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사는 게 팍팍했던지라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민호는 딱히 이런저런 해결법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런 민호를 보는 뉴트도 비슷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그냥 둘이 붙어있는 정도로 만족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누구보다 가까운 듯 그렇지 않은 듯 미묘한 상태로 둘은 여전히 항상 비슷한 거리를 둔 채 서 있었다.
“너희 둘은 이제 어쩌려고?”
토마스가 둘을 가만히 바라보다 툭 던진 말이었다. 물론 이런 말이 나올 수 없을 정도로 큰일이 있었다. 민호를 따르던 사람들은 모두 경비대에 끌려갔었다. 그 소식이 저 먼 곳에 살던 토마스한테 들어가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말로 꼬박 사흘은 달려야 올 수 있는 거리는 밤새 말을 바꿔 타면서 달려온 친구는 당장 신변 보증을 요청하며 경비대에 자리를 잡았다. 경비대 대장은 갑자기 나타난 부잣집 도련님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며 자리만 빙빙 돌았다.
“내 친구는 무사한가요?”
“곧 도착할 것이니 조금만…….”
“정말 내가 이래서, 그렇게 그만두라고 했는데.”
“…….”
사실 이곳에선 다른 것보다 큰 가문의 가주나 오래된 어르신의 말씀이 더 효과가 있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알려졌을 법한 부자라면 더했다. 토마스가 가져온 아버님의 말씀이 담긴 문서 한 장이 배달되자마자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이렇게 권력이라는 걸 눈으로 보고 싶진 않았는데, 토마스는 쓴 입맛을 다시면서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때 저 멀리서 인기척이 들렸다.
“…민호!”
“토마스?”
“내가 진짜 못 살겠어.”
저 멀리서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민호를 보자마자 토마스가 벌떡 일어났다. 그나마 크게 다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할 만큼 상황이 무시무시했던지 온몸엔 자잘한 상처가 가득했다. 민호의 팔엔 아직도 피가 배어 나오는 붕대가 꽉 묶여 있었다. 그 뒤에 따라 들어오는 뉴트는 잔뜩 쓸린 얼굴에 피딱지가 올라앉아 있었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잔뜩 다친 곳에 붕대를 하나둘 싸매고 있었다.
냉큼 뛰어나가 민호의 온몸을 살펴보던 토마스는 내내 한숨을 쉬었다. 민호 옆에 있는 뉴트 꼴도 말이 아닌지 한숨이 더욱 깊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대충 듣긴 했지만, 험하게 다친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그러기에 정리하고 우리 집에 오라고 했잖아. 도대체 이게 뭐야.”
“일이 좀 있었다.”
“좀 있는 게 아닌데. 뉴트는 괜찮아?”
“나야. 뭐. 다들 더 많이 다쳤지.”
너덜너덜한 옷을 벗고 경비대한테 빌린 가벼운 옷을 입은 뉴트가 눈썹을 떨어뜨리며 웃었다. 토마스는 이후 민호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모든 일은 보증한다는 말을 남긴 채 곧 떠날 준비를 했다. 더는 이곳에 머물게 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태도는 민호도 꺾지 못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대장님.”
“아버님께 제가 최대한 할 수 있는 모든 편의를 봐 드렸다고 꼭 전해주시길 바랍니다.”
“물론이죠. 그럼.”
“토마스…어딜 간다는.”
“어디긴. 우리 집이지.”
“…….”
“어차피 여기서 더 살 수도 없잖아. 겨울이 오면 더 추워,”
“…….”
“우리 집에 와서 천천히 겨울나면서 계획을 짜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딱히 할 일이 없어도 되지만, 나도 심심하니까 말동무 해주면서 공부나 하면 되는 거지.”
“그래도…….”
“아, 하는 김에 둘이 식도 올리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민호가 토마스의 입을 막았다. 하지만 토마스는 굴하지 않았다. 일단 우리 집에 들어가면 할 일부터 마저 끝내고, 천천히 생각해. 친구들도. 그런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프라이는 은근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친구?”
“민호 친구면 내 친구기도 하지.”
“그래?”
“웅. 우리 집으로 가려면 좀 멀긴 한데, 말을 갈아타고 급하게 갈 필요도 없으니 천천히 가는 거로 하면 되지 않을까? 다들 배고프지 않아?”
“그러고 보니…….”
경비대에 잡혀있으면서 밥 몇 술 얻어먹은 것이 다였다. 그나마 물이라도 넉넉하게 먹을 수 있게 해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해서 배가 고프다는 느낌을 잘 받지 못했는데, 막상 저런 소리를 들으니 위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일단 밥 좀 먹고 움직이자.”
토마스가 웃으며 민호와 뉴트의 팔을 이끌고 찻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
“아…안 입을 거야!”
“뉴트. 그러면 어쩔 건데.”
“지겹도록 입다가 겨우 찢어져서 내다 버렸는데, 또 입으라고? 난 싫어!”
“…….”
“이젠 좀 벗고 살아도 되는 거 아닐까?”
“…….”
옥신각신 씨름하던 뉴트는 방석에 터럭 주저앉았다. 그런 뉴트를 보는 민호는 뭐라고 한마디 말도 못한 채 그 앞을 왔다 갔다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둘을 지켜보며 한마디씩 훈수를 두던 토마스는 이미 웃음을 참지 못하고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냥 안 해도 된다고.”
“하지만…….”
“뭐 자랑할 것도 아니고, 우리 둘만 알고 있으면 되는 거 아니야?”
나름 논리적인 뉴트의 말에 말문이 막혀버린 민호는 좀처럼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하지 않는 민호를 대신해 토마스가 쑥 끼어들었다.
“민호는 네가 예쁜 옷 입는 쪽이 보기 좋다고 하던데.”
“…뭐?”
“기왕이면 예쁜 거 입고하면 좋잖아.”
“여자 옷…싫은데.”
“다른 사람 부를 것도 아니고 우리끼리 할 건데 뭐.”
“…….”
뉴트는 가만 생각을 하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얼굴이 풀리는 민호를 바라보던 토마스는 슬쩍 자리를 비켰다. 조용히 치르기로 했지만, 준비할 것이 생각보다 많았다. 비어있는 별채를 청소하고 새로 만든 방석과 벽걸이를 걸어둘 생각이었다. 색은 화사한 쪽이 좋으려나.
큰일을 해야 하니 괜히 먼저 시집간 누나들 생각이 났다. 남자가 할 수 있는 것엔 한계가 있었다. 조금이라도 꼼꼼하게 해주고 싶은데, 토마스는 사실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결국, 유모의 손을 빌리기로 했는지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별채엔 하인들이 분주하게 들락거렸다.
