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팁버키/스벜] Into orbit: EXPLORER 010
+) NOTICE
캡틴 아메리카 : 시빌워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센티넬버스 au입니다 예민하신 분은 피해주세요
속으로 곪아가는 캡틴이랑 기억 조각을 찾는 버키가 나옵니다 취향탈 수 있어요
적당한 망상과 설정 붕괴가 언제나 함께 합니다 ㅇㅅㅇ)9
write. 환월
스티브는 빈손으로 방에 돌아왔다. 하긴 급하게 부탁하기엔 너무 어려운 정보라는 것을 알고 있긴 했다. 하지만 한시라도 빨리 알고 싶은 마음이 몸을 움직이게 하였다. 잠깐 떨어져 있을 뿐인데, 또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몇 번이나 버키가 발작을 하는 걸 봐서 그런지 아무리 괜찮다는 말을 들어도 영 개운하지 않았다. 혹시. 또 그러면 어쩌지. 한 번 마음에 뿌리내린 의심은 가실 줄을 몰랐다.
“…괜찮겠지.”
이젠 거의 뛰다시피 걷는 스티브의 발걸음은 그래도 모자라기만 했다. 올 땐 분명 얼마 안 되는 거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무리 걸어도 좀처럼 방이 가까워지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거리 가늠이 되지 않는 일은 처음이었다. 스티브는 약간 초조해졌다. 비록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바쁘게 발을 움직이고 있지만, 속은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버키가 또 발작을 일으킨 건 아닌데.’
왜 이렇게 기분이 이상하지. 스티브는 요즘 들어 감정이 풍부해졌다. 물론 좋게 말하면 그랬다. 오히려 감정이 너무 넘쳐서 주체를 못 하는 것에 가까웠다. 좋은 게 좋은 거라 말하긴 했지만, 지금은 너무 좋아서 탈이었다. 버키를 향한 애정에 이유 모를 불안함이 겹치자 가끔 도를 넘을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바로 지금처럼.
친구는 자신이 한 두 살 먹은 어린애가 아니라고 했지만, 스티브는 내내 불안했다. 모든 걸 알게 된 이상 어딜 가더라도 품에서 떼어놓지 않겠다며 고집을 부리는 녀석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하지만 스티브가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모두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버키는 이곳에 숨어있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믿을만한 사람들만 다니는 곳에 기거하고 있지만, 그걸 믿고 마음대로 나다닐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반쯤 스스로 방 안에 틀어박힌 녀석을 볼 때마다 스티브는 내내 안타까워하기만 했다.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사실 스티브가 마음을 쓰는 것과 달리, 뭐 그리 좋은 곳에 가는 것도 아니었다. 기껏 걸어봤자 끝없이 이어지는 복도뿐이었다. 너무 깊은 곳에 있어서 창문조차 없는 복도를 걸어야 할 뿐인데, 스티븐는 내내 버키 생각을 했다. 방에만 처박혀 있으면 몸에 안 좋아. 언젠가 어린 날 자신에게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 꼭 나갔다 오면 감기가 도졌다. 콜록거리며 죽어 넘어갈 듯 구는 친구를 보며 잔뜩 주눅이 든 녀석은 늘 한결같은데, 상황이 많이 변했다.
“버키?”
“…….”
“나야. 들어갈게.”
“…….”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이렇게 한마디 말을 하고 노크를 했다. 그리고 나서야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물론 둘이 이런 식으로 내외할 사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단 하나라도 버키가 놀랄만한 상황을 만들긴 싫었다. 버키가 이성을 잃으면 윈터솔져가 그를 잡아먹는다. 그 광경을 몇 번이나 지켜본 스티브는 더는 그런 일을 반복할 수 없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매너를 차렸어?”
“…응?”
“처음에 만났을 땐…그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럴 수도 있지.”
“그런가.”
스티브는 별것 아닌 듯 가볍게 대답을 했다. 하지만 가슴이 쿵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스티브. 아니 캡틴 아메리카와 윈터 솔져가 처음 만났을 때는 상황이 지금보다 더 좋지 않았다. 그때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저 막연하게 더듬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오늘은 좀 괜찮아?”
“…뭐가?”
“내가 떨어져 있어도 괜찮은가 싶어서.”
“괜찮아. 나 어린애 아니야. 스티브.”
“이건 나이가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니잖아. 버키.”
“그렇지. 그리고 내가 조절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어.”
“…….”
“멍청하게도 말이야.”
“그런 뜻으로 한 말 아닌 거 알잖아.”
“알지.”
