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팁버키/스벜] Into orbit: EXPLORER 012
+) NOTICE
캡틴 아메리카 : 시빌워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센티넬버스 au입니다 예민하신 분은 피해주세요
속으로 곪아가는 캡틴이랑 기억 조각을 찾는 버키가 나옵니다 취향탈 수 있어요
적당한 망상과 설정 붕괴가 언제나 함께 합니다 ㅇㅅㅇ)9
write. 환월
“…….”
“생각보다…….”
“본격적인 곳이네.”
버키가 생각보다 좀 안절부절못하긴 했다. 천천히 움직여도 된다는 걸 누가 쫓아오는 것처럼 뛰다시피 걷고 있었다. 스티브는 내내 걱정을 달고 뒤를 쫓았다. 뭐에 홀린 건지 아니면 무서운 걸 보기라도 한 것인지. 버키의 표정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둘이 미리 알고 있던 곳에 도착하고 나서야 버키는 한숨을 내쉬면서 그대로 무너졌다.
“버키!”
“…아. 괜찮아. 아무 일도 아니야.”
“아닌 거 같은데.”
“응?”
“버키. 내 눈을 봐. 정말 아무 일도 아니야?”
“응. 아무 일도 아니야.”
말은 단호하지만 눈동자는 살짝 불안하게 떨렸다. 스티브는 그런 것을 놓칠 리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것 하나 때문에 친구에게 따지듯 물어볼 수 없었다. 감추는 것이 없었으면 했지만, 그렇다고 비밀 하나 때문에 몰아세울 생각도 없었다.
“그래. 많이 놀란 거 같아서 그랬어.”
“내가…아직 실험실 같은 곳이 좀 그래. 그래서 그랬어.”
“…….”
“정말이야. 그래도 많이 참았잖아. 안 그래?”
“응.”
“그럼 이제 얼굴 펴.”
능글능글하게 대화에서 빠져나간 버키가 오히려 스티브를 다독였다. 이렇게 나오면 정말 어쩔 수 없어진다. 스티브는 그냥 내내 웃고 말았고, 버키도 같았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주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원이라기보단 열대 우림이 가까운 곳인 것 같았다. 습기가 가득 차고 약간 더운 곳. 춥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버키는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주변을 조심스럽게 돌아봤다.
“신기한 곳이네.”
“와칸다는 워낙 비밀이 많은 곳이라서…나도 처음 와봤을 정도야.”
“물방울이 온몸에 내려앉는 것 같아.”
“응?”
“더운데 왜 이렇게 춥지.”
버키는 춥다는 말을 곧잘 했다. 분명 방이 숨이 막힐 만큼 후끈한데도 잠시 찬바람이 드는 것을 못 견뎌 했다. 물론 예전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천천히 세뇌가 풀리고, 조금씩 기억을 찾아가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몇 번씩 냉동됐던 몸이 비명을 지른다고 했다.
“추워?”
“…조금? 이상하네.”
“…….
“이렇게 후끈한 열기가 느껴지는 데 왜 내 주변은 이렇게 싸늘하지.”
“…….”
“죽은 사람도 아닌데.”
“…….”
몸을 부르르 떨면서 한쪽 팔로 어깨를 잡았다. 뭉툭한 느낌이 영 낯설었지만, 추운 것이 먼저였다. 스티브는 아차 싶었다. 잠시 주변에 덮을 것이 있나 찾아봤다. 하지만 이런 곳에 담요가 있을 리 없었다. 위에 뭘 입혀야 했는데, 급하게 나가버린 탓에 버키는 내내 민소매 차림이었다.
“내 정신 좀 봐.”
“왜?”
“너 이런 차림인 거 몰랐어.”
“…….”
스티브가 허겁지겁 점퍼를 벗었다. 그리곤 버키의 어깨부터 푹 눌러 씌웠다. 좀 큰가. 아닌가. 버키는 빤히 스티브를 바라보았다. 버키가 움직이지 않으니 옷을 입혀줄 순 없었다. 어깨에 올라앉는 점퍼는 습기를 먹어서 제법 무거웠다.
“일단 이거라도…….”
“내가 애야?”
“응?”
“이렇게 하나하나 허둥지둥하면 나중에 어쩌려고 그래.”
“버키. 너 추운 거 싫어하잖아.”
“…….”
“나도 네가 힘들어 하는 것 싫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
“스티비. 내 친구. 정말 못 말리겠어.”
“놀리지 마!”
“예전엔 너 혼자 할 수 있다고 그렇게 바락바락 나한테 화를 냈는데 말이야.”
