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민호/토민호] Here I am 005
+) NOTICE
영화 1편을 기반으로 원작 네타(메이즈러너 파일분량)를 맛내기로 섞었습니다.
토민호인데 토마스랑 민호 한참동안 안만남 주의
적당한 망상과 설정 붕괴가 언제나 함께 합니다 ㅇㅅㅇ)9
어느정도까지 연재 후 뒷부분을 추가해 회지로 만들 예정입니다.
책이 나와도 연재한 분량 자체를 지우진 않습니다..
write. 환월
처음 올라간 알비가 어떻게든 한 달을 버텼다고 해서, 그다음에 올라간 사람들도 버틸 수 있을 거란 보장은 없었다. 알비는 실험을 하는 내내 상위권에 속해있는 그룹이었고, 무슨 일을 하더라도 의지를 꺾지 않았다. 그렇기에 적어도 세 번째 상자가 올라오기 전까지는 괜찮을 거라 보고 있었다. 연구원들의 낙관론인지, 생각 외로 실험군의 삶에 대한 집착이 강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연구원들은 항상 하던 일을 하면서 다음 올려보낼 아이들을 고르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상위 그룹만 보낼 수 없었다. 두 번째로 올라가는 사람들은 일종의 쿠션 장치이기도 했다.
“내일 상자를 보내기로 했단다.”
“벌써 한 달이 지났나요?”
“그렇지. 알비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지만 훌륭하게 살아남았더구나. 역시 처음부터 눈에 띄던 실험체다워.”
“남아있는 정보는 이름뿐인가요?”
“그렇지. 생존에 필요한 정보들도 조금씩 기억이 나긴 할 거란다. 다만 공터가 아직 황폐하기 때문에 언제 제대로 써먹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렇군요. 좀 더 사람 수가 늘어야 할 텐데”
토마스가 뭔가 열심히 한쪽 구석 땅을 파고 있는 알비를 쳐다보았다. 제대로 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알비에게 주어진 것은 함께 실려 올라온 모포 몇 개와 저장용 음식 그리고 연장이 전부였다. 그나마 음식이 오래 저장할 수 있는 육포인 것이 다행이었다. 공터에는 이름 모를 풀들이 잔뜩 자생하고 있었지만, 비상약 하나도 제대로 없는 곳에서 그런 것을 함부로 뜯어먹을 수 없었다.
알비는 생각보다 침착하게 나무 아래에서 모포를 두른 채 하루를 버텼다. 일단 마실 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다음 날 숲 속을 헤매면서 반대쪽으로 나갔다. 상자에서 꺼낸 저장용 물통에 식수를 담아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공터는 상상보다 훨씬 넓었고 사람은 한 명이라 많은 것을 할 수 없었다. 연구원들이 알비에게 원하는 것은 그저 한 달 동안 저 황폐한 곳에서 살아남는 것 하나뿐이었다.
곧 두 번째 상자가 공터로 올라갔다.
아무래도 한 명씩 올려 보내면 기반을 다지는 것이 너무 느려질 것 같다는 의견을 받아들여 이번에 올라갈 사람은 두 명이었다. 중위권에 속해있는 비슷한 체격의 남자아이 둘이 저번처럼 조용히 끌려 나갔다. 뉴트는 이번에 수면가스를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예민한 신경 줄을 긁으면서 퍼지는 수면 가스는 속을 쥐어짜는 것처럼 스며들었다. 아마 일어나면 누군가 사라져 있을 것이 분명하다 생각하며 정신을 잃었고, 눈을 뜨자 그 걱정이 현실이 된 것을 알 수 있었다.
“…….”
“우리 그룹에서 사라지진 않았어.”
“그게 중요한 일이야? 어쨌든 누군간 사라졌다는 거잖아.”
“맞아.”
“뉴트. 지금 일부로 냉정하게 반응하는 거야?”
갤리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이렇게 기절하듯 감을 자고 일어나면 항상 기분이 더럽다고 말하면서 유난히 예민하게 굴었다. 뉴트는 속으로 주변 사람들이 사라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아주 잠깐 생각했다. 그것이 못된 생각일수도 있지만, 적어도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남아있다는 사실은 기쁜 일이었다. 물론 갤리는 그런 뉴트와 민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독보적으로 이성적인 사람은 눈 밖에 나기 쉬웠다. 사람들이 끌려 올라갈 때마다 격리실의 분위기는 점점 나빠졌다.
“일단은. 다른 그룹에서 끌려 올라갔다는 것은 우리 차례가 생각보다 늦게 돌아올 수도 있다는 걸지도 몰라.”
“그래서 지금 그게 잘한 생각이야?”
“말꼬리 잡지 마. 갤리. 그래서 너도 살아남았잖아.”
“…….”
뉴트는 굉장히 예민했다. 스스로 인정하고 있었지만, 그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격리실은 금방이라도 짓눌릴 것 같은 무거운 공기가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도 모두 연구원들에게 보고되고 있었다. 동료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분노와 체념. 그리고 다시 일어서는 과정이 담긴 뇌파는 모두 분석실로 보내졌다. 수많은 사람 중 고작 세 명이 사라졌을 뿐인데 저렇게까지 무리가 흔들린다는 것이 재밌기도 했다.
토마스는 착 가라앉은 눈으로 격리실 카메라를 이리저리 돌려보다 뉴트를 발견하곤 자기도 모르게 다른 카메라로 시선을 옮겼다. 뉴트가 의도적으로 그날 밤에 있었던 일은 묻어둔 것인지, 나중에 쓰기 위해 숨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행히 아직 토마스가 격리실을 몰래 훔쳐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한 명 뿐이었다. 계속 불안해지는 마음은 점점 자라서 심장 한구석에 단단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차라리 뉴트를 먼저 보낼까.’
