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호뉴트/민늍] 신부이야기 003
+) NOTICE
신부이야기에서 모티브를 얻은 중앙아시아+무언가 동양 판타지 aU입니다
민호는 도적단 두목 / 뉴트는 팔려가던 중
기본적인 의상에 대한 묘사는 촐님(@go00chol)의 그림을 보고 연성했습니다
촐님(@go00chol), 로케님(@goroke11)과 같이 풀던 썰을 기반으로 합니다
적당한 망상과 설정 붕괴가 언제나 함께 합니다 ㅇㅅㅇ)9
write. 환월
궁금함이나 문의는 댓글 방명록 트위터 등 편한 곳으로 부탁드립니다 >_<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신부이야기 003
뉴트가 눈을 뜬 건 이미 아침 해가 뜨고 한참 지난 뒤였다.
그제야 어젯밤 일이 생각났다. 무슨 용기였는지 도적 두목한테 하나부터 열까지 대든 것도 모자라서, 주인인 남자를 쫓아내고 천막까지 점거해서 잠을 잤다. 뉴트는 잠이 덜 깨 핑핑 도는 머리를 붙잡고 끙끙 앓았다. 하나 둘 생각나는 기억을 더듬자니 어젯밤에 그대로 목이 달아나지 않은 것이 용하다 싶었다.
“…내가 눈에 보이는 게 없어서.”
이러고도 아직 살아있는 걸 보면 확실히 당장 죽은 팔자는 아닌가 싶었다. 뉴트가 괴로움에 버둥거리자 간신히 덮고 있던 두툼한 이불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아. 자신의 꼴이 어떤지 알아챈 뉴트가 허겁지겁 이불을 끌어당겼다. 밤에 금방 추워지는 천막에선 옷을 입고 자면 감기에 걸리기 쉬워서 벗고 자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이런 사지에서 그러고 잤다는 것도 참 어이가 없을 정도로 태평스러웠다.
“아주 그냥 미쳤었네.”
옆을 돌아보니 수북하게 쌓인 옷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슬슬 옷을 입어야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대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저 옷을 다시 입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슬쩍 천막 안을 돌아보며 입을 만한 것이 있나 찾았다. 하지만 무슨 천막이 이렇게 삭막한지, 정말 필요한 생활도구 외엔 있는 것이 없었다. 있어 봤자 방석이나 여분의 이불 정도였다.
날붙이는 다 치운 건지, 아니면 원래 없었는지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어제 떨어뜨린 칼 생각이 났다. 보통 하나씩 품에 들고 다니는 거라 없으면 불편할 수밖에 없는 물건이었다. 바닥을 살폈지만 역시 가지고 나간 듯 보이지 않았다.
“망했군.”
짧게 혀를 찬 뉴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알몸으로 있다가 사람이라도 들이닥친다면 저항을 할 수 없을 거란 생각이었다. 물론 틀린 말도 아니었다. 지금 당장 끌려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입기 싫은 표정으로 옷을 하나하나 주워 입었다. 화려한 자수로 마무리된 겉옷까지 입은 뉴트가 한쪽에 모여 있는 팔찌를 바라보았다.
‘저건 어쩔까.’
잠깐 고민을 했다. 굳이 끼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저걸 모두 버려둘 순 없을 것 같았다. 도적들이 자신을 데려온 이유가 패물이라면, 목숨값인 물건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았다. 뉴트는 번쩍거리는 장신구 앞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몇 번 망설이다가 목걸이를 들어서 목에 걸었다. 작은 구슬과 장식품을 하나하나 꿰어서 만든 목걸이는 꽤 거추장스러웠다. 몇 개나 되는 팔찌로 줄줄 흘러내리는 소매를 고정했다. 어쩐지 온몸이 묵직해지는 기분에 눈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 남은 장신구를 손가락으로 세어봤다. 반지는 너무 많았다. 저걸 다 끼고 있으면 주먹조차 제대로 쥘 수 없을 것 같았다. 가장 단순하게 생긴 반지 두어 개만 골라서 손가락에 끼우곤 나머지는 한곳에 모아두었다.