**
가장 맑은 날을 골라 조촐한 예식이 있었다. 멀끔한 차림으로 앉아있는 친구들은 민호를 가운데 둔 채 한마디씩 덕담을 보태고 있었다. 함께 있던 동료들 외엔 연고가 없는 사람이었다. 새신랑 옷을 입은 민호는 영 민망한 듯 자꾸 물만 들이켜고 있었다. 그런 민호를 보며 자꾸 술을 권하던 프라이는 껄껄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앞에 앉아있던 토마스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뭐랄까. 어릴 때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누나와 형들의 결혼식을 다시 보는 것 같았다. 얼굴에 상처가 가실 때까지 기다려야 해서 조금 늦어지긴 했지만, 그때보다 훨씬 날이 좋아서 잘한 선택이라 생각했다. 상 가득한 음식에 특별한 날에만 먹는 달콤한 과자들까지 줄지어 나왔다. 술에 고기까지 넉넉하게 들어가자 제법 잔치 분위기가 났다. 민호가 친구들을 상대하는 동안 뉴트는 내내 방 안에 있었다.
사실 신부 측에서 마련한 방에서 혼인 의식을 치러야 했지만, 뉴트는 그럴 수 없었다. 갈 곳이 없는 것은 민호도 마찬가지였기에, 토마스 쪽에서 방을 준비하기로 했다. 혼인 의식엔 증인이 필요했지만, 이것도 거의 불가능했다. 대신 프라이와 토마스가 양측의 증인이 되어주기로 했다. 혼인 의식을 하는 방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신랑과 신부. 그리고 증인 두 명과 의식을 주관해줄 고명한 승려 한 사람뿐이었다.
“오늘 혼인에 앞서 간단한 맹세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성전에 손을 얹고 맹세의 기도를 한다. 그리고 축복의 말과 함께 밀가루를 뿌려주고, 의식에 따라 빵과 고기를 나눠 먹고 마지막으로 소금물을 마신다. 물론 정식으로 하자면 이것보다 조금 더 복잡한 의식이 있지만, 모두 생략하고 약식으로 진행했다. 뉴트는 칭칭 감은 옷이 영 불편한 얼굴이었다. 마지막 축복의 말이 끝나자 승려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프라이와 토마스가 먼저 밖으로 나갔다. 민호가 가만히 뉴트를 바라보더니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뉴트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그 손을 잡았다.
“…….”
어쩐지 심장이 손끝에서 뛰는 것 같았다. 좁고 어두운 방에서 나오자마자 둘을 축복하는 것처럼 햇살이 쏟아졌다. 가늘게 웃는 뉴트가 민호의 손을 좀 더 꽉 쥐었다.
“…솔직히 말이야.”
“응?”
“뭐가 바뀌게 되는 건진 잘 모르겠어.”
“나도 그래.”
“잘 부탁해.”
“…나도.”
둘은 잠시 같은 높이로 눈을 맞추다 웃었다. 내내 같이 있었는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심장이 간질간질한지 알 수 없었다.
그 시간 뉴트는 간신히 격리실을 빠져나와, 되는 대로 헤매고 있었다. 옷은 사막에서 편히 움직일 만한 복장이 아니었다. 체온이 너무 올라가서 바깥이 뜨겁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두툼한 목도리를 둘둘 감은 채 간신히 눈만 내놓은 상태로 정처 없이 걸음을 옮겼다.
“여긴 어디지.”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간신히 만난 사람은 사막 모래에 반쯤 묻혀있는 송장이었다. 띄엄띄엄 광인들이 죽어있는 것을 이정표 삼아 광인 궁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물론 뉴트는 그 장소를 기억하지 못했다.
여전히 바짝 마른 손목은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본능이 시키는 대로 걷는 뉴트 뒤로 긴 그림자가 끓어올랐다. 체온은 점점 뜨거워져서 온몸의 피가 그대로 말라붙을 것 같았다.
이 발걸음이 멈추는 곳에 자신의 답답함을 풀어줄 사람이 있을 것만 같았다.
***
석양이 지고 있었다.
뉴트는 눈으로 새빨갛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정처 없이 걷고 있었다. 발길이 가는 대로 하염없이 헤매다 보면 언제나 어둠이 스며들었다. 오늘은 여기서 잠을 자야 하나. 온 세상을 집어삼킨 사막은 뉴트의 발목은 부드럽게 감싸 쥐고 놔주지 않았다. 뉴트는 한숨을 쉬며 사막 한가운데 털썩 주저앉았다.
“…….”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곳에 달빛이 하얗게 내렸다. 어둠을 밝히는 한 줄기 빛을 따라 저 멀리 다 무너져가는 건물이 흐릿하게 눈에 보였다. 아무도 살지 않는 곳에 홀로 앉아있는 뉴트는 최대한 바람을 피할 곳을 찾고 있었다. 가장 무서운 것은 모래 폭풍에 휘말리는 것. 두 번째는 영원히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죽는 것. 세 번째는 없었다. 혼자 있다거나 누군가 뒤에서 덮친다는 것은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어차피 한 번 죽을 뻔했는데, 그런 거로 목숨을 잃을 운명이라면 벌써 이 세상에 없을 거로 생각했다. 차 문이 다 떨어져 나간 자동차에 몸을 숨겼다. 세찬 바람은 어둠을 머금고 점점 추워졌다. 사막은 낮에는 끓어올랐지만, 해가 지면 그 어느 곳보다 추워졌다. 뉴트는 온몸을 빈틈없이 두른 옷을 좀 더 단단하게 여미며 가늘게 신음을 내뱉었다.
“…춥다.”
아무리 체온이 펄펄 끓어도 한계가 있었다. 쩍쩍 갈라진 손이 바람에 부서지지 않을까. 내일은 눈을 뜰 수 있을까. 뉴트는 한참 생각이 많아졌다. 누구를 만나야 이 답답함을 풀 수 있을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이미 세상은 다 죽어가고 있었고,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내일은 누군가 찾을 수 있길.”
뉴트는 항상 같은 생각을 하며 하루를 마무리 지었다. 계속 걷다 보면 이 사막의 끝이 보일 것 같았는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날수록 점점 그 생각이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모래로 된 비가 석 달 열흘 동안 내려서 모든 곳을 채워버린 것 같았다. 이젠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은 온통 부서진 유리와 뾰족한 철근이 마구잡이로 널려있었다.
“그래도…살아있으면.”
살아있으면 누군가 만날 수 있을 거야. 뉴트는 흐릿하게 빛나는 별 무리를 하나하나 세어보다 잠을 청했다. 조각조각 깨진 기억을 이어붙이는 시간은 고독하기만 했다. 꼭 잠이 들려 하면, 온갖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민호. 토마스. 알비. 척. 갤리. 단어가 조금 더 기억났다. 하지만 저 사람들이 누군진 아직 몰랐다. 적인지. 아니면 친구인지. 혹은 어른인지. 아무런 단서가 없었다. 그저 이름 한마디만 손에 쥔 채 세상을 헤맬 뿐이었다.
목이 타는 갈증을 해소하려면 저 사람을 만나야 했다. 만나서 붙들고 내가 누구냐고 물어봐야 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내가 당신들과 무슨 관계였느냐 라는 질문도 하고 싶었다. 뉴트는 너무 생각이 많아. 순간 귓가에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
뉴트가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귀에 들리는 것은 모래를 몰고 지나가는 바람뿐이었다. 산이었다면 메아리라도 말동무로 삼을 수 있을 텐데, 사막은 너무 황량했다.
