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민호/토민호] Here I am 006 [선공개분 完]
+) NOTICE
영화 1편을 기반으로 원작 네타(메이즈러너 파일분량)를 맛내기로 섞었습니다.
토민호인데 토마스랑 민호 한참동안 안만남 주의
적당한 망상과 설정 붕괴가 언제나 함께 합니다 ㅇㅅㅇ)9
선연재분이 끝났습니다!
이 이후 작업물은 3월 메런온에 회지로 만들어집니다 봐주셔서 감사해요!
어느정도까지 연재 후 뒷부분을 추가해 회지로 만들 예정입니다.
책이 나와도 연재한 분량 자체를 지우진 않습니다..
write. 환월
Since, 230
위키드 내부가 발칵 뒤집힌 날이 있었다. 수군거리며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루머의 실체를 눈앞에서 목격한 사람들은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일반 연구원들은 제대로 된 정보를 들을 수도 없을 만큼 숨겨둔 정보였다. 엘리트 그룹에서도 몇 명 알지 못하는 일은 빠르게 위키드 내부를 잡아먹으며 몸을 불리기 시작했다.
“그건 제가 할 일이에요.”
“뭐?”
“엘리트 그룹 내에서 정리된 의견입니다.”
“…….”
“그럼 그렇게 알고, 회의는 여기서 끝내기로 하죠.”
“…….”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짧은 회의를 끝낸 토마스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 총장이 모습은 감춘 이후 모든 명령은 에바 페이지와 토마스를 통해 전해졌다. 물론 불만은 가지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킬 존 테스트에서 토마스의 존재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제법 날카로워진 눈을 싸늘하게 접으면서 보고서를 검토했다. 가벼운 한숨을 쉬며 서류철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들다 이내 어디론가 걸어갔다. 연구원 중에서도 꽤 고위 관리직에 속하는 사람조차 토마스를 막을 수 없었다. 모두 민호가 공터로 올라간 다음부터 토마스가 달라졌다고 하나같이 입을 모았다. 조금이라도 웃던 모습은 간 곳 없고 목표를 위해 그저 앞만 보고 달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런 말을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위키드에선 누가 어떤 말을 들을지 알 수 없었다.
“정말 걱정되는데…….”
“…….”
“토마스. 괜찮아?”
“뭐가?”
항상 대화는 이런 식이었다. 그나마 옆에 트리샤가 붙어있었지만, 그녀도 토마스를 완벽하게 막을 수 없었다. 삼일 밤을 새웠을 때 억지로 끌고 와서 침대로 떠밀었다. 좀처럼 잠을 자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한 번 잠이 들면 시체처럼 하루 종일 움직이지도 않는 자신의 페어를 바라보며 여자아이는 내내 한숨을 쉬었다.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위키드가 휘청거리기 시작한 것은 알 수 없는 편지가 도착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발신인은 총장. 수신인은 엘리트 그룹. 누가 보면 이상할 것 없는 편지였다. 총장은 항상 바쁜 사람이었기 때문에 서신으로 뜻을 전하는 날이 많았다. 하지만 편지를 받아드는 토마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또 너만 읽어야 하는 편지?”
“응? 응.”
“엘리트 그룹도 못 읽는 편지라니. 궁금한데.”
“알아서 좋을 것 없는 내용이야.”
아무렇지 않은 척 대화하던 토마스가 가늘게 손을 떠는 것을 알아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날 토마스는 담당의를 찾아가 꽤 여러 알의 수면 유도제를 받아갔다. 의사는 별일이라며 토마스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것도 그럴 것이 일어나면 기분이 더럽다는 이유로 애써 피해왔던 약이었다. 한 번에 약을 모두 털어 넣은 토마스가 옷도 벗지 않은 채 침대 위에 그대로 쓰러졌다. 몸을 빙글 돌려 천장을 바라보았다. 몸이 나른해지는 감각은 도저히 익숙해지기 힘들었다. 무거운 팔을 들어 눈을 가려버렸다. 귓가에 들리는 어린 날의 트라우마에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러면 꼭…그때…….’
총장의 편지를 받고 나면 꼭 악몽을 꿨다. 아주 지독하게 뇌에 눌어붙는 꿈은 깨고 싶어도 쉽게 일어날 수 없었다. 이젠 기억조차 희미한 부모의 손길이 한순간 사라진 그 날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느리게 돌아가는 고장 난 테이프처럼 흐르는 꿈은 토마스가 개입할 수 없었다. 보고 싶지 않아도 눈앞에 나타나는 기억은 머릿속에 낙인을 찍는 것 같았다. 비명을 지르고 싶어도 입 밖으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온몸을 내리누르는 꿈은 토마스의 진을 완전히 빼고 나서야 사라졌다.
“…그만.”
일어나면 항상 온몸이 땀으로 푹 젖어있었다.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이마를 손등으로 아무렇게나 훔쳤다. 자신이 꿈에서 깬 것이 확실한지도 알 수 없었다. 곧바로 지겨운 악몽이 다시 시작될 것 같아 토마스는 가늘게 어깨를 떨었다.
