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한계까지 몰려있던 친구는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의식을 놓아버렸다. 그 모습이 꼭 죽은 시체 같아 스티브는 와칸다로 이동하는 내내 가슴을 졸일 수밖에 없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윈터솔저가 된 버키를 만나고, 하이드라의 비밀을 알게 된 이후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다. 조금이라도 의연하게 대처하고 싶었지만, 버키를 본 순간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런 둘에게 와칸다 행을 권한 쪽은 티찰라였다. 방패도 없이 맨몸으로 친구를 둘러업고 걸어 나오는 캡틴 아메리카를 가만히 바라보던 티찰라가 둘을 불러 세웠다. 당연히 무시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한다. 그러면 쫓아가서 억지로 명령이라도 해야 하나. 이렇게 생각하던 순간 캡틴 아메리카가 티찰라를 바라보았다. 잔뜩 상처 입은 푸른 눈이 추위에 닿아 형형하게 빛났다.
“폐하?”
“내가 제안할 것이 있어 불렀네.”
“말씀하시면 됩니다.”
“…….”
“괜찮습니다.”
“그래.”
티찰라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할 말이 있지만, 일단 이 녀석을 안전하게 넘겨서 심판을 받게 해야 한다. 기다려 줄 수 있겠는가.”
“…….”
“그대의 친구에겐 해가 가지 않게 하겠네.”
“…그렇다면야.”
“그래 내 전용기 안쪽으로 들어가면 비밀 공간이 있지. 이 녀석을 인도할 때까진 그곳에 있으면 된다네. 응급 처치를 할 사람을 보내주겠다.”
“그러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군인은 딱딱하게 거절한다. 티찰라는 유난히 흔들리는 캡틴 아메리카의 표정을 그대로 읽을 수 있었다. 캡틴 아메리카의 가면을 쓴 스티브 로저스가 말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저 내 착각인가. 왕은 갑자기 어려운 문제를 골라잡은 기분이 들었다.
“그럼 일단 움직이지.”
“예, 폐하.”
물론 이렇게 쉽게 사람을 믿을 순 없었다. 하지만 몸이 성치 않은 버키를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은 힘들 것 같았다. 퀸젯이 있었지만, 이미 추적을 당하고도 남았을 것 같아 쉽게 사용할 수 없었다. 최대한 버키가 안전한 곳으로 피하고 싶었다. 그런 캡틴의 마음을 알기도 하듯 티찰라는 기꺼이 자신의 전용기 한쪽을 내주었다.
“좀 쉬고 있거라.”
“아닙니다. 폐하.”
“…걱정되는가.”
“안된다고 하면 폐하를 기만하는 것이 될 테니, 그렇게 말하진 않겠습니다.”
“그런가.”
티찰라는 미세하게 떨리는 군인의 목소리를 완벽하게 알아들었다. 캡틴 아메리카로서 감정을 숨기고 있지만, 친구를 걱정하는 친우로선 그렇지 못했다.
“이대로 영영 일어나지 않을까 항상 그런 생각을 합니다.”
“…….”
“예전엔 버키가 제게 해줬던 걱정입니다만…….”
“그랬군.”
“그게…아닙니다.”
“왜 그러지?”
“남자답지 못하게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하던 것이 떠올라서 그만.”
“…….”
“웃으셔도 됩니다.”
“…….”
“…괜찮습니다.”
“…….”
티찰라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계속 둘을 바라보자 약간 민망한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군인은 말을 길게 잇지 않았다. 티찰라는 예상외의 대답에 약간 놀란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누가 누굴 걱정한 것인지 다시 생각하려는 그 순간 버키의 몸이 축 늘어졌다. 마치 숨이 끊어진 것 같아 급히 코 밑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희미한 숨이 손가락에 닿고 나서야 간신히 안심했다. 가짜 혈청을 맞았지만, 그것이 죽음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스티브도 그랬고, 버키도 그랬다. 주렁주렁 매달린 수액 병에선 계속 약이 떨어져 내렸다. 깨어있는 것이 고통스러울 테니 진통제와 수면제를 같이 처방해 달라 말한 것은 자신이지만, 막상 재워놓고 보니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불편 할 테니 이리 와서 앉아있으란 소리도 극구 사양했다. 티찰라는 몇 번 권하다 입을 다물었다. 그 캡틴 아메리카가 이렇게 싸고돌만한 인물이면 분명 이유가 있겠지. 적당히 둘에 대해 듣긴 했지만, 둘 사이의 기구하고 끈끈한 운명을 모두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티찰라는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었기에, 일단은 모른척하기로 정했다.
“…버키.”
스티브의 손이 잔뜩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얼굴에 피 칠갑을 한 채 슬쩍 웃고 있던 표정이 또 아프게 살아났다. 심장에 쿡 박힌 채 움직이지 않는 거대한 파편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단단하게 박혔다. 반대쪽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무슨 감정일까. 스티브는 알 수 없었다. 분노도 아니었고, 슬픔도 아니었다. 좀 더 복잡하고 묘한 감정이었다.