지극히 어린이다운 생각이었다. 사실 민호와 가장 가깝게 의견을 교환하고 의지하고 있는 사람은 뉴트였다. 그런 것만으로도 충분히 신경이 쓰이는데, 그 녀석이 자신의 비밀을 틀어쥐고 있기도 했다. 적어도 알비와 뉴트가 민호 곁에서 사라진다면, 좀 더 지켜보기 편할 것 같았다. 어린 날 토마스였다면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로 자신을 혐오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뇌의 한 부분이 의도적으로 망가져 버린 아이는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위해 가장 이상적인 방법만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격리실에 있는 사람들을 공터로 올려 보내는 순서는 전적으로 토마스가 담당하고 있었다. 연구원들이 조언을 해주긴 했지만, 토마스가 하는 결정은 절대적이었다. 총장이 승인한 권리에 대해 불만을 대놓고 표할 사람은 연구소 내에 아무도 없었다.
“토마스!!”
“…….”
“토마스!!! 들리니? 토마스!!”
“살롯? 왜 그래요?”
“큰일 났다. 지금 당장 메인 감시실로 오렴. 알겠니? 빨리!”
“…….”
갑작스러운 소란에 토마스는 이것저것 적어놓은 노트를 뒤집어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이 뛰어다니면서 연구원들을 불러 모을 정도라면 작은 일은 아니었다.
급하게 문을 열고 나오자 웅성거리는 소리가 한 번에 들이닥쳤다. 아무 말 하지 않고 눈만 깜박이며 복도를 쳐다보는 아이의 손을 확 낚아챈 어른이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어른과 아이의 발 보폭의 차이는 너무 컸다. 한 쪽 손을 꽉 잡힌 채 반쯤 뛰면서 간신히 따라붙은 토마스가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가서 보면 안다.”
“큰일이라도 난 건가요? 테스트에 문제가 생겼어요?”
“가보면…….”
“…….”
더는 대답을 해주지 않아 토마스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제대로 설명을 할 정신도 없는 것 같았다. 간신히 연구실 앞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벽 한쪽에 가득한 카메라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카메라가 비추는 곳마다 엄청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입을 가린 채 고개를 돌리고 있었고, 그나마 비위가 강한 사람은 무엇인가 연신 조작하며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 쓸데없이 화질이 좋은 카메라가 이럴 때 원망스러웠다. 토마스가 찬찬히 화면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
“이런,”
“도대체 왜.”
“이유가 확실하지 않습니다. 분명 정신을 잃은 것을 확인하고 상자에 실었는데.”
“…….”
“상자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데, 몸싸움하다 카메라가 파손된 것인지 제대로 찍혀 있지 않습니다.”
“…….”
“카메라 복구되었습니다.”
“블랙박스 조사 들어갔습니다.”
하나둘 장내 상황이 정리되고 있었지만, 오히려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피해 규모와 현장 사진을 봐야 한다는 것부터 부담이 심했다. 몇몇 연구원이 토마스의 눈을 가려주려 했다.
두 번째로 끌려간 아이들은 중위권에 속해있는 남자아이 둘이었다. 리노. 아널드. 이렇게 불리던 아이들은 알비가 그랬던 것처럼 수면가스를 들이마시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커다란 격리실에 모여 앉아있는 녀석들이 모두 정신을 잃은 것을 확인하고 나서 재빨리 두 명을 밖으로 끌어냈다. 완전히 늘어진 둘을 빠르게 수술실도 데려갔다.
간단한 수술을 시작했다. 이곳에서 받았던 모든 실험을 생각나지 않게 하기 위해 기억을 조작했다.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며칠이 지나면 이름 정도만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위키드가 주는 마지막 자비였다. 알비도 그랬고, 지금 올라가는 아이들도 그랬다. 아마 공터에 올라가는 모든 사람은 같은 수술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늘어진 두 아이를 상자에 실었다. 그리고 남은 공간에 생존에 꼭 필요한 것들을 채워 넣었다. 공터에 사람이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먹을 것이 더 필요했다.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저장식품과 날카로운 연장들이 가득 실렸다. 무엇인가 고정할 때 쓸 수 있는 단단한 밧줄도 둘둘 말린 채 한쪽 구석에 쌓아두었다.
철장으로 만든 문을 닫았다. 제대로 닫혔는지 두 번 정도 확인하고 서둘러 아래로 내려왔다. 손을 흔들어 확인 신호를 보내자 곧 상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길고 차가운 통로를 지나면 처음 보는 곳에 도착해 있을 것이 분명했다. 수면 가스는 통로를 다 지나기 전에 몸에서 사라졌다. 알비와 새로운 신입 두 명이 한 달을 무사히 버틴다면 곧 새로운 실험 군을 올려 보낼 계획이었다.
“상자, 공터로 올라갑니다.”
“좋아. 지금까지 모든 결과를 보고서로 작성하고, 격리실 쪽도 살펴보도록 하세요.”
“잘 될까요?”
“성공해야만 하죠.”
하지만 언제나 계획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평균 시간보다 조금 더 빨리 깬 아이는 공포가 가득 찬 눈으로 사방을 돌아보았다. 낯선 곳이었다. 쇠를 긁어내리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없을 만큼 새까만 어둠이 그대로 보이는 아슬아슬한 철장으로 만든 상자에서 끝없이 비명을 질렀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것처럼 벌벌 떨리는 다리로 기어가다 옆에 있는 사람에 툭 걸려 넘어졌다. 밧줄 더미에 코를 박은 채 꿈틀거리는 몸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
단어도 되지 못한 신음이 입에서 줄줄 흘러나왔다. 더듬거리며 의지할 수 있는 것을 힘껏 움켜잡았다. 사시나무 떨듯 떨며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두 가지였다. 자신을 감싸고 있는 철장과 낯선 기계로 만들어진 통로뿐이었다.