“…….”
울고 싶어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반쯤 잠이 깨면 항상 볼 끝을 스치는 희미한 손길이 너무 부드러워서 꿈에서나마 그것을 찾았다. 마음을 정리해야 했지만, 무서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플레어.”
토마스가 덜덜 떨리는 손을 반대쪽 손으로 눌렀다. 생각만 해도 무서운 병이었다. 누군가는 면역 인이었고, 나머지는 아니었다. 새로운 세대가 나타났다고 하지만, 그 세대들의 기적이 지금까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방향이든 토마스가 결정해야 했지만, 쉽게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남들이 보기엔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편지가 하나 둘 쌓일 뿐이었지만, 토마스는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짐을 진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지끈거리는 머리에 왈칵 현기증이 돌았다.
문득 민호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참기로 했다.
✗ ✓ ✗
저 멀리서 낮은 총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아무도 총소리가 난 쪽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애써 모르는 척 하는 표정에선 이미 여유가 없어졌다. 모든 연구원은 자신의 연구실 밖으로 나오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유를 전혀 알 수 없는 연구원들은 그저 묵묵하게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트리샤는 공터를 비추는 카메라 앞에서 괜히 이리저리 카메라를 조작했다. 꽤 많은 사람이 움직이고 있었다. 이번에 올라갈 사람들 명단을 점검하기도 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도대체 연구실 밖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내내 답답했다. 총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아하니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았다.
‘토마스는…어디 간 거지.’
당연히 연구실에 있을 줄 알았던 토마스가 자리를 종일 비웠다는 것을 깨닫자 불안함이 밀려들었다. 엘리트 그룹에서도 리더 격에 있었지만, 그렇다고 어른인 것은 또 아니었다. 그래 봤자 자기 또래일 뿐인 아이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트리샤는 연구실 문에 조용히 귀를 대로 바깥에서 나는 소리를 들어보려 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총소리 이후 죽은 듯한 정적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토마스는 총장실에 있었다. 사늘한 표정으로 총장이 앉아있었던 의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덜덜 떨리는 손에 쥔 총을 다시 고쳐 잡았다. 조용히 팔을 앞으로 뻗었다.
“…….”
더는 생명 반응이 없자 한숨을 쉬면서 총을 가뒀다. 끝까지 경계를 풀지 않은 채 천천히 뒷걸음질로 책상에서 멀어졌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 문을 닫고 나서야 간신히 입술을 떨며 숨을 내쉬었다. 비틀거리던 몸이 벽을 짚어 간신히 버티듯 섰다.
“…하아.”
토마스가 총을 들지 않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손끝에 이미 굳어가는 피가 바스러지며 잔뜩 묻어나왔다. 손에 묻은 붉은 것을 보자 왈칵 구역질이 올라왔다. 비틀거리며 벽을 다시 짚었다. 긴 꼬리를 남기며 걸어가는 토마스는 위태로워 보이기만 했다.
“…….”
잠시 망설이던 몸이 통제실로 향했다. 메인 연구실보다 작았지만, 공터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치가 있는 곳이었다.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통제실로 들어간 토마스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나 또 한 번 피 냄새가 왈칵 올라왔다. 절로 표정이 찡그려졌다. 얼굴에 묻은 피도 다시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비릿한 맛이 입 안에 가득 차는 것 같아 몇 번이나 침을 삼켰지만, 쉽게 가시지 않았다.
토마스가 긴 신음을 뱉으며 의자에 몸을 맡겼다. 아직도 손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감촉이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손을 움직이면 바삭바삭하게 마른 붉은 피가 가루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몸은 아직도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는데, 머리는 차갑게 식어갔다. 지금 이 사태를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지만,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손가락 한 마디에 간신히 걸려있던 쇠붙이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가늘게 떨리는 입술 사이로 긴장이 뚝뚝 묻어나는 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의자에 반쯤 늘어진 토마스가 눈을 살짝 들어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잠시도 쉬지 않고 돌아가는 카메라는 깜박거릴 때마다 계속 다른 화면으로 교체되고 있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화면을 눈으로 간신히 따라가던 토마스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금방이라도 뇌가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혹시 나도 플레어에 감염된 것이 아닐까. 그래서 이렇게 행동하는 걸까. 잠깐 그런 상상을 하기도 했다.
“…….”
천천히 의자를 끌며 모니터 앞으로 다가갔다. 손끝으로 화면을 조작했다. 얼굴에 잔뜩 튄 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오랫동안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눈을 가늘게 찌푸렸다. 토마스가 바라보는 화면 안에는 어느새 공터에 적응한 민호가 있었다.