뉴트가 옷도 다 입고, 이젠 뭘 해야 하나 대책을 세우는 동안 천막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하다못해 주변에 누군가 지나다니는 기척조차 들리지 않았다. 조용하면 조용할수록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사실 이곳이 감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쪽으로 머리가 기울기 시작하자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얼굴이라도 가려보자 싶어서 머리쓰개를 손으로 끌어왔다.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지만, 여기에 내내 앉아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좀처럼 밖으로 나가기 어려웠다. 그나마 안전한 공간을 벗어나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뉴트가 심호흡을 하며 옷자락을 꾹 쥐었다. 아직 몸에 아무런 위해를 가하지 않고 살려둔 것을 보면 분명 쓸모가 있을 거란 계산이었다. 그 쓸모란 것이 뉴트의 몸이든 아니면 걸치고 있는 패물이던 살려둘 이유만 된다면 충분했다.
“…….”
조심스럽게 천막 문을 걷었다. 완전히 떠오른 해가 길게 빛을 이으며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뉴트는 잠깐 멈칫하며 바깥으로 귀를 기울였다. 드문드문 들리는 낯선 목소리들이 모래바람 속에 섞여들었다. 말 울음소리와 물건 옮기는 소리가 마구 뒤섞여 들렸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직 뉴트가 바깥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사람이 없었다. 침착하게 주변 상황을 둘러보던 까만 눈에 익숙한 말이 눈에 들어왔다. 거칠게 반항하던 녀석은 고삐를 잡아당기는 힘에 더는 버티지 못하고 억지로 발을 떼고 있었다.
“누르!”
그 모습에 크게 놀란 뉴트는 조금 전까지 조심스럽게 주변 상황을 살피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천막을 박차고 뛰어나왔다. 비단 실로 자수를 놓은 붉은 옷이 햇살을 받아 눈이 부시게 빛났다. 그런 뉴트를 보던 사람들이 수군거리더니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뭐야 저 녀석 잡아! 웅성거리는 소리를 헤치고 달려온 뉴트가 조금 더 빨랐다. 그대로 말 앞을 막아선 채 끌고 가던 사람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런 거로 물러설 도적들이 아니었다. 그런 맹랑한 인질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뭐하는 거야.”
“내 말이에요. 어디로 데려가는 거죠?”
“지금 네 녀석이 이렇게 당당해 할 상황이 아닐 거 같은데, 앞뒤 분간을 못 하고 덤벼들긴.”
“내 말이라고 했어요. 다른 건 다 필요 없어도 얜 안돼요.”
“허 참.”
절로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뭐가 그렇게 소중한 것인지는 몰라도 말 앞에서 떨어지지 않는 녀석은 누르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미 주변을 둘러싼 도적들은 그 모습이 웃긴 듯 저마다 한마디씩 보탰다. 소란스러움이 커졌다. 하긴 누가 봐도 이상한 상황이었다.
자기 목숨을 먼저 걱정해도 모자랄 판에 말을 지키려고 한다니. 그러고 보니 옷차림도 기묘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푹 덮어쓴 천 때문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당돌한 녀석임은 틀림없었다.
“이깟 말보단 네 목숨이 더 소중할 텐데.”
“내 목숨만큼 소중한 아이예요.”
“하긴 가끔 이렇게 돌아버린 녀석이 있긴 하더라니까.”
“…….”
“이곳으로 끌려와서 제정신이 아니거나. 아니면 당장 죽어도 아쉽지 않다는 소리지.”
거칠게 살아온 녀석들은 뉴트의 말이 그다지 의미 있게 들리는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그리곤 억지로 말에서 떼어놓았다. 잠깐. 뉴트는 온몸을 붙잡는 손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장정 몇 명의 힘을 당해낼 수 없었다.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놔둬.”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대장 하지만…….”
“그냥 놔두라 했다.”
“쳇.”
다시 한 번 명령이 떨어지자 뉴트의 팔을 붙잡고 있던 손이 툭툭 떨어졌다. 이곳에서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잔뜩 비틀린 채 잡혀있던 손목이 자유로워지자 뉴트가 눈을 찡그리며 손목을 주물렀다. 얼마나 세게 잡아당겼는지 온몸에 새빨간 손자국이 남은 것 같았다.
뉴트를 빤히 쳐다보던 녀석들이 말 고삐를 놓고 낮게 구시렁거리며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대장이 하지 말라고 했는데, 억지로 끌고 갈 수도 없었다. 뉴트가 달려가서 누르의 목을 와락 껴안았다. 그리곤 여기저기 손으로 쓸어주며 다친 곳이 없는지 살피기 시작했다.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
그런 뉴트를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민호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리곤 잠시 뒤 뚜벅뚜벅 걸어가서 누르의 고삐를 잡았다. 또 화들짝 놀란 눈이 민호를 쳐다보았다.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으면 다들 널 의심할 거야.”