잠시 뒤 정신을 차린 아이는 낯선 사람을 보는 손길로 상대방을 왈칵 밀쳤다. 공포가 가득 물든 몸은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을 정도로 패닉에 빠져 있었다. 수술을 받기 전까진 누구보다 서로 의지하던 상대였지만, 지금은 낯선 사람일 뿐이었다. 좁은 상자에서 엉킨 채 마구 구르다 누군가의 손에 연장이 담겨있는 주머니가 닿았다. 공포에 빠진 사람은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었다. 사방에 피가 튀고 비명 소리가 긴 통로에 울려 퍼졌다. 상자는 하염없이 위로 올라갔다.
“…….”
알비가 올라온 상자를 열었을 때, 숨을 들이 쉴 수밖에 없었다. 철장 안의 상황은 끔찍했다. 둘 중에 숨이 붙어있는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물론 목숨만 건졌을 뿐이었다. 제정신은 아니었다. 반쯤 뒤집힌 눈을 본 알비가 철장 안으로 내려가서 뺨을 몇 번이나 쳤다. 간신히 살아있는 사람을 끌어냈다. 하지만 죽어있는 사람을 어떤 식으로 도와줘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흙투성이가 된 채 벌벌 떨고 있는 녀석을 조금 바라보다 침착하게 지급된 물품을 꺼내 올리기 시작했다. 죽음보다 무서운 것은 혼자 있는 공포였다. 알비는 혼자서 사는 내내 그렇게 말했다.
여기저기 찔려서 피를 많이 흘린 탓인지 녀석은 시름시름 앓았다. 환영은 보는 것처럼 새벽마다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가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녹슨 것에 찔리기라도 했는지 온몸에 지독한 열이 올랐다.
“…….”
알비는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살겠다고 생명을 붙잡고 있는 사람을 모른 척 할 수는 없었다. 일단 계속 적당히 부를 수 없어서 이름을 알아보기로 했다. 알비는 공터에 들어온 지 일주일 만에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 냈다. 아마도 옆에서 자극을 주는 사람이 없어서 조금 느렸던 것이 아닐까 했다.
“이름이 뭐지? 몰라?”
“…….”
“이름. 기억날 거 아냐.”
“…….”
“이봐. 여기선 어리광부리면 곧장 죽어. 알고 있어?”
“…리노.”
겨우겨우 입을 뗀 녀석은 또 울기 시작했다.
“내 이름은 리노야.”
하지만 이름을 알아낸 수고를 보상받지도 못한 채 리노는 다음 날부터 고열에 시달리면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금방 죽어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상태가 좋지 않았다. 좀 더 버티나 싶었는데, 역시 철장 안에서 난투극을 벌인 것이 제법 리스크가 큰 것 같았다.
“아무리 봐도 안 되겠어요.”
알비와 리노를 바라보던 카메라를 돌려버린 남자가 일어섰다. 리노의 생명 반응은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육체와 정신 둘 중의 하나라도 기대할 만한 부분이 남아있지 않았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킬 존 테스트 세 번째 대상자를 올려 보낼 것을 요청합니다.”
“너무 빠른 것 아닐까요?”
“길어봤자 사흘입니다. 그러면 또 알비 혼자서 공터에 있을 텐데, 우리가 원하는 일이 너무 늦어질 수 있습니다.”
“역시 초반에 중위권을 투입한 것이 잘못됐던 것일까요?”
“적응하지 못한 쪽도 문제가 있겠죠.”
연구원들은 곧 토마스에게 세 번째 리스트를 부탁했다. 사람을 올려보내는 순서는 오직 토마스만 정할 수 있었다. 귀찮은 내색도 하지 않고 생글생글 웃는 아이는 내일까지 필요한 자료와 함께 답변을 준다고 말하고 나서 곧장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다녀왔습니다.”
의미 없는 인사가 빈방에 훅 뿌려졌다. 급하게 나가면서 덮어놓은 노트가 책상 위에 그대로 있었다. 조심스럽게 가운을 벗고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시간이 꽤 지났는데 이제야 속이 울렁거렸다. 눈앞에 선연한 피 웅덩이가 보이는 것 같아서 고개를 흔들면서 베개를 끌어당겼다. 상상 속에서 피어난 핏물에서 왈칵 쇠 냄새가 났다. 비릿한 맛이 입안에 고이는 것 같아서 토마스는 작게 헛구역질을 했다. 생각할수록 잔인한 장면이었다. 계속 재생되는 장면을 더는 보기 힘들었다.
“…….”
베개를 끌어안고 끙끙 앓던 아이가 간신히 일어나 앉았다. 아무리 지금 컨디션이 좋지 않더라도 할 일이 있었다. 빨리 세 번째를 선택해야 했다. 토마스가 책상에 있는 노트를 손끝으로 집어 올렸다. 그리고 뒤로 털썩 누워버렸다. 노트를 한 장 한 장 읽을 때마다 침대에 흩뿌리기 시작했다. 누가 봤으면 갑자기 왜 그러냐면서 걱정을 할 만큼 별난 행동이었다.
‘뉴트…민호.’
토마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름을 말할 때마다 조각조각 깨져서 심장에 푹푹 박히는 것 같았다. 저 안쪽에서 아릿하게 저리는 심장이 숨쉬기 힘들게 만들었다.
‘…아니면 갤리.’