“잘못 들었나.”
이젠 몸이 망가지다 못해 헛소리가 들리나 싶었다. 이 이상 몸이 안 좋아지면 움직이는 데 불편할 텐데. 뉴트는 지극히 현실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 몸도 굉장히 불편하긴 했지만 말이다. 조금이라도 잠을 자야 했다. 뉴트는 다시 꼬물꼬물 몸을 웅크렸다.
**
“민호.”
“…….”
“민호. 이쪽이야. 오늘은 이쯤에서 쉬자”
토마스는 한쪽만 남은 벽을 등 뒤에 둔 채 민호를 불렀다. 어둠 속에서 뭔가 보이는 건지. 민호는 내내 사막을 바라보며 눈을 찌푸리고 있었다. 하여튼. 민호가 저러고 있으면 앞으로 한 시간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토마스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익숙하게 덮을만한 것을 찾았다. 다 떨어진 누더기를 주워오고, 불을 피울만한 재료를 찾았다. 나무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적어도 불이 붙을 만한 목재 장식만 찾아도 행운이었다.
“…오늘은 운이 좋네.”
토마스가 사막에 반쯤 묻혀있는 문을 끙끙거리며 끌어냈다. 너덜너덜한 부분을 발로 강하게 밟자 뿌득 소리가 나며 쩍쩍 갈라졌다. 이 정도면 어떻게든 불을 피울 수 있었다. 주섬주섬 목재 조각을 들고 돌아온 토마스는 다시 한 번 민호를 불렀다.
“민호! 뭐가 보여?”
“응? 아니.”
허탈하게 웃으며 돌아선 민호는 토마스 품에 한가득 안긴 나무를 보자 미안한 표정으로 모래 언덕을 쭉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리곤 불을 피웠다. 이젠 노숙이 너무 익숙해진 둘은 자연스럽게 벽에 등을 댄 채 주저앉았다. 먹을 건 넉넉하지 않았다. 돌아갈 생각을 하면 이쯤에서 방향을 돌려야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괜히 모닥불을 들쑤시는 민호의 표정엔 내내 먹구름이 끼어 있었다.
토마스도 마찬가지였다. 민호가 가진 희망이 전염이라도 된 것인지 꼭 저 멀리 뉴트가 살아있을 것 같았다. 내일은 찾을 수 있어야 할 텐데. 간신히 한마디를 뱉어내곤 한숨을 쉬었다.
“일단 자자. 민호. 내일 움직이려면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야지.”
“내가 먼저 불침번 할 테니까. 먼저 자.”
“여긴 괜찮을 거야.”
“그걸 어떻게 알아.”
“그냥 내 느낌이야.”
“…….”
또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한다며 타박하던 민호는 예상보다 순순하게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사막은 밤이 추운 만큼 아침이 빠르게 왔다. 내일도 무사히 해가 뜨는 것을 볼 수 있길 바라고 또 바랄 뿐이었다.
**
뉴트는 해가 사막 끝에서 나타나기도 전에 발을 옮겼다. 슬슬 다시 달아오르는 사막은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 석양처럼 새빨갛게 물드는 아침 하늘을 바라보던 까만 눈에도 불꽃이 옮겨붙었다. 버석버석하게 마른 피부는 어제보다 조금 더 균열이 생겼다.
뉴트는 목도리를 코끝까지 올려 감았다. 예전엔 이 정돈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몸이 더 안 좋아진 건지. 아니면 체온이 점점 오르는 것인지. 해가 완전히 뜨고 사막에 뜨거운 공기가 가득 차도 몸은 내내 춥기만 했다. 적어도 위키드 내에 있을 땐 몸 상태에 대해서라도 알 수 있었는데. 괜히 입맛이 썼다. 이미 뛰쳐나온 것을 어쩌랴 싶어 고개를 몇 번 저을 뿐이었다.
운명인지. 아니면 필연인지. 뉴트와 민호, 토마스는 서로를 향한 채 곧게 걸어가고 있었다. 거리는 아직 꽤 떨어져 있었다. 이대로 누군가 방향을 틀지만 않는다면 적어도 스쳐 지나갈 순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알 리 없는 셋은 여느 때처럼 생명 반응을 쫓아 사막을 헤맬 뿐이었다.
“벌써 해가 지는 거야?”
“그럴 리가 없는데.”
“…….”
“민호. 뭔가 기분이 이상해.”
“…….”
“그리고 우리는 내일부터 다시 돌아가야 해. 알고 있지?”
“…….”
“다음에 다시 나오자. 그땐 아예 밖에서 두 배 정도 버틸 수 있게 짐을 가지고 나오는 거야.”
“…….”
“민호.”
“뉴트…살아 있겠지?”
“…….”
민호는 갑자기 무거운 말을 툭 던졌다. 처음으로 보인 흔들림에 토마스는 뭐라고 말을 할 수 없었다. 민호는 그런 토마스의 얼굴을 살피더니 괜한 소리를 했다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마른하늘에 비가 내렸다. 바짝 마른 사막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온 세상이 엉망으로 변했다. 모래는 물을 담을 힘이 없었다. 군데군데 푹푹 파인 곳엔 물이 흘렀다. 안 그래도 다리를 붙잡는 모래가 습기를 머금자 걷는 것이 점점 힘들어졌다.
“갑자기 무슨 비야.”
“나도 모르지.”
“…우리가 사막을 헤매고 다닌 지 몇 년이 된 거 같은데, 이런 거 처음 봐.”
“잔말 말고, 비 피할 곳이나 찾아. 이 똘추야.”
둘은 허겁지겁 비를 피하러 달려갔다. 세상을 집어삼킬 것처럼 쏟아지던 비가 멎는 덴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축축하게 젖은 옷을 훌렁 벗어서 물을 짜던 토마스는 언제 비가 내렸느냐는 듯 쨍쨍한 하늘을 보며 짧게 욕을 했다.
“아주 그냥 우리를 놀리나 보네.”
“…….”
“이거 마르기 전까진 모래가…자꾸…….”
“그래도 그쳐서 다행이다.”
“그건 그래.”
토마스는 또 어린애처럼 웃었다. 물기에 닿기만 하면 달라붙는 모래를 털어내는 것도 이젠 반 포기상태였다. 그리고 모래 먼지가 모두 가라앉은 덕분일까. 둘의 눈앞엔 다 무너져가는 커다란 건물이 보였다.
생각보다 도적 무리와 함께 사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물론 뉴트 뒤에 대장인 민호가 버티고 있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그것도 어떻게 보자면 뉴트가 얻은 행운이었다.
“…….”