알비와 뉴트만 있을 때는 좀처럼 진행이 되지 않던 일들이 사람이 늘어나면서 조금씩 속도가 붙고 있었다. 저 멀리서 밧줄과 나무를 끌고 오는 아이들이 뭔가 손짓을 하면서 떠드는 것 같았다. 스피커는 없었지만, 귀가 어지러웠다. 화면 속에서 벙긋거리는 모든 목소리가 한 번에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이젠 서로 모르는 사이가 된 아이들이 다시 한 번 힘을 뭉쳐서 열악한 환경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하고 있었다. 토마스는 그 모습을 오래오래 지켜보았다.
“뭐 하는 거야. 이거나 받아.”
“…….”
“야, 똘추야. 뭐하냐고.”
“뭐.”
“이거나 받아서 세워.”
툴툴거리는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민호가 고개를 돌렸다. 눈앞에 불쑥 다가온 목재를 익숙하게 넘겨받았다. 갤리가 넘겨준 나무를 질질 끄는 민호의 팔뚝엔 바짝 힘이 들어가 있었다. 고된 노동에 지친 아이들은 하나같이 새까맣게 피부가 탔다.
공터의 환경은 엄청나게 열악했지만, 아이들은 그래도 빠르게 자랐다. 벌써 한 뼘도 넘게 큰 아이들도 있었다. 물론 평균보다 조금 늦게 성장기가 온 민호도 마찬가지였다. 실험실에 있을 땐 오히려 작은 축에 속했던 민호였지만, 공터에 올라오고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고 있었다. 키가 크고 근육이 붙기 시작했다. 해가 떠 있는 내내 바쁘게 일하느라 바짝 탄 살결 위에서 땀이 흘렀다.
“이쪽 잡아.”
“윈스턴. 거기 가서 뉴트랑 같이 땅을 다지도록 해. 오늘 이거까지 해야 밥 먹는다.”
“알았어.”
“뉴트. 옆에다 구덩이 하나 더 파. 오늘 아예 기둥까지 다 세우고 끝내자. 며칠 내내 이슬 맞고 자니까 죽을 거 같다.”
“우린 몇 달 됐는지 아냐?”
“그러니까 빨리 끝내잔 소리잖아. 이것만 하면 내일부터는 그래도 지붕 밑에서 잘 수 있다고.”
“…….”
“오늘 끝낼 수 있다니까? 갤리 녀석만 도와주면 말이지.”
낄낄거리면서 농담을 주고받았다. 물론 뉴트가 말하는 것은 모두 사실이었다. 초반에 둘만 있을 땐 겨우 몸을 누울 수 있을 만한 얕은 구덩이 하나 파는데도 일주일이 넘게 걸렸다. 하지만 하나둘 사람이 올라오기 시작하면서 점점 속력이 붙기 시작했다.
지금은 이슬을 피할만한 곳을 만드는 중이었다. 사람이 살만한 하게 정리해둔 공터에 기둥을 세우는 민호가 눈에 들어왔다. 무거운 나무를 몇 사람이 붙어서 간신히 세웠다. 아마 지지가 되는 중심축이 될 곳을 다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옆에서 기둥을 고정하기 위에 곡괭이로 땅을 파는 뉴트도 있었다. 바짝 마른 채 키만 큰 금발 소년은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은 몸으로 잠시도 쉬지 않고 일하고 있었다.
‘벌써 서열 정리가 끝났나.’
민호 외엔 모든 것을 흥미 없이 바라보던 토마스의 눈에 조금 호기심이 돌았다. 물론 호기심의 대상은 뉴트였다. 자신의 이기심으로 글레이드에 먼저 올려보내긴 했지만, 아무리 봐도 뉴트는 일찍 올라왔다는 이유만으로 상위 서열이 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당연히 힘이 세고 덩치가 좋은 사람들이 우선순위를 차지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뉴트는 그런 곳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오히려 다른 아이들보다 곱절은 일하면서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어우씨. 무거워 죽는 줄 알았네.”
낑낑거리며 기둥을 세운 민호가 만족한 듯 나무를 퍽퍽 쳤다. 그리곤 땅바닥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더운 듯 머리를 흔들면서 고개를 푹 숙이자 뉴트가 그 위에 물을 뿌려주고 웃었다. 민호는 잔뜩 젖어버린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털어냈다.
“…….”
뉴트가 웃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물기를 마저 털며 일어나는 민호가 뉴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는 것까지 지켜보았다. 그리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토마스는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민호보다 훨씬 큰 아이의 뒷모습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토마스도 많이 컸지만, 민호는 훨씬 빠른 속도로 자라고 있었다. 어깨가 벌어지고 단단하게 근육이 잡혀가는 몸은 제법 아이 티를 벗고 있었다.
물론 글레이드에서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선 필연적으로 크고 작은 다툼이 생기곤 했다. 작게는 소소한 불만 같은 것이 터져 나오기도 했고, 크게 번지면 싸움이 되기도 했다. 서로 패를 갈라서 싸우는 것이 그냥 몸만 조금 다치고 끝나면 다행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날도 왕왕 있었다.
“…….”