실험 상위권에 속한 사람들의 이름을 몇 번이나 말하면서 끊임없이 고민했다. 중위권 아이들을 둘이나 보냈는데 저 꼴이 난 것을 보면, 아직 시기상조였다. 어중간한 놈들이 몇 명이 간다고 해도 저것보다 좋은 결과가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역시 처음 공터에서 살아남을 사람들은 상위권밖에 없나. 정말 그것밖에 답이 없는 걸까.’
토마스는 민호를 먼저 올려보내기 싫었다. 물론 연구에 사심을 담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언제나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원칙에 어긋나지 않으려 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머릿속에 스며든 사적인 감정이 점점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최대한…뒤로 뺄 수 있다면…….”
머리가 복잡했다. 미룰 수 있다면 민호가 공터로 올라가는 것을 끝까지 반대하고 싶었다. 하지만 모든 방면으로 좋은 능력을 보여준 터라 그렇게 하기도 힘들었다. 여전히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손끝에서 작고 고른 글씨가 종종 내려앉기 시작했다.
남은 상위 그룹 네 명 중 세 번째. 결국, 토마스는 민호를 세 번째로 공터로 보내기로 했다. 더는 뒤로 미룰 수 없었다. 뉴트 다음으로 민호의 이름을 꾹꾹 힘줘서 적어 넣은 토마스가 펜을 내려놓으며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작은 손으로 연신 마른세수를 하며 괴로워 하다가 다시 리스트에 이름을 채워 넣기 시작했다.
가장 힘든 고비를 넘기고 나자 오히려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사실 기초를 다질 사람들만 올라가서 잘 적응한다면 그다음 도착하는 중위권 그룹은 그다지 큰일이 없이 적응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빼곡하게 이름을 적은 종이를 제출하자, 곧 다음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대로 하면 되는 거지?”
“…….”
“토마스?”
“네? 네.”
“왜 그러지? 무슨 할 말이라도 있니?”
“저…괜찮다면.”
토마스는 그 날 이후 처음으로 격리실로 몰래 내려갔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얼마나 차가운지 알고 있어서, 완전히 격리실로 들어가지 않고 바로 직전 멈춰 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이미 안쪽은 아수라장이었다. 이상함을 느낀 뉴트가 예민하고 거칠게 반항을 하고 있었다. 급한 상황이라 수면가스를 살포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어른들이 들어와 뉴트 끌어내기 시작했다. 가는 팔을 단단히 붙잡힌 뉴트가 온몸으로 저항하면서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뭐야! 이거 안 놔!”
“쉿…조용히 해라.”
“조용히 하기는…야 이거 놓지 못해! 민호! 갤리!”
“어서 끌어내.”
“야!”
“뉴트!”
달려드는 아이들을 호신용 무기로 저지하면서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민호가 그 틈을 뚫고 달려 나왔지만, 곧 커다란 손에 붙잡힌 채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뉴트는 이미 두 팔을 완전히 구속당한 채 질질 끌려나가고 있었다. 잔뜩 겁에 질린 까만 눈동자가 보였다 사라질 때마다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최대한 버티고 있었지만, 바짝 마른 몸으로는 어른 두셋의 힘을 절대 감당해 낼 수 없었다. 민호는 두 팔을 잡히고 뒷목을 눌린 채 멀어져 가는 친구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뉴트! 이 새끼들이!”
“…….”
“이거 놔!”
민호가 움직이지 못하자 다른 아이들은 감히 연구원에게 덤비지 못했다. 위협용이긴 하지만, 전류가 파직파직 튀는 검은 몽둥이를 피해 달려가긴 쉽지 않았다. 학습된 무기력과 공포가 아이들을 사정없이 짓눌렀다. 새끼 펭귄처럼 한쪽 구속에 몰아 붙여진 아이들을 간신히 입을 열어서 웅얼거리다 이내 그 것마저 포기해 버렸다.
“실험체 격리 완료. 곧 세부 조정에 들어간다. 한시간 뒤 각각의 격리실에 수면가스 살포하도록.”
“알겠습니다.”
“모두 안쪽에서 철수한다. 다만 실험 격리실 밖에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라.”
“네.”
어른들이 빠져나가자 잔뜩 움츠린 채 뭉쳐있던 아이들이 하나 둘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민호의 두 팔을 풀어주자 아이는 금방 눈을 번뜩이며 달려들었다. 가볍게 아이를 제압한 어른들은 힘을 주어 반대편으로 민호를 밀어냈다. 그대로 뒤로 밀린 몸을 간신히 받아준 아이들이 잔뜩 화난 동양 소년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민호 그만해.”
“뭘 그만해! 지금 너희 눈앞에서 뉴트 끌려간 거 안 보여?”
“너도 끌려가면 어떡해.”
“…….”
“그만하자.”
“애들 말이 맞아.”
“…갤리 너까지.”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뿐이야.”
젠장. 낮게 욕을 내뱉은 민호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단단한 주먹으로 몇 번이나 바닥을 세게 치면서 울분을 토했다. 손이 얼얼하게 아팠다. 뼈를 잘못 맞기라도 했는지 욱신거리며 벌겋게 부어올랐다. 하지만 이 정도 아픔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더 힘든 것은 또 한 번 이렇게 허망하게 친구를 빼앗겨버린 사실이었다. 알비는 신기루처럼 순식간에 곁에서 사라졌는데, 뉴트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끌려갔다.
“…….”