하지만 그런 행운을 손에 쥐었음에도, 뉴트의 표정은 언제나 찝찝함이 가득했다. 그럴 만한 일이 있었다. 사람을 납치해왔으면 재빠르게 팔아버리던가,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각오한 일이기도 했다. 그나마 목숨이라도 부지하려면 잘했던 노동 종류라도 말해야 하는 걸까. 이곳에 양이라도 있으면 그쪽을 돌보면 될 텐데. 이런 쓸데없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런데 생각만큼 일이 흘러가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어쩌라는 거지.
차라리 끌고 나가서 말 먹이라도 주라고 떠미는 편이 훨씬 마음이 편했을 것 같았다. 뭔가 할 일을 시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잘 단장해 팔아버릴 것 같지도 않았다. 두목이라는 놈은 하루에 세 번 밥을 가지고 들어와서 네 말은 잘 있다는 둥 헛소리나 해댔다. 아, 물론 누르가 무사하다는 소리는 굉장히 기뻤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하긴 뭐 좋다고 얼굴 맞대고 대화하면서 밥을 먹겠어.’
여전히 몸에 주렁주렁 감긴 천을 정리하던 뉴트는 가늘게 한숨을 쉬었다. 밥도 잘 챙겨주고, 험한 일도 시키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이 천막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잠자리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호화로웠다. 도적단 두목의 천막을 차지한 녀석은 뻔뻔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어쩔 수 없을 만큼 황송한 대접을 받았다.
사실 불편해서 죽을 것 같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여기서 자라면 잘 수밖에 없었다. 민호가 사용하던 이불과 잠자리는 어느새 뉴트의 차지가 되어 있었다. 물론 천막 주인은 일주일 째 밖에서 밤을 새우다 한 소리를 들었는지 죽을상을 한 채 안으로 들어왔다.
“…….”
“내가 나갈까?”
“아니야.”
사실 밖에서 자도 상관없는데, 뭐 그리 큰일 날 소리를 들은 건지 무뚝뚝하게 대화를 확 끊어버리곤 했다. 그리고 천막 가장자리가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그렇게 이불 하나 방석 하나 나눠가며 잠을 자기 시작한 것이 벌써 일주일도 넘었다.
민호는 민호대로 맨바닥에 누워있으니 온몸이 결리고, 뉴트는 뉴트대로 이 상황이 너무 불편해서 잠을 설쳤다. 그래도 불편하단 소리를 입 밖에 낼 수 없어 꾹꾹 참으며 삼일을 같이 지냈다. 하지만 몸이 결리고 불편한 것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거기서 자지 마.”
“…응? 불편해? 나갈까?”
“…….”
“미리 이야기하지.”
“아니…내 말은 그게 아니고!”
벌떡 일어서는 민호를 다시 잡아 앉혔다. 도대체 이런 눈치로 대장 자리는 어떻게 꿰어찬 건지. 뉴트는 직접 말하기도 부끄러운 소리를 하나하나 밖으로 풀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민호는 머리를 긁으며 가만히 앉아있었다. 긍정도 그렇다고 부정도 하지 않는 얼굴을 바라보던 뉴트는 괜한 말을 했다면서 돌아앉았다.
결국, 어쩔 수 없이 같은 이불을 쓰기로 한 날부터 둘의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뭐 주변을 맴도는 부하 녀석들은 좋은 소식이라도 있을까 싶은 모양이었지만, 둘은 당장 이 어색한 공기에서 탈출하고 싶은 생각 만 가득했다. 자고 일어나서 서로 마주 보는 상황은 며칠 겪다 보니 조금 익숙해지긴 했지만, 도저히 그 아래로는 시선을 내릴 수 없었다. 천막에선 옷을 입는 쪽이 감기에 쉽게 걸린다. 이 이야기가 그렇게 억울하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누가 처음 시작했는지. 안 그래도 작은 이불 끝과 끝에 자리 잡은 둘은 금방이라도 구를 것 같았다.
“…….”
물론 해가 뜨기 한참 전부터 둘은 눈을 뜬 채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먼저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고 자는 척 고른 숨만 내쉴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기다리다 보면 바깥에서 해가 떠올랐다. 이 정도 시간이 흐르면 더는 버틸 수 없었다.
“…….”
민호가 일부러 잠이 덜 깬 척하며 끝까지 등을 돌리고 누워있으면, 뉴트가 먼저 일어나 옷을 입기 시작했다. 이불이 스르르 구겨지는 소리가 들릴 때면 민호의 귀가 또 벌겋게 물들었다. 죽은 듯 누워있으면 뉴트는 손끝으로 더듬어 옷을 끌고 왔다.
“…이걸 또 언제 입지.”
낮은 투덜거림조차 천막 안에선 너무 크게 들리곤 했다. 뉴트는 몇 번이나 한숨을 쉬면서도 제법 빠르게 옷을 챙겨 입었다. 민호는 여전히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뜨며 자는 척했다.
처음엔 빠르게 이 자리를 벗어나려고 서로 일어나 각자 옷을 입긴 했다.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물론 허겁지겁 손을 놀리다 보면 꼭 실수했다. 손이 서로 엉켜서 서로 남의 옷을 들고 가기도 하고, 소매가 서로 엉켜서 끙끙거리며 풀기도 했다. 그러다 알몸 상태로 서로 마주 보고 난 이후로 유난히 내외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한데, 뉴트는 입을 옷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끙끙거리며 옷을 입던 녀석은 결국 자기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겉옷을 내팽개쳤다. 절그럭거리는 장신구 소리도 요란했다. 아이 씨. 짜증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민호의 귀에 쿡 박혔다. 그런 소리까지 들었는데 계속 자는 척을 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왜 그래.”
“…….”
“뭐가 그렇게 또 짜증이…….”
“너 같으면 안 그러겠어?”
“…….”
민호가 모른 척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물론 진작 민호가 깨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뉴트는 샐쭉하게 눈을 흘겼다. 반쯤 걸치다가 만 옷을 추스를 생각도 하지 않고 민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속살을 본 것도 아닌데 어쩐지 눈을 둘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어차피 나 팔아버릴 거 아니지 않아?”
“응?”
“맞아? 아니야? 대답해 봐.”
“그야……”
민호는 또 말끝을 흐렸다.
자신은 이제 그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부하들의 생각을 알 수 없었기에 함부로 단언할 수 없었다. 뉴트는 딱히 감정이 보이지 않은 녀석의 얼굴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뭐…좋아.”
“…….”
“사실 팔아버린다 해도 그 때 되면 알아서 옷을 주겠지.”
“그게 무슨 소리야?”
“답답하네. 진짜.”
뉴트가 또 미간을 구겼다. 잠깐 같이 있는 동안 민호가 겨우 눈치를 챈 뉴트의 버릇이었다.
“뭐가.”
“그런 눈치로 잘도 이런 무리를 이끌고 있네.”
“…….”
“어차피 팔아먹을 것도 아니고, 그냥 이렇게 가둬만 둘 거라면 옷 좀 바꿔 입으면 안 될까?”
“…뭐?”
“매일매일 이 많은 옷을 껴입어야 하는 내 생각을 좀 해 달라 이거야. 지금 당장 날 팔진 않을 거니까.”