“어째서.”
“도망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겠지.”
“…….”
“그리고 난 다음 우리들의 본거지를 경비대에 알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말이야.”
“…….”
“이제 이 녀석은 아무도 건드리지 않을 테니 조용히 따라와.”
“…….”
민호는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먼저 말고삐를 잡고 걷기 시작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세게 반항하던 말은 무슨 일인지 민호를 따라 얌전히 걷기 시작했다. 뉴트는 한 걸음 두 걸음 멀어져가는 둘을 바라보다 급히 뒤를 따랐다. 반쯤 뛰듯 걸음을 따라잡은 뉴트는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쓰개를 두 손으로 단단히 잡았다. 참 묘한 광경이었다.
아무 말 없이 말을 데려간 민호는 전용 마구간에 고삐를 묶었다. 처음 민호를 만났을 때 봤던 커다란 덩치의 검은 말만 있는 곳에 얌전히 들어간 녀석은 가볍게 머리를 흔들 뿐 별다른 반항을 하지 않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런 모습을 보던 뉴트는 쉽게 말을 걸지 못했다. 민호가 말의 콧잔등을 슥슥 쓸어주다 고개를 돌렸다.
“됐지?”
“뭐가.”
“이 녀석이 안전하길 바란 것이 아니었나.”
“그야 그렇지만…….”
어물어물 말을 삼켰다. 갑자기 이런 친절을 받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분명 다른 의도가 있는 것 같았다. 수상한 것을 보는 표정이 점점 심각해지는 걸 빤히 바라보던 민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경계하려면 처음부터 하던가, 아니면 살갑게 굴면서 목숨이라도 부지하려고 하던가. 이도 저도 아닌 녀석은 내내 뾰족하기만 했다.
“너는 어젯밤에도 그랬지만 정말 이상한 녀석이다. 보통 말보다 스스로 목숨을 더 중히 여기지 않던가.”
“내 목숨과도 같은 녀석이야.”
“그래서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거다.”
“…….”
“보통 사람들은 자기 목숨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던데.”
“그렇지.”
“지금 이 상황이 너한테 위험하다고 생각하진 않아?”
“…….”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
아차 싶었다. 몸에 지니고 다니는 칼도 무기도 없는 상황에서 도적 두목과 독대를 하고 있다니. 뉴트의 까만 눈에 당황스러움이 사렸다. 그런 뉴트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보던 민호는 입꼬리만 슬쩍 당기며 웃었다. 애써 침착함을 가장하려 했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민호는 몸을 완전히 돌려 뉴트를 바라보았다. 뉴트는 그 시선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잠깐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대로 평정심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앞만 바라보고 있었지만, 따지고 보면 같은 상황이었다. 민호가 슬쩍 몸을 움직여 시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고 나서야 둘은 서로의 얼굴을 이제야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
“지금 이 상황에 네가 할 수 있는 가장 영리한 행동이 뭐라고 생각해? 똑똑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야 할지.”
“…….”
뉴트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확실히 지금 당장 민호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차라리 말고삐라도 손에 쥐고 있었다면 조금 더 마음을 놓을 수 있을 텐데, 그것도 아니었다. 누르는 얌전히 마구간에 들어가 있었고, 그 앞은 민호가 지키고 서 있었다.
“뭐해?”
“아니…그러니까.”
급하게 한 걸음 더 물러서려던 뉴트가 뒤로 넘어졌다. 발꿈치로 옷자락을 콱 밟자 완전히 몸의 균형이 무너졌다. 그러다 더 당황하며 손을 뻗으려 했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넘어간다. 뉴트가 눈을 질끈 감았다. 곧 와장창 소리를 내며 온몸에 멍이 들 정도로 구를 것으로 생각했다. 어. 하지만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뉴트가 잔뜩 감고 있던 눈을 조심스럽게 떴다.
“…어.”
“…….”
시선 가득 민호의 얼굴이 들어왔다. 깜박. 깜박. 뉴트는 황당한 표정으로 눈만 감았다가 떴다. 으윽. 민호가 잔뜩 찡그리며 허리를 잡은 팔에 힘을 줬다. 일어나 무겁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뉴트는 버둥거렸지만, 결국 민호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일어날 수 있었다.
“하아.”
흙 발자국이 선명한 옷자락을 바라보던 뉴트는 끙끙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뭘 하려 그랬지. 어쩐지 절망이 커지는 기분이었다.
“가만있으면…….”
“응?”
