…….”
아까까지만 해도 곧잘 미소를 띠며 말하던 사람은 민호가 아니었는지, 도통 가까워지기 힘든 목소리로 띄엄띄엄 대답했다. 몇 번이나 민호를 부르다 포기한 토마스는 입을 다물고 열심히 걷는 데만 신경을 집중했다. 저 멀리 나무에 가린 움막이 눈에 들어왔다. 토마스는 그곳이 무슨 일은 하는 곳인지 꽤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러너들만 들어갈 수 있는 오두막이 보이기 시작하자 민호가 가볍게 뛰기 시작했다.
“왜?”
“여기서 기다려.”
“하지만…나도!”
“알아. 아니까 기다리라는 거야.”
민호는 오두막으로 들어오려는 토마스를 만류했다. 토마스는 아직도 자신을 못 믿는 것이 확실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억지로 밀고 들어갈 수도 없는 일이기에 볼을 부풀린 채 몇 나무에 기대섰다. 민호는 그런 토마스를 보고 나서야 조심스럽데 오두막 안으로 들었다.
“도대체 얼마나 중요한 것이 있기에…….”
토마스는 야속한 마음이 들었다. 러너를 시켜준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괜히 축축한 땅을 발로 툭툭 찼다. 안쪽에서 한참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날…왜 여기로 불렀지.”
토마스의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 정도가 되고 나서야 민호가 밖으로 나왔다. 언제나 비슷한 표정을 가진 녀석은 좀처럼 속마음을 읽기 어려웠다. 하지만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뭔가 안심이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이유가 뭘까. 토마스는 알아야 하는 것이 너무 많았다.
“…자.”
“응?”
민호가 토마스의 턱밑에 무엇인가 쑥 내밀었다.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깜박이던 녀석이 민호의 손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가죽을 얼기설기 엮어 만든 것은 확실한데 어디에 쓰는지 알기 힘든 물건이었다. 낯선 물건을 쉽게 받아들지 않는 토마스의 손에 억지로 그것을 쥐여 주었다.
“이제부터 네가 계속 쓸 물건이야.”
“내가?”
“그래.”
“이게 대체…….”
토마스는 묵직하게 쥐어진 것을 천천히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조끼와 비슷한 디자인이긴 한데 조금 달랐다. 가죽조끼를 가슴에 대보던 토마스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이렇게 쓰는 게 맞아?”
“그래. 러너는 종일 미로 안을 달려야 해.”
“…….”
“그리고 최소한으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무기도 있어야 하고. 그 조끼 뒤엔 작은 휴대용 주머니를 연결할 수 있게 되어있어. 거기에 물통과 비상식량을 넣어 다니면 돼.”
“…아. 민호가 쓰는 것과는 조금 다른 디자인이구나.”
“뭐…그런 셈이지. 일단 입어볼래?”
“응? 그래.”
어떻게 입는지 잠시 고민하던 토마스가 옷을 걸치자 민호가 가까이 다가왔다. 가죽 끈으로 연결된 곳마다 탄탄하게 잡아당겨 주며, 옷이 지나치게 크지 않은지 확인했다.
“좋아. 나쁘지 않네.”
“이게 러너라는 표식인가?”
“비슷해. 러너 말고는 이런 것을 입을 사람이 없거든. 이것보다 중요한 건 말이지.”
민호가 눈을 가늘게 뜨며 토마스를 훑어보았다.
“난 사실 네가 얼마나 빠르게 오래 뛸 수 있는지 몰라. 하지만 그걸 하나하나 검증하고 있을 시간이 없어. 그러니 내일부터 당장 미로에 들어갈 준비를 해.”
“…오늘은.”
“오늘은 안 돼. 이미 늦었어. 가까운 곳은 보고 올 수 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를 데리고 들어가고 싶진 않아.”
“…….”
“오늘 들어가지 않아도 미로는 언제나 열려있을 테니까. 굳이 먼저 서두를 필욘 없어.”
민호는 항상 알 듯 말 듯한 설명을 했다. 토마스는 당장 미로를 헤집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멋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러너가 된 이상 민호의 말이 절대적이란 것을 잊으면 안 됐다.
“내일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가볍게 전달할 내용도 있고, 처음이니 준비 시간이 오래 걸릴 거야.”
“알았어.”
“그럼. 그 정도만 하자. 오두막 안은 미로에서 무사히 빠져나오고, 러너를 그만두겠다고 말하지 않으면 보여주도록 하지.”
“응.”
토마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민호는 그제야 단단히 쌓아올렸던 철옹성을 조금씩 무너뜨렸다.
“그런데…민호!”