“…….”
민호는 뭐라고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런 녀석을 보는 뉴트는 생각보다 훨씬 필사적이었다. 당장 이 거추장스러운 옷만 벗게 해준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민호는 그 부탁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입을 꾹 다문 채 뉴트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왜?”
“…….”
“내내 여기 있을 건데 대충 아무거나 입으면 또 뭐 어때서. 어차피 원래 내 것도 아닌 옷이었어.”
“…….”
“뭘 원하는지 정말 모르겠네.”
뚱한 민호 앞에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댄 뉴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긴 원래 그리 말이 많은 녀석은 아닌 것 같았다. 어차피 자기가 입고 지낼 옷은 아니었다. 차라리 이곳에 오는 과정에 어딘가에 걸려 갈기갈기 찢어졌으면 하고 빌 만큼 귀찮은 옷이었다.
하지만 얼마나 튼튼하게 만든 옷인지 하나 찢어진 곳 없이 곱게 끌려왔다. 그러고 나서 지금까지 매일 아침 몇 겹이나 되는 옷을 껴입고 장신구까지 주렁주렁 달고 앉아있어야 했다. 물론 장신구야 목숨값 정도로 생각하면 들고 있을 수라도 있지, 도무지 이 옷은 한군데 쓸 곳이 없었다. 누군가 일한 만큼 먹으라면서 일을 시킨다 해도 이렇게 치렁치렁한 것을 걸치고선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이 뻔했다.
“응? 안되냐고.”
“그냥 그러고 있어.”
“가만히 있으면 누가 공짜로 밥이라도 먹여준대? 나도 어차피 여기 계속 있어야 하겠다. 밥값은 해야 할 거 아냐.”
“그럴 필요 없어.”
“뭐?”
“그럴 필요 없다고.”
민호는 한 마디 한 마디 힘주어 말한 뒤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뉴트는 민호의 옷자락을 잡으려 했지만, 한 박자 늦었다.
“그냥 여기 있으면 돼.”
“…….”
“그렇게 알아둬.”
또 한 번 정적이 찾아왔다. 천막 문이 단단하게 막히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뉴트는 다리를 쭉 뻗으며 짜증을 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여기에 갇혀있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사실 곱게 자랐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는 집이었다. 비록 지금 꼴은 이 모양이지만 한 사람 몫을 충분히 할 수 있는데.
입에서 쓴맛이 돌았다.
***
“민호 왜 표정이 그래?”
“응?”
“다 죽어가는 표정에 미간엔 그냥 주름이 펴지질 않네.”
프라이가 껄껄 웃으며 손가락으로 민호의 미간을 꾹꾹 눌러 펴줬다. 민호는 한쪽 눈을 찡그리면서 피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프라이는 그런 친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결국, 민호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서고 나서야 손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무슨 일이냐니까?”
“…그게.”
“뉴트 때문에?”
“…….”
이렇게 쉽게 티가 날 것이면서 왜 저렇게 빙빙 돌아가는지. 프라이는 뒤늦게 찾아온 친구의 사춘기를 보며 약간 짠한 마음이 들었다. 뭐라고 해줘야 할지. 아니면 모른 척해야 할지. 프라이도 그런 것을 볼 때마다 나름대로 속이 복잡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냥 놔두면 저 녀석은 내내 가슴앓이만 할 것이 분명했다. 누구 하나라도 좀 이리 밀고 저리 당겨줘야 하는데, 정작 저 친구는 영 그런 쪽에 재능이 없었다.
“그래도 얼굴 좀 펴고 다녀. 애들이 불안해한다.”
“알고 있어.”
“첫사랑이라도 하는 건지.”
“그런 거 아니다.”
“그래? 그럼 말고.”
“…….”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돌렸다. 여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분명 와락 화를 낼 것이 분명했다. 이럴 땐 그만 말해야지. 프라이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듣고 왔는지 시커멓게 얼굴이 죽어가는 놈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넌 항상 알아서 잘 하잖냐. 뭘 걱정해. 오랜 친구의 말에 민호는 조금 얼굴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뉴트가…….”
“왜?”
몇 번 망설이던 민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제야 말을 해주나 싶어서 프라이는 귀를 쫑긋 세웠다.
“아무래도 여기서 사는 게 불편한 걸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하신 네가 저렇게 귀하게 모셔놓는 사람이 처음이라 다들 놀라긴 했지만…….”
“그런 말이 아니고.”
“그러면?”
“그러니까.”
결국, 이야기를 풀어놓는 민호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프라이의 표정은 점점 미묘해졌다. 뭐라고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민호의 이야기가 끝나길 기다렸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나 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정말 그것 때문에?”
“이게 심각하지 않다는 거야?”
“아니 뭐…심각할 순 있겠지만.”
“…….”
“그러면 그냥 옷을 가져다주는 게 낫지 않아? 어차피 여기 애들도 다 아무거나 적당히 걸치고 지내잖아.”
“…….”
“뭐 같이 약탈 일하러 나갈 거 아니면 적당히 옷 입혀서 돌아다니게 하면 되는 거잖아?”
“하지만…….”
민호는 뭔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게 제일 잘 어울리니까. 굳이 여기 있다고 똑같이 어울릴 필요도 없고.”
“…….”
“안 그래? 옷이라고 해봤자 이것저것 껴입고 다니는 것이 전부인데. 내가 뭐 일을 시키는 것도 아니고.”
“뉴트는 그냥 그 일을 안 시킨다는 거에 굉장히 불만이 있고, 불안해하는 것 같은데.”
“그게 무슨 소리야?”
아. 프라이는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도대체 이 친구를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저렇게 빙빙 돌려 이야기를 하지만, 결론은 자기가 보기에 예쁘고 좋으니 벗기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간신히 내보이는 자기 욕심이 귀엽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그 나이다운 것 같기도 했다. 물론 프라이와는 그리 나이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어차피 여기 떠나서 갈 곳이 없다는 확답을 받으면 그냥 좀 밖에 돌아다니게 놔둬도 괜찮잖아.”
“그런가.”
“그래. 그러면 적당히 할 일도 생길 거고.”
“하지만…….”
“네가 그렇게 싸고도는데 누가 감히 뉴트를 건드리겠냐.”
“아니라니까.”
“아니긴. 다른 애들은 죄다 네가 그 녀석이 마음에 들어서 천막 안에 들여앉혀 놓고 얼굴도 안 보여주는 거로 생각할 걸.”
“…….”
얼굴이 또 한 번 벌겋게 익었다.
일하러 간다고 나갈 때면 이 세상에 다시없을 남자처럼 굴면서, 이럴 때 보면 천상 소년이었다. 이러나저러나. 이렇게 한마디 해서 뭔가 진전이 있으면 좋겠지. 프라이는 마음을 편히 먹기로 했다.
“어지간하면 같이 살 건데, 얼굴도 좀 보여주고 그래.”
“…….”
“진짜 부인으로 들여앉힐 거면 말리진 않겠지만.”