토마스는 그 상황에서 안쪽으로 더 들어갈 수 없었다. 슬그머니 발을 돌려서 뉴트가 끌려간 일인 격리실을 찾았다.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이쪽도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아이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수면가스가 몸에 돌기 시작하면 그대로 잠이 들 것이 뻔했지만, 정신이 있는 내내 뉴트는 저항할 생각인 것 같았다. 차마 얼굴을 마주 볼 순 없어서 조심스럽게 까치발을 하고 격리실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새하얀 수술복으로 갈아입은 뉴트가 벽을 쾅쾅 치면서 뭐라고 소리 지르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왈칵 뒤집어지는 목소리가 토마스의 귀에 날카롭게 꽂혔다.
“…너.”
순간 까만 눈과 마주쳤다. 분노로 활활 타는 눈은 안쪽에서부터 빨간 불꽃을 내뿜고 있었다. 그 시선과 닿았을 때 토마스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찌푸리며 피해버렸다. 창가 근처로 척척 걸어온 아이가 토마스를 똑바로 노려보면서 이를 갈았다. 반쯤 졸음에 잠긴 눈을 애써 똑바로 뜨며 아이가 사라질 때 까지 내내 쳐다보았다. 하얀 가운 끝자락이 사라지고 나서야 그대로 푹 쓰러진 몸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뉴트가 완전히 늘어진 것을 확인한 연구진들이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들어왔다. 곧 수술실로 옮겨진 침대는 꽤 오랫동안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토마스는 다시 민호가 있는 격리실로 돌아가고 있었다. 격리실에서 돌아 나오는 그 마지막까지 달라붙던 분노에 찬 시선이 아직도 옷자락을 잡고 늘어졌다. 널 용서하지 않겠어. 한 글자 한 글자 뚝뚝 끊어서 정확하게 말하는 그 발음을 듣지 못해도 눈으로 알 수 있었다. 평생 동안 용서하지 않아. 분노에 찬 뉴트의 입술에서 쏟아지는 말은 유리 파편처럼 쪼개져서 토마스에게 우수수 쏟아졌다.
“…….”
하지만 한마디 반박을 할 수 없었다. 뉴트가 간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정한 순서였다. 선택에 따라 민호가 갈 수도 있었고, 갤리가 올라갈 수도 있던 일이었다. 토마스는 뉴트의 이름을 적어 넣으면서 필사적으로 이번 결정에 대한 근거를 찾았다. 질투가 아닌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몇 번이나 생각해 가며, 뉴트가 세 번째로 올라가야 하는 이유를 적어 넣었다. 지금까지 실험으로 미루어볼 때 침착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한다. 적어도 동료들이 있는 곳에서 죽을 아이가 아니다. 구구절절 적어 내려간 문장의 끝에 마침표를 찍었다. 아마 토마스가 그렇게 열심히 의미를 찾지 않았어도 뉴트의 미래는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잘못 한 것이 아니야.’
토마스는 몇 번이나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 아주 조금은 뉴트에게 질투를 느낀 적이 있었다. 민호랑 어렸을 때부터 항상 같이 있었으니 친할 수 있다고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몸으론 절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기 싫었다. 이유 없이 자신을 보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는 애들도 싫었고, 같은 어린애 주제에 다 안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뉴트도 싫었다. 이미 잔뜩 질투에 눈이 멀어버린 아이는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성적으로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발걸음이 저절로 민호에게 향한다는 사실도 모른 채 토마스는 비척비척 긴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싸한 약품 냄새가 나는 긴 복도의 끝에 대규모 격리시설이 있었다. 모든 일이 끝나서 어른들이 다 빠져나갔는지, 길고 커다란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토마스가 벽에 바짝 붙어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한 사람이 사라진 공간은 묘한 긴장이 흘렀다. 민호가 팔짱을 낀 채 씩씩거리며 입구를 노려보고 있었다.
“…….”
“저 새낀 또 뭐야.”
“…….”
이런 상황에서 토마스가 안쪽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사실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찔러죽일 듯 쏟아지는 엄청난 시선이 온몸에 푹푹 꽂혔다. 고개를 푹 숙이고 안으로 들어온 토마스가 슬쩍 시선만 움직이면서 분위기를 살폈다. 물론 분위기가 좋을 리 없었다. 손에 뭐라도 들려 있다면 당장 집어 던지고 싶다는 표정이 역력한 아이들이 보였다. 또 한 번 또래 그룹에 속하지 못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한걸음. 다시 한 걸음. 천천히 다가갈수록 견디기 힘든 시선과 수군거림이 쏟아져 내렸다. 대놓고 욕하는 소리가 귓가에 들릴 때마다 입술을 깨물었다.
“넌 뭐가 잘났다고 여기까지 왔냐.”
“…….”
“왜? 사람이 모자랐어?”
“…….”
입을 떼려는 순간 민호의 두 손이 토마스의 멱살을 덥석 잡았다. 잔뜩 화난 표정이 시선 가득 담겼다 사라졌다. 쾅. 등이 아플 정도로 벽에 부딪혔다. 아파. 토마스가 중얼거렸다. 다시 몸이 딸려 나가다 한 번 더 벽에 처박혔을 때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구기고 말았다. 단단하고 거친 벽에 부딪힌 모든 부분이 얼얼하게 아팠다. 찌르르 온몸을 타고 내리는 고통에 몸을 뒤틀었지만, 민호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
토마스가 얼굴을 찡그리며 한마디 하려는 순간 민호는 그대로 주먹을 날렸다. 그 순간 이를 악문 날선 표정을 바라봤다. 토마스는 까만 눈에서 파란 불꽃이 튀었다고 생각했다. 악. 짧은 비명이 격리실에 울려 퍼졌다. 단단하게 말아 쥔 주먹이 있는 힘껏 치고 지나간 뺨은 벌써 벌겋게 부풀어 올랐다. 충격에 입 안이 터졌는지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한쪽으로 고개를 푹 꺾고 있는 토마스가 가늘게 신음을 챘지만 민호는 멱살을 틀어쥔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옷을 찢을 것처럼 더 단단히 잡았다.