“널 다시 볼 수 있어서 다행이야.”
“…….”
“버키.”
“…….”
수면제를 맞고 잠이 든 사람에게 들릴 리 없지만, 계속 이름을 불렀다. 완전히 날아간 왼쪽 팔은 쳐다볼 수 없었다. 깨끗하게 잘린 것도 아니라 군데군데 끊어진 전선에선 연신 마찰열이 일어났다. 이식한 메탈암이라 해도 신경은 살아있었다. 팔이 잘리는 순간부터 무슨 생각을 했을지 알 수 없었다. 한번이 아닌 고통을 또 받았을 것을 생각하니 심장이 저릿했다.
고통을 참는 것이 익숙했던 친구는 바득바득 발걸음을 옮기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면서 스티브를 먼저 챙겼다. 괜찮아? 그 한마디를 듣는 순간 눈앞이 뿌옇게 변했다. 누가 할 소리를. 울먹이지 않으려고 애써 천천히 한마디씩 끊어서 말을 했다.
아직 기억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친구는 그 순간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짧은 신음과 함께 한숨을 훅 토해냈다. 지칠 대로 지친 몸뚱이는 한 번에 무너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애써 잊어버리고 있던 고통이 밀려왔다. 신경이 연결된 부분이 그대로 파괴되면서 온몸을 잡아먹고 있었다. 있어야 할 것을 다시 잃어버린 버키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땅바닥을 긁었다. 결국, 진통제를 몇 번이나 맞고 수면제를 처방받은 후에야 기절하듯 잠을 잘 수 있었다.
“널 재우고 싶진 않았어.”
“…….”
“다시 못 일어날까 봐.”
“…….”
“하지만 고통스럽다는데, 내 욕심만 챙길 순 없었으니까…….”
“…….”
“날 이해해?”
“…….”
스티브의 목소리에 물기가 서렸다. 나직하게 말하는 목소리는 너무 무거웠다. 뚝뚝 떨어지는 온갖 감정은 그대로 뒤섞인 채 굳어갔다. 채 지워지지 않은 핏자국을 몇 번이나 지워보고, 얼굴을 만져봤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버키가 맞는데, 왜 이리 낯선지 알 수 없었다. 금방이라도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갈 것 같았다.
‘혼자서 생각을 거듭하면 점점 깊게 파고들어 가더라.’
스티브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분명 버키가 말을 걸었다. 하지만 무릎을 베고 누워있는 친구는 여전히 잠이 든 상태였다. 환청이라도 들었나 싶어 머쓱해졌다. 방금 들린 말은 어느 날 버키가 자신을 보며 흐르듯 한 것이었다. 혼자 속으로 삭이면 힘들다면서 어깨를 툭툭 치던 모습이 선했다.
“…버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눈을 감은 스티브가 고개를 숙이며 친구를 찾았다. 눈앞에 있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이 고통이 끝나면 우린 어떻게 될까. 답을 해줄 수 없는 질문을 자꾸 던지기만 했다. 차라리 목 놓아 울기라도 하면 이 답답함이 조금은 가실까 싶었다. 하지만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아니 울 수 없었다. 어린애처럼 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때가 언제였을까. 이런 생각을 했지만, 그것조차 너무 먼 과거의 이야기였다. 이젠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잠들기 전에 나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
“…….”
“물어보려 했는데, 자려는 걸 깨울 수 없어서…….”
“…….”
“그래서 되묻지 않았어. 일어나서 이야기를 해줬으면 하는데…….”
“…….”
듣는 이 없는 일방적인 대화가 띄엄띄엄 이어졌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말은 점점 작아지더니 이내 들리지 않았다.
스티브는 꿈을 꾸었다. 어릴 적 이유도 모른 채 앓아누운 자신과 그 옆을 지키는 버키가 있었다. 느릿느릿 흑백 영화처럼 흘러가는 공간에 그저 존재할 뿐인 스티브는 과거의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괜한 말을 꺼냈던 것이 틀림없었다. 몇 번이나 제 손을 이마에 대보고, 그것도 마땅치 않은지 이마와 이마를 맞닿으면서 연신 걱정을 하던 친구는 대뜸 손가락을 내밀었다.
‘뭐야.’
‘약속해.’
‘…….’
‘건강해지란 소린 안 해.’
‘…….’
‘계속 나랑 같이 있어 준다고 약속해.’
‘계집애처럼…그게 뭐야. 됐어.’
‘안 할 거야?’
‘…….’
하지만 버키를 이길 수 없었다. 겨우겨우 손가락을 걸고 고개를 끄덕였다. 흐릿하게 남은 기억이 이리도 생생하게 꿈으로 나타나는지 알 수 없었다. 꿈속의 어린 버키는 내내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너무 따뜻해서 마냥 햇살 아래 있는 것 같았다. 어린 스티브는 그렇게 생각했다.