“아니라니까!”
“그러니까 적당히 안면 트고 지내자는 거지. 말은 안 해도 그날 네가 뉴트 안고 들어간 이후로 굉장히 궁금해하는 눈치던데.”
“…….”
“알았어?”
“알긴 뭘 알아. 그리고 뭐가 그렇게 궁금해서.”
민호가 볼을 마구 문지르며 빙글 돌아섰다. 은근히 섞인 성적인 농담에 유난히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것 같더니, 주변을 둘러보고 오겠다며 말을 끌고 나왔다.
“어디가.”
“아무래도 밖을 한 번 둘러봐야 할 것 같아. 너무 오랫동안 긴장을 풀고 가만히 있었어.”
“…….”
꼭 이렇게 뭔가 할 말이 떨어지면, 휙 사라지곤 했다. 저녁 먹기 전엔 들어와! 프라이가 냅다 지른 소리가 민호의 뒤꽁무니에 철썩 날아가 붙었다. 딱히 경비대가 올 것 같진 않지만, 그렇다고 말리진 않기로 했다. 프라이는 민호가 그러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민호는 자기만의 시간이 조금 필요한 것 같았다.
***
‘…어쩌지.’
마구 말을 재촉해서 달리는 와중에도 민호는 복잡한 머리를 도무지 정리할 수 없었다. 몸은 자꾸 고삐를 잡고 말을 다그치는데 머릿속은 딴생각만 가득했다. 아차 싶으면 그대로 낙마를 할 수 있는 아슬아슬한 상황이었지만, 민호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걷기 시작할 무렵부터 말을 더 오래 탔던 녀석이었다.
“…….”
몇 번이나 고개를 저으면서 좋을 대로 말을 몰았다. 거친 숨을 내뿜으며 달리던 말이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 민호가 이래저래 마음이 심란할 때마다 곧잘 오곤 했던 호수였다.
“…….”
민호는 훌쩍 말에서 뛰어내렸다. 여기에 얌전히 있어. 말 콧잔등을 몇 번 석석 쓸어주고 나서, 천천히 호숫가로 걸어갔다. 주변에 수북하던 풀 더미는 노랗게 죽어가고 있었다.
“벌써 겨울이 오는 건가.”
그러고 보니 바람이 쌀쌀해진 것 같았다. 민호는 볼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결을 느끼며 가늘게 눈을 떴다. 아직은 그렇게 춥진 않았지만, 겨울은 빠르게 다가올 것이 분명했다. 금방 찬바람이 불고, 얼음이 얼기 시작하면 이 부근은 바짝 말라 아무것도 남지 않겠지. 민호는 몇 해나 봤던 풍경이지만, 내내 새로웠다.
“…춥다.”
하얀 숨이 금방이라도 불어오는 겨울바람에 얼어버릴 것 같았다. 도적들이야 양을 많이 키우지 않았다. 하지만 유목 생활은 하는 사람의 재산인 양을 먹이려면 빨리 떠나야 할 시기였다. 하나둘 사람들이 떠나면 이 구역에 남는 것은 민호와 그의 무리뿐이었다.
“너도 마찬가지지.”
민호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옆에 다가온 녀석이 주둥이로 주인의 팔을 툭툭 쳤다. 그런 애마를 바라보던 민호는 피식 웃으며 단단한 손으로 목을 두드렸다. 말은 오랫동안 함께 있으면 종종 이렇게 생각을 읽는 것 같은 행동을 하곤 했다. 민호는 그래서 동물을 좋아했다.
“좀 더 추워지기 전에 여기에 한 번 더 올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이렇게 좋은 곳인데 좀처럼 모른다. 이 말이지.”
“…….”
“안 그래? 야쿠브.”
민호는 낮게 웃으면서 말에 슬쩍 기댔다. 사람보다 높은 따뜻한 체온이 온몸에 스며들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민호는 한껏 늦장을 부리고 있었다. 프라이에겐 저녁 먹을 때까지 돌아가겠다고 했지만, 이미 해가 저 멀리 기울어지고 있었다.
“너무 늦었나.”
길게 그림자가 늘어지는 걸 눈치를 챈 민호가 말에 얹어진 안장을 다시 조절해줬다. 몇 번 주변을 살피다 발판에 발을 걸고 훌쩍 뛰어올랐다. 그리곤 고삐를 바짝 당겨서 돌아갈 길을 재촉했다.
‘…이런 아무래도 저녁 시간이 끝나서 도착하겠는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차 싶었다. 당장 저녁 시간에 꽁꽁 갇혀있어야 할 뉴트를 떠올리니 괜히 미안해졌다. 좀 더 빠르게 부탁해. 야쿠브. 민호가 고삐를 바짝 당기며 걸음을 재촉했다.
보통은 한군데 모여서 밥을 먹곤 했다. 민호도 예외는 아니었다. 큰 접시에 음식을 잔뜩 쌓아두고 필요한 만큼 가져가서 먹는 것에 익숙한 무리는 일찌감치 흥분하고 있었다.
“고기가 나온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어떻게 된 거야?”
“일단 주는 대로 먹어. 먹다가 뺏길라.”
“잔치 날이야?”
수북하게 담긴 고기를 바라보던 녀석들이 하나 둘 고기를 접시에 덜기 시작했다. 각자 가지고 있는 작은 칼을 들더니 먹고 싶은 만큼 이것저것 슥슥 썰어서 접시를 채우고 있었다. 양고기에, 소시지까지 이것저것 가져가는 손이 점점 빨라졌다.
“두목, 뭐해?”
“…응?”
“안 먹어?”
“아니, 먹는다. 먼저들 먹어.”
“오늘 두목이 이상하네.”
“…….”
문득 공중에 멈춰있는 손이 보였다. 손가락에서 팔목을 따라 시선이 쭉 올라갔다. 얼굴을 확인하니 민호였다. 보통 때면 같이 어울려서 식사했을 텐데, 오늘은 유난히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프라이는 그런 민호를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민호가 구워달라고 했는데, 이미 반절도 넘게 없어진 양고기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모른 척 민호 옆에 자리를 잡은 프라이가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민호.”
“…왜?”
“고기 구워달라며, 그 녀석 때문인 거 아냐?”
“…….”
“신경 쓰려 했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 한창 배고플 시간일 텐데 언제까지 저렇게 가둬둘 거야.”
“뭐라는 거야.”
“등 한번 떠밀어 주는 거지.”
“…….”
“친구 좋다는 게 뭐냐.”
“그런 거 아니야.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어,”
아무것도 아닌 척 빵을 찢어 입에 넣던 민호는 애써 시선을 천막으로 돌리지 않았다. 하지만 씹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는 것을 보아하니 여전히 온통 신경은 그쪽에 가있었다.