“네 녀석이 보낸 거지!”
“…….”
“도대체 어디까지 관련이 되어 있는 거야. 너!”
“…….”
“당장 말해!”
“…….”
토마스는 잔뜩 화가 나서 으르렁거리는 민호가 하는 말을 그대로 듣고만 있었다. 한마디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말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민호의 팔이 움직이는 대로 같이 흔들리고 있었다. 빨갛게 부어오르다 못해 화끈하게 열이 오르는 뺨은 이미 멍이 들었다. 시커멓게 멍이 스미는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시끄럽게 울리는 소음 때문에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현기증이었다. 다리가 풀려서 쓰러질 뻔했다. 간신히 손으로 벽을 짚었다.
“…….”
뒤늦게 저러다 큰일 나겠다 싶었는지 하나둘 민호를 말리기 시작했다. 갤리의 손을 뿌리쳤다. 씩씩거리며 아직도 분노를 삭이지 못하는 민호는 구겨 잡고 있던 토마스의 멱살을 홱 뿌리쳤다. 구겨진 옷을 펴지도,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지도 않았다. 고개를 가만히 숙이고 있다 가만히 시선만 들어서 눈앞의 사람을 쳐다볼 뿐이었다. 물론 그 시선이 사람을 더 화나게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어디서 억울한 척이야.’
차라리 연구원들 틈에 껴서 오만하게 내려다보는 쪽이 나았다. 가해자 주제에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억울하게 쳐다보는 그 얼굴이 싫었다. 누가 피해자인지 알 수 없었다. 민호의 주먹에 다시 힘이 들어가는 것을 눈치챈 애들이 우르르 몰려와 둘을 떼어놓았다. 이러다 제대로 맞아서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벽을 붙잡고 서 있는 녀석을 뒤로 한 채 민호를 둥그렇게 에워쌌다. 아무도 토마스를 신경 쓰지 않았다.
“…….”
참 오랜만에 머리가 아팠다. 뇌 한가운데서 욱신거림이 시작되더니 이내 목 뒤가 뻣뻣해질 정도로 고통이 흘러내렸다. 웅웅 시끄러운 소음이 일어나는 귀는 진공상태가 되는 것처럼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이거 놓으라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렸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났다. 더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토마스는 이미 쓰러져있었다. 분명 차가운 바닥에 온몸이 비명을 지를 정도로 세게 쓰러졌을 텐데 이상하게도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
“…….”
“…….”
‘졸려.’
호박색 눈이 스르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이후 기억이 없었다.
✗ ✓ ✗
토마스가 정신을 차린 것은 응급실 침대 위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눈만 깜박이고 있다가 몸을 일으키자 입에서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부딪히고 넘어진 온몸에서 비명을 질러댔다. 옆에 놓인 시계를 집어서 시간을 확인했다. 세 시간? 네 시간? 제대로 알 순 없었다. 하지만 꽤 오랜 시간 침대에 누워있었던 것 같았다. 욱신거리는 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얼마나 부어올랐는지 손에 잡힐 것처럼 부푼 볼은 손 끝이 스칠 때마다 아팠다.
‘아파. 멍 들었나 봐.’
침대에서 내려와 화장실로 갔다. 눈을 찡그리면서 세수를 하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거울로 본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시커멓게 내려앉은 멍이 점점 번지는 게 눈에 보였다. 잔뜩 열이 올라온 것을 보니 맞아도 제대로 맞은 것이 틀림없었다. 볼을 문지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마침 자리를 비웠다 돌아온 담당 의사가 토마스의 볼에 거즈를 붙여줬다.
“…….”
“괜찮니?”
“네? 네. 그런데 저 뭐 하나 물어봐도 괜찮아요?”
“뭔데 그러니.”
“그…민호는.”
“…….”
“내가 도발한 거였어요. 그 시간에 가면 당연히 화낼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일주일 독방 처분이 내려졌다.”
“…….”
“그 정도면 양호한 거지.”
“…맞아요.”
토마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몇 남지 않은 귀한 상위 실험체라서 최대한 편의를 봐준 것 같았다. 다행일까. 불행일까. 토마스는 그 처분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그러고 요즘 토마스 네 감정이 많이 불안정해진 거 같아서 수술 날짜가 잡혔단다.”
“…….”
“계속 두면 저번처럼 계속 쓰러질 수도 있어.”
“…싫은데.”
“총장님이 내린 명령이란다.”
“…….”
스스로 받은 벌이라고 생각했다. 수술실에 들어가는 건 너무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의자에서 내려와서 꾸벅 인사하고 밖으로 나왔다. 얼마 걸어가지 않아 트리샤가 웃으면서 나타났다. 그리고 터벅터벅 걷는 토마스 옆에서 발을 맞추기 시작했다.
“얼굴 왜 그래?”
“맞았어.”
“누구한테?”
“민호한테.”
“…….”
트리샤는 알면서 물어봤던 걸까.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세 갈래로 뻗은 홀에서 트리샤와 토마스는 각각 반대편으로 헤어졌다. 트리샤는 아직 할 일이 있었고, 토마스는 수술 일정을 알아봐야 했다. 사실 이럴 때마다 항상 이것저것 식단을 조절해야 하는 것도 많아서 영 귀찮았다. 민호가 나오는 날에 수술을 받기로 했다. 매일매일 끼니때마다 먹어야 하는 약을 한 움큼 받아서 돌아온 토마스는 책상에 약병을 주르르 늘어놓고 한숨을 쉬었다. 한 끼마다 먹을 양이 어마어마했다. 알록달록하지도 않고 예쁘지도 않은 하얀 알약은 약병마다 가득 담겨있었다.