짧은 대화가 끝나고 캡틴 아메리카는 병원에서 빠져나왔다. 나타샤도 말려보고, 옆에 있던 팔콘도 한마디 거들었지만 스티브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항상 그래서 익숙하다는 듯 나타샤가 어깨를 으쓱 올려 보이며 반걸음 쯤 뒤로 물러섰다.
병원에서 돌아온 이후로 스티브는 항상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날짜는 착실하게 달력을 넘기고 있었지만, 스티브의 머릿속 한 구석은 헬리 케리어가 폭발하던 그 날에 잠시 멈춰있었다. 캡틴 아메라카로 활동하는 동안 잊지 못하는 사건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길을 걸어가다 문득 생각이 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쩔 수 없이 멈춰 서서 눈을 감고 한숨을 길게 쉬어야 했다. 그럴 때마다 저릿하게 뭉쳐진 심장이 아프게 삐걱대곤 했다.
버키. 스티브는 더는 부를 수 없는 친구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부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입에서 나온 이름은 찬 공기에 그대로 얼었다가 이내 부서져 내렸다. 눈앞에서 삽시간에 하얗게 바스러지는 단어는 바람에 날려 공중으로 흩어졌다. 스티브가 아무리 이름을 불러도 친구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버키. 버키 반즈.’
스티브는 정신을 차린 그 순간부터 버키를, 원터솔져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헬리 케리어가 침몰하던 날 그렇게 죽이려고 했던 캡틴아메리카를 굳이 물 밖으로 끌어올린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이후로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마치 그대로 하늘에 녹아내린 것처럼 사라졌다.
“버키.”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아직도 정하지 못했다. 윈터솔져가 아닌 버키 반즈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한다면 솔직히 쉽게 입을 뗄 수 없을 것 같았다. 죽은 줄 알고 살아왔다. 그 높이에서 떨어져서 살아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고, 수색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스티브 로저스의 친구는 그곳에서 살아남았다. 하이드라의 실험체로 끌려가 정신도 차리지 못한 사이에 강철로 된 팔을 이식받았다.
그것도 부족해서 강제로 냉동 수면을 취하게 했다. 죽지못해 살아있는 친구를 필요할 때마다 냉동된 몸을 끄집어내 멋대로 움직였다. 기억도 지우고, 과거도 지워버렸다. 태엽이 떨어진 인형처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보통은 냉동된 상태로 지내지만, 해야 할 일이 많아 가끔 오랫동안 깨어있을 때도 있었다고 했다.
원터솔져는 때때로 자신에 대해 반문하곤 했다. 물론 누구도 속 시원한 답을 주지 않았다. 윈터솔져가 명령받은 일 외에 다른 곳에 의문을 품을 때마다 쓸데없는 것이 묻어왔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언제나 비슷한 수순이었다. 브레인 워싱을 받기 위해 의자에 앉곤 했다.
“…….”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마우스피스 사이로 새어나오는 친구의 비명이 들리는 것 같아 눈을 질끈 감았다. 버키에 관한 서류를 본 것을 잠시 후회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윈터솔져에 대해 알지 않으면 영영 버키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더는 친구가 망가지기 전에 찾아야 했다. 예전에 그가 자신을 돌봐주었던 것처럼 이번엔 자신이 버키를 찾아가 안아줄 차례였다.
하지만 쉴드도 무너지고, 퓨리 국장도 죽은 것으로 된 이 마당에 쉽게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나타샤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캡틴 아메리카인 자신도 원치 않은 휴가를 받은 상태였다. 점점 더 추워지는 밤이 야속하기만 했다.
무거운 발걸음이 저 멀리 사라지고 텅 빈 거리엔 나무에서 떨어진 늦은 낙엽만 바람에 날려 굴러다녔다.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여기저기 엉켜 들었다
(중략)
모처럼 쉬는 날이었다.
온종일 버키를 찾아 헤맸던 스티브가 채 잠에서 깨기 전에 고양이가 침대 위로 훌쩍 뛰어 올라왔다. 익숙하게 침대 안쪽으로 걸어가 스티브를 깨우기 시작하던 고양이가 가늘게 울었다. 귓가에서 들리는 고양이 특유의 울음소리에 눈을 뜨자 시선 가득 검은 털 뭉치가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손을 들자 머리를 들이밀며 슬슬 비비기 시작했다.
“버키, 왜 그래.”
“…….”
“물이 떨어졌나.”
한참 동안 동물의 따끈함을 느끼던 스티브가 일어나자 곧 흥미가 떨어진 것인지 홱 돌아섰다. 스티브가 밖으로 나와서 사료와 물을 살펴보았지만 떨어지지 않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소파 위에서 그루밍을 하고 있는 녀석을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기왕 일어난 김에 물그릇을 비우고 새 물을 채워주었다. 그새 다가와서 몇 번 물을 핥아 먹은 녀석이 또 종아리에 달라붙어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버키 왜 그래?”