“그냥 가만히 있으면 다들 널 건드리지 않을 거다.”
“…….”
“무슨 소린지 알아들어? 내가 널 놔두라고 한 건 돌발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달렸다는 이야기다.”
“…….”
“아까처럼 돌발 행동을 한다거나, 괜히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면 적어도 몸에 위해를 가하진 않을 거라고.”
“그건…….”
“그렇게 말꼬리 잡는 것도 그만 둬.”
뉴트는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숙이자 머리쓰개가 와르르 흘러내렸다. 민호는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눈앞이 아득해졌다. 분명 머리로는 남자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저렇게 햇살을 받고 있으면 자꾸 다른 생각이 들었다. 하긴 처음 데리고 왔을 때도 착각한 부분이 있긴 했다. 옷을 벗기면 헷갈릴 이유도 없을 텐데, 어쩐지 그러긴 싫었다.
“돌아가.”
“뭐?”
“내 천막으로 돌아가 있으라고.”
“…….”
“저녁 때까지 괜히 나돌아다니지 말고 가만히 앉아있어.”
“내가…어째서.”
“우리 애들이 내가 하는 말에 복종하는 걸 보니 그다지 무섭지 않은가 본데 말이야.”
“…….”
“생각보다 거친 녀석들이야. 이런 곳에서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해야 하거든.”
“알았어.”
뉴트가 생각보다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민호는 약간 헛기침을 하며 앞장섰다. 옷자락을 살짝 든 채 뒤따라 걸음을 옮겼다. 얌전히 있던 자리로 돌아온 뉴트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민호가 말했던 것이 맞았다.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지긴 했지만,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그런 것을 눈으로 보고나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민호는 발을 멈춘 채 멍하니 서 있는 뉴트를 천막 안으로 밀어 넣었다. 버텨보려 했지만, 뒤에서 강하게 미는 힘을 당해낼 수 없었다.
“잠깐!”
“그 안에 얌전히 있어. 안에서 절대 문을 못 열게 할 거니까 괜히 힘 빼지 말고.”
“…….”
와장창 소리를 내며 바닥에 주저앉은 뉴트는 온몸에 엉겨드는 옷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 모습을 보던 민호가 문을 한 손으로 붙잡고 말을 이었다.
“저녁 시간이 되면 음식 가져다줄 거니까 너무 걱정하진 마.”
“밥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야!”
“그럼 잠이라도 한숨 자면 되겠네.”
“너! 이거 안 열어!”
안쪽에서 문을 열려고 하는 소리가 점점 시끄러워졌지만, 민호는 한 줌 미련을 남기지 않고 자리를 떴다. 좀 편하게 놔두고 싶어도 영 도움을 주지 않는 통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젠장.”
뉴트는 단단하게 잠긴 문을 연실 쥐어뜯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것도 없는 이런 곳에서 시간을 보내라는 것도 짜증이 나는데, 혼자 있는 것도 싫었다.
“도대체 여기서 뭘 하라고.”
바느질에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이곳엔 바느질할 수 있을 만한 도구가 없었다. 뉴트는 바닥에 깔아놓은 이불 위에 앉았다. 잔뜩 긴장했던 온몸이 찌르르 아파져 왔다. 옷은 내내 불편했고, 천막은 점점 조용해졌다. 이리저리 눈을 돌리며 문양의 개수를 세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쉽게 잠이 오곤 했다.
“…….”
꾸벅꾸벅 졸던 고개가 갑자기 푹 꺾였다 그리고 깜짝 놀라 고개를 든 채 눈을 깜빡거렸다. 아. 그제야 자신이 졸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괜히 딴 짓을 했다. 그래도 오는 졸음을 막을 수 없었다. 고개만 끄덕끄덕하며 졸던 뉴트는 어느샌가 이불 위에 웅크린 채 잠이 들었다.
뉴트를 천막 안에 가두고 나자 민호는 금방 할 일이 많아졌다. 물론 아까부터 해야 할 일을 일부러 미루고 있는 것에 가까웠다. 오늘은 밖으로 나가지 않기로 했으니, 며칠 동안은 이곳에 머물러야만 했다.
사실 도적질이란 것은 너무 자주 나타나면 꼬리 밟히기 딱 좋은 일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멀쩡히 말을 타고 있던 사람까지 납치해서 떠났는데, 며칠 동안은 죽은 척하고 사는 것이 편했다. 이번엔 뉴트 외엔 이렇다 할 약탈물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굶어 죽는 것도 아니었다.
“…….”