그날 이후 토마스는 매일매일 민호를 찾아갔다. 독방은 작은 감시 창문 외엔 빛이 들어가는 곳이 없었고 하루에 세 번 열리는 배식구는 단단히 잠겨있었다. 물론 안쪽에서 보는 구조는 그랬다. 민호는 두 팔이 결박된 채 독방에 앉아있었다.
많은 사람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매직미러로 만들어진 독방 덕분에 토마스는 민호의 모습을 마음껏 볼 수 있었다. 싸늘하게 식은 눈이 가끔 움직일 때마다 토마스는 조용히 그 시선을 따라서 발걸음을 옮겼다. 점점 머리가 아파져 오는데, 이렇게 보고 있지라도 않으면 버틸 수 없었다. 볼을 감싸고 있던 멍은 지독히도 오래갔다.
일주일 내내 시간만 나면 독방 근처를 어슬렁거리던 토마스는 결국 끝까지 버티다 수술실로 끌려갔다. 그리고 채 두 시간이 되지 않아 민호가 밖으로 나왔다. 일주일 내내 불편하게 결박되어있던 손을 연신 움직이며 짜증스럽게 주위를 쳐다보았다. 민호는 그새 좀 더 컸다. 성장기에 접어든 아이들은 조금만 떨어져 있어도 키가 큰 것이 티가 났다. 돌아온 친구를 반겨주는 아이들은 민호가 없던 동안 일어난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민호도 물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였다. 근육통이 뻐근하게 얹힌 팔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자연스럽게 섞여들었다.
그리고 민호가 공터로 올라가기로 결정되었다. 토마스도 어쩔 수 없는 사항이었기에 스스로 이해했다. 하지만 공터로 올라가기 전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모두 해주고 싶었다. 저번 사건을 계기로 서로 마주치면 더 안 좋은 일이 생긴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아챈 토마스는 뒤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좀 더 싸늘해진 눈빛으로 자신이 가진 권리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사용했다. 토마스가 이상해졌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었고, 아닌 사람도 있었지만 크게 걱정을 하진 않았다. 어차피 위키드란 그런 존재였고, 할 일만 똑바로 한다면 뭘 해도 상관없는 장소였다.
“토마스 이게 뭐니?”
“다음 달에 올라갈 녀석을 위한 식단이에요.”
“이렇게 특별식으로 먹이는 건 없었던 일인데.”
“가끔은 그래도 좋잖아요. 연구에 필요해서 그러는 거니까.”
“…뭐 좋을 대로 하렴.”
살살 웃으면서 말하는 토마스를 보던 연구원이 웃음을 터뜨리면서 종이를 받아들었다. 확실히 상위 그룹은 조금 더 특별한 취급을 받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적당히 밤에 섞여 나오는 영양제는 물론이고 대놓고 간식거리가 들어오기도 했다. 실험실로 들어온 이후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민호는 주위에 있는 애들한테 적당히 나눠주고 오히려 그런 군것질거리엔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민호가 자신의 호의를 누구에게 주던지 상관없었다. 토마스는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왜 아무렇지 않아 하는 걸까.’
공터로 올라가게 된다는 사실이 공공연하게 소문으로 돌아다닐 정도로 민호는 위키드에게 특별대우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취급을 받으면서도 별다른 반응이 없는 민호를 보면서 토마스는 혼자 앓고 있었다. 알비도 뉴트도 모두 주변에서 떼어놨다. 그런 다음 다시 만나도 서로 알아볼 수 없는 곳으로 보냈지만, 토마스의 허한 마음은 채워지지 않았다. 지금은 아무런 방해 없이 보고 싶은 만큼 민호를 혼자서 독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민호의 시선 끝에는 토마스가 없었다.
‘뉴트가 궁금한 걸까.’
때때로 보이는 쓸쓸함을 알아챈 토마스는 걱정만 깊어갔다. 뉴트가 공터에 올라가서 죽었다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알비와 함께 억척스럽게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쩐지 살아있는 모습을 보면 더 화가 날 것 같아서 일부러 찾아보지도 않았다.
토마스는 처음으로 공터를 감시하고 있는 카메라를 틀었다. 이리저리 카메라를 돌리다 보니 저 멀리 뉴트같은 인영이 보였다. 그새 좀 더 커버린 뉴트가 땀에 젖은 후드티를 허리에 질끈 묶곤 뭔가를 부지런히 옮기고 있었다. 아직도 제대로 된 주거지조차 없는 곳에서 조그만 아이는 열심히 땅을 파고, 나무를 뜯어내고 있었다. 간신히 새벽이슬을 피할 수 있을 정도로 얇게 파진 구덩이 위에 어설프게 만든 지붕이 얹혀 있었다.
알비와 뉴트. 둘이서 하기엔 버거워 보이는 작업이었지만, 둘은 밤이 될 때까지 끊임없이 움직였다. 조금씩 조금씩 만들어지는 기둥을 보면서 토마스는 처음으로 감탄을 내뱉었다. 불을 피우는 손길은 아직 서툴렀지만, 곧잘 모닥불을 만들기도 했다.
“미로는…아직 인가.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네.”
둘은 이 지옥에서 살아남는 것이 너무 간절해 흉물스럽게 입을 벌리고 있는 미로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아무리 살펴봐도 미로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서 닫히는 것을 시계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미로로 가는 길목이 봉쇄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밤이 되었다. 캄캄한 어둠이 내린 글레이드엔 길고 찢어지게 우는 그리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둘은 어설프게 만들어놓은 잠자리에서 간신히 눈을 붙였다. 그리버가 미로 곳곳을 헤집으면서 기괴하게 울었다. 새벽마다 깜짝 깜짝 놀라서 깨는 일은 이젠 익숙해질 정도로 당연한 일이었다.