침대에 걸터앉은 채 한쪽 다리를 까딱까딱 흔들던 녀석이 마치 빈집을 지키던 강아지처럼 문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자꾸 스티브가 듣고 싶지 않을 말을 하곤 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최악의 상황만 생각하게 되었는지. 예전의 버키로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가슴이 아렸다.
자연스럽게 버키 옆을 차지하고 앉아서 또 손을 만지작거린다. 날아간 팔 부분을 수리하면 좋을 텐데, 그쪽은 건드리지도 못하게 하니 내내 마음이 쓰였다. 손을 만지작거리며 꾹꾹 주물러주다 슬쩍 깍지를 낀다. 그러다 다시 손가락으로 손바닥을 죽 긁었다. 으. 버키가 눈을 찌푸린다. 여기가 약점인가 싶어 몇 번 더 해보니 대놓고 싫은 표정을 지었다.
“간지러워. 스티브.”
“약점이야?”
“…그런 건 아니지만. 기분이 이상해.”
“흠.”
꽤 흥미로운 반응이었다. 좋다. 싫다. 이런 감정을 잘 보여주지 않던 친구의 의외의 표정에 자꾸 손바닥에 손톱을 세웠다. 그럴 때마다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끝내 손을 빼진 않았다. 그만해. 스티브. 결국 한 소리를 듣고 나서야 아쉬운 표정으로 깍지를 풀었다. 아직도 찌르르한 기운이 남아있는지 괜히 손을 쥐었다 펴는 버키의 모습에 스티브는 남몰래 웃음을 지었다. 어쩐지 이렇게 하고 나면 묘하게 안심이 됐다.
“자료는?”
“응?”
“자료 받으러 다녀온 것 아니야?”
“그게 그렇게 한 번에 받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서.”
“그런가…….”
“시간이 좀 걸린다는 데, 옛날이야기라도 할까?”
“잘 기억이 안 나.”
“수첩 봤어.”
“…….”
스티브의 꽉 찬 직설화법에 버키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눈을 크게 뜨다 이내 몇 번 깜박거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잊어버릴 리 없는 물건이지만, 버키는 늘 이런 식으로 생각하곤 했다.
“그래. 그거 썼었지.”
“얼마나 기억해?”
“이것저것.”
“…….”
“박물관에 갔었어.”
“네 모습이 있는 곳?”
“그래. 그땐 솔직히 믿기지 않았지. 나는 여기 살아있는데 내 얼굴은 커다랗게 박제된 채 박물관에 걸려있었어.”
“…….”
“게다가 내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과거 이야기도 모두 적혀있었고.”
“…….”
“그렇게 학습을 했지. 박물관에 있는 정보는 나쁘지 않았어. 내가 모르는 나에 대해서 알려줬거든. 하지만 그게 진짜 나라고 믿진 않았지.”
“어째서?”
“내 기억에 없으니까.”
“…….”
스티브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 버키의 얼굴을 보면 또 감정을 참을 수 없게 될 것이 확실했다. 센티넬은 오감이 예민한 만큼 감정 증폭도가 매우 컸다. 좋게 말하면 섬세한 거고, 그것이 아니라면 예민해진다. 그 감정을 이겨내지 못한 센티넬은 모두 죽었다. 캡틴 아메리카는 이런 식으로 센티넬의 단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버키는 존재만으로도 스티브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었다.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이 있다고 하는데, 버키는 스티브의 시작이고 끝이며 돌아갈 집과도 같았다. 스티브의 눈가에 열이 오르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버키는 계속 앞만 보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다들 내가 버키라고 하는데, 정말 내가 버키일까 고민을 했어. 하루 종일. 밤에는 잠을 잘 수 없어서 그대로 누운 채 기억을 짜 맞췄고, 낮엔 정보를 모으러 다녔으니까.”
“루마니아엔 왜 건너갔지?”
“글쎄.”
“버키. 숨기는 거 없기로 했잖아.”
“잘 기억이 안 나. 내가…기억을 좀 잘 잊어버려서. 그러고 보니 내 기억 노트들 다 그곳에 두고 왔었네. 다시 쓸 수도 없는 건데.”
“…….”
“정말이야. 최근이 한 일도 잘못 걸리면 금방 잊어버리고 기억을 못 해.”
“…….”
“그래도 살아 있잖아. 스티브.”
“그런 말로 얼버무리지 마.”
“들켰네.”