“…아우응.”
“이상한 녀석이네.”
어쩐지 하루 내내 치대는 녀석이 스티브를 귀찮게 했다. 보통 때면 옆에 굴려준 공 하나 가지고도 잘 놀던 녀석이었는데, 몇 번이나 장난감에 흥미를 잃었다. 그리고 나선 소파 위로 뛰어 올라와 스티브의 무릎에 당당히 자리를 잡았다.
“버키. 지금 일하잖아.”
필요한 것이 있을 때는 말도 잘 알아듣고 착하게 굴더니 오늘은 왜 이렇게 귀찮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손에 들고 있던 볼펜은 버키의 맹렬한 공격으로 인해 바닥으로 떨어졌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볼펜을 바라보던 스티브는 결국 반대쪽 손으로 잡고 있던 지도를 마저 내려놓았다.
잠깐 놀아주면 괜찮겠지 싶어 소파에 편하게 기댄 채 원하는 만큼 놀아주었다. 얌전히 웅크리고 누워있나 싶더니 어느새 창문 앞으로 쪼르르 달려가 앉아있었다.
“밖에 나가려고?”
“……”
“같이 산책하러 갈까?”
“…….”
귀를 쫑긋거리며 돌아보는 녀석의 얼굴을 보자마자 원하는 것을 제대로 짚었다 생각했다.
문을 열어주자마자 쏜살같이 뛰어 나가는 녀석을 두 번 정도 소리쳐 부른 뒤 스티브는 거실 전등을 껐다.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니 저만큼 앞으로 뛰어간 버키가 담장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 어둑하게 땅거미가 내린 거리를 천천히 걷기 시작하자 조금씩 둘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다.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오자 버키는 담장에서 훌쩍 뛰어내려서 앞으로 뛰어갔다.
“…….”
분명 나타샤한테 들었을 때 고양이는 이런 느낌이 아니었다. 일방적으로 스티브를 재촉하는 산책이긴 했지만, 썩 나쁘지 않았다. 한명의 사람과 한 마리의 동물이 머물고 있는 집 인근엔 커다랗게 조성된 공원이 있었다. 보통 뛰어서 갔다면 얼마 걸리지 않았을 거리지만 오늘은 조금 시간이 지체되었다. 스티브는 몸을 푸는 것처럼 가볍게 뛰면서 버키를 뒤쫓아 왔다.
“…버키?”
순식간에 어둠이 흘러내렸다. 익숙한 기시감에 스티브는 잠시 허리를 굽히며 멈춰 섰다. 순간 눈앞에 스쳐 지나간 환영은 한참 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버키.’
이렇게 버키를 찾았던 적이 있었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그 날의 기억은 갑자기 살아나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어느새 넓은 공원 어딘가로 사라진 녀석은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몸을 풀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기다렸지만, 녀석은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밤이 찾아오고 드문드문 별이 돋아났다.
하나둘 사람들이 돌아가기 시작하자 공원은 텅 비어버렸다. 스티브는 참을성 있게 버키를 기다렸다. 하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며칠 동안 마음대로 나가 놀곤 했던 동물이라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뭉친 것처럼 답답했다. 그렇다고 해서 밤새도록 공원에서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스티브의 걱정과 다르게 언제나 집까지 무사히 찾아오는 똑똑한 녀석이니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둘이서 나간 길을 스티브 혼자 걸어왔다. 유난히 돌아오는 길이 길게 느껴진 것은 그저 기분 탓일 거라 생각했다. 눈앞에서 사라지는 거나 문 앞에서 배웅하는 건 비슷한 일이었지만, 한순간 온몸에 느껴진 허탈감은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
하루가 지나도 버키가 돌아오지 않았다. 애써 침착한 척 지도와 볼펜을 들고 분주하게 집안을 오가던 스티브는 결국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당장에라도 찾으러 나가고 싶었지만, 급히 걸려온 전화 한 통에 어쩔 수 없이 오토바이에 몸을 실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돌아오면서 찾아봐야겠네. 공원에서 멀리 안 갔으면 좋겠건만.’
버키에 대한 정보를 알아냈다고 나타샤에게서 온 짧은 연락이었다. 이 부근에서 이상한 차림의 남자를 목격한 사람들이 있다고 하네요. 두 번 물을만한 시간도 없었다. 정보만 넘겨주고 전화를 끊어버린 덕택에 스티브는 일단 그곳으로 달려가야만 했다.
결국 스티브에게 넘어온 정보도 허탕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얻은 정보라 반쯤은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언제나 절망으로 바뀌어 켜켜이 가슴에 쌓이곤 했다. 며칠 전에 그런 남자를 분명 봤다는 소리까지는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 이후 더는 보이지 않았다는 말이 더해졌다. 거리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이 걱정스러워 말을 걸어보았지만,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고 급하게 도망치듯 몸을 숨기려고 했다는 말도 덧붙었다. 사람들에게 얻어낸 정보가 하나 둘 쌓여갈수록 스티브는 직감적으로 그 남자가 버키라고 확신했다.