✗ ✓ ✗
다음날 토마스는 민호를 찾아갔다. 이것저것 격리 실험을 받고 돌아와서 옷을 갈아입던 민호는 토마스를 보자마자 대놓고 인상을 구기긴 했지만, 저번처럼 덤벼들진 않았다. 대신 상의를 벗으면서 자연스럽게 뒤로 돌아섰다. 토마스가 격리실 벽에 바짝 다가서도 돌아보지 않았다. 슬슬 근육이 짜 맞춰지는 몸이 새로 지급받은 실험복 안으로 사라졌다.
“…민호.”
토마스가 조심스럽게 민호를 불렀다. 예전이라면 분명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냐면서 벌컥 화를 냈을 텐데 이번엔 반응조차 없었다. 그러자 조금 초조해졌다.
“민호.”
“…….”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토마스는 창살을 그러쥔 채 뉴트 이야기를 했다. 물론 절대 하면 안 되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 정보를 말해야 저 먼 곳을 보는 시선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뉴트가 살아있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 민호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 했다. 토마스는 그 모습을 보면서 또 한 번 마음이 차갑게 식어갔다.
“민호. 듣고 있어? 뉴트랑 알비는 살아있어.”
“…….”
“이 실험의 종착역이 되는 곳에서 열심히 살아갈 곳을 만들고 있어. 응? 듣고 있냐고.”
“…….”
“…민호.”
“…….”
할 말이 떨어졌다. 돌아 나오는 그 순간까지 흔한 고맙다는 말 한마디 못 들었지만, 그래도 달려들어 멱살을 잡지 않은 것만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실험실엔 멋대로 들어갈 수 없으니 민호가 수술을 받을 때마다 슬그머니 참관을 하곤 했다. 뇌에 작은 칩을 심었다. 그리고 천천히 기억 조작을 할 기반을 잡기 시작했다.
기절하는 것처럼 한숨 자고 일어나서 상자에서 눈을 뜨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글레이드에 첫발을 딛게 될 것이 분명했다. 알비도 뉴트도 함께 실험을 받았다는 사실도 모두 잊은 채 하루하루를 살아갈 것이 분명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인 마냥 다시 어깨를 맞대고 등을 맞대고.……. 여기까지 생각하니 또 기분이 나빠졌다. 토마스는 가끔 이렇게 사방으로 튀는 감정을 자제하기 어려웠다.
“…물론 나도 잊게 되겠지.”
민호의 기억 속에 토마스가 얼마나 자리 잡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토마스는 자신이 민호를 잊지 않으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수술이 끝나고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 실려 나온 민호는 피를 많이 흘려 하얗게 질려있었다. 잠시 보고 가겠다는 말에 연구원들이 흔쾌히 자리를 비켜줬다. 사실 토마스가 지키고 있다면 잠시 숨을 돌리며 쉴 수 있는 시간이 생기기 때문에, 딱히 반대하지 않았다.
“눈을 뜨면 바로 호출하렴.”
“알았어요.”
“부탁한다. 토마스.”
“여긴 걱정하지 마시고 다녀오세요.”
마지막으로 나가는 연구원이 친절하게 문을 닫아주자 회복실엔 민호와 토마스만 남아있었다.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민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토마스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섰다. 숨은 고르게 쉬고 있는데 눈을 뜨지 않았다. 두 손으로 단단한 어깨를 살짝 누르면서 허리를 숙였다. 토마스의 입술에 싸늘할 정도로 핏기가 가신 입이 닿았다. 하얗게 질린 입술은 아직도 제 색을 찾지 못했다. 좀 더 힘을 주면서 입을 맞대던 토마스가 조심스럽게 혀로 입술을 벌리며 안쪽을 탐하기 시작했다. 토마스와 민호가 닿아있는 부분에 씁쓸한 물기가 어렸다.
“민호….”
“…….”
“민호오. 응? 민호…….”
“…….”
대답이 없었다. 으음. 토마스가 한참 맛보던 입술에서 떨어져 나가며 아쉬운 한숨을 내뱉었다. 차가운 민호의 입술에선 소독약 맛이 났다. 다행히 민호는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 다시 한 번 가볍게 입술을 맞댄 토마스가 조용히 떨어져 나갔다. 민호가 눈을 뜰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내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의식이 돌아오는 것을 확인한 토마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와 연구원들에게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곧장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민호가 공터로 올라간 시점을 기점으로 토마스는 킬 존 테스트에 과도할 정도로 집착하기 시작했다. 모두 걱정을 할 만큼 열정적으로 매달렸고, 곧잘 좋은 결과를 들고 나타났다. 아이들을 하루가 다르게 컸다. 토마스도 벌써 한 뼘도 넘게 키가 자랐다. 늦게 자라는 아이는 형광등이 잔뜩 걸린 곳에서도 길쭉하게 컸다.
이곳에 속한 아이들은 자라는 내내 한 번도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글레이드에 갇힌 사람들도 그랬고, 위키드 연구소에 있는 남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토마스는 잠을 설쳐 까칠하게 마른 얼굴로 가끔 카메라를 쳐다보곤 했다. 카메라엔 민호가 보이기도 했고, 저 멀리 뉴트가 잡히기도 했다. 불면증이 점점 심해진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누구하나 말릴 수 없었다. 온몸을 혹사하는 것처럼 연구하다가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곤 했다. 토마스의 그 눈길이 너무 싸늘해서 아무도 말을 걸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계속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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