어휴. 프라이는 한숨을 쉬며 큰 접시에 이것저것 담기 시작했다. 접시 한쪽에 잘 익은 양고기를 담고, 그 옆에 몇 가지 고기와 내장으로 만든 순대도 조금 얹었다. 넓적하게 구운 빵을 크게 잘라서 척척 쌓은 다음 과일과 치즈까지 옆에 와르르 쏟았다. 프라이는 자신의 작품을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프라이가 열심히 움직이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민호는 아까 들고 있던 빵을 내내 든 채 공중에 시선이 멈춰 있었다.
“가봐.”
“…뭐가.”
“어차피 지금 밥이 넘어가지도 않잖아.”
“…….”
“하루 정도 따로 밥 먹으면 뭐 어때. 다들 적당히 먹으면 알아서 할 일 하러 갈 테니까.”
“…….”
“자. 2인분 담았다.”
“…….”
“어서 가보라니까.”
“…….”
음식이 수북하게 담긴 쟁반을 넘겨준 프라이가 자꾸 민호의 등을 떠밀었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민호는 약간 민망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당장 고기파티에 신난 녀석들은 딱히 그런 대장을 신경 쓰지 않았다. 으음. 항상 같이 먹던 시간에 빠지려고 하니 뭔가 찝찝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결국 프라이가 이겼다.
“…그럼 애들 좀 부탁해.”
“네가 걱정 안 해도 알아서 먹고 놀고 있을 거야. 이번 주엔 딱히 할 일이 없잖아?”
“…….”
결국, 민호는 음식을 들고 조용히 무리를 빠져나왔다. 민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프라이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다시 음식에 집중했다. 긴 그림자가 민호를 쫓아갔다.
“으음.”
민호는 천막으로 걸어가면서도 내내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뭐라고 할까. 지금까지 도적질하며 사는 동안 이렇게 따로 챙겨야 했던 적이 없었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뉴트를 굳이 천막에 가둬둔 사람이 자신이니 뭐라고 불평할 수도 없었다. 민망함에 자꾸 헛기침이 나왔다. 손에 들고 있는 쟁반이 점점 무거워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영원히 도착하지 않을 것 같던 천막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긴 그렇게 넓은 부지에 집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흠. 흠. 걸음이 자꾸 느려졌다. 몇 번이나 멈춰선 민호는 뒤를 돌아보았지만, 돌아갈 순 없었다.
“…어쩐다.”
물론 고민한다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자기가 민망하다 해서 아무 잘못이 없는 뉴트를 굶길 순 없었다. 하지만. 그러니까. 아. 이 민망함을 어떻게 해야 할지. 또 귀가 따끈따끈해졌다. 민호는 거의 죽어가는 표정으로 뉴트를 가둬둔 천막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
그 시각, 뉴트는 슬슬 허기를 느끼는 자신의 몸을 탓하고 있었다. 민망할 정도로 몸은 정직했다. 뭐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남으려고 하는지, 착실하게 배가 고프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끙.”
잔뜩 찌푸린 얼굴로 좀 더 웅크려 앉은 뉴트는 좀처럼 열리지 않는 문을 내내 바라보기만 했다. 안쪽에선 열 수 없으니, 밖에서 들어올 수밖에 없는데 영 인기척이 나지 않았다.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가 살짝 들리는 것을 보면 분명 저녁 시간이 된 것 같은데, 이대로 굶겨 죽이려는 건지. 아니면 반항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내버려두려는 건지. 시간이 지날수록 최악의 상상만 골라 하는 뉴트는 점점 더 심각해졌다.
“뭐…죽기밖에 더 하겠어.”
그러려니 했다. 어차피 이렇게 끌려온 이상 평범한 삶을 기대하는 것은 어려웠다. 누군가 지나가는 말로 굶는 것도 익숙해지면 배가 고프지 않다고 했던가. 누워있고 싶지만, 그렇게 무방비한 상태로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조금씩 자세를 바꿔가며 부득불 앉아있는 뉴트의 귀에 반가운 소리가 들렸다.
“…….”
절대 열릴 것 같지 않던 천막 문이 덜컹거렸다. 밖에서 들리던 인기척이 순간 뚝 끊겼다. 그러더니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뉴트는 잔뜩 긴장한 채 문을 노려보았다.
물론 민호가 들어온다면 그나마 나은 상황이었다. 그나마 이 곳에서 자신에게 아주 조금이나마 호감을 보이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대장인 민호 밑에 있는 녀석들은 달랐다. 안 그래도 눈도장 찍지 말라며 민호가 당부했던 것이 휙 스쳐 지나갔다.
“아, 도대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괜한 짜증이 왈칵 올라왔다. 어차피 갈 곳도 없는 몸인 데다, 몸 하나 지킬 수 있는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지금 밖에서 문을 열고 있는 사람이 만호가 아니라면, 생각보다 더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뉴트의 어깨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
뭘 그렇게 열심히 묶어 놨는지 좀처럼 열리지 않는 문은 불안함을 더욱 자극했다. 뉴트가 조금씩 뒤로 물러서다 못해 천막에 등이 닿을 무렵이 되어서야 문이 열렸다.
“…왜 그러고 있어?”
“…….”
“안 잡아먹어.”
“…….”
커다란 접시를 든 민호가 잔뜩 웅크리고 앉은 뉴트를 바라보며 이상하단 표정을 지었다. 뉴트는 그런 얼굴을 봐도 좀처럼 긴장이 풀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잘해준다 해도 순간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여전히 다가오지 않는 뉴트를 설득하길 포기한 민호는 직접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말하면 실례일지도 모르지만 사람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고양이 같은 느낌이 들었다.
조금 더 뒤로 물러나려는 뉴트는 애써 날카로운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겁먹은 표정을 내보였다간 그대로 잡아먹힐 것 같았다. 하지만 민호는 그런 뉴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막 가운데 깔린 덮개 위에 접시를 툭 내려놓았다.
“저녁 먹을 시간이라…….”
“…….”
“안 먹을 거야?”
“…….”
“여기선 제시간에 찾아 먹지 않으면, 그 이후에 제대로 된 음식이 남아나지 않아. 듣고 있어?”
“…….”
“먹지 않으면 지쳐서 죽는다고.”
“…….”
여전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조개처럼 입을 다문 뉴트를 보고 있자니 또 머리가 아팠다. 접시를 조금 밀어주고 자신도 털썩 주저앉았다. 약간 놀란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까만 시선이 자기도 모르게 흔들렸다. 민호는 마른 입맛만 다시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어쩔 수 없어.”
“…뭐가.”
“나도 밥 못 얻어먹고 너 먹이면서 같이 먹으라고 쫓겨났거든.”
“뭐? 대장이라며? 누가 널 쫓아내.”
웃기는 소리 한다는 표정이 민호의 눈에 가득 들어왔다. 하나도 믿고 있지 않은 눈치였다. 물론 당연한 일이었지만, 구구절절 설명해야 하는 쪽은 답답하기만 했다.
“원래 이런 곳에선 밥 주는 사람이 제일 강한 거야.”
“…….”
“그러니까 잔말 말고 먹을 수 있을 때 먹어둬.”
“왜? 잘 먹인 다음 데려다 팔려고?”
“…….”