민호는 마른 입맛을 다셨다. 다들 그런 생활을 잘 알고 있어서 두목이 어슬렁거리며 주위를 돌아다녀도 딱히 말을 걸지 않았다. 물론 이런 시기에 제일 안절부절못하고 불편해하는 것은 민호였지만, 그렇다고 제 욕심만 차리려 부하들을 사지로 몰아넣을 생각은 없었다. 며칠 몸을 혹사한 말들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고, 무기를 정비하는 곳에도 들렸다.
“작업은 좀 어때?”
“언제나 그렇죠. 대장.”
“그런가.”
“대장이야말로 재미 좀 보셨습니까?”
“…무슨 소리야?”
“다 아시면서 왜 이러실까.”
킬킬 웃는 목소리가 하나둘 섞여들었다. 민호는 그런 녀석들의 엉덩이를 더 한번 걷어찼다. 하여튼 조금만 틈이 있으면 농담을 못 해 죽은 귀신이라도 붙은 듯 굴었다. 잔말 말고 저녁 먹기 전에 무기 손질이나 끝내놓으라고 큰소리치고 돌아섰다.
“두목, 우리도 다 안다니까!”
“시끄럽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소리 지르는 민호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새삼스레 다른 생각이 들었다. 얼굴의 열기가 가라앉지 않는 민호는 수건에 물을 적셔 얼굴에 뒤집어썼다. 축축한 수건이 얼굴에 철썩 붙었다. 하지만 뜨끈뜨끈한 볼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
이놈들은 사람 놀리는데 재주가 있어서. 몇 번이나 속으로 투덜대던 민호는 미지근해진 수건을 집어 들었다. 괜한 소리를 들었더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이래서야. 영 못 써먹겠어. 아직도 벌겋게 익은 얼굴을 몇 번이나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그리고 음식을 준비하는 곳으로 갔다. 많은 사람을 먹이는 곳은 벌써 저녁 준비가 한창이었다. 물론 정착해서 사는 사람처럼 먹지 못하지만, 그래도 제법 번듯한 음식이 하나둘 완성되고 있었다. 민호는 문간에 기댄 채 바쁘게 움직이는 부엌 담당들을 바라보았다. 이 시간에 가장 바쁜 장소였다. 쉼 없이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부글부글 끓는 냄비가 보였다.
“준비는 잘 돼 가는 건가?”
“물론이죠. 대장. 조금만 더 있으면 금방 완성될 겁니다.”
“탄다. 타.”
민호가 말을 건 틈을 타 딴짓을 하던 녀석의 등짝을 철썩 내려친 부엌 담당이 민호를 보고 씩 웃었다. 민호가 처음 이 도적 단에 들어왔을 때부터 같이 있었던 친구였다. 동료는 계속 바뀌었지만, 항상 곁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소중한 동료였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밥에 신경을 써?”
“…응?”
“뭐 부탁할 거라도 있어?”
“아니…뭐 그런 건 아니고.”
민호가 말끝을 흐렸다. 그런 대장을 바라보던 프라이의 얼굴엔 뭔가 알겠다는 표정이 생생하게 올라왔다. 그리곤 냄비에 들어있는 음식을 솜씨 좋게 뒤집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지금 말해.”
“…….”
“시간 더 지나면 해주고 싶어도 못 해줘.”
“…그럼.”
몇 번이나 망설이던 녀석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프라이는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민호의 입을 바라보았다.
“어제 사온 양고기 좀 구워봐.”
“개인적인 이유야?”
“…그런 거 아니야.”
“정말?”
“…….”
짓궂게 물어보는 녀석의 얼굴이 보이자 민호는 또 홱 돌아섰다. 하여튼 눈치 빠른 녀석들은 상대하기 껄끄러웠다. 그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뚜벅뚜벅 자리를 벗어났다. 그런 친구의 듬직한 등을 바라보던 프라이를 내내 웃으면서 몇에 있던 조수에게 양고기를 가져오라고 소리쳤다.
그 와중에 넓적하고 두툼한 빵이 김을 내며 구워졌다. 뜨끈뜨끈한 빵을 커다란 접시에 가득 담더니, 그 옆 접시에 양젖으로 만든 치즈를 뭉텅뭉텅 잘라서 놓았다. 밥과 빵. 그리고 치즈. 약간의 과일. 눈짐작으로 음식의 양을 가늠하던 프라이는 어느 정도 고기를 덜어내서 굽기 시작했다. 그나마 고기가 남아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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