‘여기 있었던 건가. 버키.’
천하의 나타샤도 제대로 된 정보를 알아내기 힘들 정도로 꼭꼭 숨어버린 사람을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사실 숨을 의지가 없어서 더 찾기 힘들 수도 있었다. 단 한 순간도 같은 곳에 머무르지 않고 정처없는 걸음으로 움직이고 있을 수도 있었다. 뭘 먹고 어디서 자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어디서는 멀리서 봐도 위협적인 시커먼 옷을 입고 다닌다고 했고, 이번에 만난 목격자는 다 떨어져 가는 후드에 모자를 쓰고 다닌다고 했다.
스티브의 걱정은 더 깊어졌다. 하지만 이곳에 버키가 없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항상 한발 늦게 도착하는 스티브를 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버키는 이미 다른 곳으로 사라지곤 했다. 기억이라도 찾았으면 좋겠지만, 제대로 된 보살핌조차 받지 못하는 몸을 이끌고 다니는 사람에게 그런 생각은 사치에 불과했다.
“오늘도 허탕이군.”
여기서 하루를 보낼 수 없어 결국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스티브의 머릿속은 나타샤가 넘겨준 극비 문서가 섞여들어 복잡했다. 브레인 워싱을 너무 많이 당해 움직이는 태엽 인형같이 되어버린 정신을 둘째 치고, 몸 상태가 걱정이었다. 엄청난 무게의 강철 의수를 달고 다니는 것은 생각보다 몸에 부담을 많이 주는 일이었다. 예전처럼 팔을 수리해줄 사람도 더는 주위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미 살과 동화되어버린 의수는 조금만 신경이 어긋나도 고통이 찾아올 것이 분명했다. 애초에 그렇게 섬세하게 움직이는 의수에 신경이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버키.’
스티브의 걱정이 커질수록 바이크의 속력이 점점 빨라지다 다시 느려졌다. 일단 버키를 찾으면 토니 스타브에게 연락해서 몸 상태를 한번 보이는 것이 낫지 않을까 했다.
물론 두 사람을 만나게 하는 일이 좋지 않을 거라고 짐작했지만, 당장 버키의 상태를 가장 잘 알아봐 줄 사람은 토니뿐이었다. 정신이 없었다. 버키를 찾아야 실행할 수 있는 일인지라 제대로 진행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버키를 찾아서 무사히 데리고 온다는 전제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맞다. 버키.”
슬슬 헷갈릴 법도 한데 스티브는 애써 버키와 버키를 구분하고 있었다. 애초에 고양이에게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이 잘못이라고 나타샤가 웃었지만, 뭐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공원 근처에 바이크를 세웠다. 이미 폐장 시간이 한참 지난 공원은 드문드문 서 있는 가로등이 간신히 주위를 밝히고 있을 뿐이었다. 조심스럽게 입구를 지나 안쪽으로 걸어갔다. 깊숙하게 들어갈수록 점점 가로등 불빛이 약해지고, 대신 하늘에서 쏟아지는 달빛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뚜벅뚜벅 스티브의 뒤를 따라왔다,
“버키?”
아무리 불러도 반응이 없는 걸 보아하니 이미 집으로 돌아간 것이 아닐까 했다. 아니 그러면 다행이었다. 공원은 넓었고, 스티브가 하나하나 뒤져볼 수도 없었다. 버키와 헤어진 곳에 서서 스티브는 한참 숲과 어둠이 뒤섞인 곳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 뭔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때마침 바람이 세게 불어서 스티브는 나무가 움직인 거라고 생각했다.
“…음?”
찬찬히 살펴보니 나무가 아니었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는 마치 사람 같았다. 스티브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며 주먹을 꾹 쥐었다. 캡틴 아메리카라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아 방패도 들고 나오지 않는 길이었다. 하이드라의 잔당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눈이 매섭게 찌푸려졌다. 땅에 쌓이기 시작한 어둠은 끈끈해서 좀처럼 그 물체의 정체를 알려주지 않았다.
둘 사이의 거리는 이제 꽤 좁혀졌다. 스티브는 반걸음 정도 물러서며 자세를 잡았다. 일반인이라면 그저 자신이 많이 예민해져 있었다고 넘길 수 있겠지만, 그 반대라면 상황이 좋지 않았다. 하늘에 떠 있던 달이 구름에 가리며 그나마 남아있던 빛이 사라졌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걸어오는 물체는 이제 사람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
순간 스티브의 귀에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버키?”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는 분명 버키의 울음소리였다. 약간 특이한 발음으로 울고 있는 녀석은 스티브와 점점 가까워질수록 더 크게 울면서 자신의 위치를 알려왔다.