“…….”
버키가 웃었다.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옛이야기는 가벼우면서도 무거웠다. 옛날의 스티브 로저스. 말라깽이. 아픈 친구. 온갖 수식어가 붙은 채 버키의 보살핌을 받던 아이. 버키는 그 기억을 떠올린 것인지, 아니면 그저 학습해서 알고 있을 뿐인지. 알 순 없었지만, 스티브는 기뻤다. 옛날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심장이 뛰었다. 이제 자기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거라 단정했지만, 버키는 아니었다. 내 친구. 친구. 버키. 버키 반즈. 버키 뷰캐넌 반즈.
이럴 때마다 욕심이 난다.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못 견뎌 하는 것조차 마음에 들었다. 친구를 속박해 봤자 하이드라와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결국 그런 짓을 할 수 없다는 것조차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버키를 조금이라도 멀리 두고 싶지 않았다. 내가 없으면 버키가 버티지 못한다. 그 생각만 해도 충분했다.
“이젠 스티브가 다 커서 날 챙겨주기까지 하고, 이 형 이제 마음이 놓인다.”
“…….”
“정말이야.”
“이젠 형 아닐 텐데.”
“뭐?”
“형이 아닐 수도 있어. 버키.”
“웃기지 마. 스티브. 넌 언제까지나 나한테 브루클린 애송이니까.”
“…….”
말문이 턱 막힌다. 버키 눈엔 언제나 그렇게 보이는 걸까.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고. 내내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이런 걸 뭐라고 해야 할까. 질투? 이건 아니었다. 과거의 나한테 질투를 하면 도대체 어떻게 되냔 말이다. 스티브는 그건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질투란 단어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버키가 하나하나 챙겨주고 따라오던 그 날의 스티브를 보면서 질투하는 거다. 버키는 눈앞에 있는데, 이 녀석은 자꾸 브루클린 애송이를 찾아댔다.
‘아…이거 좀 위험한 걸.’
물론 과거의 내가 싫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다만 당장 눈앞에 있는 날 봐줬으면 하는 어린애 같은 마음 때문이었다. 누구한테도 이런 적이 없었다. 버키 앞에만 서면 내내 어리광을 부리게 된다. 받아줄 것을 안다는 마음은 참으로 간사했다.
“애송이. 그러니까 형 말이나 잘 들어.”
“애송이 이제 하극상 일으키려고.”
“어쭈.”
“이 정도 살았으면 어린애라고 부르는 건 그만둬주는 건 어때?”
“…싫어.”
버키가 또 웃는다. 길게 말려 올라간 입술 끝에 이런저런 감정이 주렁주렁 걸렸다. 스티브의 옷을 어깨에 걸친 채 서 있는 버키가 그렇게 웃었다. 스티브는 냉큼 버키를 품에 끌어당겼다. 아. 아무런 저항 없이 끌려온 녀석은 그대로 가슴에 코를 박은 채 눈을 감았다.
“어린애 아니잖아.”
“…….”
“그렇지?”
“그렇구나. 다 컸어. 스티비.”
“더 불러줘. 이름.”
“스티브.”
“또.”
“스티브 로저스.”
“또.”
“로저스.”
“…다시.”
“내 스티비.”
“나의 버키.”
스티브가 친구의 목에 코를 묻는다. 겨울 냄새가 올라왔다. 찬 기운은 밖에서 오는 것에 아니라 몸속에서 흘러나온다. 이 냉기가 다 빠지면 버키는 어떻게 될까. 냉기와 함께 자신이 불안함이 뭉쳐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둘은 내내 마음속에 하나씩 아픈 것을 키우면서 살았다.
“스티브?”
“버키, 있잖아.”
“응.”
“…내 이름 불러주는 목소리 다시는 못 듣는 줄 알았어.”
“…….”
“그때 이후로 전쟁이 너무 힘들어서, 견딜 수 없었어. 너랑 함께 있을 땐 뭘 해도 항상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는데.”
“…….”
“그 날 이후로 세상이 흑백으로 보이는 것 같았어. 승패랑은 상관없는 일이지만, 세상이 더는 아름답지 않았어. 버키.”
더듬더듬 오랫동안 못한 말을 꺼냈다. 단단하게 굳은 말은 혀끝에서 내뱉기 어려울 정도로 아팠다. 그런 친구에게 뭐라고 해야 할까. 버키는 할 수 있는 말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불편하지 않은 팔로 친구의 넓은 등을 두드려주고, 좀 더 깊은 말을 토해낼 수 있도록 어깨를 빌려줄 뿐이었다.