“왜?”
토마스가 대뜸 민호를 불렀다.
“혹시…우리 만난 적 있어?”
“…….”
“네가 낯설지 않아. 꼭 어디서 본 것 같고…가까이 서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아.”
“뭘 잘못 먹었나. 여기에 과거를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물론 우리가 서로 알던 사이일 수도 있지.”
“…….”
“하지만 그건 여기서 아무 짝에 쓸모없는 소리야. 괜한 소리 하면서 허황한 꿈을 따르지 마.”
민호는 토마스의 간절한 시선을 단호하게 쳐냈다. 물론 같은 말을 토마스에게 하고 싶었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공터에 불안감을 심어주는 것과 다름없었다.
서로 같은 생각을 하던 둘은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 공터로 돌아왔다.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주위에 몰려있던 아이들도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낯선 광경이었다.
***
밤은 빠르게 찾아왔다. 그리고 그만큼 쉽게 물러나면서 새벽을 몰고 왔다. 토마스는 긴장해서인지 깊은 잠을 잘 수 없었다. 이렇게 잠을 설치다간 몸에 무리가 올 것이 뻔했지만, 두근거리며 뛰는 심장이 잠이 드는 것을 방해했다. 토마스는 두 손을 심장 위에 올렸다. 두근. 두근. 두근. 얼마나 긴장했는지 심장은 불규칙하게 뛰었다.
“…하.”
토마스의 눈은 이젠 희미해진 별 무리를 따라가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자야 한다고 몇 번이나 속으로 되뇌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뒤척거리는 소리에 옆자리 친구들이 깰까 봐 쉽게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조금이라도 자야지. 눈을 억지로 감았다.
“…민호.”
그렇게 깜빡 눈을 붙이고 일어나니 벌써 벽 너머로 붉은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는 토마스가 주위를 둘러보며 민호를 찾았다. 하지만 저마다 몸을 웅크리고 있는 해먹 무리에서 특정한 사람을 찾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었다.
“민호는…여기서 같이 안 자는 건가.”
토마스는 모르는 사실 이었지만, 민호의 해먹은 다른 사람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러니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정작 토마스가 그렇게 찾고 있는 민호는 이미 옷을 갖춰 입은 채 해먹에 앉아있었다. 나무 그림자에 약간 몸을 가린 채 토마스가 하는 행동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발이 꼬여 넘어질 것 같은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내가 과연 저 녀석을 러너로 뽑은 게 잘한 일일까.”
몇 번이나 자신에게 물어봤다. 하지만 뾰족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사실 러너 생활이 여기서 나빠지면 나빠졌지, 좋아지진 않을 것이 뻔했다. 최악까지만 가지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닐까. 민호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계속 토마스를 살펴보았다.
“민호!”
결국, 원하는 것을 찾아낸 토마스가 쪼르르 민호 곁으로 다가왔다. 그래. 이제 일어났냐. 실없는 아침 인사를 주고받던 둘은 잠시 말이 없어졌다. 또 간질거리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
왜 둘이 마주 보기만 하면 이렇게 기분이 이상한지. 민호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리고 나서야 묘한 기분이 사라졌다. 토마스도 머쓱한지 괜히 신발 코로 땅을 푹푹 팠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은 언제나 두려움을 함께 가져오곤 했다. 민호는 이 상황마저 스트레스였다. 항상 냉정하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스스로 정해왔는데, 토마스가 올라오고 나선 그런 지침이 완전히 무너진 것 같았다. 오히려 저 신입 녀석이 좋을 대로 휘둘리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준비해야지.”
“응? 응.”
“따라와.”
이것저것 가지고 들어갈 것이 많았다. 물론 무거운 것을 들고 달리는 것은 미로에서 죽고 싶다는 소리와 마찬가지였다. 토마스가 메고 갈 휴대용 주머니에 육포 몇 개와 물통을 집어넣은 민호가 무게를 가늠했다. 이 정도면 되려나. 아래위로 팔을 움직이던 민호가 주머니는 토마스의 품으로 휙 던졌다. 두 팔로 묵직한 주머니를 받아든 토마스가 어설픈 손길로 조기 뒤에 주머니를 연결했다.
“항상 이 정도는 들고 달려야 해.”
“그렇구나.”
“그래 봤자. 물과 약간의 음식이 전부지만.”
“알았어.”
며칠 내내 밥을 먹을 때에도 구경 못 하던 고기였다. 정확힌 말려서 저장해 놓은 거라 딱딱하기 그지없는 육포였다. 토마스는 이런 것 하나하나가 러너들을 위주로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했다. 민호는 하나부터 열까지 토마스에게 해줄 말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노파심에 이야기하는 거지만, 미로에 들어가면 내 명령은 절대적이야.”