짧은 대화가 끝나고 캡틴 아메리카는 병원에서 빠져나왔다. 나타샤도 말려보고, 옆에 있던 팔콘도 한마디 거들었지만 스티브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항상 그래서 익숙하다는 듯 나타샤가 어깨를 으쓱 올려 보이며 반걸음 쯤 뒤로 물러섰다.
병원에서 돌아온 이후로 스티브는 항상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날짜는 착실하게 달력을 넘기고 있었지만, 스티브의 머릿속 한 구석은 헬리 케리어가 폭발하던 그 날에 잠시 멈춰있었다. 캡틴 아메라카로 활동하는 동안 잊지 못하는 사건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길을 걸어가다 문득 생각이 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쩔 수 없이 멈춰 서서 눈을 감고 한숨을 길게 쉬어야 했다. 그럴 때마다 저릿하게 뭉쳐진 심장이 아프게 삐걱대곤 했다.
버키. 스티브는 더는 부를 수 없는 친구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부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입에서 나온 이름은 찬 공기에 그대로 얼었다가 이내 부서져 내렸다. 눈앞에서 삽시간에 하얗게 바스러지는 단어는 바람에 날려 공중으로 흩어졌다. 스티브가 아무리 이름을 불러도 친구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버키. 버키 반즈.’
스티브는 정신을 차린 그 순간부터 버키를, 원터솔져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헬리 케리어가 침몰하던 날 그렇게 죽이려고 했던 캡틴아메리카를 굳이 물 밖으로 끌어올린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이후로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마치 그대로 하늘에 녹아내린 것처럼 사라졌다.
“버키.”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아직도 정하지 못했다. 윈터솔져가 아닌 버키 반즈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한다면 솔직히 쉽게 입을 뗄 수 없을 것 같았다. 죽은 줄 알고 살아왔다. 그 높이에서 떨어져서 살아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고, 수색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스티브 로저스의 친구는 그곳에서 살아남았다. 하이드라의 실험체로 끌려가 정신도 차리지 못한 사이에 강철로 된 팔을 이식받았다.
그것도 부족해서 강제로 냉동 수면을 취하게 했다. 죽지못해 살아있는 친구를 필요할 때마다 냉동된 몸을 끄집어내 멋대로 움직였다. 기억도 지우고, 과거도 지워버렸다. 태엽이 떨어진 인형처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보통은 냉동된 상태로 지내지만, 해야 할 일이 많아 가끔 오랫동안 깨어있을 때도 있었다고 했다.
원터솔져는 때때로 자신에 대해 반문하곤 했다. 물론 누구도 속 시원한 답을 주지 않았다. 윈터솔져가 명령받은 일 외에 다른 곳에 의문을 품을 때마다 쓸데없는 것이 묻어왔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언제나 비슷한 수순이었다. 브레인 워싱을 받기 위해 의자에 앉곤 했다.
“…….”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마우스피스 사이로 새어나오는 친구의 비명이 들리는 것 같아 눈을 질끈 감았다. 버키에 관한 서류를 본 것을 잠시 후회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윈터솔져에 대해 알지 않으면 영영 버키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더는 친구가 망가지기 전에 찾아야 했다. 예전에 그가 자신을 돌봐주었던 것처럼 이번엔 자신이 버키를 찾아가 안아줄 차례였다.
하지만 쉴드도 무너지고, 퓨리 국장도 죽은 것으로 된 이 마당에 쉽게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나타샤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캡틴 아메리카인 자신도 원치 않은 휴가를 받은 상태였다. 점점 더 추워지는 밤이 야속하기만 했다.
무거운 발걸음이 저 멀리 사라지고 텅 빈 거리엔 나무에서 떨어진 늦은 낙엽만 바람에 날려 굴러다녔다.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여기저기 엉켜 들었다
(중략)
모처럼 쉬는 날이었다.
온종일 버키를 찾아 헤맸던 스티브가 채 잠에서 깨기 전에 고양이가 침대 위로 훌쩍 뛰어 올라왔다. 익숙하게 침대 안쪽으로 걸어가 스티브를 깨우기 시작하던 고양이가 가늘게 울었다. 귓가에서 들리는 고양이 특유의 울음소리에 눈을 뜨자 시선 가득 검은 털 뭉치가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손을 들자 머리를 들이밀며 슬슬 비비기 시작했다.
“버키, 왜 그래.”
“…….”
“물이 떨어졌나.”
한참 동안 동물의 따끈함을 느끼던 스티브가 일어나자 곧 흥미가 떨어진 것인지 홱 돌아섰다. 스티브가 밖으로 나와서 사료와 물을 살펴보았지만 떨어지지 않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소파 위에서 그루밍을 하고 있는 녀석을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기왕 일어난 김에 물그릇을 비우고 새 물을 채워주었다. 그새 다가와서 몇 번 물을 핥아 먹은 녀석이 또 종아리에 달라붙어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버키 왜 그래?”