눈으로 아이들의 수를 세던 알비가 얼굴을 굳히며 뉴트를 불렀다. 뉴트는 민호와 갤리를 불렀고, 기분 나쁜 기운이 공터를 쓸고 지나갔다. 또 한 사람이 없어졌다. 공터는 아직도 할 일이 많으므로 하나하나 신경을 써주기 힘들었다.
“아무도 못 봤다는 거네?”
“우리 오늘 일할 무렵에 사라진 거 같은데.”
“…저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거야?”
“아마도?”
“…….”
갤리가 대놓고 얼굴을 구겼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 안쪽에 무엇이 있는지 확실하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알비도 낮에 입구가 벌어져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함부로 다가가지 못하게 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곳까지 정리하기엔 아직 글레이드에 할 것이 많았다. 눈앞에 보이는 것도 아직 수습하지 못한 것이 태반이었다.
“제 명줄 스스로 갉아먹은 거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맞지 않아? 아무도 들어가지 않은 곳을 들어가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 거 같아? 그냥 여기에 있으면 적어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고.”
“…….”
“안 그래?”
“둘 다 그만해.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잖아.”
말씨름하던 갤리와 뉴트가 입을 다물었다. 옆 기둥에 비스듬하게 기대 서 있던 민호가 눈썹을 움찔거리며 알비를 쳐다봤다. 알비도 머리가 아프긴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자신마저 화를 낸다면 상황이 더 악화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지금까지 몇 명이나 사라졌지?”
“…….”
숲으로 도망갔다 길을 잃어버린 채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 하나. 서로 싸우다 급소를 잘못 맞은 사람이 적어도 셋. 몇 명은 미로 안으로 들어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손가락으로 하나 둘 세던 뉴트가 입술을 잘근거리며 한숨을 푹 쉬었다.
“다시 한 번 저 안쪽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아니면…….”
“민호 무슨 생각이 있어?”
“아냐. 조만간 생각이 정리되면 말할게.”
“또 저런다.”
꼭 한마디씩 덧붙이는 사람이 있었지만, 이것마저 익숙해진 상황이었다. 알비가 하나 둘 할 일을 분담하고 사람들을 해산시켰다. 낮 동안 열려있는 입구에 가까이 다가가지 말 것. 싸우지 말 것. 욕심내지 말 것, 같이 살기 위해 꼭 필요한 규칙을 세웠다.
그리고 민호는 계속 벌어진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문이 열리는 것을 확인하고 땅에 새겨두었다. 그리고 점심을 먹기 전까지 목재를 옮기고 해먹으로 쓸 천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단순 노동은 한번 집중하기 시작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것이 탈이었다. 허리가 아프고 팔이 저려서 뒤를 돌아보면 벌써 식사 시간이었다. 팔을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걸어오는 민호를 발견한 뉴트가 손을 흔들었다.
“오늘은 뭐래?”
“늘 먹던 거지 뭐.”
사람이 늘어난 만큼 이것저것 잡아오거나 뜯어오는 것이 많아 사정은 조금 나아졌지만, 그래도 양껏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저것 한 번에 넣고 최대한 양을 불려 끓인 음식이 전부였다. 맛이 있어서 먹는 것이 아니고 살기 위해 음식을 쑤셔 넣은 민호가 그릇을 옆으로 치웠다.
“…….”
“왜?”
“내일은…저기 들어가 봐야겠어.”
“뭐? 어딜?”
“저기.”
민호가 손으로 아직도 입을 벌리고 있는 미로의 입구를 가리켰다. 뉴트는 잘못 들은 것인가 싶어 눈썹을 찡그리며 민호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다. 하지만 곧게 뻗은 손가락은 흔들리지 않았다.
“계속 봤는데, 항상 일정한 시간에 열리고 닫혀.”
“…….”
“그리고 단 한 번도 그 시간에 어긋나서 닫히거나 문이 움직이지 않았어. 그건 저 안쪽에 뭔가 있다는 뜻 일 거야.”
뉴트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민호가 다음에 할 말을 기다렸다. 도대체 언제부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 턱이 없었다.
“저 입구 말고는 우리가 여기서 벗어날 방법이 없는 것 같아. 그렇지 않으면 왜 저런 곳을 만들어 뒀겠어.”
“하지만 너무 위험해.”
“한 번에 들어가겠다는 건 아니야. 정식으로 알비와 다른 팀장들에게 허락을 받은 후 조심스럽게 들어가 볼 거야.”
“혼자서 가능하겠어?”
“일단 들어가 보고 내 힘으로 안 될 거 같으면…….”
민호가 잠시 말을 멈췄다. 다부지고 반짝이는 검은 눈이 한층 더 깊어진 채 저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와달라고 해야지.”
뉴트는 민호의 결심이 영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알비에게 말을 전했다. 갤리와 다른 팀장. 그리고 몇몇 반대하는 사람들 설득하는데 시간이 제법 걸렸다. 하지만 결국 민호가 이겼다. 처음으로 미로 앞에 선 아이가 긴장을 숨기지 못하고 계속 신발 코로 땅을 툭툭 쳤다. 어깨가 떨리는가 싶더니 깊숙하게 숨겨둔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혹시 들어가서 이상하면 곧바로 나오도록 해.”