“알고 있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한 일도 해야 해.”
“응?”
“만약…….”
민호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예를 들어 내가 뛸 수 없을 정도로 다쳤을 때, 날 버리고 공터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한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야 해.”
“…….”
“난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니까. 그만큼 러너 일은 힘들고 외로우니까. 어중간한 마음으로 하는 거면 지금 그만두란 소리야.”
“…….”
한마디 대꾸하지 않았지만, 토마스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민호는 그런 토마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완전히 떠오른 태양을 받으면 밝고 따뜻하게 빛나는 눈동자를 보며 왠지 모를 안심이 들었다. 왜일까. 몇 번이나 속으로 되물어 봐도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토마스. 토마스.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덧없이 흘러가는 이름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내가…못 미더울지 몰라도, 절대 포기하지 않아.”
“넌 왜 미로에 집착하지.”
“그건 내가 민호한테 물어볼 말 같은데.”
“…….”
“출구가 있다면 그곳을 내 눈으로 보고 싶어.”
“…알았어.”
민호는 더는 묻지 않았다. 어떤 행동과 말투에서 토마스를 믿을 수 있는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뒤를 맡기고 미로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어지간히 믿음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토마스는 긴장한 표정이 역력한 채 민호를 따라갔다.
‘왜 이렇게 익숙하지.’
점점 가까워지는 미로의 입구는 꼭 어디선가 본 것 같았다. 꿈에서 본 걸까. 그래서 일어나면 아무런 기억이 남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처음 본 곳이 꿈에 나올 리 없었다. 억지로 뇌를 다시 헤집어 봐도 뾰족한 것이 생각나는 것도 아니었다.
‘난…누구지. 왜. 어째서’
토마스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민호가 마음에 들고, 눈에 밟히는 것은 우연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 ‘민호’가 미로를 달린다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내놓고 따라간다니. 그렇게 의문을 가지는 와중에도 토마스의 눈은 언제나 민호에게 닿아있었다.
“준비됐어?”
“응? 어…물론이야.”
“그래. 조금 있으면 문이 완전히 열릴 거야. 뒤처지지 않도록 조심하고, 절대 내가 내리는 명령을 어길 생각 하지 마.”
“알았어.”
“좋아. 토마스.”
민호가 가늘게 숨을 쉬며 지옥의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괴상한 소리와 함께 커다란 쇠붙이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민호가 익숙하게 두 손을 모은 채 눈을 감았다.
“…미로 안을 헤쳐나갈 민첩함을 그리고 미로 문이 닫힐 때까지 그리버로부터 안전할 수 있게 이끌어 주소서. 글레이드에 영원한 평화가 함께하길…그리고…….”
“…….”
민호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우리의 달림이 끝까지 헛되지 않도록 하소서.”
토마스의 귀에 들리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너무 무거웠다. 러너란 항상 이런 기분으로 미로 안을 달렸던 걸까. 민호의 기도는 끝나지 않았다. 뒤에서 내리쬐는 햇살이 팀장을 부드럽게 감쌌다. 긴 그림자와 함께 미로 앞에 서 있는 녀석이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가자. 토마스.”
“알았어.”
“들어가자마자 한참 달려야 중앙으로 갈 수 있어. 뒤처지지 말도록 해. 뛰어! 가자!”
민호가 먼저 뛰기 시작했다. 토마스는 그 뒤를 허겁지겁 따라갔다. 사람에 비해 커다란 미로는 금방 둘의 그림자마저 삼켜버렸다.
***
민호는 알아서 따라잡으라는 말을 지키려는 듯 빠르게 달렸다. 토마스는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으면서도 용케 그 뒤를 쫓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 보는 지리를 달리는 사람과 익숙한 민호는 분명 차이가 있었다. 민호가 갑작스럽게 몸을 틀며 오른쪽으로 사라지자 토마스는 벽에 부딪힐 뻔했다. 그 순간 속도가 확 줄었다. 토마스가 조금만 더 빨랐으면 그대로 벽에 코를 박고 뒤로 넘어졌을 것이 분명했다.
“민호!”
“조금만 더 가면 중심부여. 얼마 남지 않았어!”
“…아이고.”