움직이던 다리가 뚝 멎었다. 이젠 좀 더 진지한 이야기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버키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깊고 깊은 고통 속에 잠들어 있는 기억을 꺼내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스티브가 원하는 기억의 조각이 무엇인지 생각해봤다. 하지만 알려줄 만한 내용이 없었다. 물론 스티브는 버키가 살았던 하루하루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싶어 했지만, 친구는 그것을 모두 기억하지 못했다.
“노트라고 남아있으면 그걸 보고 이야기해줄 텐데.”
“…….”
“다른 듣고 싶은 이야기라도 있어?”
“아니.”
스티브는 고개를 저었다. 강요 때문에 억지로 생각을 짜내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그건 하이드라와 다를 바 없는 짓이었다. 시간이 얼마 없음을 알고 있었지만 몰아붙여서 될 일도 아니었다. 스티브는 잠시 그냥 이렇게 지내다 버키가 안정되면 치료를 시작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버키.”
“응?”
“우리 그냥 이렇게 며칠 있어 볼까?”
“둘이 뭐하게?”
“예전에 했던 거 그대로 하지 뭐.”
“그거?”
“그것도 좋고.”
“언제는 공부한다더니.”
“걸어오면서 생각을 해봤는데,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난 네가 편해졌으면 좋겠어.”
“편해진 다라…….”
버키는 잠시 천장을 쳐다보며 눈을 감았다. 아.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뭘 상상하고 있는 걸까. 스티브는 그 머릿속이 너무 궁금했다.
“내가 편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
“적어도 내 옆에 있으면 발작은 멈출 수 있어.”
“…….”
“버키. 이제 그냥 같이 있자.”
“…….”
“같이 있으면서 방법을 찾아보면 되는 거잖아.”
“방법 같은 건 없을 거야.”
“…….”
아픈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굳이 센티넬에 관한 자료를 부탁한 것도 스티브가 자신의 옆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막아보려는 생각이었다. 캡틴 아메리카가 어둠에 묶여 있을 수 없다. 몇 번이나 그렇게 마음을 굳혔다.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발작만 조절할 수 있다면 큰 걱정은 덜 수 있을 텐데. 자료가 없으니 너무 막연했다.
“나도 센티넬과 가이드의 관계를 잘 모르지만 말이야.”
“…….”
“잠시 들었던 적이 있지. 가이드는 센티넬과 달리 자신이 그런 인자를 타고났다는 사실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고 하더군, 어쩌면 당연한 일이야. 가이드는 센티넬이 없어도 충분히 불편 없이 살 수 있으니까.”
“…….”
“오히려 센티넬이 더 힘들지. 그래서 점점 숫자가 줄었다고 들었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가이드를 찾기엔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거든.”
“그래. 들어보긴 한 것 같네. 그들도 나한테 그랬지. 나한테 맞는 가이드는 이 세상에 없다고. 그게 이런 이야기인 줄 몰랐어,”
“…버키.”
“내가 고통 속에서 뒹굴고 있을 때 그런 말을 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이야기하면 잘 기억에 남지 않아서 기억하기 힘드니까…….”
“…….”
“그래도 그 성질 덕에 살아남은 것인지도 모르지.”
“그것도 맞아.”
스티브는 생각보다 덤덤한 버키의 말에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물론 자기 입으로 그때의 일을 꺼낼 수라도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리고 버키가 어느 정도 괴로웠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말하는 것은 항상 묵묵히 들어주려고 했다.
“성질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아는 것이 없어서, 조금이라도 공부를 하면 낫지 않을까 했는데. 가이드가 없으면 애초에 성립할 수 없는 소리였어.”
“내가 있잖아.”
“엄밀히 말해서 넌 내 가이드가 아니야. 스티브.”
버키의 단호한 한마디에 잘 생긴 얼굴이 약간 구겨졌다.
“넌 가이드가 아니야. 내가 네 영향을 받고 있을 뿐이지.”
“그게 뭐가 달라.”
“달라. 만약 내 체질이 바뀌면…스티브는 힘이 아닌 가이드로서 내가 폭주하는 걸 누를 수 없어지니까.”
“…….”
“그래도 가끔 억울하긴 해. 우리 둘이 센티넬과 가이드의 관계였으면 이러지 않았을 텐데. 둘이 각인하고, 믿고…아니다.”
내가 괜한 소리를 했어. 버키는 금방 주눅이 든 표정으로 발끝만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불안하고 고통이 새겨진 눈동자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너무 많은 상처가 덧씌워진 탓에 회복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산산이 쪼개졌다. 그런 버키를 품에 끌어당긴 스티브는 속으로 울면서 고개를 묻었다. 고통 받는 것을 알고 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이렇게 크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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