“알았어.”
“민호. 조심해.”
“도대체 저 안에 뭐가 있을지 처음으로 알 수 있을 거 같네.”
“…….”
“우리를 여기로 보낸 사람들은 과연 이걸 원하고 있었던 걸까? 우리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거면 어쩌지?”
“그렇다 해도 우리가 탈출할 수 있으면 다행이겠지.”
“…….”
문이 열리고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잠시 좌우로 둘러보던 민호가 한 쪽 방향으로 꺾자 곧 모습이 벽 뒤로 사라졌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을 하나둘 돌려보던 알비는 아직도 미로 안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
“걱정돼?”
“물론이지. 민호가 저곳에 들어간 게 잘한 일이지 모르겠어.”
“민호가 정한 거야. 그리고 돌아올 거고.”
“…….”
“네가 흔들리면 글레이드 전체가 흔들려. 민호는 돌아올 거야. 이제 우리 할 일을 하자.”
“…….”
“민호는 꼭 돌아와.”
“그렇겠지. 고맙다 뉴트.”
알비가 바싹 마른 어깨를 툭툭 쳐주고 자리를 떴다. 알비한텐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했지만, 뉴트는 좀처럼 민호가 들어간 곳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불안함은 눈을 한번 깜박일 때마다 뭉클거리며 자라났다.
✗ ✓ ✗
“민호.”
토마스는 민호의 행동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었다. 물론 애정이 수반된 행위라기보단 관찰자의 시선에 가까웠다. 미로의 입구는 위키드가 만들어둔 유일한 출구였다. 생각보다 늦게 그 가능성을 발견했지만, 저렇게 빨리 안 쪽으로 들어가겠다고 말을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토마스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입술을 조금 말아 올렸다.
“역시 대단해.”
손끝으로 다 식은 커피 잔을 톡톡 치다 턱을 괴었다.
“내가 생각한 그대로야. 난 역시 네가 가장 처음으로 미로로 들어갈 거라고 생각 했어.”
한껏 만족한 표정으로 미로 안에 설치된 카메라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일정한 구간마다 박혀있는 카메라는 미로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움직이는 작은 물체가 카메라 렌즈에 잡혔다.
✗ ✓ ✗
민호는 카메라의 존재를 아는지 모르는지 잔뜩 긴장한 채 벽을 짚고 움직이고 있었다. 막상 들어오긴 했지만, 문 안쪽은 상상외로 복잡했다. 담쟁이덩굴이 어지럽게 자란 벽을 손끝으로 쓸어가며 조심스럽게 걸어다가 또 발걸음을 멈췄다.
“…….”
아직까진 기억할 만했다. 위를 올려다보니 아직 해가 높게 떠 있으니 문이 닫힐 시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더 안으로 들어가면 돌아 나올 수 있을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돌아갈까.”
손끝에 척척 감기는 습기가 기분 나쁠 정도로 축축했다. 소름 끼칠 정도로 조용한 미로 안에서 움직이는 것은 민호 혼자뿐이었다. 그 흔한 벌레 하나 날아오르지 않는 공간은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저 멀리서 기괴한 울음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온몸을 물어뜯는 것처럼 울어대는 소리에 민호가 깜짝 놀라 주변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가 두 번 정도 더 들리자, 잠잠하던 새가 한 번에 날아올랐다. 푸드덕거리는 소리가 좁고 높은 미로 안을 가득 채우자 점점 더 불안해졌다.
생각보다 이르게 공터로 돌아온 민호가 후들거리는 다리를 주체하지 모사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빠르게 달려온 아이들이 저마다 궁금한 점을 쏟아냈지만, 민호는 단 한마디도 대답할 수 없었다.
갤리가 퉁명스럽게 던져주는 물통을 받아들었다. 물을 몇 번이나 꿀꺽 꿀꺽 먹고 나서야 간신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팀장들만 따로 모인 회의에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물론 자신이 본 것이 무엇인지는 제대로 말하지 않았다.
미로. 출구. 알 수 없는 소리. 민호가 말한 것은 이 세 가지 뿐이었다. 입구로 들어가면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는 미로가 펼쳐져 있으며, 아직 확실하지 않아 멀리 까진 가보지 않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물체가 지르는 소리를 들었으나 사람은 아니었다. 민호가 하는 말은 쉽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허황한 이야기였다.
“그럼 예전에 저 안으로 들어간 녀석들은…….”
“아마…….”
긴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내일 다시 들어가겠다는 말만 남기고 피곤한 듯 하품을 했다. 잔뜩 긴장한 몸이 풀리니 잠이 쏟아질 만도 했다. 알비는 민호에게 푹 쉬라고 말했고, 뉴트는 잠자코 옆으로 비켜섰다. 민호가 비틀거리며 자신의 해먹을 걸어가 푹 쓰러졌다.