민호를 불러도 어서 오라는 재촉만 돌아왔다. 오히려 속도가 더 빨라진 민호는 금세 앞으로 훌쩍 나가 있었다. 안 그래도 익숙하지 않은 지형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지만 여기서 민호를 놓친다면 다시 돌아갈 일이 막막했다. 토마스는 죽을힘을 다해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하늘을 찌를듯하게 솟아있는 미로의 벽이 조금씩 높이가 달라지고 있었다. 끝까지 자라지 못한 담쟁이 넝쿨이 벽을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꽤 낮게 내려온 벽 사이로 완전히 떠오른 햇빛이 스며들었다. 쭉 뻗은 직선거리를 달리던 민호가 조금씩 속도 조절을 했다.
“헉…헉.”
이젠 말을 건넬 힘도 없었다. 거칠게 터지는 숨만 미로 속에 가득 찼다. 아슬아슬하게 민호를 잡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조금만 더. 토마스가 이젠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다리는 간신히 움직이며 달렸다. 앞서가던 민호가 우뚝 멈춰 섰다. 민호의 등에 그대로 코를 박을 뻔한 토마스가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왜?”
“내가 알던 지형이 아니야. 여기부터 바뀐 모양이네.”
“…….”
“여기서부턴 천천히 지리를 외우면서 이동해야 해. 방금까지는 내가 아는 곳이라 빠르게 달렸지만…….”
“알았어.”
도대체 어떻게 외워야 하는 걸까. 토마스는 사방을 두리번거렸지만, 단단하고 높은 벽 외에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민호는 익숙하게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오른쪽과 왼쪽으로 복잡하게 꺾인 길마다 멈춰 서서 무엇인가 표시를 했다.
“뭐 하는 거야?”
“혹시 길을 잃더라고 이걸 보고 따라올 수 있게 표시는 해두는 거지. 아무런 대비 없이 깊이 들어가는 건 위험해.”
“…그렇구나.”
민호가 하는 대로 똑같이 담쟁이 넝쿨을 끊으려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칼이 생각보다 무디기도 했고, 오랫동안 벽을 붙잡고 살아온 담쟁이는 너무 질겼다. 낑낑거리며 간신히 가지를 꺾은 다음 길 한가운데 툭 던졌다. 민호는 꼬깃꼬깃한 종이에 갈림길을 간단하게 표시했다. 모든 것을 자세하게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자원이 넉넉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곳만 그리고 나머지는 머리로 기억해야만 했다.
“이걸 다 기억해?”
“물론이지.”
“…….”
“하루마다 미로의 위치가 바뀌어. 그리고 같은 구역을 다시 돌려고 하면 일주일이나 기다려야 해. 이번에 기억하지 못하면, 꼬박 일주일을 버리는 셈이니까.”
“그렇구나.”
“오늘은 일단 처음 들어오기도 했으니 천천히 감을 익히도록 해. 넉넉하게 시간을 주고 싶지만, 하루가 급한 사항이라 그럴 순 없어.”
“알고 있어.”
“일단 너무 많은 걸 생각하려 하지 말고, 가장 확실한 것 몇 가지만 기억해. 처음부터 너무 서두르면 한 번쯤 세게 넘어지니까.”
“…….”
민호가 말하는 것과 달리 토마스의 눈엔 미로가 항상 똑같아 보였다. 들은 바로는 일정 시간마다 미로가 움직인다고 했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머리가 아팠다.
‘민호는 이런 것을 항상 하고 있던 건가.’
몇 번이나 중간에 그만둘 거라면 시작하지 말라던 민호의 말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미로는 겉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무서운 곳이었다. 아마 들어오지 않은 사람들은 이 정도로 힘들 거라 생각도 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무얼 생각하던지 미로는 항상 그것보다 힘들고 어려운 곳이었다.
“가자.”
민호는 금방 지형을 파악했는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토마스는 간신히 미로에 대한 정보를 머리에 욱여넣었다. 달릴 때는 다른 생각을 하기 힘들었다. 조금 이 일에 익숙해진다면 모를까, 지금은 민호의 등을 보고 달리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자꾸 발이 서로 엉킬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잔뜩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달리기에 집중하지 못하니 금방이라도 큰일이 날 것 같았다. 똑같은 벽을 보고 달리자니 자꾸 헛것이 보였다. 움직일 리 없는 미로가 자꾸 길을 새로 만들면서 토마스의 발목을 잡았다. 몇 번이나 고개를 흔들고 연신 눈을 감았다가 뜨며 길을 똑바로 보려 했다.
“…아.”
그 순간 벽 너머 멀리서 기괴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처음 공터에 올라왔을 때 해먹에 누워서 들었던 바로 그 소리였다. 순간 등에 소름이 쫙 돋았다. 그리고 온몸이 얼어붙는 것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계속 뛰어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꼭 어디선가 본 모양새였다. 이렇게 몸이 맘대로 안 움직이고, 불안하면 분명. 그 순간 토마스는 발이 꼬이면서 와장창 무너졌다. 단단한 돌 바닥에 온몸을 쓸며 그대로 몇 번이나 데굴데굴 굴렀다. 뒤에서 들리는 소란에 민호가 휙 뒤를 돌아보았다.