“내가…늦게 와서 미안해.”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너무 늦었어.”
“이제라도 왔잖아.”
“좀 더 빨리 생각해냈어야 하는데…….”
“…….”
“돌아와서 다행일까?”
“다행이지.”
“그래. 그렇게 생각할래.”
스티브가 좋으면 된다. 그렇게 생각했다. 어차피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이었다. 헬리캐리어에서 떨어지고, 스티브를 구한 다음 그대로 도망갔다. 하이드라의 손에서 벗어난 그 날 이후로 언제 죽더라도 놀라지 않기로 했다. 냉동에서 깰 때마다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늘 들었다. 제때 수리를 받지 못한 팔이 약간 아프긴 했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가끔 아픈 팔을 부여잡고 끙끙거리면 문득 예전 생각이 하나둘 떠올랐다.
캡틴 아메리카, 아니 스티브는 날 버키라고 불렀다. 그 이름의 진실을 찾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이런 사람이지만 버키라고 불러주는 친구가 있다면 그대로 맞춰가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버키는 자신의 기억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스티브가 그렇다면 된 것 같았다.
“내가 버키라서 쓸모가 있다고 생각해.”
“버키.”
“그렇지?”
“응.”
습기를 잔뜩 머금은 낯선 종류의 나뭇잎이 바람에 후두둑 맺혀있던 이슬을 떨어드렸다. 어깨 위에 점점이 짙은 자국이 생겼다. 하지만 스티브는 버키를 놓지 않았다. 약간 예민해진 감각이 다시 노골노골 누그러졌다. 스티브의 심장 소리를 들으면서 한동안 멍하게 안겨있던 버키가 천천히 스티브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약간 아쉬운 표정을 보니 또 놀리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누가 들어오면 어떡해.”
“…….”
“그런 표정 지어도 안 돼.”
“…알았어.”
“여기선 안 돼.”
그 옛날 버키처럼 짐짓 엄하게 말한다. 스티브한테는 특히 효과가 좋았다. 스티브가 모른 척 자신의 어깨를 감싸 쥐는 것까진 막지 않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아까까진 온몸에 냉기가 흘러넘치는 것 같이 춥더니 이젠 아무렇지 않았다.
천천히 묘한 정원을 걷기 시작했다. 쉽게 볼 수 없는 이국적인 식물이 가득한 곳은 정원이라기보다 열대 우림에 가까워 보였다. 가장 작은 정원이라고 들었는데, 꽤 넓었다. 중앙에는 잠깐 쉴 수 있는 곳이 있었다. 나중에 여기 와서 밥이라도 먹으면 좋겠네. 스티브는 소풍온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티찰라…아니 폐하한테도 인사를 해야지.”
“나중에 같이 갈까?”
“역시 그게 좋을 것 같아. 아직 혼자 다니긴 좀 그래.”
“옷을 받아와야겠다.”
“응?”
“춥잖아.”
“…아.”
그렇네. 허허 웃고 만다. 스티브는 안절부절못하면서 좀 더 챙겨줄 것이 없는지 계속 뒤척였다. 모른 척 그 친절을 다 받아볼까 하지만, 역시 그건 성미에 맞지 않았다. 한참 정원 중앙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의 주제는 빠르게 변했다. 옛날이야기를 하다가도 금방 현실로 돌아오곤 했다. 버키는 뇌가 완전히 낫지 못하는 상태인지라 아직 많은 단어를 구사할 순 없지만, 알고 있는 주제라면 늦지 않게 따라갈 수 있었다. 한껏 기분이 좋아진 스티브는 꼭 커다란 강아지 같았다. 버키가 손을 들어 턱을 긁어주는 시늉을 하자 눈을 찌푸렸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아까 형 취급 안 해준 것에 대한 복수야?”
“그런 거 아닌데.”
“이상한 데.”
“혼자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스티브와 있던 내내 괴상한 헛것과 환청이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버키는 오랜만에 마음을 놨다. 개인적인 욕심이라고 할 수 있지만,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해지고 싶었다. 단 한 순간이라도 아무것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센티넬 인자가 폭주해서 오감이 망가져 버리면, 세뇌코드도 환청도 쓸모없어지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했다.
+)
바로 전 편에 규칙적인 글을 쓴다고 해놓고, 본업이 밀어닥쳐서 좀 늦었습니다
이래서 지킬 수 없는 약속은 하는 것이 아닌데, 죄송하고 민망합니다
둘이 슬슬 연애라는 것을 하고 있긴 한데, 아직도 한참 자란 것 같아요,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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