내일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 본 후에 다시 의논하기로 했다. 아직은 많은 사람을 데려가지 않아도 된다는 민호의 주장 아래. 한동안 미로로 들어가는 사람은 한 명 뿐이었다. 그리고 매일매일 미로의 생김새를 외워서 돌아왔다. 일주일이 되었을 때 영 이상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가져온 정보를 맞춰보더니 곧장 아무도 보이지 않는 숲 속에 하루 종일 처박혀 있었다. 민호가 돌아왔을 때 궁금함과 불안감을 한가득 담은 눈이 한 곳에 모였지만, 아무도 묻지 않았다.
“알비.”
“왜 그러지?”
“나와 같이 들어갈 사람이 필요해. 많이는 필요 없어.”
“뭐?”
“미로가 생각보다 복잡해. 나 혼자서는 외우는 데 한계가 있어. 날 백업하고 도와줄 사람들이 필요해.”
“…누가 하려 할까?”
“억지로 시키진 않아. 하지만 하고 싶다는 사람이 있으면 최우선 순위로 내 밑에 배정해 주길 바라고 있어.”
“알았어.”
“이제부터 우린 러너가 될 거야.”
갑작스러운 제안에 알비가 민호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미로 속을 달리고, 외워서 출구를 찾아오겠어. 이 지독한 곳에서 나갈 수 있는 것은 그것 뿐이야.”
“정말 그렇다고 생각해?”
“미로가 아닌 곳은 이미 다 돌아서 지도로 만들었잖아. 사방이 막혀있어. 우리를 여기로 보낸 놈들은 분명 저길 통해 우리가 출구를 찾기를 바라고 있을 거야.”
“지독한 놈들이야. 이런 개 같은 상황을 만들다니.”
“말은 험하지만 맞는 소리네. 갤리.”
“그리고 오늘부터 정식으로 러너 활동을 할 수 있게 허가해줘. 그리고 이 이후 러너를 제외한 그 누구라도 허락 없이 미로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할 거야.”
“그래야겠지. 과도한 호기심은 좋지 않아.”
팀장 회의에서 나온 이 한마디가 최초의 러너를 만들었다. 민호는 스스로를 러너라고 말했고, 더는 미로로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덧붙였다. 알비와 다른 팀장이 수긍했고, 뉴트가 마지막까지 깊은 생각을 하며 판단을 보류하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러너가 된 민호는 그 날부터 매일 미로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 ✓ ✗
“아무래도 안 되겠어.”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내가 직접 올라가야 할 거 같아.”
“너 미쳤어?”
소파에 앉아서 보고서를 넘겨보던 트리샤가 펄떡 뛰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지금 모든 것이 토마스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하다못해 다음번에 올라갈 생존 필수품을 지정하는 것도 토마스의 손끝에서 관리되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 이런 때에 저런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글레이더로 올라가겠다는 소리야? 왜? 어째서?”
“내가 희망이라며 여기서 앉아있으면 뭐가 달라지겠어. 적어도 내가 만든 곳을 직접 보고 싶을 뿐이야.”
“아무것도 기억 못 할 거야. 저기 올라가려면 지금까지 했던 거랑 똑같이 해야 하니까.”
“상관없어.”
토마스의 단호한 말에 트리샤는 할 말이 없었다. 언제부터 저런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최근에 딱히 티를 내고 다니는 것도 아니었다. 민호 라는 아이에게 신경을 쓰고, 공터로 올라간 다음부터 약간 과도할 정도로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갑자기 저렇게 강수를 들고나올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내가 모든 기억을 잃고 공터에 버려진다 해도, 내가 하려는 목적은 잊지 않을 테니까.”
“민호 때문이야?”
“뭐가?”
“그 녀석 드디어 미로의 의미를 깨달은 다음 출구 찾으러 들어갔다면서. 그래서 직접 들어가 보려는 거 아니야?”
“…….”
“토마스. 다시 한 번 생각해 봐. 거기 들어가면 우리도 더는 널 도와줄 수 없어.”
“상관없어.”
“…토마스.”
트리샤에게 한마디 했을 뿐인데, 어느새 위키드의 최고 책임자들이 모인 곳에 불려가게 되었다. 굳이 트리샤가 말을 옮긴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위키드는 원한다면 개인 연구실에서 말하는 혼잣말도 알 수 있을 테니까. 올 것이 왔다는 표정으로 자리에 앉은 토마스를 보자마자 온갖 사람의 목소리가 한데 섞여서 와르르 쏟아졌다. 머리가 아팠다. 토마스는 언제나 이런 분위기를 굉장히 싫어했다.
“…….”
“토마스. 우리가 들은 것이 사실인가요?”
“물론입니다. 곧 생각을 정리에 회의를 소집하려 했는데, 어떻게 이리도 빠르게 아시고…….”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물어봐도 되겠니?”
“기초 설계를 한 사람이 직접 올라가는 것보다 좋은 것이 있나요? 게다가 저 공터에 있는 아이들이 면역체계가 있다고 해도, 치료의 핵심 인물은 아닐 테니까요.”