“…이런.”
바닥에 그대로 엎어진 토마스가 끙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머리 위론 계속 그리버라고 부르는 괴물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귀가 먹먹하고, 몸이 굳었다. 마치 맹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 것 같았다. 그리버가 울부짖는 소리는 듣는 순간 오감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그런 토마스를 보며 혀를 차던 민호가 천천히 다가왔다.
“잘 달릴 수 있다며. 혼자서 넘어지는 녀석이 할 소리야?”
“…….”
“달리기를 잘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보다 구르는 걸 더 잘하는 모양이다? 토마스?”
“…아냐. 잠깐 발이 걸려서.”
토마스가 땅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아. 손목이 욱신거렸다. 아무래도 넘어지면서 잘못 디딘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온몸이 잔뜩 쓸리고 긁혀서 말이 아니었다. 팔은 바닥에 완전히 찢겨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피 냄새가 훅 올라오자 민호가 표정을 찡그렸다. 머릿속에서 억지로 묻어두었던 생각이 살아 올라왔다.
“다리는?”
“어?”
“다리는 괜찮아?”
“괜찮아. 그냥 팔이 좀 긁혔을 뿐이야.”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일어서던 토마스의 팔목이 푹 꺾였다. 민호가 조금 더 다가왔다.
“천 같은 거 없어?”
“어? 잠깐만.”
토마스가 주머니를 뒤졌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한숨을 쉰 민호가 토마스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곤 자신의 주머니에서 낡은 천을 꺼냈다. 상처가 길게 나 있어 다 싸매진 못했지만, 얼추 상처를 묶을 수 있었다. 피가 멈추지 않아서 천에 붉게 배어 나왔다.
“어쩔 수 없지. 일단 돌아가자.”
“하지만…….”
“이 모양을 하고 계속 달리겠다고? 그러다 또 넘어지기라도 하면, 우리 둘은 꼼짝없이 미로에서 죽는 거야.”
“…….”
“잔말 말고 일어서. 공터로 돌아간다.”
민호는 두 번 말하지 않았다. 토마스의 손을 잡고 일으킨 다음 앞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토마스는 비틀거리며 뒤를 따랐다. 그래도 다리를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미로에선 뒤를 돌아보는 것을 금한다. 민호가 항상 하던 말이었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두려움이 몸을 잡아먹을 거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토마스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계속 신경이 쓰였다. 앞서 달리던 민호가 계속 불안한 듯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만든 규칙을 어기고 있는 리더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토마스! 딴 생각하지 말고 빨리 따라와.”
“알았어.”
“…….”
민호도 민호대로 생각이 많았지만, 토마스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달려도 끝까지 따라오는 기괴한 소리가 계속 발목을 붙잡았다.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온몸이 그 소리를 거부했다. 몇 번이나 다시 넘어질 뻔하고, 구를 뻔 했다.
돌아오는 내내 토마스의 속도가 점점 떨어졌다. 민호는 시간을 재며 계속 신입 러너를 재촉했다. 지금까지야 괜찮지만, 여기서 조금만 더 늦으면 꼼짝없이 미로 안에 갇히게 된다. 토마스를 재촉하다 못해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조금만 더 빨리! 토마스는 정신없는 와중에 민호의 손을 높지 않기 위해 꽉 쥐었다.
“…허억.”
다행히 미로의 문이 닫히기 바로 전 간신히 몸을 굴려 빠져나왔다. 그런 둘의 행색은 말이 아니었다. 한 명은 얼마나 굴러다녔는지 피가 말라붙은 두 팔과 꼬질꼬질한 흙먼지를 가득 뒤집어썼다. 민호도 굉장히 지친 표정이었다.
“뭐야. 둘 다 왜 이래?”
“일이 좀 있었어.”
“토마스는…또 넘어졌어?”
“그래. 잘 달린다고 하더니, 이런 녀석이었어? 잠깐. 또 라고? 넘어진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야?”
“내가 말 안 했던가. 그때도 넘어지긴 했거든.”
“…….”
민호는 뉴트의 말을 듣자 헛웃음을 터뜨렸다. 너희 짜고 날 속인 거냐?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던 민호가 털썩 땅에 주저앉았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며 땀에 젖을 얼굴을 슥슥 닦았다. 조금 다치긴 했지만 무사했다. 그러면 다행이었다.
“…….”