“…아우응.”
“이상한 녀석이네.”
어쩐지 하루 내내 치대는 녀석이 스티브를 귀찮게 했다. 보통 때면 옆에 굴려준 공 하나 가지고도 잘 놀던 녀석이었는데, 몇 번이나 장난감에 흥미를 잃었다. 그리고 나선 소파 위로 뛰어 올라와 스티브의 무릎에 당당히 자리를 잡았다.
“버키. 지금 일하잖아.”
필요한 것이 있을 때는 말도 잘 알아듣고 착하게 굴더니 오늘은 왜 이렇게 귀찮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손에 들고 있던 볼펜은 버키의 맹렬한 공격으로 인해 바닥으로 떨어졌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볼펜을 바라보던 스티브는 결국 반대쪽 손으로 잡고 있던 지도를 마저 내려놓았다.
잠깐 놀아주면 괜찮겠지 싶어 소파에 편하게 기댄 채 원하는 만큼 놀아주었다. 얌전히 웅크리고 누워있나 싶더니 어느새 창문 앞으로 쪼르르 달려가 앉아있었다.
“밖에 나가려고?”
“……”
“같이 산책하러 갈까?”
“…….”
귀를 쫑긋거리며 돌아보는 녀석의 얼굴을 보자마자 원하는 것을 제대로 짚었다 생각했다.
문을 열어주자마자 쏜살같이 뛰어 나가는 녀석을 두 번 정도 소리쳐 부른 뒤 스티브는 거실 전등을 껐다.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니 저만큼 앞으로 뛰어간 버키가 담장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 어둑하게 땅거미가 내린 거리를 천천히 걷기 시작하자 조금씩 둘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다.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오자 버키는 담장에서 훌쩍 뛰어내려서 앞으로 뛰어갔다.
“…….”
분명 나타샤한테 들었을 때 고양이는 이런 느낌이 아니었다. 일방적으로 스티브를 재촉하는 산책이긴 했지만, 썩 나쁘지 않았다. 한명의 사람과 한 마리의 동물이 머물고 있는 집 인근엔 커다랗게 조성된 공원이 있었다. 보통 뛰어서 갔다면 얼마 걸리지 않았을 거리지만 오늘은 조금 시간이 지체되었다. 스티브는 몸을 푸는 것처럼 가볍게 뛰면서 버키를 뒤쫓아 왔다.
“…버키?”
순식간에 어둠이 흘러내렸다. 익숙한 기시감에 스티브는 잠시 허리를 굽히며 멈춰 섰다. 순간 눈앞에 스쳐 지나간 환영은 한참 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버키.’
이렇게 버키를 찾았던 적이 있었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그 날의 기억은 갑자기 살아나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어느새 넓은 공원 어딘가로 사라진 녀석은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몸을 풀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기다렸지만, 녀석은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밤이 찾아오고 드문드문 별이 돋아났다.
하나둘 사람들이 돌아가기 시작하자 공원은 텅 비어버렸다. 스티브는 참을성 있게 버키를 기다렸다. 하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며칠 동안 마음대로 나가 놀곤 했던 동물이라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뭉친 것처럼 답답했다. 그렇다고 해서 밤새도록 공원에서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스티브의 걱정과 다르게 언제나 집까지 무사히 찾아오는 똑똑한 녀석이니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둘이서 나간 길을 스티브 혼자 걸어왔다. 유난히 돌아오는 길이 길게 느껴진 것은 그저 기분 탓일 거라 생각했다. 눈앞에서 사라지는 거나 문 앞에서 배웅하는 건 비슷한 일이었지만, 한순간 온몸에 느껴진 허탈감은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
하루가 지나도 버키가 돌아오지 않았다. 애써 침착한 척 지도와 볼펜을 들고 분주하게 집안을 오가던 스티브는 결국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당장에라도 찾으러 나가고 싶었지만, 급히 걸려온 전화 한 통에 어쩔 수 없이 오토바이에 몸을 실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돌아오면서 찾아봐야겠네. 공원에서 멀리 안 갔으면 좋겠건만.’
버키에 대한 정보를 알아냈다고 나타샤에게서 온 짧은 연락이었다. 이 부근에서 이상한 차림의 남자를 목격한 사람들이 있다고 하네요. 두 번 물을만한 시간도 없었다. 정보만 넘겨주고 전화를 끊어버린 덕택에 스티브는 일단 그곳으로 달려가야만 했다.
결국 스티브에게 넘어온 정보도 허탕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얻은 정보라 반쯤은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언제나 절망으로 바뀌어 켜켜이 가슴에 쌓이곤 했다. 며칠 전에 그런 남자를 분명 봤다는 소리까지는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 이후 더는 보이지 않았다는 말이 더해졌다. 거리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이 걱정스러워 말을 걸어보았지만,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고 급하게 도망치듯 몸을 숨기려고 했다는 말도 덧붙었다. 사람들에게 얻어낸 정보가 하나 둘 쌓여갈수록 스티브는 직감적으로 그 남자가 버키라고 확신했다.