“…….”
“제가 위키드로 오고 난 후 계속 이 테스트의 핵심인물로 키우신 책임을 다하려고 할 뿐입니다.”
“하지만 지금 토마스 군이 빠지는 것은 너무 위험 부담이 큽니다. 알다시피 모든 테스트가 이쪽 주관일 텐데.”
“그것도…맞는 말이네요.”
“위키드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 토마스를 공터로 올려보낼 생각이 없습니다.”
“…….”
단호한 말이었다. 위키드의 측면에서 본다면 너무나 당연한 말이라 따로 한마디 변명할 것도 없었다. 토마스는 잠시 생각했다. 자신이 직접 올라갈 수 없다면 다른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민호에 대한 생각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 이 상황에도 그러다니. 아무래도 미친 것이 틀림없었다.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꾹 참았다. 지루한 회의는 끝날 줄을 모르고 계속되었다.
토마스의 의견은 흔들리지 않았다. 사실 어른들은 이렇게 고집부리는 아이를 다루는 데 매우 약했다. 일곱 살 무렵 처음 위키드에 들어와서 엄마 찾으면서 우는 모습까지 보면서 같이 살았었다. 그런 연구원들의 기억 속에선 토마스는 언제나 아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토마스의 의견에 찬성할 수는 없었다. 기억을 잃은 아이가 혹여 잘못되기라도 하면 누가 책임질 수 있을까. 공터는 감시하는 장비는 완벽했지만, 그 안에 있는 누군가를 의도적으로 도와줄 방법이 현저히 적었다. 일단 위키드의 손을 떠나 공터로 들어가게 되면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시피 했다. 이런 상황에서 토마스를 지키겠다고 기억을 지운 채 올려보낼 수도 없었다. 누군가 한걸음 물러서지 않으면 이 갈등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럼.”
토마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트리샤는 놀란 표정으로 토마스를 쳐다보았다. 절대 물러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저 대신 똑같은 클론을 보내는 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뭐?”
“말 그대로 저는 여기 남아있지만, 제 생각과 똑같이 움직여줄 클론을 만들겠다는 소리입니다. 그러면 적어도 제가 다치는 상황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요?”
“…….”
“결과물을 필요하지만, 전 움직일 수 없다. 그러면 이것 밖에 남은 것이 없지 않을까요? 이 정도면 많이 양보했다고 생각합니다만.”
“…….”
“안 그런가요?”
토마스가 오랜만에 생글거리며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 속에는 너무나 많은 것이 담겨있어 좀처럼 받아줄 수 없었다. 길고 긴 회의의 결과는 예상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 ✓ ✗
플레어에 감염되어 죽은 전 총장의 후임으로 에바 페이지가 선출되었다. 에바 페이지는 총장 자리에 앉음과 동시에 토마스가 제안했던 클론 프로젝트를 물 위로 끌어올렸다. 다소 잡음이 있었지만, 그 정도의 불만으로 취소될만한 프로젝트는 아니었다. 현 총장은 토마스를 매우 아꼈고, 그만큼 필요한 모든 지원을 해주려 했다.
단숨에 물 위로 올라온 프로젝트는 총장의 권위를 등에 업은 채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 프로젝트를 열람할 수 있는 사람은 토마스를 포함해도 채 다섯 명이 되지 않았다.
“괜찮겠어?”
“뭐가?”
“아무리 똑같이 복제한다 해도 저 녀석은 네가 아닐 텐데.”
“나와 모든 DNA 정보가 같아.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지식은 밖으로 나온 후 하나하나 주입할 거니까 상관없어.”
“내 말은…….”
“…….”
그만두자. 트리샤가 대화를 뚝 끊어버렸다. 지금 토마스에겐 아무리 클론과 너는 다르다는 사실을 말해도 소용없었다. 당사자는 전혀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토마스는 커다란 시험관 안에 들어있는 클론을 바라보았다. 서늘한 색으로 빛나는 묘한 액체가 가득 담긴 유리관 안에는 숨을 쉬기 위한 긴 호흡용 마스크가 늘어져 있었다.
“…토마스. 아니 토미?”
“…….”
들을 리도 없고 대답을 할 리도 없었다. 아직 제대로 몸이 완성되지도 않은 녀석은 힘없이 물에 떠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가끔 초점이 잡히지 않는 눈이 천천히 움직이면서 저 먼 곳을 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한 걸음씩 가깝게 다가간 토마스가 손끝으로 유리관을 쓸었다. 손가락에 착 달라붙는 유리의 감촉이 차가웠다.
“토마스. 날 봐.”
“…….”
“넌 나와 똑같이 자라야 해.”
가늘게 웃는 토마스가 유리관에 이마를 댄 채 중얼거렸다. 이상하리만큼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기분이 나쁘다던가. 아니면 벅차오르던가. 자신과 똑같은 사람을 눈앞에 두고도 침착할 수 있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사람이라기보단 수단에 가까웠다. 그런 토마스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인지 부글거리는 거품이 숨소리처럼 위로 올라왔다.