“까칠하게 마르면 사주는 사람이 없을 거 같아서?”
“그런 거 아니야!”
“…….”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르는 민호의 기세에 깜짝 놀란 뉴트가 입을 다물었다. 민호는 잔뜩 표정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고 있었는데, 도대체 저 녀석은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적어도 여기선 사람을 굶기는 짓은 안 해.”
“…….”
“제발 의심하지 말고 좀 먹어.”
“…….”
뉴트는 그제야 약간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도적 무리라고 해서 괜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걸까. 눈을 깜박이던 뉴트가 주춤주춤 접시 앞으로 다가왔다. 물론 계속 버티려 했지만, 일단 음식을 보고 나자 두 배로 배가 고파졌다. 약간 식긴 했지만, 아직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고기를 보고 있으니 입에 침이 고였다.
“먹어.”
“…….”
“왜 또.”
“나…칼이.”
“…….”
민호가 발로 차서 없애버린 칼이 생각났다. 휴대용 칼이 없으니 제대로 고기를 썰어서 가져올 수 없었다. 뉴트는 손으로 애꿎은 빵만 뜯어서 입으로 가져갔다. 깨작깨작 뭔가 먹기 시작하는 뉴트를 보던 민호도 그제야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
치즈도, 고기도 뭐 하나 제대로 자르지 못하는 것을 보다 못한 민호가 자신의 칼을 꺼냈다. 이것저것 먹기 편한 크기로 썰어서 접시에 나눠 담았다. 그리고 한 말마디 없이 쑥 뉴트의 가슴 쪽으로 내밀었다.
“…왜?”
“칼이 없으니까 이거라도 먹으라고.”
“…….”
“빵만 먹어서 뭐할 거야.”
“…….”
작은 접시에 이것저것 담긴 음식을 바라보던 뉴트는 잠자코 그것을 받아들었다. 민호는 자기가 부탁해서 음식을 준비했다는 소리 한마디 하지 않은 채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던 뉴트는 아직도 경계를 풀지 않은 얼굴로 음식을 집어 들었다.
한마디 말도 주고받지 않는 어색한 식사는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다. 뉴트가 접시를 비워 가면 말없이 그릇을 거둬 갔다. 그리고 다시 새 음식을 담아 건네주던 민호는 계속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
그러다 보니 미묘하게 변하는 뉴트의 표정을 도무지 알아차릴 방법이 없었다. 배부른데. 배가. 몇 번이나 그런 마음을 알아차려 주길 기대했지만, 민호는 도통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더 먹으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뉴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배불러.”
“…응?”
“배부르다고. 얼마나 먹일 셈이야.”
“아니…그게.”
민호는 또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음식을 건네주는 손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뉴트는 살짝 눈을 찌푸렸다.
“많이 먹었어.”
“…….”
“고마워.”
흘러가듯 한 한마디에 민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깜짝 놀라 허둥지둥 접시를 끌어모았다. 그리고 뉴트가 한마디 더 하기도 전에 벌떡 일어선 민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천막 밖으로 걸어나가 버렸다. 빠른 속도로 천막에서 멀어지는 녀석을 붙잡을 수 없었다.
갑자기 또 혼자 남겨진 뉴트는 당황한 표정으로 눈만 깜박거렸다. 굶기진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영 기분이 이상한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도대체 저 두목이란 녀석의 의중을 알 수 없었다.
“…이상한 녀석이야.”
뉴트는 문 잠그는 것조차 잊어버린 저 두목이란 녀석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잠시 혼란스러웠다. 도망가라고 제사라도 지내는 걸까. 물론 문이 열려있다고 해서 밖으로 나갈 생각은 없었다. 절대 나가지 말라는 소리와 함께 꼼꼼하게 문단속을 하던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유난히 허둥거리는 모습을 잠깐 되새겨 보던 뉴트는 결국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느새 불안하던 마음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어떻게든 되겠지. 뉴트는 조금 더 편하게 마음을 먹기로 했다.
“다 먹였어?”
“…….”
“민호!”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채 빠르게 걸어오는 친구를 바라보던 프라이가 발걸음을 붙잡았다. 민호는 여전히 시선을 제대로 고정하지 못한 채 프라이의 품속에 빈 그릇을 냅다 던져버렸다.
“다 먹었냐고.”
“어…그래. 다 먹였어.”
“왜 그렇게 진정을 못 하고 있어?”
“아무 것도 아니야.”
“…….”
“왜 그렇게 봐!”
갑자기 내 친구가 사람이구나 싶어서.”
“무슨 소리야.”
민호는 친구의 말을 도통 이해하지 못하겠단 표정을 지었다. 그런 얼굴을 빤히 보고 있던 프라이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다른 일을 할 땐 누구보다 예민하고 정확한 판단을 하는 녀석인데, 이렇게 자기감정엔 무뎠다. 옆에서 말을 해줘도 못 알아들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잘 해줘.”
“잘 해주고 있어.”
“뉴트가 이곳이 익숙해지고 도망치지 않을 것 같으면 아예 같이 살아도 괜찮을 텐데.”
“…….”
“너도 나쁘지 않잖아.”
“그 녀석 마음이 문제지. 내가 결정할 일은 아니야.”
“그 소리 다른 사람들이 들었으면 진짜 놀랄 거야. 누가 두목이 그런 말을 하리라 생각하겠어.”
“됐어. 뉴트 이야기는 그 정도만 하자.”
또다시 화제를 돌려버리는 민호는 여전히 어설펐다. 프라이는 여기서 더 했다간 친구가 진심으로 화를 낼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민호가 건네준 접시를 들고 설거지하는 곳으로 걸어갔다.
민호는 그런 프라이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사실 프라이가 하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안 그래도 머릿속이 복잡한데, 마치 그런 생각을 꿰뚫어보기라도 하는지. 오랜 친구는 너무나 쉽게 그의 의중을 파악했다.
“…어쩔까.”
물론 필요하다면 사람을 사고, 팔 수 있었다. 도적이라면 보통 물건을 빼앗고 사람을 팔아 필요한 것을 마련했다. 하지만 민호는 그런 것을 싫어해 오랫동안 사람을 매매하지 않았다.
‘…뉴트.’
물론 팔아버릴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곳에 있기 싫어한다면 억지로 잡아놓을 수도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물론 한번 도적 단에 끌려갔던 사람이 평범한 생활로 돌아갈 확률은 낮기만 했다.
특히 뉴트처럼 다른 곳으로 팔려가던 처지라면 더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절대 놔줘선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도적 무리를 이끄는 자신의 지위와 평범한 인간으로서 생각하는 심장의 괴리감이 점점 심해졌다. 민호는 잠시 멈춰 서서 심장 부근을 손으로 꽉 쥐었다.
‘답답하네.’
이상하게 심장이 크게 뛰면서 숨이 찼다. 몸이 아픈 것 같진 않은데 자꾸 이렇게 온몸이 통증을 호소했다. 아무래도 뭔가 잘못되고 있는 것은 확실한데, 정확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