하지만 그렇게 웃으면서 대화를 할 수 있는 민호에 비해서, 토마스의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도대체 뭘 본 걸까. 민호도 알지 못했다. 토마스는 무언가 굉장히 무서운 것을 본 것처럼 다친 팔을 감싸 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을 뿐이었다. 토마스는 좀처럼 일어서지 못했다.
“도저히 안 되겠네. 이 녀석 좀 봐주고 있어. 난 미로 정리 좀 하고 돌아올 테니까.”
“…….”
“뉴트. 잠깐만 저 녀석 부탁한다. 의료반이나 제프를 불러서 팔 좀 치료해 주라고 해줘.”
“알았어.”
“저기…민호.”
터질 것 같이 두근거리는 심장이 조금 진정 되었는지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민호가 한발 먼저 일어났다. 그리곤 미로에 대한 정보와 보고서를 작성하러 떠났다. 눈앞에서 사라지는 민호의 바지를 붙잡으려 하던 토마스가 그대로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그런 모습을 보던 뉴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녀석은 도대체…….”
“…….”
쓰러진 토마스를 간신히 해먹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녀석의 팔에 붕대를 감아줬다. 도대체 뭘 봤을까. 뉴트는 이젠 희미해진 러너의 기억을 더듬었다.
“…모르겠다.”
미로에 들어갔던 사람 중에서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무섭다거나, 긴장해서 더러 발이 꼬인 녀석은 있었지만, 발작에 가까울 정도로 힘들어하는 놈은 토마스가 처음이었다. 간신히 잠이 든 신입을 바라보던 뉴트는 조용히 자리를 떴다.
악몽은 항상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찾아왔다.
그리고 지금은 멀쩡히 눈을 뜨고 있는데, 꼭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단어와 영상이 눈앞에서 어른거리고 귀를 파고들었다. 듣기 싫어도 방법이 없었다. 누군가 토마스의 어깨를 흔들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깨어나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몇 번이나 끈질긴 꿈에 괴로워하던 녀석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중심을 잡지 못한 몸이 해먹에서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와르르 굴러떨어졌다. 그 와중에 다친 팔부터 떨어졌는지 온몸에 짜릿한 고통이 느껴졌다.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끙끙거리는 토마스 위로 검은 그림자가 졌다.
“꼴좋다.”
“…….”
희미하게 보이는 얼굴은 민호였다. 그 순간 머릿속을 괴롭히던 소리가 한 번에 사라졌다. 귀에 이상한 소리가 아닌 동료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마구잡이로 깨지던 시선이 하나로 또렷하게 잡혔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던 토마스가 민호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도대체 얼마나 무서운 걸 본 거야?”
“…….”
“미로에서 말이야.”
“…….”
“그리고 이렇게 될 거면 왜 러너를 하겠다고 했지? 하루도 못 가서 망가지는 신입은 사양이야.”
“내가…….”
“이럴 거면 시간이 더 지나가기 전에 그만둬. 더는 동료들이 죽는 걸 보는 것도 사양이니까.”
“…….”
“넌…역시 이상해. 토마스.”
“난. 아니야. 민호.”
“…….”
달빛을 등으로 받고 있어 얼굴엔 짙은 그림자가 졌다. 그래서 민호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가슴에 칼처럼 박히는 목소리엔 분노와 공포 그리고 알 수 없는 감정이 분명히 느껴졌다.
“…따라와.”
민호는 언제나 같이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한번 비틀거리며 일어난 토마스가 민호의 뒤를 쫓았다. 어디로 가는 건지 물을 수도 없었다. 민호는 조금 떨어진 나무에 걸어둔 잠자리로 가는가 싶더니 이내 발걸음을 숲으로 옮겼다.
완전히 어둠이 내린 밤에 숲으로 들어가는 것은 또 처음이었다. 빽빽하게 자란 나무들이 달빛을 감추기 시작하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발엔 자꾸 턱턱 썩은 나무 둥치가 걸렸다. 몇 번이나 넘어지는 것을 간신히 버텼다. 힘겹게 걸어가는 토마스와 달리 민호는 마치 눈앞에 길이 보이는 것처럼 저벅저벅 걸어갔다.
“저기! 민호! 잠깐만!”
“…….”
“야!”
“…….”
사실 이렇게 부른다고 민호가 발걸음을 늦춰줄 리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숲 속 지리에 해박하지 않은 토마스는 눈앞의 사람을 놓치면 꼼짝없이 여기서 밤을 새워야 할 판국이었다. 그리고 잘못 발을 디뎌서 구르기라도 하면 죽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미로에서 죽는 것도 아니고 숲이라니. 인정할 수 없었다. 얇고 가시가 있는 나무에 온몸이 긁히는 것도 모른 채 급히 걸음을 옮겼다.