토마스는 과도한 실험과 수술의 후유증으로 실험과 관련된 이성적인 면만 남기고 감정이 점점 망가지고 있었다. 가장 빠른 길을 택하는 것이 중요했다. 물론 이런 냉정한 면이 연구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토마스가 속으로 곪아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눈치를 챈 사람은 있지만, 그 상처의 깊이가 얼마나 속으로 파고들었는지는 상상하지 못했다.
토마스는 자신의 클론을 토미라고 불렀다. 딱히 구분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헷갈릴 수 있다는 이유였다.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신생아 같은 녀석을 바라보다 입술 끝을 말면서 웃었다. 눈을 천천히 깜박이며 토마스의 얼굴을 바라보던 녀석이 똑같이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은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
“토미.”
“…….”
“토미. 토마스.”
“…….”
“이제 하나하나 다 알려줄게. 네가 해야 하는 것. 알아야 하는 것. 다 가르쳐 줄 테니까 내 기대를 저버리지 마.”
“…스. 나…….”
“말은 곧 배울 수 있을 거야. 내 뇌를 복사했는데, 그 정도도 못 하면 말이 안될 테니까.”
“…….”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가만히 바라보는 눈동자가 생각보다 더 맑아서 토마스는 눈을 찌푸렸다. 할 일은 언제나 많았다. 클론이라는 것을 알아채기 전에 자신이 본체라고 믿게끔 정보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똑같은 얼굴 똑같은 목소리에 뇌마저 그대로 복제된 녀석은 토마스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점차 말도 하고 자기 생각을 입 밖으로 내기도 했다. 교육 한다기보다는 지식을 주입하는 것에 가까웠다. 다행히 토미는 그것을 거부하지 않고 빠르게 지식을 받아들였다.
“토미. 이리와.”
“…….”
“어서.”
수술대 위에 앉아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는 녀석을 몇 번이나 불렀다. 이럴 때마다 한 박자씩 늦게 반응하는 녀석이 답답했다. 긴 목을 천천히 돌려서 자신을 바라보며 꼭 만들어진 것 같은 티를 냈다. 이리오라고 손짓을 하자 느릿느릿 침대에서 내려왔다. 늘어지는 발걸음으로 따라오는 녀석을 데리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토마스.”
“왜?”
“우린 쌍둥이야?”
“…….”
“거울을 볼 필요가 없는 거 같아.”
“그렇겠지.”
귀찮아서 최대한 짧게 대답해 주는데도 질리지 않는지 요즘 유독 호기심이 늘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다행히도 토미는 자신이 토마스와 쌍둥이쯤 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되도록 사람들과 만나지 않게 하려는데 어디서 배워왔는지 형이란 단어를 입에 올렸다. 형. 토마스 형. 물론 싸늘하게 쳐다보는 눈빛을 받고 다시 토마스라고 부르긴 했다.
지능이 빠르게 높아지는 것을 알아챈 토마스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기억을 그대로 이식했다. 다음날 눈을 뜬 토미는 자신이 연구원이라고 알고 있었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기억은 꽤 정교해서 토미는 그것이 가짜인지 알지 못했다. 연구원으로서 태가 나기 시작하자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조금만 더 안정되면 곧바로 글레이드에 올려보낼 계획이었다.
“토마스.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이네요. 제가 좀 바빠서.”
“이건 무슨 시뮬레이션이죠? 못 보던 건데?”
“곧 다음 실험군을 보내야 해서요. 혹시 몰라서 가상으로 좀 돌려보려고 자료 입력 중이에요.”
“너무 무리하지 말고.”
“연구실 문은 제가 닫을 테니 걱정 말고 들어가세요.”
“그럼 부탁해요?”
혹시 옆에서 보겠다고 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었다. 혼자 남은 연구실 안에서 토마스는 바쁘게 토미의 데이터를 옮겨 담았다.
“…뭐야 이거.”
- 실패. 실패. 에러.
“이럴 리 없는데. 뭔가 잘못 입력했나?”
토마스가 급하게 자료를 뒤적였지만, 잘못 적은 것은 없었다. 눈이 피곤해서 오타가 안 보이는 일이 있나 싶어 아예 리셋하고 다시 적어 넣었다. 가볍게 끝내려고 했던 일이 조금 심각해졌다.
- 실패. 에러. 예기치 못한 변수 있음. 실패.
- 시뮬레이션을 종료합니다.
몇 번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화면상에 나타나는 예기지 못한 변수가 무엇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토미는 토마스의 몸과 정신을 그대로 복제해 만든 개체였다. 게다가 위키드에 들어와서 보고들은 기억조차 그대로 이식했는데 왜 다른 결과가 나오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혹시나 싶어 자신의 데이터를 덮어씌웠다.
“내 데이터는 멀쩡한 데.”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제대로 된 원인을 찾지 못했다. 변수를 제외하고 억지로 시뮬레이션을 진행하면 별 문제없었기에, 곧 큰일이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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