‘여기 있었던 건가. 버키.’
천하의 나타샤도 제대로 된 정보를 알아내기 힘들 정도로 꼭꼭 숨어버린 사람을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사실 숨을 의지가 없어서 더 찾기 힘들 수도 있었다. 단 한 순간도 같은 곳에 머무르지 않고 정처없는 걸음으로 움직이고 있을 수도 있었다. 뭘 먹고 어디서 자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어디서는 멀리서 봐도 위협적인 시커먼 옷을 입고 다닌다고 했고, 이번에 만난 목격자는 다 떨어져 가는 후드에 모자를 쓰고 다닌다고 했다.
스티브의 걱정은 더 깊어졌다. 하지만 이곳에 버키가 없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항상 한발 늦게 도착하는 스티브를 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버키는 이미 다른 곳으로 사라지곤 했다. 기억이라도 찾았으면 좋겠지만, 제대로 된 보살핌조차 받지 못하는 몸을 이끌고 다니는 사람에게 그런 생각은 사치에 불과했다.
“오늘도 허탕이군.”
여기서 하루를 보낼 수 없어 결국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스티브의 머릿속은 나타샤가 넘겨준 극비 문서가 섞여들어 복잡했다. 브레인 워싱을 너무 많이 당해 움직이는 태엽 인형같이 되어버린 정신을 둘째 치고, 몸 상태가 걱정이었다. 엄청난 무게의 강철 의수를 달고 다니는 것은 생각보다 몸에 부담을 많이 주는 일이었다. 예전처럼 팔을 수리해줄 사람도 더는 주위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미 살과 동화되어버린 의수는 조금만 신경이 어긋나도 고통이 찾아올 것이 분명했다. 애초에 그렇게 섬세하게 움직이는 의수에 신경이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버키.’
스티브의 걱정이 커질수록 바이크의 속력이 점점 빨라지다 다시 느려졌다. 일단 버키를 찾으면 토니 스타브에게 연락해서 몸 상태를 한번 보이는 것이 낫지 않을까 했다.
물론 두 사람을 만나게 하는 일이 좋지 않을 거라고 짐작했지만, 당장 버키의 상태를 가장 잘 알아봐 줄 사람은 토니뿐이었다. 정신이 없었다. 버키를 찾아야 실행할 수 있는 일인지라 제대로 진행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버키를 찾아서 무사히 데리고 온다는 전제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맞다. 버키.”
슬슬 헷갈릴 법도 한데 스티브는 애써 버키와 버키를 구분하고 있었다. 애초에 고양이에게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이 잘못이라고 나타샤가 웃었지만, 뭐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공원 근처에 바이크를 세웠다. 이미 폐장 시간이 한참 지난 공원은 드문드문 서 있는 가로등이 간신히 주위를 밝히고 있을 뿐이었다. 조심스럽게 입구를 지나 안쪽으로 걸어갔다. 깊숙하게 들어갈수록 점점 가로등 불빛이 약해지고, 대신 하늘에서 쏟아지는 달빛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뚜벅뚜벅 스티브의 뒤를 따라왔다,
“버키?”
아무리 불러도 반응이 없는 걸 보아하니 이미 집으로 돌아간 것이 아닐까 했다. 아니 그러면 다행이었다. 공원은 넓었고, 스티브가 하나하나 뒤져볼 수도 없었다. 버키와 헤어진 곳에 서서 스티브는 한참 숲과 어둠이 뒤섞인 곳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 뭔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때마침 바람이 세게 불어서 스티브는 나무가 움직인 거라고 생각했다.
“…음?”
찬찬히 살펴보니 나무가 아니었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는 마치 사람 같았다. 스티브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며 주먹을 꾹 쥐었다. 캡틴 아메리카라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아 방패도 들고 나오지 않는 길이었다. 하이드라의 잔당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눈이 매섭게 찌푸려졌다. 땅에 쌓이기 시작한 어둠은 끈끈해서 좀처럼 그 물체의 정체를 알려주지 않았다.
둘 사이의 거리는 이제 꽤 좁혀졌다. 스티브는 반걸음 정도 물러서며 자세를 잡았다. 일반인이라면 그저 자신이 많이 예민해져 있었다고 넘길 수 있겠지만, 그 반대라면 상황이 좋지 않았다. 하늘에 떠 있던 달이 구름에 가리며 그나마 남아있던 빛이 사라졌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걸어오는 물체는 이제 사람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
순간 스티브의 귀에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버키?”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는 분명 버키의 울음소리였다. 약간 특이한 발음으로 울고 있는 녀석은 스티브와 점점 가까워질수록 더 크게 울면서 자신의 위치를 알려왔다.