“어디쯤인지 하나도…모르겠네.”
앞으로 걷고 있는지, 옆으로 걷고 있는지. 하나도 모르는 상태로 눈앞에 간신히 보이는 민호만 쫓아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짙은 숲을 뚫고 들어온 달빛이 희미하게 길을 밝혀주었다.
토마스의 눈앞엔 나무로 만든 움막이 나타났다. 한참 동안 숲 속에서 헤맨 탓에 어둠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눈은 다행히 커다란 건물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제야 저번에 와본 곳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간신히 러너의 오두막에 도착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민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구름이 달빛마저 가려버리는 통에 빛 하나 없는 움막 안을 들여다봐도 어둠밖에 보이지 않았다.
“…….”
“뭐해? 들어 와.”
“아직 들어오면 안 되는 곳이라며.”
“싫으면 거기 계속 서 있던가.”
“…….”
“맘대로 해라.”
움막 안에서 민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이 마지막으로 물어보는 거다. 그 말을 듣자마자 토마스가 조심스럽게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횃불 하나 없는 곳은 얼기설기 엮은 나무 지붕 사이로 흘러내리는 달빛이 전부였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희미한 인영이 보였다. 민호는 늘 곧게 선 채로 토마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민…호?”
나무가 울창하지 않아 하늘이 보이는 곳에 있는 움막은 보통 달이 뜨면 꽤 환해졌다. 하지만 오늘따라 짙은 구름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토마스가 눈을 찌푸리며 민호의 표정을 읽으려 노력하는 그 순간 구름이 걷히고, 달빛이 와르르 쏟아졌다. 아. 숲이 바람을 따라 우는 소리를 들었다. 짙은 구름이 똬리를 틀고 버티다 바람에 떠밀려 달 주위에서 물러간 것 같았다. 달빛이 쏟아지는 움막 안에 조용히 앉아있던 민호가 고개를 들어 토마스를 바라보았다.
“넌 출구를 찾고 싶다 했지?”
“맞아.”
“그러면…혹시.”
민호답지 않게 쉽게 말을 잇지 않았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뭔가 계속 생각하면서 말을 아끼고 있었다. 잘게 떨리는 팔뚝에 닿았던 달빛이 파스스 부서져 내렸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하얀 달 부스러기를 바라보던 토마스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거야. 민호.”
“…….”
눈마저 꾹 감아버린 민호 곁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어둠 속에서 뭔가 단단한 것이 허벅지에 닿았다. 손끝으로 천천히 만져보니 나무로 만든 거대한 원탁이었다. 민호는 토마스의 손이 닿은 그 탁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민호?”
“이곳엔 출구가 없으면 어쩌지?”
“…뭐?”
토마스는 민호의 말을 듣고 정신이 멍해졌다. 누구보다 단단하게 출구를 찾고 있던 녀석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는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민호의 얼굴엔 그늘이 가득했다.
“만약…정말 출구가 없다면.”
“왜 그런 소리를 해.”
“출구가 없으면…그땐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
“…….”
“난 알비의 결정을 따를 거지만, 넌 받아들일 수 있겠어?”
“뭘?”
“모든 상황에 대해서.”
“…….”
“네가 올라오기 전에 이미 지도의 절반을 완성했어. 그때까지만 해도 나도 금방 출구를 찾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지.”
토마스는 민호의 시선이 살짝 떨리는 것을 발견했다. 애써 감정을 추스르려고 하지만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커다란 탁자 위엔 뭔가 올려져 있었다. 민호는 그 위를 덮고 있는 천을 벗겨냈다.
“…이건.”
“현재까지 완성한 공터 밖 미로의 지도야. 매일매일 가져온 정보를 바탕으로 조금씩 만들고 있지.”
“…….”
토마스는 달빛이 그대로 쏟아지는 원탁을 멍하니 응시했다. 작은 나무 조각을 겹겹이 붙여서 만든 것은 한눈에 봐도 꽤 복잡했다. 토마스는 조심스럽게 손끝으로 미로 모형을 만졌다.
“…….”
손에 달라붙는 나무 조각엔 얼마나 많은 생각이 서렸을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이만큼 지도를 만들기 위해 몇 명이나 이곳을 거쳐 갔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문득 민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던 와중에 민호는 항상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난…도망가지 않을 거야.”
“…….”
“그리고 꼭 출구를 찾을 거니까.”
“토마스.”
“그리고 난 민호를 믿어. 지금까지 네가 가던 길이 잘못됐다곤 절대 생각하지 않아.”
“…….”
도대체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쉽게 믿을 수 있을까. 민호는 그런 토마스를 순간 멀리할까 생각도 했다. 처음 본 사람을 아무런 이유를 달지 않고 어미 오리를 따르는 것처럼 따라다녔다.
‘너는 왜 나를 믿지.’
민호는 몇 번이나 그 말을 하고 싶었지만, 토마스의 눈을 보면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이 일방적인 믿음을 계속 받아도 될까. 민호는 오랜만에 고민하고 있었다.
“우리가 가는 방향의 결과가 좋지 않다고 해도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분명 끝에 출구가 있다고 믿어.”
“나도 그렇게 생각은 하고 있어.”
“그리고 내가 이렇게 출구가 있다고 믿는 건 민호가 내 앞에 있기 때문이니까.”
“토마스.”
“…민호. 난 널 처음 볼 때부터 뭔가 익숙했어. 과거에 대해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지만, 어쩐지 예전에 널 만났던 것 같아.”
“…….”
허튼소리 하지 말라던 민호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씁쓸함이 밴 웃음이 허망하게 밤하늘에 흩어졌다. 민호가 손끝으로 미로를 더듬어 나가자, 토마스도 반대쪽에서 똑같이 따라 했다. 중간 지점. 그러니까 공터에서 두 손이 만나서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둘은 결국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난 말이야. 민호와 함께 달린다면 그 미로의 끝이 절망뿐이라도 괜찮다고 생각해.”
“…올라오자마자 날 이렇게 믿는 녀석도 처음이라.”
“분명 어디서 만났을 거야. 그렇게 믿으려고.”
“…….”
“어디서 만났을진 모르겠지만…….”
“그래. 우리 둘은 어딘가에서 만났다고 치자.”
“좋아.”
그 말을 끝으로 둘은 더 이상 대화를 하지 않은 채 움막 안에서 밤을 지새웠다. 달빛이 잠시 머물다가 지나가는 탁자와 지도 위엔 하얗게 뿌려진 새벽의 궤적이 남았다. 어느새 어깨를 맞대고 바닥에 앉은 둘은 서로 비슷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야지. 내일도 미로로 들어가지 않을까?”
“넌 그렇게 다치고도 들어갈 마음이 들어?”
“물론이지. 그저 그리버가 내는 소리에 놀랐을 뿐이야.”
“그럼 내일도 그리버가 울어 재끼면 또 넘어지겠군. 그런 어설픈 러너는 내가 사양하고 싶은데.”
“이젠 안 그럴 테니까 그만 놀려.”
“…….”
민호가 또 한 번 피식 웃었다. 그런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토마스가 퉁퉁 부어있던 입을 열었다.
“공터에 와서 민호를 만나 다행이야.”
“어째서?”
“그냥.”
“실없는 놈. 그러다가 비명에 간 녀석들 나 많이 봤다.”
“그냥 저주하지 그래.”
얼마 만에 웃어본 것인지 세지 못했다. 민호가 숨을 죽이고 배를 접으며 웃었다. 토마스는 옆에서 내내 눈을 흘겼다.
시간이 흘러갔다.
완전히 기울었던 달이 어느샌가 사라지고 희뿌연 안개와 함께 태양이 떠오를 때가 되었다. 그제야 둘은 조심스럽게 숲 속을 빠져나왔다. 아직도 몸에 익지 않아 불편한 해먹에 억지로 몸을 눕혀 잠을 청했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토마스가 조심스럽게 몸을 돌려 누웠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민호는 항상 다른 사람들과 조금 떨어져 있었다. 여기까진 이유를 물어볼 수 없어 그저 궁금하기만 했다. 조금 떨어진 나무 및 외진 곳에 해먹을 걸어둔 자리가 러너 팀장의 침실이었다.
‘민호는 왜 혼자서 자는 거지.’
단순한 물음이었다. 물론 잠귀가 밝다거나, 유난히 잠자리에 예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토마스가 보기엔 뭔가 도망치듯 최대한 먼 곳에서 잠을 청하는 것 같았다.
‘…어째서.’
당장 물어볼 순 없으니 그저 등을 보이고 돌아누운 민호의 등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그 등을 보고 있자니 몇 년 동안 혼자서 감당해야 했던 진실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혹시나 이 방향이 잘못된 것이면 어쩔까. 과연 그 것을 혼자서 감당할 수 있을까. 민호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온갖 생각이 토마스에게 옮아오는 것 같았다.
‘그래도…민호와 함께 있으면.’
토마스는 계속 민호를 쳐다보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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